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과 용서해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요나)[교사들을위한강해식과정공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5-06 08:00 조회5,591회 댓글0건첨부파일
- 제06과 용서해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hwp (80.0K) 146회 다운로드 DATE : 2013-05-06 08:00:17
본문
제 6과 용서해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요나)
5월 1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1분
기억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 2:9).
연구범위: 욘 1~4장, 시 139:1~12, 사 42:5, 계 10:6, 마 12:39~41, 대하 36:15~17.
중심 사상: 요나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보다 훨씬 너그럽게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도입)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는데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서 죽여서 가죽을 벗겨서 성벽에 걸어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로 말하면 우리 민족에게 온갖 학대를 자행한 일본에 비길 수도 있고 북한에 비길 수도 있을 것이다.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온갖 테러와 학대를 자행한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다. 부시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악의 축’이었고, 공격의 대상이었다.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나라와 성이었다. 요나는 앗수르의 악독함을 들으며 살아왔고 눈으로 보며 살아왔었다. 그러므로 요나의 가슴은 앗수르를 미워하는 증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요나는 “하나님의 정의가 언제나 이루어질까? 남의 피를 뽑아내던 저 악독한 놈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유황불에 멸망당하게 될까?” 하는 질문들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하나님의 엄정하신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요나는 정의의 칼을 들고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 속히 오기를 기대하는 요나를 상상해 보라. 이런 요나에게 예상 밖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요나야!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라”(요나 1:2). 이 말씀을 들은 요나는 어떤 충격을 받았을까? 당신에게도 요나와 같이 꼭 망하거나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사람이나 단체나 나라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임하여 당신이 가서 그 사람, 그 단체, 또는 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용서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평범치 않은 하나님의 사자 요나의 일화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임박한 멸망을 알리러 요나를 니느웨로 파송하셨다. 그는 과연 이방인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 주실지 의심하였다. 참선지자로서 요나는 하나님의 계획이 니느웨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도망하려고 했던 것이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을 능가하는 힘에 의하여 요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성 전체가 기별을 받아들여 회개하였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과 유다가 거부했던 방식으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요나는 중요한 교훈을 많이 배웠다.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편협하고 고집스런 선지자를 어떻게 인내하며 가르치시는지 그리고 진정한 은혜와 자비와 용서란 무엇인지 보여 주고 있다.
결론 하나님은 선원들, 니느웨 백성들 그리고 선지자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최악의 죄인들에게 열려 있고, 국경을 초월하며, 인간의 이해와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첫째날(일) 불순종하는 선지자(욘 1장)
5월 5일
“그러나 요나가…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교사 강해 1)
니느웨 성을 쳐서 외치라는 말씀은 그 도시의 죄를 회개시켜 그 도시를 멸망에서 구원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성을 구원하고자 하셨고 그 계획을 요나에게 맡겼다. 사실 요나는 니느웨 성이 멸망하기를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도 니느웨 성은 멸망당해야한다. 그처럼 악독한 도시마저 정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정의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도 하나님의 정의를 이야기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악독한 사람이나 단체나 나라가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에게 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과 용서를 전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요나는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수 없었다. 그는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고자 했다. 니느웨 성은 동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다시스는 아득한 서쪽에 있다. 요나는 자기가 니느웨에서 더 먼 곳으로 가버린다면 그만큼 니느웨의 구원은 멀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저 악독한 도시가 하나님의 구원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요나와 그의 가족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왕하 14:25에 따르면 그는 북방 이스라엘에서 살았고 기원전 8세기경에 봉사했으며 북방 왕국의 영토 확장을 예언하였다.
역사적으로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 유역에 위치한 대국 앗시리아의 3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하나님은 만국의 주이시고, 만민이 그분의 책임하에 있기 때문에(암 1~2장), 그분은 선지자 요나를 보내셔서 니느웨에 임박한 멸망을 경고하게 하셨다(욘 1:2).
앗시리아인들의 잔인성은 악명이 높았다. 백 년 후에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를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다고 묘사하였다(나 3:1). 요나는 그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도록 파송되었다. 무엇보다 요나의 행동에 자극을 주었던 것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앗시리아인들에게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니느웨를 향해 동쪽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선지자는 명령을 거부한 채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도망하려고 하였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싫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였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여러 핑계로 하나님에게서 도망한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그분을 개인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경우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 차라리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기적이고 죄 많은 본성에 역행하는 일을 행하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도 그 일을 행하기 싫어서 그분을 회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부가적용)
그는 대풍이 불어 배가 위태한 지경에 처했어도 걱정하지 않았다. 자기가 죽어버리면 니느웨 성에 가서 전도할 사람이 없을 것이요 그러면 그 성은 망하고 말 것이다. ‘두고 봐라. 내가 죽어도 너 니느웨 성을 구하러 가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요나는 제비를 뽑기 전부터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제비에 뽑혀 물에 던져지는 운명에 처했어도 조금도 돌이키지 않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폭풍을 만난 것은 나의 연고인 줄 아노라.” 그가 회개하여 다시 니느웨로 돌아간다면 그 풍랑은 잔잔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을 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요나는 자기가 바다에 던져져서 비참하게 죽더라도 니느웨에 가서 그 성읍을 위하여 회개를 외칠 수는 없다는 결단을 한 것이다. 얼마나 요나의 마음에 니느웨의 멸망이 한이 되었으면 그렇게 하였겠는가? 당신에게도 그렇게 한이 맺힌 대상이 있는가?
교훈: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하였다. 그분의 뜻을 행하기 싫어 하나님을 피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피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12).
| 적용 |
그대는 하나님을 피하려는 계획을 중단하고 어떻게 그분께 순종하기로 결심합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한 요나- “선지자는 이 사명이 어렵고 외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어서 부르신 분의 지혜를 의심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인간의 견해로 볼 때에 이 거만한 도시에 가서 이와 같은 기별을 선포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그는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심을 잊었다. 그가 여전히 주저하고 의심하는 동안에 사탄은 그를 좌절감에 싸이게 했다. 선지자는 큰 공포에 싸여‘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였다”(선지자와 왕, 266).
기도
아버지, 도망가기만 하는 저를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붙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큰 뜻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순종하고 따르기를 원하오니 제 작은 믿음을 받아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내키지 않는 증언
5월 6일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 1:15~16).
