제2과- 예수님의 사역의 하루 -(요점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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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4-07-08 00:42 조회95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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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예수님의 사역(使役)의 하루
(07월 13일 (안) / 일몰: 오후 7시 54분)
<기억절(記憶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
<핵심(核心) & 맥(脈)>
(제2과) 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특별한 사역(使役)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는다.
1. 성부(聖父)와 협력(協力)하는 예수님의 사역(使役)
2.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전 지역으로 선교 사업(宣敎事業)을 하셨다.
(즉 예수께서 공생애(公生涯)의 주요 부분을 위해 본부를 세우신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3. 예수님의 기도생활(祈禱生活)/ (기도(祈禱)의 삶을 사신 예수님)
4. 예수님의 권위(權威)
5. 마귀(魔鬼)와의 만남. (예수님과 마귀(魔鬼)들)
☞. (마가)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능력(能力)과 마귀(魔鬼)를 다스리시고 병(病)든 자(者)를 치유(治癒)하시는 권세(權勢)를 보여주시며, 그분은 많은 사역으로 분주(奔走)하고 바쁘지만, 결코 기도(祈禱)를 소홀히 하거나 등한히 하지 않으시고 더 많이 기도(祈禱)하셨다. 그분의 능력(能力)은 기도(祈禱)에 있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07월 7일) (일) <“나를 따라오라”>
(Q)~시몬, 안드레(두 형제) & 야고보, 요한(두 형제)이 예수님의 “나를 따라오라”라는 부르심에 즉시 반응(反應)한 영적교훈(靈的敎訓)은 어떤 것일까? (마가복음 1:16~20)
(A)~<주님의 부르심은 부름을 받은 그들 자신(自身)을 위한 것이기보다 오히려 멸망(滅亡)의 길로 치닫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爲)한 부르심이었다. 실로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은 사람들을 임박(臨迫)한 심판(審判)으로부터 구(求)해내어야 하는 긴급(緊急)한 임무(任務)를 맡기시기 위함이었으며 이런 긴급한 상황(狀況)에서는 당연히 즉각적(卽刻的)인 순종(順從)이 요구(要求)되는 것이다> (만나 주석 막 1:16~20)
⑴.이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부르심은 단순(單純)하고 직접적(直接的)이며 예언적(豫言的)이며 예수의 능력(能力)과 제자들의 따름을 강조(强調)하기 위한 것이다.
⑵.그분의 부르심은 허황(虛荒)되고 맹목적(盲目的)인 것이 아니라 부르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건설(建設)의 위대(偉大)한 주역(主役)의 역할(役割)을 맡기시리라는 약속(約束)을 포함(包含)하고 있다.
⑶.베드로와 안드레 두 형제는 경제적(經濟的)으로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하게 한다.
⑷.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는 베드로와 안드레보다 재정적(財政的)으로 더 부유한 것처럼 보인다.
⑸.'누가'는 베드로가 배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안드레의 동역자(同役者)라고 알려준다. (눅 5:1~11)
⑹.마가는 그들의 차이(差異)를 표현함으로 예수께서 빈부(貧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제자(弟子)로 삼으시는 것을 말하기 위해 두 형제 집단(兄弟集團)을 대조적(對照的)으로 묘사(描寫)하였을 수 있다.
⑺.예수께서는 갈릴리 전도(傳道)에 있어서 최초로 이 어촌(漁村)을 ‘지나가시다가’(따라 걸어가시다가) 갈릴리 어부 출신 형제인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다.
⑻.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부(漁夫)의 직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 형제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은 요단강에서 이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바로 이 메시아라고 가르쳐 준 침례(浸禮) 요한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요 1:35-39).
⑼.특히 침례(浸禮)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개(紹介)하였다(요 1:29). 따라서 그들 두 형제는 그때부터 예수를 따라다녔으며 인격적(人格的) 관심(關心)의 대상으로 삼았다.
⑽.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가 이때까지 살아왔던 그러한 방향(方向)으로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이리로’ 혹은 ‘이 새로운 방향(方向)으로’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07월 8일) (월) <잊지 못할 안식일(安息日)>
(Q)~가버나움 회당(會堂)에서 있었던 잊지 못할 일은 무엇이며,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진리(靈的眞理)를 배울 수 있는가? (마가복음 1:21~28)
(A)~<마가복음 1장에 기록된 안식일(安息日)은 가버나움에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안식일이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그분의 말씀 하시는 권능(權能)에 영향(影響)을 받아 한 귀신(鬼神)들린 사람이 이렇게 소리쳤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 이다"(막 1:24). 그리고 예수님은 그 귀신(鬼神)을 내쫓으셨다.>
⑴.마귀(魔鬼)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분'으로 안다..
