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예수: 공급자와 유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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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2-18 09:08 조회4,395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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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8과 예수: 공급자와 유지자
2월 23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19분
기억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연구 범위: 히 1:3, 골 1:16~17, 욥 42장, 마 5:45, 마 6:25~34, 마 10:28.
도입)
오늘날 세계인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연대(西紀)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산정된 것이다. 곧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을 BC(Before Christ) 곧 기원전이라 하고, 예수님 이후를 AD(Anno Domini) 곧 기원후로 표기한다. 이것은 우연일까? 세상에는 민족이나 나라마다 제 나름의 역사와 전통이 있고 또 그것을 가름하는 연대가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민족의 뿌리나 나라의 건국과 함께 연호(年號)와 연대(年代)가 붙여지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우리나라만이 쓰는 고유의 연호와 단기 연대가 있으나 지금의 달력으로 바뀌었다. 지구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족이 있고, 또 특정인을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와 왕조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역사와 연대가 계속되지는 못했다. 풀의 꽃과 같이 잠시잠간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곤 하였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민족과 나라의 역사가 유구한 인류의 역사에 지장을 주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역사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류와 역사의 근원자요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사도 요한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다(요 1:2-3).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고 하였다(행 17:26). “모든 세계를 공간에 달려 있게 하고, 우주 만물을 질서 정연하게 그리고 지치지 않고 활동하도록 붙드는 손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손이다”(교육,132).
결론: 피조물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하나님이 유지시키시려 하는 목적 내지 설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첫째날(일) 2월 17일
유지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도입)
세상의 어떠한 과학자도 밝혀낼 수 없었던 만유인력의 근원을 성경은 시원하게 밝혀준다. 만물을 붙드시는 힘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못 박아 이야기한다. 광활한 천체가 질서 있게 운행하고, 몸속의 작은 세포조직이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운행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질서를 붙드시는 힘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선언하셨다(히 1:3). 우리의 삶을 붙드시는 힘의 근원도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말씀의 원리를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는 참으로 조화롭고 아름답게 나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운행하지만, 말씀의 궤도를 이탈하여 불순종하고 내 맘대로 행한다면 나의 삶이 어디로 튀어 날아갈지 모르는게 인간이다.
1. 히 1:3과 골 1:16~17을 일어 보라. 우주가 지속적인 존재하는 데 있어 예수께서 하시는 역할은 무엇인가?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부가설명>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 임의대로 났다가 자기 마음대로 죽는 자가 없다. 주권자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세상에 오기도 하고 때가 되어 불려가기도 하는 것이다. 솔로몬왕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라고 하였다(전 3:1-2). 예수님은 생명을 있게 하신 근원자일뿐 아니라 또한 그 생명을 유지하도록 호흡을 공급해 주신다. 사도행전 17:25에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하였다. 28절에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하였다.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에게 산소를 공급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은 생명의 근원 자이신 예수님과 생명적인 연결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바다에 항해하는 배가 반드시 목적하는 항구가 있는 것처럼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도 삶의 목적이 있다. 그 마음속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삶의 목적의식을 갖지 못한 채 덧없이 왔다가 덧없이 가는 뜬 구름의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삶의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위하여 매진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하였다(롬 14:7-8). 바울 자신은 그 인생의 목적을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빌립보서 3:12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다.
교훈: 하나님은 만물을 초월해 계시며 만물을 유지하신다. 그분은 우주에 의존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우주와 인간이 그분께 의존하고 있다.
둘째날(월) 2월 18일
관대하신 공급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 1:29).
도입)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체험하고자 한다. 실상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체험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보아야 믿겠다는 심보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의 돌보심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아버지가 가까이 있듯이 하나님도 가까이 계신다.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심을 체험하고 싶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우리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간절히 소망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한다. 여러분은 이미 좋은 믿음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1. 창 2:8~9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에서 음식을 제공하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가?
[창2:8,9]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천연계를 볼 때에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서 창조주의 임재를 볼 수 있다.