교사 강해 2)
요나는 구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정식으로 임명된 첫 선교사이다. 그러나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요나는 며칠을 고민한 후에 드디어 봇짐을 싸서 짊어지고 집을 떠났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가기로 작정하고 욥바로 내려와서 그곳에서 배를 타고 드디어 다시스로 줄행랑을 치게 되었다. 가장 먼 곳으로 도망하기 위해서 다시스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그렇지만 요나가 어떻게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있겠는가? 얼마 가지 않아서 요나가 탄 배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요나가 타고 도망가는 그 배는 큰 풍랑을 만나고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선장은 어떻게 하든지 배를 안전하게 항해하려고 배에 싣고 있던 짐을 다 바닷 속에 던지고 배를 가볍게 했지만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고 배는 아주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 풍랑은 요나의 앞길을 가로 막고,그의 삶의 방향을 돌이키게 했던 풍랑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풍랑이 요나에게 축복이 되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 풍랑을 만나게 하심으로 선지자의 사명을 다시 감당케 하셨다. 그것 때문에 니느웨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었다.
요나 1장에서 여호와는 요나의 탈출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큰 폭풍을 일으키셨다. 배가 좌초할 위기에 처하자 선원들은 각자의 신을 찾았다. 폭풍의 심각성을 보고 그들은 누군가 신을 노엽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것인지 제비를 뽑았다. 제비뽑기를 위해 각자는 자기 소유의 돌이나 나무조각을 가져온다. 그것들을 어떤 통에다 집어넣고 하나가 튀어 나올 때까지 흔든다. 제비뽑기에서 요나의 것이 나왔다. 요나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요구했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에서 요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반면 이방인 선원들은 긍정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이 여러 신을 섬겼을지라도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면서 보여 준 경외심만큼은 대단하였다. 그들은 요나에게 온정을 베풀어 배를 육지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끝내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말에 동의한다. 요나를 던지자, 폭풍이 잔잔해졌고, 선원들은 여호와께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9절에서 요나는 자신이 경외하는 여호와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했는가? 여호와에 대한 설명에서 중요한 사실은 무엇인가?(계 14:7, 사 42:5, 계 10:6 참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눈에서 도망하려는 그의 시도가 헛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마자 폭풍이 잠잠해졌다는 사실은 여호와께서 바다를 지배하는 창조주이심을 드러낸다. 그래서 선원들은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창조주를 두려워하며 경외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는 다시스의 배에 임한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1:8절) 라고 요나에게 말했을 때 요나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나는 육지와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사람이다. 너희가 이 재앙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말이다. 많은 사람들 요나가 믿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러면서 요나에게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할 때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요.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하여 질 것이요.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12절).고 요나는 고백하고 있다. 무리들은 할 수 없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다. 그랬더니 정말 그렇게 무섭도록 몰아치던 풍랑이 아주 잔잔해 졌다. 요나가 증거 한 히브리 여호와 하나님이 자연을 주장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 한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다시스의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요나가 섬기는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고 그분을 섬기기로 서원하고 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그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깊은 터널과 같은 큰 물고기 뱃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는 밤 낮 3일 동안 그곳에서 죽음을 경험하며 회개하였다. 이 회개는 요나의 죽음을 가르친다. 회개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이 회개 후에 하나님께서 요나를 극적으로 살려 주셨다. 회개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요나를 살려 주셨다. 큰 물고기가 니느웨 가까운 육지에 토하였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폭풍을 통해 도망하는 요나를 놓치 않으셨고, 그 과정에서 선원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바다의 주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과거에 방황하는 그대를 하나님이 어떻게 붙잡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젊은 시절 교회의 고리타분한 분위기와 불합리한 모습이 싫어서 신앙을 떠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기성 교인들은 실망만 안겨 주는 모순투성이로 보였을 것입니다. 성경은 지어낸 이야기 같고, 기독교의 꿈은 허황되며, 신앙은 부질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존재마저 확신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떠났다가 삶의 고비에서 다시 하나님을 발견하고 교회로 돌아온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분입니다.
| 적용 |
주변에 방황하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들을 어떻게 돕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경배의 근거- “하나님을 경배할 의무는 그분께서 창조주가 되시며 만물이 그분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이방의 신들보다 나으며 존경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기록할 때마다 반드시 그분의 창조력의 증거를 들어 말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436~437).
기도
의심과 실망에 가득차 아버지 곁을 떠났던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 믿음을 증거 하는 생애를 살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요나의 시
5월 7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배 속에 있으니라”(욘 1:17).
교사 강해 3)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보내신 큰 물고기에 의해 삼키우게 됐다. 그 사건은 오히려 요나에게 구원이 되었다. 즉 풍랑이 심한 바다에서의 익사에서 보존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큰 물고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흔히 고래라고 생각하는데 칠십인역에 번역된 kh'to"(케토스)는 정체가 불분명한 '바다 괴물'(창1:21 ; 욥7:12 ; 시74:13)을 뜻한다.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약 400여 종의 상어 가운데서 몸의 크기만을 고려해 볼 때 사람을 삼킬 수 있는 큰 상어는 고래상어(Rhincodon typus), 돌묵상어(Cetorhinus maximus), 큰입상어(Megachasma pelagios), 백상아리(Carcharodon carcharias), 뱀상어(Galeocerdo cuvier), 기타 흉상어류 등 약 10종정도가 있다. 고래상어와 큰입상어, 돌묵상어는 플랑크톤과 작은 물고기 등을 먹이로 하므로 생태적으로 사람을 삼킬 가능성은 매우 적다. 백상아리의 먹이는 고래와 물개, 바다사자, 바다표범 등 해산포유류이다. 백상아리는 매우 난폭한 상어로 영화 「죠스」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와 세계적으로 바다에서 희생자를 내고 있는 사나운 상어이다. 따라서 백상아리와 뱀상어(Galeocerdo cuvier), 일부 흉상어류(Carcharhinidae)가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상어에 포함된다. 그러나 상어의 세계적인 분포로 볼 때 뱀상어와 흉상어류는 북위 40。 미만의 열대해역에 분포하는 어종이다. 요나가 욥바에서 배를 타고 가려던 다시스는 오늘날의 스페인으로 당시 광물이 풍부하고 무역이 성행하던 곳이다. 따라서 요나가 타고 있던 배는 지중해를 항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상어 가운데 지중해 연안에 서식하는 대형 상어는 백상아리이기 때문에 역시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백상아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물고기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 였기 때문이다.
