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과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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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3-05-10 14:17 조회4,745회 댓글0건첨부파일
- 제 7 과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hwp (30.5K) 107회 다운로드 DATE : 2013-05-10 14:17:25
본문
제 7 과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미가)
기억절:“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미가는 남방유다를 위한 선지자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이미 앗시리아로 인해 북방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하였고 남방유다도 부정직, 부정의, 뇌물, 불신 등으로 치명적인 죄들이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을 떠나는 모습이며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것이 사망이므로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부르셔서 남방유다를 방문하시며 유다의 상황을 설명하시고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호소하십니다. 미가의 기별에서 한 가지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메시야의 탄생이었습니다. 메시야는 만국에 평화를 가져오며 온 인류를 구원하시게 될 것입니다.
첫째 날(일) 선지자의 정신적 고뇌
*도입질문: 선지자 미가가 정신적 고뇌를 경험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미가는 남방 유다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선지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미가가 부르심을 받은 당시의 상황은 북방 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 인해 이미 멸망 받았고, 유다도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받게 된 배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과의 분리에 있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방의 각종 우상들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이 거절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택이 결국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한 멸망이므로 이스라엘의 선택의 결과가 무엇임을 보여주시고 그 선택을 돌이켜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기대하여 선지자들을 부르셔서 기별을 전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거절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걷혀졌을 때 호전적인 앗시리아의 공격으로 인해 멸망하였습니다.
북방 이스라엘과 유사한 상황이 남방 유다에서도 전개되자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부르셔서 남방 유다의 현실을 보게 하시고 그것의 결과와 함께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호소하셨습니다. 미가의 기별은 남방유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최후의 기별이었습니다.
미가는 만약 남방 유다가 자신의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북방 이스라엘처럼 멸망과 더불어 백성들이 죽고 또한 포로 되어 가는 고통에 빠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기별은 애절했습니다. 동포를 사랑하는 선지자의 마음은 안타까움과 조마조마함이 동시에 있어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둘째 날(월) 죄악을 꾸미는 자들
*도입질문: 당시 타락한 지도자들의 기별의 초점은 무엇이었고,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당시 남방 유다의 지도자들은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면서도, 선민의식으로 인해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전 국민적인 우상 숭배가 만연하였고, 공직 사회에는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였고,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을 타락시킬 기별을 가지고 사방에서 일어났고, 제사장들은 삯을 위해 가르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방유다에 존재하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우상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이방인들과는 반대로 그들이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러한 특별한 지위가 징벌에서 그들을 어느 정도 면제시켜 줄 것이라는 망상이었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나 성경의 지식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식이나 성경의 지식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 주는 도구입니다. 종교의식에 참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심으로 양처럼 생명을 바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과 그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에 대한 감격과 확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개인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선택할 때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 생명이 됩니다.(요일5:11-12)
성경의 지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어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함으로 사람에게 주신 의지의 자유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선택할 때 그것이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연결로 인해 생명이 됩니다.
지식을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교만”에 이르게 됩니다.(고전8:1)
오히려 지식이 하나님을 거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예수님 당시의 성경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거절했던 예들고, 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입니다. -지식이 많고 마지막 진리의 백성이라고 선택 받았다는 선민의식으로 인해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안 계셔서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의 모습)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입니다.(요14:6) 그 외의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임을 가르쳐 주는 도구일 뿐 어떤 것도 생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품성을 오해하지 않고 알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확신하여 포도나무 비유처럼 절대적 관계가 필요함을 인식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생명입니다.(요17:3)
셋째 날(화) 베들레헴 태생의 새로운 통치자
*도입질문: 미가 선지자가 남긴 온 인류를 위한 최고의 기별은 무엇인가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인간 사회는 아담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선택을 한 이래로 언제나 문제투성이였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들의 죽은 행실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희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 사회에 하나님은 최고의 선물을 하셨는데 그 선물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아담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첫 번째 아담의 선택으로 인한 모든 결과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실 것이었습니다.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지가 놀랍게도 당시에 늘 암울했던 미가 시대에 미가 선지자를 통한 예언으로 주어짐으로 새로운 희망의 기별이 되게 하셨습니다.