<부가설명>
계시(revelation, 啓示)란 “숨겨져 있는 것을(커튼을 열어 보여 주듯이) 나타내 보여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divine revelation)”에만 한정되어 사용되며, 특히 진리이신 하나님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적 성격이 강조된다. 계시라는 말은 이러한 계시행위나 그로 인해 계시된 진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계시는 자동적이 아니며 의도적이다. 비록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의 모든 말씀과 행위와 창조가 자동적으로 진리성을 반영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은 의도 없이 말씀하시거나 행하시거나 만드시지 않고 그의 무궁한 지혜와 경륜에 따라 된 것이다. 작품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듯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와 원리를 반영한다. 시편 19편은 자연계시의 존재를 시적으로 표현하였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또한 로마서 1장 20절은 그것을 직설적으로 강조하였다: “창세로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교훈: 하나님은 지상의 모든 생물과 인간에게 필요한 식물을 제공하심으로써 그분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증명하신다.
셋째날(화) 2월 19일
자연적인 죄악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도입)
욥기는 일반적으로 ‘의로운 자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답하는 문학적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욥기는 단지 인간이 받는 고통의 문제뿐만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욥기는 ‘까닭 없는 고난’의 실재를 강력히 변호하는 일과 동시에 이러한 고난에 대처하는 길을 찾는 일에도 매우 진지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욥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변론하고, 결국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대답하심으로 문제 해결의 답을 찾게 된다. 드디어 욥은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후에 욥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뵙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재와 먼지 위에 앉아서 회개하였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이다. 욥기의 전체 구조는 프롤로그(1:1-2:10), 전개(3:1-37:24), 절정(38:1-41:34), 결말(42:1-6), 에필로그(42:7-17)로 구분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경건한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재난을 당했다. 당연히 왜 무고한 자가 고난을 당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전개(3:1-37:24)에서는 프롤로그에서 제기된 문제의 답을 얻고자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서로의 논쟁을 통해 고난의 원인과 하나님의 이해에 대한 주장들을 펼친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교리를 가지고 대화를 이끌어간다. 즉 인과응보의 교리이다. 이에 욥은 자기의 당한 고통은 인과응보의 교리에 맞지 않다고 반박한다. 절정(38:1-41:34)에서 드디어 하나님과 욥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욥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비를 깨닫는다. 그리고 결론(42:1-6)에서 욥의 고백이 이루어진다. 곧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에 이르게 된다. 욥의 시각이 바뀐 것이다. 신앙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신뢰 회복이다.
* 욥기는 천연계의 재난을 사단이 주장할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죄의 세상에서 천연계도 역시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기의 중심 사상은 도덕론적 종교와 창조론 종교의 대조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모든 주석가들이나 신학자들, 목회자들이 의인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라고 말한다.
<부가설명>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와 엘리후의 발언에 이어, 마침내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나타나신 부분은 욥기의 절정이다. 하나님의 엄중한 선포 앞에서 그때까지 기고만장하던 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욥 40:3-5). 하나님이 숨죽여 있는 욥에게 다시금 대답을 추궁하며 자신의 위대한 창조의 능력을 말씀하시자, 이제 욥은 하나님께 고백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하나님의 일방적인 말씀에 대한 욥의 대답은 욥기의 결론이다. 하나님을 만난 욥은 새로운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변화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전에 귀로만 듣고 지식으로만 알았던 자신의 무지에 대해 회개하는 모습이다. 욥기의 저자는 욥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을까? 결국 욥기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무죄한 자의 고통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점이다. 욥의 친구들은 전통적 해석 방법, 곧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욥과 그 자녀들이 고난을 당한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욥기의 저자는 욥의 주장을 통해 이러한 전통적 사상에 도전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인과응보 사상은 결코 인간을 위한 교리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욥기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 사상에 기반을 둔 하나님의 정의 개념을 탈피하여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그 대답이 욥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하나님을 단죄함으로써 자신의 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욥이 폭풍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속한 자기의 위치를 겸손하게 인정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욥기 저자는 욥기의 핵심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욥의 회개(42:6)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욥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자기 신분을 확인하게 된다.