요나가 바다에 빠지자,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켰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야 할 사명에서 도망할 길은 이제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큰 물고기는 선지자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였다. 요나와 달리 이 동물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이고 순종적으로 반응하였다(욘 1:17, 2:10).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운 방식으로 작동했다. 비록 이 이야기를 비웃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 진실성을 증언하셨고(마 12:40), 심지어 요나의 표적을 들어 자신의 죽음과 육체적 부활을 언급하셨다.
요나 2장은 요나의 시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는 무엇을 깨달았나? 이 장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 원리를 배워야 하는가?
요나의 시는 깊은 바다로부터 구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이는 요나서의 유일한 운문이다. 시 속에서 요나는 깊은 바다에 잠겨 죽음을 앞두고 드렸던 기도를 떠올린다.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시는 요나가 성경의 시편과 찬양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요나의 서원은 감사의 제사로 구성된 듯 보인다. 그는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 주신 특별한 자비를 감사하게 여겼다. 그는 불순종했지만 이전에 절대로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에게 성격적인 결함이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다.
부가적용)
요나의 이야기는 성경에 아이들을 위해 기록된 이야기 동화책이 아니다. 이것은 영생의 이야기이며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에 대한 구속의 이야기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 경험은 땅속에 들어가 죽었다가 다시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고 말씀하신 것에서처럼 바다는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다. 요나는 자신들의 원수들에게 심판의 기별을 전하는 것을 피해 달아났지만 우리 주님은 심판 받을 이 지구 땅에 그 스스로 찾아 오셔서 이 온 인류, 즉 니느웨와 같은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심판의 기별을 전하셨다. 자신을 믿고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자비의 심판의 기별을 전하고 계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올린 요나를 구원해 주셨고 그는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수렁에서 그대를 건져내신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고 있습니까?
요나는 무덤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거기서 건져 내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왔을 때 요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아직 많은 결점이 있었지만 그는 분명 과거와 다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찬양이란 바로 우리의 변화된 삶일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드러내는 삶처럼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 적용 |
과거보다 더 큰 시련이 온다면 그대는 어떤 믿음과 소망으로 그것을 극복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 “열렬하게 쉬지 말고 기도하고 기도하라. 그러나,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하나님의 품성이 어떠함을 증거 해야 한다. 그대는 주님을 찬미할 수 있으며, 붙들어 주시는 은혜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다. …우리는 마음과 심령과 음성을 합하여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시107:8)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증언보감 2권, 111).
기도
인자하신 아버지, 저를 사망과 절망의 늪에서 건져 주시니 감사합니다. 죽은 자와 다름 없는 저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주를 찬송해야 할지 알지 못하나 주를 위해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날(수) 성공적인 사명 완수
5월 8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욘 3:4~6).
교사강해 4)
요나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외침은 니느웨 온 성으로 퍼져 나갔다. 백성들이 요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사건이 니느웨의 왕에게 알려지자 왕도 즉시 회개하고 조서를 내려 백성들 모두 철저한 회개를 하도록 하였다. 니느웨 백성들을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를 입었다고 전한다. 이 같은 행동은 하나님에게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들은 하나님은 이를 받아들여 니느웨를 멸하고자 하는 계획을 돌이키셨다.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는 니느웨의 왕이 그 백성들이 요나를 통하여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도 회개하는 장면이다. '굵은 베를 입는다'는 것을 다른 곳에서는 '굵은 베를 동인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굵은 베로 허리와 어깨를 감는 것으로서 극한 슬픔을 나타내는 관습의 일종이었다. 또한 온 니느웨에 조서를 내려 물도 금하며 금식하고,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다. 하나님의 니느웨를 향한 벌하심의 뜻이 돌이켜 지기를 바라며 간절히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니느웨의 돌이킴을 보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진정한 회개의 마음을 보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을 감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요나는 기적적인 구원을 받고 니느웨로 가서 기별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다. 요나는 심판의 기별을 선포하면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연상케 하는 언어를 사용하였다(욘 3:1~4, 창 19장 참고). 그러나 원어를 보면 “무너지리라”(창 19:21, 29, 욘 3:4)고 번역된 단어는 ‘돌아서다’ 또는 ‘변화되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출 7:17, 20, 삼상 10:6).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기별은 헛되지 않았다.
선지자로서 요나의 경력 가운데 최고의 업적은 니느웨의 회개였다. 요나서에서 니느웨 사람들은 선원들 이후 결점 많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반응하여 하나님께 돌아선 두 번째 집단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기 위하여 니느웨 사람들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금식하였다. 이 모든 것은 슬픔과 참회의 외적인 표현이었다.
마 12:39~41과 대하 36:15~17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회개의 중요성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가?
강대국 앗시리아의 군주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재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은 회개하라는 선지자의 호소를 완고하게 거절했던 수많은 이스라엘의 교만한 통치자들과 백성들에게 하나의 날카로운 견책이 되었다. 요나서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강조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매년 속죄일이 절정에 달하는 시간에 요나서를 읽는다. 왜냐하면 그날은 우리의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경축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사무엘상 16장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진정한 뉘우침과 돌이킴을 보셨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셨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다고 10절은 말씀한다. 요나를 구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님의 뜻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은 이제 니느웨 사람들도 죄악과 범죄함에서 돌이키게 하셨다. 그들의 진정한 회개를 보시고,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자들로 변화시켜 주셨다. 니느웨는 이방인 나라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의 나라까지 전해지며,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요나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다. 하나님은 온 인류 구원의 계획을 위한 크고 놀라운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다.
교훈: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기별을 듣고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어 멸망을 경고하게 하신 목적이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이 시대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기별을 듣는다면 과연 회개할까요?
기온 이상, 자연재해, 방사능 오염, 전쟁과 사고 등으로 현대인은 공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도 불안감을 가중시킵니다. 게다가 질병과 가계부채 증가로 개인들의 삶은 황폐해지고, 유명인들의 자살이 이어지면서 사회적 분위기 또한 암울합니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입니다. 물질문명과 죄로 물든 그들의 마음은 용서와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이 만든 거짓 왕국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서리라는 소망이 그들에게 제시되어야 합니다.
| 적용 |
그대가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다. 그분은 오래 참으심과 자비로써 범법자들을 대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을 익힐 기회가 많지만, 하나님은 폭력과 범죄가 지배하는 사악한 도시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시지 못한다. 그 도시들의 백성들이 니느웨의 거주자들처럼 회개했더라면 요나서와 같은 기별들이 더 많이 제시되었을 것이다”(The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 , 1906년 10월 18일).
