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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여호와를 찾으라[교사들을위한강해식과정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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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4-26 21:59 조회5,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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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여호와를 찾으라
안식일 그리하면 살리라!(아모스)

5월 4일
일몰:오후 7시 25분

기억절: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암 5:14).

   연구범위: 암 5:1~15, 히 5:14, 사 5:20, 암 7:10~17, 암 9:11~15, 행 15:13~18.
   중심 사상: 아모스는 여호와를 구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도입)
아모스 5장은 아모스의 애가로 되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부고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고장을 읽어보도록 하였다. 부고란을 보면 그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또 어떤 후손들을 남기고 죽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의 부고장은 읽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부고란에는 당사자가 죽은 다음에 글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모스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고장을 먼저 읽어보게 하신 것이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유명한 작가 찰스 디킨스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쓴 소설 가운데 「크리스마스 캐럴」이 있는데 거기에 스크루지라는 구두쇠 영감이 나온다. 스크루지 영감은 성탄전야에 자기와 함께 일하다 7년 전에 죽은 동료 말리의 유령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스크루지 영감은 말리와 함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모습을 보게 되는데 미래의 자기 무덤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 무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수군대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을 본 스크루지 영감은 크게 변화되어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는 인정 많은 사람이 되었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부고장을 미리 보는 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성실하였더라면 하나님은 그들의 존귀와 높임을 통하여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순종의 길로 행했더라면 하나님은 그들을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셨을 것이다.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고 모세는 말하였다.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열국은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라고 말할 것이다(신 26:19, 28:10, 4:6). 그러나 그들의 불충실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계속적인 역경과 굴욕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28).
이번 주에 우리는 계속 아모스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그 백성들에게 죄에서 떠나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셨는지 볼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생명과 사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중간은 없다. 아모스는 이 둘 사이에 엄연한 차이점을 보여 줄 것이다.

*안교반과 소그룹을 일원화시키면 가장 좋습니다.

  결론 공허한 의식들과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지는 악행들은 만족을 주지 못할 뿐더러 우리를 하나님 또는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로 이어 주지도 못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길만이 참된 삶을 가져다줍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1. 지난주 친교 모임에 온 손님들을 위해 어떤 후속 조치가 필요한지 이야기합니다.
2. 지난 기부터 시작한 안식일 오후 활동을 점검하고 어떻게 발전시킬지 의논합니다.
3. 구도자들과 안교반(소그룹) 활동을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
4월 28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암 5:15).

(교사 강해 1)
하나님 백성들에게 예배와 일상생활은 서로 아무런 관련 없이 분리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아모스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에서 드리는 제사를 행복과 번영을 얻을 수 있는 기복의 수단으로 오해했고, 제사는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삶의 태도와는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 못했다. ‘예배 따로, 생활 따로’였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실천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의와 요구하신 공의는 더 이상 저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또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주변 여러 이방 민족의 우상들을 더 즐거이 섬겼다. 암 5:26절에 나오는 식굿과 기윤은 앗수르의 천체 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저들의 가증한 예배와 절기행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실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원하신 것은, 번제보다 정의를, 제사보다 순종과 공의를 더 원하셨다. 이 같은 사상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신앙관이다. 혹시 오늘 우리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예배와 신앙행위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우리의 생활이 아무런 연관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증한 신앙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배를 나의 삶과 일치시켜야만 한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상황이 너무 나빴다. 부패, 억압과 죄가 만연했다.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시점이었다. 아모스는 다가올 이스라엘의 멸망을 애도하기 위해 애가를 지었다(암 5:1~15). 선지서를 보면 선지자의 말과 여호와의 말에 구분이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아모스의 애가는 또한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애가이기도 하다.
  암 5:1~15에 나오는 장송곡의 목적은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들이 죄를 고집하다면 그들은 분명 죽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그들은 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응하기를 기대하신다.
  암 5:14~15을 읽어 보라. 우리는 어떻게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할 수 있는가?(히 5:14, 롬 12:9, 잠 8:36) 아모스는 악을 추구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한다. 성경에서 ‘사랑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하브(‘ahav)’와 ‘미워하다’는 뜻의 ‘사네('sane’)’는 단지 감정이나 태도가 아닌 결심과 행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태도의 변화는 곧 행동의 변화로 이어져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 5:20에는 어떤 경고가 있는가?
  “그 사악한 날에 양심의 명령을 따라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용기와 확고부동함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들의 동기가 비난을 받을 것이며 그들의 최선의 노력이 오해를 받고 그들의 이름이 사악한 것으로 내던짐을 당할 것이다. 사탄은 그의 모든 기만적인 능력을 가지고 마음에 영향을 주고 이해력을 흐리게 하여 악을 선처럼, 선을 악처럼 나타내려고 노력할 것이다”(사도행적, 431).