교훈: 우리는 천연계 속에서 벌어지는 재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 죄악이 존재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넷 째날(수) 2월 20일
훼손된 창조 세계를 통치함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마 5:45).
도입)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나 악인, 이웃과의 관계가 좋은 사람이건 아니건, 도덕적으로 깨끗하건 아니건, 종교적인 열심이 있건 아니건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이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만을 축복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리새적인 바램에 불과하다. 사랑의 하나님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당신의 사랑으로 모두가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적어도 이 땅의 삶이 마감할 때까지는. 또한 신자들이 스스로 믿음이 있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착각에 불과할 수 도 있다.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경쟁이나 다툼에서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기게 되었고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세속적으로 축복하셨다는 간증을 너무도 자주 접하게 된다. 세상을 불신자와 신자로 나누고 하나님은 신자들을 편드는 편협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간증은 과연 성령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의문이 든다.
1. 마 5:45과 시 65:9~10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돌보기 위해 창조 세계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시는가? 이는 창조된 세계에 대한 그분의 관심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는가?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해와 비를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베풀어주시고, 농사하여 먹고 생활하는 일을 일일이 친히 돌보시는 것을 가르쳐준다.
<부가설명>
아직도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날 믿는 사람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죄인으로 있는 악인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생은 사랑할 능력이 없는 존재다. 반대로 미움의 도가 지나쳐서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자에게 몇 배의 앙갚음을 하는 악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그 미움의 한계를 정하여 “파상은 파상으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레 23:39) 갚도록 명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며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율법의 말씀에 의해, 인간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하여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간단히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라고 말씀하시면 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시지 않으면 안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으나, 사랑할 능력이 없는 인생은 이 말씀 앞에서 정죄되어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라 명하신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어 자신의 심판이 의로우심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친히 이처럼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원수 되었던 인생들의 죄를 대신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먼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죄인들을 사랑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심으로 죄인을 심판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결국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려 하신 것이다(롬 3:25, 26).
교훈: 하나님은 죄의 영향으로 손상을 입은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그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일하시며 때로 우리가 알 수 없는 기이한 방식으로 섭리하신다.
다섯째날(목) 2월 21일
훼손된 창조 세계를 위한 공급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도입)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기르신다. 하나님은 사람만 키우시는 것이 아니 라 땅위의 모든 것을 기르시는 분이시다. 구약성경에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여정에서 양식 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 먹이셨다(출 16:4)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읽으면서 종교적 신화나 동화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금도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 주셔서 모든 생명체가 살고 있다. 광야 40년간의 만나는 땅위에 인류가 살아온 음식물의 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질소(Nitrogen-N)를 먹으며 사는 것이다. 물론 공기 중의 있는 질소를 직접 먹지는 못한다. 우리는 질소를 들어 마시고 곧 내어 뱉지만 먹는 음식에서 필요한 질소를 얻는 것이다. 우유도 치즈에서도 계란에도 고기 속에도 질소가 있다. 모든 살아 있는 물질은 질소의 일부분이다. 