기도
아버지, 진리를 알면서 그대로 살지도 않고 전하지도 않는 우리에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다음 영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와 소망의 기별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다섯 째날(목) 용서받았지만 용서 못하는
5월 9일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3~4, 11).
도입)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구원을 받아 자신의 비뚤어진 마음을 회개하고 다시 소명을 받은 후 니느웨로 갔다. 그는 거기서 '하룻길을 행하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다. 그 결과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고'(3:5) 회개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한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을 본 요나는 심히 분하고 노했다. 그래서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했다'고 하였다. 그는 심지어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하였다. 요나는 하나님의 강요에 의해 니느웨에 와서 회개를 외쳤지만, 속으로는 적국의 수도가 천재지변이나 더 강한 군대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나게 잘못되고 편협한 민족주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요나는 자기의 생각,자기의 기대대로 니느웨가 멸망치 않자 하나님 앞에서 원망의 말을 내뱉고 더 나아가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기를 청하고 있다. 니느웨의 모든 백성이 회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며 용서받은 것은 요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충격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동안 앗수르가 저질러 온 만행과 포악한 행동 등은 요나에게 았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나는 그처럼 악독한자들은 진멸되는 것이 분명 정의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철회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햐나님의 행사는 요나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요나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 그 있는 감정 그대로를 노출 시키며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내뱉기까지 하였다.
요나 4장을 읽어 보라. 요나는 어떤 중요한 교훈들을 배워야 했는가? 그의 위선적 태도는 어떻게 드러났는가? 요나 4장은 선지자에 관한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증언하기보다 차라리 죽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에 죽음에서 구원을 얻어 기뻐했었는데 니느웨가 용서를 받자 이제는 죽기를 구했다(욘 4:2~3).
요나의 태도와 다르게 성경에서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분으로 묘사된다(겔 33:11). 요나와 그의 동포들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는 감사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적국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기를 바랐다. 요나서의 기별은 바로 이러한 굳은 마음을 혹독하게 견책하고 있다.
요나의 실수를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편견은 복음 전파에 얼마나 해로운가? 요나서를 통해 우리는 선지자의 정신과 어긋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 요나는 반역적인 정신과 잘못된 우선순위를 가진 선지자였다. 그는 편협하고 성질이 고약했다. 그는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보이신 자비를 환영하는 대신 이기적이고 악한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분개하였다.
요나의 최후진술은 죽게 해 달라는 요구였으나(욘 4:8~9), 하나님의 최후 진술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삶에 대한 증언이었다.
요나서는 결말이 없이 끝난다. 요나서의 마지막 절은 독자들에게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진다. 니느웨 사람들의 기적적인 심령의 변화가 결국 요나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을까?
부가적용)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분노를 폭발시킨다. 요나 자신은 하나님의 낯(얼굴)을 피해 도망가는 다시스의 길에서 구원을 받았다. 폭풍이 부는 바다와 배에서 구원을 받았다. 물결이 에워싸는 깊은 바다 속에서도 구원을 받았다. 큰물고기 배속에서도 구원을 받았다. 자기는 구원 받은 일에 정당하고 다른 사람이 구원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인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갚지 않는 사람을 때리며 갚으라고 한 사람이야기가 생각난다(마18:21~35). 혼자만 구원 받겠다는 생각은 영적인 교만이다. 내가 용서 받았음으로 용서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용서 받았다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용서받아야 할 대상임을 알아야 한다. 구원을 경험한 요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하는 요나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자기의 생각과 민족주의와 선민의식을 내려놓지 못한다. 신학적 인본주의로 똘똘 뭉친 것 같다. 요나의 자아는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들 정도로 의로운척한다. 그래서 끝가지 하나님과 평행선을 그으며, 니느웨에 대한 용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한다. 요나의 마음에는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받아야할 대상이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들도 구원 받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우리 역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교훈: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도 구원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하여 자신의 편견을 버려야 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에게 요나와 같은 편견과 편협함은 없습니까?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만 일하시고 다른 곳에는 없는 분처럼 생각합니다. 참 감동적인 사연을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우리 교인이 아닌 다른 개신교인의 이야기일 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고, 어떤 개신교회의 부흥을 보고 진리가 없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부흥은 거짓 부흥일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우리 역시 요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 적용 |
그대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버려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모든 장벽을 헐어 버리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장벽과 이기심과 민족 차별의 편견을 헐어 버리시고, 모든 인간 가족을 위한 사랑을 가르치신다. 그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기심 때문에 달라붙어 있던 좁은 범위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모든 경계선과 사회의 모든 인위적 차이를 철폐하신다. 그분은 이방인과 이웃, 친구와 원수를 구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가난한 사람을 우리의 이웃으로, 세상을 우리의 일터로 여기도록 가르치신다”(산상보훈, 42).
기도
아버지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데, 우리는 아버지를 우리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아끼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아끼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넓고 크신 사랑을 배우고 싶습니다.
여섯째날(금)
5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분께 도움을 호소할 수 있는 귀한 특권을 가진다. 장소가 얼마나 부적합한가는 상관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귀는 그의 외침에 열려 있다. 아무리 황량하고 캄캄한 장소라 할지라도 그곳은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에 의해 실제적인 성전으로 바뀔 수 있다”(재림교회 성경주석 8권, 726).
“그는 니느웨를 아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성읍을 경고하여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취하였다. 비록 예언한 사건은 성취되지 않았을지라도 경고의 기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기별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적을 성취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은 이방인 중에 나타났다”(선지자와 왕, 272~27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요나서는 천연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연재해로 그대의 친구가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는 천연계를 파괴하고 인명을 앗아가는 재해를 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천연계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에게 설명하겠습니까?
2. 요나서의 마지막 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온 세상 구석구석에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됩니까?
3. 마 18:21~35의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용서를 취소하고 종을 감옥에 가두었던 화난 임금과 하나님을 비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용서를 취소하시는 분입니까?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그런 분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세속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은 사람이 산 채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그 이야기의 사실성을 증언해 주셨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를 비춰 볼 때, 세계에 대하여 반초자연적 견해는 얼마나 편협하고 제한적입니까?