넷째 날(수) 무엇이 선한 것인가?
*도입질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정의란 무엇인가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8)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정의란 무엇일까요? 흔히 사람 사회에서의 정의는 상대적 혹은 법적인 정의입니다. 잘한 사람에게는 복과 칭찬을 하지만, 못한 사람에게는 저주와 형벌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의 대표적인 구호입니다. 이런 상대적인 개념의 정의가 사람들에게는 바른 정의라고 생각되어지는 이유는 사람들 즉 모든 피조된 자들의 품성은 상대적 개념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개념의 품성 속에서의 바른 정의는 상대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정의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잘 한사람은 잘해주고,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정의란 하나님께서 가지신 절대적 사랑의 품성에 기반한 것이므로 그것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롬5:20)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일수록 빛이 더 많이 필요한 것처럼 죄가 많은 곳에 더 많은 은혜를 주어야 공평한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품성대로의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사회가 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그것을 가리켜 선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고,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적게 느끼는 사람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는 것이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 정의입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해지는 것, 요즘 일컬어지는 경제 민주화를 통해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정의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다섯째 날(목) 깊은 바다에
*도입질문: 하나님께서 깊은 바다에 던지시고 다시는 건지길 원치 않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미가 선지자가 이야기 하는 심판은 사람들의 선택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의 선택대로 인정될 때, 그 사람의 선택대로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해 창조 전의 상태인 무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선택하게 되면 그 결과로 하나님과 생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전되어지고 있는 상태의 결과가 영원한 무로 가버리는 것이므로 그런 고정된 시간(심판)이 오기 전에, 되돌릴 수 있는 기회와 은혜의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호소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미 하나님 자신의 피를 통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볼 때에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라는 확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미 용서하셔서 나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으로 생각할 때에 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시는 아버지의 역사를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빌1:6)
기억절:“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미가는 남방유다를 위한 선지자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이미 앗시리아로 인해 북방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하였고 남방유다도 부정직, 부정의, 뇌물, 불신 등으로 치명적인 죄들이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을 떠나는 모습이며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것이 사망이므로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부르셔서 남방유다를 방문하시며 유다의 상황을 설명하시고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호소하십니다. 미가의 기별에서 한 가지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메시야의 탄생이었습니다. 메시야는 만국에 평화를 가져오며 온 인류를 구원하시게 될 것입니다.
첫째 날(일) 선지자의 정신적 고뇌
*도입질문: 선지자 미가가 정신적 고뇌를 경험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미가는 남방 유다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선지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미가가 부르심을 받은 당시의 상황은 북방 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 인해 이미 멸망 받았고, 유다도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받게 된 배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과의 분리에 있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방의 각종 우상들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이 거절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택이 결국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한 멸망이므로 이스라엘의 선택의 결과가 무엇임을 보여주시고 그 선택을 돌이켜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기대하여 선지자들을 부르셔서 기별을 전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거절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걷혀졌을 때 호전적인 앗시리아의 공격으로 인해 멸망하였습니다.
북방 이스라엘과 유사한 상황이 남방 유다에서도 전개되자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부르셔서 남방 유다의 현실을 보게 하시고 그것의 결과와 함께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호소하셨습니다. 미가의 기별은 남방유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최후의 기별이었습니다.