부가적용)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수많은 예배와 세련된 프로그램들과 아름다운 예배당이 아니라 예배와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종교는 생활이다. 생활과 일치되지 않는 종교는 허구요 형식에 불과하다. 오늘날 신앙과 생활을 분리해서 신앙은 신앙대로 적당히 하고 생활은 생활대로 적당히 하는 기회주의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신앙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함을 알아야 한다. 예배에서도 아무런 감각 없이 참여하여 드리고 생활에서도 무감각의 생활로 산다면 진통제를 맞은 환자나 다를 바가 없다.

  교훈: 멸망을 목적에 두고 이스라엘이 선택해야 할 길은 단 한 가지, 하나님께 돌아오되 죄를 버리고 선을 행해야 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어떻게 악이 선처럼, 선이 악처럼 보일 수 있습니까?
예를 들면 세계 어느 지역에서는 동성애자들을 차별한다는 이유로 교회가 고발을 당합니다. 물론 그 교회는 동성애자들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성애에 찬성하지 않아 어려움을 당합니다. 한편 교회 내에는 간혹 진리와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 배척을 당하고, 타협을 주장하는 사람이 환영을 받기도 합니다.
적극적인 복음 전파와 봉사를 실천하는 사람을 존경하기보다는 불편해하는 일도 있습니다.
| 적용 |
선과 악의 기준이 모호하고 가치관이 흔들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기를 기도하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모든 악에서 떠나기 위해 조심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기를 배울 때까지는 번영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쉬지 말고 깨어 기도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길에 덫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사탄의 간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시간에 우리가 기도에 깨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원수에 의해 당할 것이고, 결정적인 손실을 얻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2권, 397).
    기도
  아버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제 양심을 진리의 빛으로 비춰 주시옵소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날(월) 일상적인 종교
4월 29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3~24).