5월 1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1분
기억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 2:9).
연구범위: 욘 1~4장, 시 139:1~12, 사 42:5, 계 10:6, 마 12:39~41, 대하 36:15~17.
중심 사상: 요나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보다 훨씬 너그럽게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도입)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는데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서 죽여서 가죽을 벗겨서 성벽에 걸어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로 말하면 우리 민족에게 온갖 학대를 자행한 일본에 비길 수도 있고 북한에 비길 수도 있을 것이다.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온갖 테러와 학대를 자행한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다. 부시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악의 축’이었고, 공격의 대상이었다.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나라와 성이었다. 요나는 앗수르의 악독함을 들으며 살아왔고 눈으로 보며 살아왔었다. 그러므로 요나의 가슴은 앗수르를 미워하는 증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요나는 “하나님의 정의가 언제나 이루어질까? 남의 피를 뽑아내던 저 악독한 놈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유황불에 멸망당하게 될까?” 하는 질문들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하나님의 엄정하신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요나는 정의의 칼을 들고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 속히 오기를 기대하는 요나를 상상해 보라. 이런 요나에게 예상 밖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요나야!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라”(요나 1:2). 이 말씀을 들은 요나는 어떤 충격을 받았을까? 당신에게도 요나와 같이 꼭 망하거나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사람이나 단체나 나라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임하여 당신이 가서 그 사람, 그 단체, 또는 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용서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평범치 않은 하나님의 사자 요나의 일화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임박한 멸망을 알리러 요나를 니느웨로 파송하셨다. 그는 과연 이방인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 주실지 의심하였다. 참선지자로서 요나는 하나님의 계획이 니느웨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도망하려고 했던 것이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을 능가하는 힘에 의하여 요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성 전체가 기별을 받아들여 회개하였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과 유다가 거부했던 방식으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요나는 중요한 교훈을 많이 배웠다.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편협하고 고집스런 선지자를 어떻게 인내하며 가르치시는지 그리고 진정한 은혜와 자비와 용서란 무엇인지 보여 주고 있다.
결론 하나님은 선원들, 니느웨 백성들 그리고 선지자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최악의 죄인들에게 열려 있고, 국경을 초월하며, 인간의 이해와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첫째날(일) 불순종하는 선지자(욘 1장)
5월 5일
“그러나 요나가…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교사 강해 1)
니느웨 성을 쳐서 외치라는 말씀은 그 도시의 죄를 회개시켜 그 도시를 멸망에서 구원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성을 구원하고자 하셨고 그 계획을 요나에게 맡겼다. 사실 요나는 니느웨 성이 멸망하기를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도 니느웨 성은 멸망당해야한다. 그처럼 악독한 도시마저 정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정의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도 하나님의 정의를 이야기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악독한 사람이나 단체나 나라가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에게 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과 용서를 전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요나는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수 없었다. 그는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고자 했다. 니느웨 성은 동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다시스는 아득한 서쪽에 있다. 요나는 자기가 니느웨에서 더 먼 곳으로 가버린다면 그만큼 니느웨의 구원은 멀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저 악독한 도시가 하나님의 구원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요나와 그의 가족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왕하 14:25에 따르면 그는 북방 이스라엘에서 살았고 기원전 8세기경에 봉사했으며 북방 왕국의 영토 확장을 예언하였다.
역사적으로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 유역에 위치한 대국 앗시리아의 3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하나님은 만국의 주이시고, 만민이 그분의 책임하에 있기 때문에(암 1~2장), 그분은 선지자 요나를 보내셔서 니느웨에 임박한 멸망을 경고하게 하셨다(욘 1:2).
앗시리아인들의 잔인성은 악명이 높았다. 백 년 후에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를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다고 묘사하였다(나 3:1). 요나는 그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도록 파송되었다. 무엇보다 요나의 행동에 자극을 주었던 것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앗시리아인들에게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니느웨를 향해 동쪽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선지자는 명령을 거부한 채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도망하려고 하였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싫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였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여러 핑계로 하나님에게서 도망한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그분을 개인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경우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 차라리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기적이고 죄 많은 본성에 역행하는 일을 행하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도 그 일을 행하기 싫어서 그분을 회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부가적용)
그는 대풍이 불어 배가 위태한 지경에 처했어도 걱정하지 않았다. 자기가 죽어버리면 니느웨 성에 가서 전도할 사람이 없을 것이요 그러면 그 성은 망하고 말 것이다. ‘두고 봐라. 내가 죽어도 너 니느웨 성을 구하러 가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요나는 제비를 뽑기 전부터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제비에 뽑혀 물에 던져지는 운명에 처했어도 조금도 돌이키지 않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폭풍을 만난 것은 나의 연고인 줄 아노라.” 그가 회개하여 다시 니느웨로 돌아간다면 그 풍랑은 잔잔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을 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요나는 자기가 바다에 던져져서 비참하게 죽더라도 니느웨에 가서 그 성읍을 위하여 회개를 외칠 수는 없다는 결단을 한 것이다. 얼마나 요나의 마음에 니느웨의 멸망이 한이 되었으면 그렇게 하였겠는가? 당신에게도 그렇게 한이 맺힌 대상이 있는가?
교훈: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하였다. 그분의 뜻을 행하기 싫어 하나님을 피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피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12).
| 적용 |
그대는 하나님을 피하려는 계획을 중단하고 어떻게 그분께 순종하기로 결심합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한 요나- “선지자는 이 사명이 어렵고 외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어서 부르신 분의 지혜를 의심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인간의 견해로 볼 때에 이 거만한 도시에 가서 이와 같은 기별을 선포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그는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심을 잊었다. 그가 여전히 주저하고 의심하는 동안에 사탄은 그를 좌절감에 싸이게 했다. 선지자는 큰 공포에 싸여‘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였다”(선지자와 왕, 266).
기도
아버지, 도망가기만 하는 저를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붙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큰 뜻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순종하고 따르기를 원하오니 제 작은 믿음을 받아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내키지 않는 증언
5월 6일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 1:15~16).