만약 우리가 먹는 음식에 질소가 없다고 하면 어느 것이든 자라지도 못 하고 부서져 상처가 난 세포를 대체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런데 모든 생물의 양식이 되는 질소가 공기 중의 5분의 4(78%)나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에게 먹는 음식을 풍성하게 주신다. 만나는 해가 떠서 날씨의 온도가 높이지면 다 녹아 없어졌으나 질소는 없어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먹었다는 만나는 그들이 사는 진 사면에 뿌려졌으나 질소는 땅위에도 땅 아래 흙에도 땅 위의 공기에도 우리 사면에 둘러 있다. 심지어 모든 식물과 동물의 몸속에도 있다. 질소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나 맛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공기 중의 질소는 콩 종류의 식물 속으로, 땅 속의 질소는 야채와 나무에게 먹이가 되어 주고 그 속에 들어가 자라난 식물을 동물이 사람이 먹으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땅위의 모든 농사를 지으시는 농부이시다. 질소가 야채 속에 나무속에 들어가는 것도 제 혼자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식물인 박테리아를 만들어 그 일을 담당시키신 것이다. 박테리아는 어디 서도 살고 있다. 음식물 속에도 물이나 공기 속에도 땅속에도 우리 몸속에도 있다. 어디든 온기와 습기와 어두운 곳에서는 아주 잘 번져 나간다. 20분이면 배로 증가되어 가면서 공기 속에 흙에 있는 질소를 푸른 식물 속에 넣기도 하고 배설과 부식을 시키면서 다시 공기와 흙으로 되돌려 놓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땅위의 요소만을 가지고는 잘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따뜻한 햇볕과 비를 내려 주셔야 잘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농부" (요 15:1)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1. 마 6:25~3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핵심적인 기별을 주셨는가? 수많은 사람이 겪는 시련과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천연계를 창조주께서 일일이 돌보신다는 것을 계시하셨다. 그것들을 그렇게 돌보시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을 돌보시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사람들이 당하는 시련과 비극들은 욥기 사건으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죄가 끼치는 영향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애3:39)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2,33)
<부가설명>
누구나 이 땅에 오면서 빈손으로 왔다. 단 한 끼라도 먹을 것을 손에 쥐고 온 사람은 아무 도 없다. 그래도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하루 세끼 꼬박 꼬박 끼니를 건너지 않고 먹으며 살아오는 것이다. 먹은 양식을 한곳에 모아 쌓아 놓으면 자기가 쓰고 사는 집 한 채 보다 더 클 것이다. 사람이 영양사처럼 음식물에 대한 지식은 없어도 하나님이 먹는 음식물에 골고루 영양을 넣어 놓으셨다. 몸의 필요한 모든 영양소, 푸로틴 비타민 미네랄 마그네슘 칼슘 등등의 종합 영양제를 다 배합하여 놓으셨다. 편식만 하지 않으면 건강한 음식을 먹여 주신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물은 지면의 2/3나 된다. 흔한 것이 물이다. 하나님은 살아가는데 요긴하게 필요한 것일수록 흔하게 주셔서 힘들이지 않고 가지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에 대한 감사를 하지 않는다. 물이나 공기를 음식물처럼 사서 먹어야 한다고 하면 사람의 삶은 훨씬 힘겹게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을 주셔서 갈한 목을 추겨주신다. 사람은 세상에 나면서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오는 것이다. 그래도 평생 옷을 입고 살아 왔다. 추위에 얼어 죽지 않고 더위에 견딜만한 옷을 입고 살아 온 것은 하나님이 입혀 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늘 위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른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그의 삶을 노래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고.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잘 먹고 잘 입고 서로 사랑하고 한 평생을 복되게 누리며 사는 일은 하나님의 돌보아주시는 은택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는 고백이 우리의 삶의 고백이다.
교훈: 하나님은 범죄 이후에도 인간의 필요를 채우신다. 우리에게 갑작스런 재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을 수 있다.
여섯째날(금) 2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런데도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그분께서 행하셨거나 하실 수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분께서 당신 자신의 법으로 말미암아 제약을 받으신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다. 사람들은 그분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가 하면 만물, 심지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까지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그분의 이름을 존경하거나, 그분의 권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이나 그 법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무한한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대로, ‘자연의 법칙’은 물질세계를 주관하는 법들에 관하여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은 얼마나 제한되어 있으며, 창조주께서 유한한 존재들에게는 전적으로 이해될 수 없지만 당신 자신의 법들과 조화되게 일하실 수 있는 분야는 얼마나 광범위한가!”(부조와 선지자, 114, 교회증언 8권, 259~261 ‘자연의 법칙’도 참고하라.)
