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과 창조: 세계의 형성(생명의 원천 제 1차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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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1-10 09:00 조회4,904회 댓글1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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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창조: 세계의 형성(제 1차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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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제 2과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기록한 글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거나 혹은 제가 가진 이 생각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사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마음을 열어놓고 이해하고 연구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성경을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하루의 대한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음에 답답하고 성도들에게 궁색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어 미안하기 까지 했습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으나 넷째 날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양계의 중심, 즉 해와 달을 중심으로 하루가 정해지지 아니하고 왜 첫째 날을 중심으로 이미 밤과 아침이 나누어져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 밤과 아침, 즉 밤과 낮이라 할 수 있는 24시간이 어찌 첫째 날부터 나누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첫째 날의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고도 하고 “신성의 빛”이라고도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밤과 낮이 태양을 중심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광채나 신성의 빛을 중심으로 하루의 개념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궁금증만 더해 갔습니다.
* 그래서 오늘의 창조의 주제 중에 제 1차 창조의 그 첫째 날의 문제와 넷 째 날의 문제를 연결해 그 해답을 풀어보는 형식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질문 1) 창세기 1:5절의 첫째 날의 하루의 개념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창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이 대답은 성경의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성경과 천문학자, 또한 이것을 규명하려는 물리학자들의 해답을 통해 이 문제의 종합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해답일 수 있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린 생각에는 저만의 해답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 가지고 있는 이 보다 더 좋은 대답이 있으면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제 마음에 지금까지 깨닫고 있는 저의 제한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부가적용)
* 여러분은 지금 이 지구의 창조가 하나님께서 마지막 창조하신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다른 별들의 창조와 다른 별들의 존재가 이미 있었다는 전제하에 이 사실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 사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사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사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우리가 읽는 이 성경절은 그 스스로를 높이다가 멸망당할 바벨론 왕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폐하여 질 것에 대한 예언으로서 마치 그 자신도 하나님과 같은 경배를 받으려던 천사장 루스벨을 빗대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서, 북극 집회 산 위에 가장 높은 터, 하늘의 큰 왕이 계신 성 시온이라 이름 하는 성(시 48:1-2)에서 하나님과 같은 경배를 받고 싶어 했던 루스벨의 모습을 함께 그린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다음가는 최고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늘 거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졌던 자에게서 시작되었다. “아침의 아들” 루스벨은 덮는 그룹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었다. 그는 크신 창조주의 어전에 서 있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둘러싼 영광의 끊임없는 빛이 그에게 머물고 있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印)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2-15). (부조와 선지자 35p)
"루스벨은 차츰차츰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겔 28:17),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 14). (상동 35p)
시48:1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시48:2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시48:3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 하나님의 보좌는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시 48:2)하는 북방 즉 북극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북극 집회의 산”(사 14:13)이란 바로 “북방에 있는 시온산”(시 48:1)인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시온 산을 지칭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북쪽을 가리키는 北極星(북극성)은 이 온 우주에서 가장 큰 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질량은 태양의 9.5배 반지름도 80배라고 하는데 현재 과학 실력으로는 가늠키 어렵지만 우주(宇宙)에서는 가장 힘센 별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양계(太陽界)를 비롯한 모든 宇宙가 北極星(북극성)을 中心으로 軌道(궤도)를 타고 순환하며 天道(천도)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 하늘의 모든 별들의 중심에는 북극성이 자리 잡고 있고, 바로 가까이에서 북두칠성이 있는데 이 북두칠성이 북극성을 모시고 그 주위를 24시간을 두고 한 바퀴씩 돌면서, 하늘의 뭇별을 다스리고 있는 형국인 것을 천문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태양계는 태양계의 모든 별들을 거느리고 태양계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북극성 주변을 자전하면서 공전하고 있습니다. 즉 태양계는 북극성 주변을 자전하면서 공전합니다.
즉 태양계는 북극성이 주재하는 우주에서 볼 때 하나의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우주는 제 마음대로 도는 것이 아니고,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도(天道) 하늘의 길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입니다.
북극성은 우주의 북쪽 끝인 황도북극에서 동쪽으로 23.5도 각도인 천(天)의 북극에 떠 있습니다. 지구의 축은 이 북극성을 향하여 23.5도 기울어져 있으며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과 자전을 반복합니다.
* 지구가 23.5도로 기울어져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북극의 보좌, 황도(黃道)를 중심으로 바로 서려는 지구의 모습인 것이다.
* 모든 별들은 북극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속한 태양계 역시 북극을 중심으로 공전과 자전을 하는 것이다.
* 이 북두칠성이 북극성의 그 주위를 24시간을 두고 한 바퀴씩 도는 형국처럼 태양계보다 앞서 24시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이 흐름에 따라 태양계가 그 시간을 따라 공전과 자전을 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봅니다.