⑵.마귀(魔鬼)는 불경(不敬)스럽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자(使者)이심을 인정(認定)한다.
⑶.우리는 예배(禮拜)드릴 때 불경(不敬)하고 부정(不淨)한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경건(敬虔)한 사람을 기대(期待)한다.
⑷.사탄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사람을 비참(悲慘)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이유는 사람을 창조(創造)하신 하나님께 대한 증오(憎惡) 때문이다.
⑸.인간(人間)의 모든 비참(悲慘)함이 창조주(創造主)를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⑹.사탄은 귀신(鬼神) 들린 비참(悲慘)한 자들을 예수님 앞에 끊임없이 보내어 그를 괴롭혔다.
⑺.귀신을 내쫓으시고 잠잠하라는(막 1:25) 침묵(沈默)을 요구(要求)하신 예수님의 요청(要請)은 그분의 시대(時代)에 메시아에 대한 기대(期待)가 정치적(政治的)으로 함축(含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⑻.사람들은 아직 예수가 누구인지 모를 수 있지만, 마귀(魔鬼)는 그분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이를 공개적(公開的)으로 인정(認定)한다.
⑼.오늘날에도 가버나움의 귀신(鬼神)들린 사람처럼 악(惡)한 영(靈)의 권세(權勢)에 정말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⑽.하나님의 계명(誡命)에서 고의(故意)로 떠나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들을 사탄의 지배(支配)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07월 9일) (화) <이어진 안식일(安息日) 사역(使役)>
(Q)~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가족(家族)을 어떻게 도우셨으며,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靈的)인 교훈(敎訓)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마가복음 1:29~34)
(A)~<그리스도께서 병(病)들어 있는 베드로의 장모(丈母)를 고쳐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곳마다 선행(善行)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가 받은 대접(待接)에 대해서 톡톡히 갚아 주셨다. 그 병(病) 고침이 얼마나 완전하였나 주의해 보라. "열병(熱病)이 떠났을" 때 베드로의 장모(丈母)는 흔히 보는 대로 허약(虛弱)한 상태에 얼마간 더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 여자(女子)를 고쳐주신 동일(同一)한 그리스도의 손이 그 여자의 원기(元氣)도 회복(回復)시켜 주셨다. 그리하여 "열병(熱病)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隨從)드니라"(3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병(病)을 고쳐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일어나서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위해 그분에게 속(屬)한 자(者)들을 섬기도록 하기 위(爲)함이다.>
⑴.마가는 단지 시몬의 장모(丈母)가 병(病)들어 누워있는 사실만을 언급(言及)하지만, 의사(醫師) 출신이었던 '누가'는 그녀가 ‘중(重)한 열병(熱病)’(눅 4:38)으로 고통(苦痛)받고 있었음을 지적(指摘)한다.
⑵.유대인들은 안식일(安息日)의 계명(誡命)을 어기지 않기 위하여 토요일 오후, 곧 안식일(安息日)이 끝나는 시각(時刻)을 기다렸다가 병자(病者)들을 운반(運搬)해 와 예수께 고침 받기를 원(願)하였다.
⑶.그녀(女)의 열병(熱病)이 아무리 장기적(長期的)이었고 또 극심(極甚)했다고 할지라도 만병(萬病)의 대 의사(醫師)이신 예수께서 못 고치실 리가 없으시다.
⑷. 예수께서 병(病)을 치유(治癒)하실 때 취(取)하시는 특징적(特徵的)인 행동(行動)으로서((막 1:41 절, 5:41) 환자(患者)에 대한 예수의 적극적(積極的)인 사랑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⑸.확실(確實)한 구원(救援)의 확증(確證)을 받은 자에게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忠誠)하고자 하는 마음과 행위(行爲)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⑹.당시(當時)의 종교 지도자(宗敎指導者)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의 정신(精神)은 배격(排擊)한 채 그 율법(律法)의 조목(條目)만을 지키도록 강요(强要)하였으며, 그리하여 백성들은 영적(靈的)으로 육적(肉的)으로 병(病)든 삶을 그대로 유지(維持)한 채 살수밖에 없었다.
⑺.예수께서는 이러한 종교 지도자(宗敎指導者)들에게 “율법(律法)의 더 중(重)한바 의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마 23:23)라고 신랄(辛辣)하게 비판(批判)하셨다.