2월 23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19분
기억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연구 범위: 히 1:3, 골 1:16~17, 욥 42장, 마 5:45, 마 6:25~34, 마 10:28.
도입)
오늘날 세계인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연대(西紀)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산정된 것이다. 곧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을 BC(Before Christ) 곧 기원전이라 하고, 예수님 이후를 AD(Anno Domini) 곧 기원후로 표기한다. 이것은 우연일까? 세상에는 민족이나 나라마다 제 나름의 역사와 전통이 있고 또 그것을 가름하는 연대가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민족의 뿌리나 나라의 건국과 함께 연호(年號)와 연대(年代)가 붙여지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우리나라만이 쓰는 고유의 연호와 단기 연대가 있으나 지금의 달력으로 바뀌었다. 지구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족이 있고, 또 특정인을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와 왕조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역사와 연대가 계속되지는 못했다. 풀의 꽃과 같이 잠시잠간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곤 하였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민족과 나라의 역사가 유구한 인류의 역사에 지장을 주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역사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류와 역사의 근원자요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사도 요한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다(요 1:2-3).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고 하였다(행 17:26). “모든 세계를 공간에 달려 있게 하고, 우주 만물을 질서 정연하게 그리고 지치지 않고 활동하도록 붙드는 손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손이다”(교육,132).
결론: 피조물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하나님이 유지시키시려 하는 목적 내지 설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첫째날(일) 2월 17일
유지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도입)
세상의 어떠한 과학자도 밝혀낼 수 없었던 만유인력의 근원을 성경은 시원하게 밝혀준다. 만물을 붙드시는 힘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못 박아 이야기한다. 광활한 천체가 질서 있게 운행하고, 몸속의 작은 세포조직이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운행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질서를 붙드시는 힘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선언하셨다(히 1:3). 우리의 삶을 붙드시는 힘의 근원도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말씀의 원리를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는 참으로 조화롭고 아름답게 나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운행하지만, 말씀의 궤도를 이탈하여 불순종하고 내 맘대로 행한다면 나의 삶이 어디로 튀어 날아갈지 모르는게 인간이다.
1. 히 1:3과 골 1:16~17을 일어 보라. 우주가 지속적인 존재하는 데 있어 예수께서 하시는 역할은 무엇인가?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부가설명>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 임의대로 났다가 자기 마음대로 죽는 자가 없다. 주권자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세상에 오기도 하고 때가 되어 불려가기도 하는 것이다. 솔로몬왕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라고 하였다(전 3:1-2). 예수님은 생명을 있게 하신 근원자일뿐 아니라 또한 그 생명을 유지하도록 호흡을 공급해 주신다. 사도행전 17:25에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하였다. 28절에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하였다.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에게 산소를 공급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은 생명의 근원 자이신 예수님과 생명적인 연결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바다에 항해하는 배가 반드시 목적하는 항구가 있는 것처럼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도 삶의 목적이 있다. 그 마음속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삶의 목적의식을 갖지 못한 채 덧없이 왔다가 덧없이 가는 뜬 구름의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삶의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위하여 매진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하였다(롬 14:7-8). 바울 자신은 그 인생의 목적을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빌립보서 3:12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다.
교훈: 하나님은 만물을 초월해 계시며 만물을 유지하신다. 그분은 우주에 의존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우주와 인간이 그분께 의존하고 있다.
둘째날(월) 2월 18일
관대하신 공급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 1:29).
도입)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체험하고자 한다. 실상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체험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보아야 믿겠다는 심보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의 돌보심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아버지가 가까이 있듯이 하나님도 가까이 계신다.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심을 체험하고 싶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우리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간절히 소망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한다. 여러분은 이미 좋은 믿음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1. 창 2:8~9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에서 음식을 제공하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가?
[창2:8,9]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천연계를 볼 때에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서 창조주의 임재를 볼 수 있다.