*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첫째 날인 밤과 낮은 이 태양계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북극의 보좌를 중심한 북극성의 북두칠성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개념이 지구에서 시작된 시간에 이미 앞서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이미 24시간이라는 시간의 밤과 낮의 개념이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인 해와 달의 시간에 의존하지 않아도 밤과 낮으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시간의 개념이 나타나 있습니다.
*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의 순서는 이미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뭇별들 위에서 큰 왕이신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실 때에, 인간이 사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 태양계가 새로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 이유에 대하여 창 1:1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이미 천지의 창조의 완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 이후에 창 1:2절에 땅의 창조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력으로는 볼 수 없고 살 수 없는 흑암한 곳에서도 그 스스로의 운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으신 분이십니다(창 1:2). 그러므로 이 창조는 오직 사람을 위한 창조요, 사람이 거하도록 설계되어 지어진 땅임을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첫째 날 창조하신 것은 빛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려 할 때 의존해야 할 생명의 원천(시 34:9)이 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물질 중의 하나입니다.
* 하나님께서 둘째 날 창조하신 궁창과 궁창의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도 인간의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궁창에 두신 공기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물질 중의 하나입니다.
* 왜냐하면 공기 또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속성이기도 한데, 공기(空氣), 즉 이는 비어있는 기로써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 공기는 사람에게 비어있어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소부재하시고 세상 어느 곳에든지 거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기에 충분합니다.
* 그리고 셋째 날 창조하신 식물들이 있습니다.
* 창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생명에 씨를 두셨다는 것은 이 생명이 시작된 처음부터 그 열매의 생명이 담겨진 씨를 담아놓으셨습니다.
* 여러분이 배 하나를 예로 들어보면 배는 모양이 둥글어서 나무에서 떨어지면 조금 먼 곳으로 굴러가 싹이 틀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 또한 껍질은 물은 드나들지 못해도 공기는 통하는 특수한 구조로 되어 있고, 배의 살 부분은 충격을 흡수해 주는 역할을 해서 씨방에 있는 씨앗을 보존해 줍니다.
* 씨방 주변은 신맛이 나서 사람들이 배를 먹을 때도 씨 부분만은 먹지 않도록 보호 조치가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생명에 씨를 담아두신 것은 이 생명의 원천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생명의 속성과 하나님의 생명의 속성, 생명의 원천, 즉 씨가 되시는 하나님을 암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인간에게도 생명의 씨를 주셔서 인간이 진화가 아니라 씨에 생명이 담겨져 있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이어지도록 하셨습니다.
* 모든 식물은 실상 태양의 빛에 의존해야 생존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광명, 작은 광명, 태양계 중심의 별들 즉 해와 달보다 먼저 식물을 만드셨습니다.
* 이것은 모든 식물이 태양계의 일월성신보다 앞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이 식물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째 날의 더 근본적인 생명의 빛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여러분은 빛에 대하여 제가 설명하는 이 글을 주의 깊게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태양신을 섬기고 보이는 물(物)의 숭배에 빠질까봐 하나님께서는 일월성신을 첫째 날이 아닌 넷째 날에 만드신 이유가 있습니다.
* 태양은 하나님께서 첫째 날 만드신 이 빛을 가두어 만드신 큰 그릇에 불과합니다. 이는 태양보다 더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빛이 되시는 하나님, 더 크신 “대 태양” 되시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생명의 원천적인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와 같은 창조의 순서를 통해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36:9)
* 이 말씀을 잘 읽어보십시오.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광명의 빛이 앞서 나타나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태양계(물질계)를 통해 광명을 보게 된 순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형태를 보면 그 모든 창조는 이 땅의 주인공이 될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 그런데 사람의 창조에 대해서 숙고해 보십시오. 사람의 얼굴을 주목해 보십시오.
* 사람은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과 관련되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창조의 형태를 얼굴에서 보여주는데, 얼굴의 제일 위에 눈이 있는데 이는 첫째 날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과 반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빛이 없으면 눈의 존재자체는 무의미해 집니다. 둘째는 궁창의 공기를 마시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기(天氣), 즉 공기를 마시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둘째 날 만드신 코는 궁창, 곧 공간에서 비어 존재하는 공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날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을 내셨는데, 이는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모든 과목이 나타났는데 이는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식물, 먹거리가 되었습니다.