교사 강해 2)
요나는 구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정식으로 임명된 첫 선교사이다. 그러나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요나는 며칠을 고민한 후에 드디어 봇짐을 싸서 짊어지고 집을 떠났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가기로 작정하고 욥바로 내려와서 그곳에서 배를 타고 드디어 다시스로 줄행랑을 치게 되었다. 가장 먼 곳으로 도망하기 위해서 다시스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그렇지만 요나가 어떻게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있겠는가? 얼마 가지 않아서 요나가 탄 배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요나가 타고 도망가는 그 배는 큰 풍랑을 만나고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선장은 어떻게 하든지 배를 안전하게 항해하려고 배에 싣고 있던 짐을 다 바닷 속에 던지고 배를 가볍게 했지만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고 배는 아주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 풍랑은 요나의 앞길을 가로 막고,그의 삶의 방향을 돌이키게 했던 풍랑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풍랑이 요나에게 축복이 되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 풍랑을 만나게 하심으로 선지자의 사명을 다시 감당케 하셨다. 그것 때문에 니느웨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었다.
요나 1장에서 여호와는 요나의 탈출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큰 폭풍을 일으키셨다. 배가 좌초할 위기에 처하자 선원들은 각자의 신을 찾았다. 폭풍의 심각성을 보고 그들은 누군가 신을 노엽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것인지 제비를 뽑았다. 제비뽑기를 위해 각자는 자기 소유의 돌이나 나무조각을 가져온다. 그것들을 어떤 통에다 집어넣고 하나가 튀어 나올 때까지 흔든다. 제비뽑기에서 요나의 것이 나왔다. 요나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요구했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에서 요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반면 이방인 선원들은 긍정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이 여러 신을 섬겼을지라도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면서 보여 준 경외심만큼은 대단하였다. 그들은 요나에게 온정을 베풀어 배를 육지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끝내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말에 동의한다. 요나를 던지자, 폭풍이 잔잔해졌고, 선원들은 여호와께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9절에서 요나는 자신이 경외하는 여호와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했는가? 여호와에 대한 설명에서 중요한 사실은 무엇인가?(계 14:7, 사 42:5, 계 10:6 참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눈에서 도망하려는 그의 시도가 헛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마자 폭풍이 잠잠해졌다는 사실은 여호와께서 바다를 지배하는 창조주이심을 드러낸다. 그래서 선원들은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창조주를 두려워하며 경외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는 다시스의 배에 임한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1:8절) 라고 요나에게 말했을 때 요나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나는 육지와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사람이다. 너희가 이 재앙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말이다. 많은 사람들 요나가 믿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러면서 요나에게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할 때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요.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하여 질 것이요.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12절).고 요나는 고백하고 있다. 무리들은 할 수 없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다. 그랬더니 정말 그렇게 무섭도록 몰아치던 풍랑이 아주 잔잔해 졌다. 요나가 증거 한 히브리 여호와 하나님이 자연을 주장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 한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다시스의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요나가 섬기는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고 그분을 섬기기로 서원하고 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그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깊은 터널과 같은 큰 물고기 뱃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는 밤 낮 3일 동안 그곳에서 죽음을 경험하며 회개하였다. 이 회개는 요나의 죽음을 가르친다. 회개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이 회개 후에 하나님께서 요나를 극적으로 살려 주셨다. 회개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요나를 살려 주셨다. 큰 물고기가 니느웨 가까운 육지에 토하였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폭풍을 통해 도망하는 요나를 놓치 않으셨고, 그 과정에서 선원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바다의 주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과거에 방황하는 그대를 하나님이 어떻게 붙잡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젊은 시절 교회의 고리타분한 분위기와 불합리한 모습이 싫어서 신앙을 떠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기성 교인들은 실망만 안겨 주는 모순투성이로 보였을 것입니다. 성경은 지어낸 이야기 같고, 기독교의 꿈은 허황되며, 신앙은 부질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존재마저 확신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떠났다가 삶의 고비에서 다시 하나님을 발견하고 교회로 돌아온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분입니다.
| 적용 |
주변에 방황하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들을 어떻게 돕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경배의 근거- “하나님을 경배할 의무는 그분께서 창조주가 되시며 만물이 그분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이방의 신들보다 나으며 존경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기록할 때마다 반드시 그분의 창조력의 증거를 들어 말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436~437).
기도
의심과 실망에 가득차 아버지 곁을 떠났던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 믿음을 증거 하는 생애를 살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요나의 시
5월 7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배 속에 있으니라”(욘 1:17).
교사 강해 3)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보내신 큰 물고기에 의해 삼키우게 됐다. 그 사건은 오히려 요나에게 구원이 되었다. 즉 풍랑이 심한 바다에서의 익사에서 보존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큰 물고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흔히 고래라고 생각하는데 칠십인역에 번역된 kh'to"(케토스)는 정체가 불분명한 '바다 괴물'(창1:21 ; 욥7:12 ; 시74:13)을 뜻한다.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약 400여 종의 상어 가운데서 몸의 크기만을 고려해 볼 때 사람을 삼킬 수 있는 큰 상어는 고래상어(Rhincodon typus), 돌묵상어(Cetorhinus maximus), 큰입상어(Megachasma pelagios), 백상아리(Carcharodon carcharias), 뱀상어(Galeocerdo cuvier), 기타 흉상어류 등 약 10종정도가 있다. 고래상어와 큰입상어, 돌묵상어는 플랑크톤과 작은 물고기 등을 먹이로 하므로 생태적으로 사람을 삼킬 가능성은 매우 적다. 백상아리의 먹이는 고래와 물개, 바다사자, 바다표범 등 해산포유류이다. 백상아리는 매우 난폭한 상어로 영화 「죠스」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와 세계적으로 바다에서 희생자를 내고 있는 사나운 상어이다. 따라서 백상아리와 뱀상어(Galeocerdo cuvier), 일부 흉상어류(Carcharhinidae)가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상어에 포함된다. 그러나 상어의 세계적인 분포로 볼 때 뱀상어와 흉상어류는 북위 40。 미만의 열대해역에 분포하는 어종이다. 요나가 욥바에서 배를 타고 가려던 다시스는 오늘날의 스페인으로 당시 광물이 풍부하고 무역이 성행하던 곳이다. 따라서 요나가 타고 있던 배는 지중해를 항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상어 가운데 지중해 연안에 서식하는 대형 상어는 백상아리이기 때문에 역시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백상아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물고기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 였기 때문이다.