⑻.(모든 병자(病者) … 데려오니.) 폭발적(爆發的)인 소문(所聞)이 온 갈릴리에 퍼져나가자 ‘모든(각양(各樣)) 많은 병자(病者)들과 귀신(鬼神)들인 자(者)들이 예수께 나아왔다.
⑼.마가는 누가의 경우(境遇)처럼 각 환자(患者)들의 질병(疾病)을 구체적(具體的)으로 묘사(描寫)하지 않고 다만 ‘모든’(많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수께서 그 어떤 질병(疾病)도, 또 아무리 많은 환자(患者)라도 다 고치실 수 있는 능력(能力)이 있으심을 은연중(隱然中) 강조(强調)하고 있다.
⑽.한편 본문(本文)의 ‘문 앞’(막 1:33)이란 베드로의 집 문 앞을 가리키며 바로 이 문(門)을 통과(通過)한 자들, 곧 문(門)을 통과(通過)하여 예수를 만난 자들은 하나같이 회복(回復)과 생명의 기적(奇蹟)을 체험(體驗)하게 되었다.
(07월 10일) (수) <예수의 사역(使役)의 비밀(祕密)>
(Q)~예수님께서 능력 있는 사역(使役)을 수행(遂行)할 수 있었던 중요(重要)한 비결(祕訣)은 무엇이며, 우리가 배울 점은 어떤 것입니까? (마가복음 1:35~39)
(A)~<예수님이 능력(能力) 있는 사역(使役)을 수행(遂行)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祕訣)은 기도(祈禱)에 있었다. 예수님의 기도(祈禱)는 지속적(持續的)이지만 기계적(機械的)이거나 정형화(定型化)되지 않은 살아 있는 기도(祈禱)였다.>
⑴.예수께서는 안식일(安息日)의 교훈(敎訓)과 치유사역(治癒使役)으로 몸이 퍽 고단하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집에 머무시다가 ‘아직 날이 채 새기도 전에’(눅4:42) 일어나셔서 한적(閑寂)한 곳으로 기도(祈禱)하러 가셨다.
⑵.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아마도 오늘날의 새벽 3~4시경이었을 것으로 추측(推測)된다) 나가셨을 뿐 아니라 그 성읍(城邑)에서도 나가셔서 갈릴리 가버나움 교외(郊外)의 광야 지대(廣野地帶)로 추정(推定)되는 ‘한적(閑寂)한 곳’으로 기도(祈禱)하시러 발길을 옮기셨던 것이다.
⑶.지금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全域)에 선교 여행(宣敎旅行)을 떠나기 전(前)으로서 그 어떤 준비(準備)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내밀(內密)한 교제(交際)를 통한 영적준비(靈的準備)가 필요(必要)했기 때문에 이 한적(閑寂)한 곳에, 이른 시간에 홀로 나아오셨던 것이다.
⑷.(기도하시더니)(막 1:35)→이 말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프로슈케토’은 미완료(未完了) 시제(時制)로서 예수께서 기도(祈禱)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지속적(持續的)이고도 열심히 기도(祈禱)하셨음을 암시적(暗示的)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⑸.예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기도(祈禱)의 모본(模本)을 통해서 기도(祈禱)가 얼마나 중요(重要)한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⑹.그리스도가 탁월(卓越)하고 귀중(貴重)한 특징(特徵) 중 하나는 자주 그리고 효과적(效果的)으로 기도(祈禱)하는 것이었다. (DA 208)
⑺.예수님은 그의 지상생애(地上生涯) 가운데 자주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 5:19, 30)라고 언급(言及)하였다. 그가 행(行)한 놀라운 일들은 아버지의 능력(能力)으로 성취(成就)되었다. ( DA 143).
⑻.예수님께서 한 말씀들은 아버지가 주신 것이었다. (요 8:28).