* 사람의 창조의 형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빛과 공기와 그 음식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얼굴의 형태입니다. 이는 사람의 생명, 즉 그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삼일 동안 제 1차 창조를 마치신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생명의 유지를 위해 그 원천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 다시 한 번 하늘의 창조와 그 중심에 선 소우주가 되는 인간의 얼굴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눈을 보면 눈은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며, 코는 둘째 날 만드신 그 궁창에 있는 공기를 통해 숨을 들여 마시도록 되어 있으며 입은 셋째 날 창조하신 그 땅에서 나온 식물을 먹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 인간의 생명의 원천이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빛과 공기와 물 그리고 식물에 있음을 보여주는 창조의 순서가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의 순서를 따라 눈 코 입의 순서를 보여준 절묘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다시 돌아가 첫째 날 창조하신 빛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 이는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유지에 필요 되는 빛을 창조하신 것인데 현대 물리학에서 이 빛에 대한 정체를 어떻게 규명하는지를 봅시다.
현대물리학의 위대한 두 가지 패러다임 전환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 모두 빛의 작용에 대한 예외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이 두 이론 덕분에 빛의 본질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빛은 우주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남은 내 생애동안 빛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빛은 신묘막측합니다. 그리고 빛은 어떤 면에서 시간 공간 또는 물질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상대성이론은 광속의 묘한 특성으로부터 도출되었습니다. 고전물리학에 따르면 관찰자의 운동에 따라 광속의 측정치가 달라져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항상 그런 차이가 나타납니다. 가령, 여러분이 자전거를 타고 시속 20km로 달리고 있고 시속 30km로 달리는 차가 당신 옆을 지난다면, 여러분에 비해 그 차는 시속 10km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시속 30km로 달리기 위해 페달을 좀 더 빨리 밟는다면 당신 속도에 비해 차의 속도는 0이 될 것이고 당신은 차 운전사와 나란히 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빛은 자전거보다 수백만 배 더 빨라서, 빛이 여러분에 비해 어느 정도 빠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빛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어 여러분이 빨리 달린 만큼 광속이 더 느려질 거라고 예측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이 이런 변화를 찾아내려 했을 때, 그들은 당황스러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빛을 향해 가든 빛에서 멀어지든, 빛의 상대적인 속도가 항상 동일했습니다. 이런 결과에 당황한 미국의 두 과학자 엘버트 마이컬슨과 에드워드 몰리는 예상되는 차이보다 수백 배 더 정밀한 초당 2마일의 정밀도로 광속의 변화를 탐지할 수 있는 실험을 설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똑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관찰된 광속은 결코 차이가 없었습니다. 기존의 과학적 패러다임에서 볼 때, 이것은 주요 예외였습니다. 빛은 왜 다른 모든 것과 똑 같은 법칙을 따르지 않을까? 그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리학자들이 광속만큼 빠른게 없다고 말할 때, 그들은 질량이 있는 물체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속도가 증가하면 시간과 공간뿐만 아니라 질량도 변화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질량의 경우에는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됩니다. 그래서 더 빨리 이동할수록 질량이 더 커집니다. 만일 물체의 속도가 광속만큼 빨라진다면 물체의 질량은 무한해 집니다. 그러나 무한한 질량이 이동하려면 무한한 양의 에너지, 즉 우주 전체에 있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우주 전체에 있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광속만큼 빠른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빛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빛은 광속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빛이 그렇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은 빛이 물질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빛의 질량은 정확히 0입니다. 질량은 없고 순수한 마음만 있는 상태인, 육체에서 분리된 관찰자가 광속으로 이동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아인슈타인 방정식에서는 빛 자체의 관점에서 시간과 공간이 0이 될 것이라고 예측할 것입니다. 이 사실이야 말로 빛에 아주 묘한 뭔가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빛이 뭐든,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빛은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 슈리 오로빈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물질은 안정된 빛의 덩어리일 뿐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빛이 창조된 것은 세상의 빛(요 8:1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를 설명하기에 적합합니다. 빛은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역에 속한 존재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가장 최초의 물질이 빛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가 심장합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이 빛에 의존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여러분과 저도 안정된 빛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빛은 물리학자들도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 이 신비한 빛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이 빛의 신비한 모습에 경악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해마다 그의 소산물을 내며, 태양 주위를 계속 공전하는 것은 고유의 힘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이 유성들을 인도하시고 우주 전역에 걸쳐서 그것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도록 하신다. 그분은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PP115p
이 작은 세계는 우주의 교과서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목적 즉 구속하시는 사랑의 신비는 “천사들도 또한 살피기를 원하는” 주제로서 무궁한 시대를 통하여 그들의 연구 주제가 될 것이다. 구속(救贖)받은 자들이나 타락하지 않은 자들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들의 과학과 노래를 찾게 될 것이다.(DA19p)
죄의 저주 아래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물 가운데 한 오점(汚點)이 되었던 이 작은 세계는 하나님의 우주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세계보다 더욱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DA26p)
천문(天文)이란 하늘의 글월이란 뜻을 말합니다. 하늘에 글자가 써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는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들에 대한 어떤 예시(豫示)가 천체의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선조들은 본 것입니다. 즉 우리 조상들은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하늘에는 절대적인 주재자가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공경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祭天)의식이 오늘날 우리 생활 속 깊이까지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천지인 합일 사상에 따라 인간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야 인간다운 삶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하늘은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영혼이 돌아갈 고향으로 믿었습니다.