요나가 바다에 빠지자,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켰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야 할 사명에서 도망할 길은 이제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큰 물고기는 선지자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였다. 요나와 달리 이 동물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이고 순종적으로 반응하였다(욘 1:17, 2:10).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운 방식으로 작동했다. 비록 이 이야기를 비웃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 진실성을 증언하셨고(마 12:40), 심지어 요나의 표적을 들어 자신의 죽음과 육체적 부활을 언급하셨다.
요나 2장은 요나의 시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는 무엇을 깨달았나? 이 장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 원리를 배워야 하는가?
요나의 시는 깊은 바다로부터 구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이는 요나서의 유일한 운문이다. 시 속에서 요나는 깊은 바다에 잠겨 죽음을 앞두고 드렸던 기도를 떠올린다.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시는 요나가 성경의 시편과 찬양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요나의 서원은 감사의 제사로 구성된 듯 보인다. 그는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 주신 특별한 자비를 감사하게 여겼다. 그는 불순종했지만 이전에 절대로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에게 성격적인 결함이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다.
부가적용)
요나의 이야기는 성경에 아이들을 위해 기록된 이야기 동화책이 아니다. 이것은 영생의 이야기이며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에 대한 구속의 이야기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 경험은 땅속에 들어가 죽었다가 다시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고 말씀하신 것에서처럼 바다는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다. 요나는 자신들의 원수들에게 심판의 기별을 전하는 것을 피해 달아났지만 우리 주님은 심판 받을 이 지구 땅에 그 스스로 찾아 오셔서 이 온 인류, 즉 니느웨와 같은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심판의 기별을 전하셨다. 자신을 믿고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자비의 심판의 기별을 전하고 계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올린 요나를 구원해 주셨고 그는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수렁에서 그대를 건져내신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고 있습니까?
요나는 무덤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거기서 건져 내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왔을 때 요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아직 많은 결점이 있었지만 그는 분명 과거와 다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찬양이란 바로 우리의 변화된 삶일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드러내는 삶처럼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 적용 |
과거보다 더 큰 시련이 온다면 그대는 어떤 믿음과 소망으로 그것을 극복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 “열렬하게 쉬지 말고 기도하고 기도하라. 그러나,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하나님의 품성이 어떠함을 증거 해야 한다. 그대는 주님을 찬미할 수 있으며, 붙들어 주시는 은혜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다. …우리는 마음과 심령과 음성을 합하여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시107:8)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증언보감 2권, 111).
기도
인자하신 아버지, 저를 사망과 절망의 늪에서 건져 주시니 감사합니다. 죽은 자와 다름 없는 저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주를 찬송해야 할지 알지 못하나 주를 위해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날(수) 성공적인 사명 완수
5월 8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욘 3:4~6).
교사강해 4)
요나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외침은 니느웨 온 성으로 퍼져 나갔다. 백성들이 요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사건이 니느웨의 왕에게 알려지자 왕도 즉시 회개하고 조서를 내려 백성들 모두 철저한 회개를 하도록 하였다. 니느웨 백성들을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를 입었다고 전한다. 이 같은 행동은 하나님에게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들은 하나님은 이를 받아들여 니느웨를 멸하고자 하는 계획을 돌이키셨다.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는 니느웨의 왕이 그 백성들이 요나를 통하여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도 회개하는 장면이다. '굵은 베를 입는다'는 것을 다른 곳에서는 '굵은 베를 동인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굵은 베로 허리와 어깨를 감는 것으로서 극한 슬픔을 나타내는 관습의 일종이었다. 또한 온 니느웨에 조서를 내려 물도 금하며 금식하고,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다. 하나님의 니느웨를 향한 벌하심의 뜻이 돌이켜 지기를 바라며 간절히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니느웨의 돌이킴을 보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진정한 회개의 마음을 보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을 감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요나는 기적적인 구원을 받고 니느웨로 가서 기별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다. 요나는 심판의 기별을 선포하면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연상케 하는 언어를 사용하였다(욘 3:1~4, 창 19장 참고). 그러나 원어를 보면 “무너지리라”(창 19:21, 29, 욘 3:4)고 번역된 단어는 ‘돌아서다’ 또는 ‘변화되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출 7:17, 20, 삼상 10:6).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기별은 헛되지 않았다.
선지자로서 요나의 경력 가운데 최고의 업적은 니느웨의 회개였다. 요나서에서 니느웨 사람들은 선원들 이후 결점 많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반응하여 하나님께 돌아선 두 번째 집단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기 위하여 니느웨 사람들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금식하였다. 이 모든 것은 슬픔과 참회의 외적인 표현이었다.
마 12:39~41과 대하 36:15~17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회개의 중요성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가?
강대국 앗시리아의 군주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재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은 회개하라는 선지자의 호소를 완고하게 거절했던 수많은 이스라엘의 교만한 통치자들과 백성들에게 하나의 날카로운 견책이 되었다. 요나서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강조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매년 속죄일이 절정에 달하는 시간에 요나서를 읽는다. 왜냐하면 그날은 우리의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경축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사무엘상 16장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진정한 뉘우침과 돌이킴을 보셨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셨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다고 10절은 말씀한다. 요나를 구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님의 뜻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은 이제 니느웨 사람들도 죄악과 범죄함에서 돌이키게 하셨다. 그들의 진정한 회개를 보시고,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자들로 변화시켜 주셨다. 니느웨는 이방인 나라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의 나라까지 전해지며,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요나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다. 하나님은 온 인류 구원의 계획을 위한 크고 놀라운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다.
교훈: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기별을 듣고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어 멸망을 경고하게 하신 목적이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이 시대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기별을 듣는다면 과연 회개할까요?
기온 이상, 자연재해, 방사능 오염, 전쟁과 사고 등으로 현대인은 공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도 불안감을 가중시킵니다. 게다가 질병과 가계부채 증가로 개인들의 삶은 황폐해지고, 유명인들의 자살이 이어지면서 사회적 분위기 또한 암울합니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입니다. 물질문명과 죄로 물든 그들의 마음은 용서와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이 만든 거짓 왕국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서리라는 소망이 그들에게 제시되어야 합니다.
| 적용 |
그대가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다. 그분은 오래 참으심과 자비로써 범법자들을 대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을 익힐 기회가 많지만, 하나님은 폭력과 범죄가 지배하는 사악한 도시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시지 못한다. 그 도시들의 백성들이 니느웨의 거주자들처럼 회개했더라면 요나서와 같은 기별들이 더 많이 제시되었을 것이다”(The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 , 1906년 10월 18일).