미가는 만약 남방 유다가 자신의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북방 이스라엘처럼 멸망과 더불어 백성들이 죽고 또한 포로 되어 가는 고통에 빠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기별은 애절했습니다. 동포를 사랑하는 선지자의 마음은 안타까움과 조마조마함이 동시에 있어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둘째 날(월) 죄악을 꾸미는 자들
*도입질문: 당시 타락한 지도자들의 기별의 초점은 무엇이었고,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당시 남방 유다의 지도자들은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면서도, 선민의식으로 인해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전 국민적인 우상 숭배가 만연하였고, 공직 사회에는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였고,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을 타락시킬 기별을 가지고 사방에서 일어났고, 제사장들은 삯을 위해 가르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방유다에 존재하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우상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이방인들과는 반대로 그들이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러한 특별한 지위가 징벌에서 그들을 어느 정도 면제시켜 줄 것이라는 망상이었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나 성경의 지식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식이나 성경의 지식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 주는 도구입니다. 종교의식에 참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심으로 양처럼 생명을 바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과 그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에 대한 감격과 확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개인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선택할 때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 생명이 됩니다.(요일5:11-12)
성경의 지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어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함으로 사람에게 주신 의지의 자유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선택할 때 그것이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연결로 인해 생명이 됩니다.
지식을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교만”에 이르게 됩니다.(고전8:1)
오히려 지식이 하나님을 거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예수님 당시의 성경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거절했던 예들고, 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입니다. -지식이 많고 마지막 진리의 백성이라고 선택 받았다는 선민의식으로 인해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안 계셔서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의 모습)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입니다.(요14:6) 그 외의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임을 가르쳐 주는 도구일 뿐 어떤 것도 생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품성을 오해하지 않고 알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확신하여 포도나무 비유처럼 절대적 관계가 필요함을 인식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생명입니다.(요17:3)
셋째 날(화) 베들레헴 태생의 새로운 통치자
*도입질문: 미가 선지자가 남긴 온 인류를 위한 최고의 기별은 무엇인가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인간 사회는 아담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선택을 한 이래로 언제나 문제투성이였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들의 죽은 행실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희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 사회에 하나님은 최고의 선물을 하셨는데 그 선물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아담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첫 번째 아담의 선택으로 인한 모든 결과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실 것이었습니다.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지가 놀랍게도 당시에 늘 암울했던 미가 시대에 미가 선지자를 통한 예언으로 주어짐으로 새로운 희망의 기별이 되게 하셨습니다.
넷째 날(수) 무엇이 선한 것인가?
*도입질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정의란 무엇인가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8)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정의란 무엇일까요? 흔히 사람 사회에서의 정의는 상대적 혹은 법적인 정의입니다. 잘한 사람에게는 복과 칭찬을 하지만, 못한 사람에게는 저주와 형벌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의 대표적인 구호입니다. 이런 상대적인 개념의 정의가 사람들에게는 바른 정의라고 생각되어지는 이유는 사람들 즉 모든 피조된 자들의 품성은 상대적 개념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개념의 품성 속에서의 바른 정의는 상대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정의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잘 한사람은 잘해주고,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정의란 하나님께서 가지신 절대적 사랑의 품성에 기반한 것이므로 그것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롬5:20)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일수록 빛이 더 많이 필요한 것처럼 죄가 많은 곳에 더 많은 은혜를 주어야 공평한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품성대로의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사회가 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그것을 가리켜 선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고,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적게 느끼는 사람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는 것이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 정의입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해지는 것, 요즘 일컬어지는 경제 민주화를 통해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정의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다섯째 날(목) 깊은 바다에
*도입질문: 하나님께서 깊은 바다에 던지시고 다시는 건지길 원치 않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미가 선지자가 이야기 하는 심판은 사람들의 선택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의 선택대로 인정될 때, 그 사람의 선택대로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해 창조 전의 상태인 무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선택하게 되면 그 결과로 하나님과 생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전되어지고 있는 상태의 결과가 영원한 무로 가버리는 것이므로 그런 고정된 시간(심판)이 오기 전에, 되돌릴 수 있는 기회와 은혜의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호소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미 하나님 자신의 피를 통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볼 때에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라는 확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미 용서하셔서 나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으로 생각할 때에 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시는 아버지의 역사를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빌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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