북두칠성을 천제(天帝)를 대변하는 별로 보았고, 하느님의 자손인 한민족으로선 죽어서도 원래 왔던 하느님 고향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신위를 북쪽에 모시고 북쪽으로 제사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께 인생이 돌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 성경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보좌 북극, 북쪽의 방향, 즉 북방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여러분과 저의 생명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북극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의식의 세계에 만연한 것입니다.
참고)
* 동양 종교에서의 “하나”는 만물의 ‘제1 시1작’ 혹은 ‘큰 부모’인 우주(宇宙)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자는 이 “하나”의 또 다른 이름이 도(道)라고 말하면서 “하나”를 궁극적 실재인 “도의 별칭”으로 보았습니다, 그 가 말하는 도는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도로써 그것은 말하여 질 수 없고 이름 되어 질 수 없는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이며 “만물 생성의 원리로서의 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도(道)와 “하나”(one, 一)는 그 근원이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동양종교에서는 도의 개념이 천(天)으로 감을 살펴보았다고 대 동양사상에서는 하늘이 인간의 일에 간섭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늘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통해 동양종교에서는 도의 개념은 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동양사상에서는 “도(道)”와 “태일(太一)”을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태일” 역시 천지만물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태일”을 세계의 중심축이라고 생각하는 북극성으로 보았으며 여기에서 ‘표준 계(稽), 척도 (도度), 법칙 칙(則), 수(數), 일정함 상常; 항 恒)’ 등이 나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도道는 태일太一) 및 북극성과 동일시되었으며 그리하여 자연 질서의 중심축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바탕에는 천체의 중심인 북극성에 우주의 최고신이 거주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대 동양인들에게 자연은 도를 깨우치는 교과서였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질서와 변화를 통해서 삶의 이치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주 자연 인간 및 만물을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천인합일(天一合一)적 세계관을 발전시켰습니다. 동양인들은 자연만물이 반드시 짝이 있음을 관찰하면서 음양사상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동양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사상이 되었습니다. 이 사상은 삶의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준 기본사상으로 특히 중국인들의 종교적인 상징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음양사상은 우주의 운동을 무극이 태극으로 다시 태극이 무극으로 반복하는 운동으로 이해하는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즉 무극과 태극의 상호작용을 음양작용으로 보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에서 태극은 양陽:1이요 무극은 음陰: 〇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우주만상이 ‘무無’ 즉‘무극’에서 태극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주에 변화를 추진하는 힘의 근원이 무극이며 그 변화작용의 본체가 태극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극과 무극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묘사됩니다. 즉 부분은 전체를 반영하고 전체의 문제는 부분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동양종교에서는 우주와 세계를 또한 유와 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물의 유(有)에는 (무無)가 항상 같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동양종교에서는 시간과 공간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 세계 사물 존재 등을 이같이 이해했습니다. 즉 ‘宇’는 공간을 ‘宙’는 시간을 가리켰습니다. 즉 ‘우주’를“ 시공간 연속체”로 본 것입니다. ‘세계世界’에서도 世는 시간을 界는 공간을 말했습니다. 또 한 ‘사물’에서 ‘事’는 존재가 시간적으로 있는 것으로 ‘物’은 존재가 공간적으로 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존재(存在)도 ‘存’을 시간적으로 생멸 변화하면서 시간에 있는 현상으로 ‘在 ’를 공간적으로 생멸 변화하면서 공간에 있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즉 존재를 시 공간 연속체적 표현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처럼 동양 종교에서는 무와 유를 (도道)의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철학적 사고로 깨우친 인간의 지각의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이와 같은 깨우침 또한 매우 대단한 것으로 저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계시를 통해 깨우친 사고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북극성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북극의 높은 보좌의 높은 터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시고 기동하게 하시고 만물을 유지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
“동양 종교와 기독교의 "하나(one, 一)" 신관(神觀)에 대한 목회 신학적 연구” 조춘호 박사논문의 일부 발췌.