<부가설명>
계시(revelation, 啓示)란 “숨겨져 있는 것을(커튼을 열어 보여 주듯이) 나타내 보여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divine revelation)”에만 한정되어 사용되며, 특히 진리이신 하나님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적 성격이 강조된다. 계시라는 말은 이러한 계시행위나 그로 인해 계시된 진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계시는 자동적이 아니며 의도적이다. 비록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의 모든 말씀과 행위와 창조가 자동적으로 진리성을 반영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은 의도 없이 말씀하시거나 행하시거나 만드시지 않고 그의 무궁한 지혜와 경륜에 따라 된 것이다. 작품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듯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와 원리를 반영한다. 시편 19편은 자연계시의 존재를 시적으로 표현하였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또한 로마서 1장 20절은 그것을 직설적으로 강조하였다: “창세로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교훈: 하나님은 지상의 모든 생물과 인간에게 필요한 식물을 제공하심으로써 그분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증명하신다.
셋째날(화) 2월 19일
자연적인 죄악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도입)
욥기는 일반적으로 ‘의로운 자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답하는 문학적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욥기는 단지 인간이 받는 고통의 문제뿐만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욥기는 ‘까닭 없는 고난’의 실재를 강력히 변호하는 일과 동시에 이러한 고난에 대처하는 길을 찾는 일에도 매우 진지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욥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변론하고, 결국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대답하심으로 문제 해결의 답을 찾게 된다. 드디어 욥은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후에 욥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뵙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재와 먼지 위에 앉아서 회개하였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이다. 욥기의 전체 구조는 프롤로그(1:1-2:10), 전개(3:1-37:24), 절정(38:1-41:34), 결말(42:1-6), 에필로그(42:7-17)로 구분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경건한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재난을 당했다. 당연히 왜 무고한 자가 고난을 당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전개(3:1-37:24)에서는 프롤로그에서 제기된 문제의 답을 얻고자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서로의 논쟁을 통해 고난의 원인과 하나님의 이해에 대한 주장들을 펼친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교리를 가지고 대화를 이끌어간다. 즉 인과응보의 교리이다. 이에 욥은 자기의 당한 고통은 인과응보의 교리에 맞지 않다고 반박한다. 절정(38:1-41:34)에서 드디어 하나님과 욥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욥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비를 깨닫는다. 그리고 결론(42:1-6)에서 욥의 고백이 이루어진다. 곧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에 이르게 된다. 욥의 시각이 바뀐 것이다. 신앙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신뢰 회복이다.
* 욥기는 천연계의 재난을 사단이 주장할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죄의 세상에서 천연계도 역시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기의 중심 사상은 도덕론적 종교와 창조론 종교의 대조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모든 주석가들이나 신학자들, 목회자들이 의인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라고 말한다.
<부가설명>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와 엘리후의 발언에 이어, 마침내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나타나신 부분은 욥기의 절정이다. 하나님의 엄중한 선포 앞에서 그때까지 기고만장하던 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욥 40:3-5). 하나님이 숨죽여 있는 욥에게 다시금 대답을 추궁하며 자신의 위대한 창조의 능력을 말씀하시자, 이제 욥은 하나님께 고백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하나님의 일방적인 말씀에 대한 욥의 대답은 욥기의 결론이다. 하나님을 만난 욥은 새로운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변화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전에 귀로만 듣고 지식으로만 알았던 자신의 무지에 대해 회개하는 모습이다. 욥기의 저자는 욥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을까? 결국 욥기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무죄한 자의 고통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점이다. 욥의 친구들은 전통적 해석 방법, 곧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욥과 그 자녀들이 고난을 당한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욥기의 저자는 욥의 주장을 통해 이러한 전통적 사상에 도전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인과응보 사상은 결코 인간을 위한 교리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욥기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 사상에 기반을 둔 하나님의 정의 개념을 탈피하여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그 대답이 욥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하나님을 단죄함으로써 자신의 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욥이 폭풍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속한 자기의 위치를 겸손하게 인정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욥기 저자는 욥기의 핵심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욥의 회개(42:6)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욥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자기 신분을 확인하게 된다.