기도
아버지, 진리를 알면서 그대로 살지도 않고 전하지도 않는 우리에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다음 영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와 소망의 기별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다섯 째날(목) 용서받았지만 용서 못하는
5월 9일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3~4, 11).
도입)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구원을 받아 자신의 비뚤어진 마음을 회개하고 다시 소명을 받은 후 니느웨로 갔다. 그는 거기서 '하룻길을 행하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다. 그 결과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고'(3:5) 회개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한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을 본 요나는 심히 분하고 노했다. 그래서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했다'고 하였다. 그는 심지어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하였다. 요나는 하나님의 강요에 의해 니느웨에 와서 회개를 외쳤지만, 속으로는 적국의 수도가 천재지변이나 더 강한 군대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나게 잘못되고 편협한 민족주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요나는 자기의 생각,자기의 기대대로 니느웨가 멸망치 않자 하나님 앞에서 원망의 말을 내뱉고 더 나아가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기를 청하고 있다. 니느웨의 모든 백성이 회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며 용서받은 것은 요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충격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동안 앗수르가 저질러 온 만행과 포악한 행동 등은 요나에게 았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나는 그처럼 악독한자들은 진멸되는 것이 분명 정의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철회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햐나님의 행사는 요나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요나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 그 있는 감정 그대로를 노출 시키며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내뱉기까지 하였다.
요나 4장을 읽어 보라. 요나는 어떤 중요한 교훈들을 배워야 했는가? 그의 위선적 태도는 어떻게 드러났는가? 요나 4장은 선지자에 관한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증언하기보다 차라리 죽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에 죽음에서 구원을 얻어 기뻐했었는데 니느웨가 용서를 받자 이제는 죽기를 구했다(욘 4:2~3).
요나의 태도와 다르게 성경에서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분으로 묘사된다(겔 33:11). 요나와 그의 동포들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는 감사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적국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기를 바랐다. 요나서의 기별은 바로 이러한 굳은 마음을 혹독하게 견책하고 있다.
요나의 실수를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편견은 복음 전파에 얼마나 해로운가? 요나서를 통해 우리는 선지자의 정신과 어긋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 요나는 반역적인 정신과 잘못된 우선순위를 가진 선지자였다. 그는 편협하고 성질이 고약했다. 그는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보이신 자비를 환영하는 대신 이기적이고 악한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분개하였다.
요나의 최후진술은 죽게 해 달라는 요구였으나(욘 4:8~9), 하나님의 최후 진술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삶에 대한 증언이었다.
요나서는 결말이 없이 끝난다. 요나서의 마지막 절은 독자들에게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진다. 니느웨 사람들의 기적적인 심령의 변화가 결국 요나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을까?
부가적용)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분노를 폭발시킨다. 요나 자신은 하나님의 낯(얼굴)을 피해 도망가는 다시스의 길에서 구원을 받았다. 폭풍이 부는 바다와 배에서 구원을 받았다. 물결이 에워싸는 깊은 바다 속에서도 구원을 받았다. 큰물고기 배속에서도 구원을 받았다. 자기는 구원 받은 일에 정당하고 다른 사람이 구원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인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갚지 않는 사람을 때리며 갚으라고 한 사람이야기가 생각난다(마18:21~35). 혼자만 구원 받겠다는 생각은 영적인 교만이다. 내가 용서 받았음으로 용서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용서 받았다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용서받아야 할 대상임을 알아야 한다. 구원을 경험한 요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하는 요나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자기의 생각과 민족주의와 선민의식을 내려놓지 못한다. 신학적 인본주의로 똘똘 뭉친 것 같다. 요나의 자아는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들 정도로 의로운척한다. 그래서 끝가지 하나님과 평행선을 그으며, 니느웨에 대한 용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한다. 요나의 마음에는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받아야할 대상이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들도 구원 받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우리 역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교훈: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도 구원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하여 자신의 편견을 버려야 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에게 요나와 같은 편견과 편협함은 없습니까?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만 일하시고 다른 곳에는 없는 분처럼 생각합니다. 참 감동적인 사연을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우리 교인이 아닌 다른 개신교인의 이야기일 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고, 어떤 개신교회의 부흥을 보고 진리가 없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부흥은 거짓 부흥일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우리 역시 요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 적용 |
그대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버려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모든 장벽을 헐어 버리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장벽과 이기심과 민족 차별의 편견을 헐어 버리시고, 모든 인간 가족을 위한 사랑을 가르치신다. 그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기심 때문에 달라붙어 있던 좁은 범위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모든 경계선과 사회의 모든 인위적 차이를 철폐하신다. 그분은 이방인과 이웃, 친구와 원수를 구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가난한 사람을 우리의 이웃으로, 세상을 우리의 일터로 여기도록 가르치신다”(산상보훈, 42).
기도
아버지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데, 우리는 아버지를 우리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아끼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아끼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넓고 크신 사랑을 배우고 싶습니다.
여섯째날(금)
5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분께 도움을 호소할 수 있는 귀한 특권을 가진다. 장소가 얼마나 부적합한가는 상관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귀는 그의 외침에 열려 있다. 아무리 황량하고 캄캄한 장소라 할지라도 그곳은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에 의해 실제적인 성전으로 바뀔 수 있다”(재림교회 성경주석 8권, 726).
“그는 니느웨를 아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성읍을 경고하여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취하였다. 비록 예언한 사건은 성취되지 않았을지라도 경고의 기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기별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적을 성취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은 이방인 중에 나타났다”(선지자와 왕, 272~27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요나서는 천연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연재해로 그대의 친구가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는 천연계를 파괴하고 인명을 앗아가는 재해를 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천연계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에게 설명하겠습니까?
2. 요나서의 마지막 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온 세상 구석구석에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됩니까?
3. 마 18:21~35의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용서를 취소하고 종을 감옥에 가두었던 화난 임금과 하나님을 비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용서를 취소하시는 분입니까?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그런 분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세속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은 사람이 산 채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그 이야기의 사실성을 증언해 주셨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를 비춰 볼 때, 세계에 대하여 반초자연적 견해는 얼마나 편협하고 제한적입니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