“행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이 세상 모든 만물(萬物)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0)께서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1)를 통해 만유(萬有)를 지으시고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고(요 10:30) 하신 이 오묘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데서 온 성경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인간은 너무도 오래 우리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행10:36)과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도입)
우리는 오늘 제 2과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기록한 글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거나 혹은 제가 가진 이 생각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사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마음을 열어놓고 이해하고 연구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성경을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하루의 대한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음에 답답하고 성도들에게 궁색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어 미안하기 까지 했습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으나 넷째 날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양계의 중심, 즉 해와 달을 중심으로 하루가 정해지지 아니하고 왜 첫째 날을 중심으로 이미 밤과 아침이 나누어져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 밤과 아침, 즉 밤과 낮이라 할 수 있는 24시간이 어찌 첫째 날부터 나누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첫째 날의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고도 하고 “신성의 빛”이라고도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밤과 낮이 태양을 중심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광채나 신성의 빛을 중심으로 하루의 개념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궁금증만 더해 갔습니다.
* 그래서 오늘의 창조의 주제 중에 제 1차 창조의 그 첫째 날의 문제와 넷 째 날의 문제를 연결해 그 해답을 풀어보는 형식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질문 1) 창세기 1:5절의 첫째 날의 하루의 개념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창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이 대답은 성경의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성경과 천문학자, 또한 이것을 규명하려는 물리학자들의 해답을 통해 이 문제의 종합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해답일 수 있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린 생각에는 저만의 해답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 가지고 있는 이 보다 더 좋은 대답이 있으면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제 마음에 지금까지 깨닫고 있는 저의 제한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부가적용)
* 여러분은 지금 이 지구의 창조가 하나님께서 마지막 창조하신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다른 별들의 창조와 다른 별들의 존재가 이미 있었다는 전제하에 이 사실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 사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사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사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우리가 읽는 이 성경절은 그 스스로를 높이다가 멸망당할 바벨론 왕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폐하여 질 것에 대한 예언으로서 마치 그 자신도 하나님과 같은 경배를 받으려던 천사장 루스벨을 빗대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서, 북극 집회 산 위에 가장 높은 터, 하늘의 큰 왕이 계신 성 시온이라 이름 하는 성(시 48:1-2)에서 하나님과 같은 경배를 받고 싶어 했던 루스벨의 모습을 함께 그린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다음가는 최고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늘 거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졌던 자에게서 시작되었다. “아침의 아들” 루스벨은 덮는 그룹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었다. 그는 크신 창조주의 어전에 서 있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둘러싼 영광의 끊임없는 빛이 그에게 머물고 있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印)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2-15). (부조와 선지자 35p)
"루스벨은 차츰차츰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겔 28:17),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 14). (상동 35p)
시48:1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시48:2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시48:3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 하나님의 보좌는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시 48:2)하는 북방 즉 북극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북극 집회의 산”(사 14:13)이란 바로 “북방에 있는 시온산”(시 48:1)인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시온 산을 지칭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북쪽을 가리키는 北極星(북극성)은 이 온 우주에서 가장 큰 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질량은 태양의 9.5배 반지름도 80배라고 하는데 현재 과학 실력으로는 가늠키 어렵지만 우주(宇宙)에서는 가장 힘센 별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양계(太陽界)를 비롯한 모든 宇宙가 北極星(북극성)을 中心으로 軌道(궤도)를 타고 순환하며 天道(천도)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 하늘의 모든 별들의 중심에는 북극성이 자리 잡고 있고, 바로 가까이에서 북두칠성이 있는데 이 북두칠성이 북극성을 모시고 그 주위를 24시간을 두고 한 바퀴씩 돌면서, 하늘의 뭇별을 다스리고 있는 형국인 것을 천문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태양계는 태양계의 모든 별들을 거느리고 태양계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북극성 주변을 자전하면서 공전하고 있습니다. 즉 태양계는 북극성 주변을 자전하면서 공전합니다.
즉 태양계는 북극성이 주재하는 우주에서 볼 때 하나의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우주는 제 마음대로 도는 것이 아니고,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도(天道) 하늘의 길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입니다.
북극성은 우주의 북쪽 끝인 황도북극에서 동쪽으로 23.5도 각도인 천(天)의 북극에 떠 있습니다. 지구의 축은 이 북극성을 향하여 23.5도 기울어져 있으며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과 자전을 반복합니다.
* 지구가 23.5도로 기울어져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북극의 보좌, 황도(黃道)를 중심으로 바로 서려는 지구의 모습인 것이다.
* 모든 별들은 북극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속한 태양계 역시 북극을 중심으로 공전과 자전을 하는 것이다.
* 이 북두칠성이 북극성의 그 주위를 24시간을 두고 한 바퀴씩 도는 형국처럼 태양계보다 앞서 24시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이 흐름에 따라 태양계가 그 시간을 따라 공전과 자전을 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봅니다.