교훈: 우리는 천연계 속에서 벌어지는 재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 죄악이 존재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넷 째날(수) 2월 20일
훼손된 창조 세계를 통치함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마 5:45).
도입)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나 악인, 이웃과의 관계가 좋은 사람이건 아니건, 도덕적으로 깨끗하건 아니건, 종교적인 열심이 있건 아니건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이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만을 축복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리새적인 바램에 불과하다. 사랑의 하나님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당신의 사랑으로 모두가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적어도 이 땅의 삶이 마감할 때까지는. 또한 신자들이 스스로 믿음이 있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착각에 불과할 수 도 있다.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경쟁이나 다툼에서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기게 되었고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세속적으로 축복하셨다는 간증을 너무도 자주 접하게 된다. 세상을 불신자와 신자로 나누고 하나님은 신자들을 편드는 편협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간증은 과연 성령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의문이 든다.
1. 마 5:45과 시 65:9~10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돌보기 위해 창조 세계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시는가? 이는 창조된 세계에 대한 그분의 관심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는가?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해와 비를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베풀어주시고, 농사하여 먹고 생활하는 일을 일일이 친히 돌보시는 것을 가르쳐준다.
<부가설명>
아직도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날 믿는 사람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죄인으로 있는 악인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생은 사랑할 능력이 없는 존재다. 반대로 미움의 도가 지나쳐서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자에게 몇 배의 앙갚음을 하는 악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그 미움의 한계를 정하여 “파상은 파상으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레 23:39) 갚도록 명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며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율법의 말씀에 의해, 인간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하여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간단히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라고 말씀하시면 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시지 않으면 안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으나, 사랑할 능력이 없는 인생은 이 말씀 앞에서 정죄되어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라 명하신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어 자신의 심판이 의로우심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친히 이처럼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원수 되었던 인생들의 죄를 대신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먼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죄인들을 사랑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심으로 죄인을 심판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결국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려 하신 것이다(롬 3:25, 26).
교훈: 하나님은 죄의 영향으로 손상을 입은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그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일하시며 때로 우리가 알 수 없는 기이한 방식으로 섭리하신다.
다섯째날(목) 2월 21일
훼손된 창조 세계를 위한 공급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도입)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기르신다. 하나님은 사람만 키우시는 것이 아니 라 땅위의 모든 것을 기르시는 분이시다. 구약성경에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여정에서 양식 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 먹이셨다(출 16:4)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읽으면서 종교적 신화나 동화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금도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 주셔서 모든 생명체가 살고 있다. 광야 40년간의 만나는 땅위에 인류가 살아온 음식물의 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질소(Nitrogen-N)를 먹으며 사는 것이다. 물론 공기 중의 있는 질소를 직접 먹지는 못한다. 우리는 질소를 들어 마시고 곧 내어 뱉지만 먹는 음식에서 필요한 질소를 얻는 것이다. 우유도 치즈에서도 계란에도 고기 속에도 질소가 있다. 모든 살아 있는 물질은 질소의 일부분이다. 