⑼.예수는 이 세상(世上)에 오기 전에 자신의 생애(生涯)를 위한 자세(仔細)한 모든 계획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가운데 다닐 때, 단계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도되었다”(DA 147)
⑽.예수님의 사역(使役)의 시작(始作)과 끝은 기도(祈禱)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祈禱)를 더 많이 더 진솔(眞率)하게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 <예수님께서는 침례(浸禮) 받으실 때(눅 3:21), 열두 제자(弟子)를 택(擇)하시기 전에(눅 6:12),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異蹟)을 베푸실 때와 그 일 후(後)에(6:41, 46), 제자들에게 중요(重要)한 질문(質問)을 하시고자 할 때에(눅 9:18), 변화산(變化山)에 계실 때에(눅 9: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도 오라”고 하신 사랑의 초청(招請) 직전(直前)에(마 11:25-30), 베드로가 자기를 세 번 부인(否認)하기 전(前) 그를 위(爲)하여서(눅22:32), 성만찬(聖晩餐) 예식(禮式)을 제정(制定)하시던 날 밤에(요 17장), 겟세마네 동산(東山)에서(14:32, 35, 36, 39), 십자가(十字架) 위에서(눅 23:34), 그리고 그의 부활후(復活後)(눅 24:30)에 기도(祈禱)하셨다. 위 기도(祈禱)의 경우(境遇)들은 예수의 기도생활(祈禱生活)이 얼마나 진지했으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端的)으로 보여주었다. 실로 기도(祈禱)는 그분이 지니신 능력(能力)의 원천(源泉)이요 또한 영적양식(靈的糧食)이었던 것이다> (만나 주석 막 1:35~39)
(07월 11일) (목)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비밀(祕密)을 지킬 수 있나요?)
(Q)~예수님께서 환자(患者)를 치료(治療)하고도 이를 알리지 말라고 하신 의도(意圖)는 무엇이었습니까?. (마가복음 1:40~45)
(A)~<율법(律法)에는 “문둥 환자(患者)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不淨)하다 부정(不淨)하다 할 것이요 병(病)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不淨)할 것이라 그가 부정(不淨)한즉 혼자 살되 진(陣) 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46)라고 규정(規定)하여 육체적(肉體的) 고통(苦痛)과 함께 대사회적(大社會的) 고통(苦痛)까지 함께 받아야만 했던 무서운 질병(疾病)이다.>
⑴.한센병(혹은 나병(癩病))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罪)의 결과(結果)를 상징(象徵)하는 질병(疾病)으로서, 그 환자(患者)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생활(生活)을 박탈(剝奪)당한 채 그들의 공동체(共同體) 밖으로 소외(疏外)되었다.
⑵.율법(律法)에 따르면 사회 활동(社會活動)이나 대인(對人) 접촉(接觸)이 금지(禁止)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한센병 환자(患者)는 율법(律法)의 고리를 깨치고 예수께 나아왔다.
⑶.실로 이것이야말로 생명(生命)의 주(主)께 나아오는 자(者)의 담대(膽大)한 모습(模襲)이다.
⑷.환자(患者)는 예수께 나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最大限)의 겸손(謙遜)과 예의(禮義)를 갖추고 (’끓어 엎드리어’) 예수께 경배(敬拜)했다.
⑸.진정(眞正) 그는 절박한 심정(心情)으로 마치 자신의 전부(全部)를 예수께 드리기라도 하듯이 겸손(謙遜)한 몸가짐으로 경의(敬意)를 표했던 것이다. (시 10:17, 약 4:6).
⑹.환자(患者)는 예수께서는 자기를 능(能)히 고칠 수 있다고 확신(確信)했다
⑺.환자(患者)가 걱정하는 바는 예수께서 과연 자기의 치유(治癒)를 원(願)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그 한센병 환자(患者)의 예수께 대한 신앙지식(信仰知識)(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분으로서 무엇이든 원(願)하시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可能)하시다는 사실)을 가히 초월적(超越的)이리만큼 놀라웠다.
⑻.믿음으로 간청(懇請)하는 자에게 향(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응답이었다. (원(願)하시면-원(願)하노니,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깨끗함을 받아라.)
⑼.그 한센병 환자에게 ‘더 큰 믿음과 온전한 영혼’까지 덧붙여 응답해 주신 것이다.
⑽.예수님은 환자(患者)를 만지시며 깨끗함을 주셨지만, 제사장(祭司長)의 편견(偏見) 때문에 치료(治療)해 주신 것을 비밀(祕密)로 부탁(付託)했다. 그런 소식은 그분의 공적사역(公的使役)에 어려움을 더했다.
<치유(治癒) 받은 사실을 공표(公表)한 결과(結果)>
“예수께서 주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자기가 나은 사실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을 감추기란 불가능(不可能)하였을 것이지만 그는 그 사실을 사방(四方)에 공표(公表)하였다. 자기에게 이를 금지(禁止) 하신 그것은 다만 예수의 겸양(謙讓)에서 나온 것이라고 상상(想像)하고 그는 이 위대(偉大)한 치료자(治療者)의 능력(能力)을 선포(宣布)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는 이런 모든 표시(表示)가 제사장(祭司長)들과 장로(長老)들로 하여금 더욱 예수를 죽이려고 단단히 결심(決心)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DA, 26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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