*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첫째 날인 밤과 낮은 이 태양계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북극의 보좌를 중심한 북극성의 북두칠성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개념이 지구에서 시작된 시간에 이미 앞서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이미 24시간이라는 시간의 밤과 낮의 개념이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인 해와 달의 시간에 의존하지 않아도 밤과 낮으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시간의 개념이 나타나 있습니다.
*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의 순서는 이미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뭇별들 위에서 큰 왕이신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실 때에, 인간이 사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 태양계가 새로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 이유에 대하여 창 1:1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이미 천지의 창조의 완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 이후에 창 1:2절에 땅의 창조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력으로는 볼 수 없고 살 수 없는 흑암한 곳에서도 그 스스로의 운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으신 분이십니다(창 1:2). 그러므로 이 창조는 오직 사람을 위한 창조요, 사람이 거하도록 설계되어 지어진 땅임을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첫째 날 창조하신 것은 빛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려 할 때 의존해야 할 생명의 원천(시 34:9)이 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물질 중의 하나입니다.
* 하나님께서 둘째 날 창조하신 궁창과 궁창의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도 인간의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궁창에 두신 공기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물질 중의 하나입니다.
* 왜냐하면 공기 또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속성이기도 한데, 공기(空氣), 즉 이는 비어있는 기로써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 공기는 사람에게 비어있어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소부재하시고 세상 어느 곳에든지 거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기에 충분합니다.
* 그리고 셋째 날 창조하신 식물들이 있습니다.
* 창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생명에 씨를 두셨다는 것은 이 생명이 시작된 처음부터 그 열매의 생명이 담겨진 씨를 담아놓으셨습니다.
* 여러분이 배 하나를 예로 들어보면 배는 모양이 둥글어서 나무에서 떨어지면 조금 먼 곳으로 굴러가 싹이 틀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 또한 껍질은 물은 드나들지 못해도 공기는 통하는 특수한 구조로 되어 있고, 배의 살 부분은 충격을 흡수해 주는 역할을 해서 씨방에 있는 씨앗을 보존해 줍니다.
* 씨방 주변은 신맛이 나서 사람들이 배를 먹을 때도 씨 부분만은 먹지 않도록 보호 조치가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생명에 씨를 담아두신 것은 이 생명의 원천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생명의 속성과 하나님의 생명의 속성, 생명의 원천, 즉 씨가 되시는 하나님을 암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인간에게도 생명의 씨를 주셔서 인간이 진화가 아니라 씨에 생명이 담겨져 있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이어지도록 하셨습니다.
* 모든 식물은 실상 태양의 빛에 의존해야 생존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광명, 작은 광명, 태양계 중심의 별들 즉 해와 달보다 먼저 식물을 만드셨습니다.
* 이것은 모든 식물이 태양계의 일월성신보다 앞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이 식물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째 날의 더 근본적인 생명의 빛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여러분은 빛에 대하여 제가 설명하는 이 글을 주의 깊게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태양신을 섬기고 보이는 물(物)의 숭배에 빠질까봐 하나님께서는 일월성신을 첫째 날이 아닌 넷째 날에 만드신 이유가 있습니다.
* 태양은 하나님께서 첫째 날 만드신 이 빛을 가두어 만드신 큰 그릇에 불과합니다. 이는 태양보다 더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빛이 되시는 하나님, 더 크신 “대 태양” 되시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생명의 원천적인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와 같은 창조의 순서를 통해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36:9)
* 이 말씀을 잘 읽어보십시오.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광명의 빛이 앞서 나타나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태양계(물질계)를 통해 광명을 보게 된 순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형태를 보면 그 모든 창조는 이 땅의 주인공이 될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 그런데 사람의 창조에 대해서 숙고해 보십시오. 사람의 얼굴을 주목해 보십시오.
* 사람은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과 관련되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창조의 형태를 얼굴에서 보여주는데, 얼굴의 제일 위에 눈이 있는데 이는 첫째 날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과 반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빛이 없으면 눈의 존재자체는 무의미해 집니다. 둘째는 궁창의 공기를 마시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기(天氣), 즉 공기를 마시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둘째 날 만드신 코는 궁창, 곧 공간에서 비어 존재하는 공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날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을 내셨는데, 이는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모든 과목이 나타났는데 이는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식물, 먹거리가 되었습니다.