만약 우리가 먹는 음식에 질소가 없다고 하면 어느 것이든 자라지도 못 하고 부서져 상처가 난 세포를 대체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런데 모든 생물의 양식이 되는 질소가 공기 중의 5분의 4(78%)나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에게 먹는 음식을 풍성하게 주신다. 만나는 해가 떠서 날씨의 온도가 높이지면 다 녹아 없어졌으나 질소는 없어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먹었다는 만나는 그들이 사는 진 사면에 뿌려졌으나 질소는 땅위에도 땅 아래 흙에도 땅 위의 공기에도 우리 사면에 둘러 있다. 심지어 모든 식물과 동물의 몸속에도 있다. 질소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나 맛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공기 중의 질소는 콩 종류의 식물 속으로, 땅 속의 질소는 야채와 나무에게 먹이가 되어 주고 그 속에 들어가 자라난 식물을 동물이 사람이 먹으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땅위의 모든 농사를 지으시는 농부이시다. 질소가 야채 속에 나무속에 들어가는 것도 제 혼자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식물인 박테리아를 만들어 그 일을 담당시키신 것이다. 박테리아는 어디 서도 살고 있다. 음식물 속에도 물이나 공기 속에도 땅속에도 우리 몸속에도 있다. 어디든 온기와 습기와 어두운 곳에서는 아주 잘 번져 나간다. 20분이면 배로 증가되어 가면서 공기 속에 흙에 있는 질소를 푸른 식물 속에 넣기도 하고 배설과 부식을 시키면서 다시 공기와 흙으로 되돌려 놓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땅위의 요소만을 가지고는 잘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따뜻한 햇볕과 비를 내려 주셔야 잘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농부" (요 15:1)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1. 마 6:25~3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핵심적인 기별을 주셨는가? 수많은 사람이 겪는 시련과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천연계를 창조주께서 일일이 돌보신다는 것을 계시하셨다. 그것들을 그렇게 돌보시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을 돌보시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사람들이 당하는 시련과 비극들은 욥기 사건으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죄가 끼치는 영향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애3:39)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2,33)
<부가설명>
누구나 이 땅에 오면서 빈손으로 왔다. 단 한 끼라도 먹을 것을 손에 쥐고 온 사람은 아무 도 없다. 그래도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하루 세끼 꼬박 꼬박 끼니를 건너지 않고 먹으며 살아오는 것이다. 먹은 양식을 한곳에 모아 쌓아 놓으면 자기가 쓰고 사는 집 한 채 보다 더 클 것이다. 사람이 영양사처럼 음식물에 대한 지식은 없어도 하나님이 먹는 음식물에 골고루 영양을 넣어 놓으셨다. 몸의 필요한 모든 영양소, 푸로틴 비타민 미네랄 마그네슘 칼슘 등등의 종합 영양제를 다 배합하여 놓으셨다. 편식만 하지 않으면 건강한 음식을 먹여 주신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물은 지면의 2/3나 된다. 흔한 것이 물이다. 하나님은 살아가는데 요긴하게 필요한 것일수록 흔하게 주셔서 힘들이지 않고 가지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에 대한 감사를 하지 않는다. 물이나 공기를 음식물처럼 사서 먹어야 한다고 하면 사람의 삶은 훨씬 힘겹게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을 주셔서 갈한 목을 추겨주신다. 사람은 세상에 나면서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오는 것이다. 그래도 평생 옷을 입고 살아 왔다. 추위에 얼어 죽지 않고 더위에 견딜만한 옷을 입고 살아 온 것은 하나님이 입혀 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늘 위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른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그의 삶을 노래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고.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잘 먹고 잘 입고 서로 사랑하고 한 평생을 복되게 누리며 사는 일은 하나님의 돌보아주시는 은택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는 고백이 우리의 삶의 고백이다.
교훈: 하나님은 범죄 이후에도 인간의 필요를 채우신다. 우리에게 갑작스런 재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을 수 있다.
여섯째날(금) 2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런데도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그분께서 행하셨거나 하실 수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분께서 당신 자신의 법으로 말미암아 제약을 받으신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다. 사람들은 그분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가 하면 만물, 심지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까지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그분의 이름을 존경하거나, 그분의 권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이나 그 법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무한한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대로, ‘자연의 법칙’은 물질세계를 주관하는 법들에 관하여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은 얼마나 제한되어 있으며, 창조주께서 유한한 존재들에게는 전적으로 이해될 수 없지만 당신 자신의 법들과 조화되게 일하실 수 있는 분야는 얼마나 광범위한가!”(부조와 선지자, 114, 교회증언 8권, 259~261 ‘자연의 법칙’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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