* 사람의 창조의 형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빛과 공기와 그 음식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얼굴의 형태입니다. 이는 사람의 생명, 즉 그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삼일 동안 제 1차 창조를 마치신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생명의 유지를 위해 그 원천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 다시 한 번 하늘의 창조와 그 중심에 선 소우주가 되는 인간의 얼굴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눈을 보면 눈은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며, 코는 둘째 날 만드신 그 궁창에 있는 공기를 통해 숨을 들여 마시도록 되어 있으며 입은 셋째 날 창조하신 그 땅에서 나온 식물을 먹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 인간의 생명의 원천이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빛과 공기와 물 그리고 식물에 있음을 보여주는 창조의 순서가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의 순서를 따라 눈 코 입의 순서를 보여준 절묘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다시 돌아가 첫째 날 창조하신 빛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 이는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유지에 필요 되는 빛을 창조하신 것인데 현대 물리학에서 이 빛에 대한 정체를 어떻게 규명하는지를 봅시다.
현대물리학의 위대한 두 가지 패러다임 전환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 모두 빛의 작용에 대한 예외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이 두 이론 덕분에 빛의 본질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빛은 우주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남은 내 생애동안 빛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빛은 신묘막측합니다. 그리고 빛은 어떤 면에서 시간 공간 또는 물질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상대성이론은 광속의 묘한 특성으로부터 도출되었습니다. 고전물리학에 따르면 관찰자의 운동에 따라 광속의 측정치가 달라져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항상 그런 차이가 나타납니다. 가령, 여러분이 자전거를 타고 시속 20km로 달리고 있고 시속 30km로 달리는 차가 당신 옆을 지난다면, 여러분에 비해 그 차는 시속 10km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시속 30km로 달리기 위해 페달을 좀 더 빨리 밟는다면 당신 속도에 비해 차의 속도는 0이 될 것이고 당신은 차 운전사와 나란히 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빛은 자전거보다 수백만 배 더 빨라서, 빛이 여러분에 비해 어느 정도 빠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빛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어 여러분이 빨리 달린 만큼 광속이 더 느려질 거라고 예측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이 이런 변화를 찾아내려 했을 때, 그들은 당황스러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빛을 향해 가든 빛에서 멀어지든, 빛의 상대적인 속도가 항상 동일했습니다. 이런 결과에 당황한 미국의 두 과학자 엘버트 마이컬슨과 에드워드 몰리는 예상되는 차이보다 수백 배 더 정밀한 초당 2마일의 정밀도로 광속의 변화를 탐지할 수 있는 실험을 설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똑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관찰된 광속은 결코 차이가 없었습니다. 기존의 과학적 패러다임에서 볼 때, 이것은 주요 예외였습니다. 빛은 왜 다른 모든 것과 똑 같은 법칙을 따르지 않을까? 그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리학자들이 광속만큼 빠른게 없다고 말할 때, 그들은 질량이 있는 물체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속도가 증가하면 시간과 공간뿐만 아니라 질량도 변화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질량의 경우에는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됩니다. 그래서 더 빨리 이동할수록 질량이 더 커집니다. 만일 물체의 속도가 광속만큼 빨라진다면 물체의 질량은 무한해 집니다. 그러나 무한한 질량이 이동하려면 무한한 양의 에너지, 즉 우주 전체에 있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우주 전체에 있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광속만큼 빠른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빛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빛은 광속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빛이 그렇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은 빛이 물질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빛의 질량은 정확히 0입니다. 질량은 없고 순수한 마음만 있는 상태인, 육체에서 분리된 관찰자가 광속으로 이동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아인슈타인 방정식에서는 빛 자체의 관점에서 시간과 공간이 0이 될 것이라고 예측할 것입니다. 이 사실이야 말로 빛에 아주 묘한 뭔가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빛이 뭐든,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빛은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 슈리 오로빈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물질은 안정된 빛의 덩어리일 뿐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빛이 창조된 것은 세상의 빛(요 8:1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를 설명하기에 적합합니다. 빛은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역에 속한 존재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가장 최초의 물질이 빛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가 심장합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이 빛에 의존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여러분과 저도 안정된 빛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빛은 물리학자들도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 이 신비한 빛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이 빛의 신비한 모습에 경악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해마다 그의 소산물을 내며, 태양 주위를 계속 공전하는 것은 고유의 힘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이 유성들을 인도하시고 우주 전역에 걸쳐서 그것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도록 하신다. 그분은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PP115p
이 작은 세계는 우주의 교과서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목적 즉 구속하시는 사랑의 신비는 “천사들도 또한 살피기를 원하는” 주제로서 무궁한 시대를 통하여 그들의 연구 주제가 될 것이다. 구속(救贖)받은 자들이나 타락하지 않은 자들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들의 과학과 노래를 찾게 될 것이다.(DA19p)
죄의 저주 아래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물 가운데 한 오점(汚點)이 되었던 이 작은 세계는 하나님의 우주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세계보다 더욱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DA26p)
천문(天文)이란 하늘의 글월이란 뜻을 말합니다. 하늘에 글자가 써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는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들에 대한 어떤 예시(豫示)가 천체의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선조들은 본 것입니다. 즉 우리 조상들은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하늘에는 절대적인 주재자가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공경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祭天)의식이 오늘날 우리 생활 속 깊이까지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천지인 합일 사상에 따라 인간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야 인간다운 삶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하늘은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영혼이 돌아갈 고향으로 믿었습니다.
북두칠성을 천제(天帝)를 대변하는 별로 보았고, 하느님의 자손인 한민족으로선 죽어서도 원래 왔던 하느님 고향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신위를 북쪽에 모시고 북쪽으로 제사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께 인생이 돌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 성경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보좌 북극, 북쪽의 방향, 즉 북방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여러분과 저의 생명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북극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의식의 세계에 만연한 것입니다.
참고)
* 동양 종교에서의 “하나”는 만물의 ‘제1 시1작’ 혹은 ‘큰 부모’인 우주(宇宙)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자는 이 “하나”의 또 다른 이름이 도(道)라고 말하면서 “하나”를 궁극적 실재인 “도의 별칭”으로 보았습니다, 그 가 말하는 도는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도로써 그것은 말하여 질 수 없고 이름 되어 질 수 없는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이며 “만물 생성의 원리로서의 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도(道)와 “하나”(one, 一)는 그 근원이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동양종교에서는 도의 개념이 천(天)으로 감을 살펴보았다고 대 동양사상에서는 하늘이 인간의 일에 간섭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늘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통해 동양종교에서는 도의 개념은 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동양사상에서는 “도(道)”와 “태일(太一)”을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태일” 역시 천지만물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태일”을 세계의 중심축이라고 생각하는 북극성으로 보았으며 여기에서 ‘표준 계(稽), 척도 (도度), 법칙 칙(則), 수(數), 일정함 상常; 항 恒)’ 등이 나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도道는 태일太一) 및 북극성과 동일시되었으며 그리하여 자연 질서의 중심축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바탕에는 천체의 중심인 북극성에 우주의 최고신이 거주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대 동양인들에게 자연은 도를 깨우치는 교과서였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질서와 변화를 통해서 삶의 이치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주 자연 인간 및 만물을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천인합일(天一合一)적 세계관을 발전시켰습니다. 동양인들은 자연만물이 반드시 짝이 있음을 관찰하면서 음양사상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동양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사상이 되었습니다. 이 사상은 삶의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준 기본사상으로 특히 중국인들의 종교적인 상징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음양사상은 우주의 운동을 무극이 태극으로 다시 태극이 무극으로 반복하는 운동으로 이해하는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즉 무극과 태극의 상호작용을 음양작용으로 보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에서 태극은 양陽:1이요 무극은 음陰: 〇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우주만상이 ‘무無’ 즉‘무극’에서 태극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주에 변화를 추진하는 힘의 근원이 무극이며 그 변화작용의 본체가 태극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극과 무극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묘사됩니다. 즉 부분은 전체를 반영하고 전체의 문제는 부분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동양종교에서는 우주와 세계를 또한 유와 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물의 유(有)에는 (무無)가 항상 같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동양종교에서는 시간과 공간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 세계 사물 존재 등을 이같이 이해했습니다. 즉 ‘宇’는 공간을 ‘宙’는 시간을 가리켰습니다. 즉 ‘우주’를“ 시공간 연속체”로 본 것입니다. ‘세계世界’에서도 世는 시간을 界는 공간을 말했습니다. 또 한 ‘사물’에서 ‘事’는 존재가 시간적으로 있는 것으로 ‘物’은 존재가 공간적으로 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존재(存在)도 ‘存’을 시간적으로 생멸 변화하면서 시간에 있는 현상으로 ‘在 ’를 공간적으로 생멸 변화하면서 공간에 있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즉 존재를 시 공간 연속체적 표현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처럼 동양 종교에서는 무와 유를 (도道)의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철학적 사고로 깨우친 인간의 지각의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이와 같은 깨우침 또한 매우 대단한 것으로 저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계시를 통해 깨우친 사고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북극성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북극의 높은 보좌의 높은 터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시고 기동하게 하시고 만물을 유지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
“동양 종교와 기독교의 "하나(one, 一)" 신관(神觀)에 대한 목회 신학적 연구” 조춘호 박사논문의 일부 발췌.
“행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이 세상 모든 만물(萬物)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0)께서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1)를 통해 만유(萬有)를 지으시고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고(요 10:30) 하신 이 오묘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데서 온 성경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인간은 너무도 오래 우리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행10:36)과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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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현님의 댓글
최성현 작성일조목사님 정말 반갑습니다. Welcome 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