교사 강해 2)
교회가 정의와 공의로부터 멀어진다면 결코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 생명을 공급할 수 없다. 이처럼 교회가 정의와 공의를 상실한다면 마치 물이 고여 썩은 개울이나 메마른 강처럼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물이 었다 해도 썩은 개울물을 마시는 사람은 없다. 또 이미 말라버린 강줄기에 찾아 가는 사람도 없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를 세우신 것은 생명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생명 구원 역사는 악인,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알고 그 의를 힘입음으로 가능하다.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세상 가운데 정의와 공의를 솔선수범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지금 이 시대가 악하여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기 이전에 과연 교회가 이 세상 가운데 정의를 물처럼 공의를 강물처럼 흘렸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암 5:23~24, 호 6:6, 마 9:13, 시 51:17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무엇에 대해 말하는가? 우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 여기서 말하는 원칙들을 어떻게 우리의 영적 생활에 직접 적용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여기서 경고하는 죄를 범할 수 있는가? (이런 영역에서 쉽게 자기를 기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아모스서는 성경의 어느 책보다 부정의, 잔인성, 비인간성에 가장 많이 주목하면서 그러한 행위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제시한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는 공허한 의식을 경멸하고 그것을 개혁하도록 요구하신다고 설교하였다. 여호와께서는 겉치레와 공허한 형식에 얽매이면서 동시에 사적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자들의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삶은 야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들은 율법의 심오한 의미를 철저하게 왜곡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 의식을 거부하셨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믿음의 삶에서 비롯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 5:14~15에서 결정적인 언어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명령이다. 여호와를 찾는 것은 성소가 있는 벧엘, 길갈, 브엘세바와 같은 종교 중심지를 순례하는 것과 대조된다(암 5:5). 왜냐하면 그 도시들은 멸망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은 정의와 공의로 그 땅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여호와를 찾으라”는 명령은 “선을 구하라”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여호와께서는 남은 자들에게 악한 행습과 종교적 형식주의를 멀리하고, 대신 정의가 강처럼 공의가 마르지 않은 시내처럼 흐르게 하라고 호소하신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성소에서 진행되는 것들을 상징하는 7가지 요소(절기, 성회, 번제, 소제, 화목제, 노랫소리, 비파 소리)를 완전히 거부하신다(21-23절). 아모스는 특유의 수사법을 사용해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7가지를 먼저 언급한 후,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한 가지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것은 성소 안이 아닌, 성소 밖에 있다. 바로,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정의다(24절). 하나님은 번제보다 정의를, 제사보다 순종을 더 기뻐하신다. 성소에서 보이는 신앙적 열심이 성소 밖에서 공의로운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 열심은 의미를 잃는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간 풍성한 제물을 드리진 못했지만, 말씀에 순종하며 가나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25절). 그러나 가나안에서 차고 넘치는 제물을 드려도 말씀에 불순종하면 다시 광야로 쫓겨나게 된다. 이스라엘은 앗수르 군대에게 포로가 되어 다메섹 밖으로 끌려가면서도 우상을 버리지 못한 채 지고 간다. 그런 어리석은 모습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정당화한다(26-27절).

  교훈: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린 자들은 종교의 형식에 몰두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의 공동체에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정의가 하나님 앞에 바른 것을 세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의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의 질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진실한 신앙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심령의 변화는 없고, 종교를 형식과 의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모습으로 변질시킨 신앙인들이 여기 있다(신 10:16 참고). 우리도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 적용 |
현재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개혁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형식주의를 제거하라- “그대는 그대의 냉랭하게 얼어붙은 형식주의를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해야 한다. 그대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부드러움과 우정의 감정을 계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대는 진정한 예의와 그리스도인 예절을 나타내어야 한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심령은 그분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들을 사랑한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극을 가리키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이는 열렬한 수고의 정신을 갖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주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교회증언 3권, 466).

    기도
  저는 교회만 오고갈 뿐 하나님이 바라시는 아름답고 의로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께 전혀 기쁨을 드리지 못했던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제 삶에 주의 선하심과 의로움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날(화)
4월 30일
선지자가 되라는 부르심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암 7:12).

교사 강해 3)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심판을 계속하여 예언하므로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소요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책임이 있는 제사장들의 입장이 곤란했을 것이다. 그래서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여로보암 왕에게 신고했다.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7:10,11). 그는 여기서 아모스를 반역자로 고소하고 있다. 때로 백성을 위한 선지자의 일이 오히려 백성을 해하는 반역자의 일로 취급되기도 한다. 아마샤와 같이 여호와를 섬긴다고 자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대우를 받으면 더욱 힘들 수 있다.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도망하라고 말했다. 도망은 죄인이나 패배자가 하는 것이다. 아마샤는 아모스가 체제 전복을 시도하는 반역죄인이요, 어차피 실패할 사역을 하는 패배자라고 생각했다. 또 그는 아모스에게 유다에서 떡을 먹으며 예언하라고 했다. 국가에서 주는 녹을 먹으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예언자 생활을 하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했다. 벧엘이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나타나는 아마샤의 시각의 한계가 무엇인가? 그는 아모스의 일이 하찮아 보였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댓가로 세상에서 돈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상의 원리인 왕의 권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보다 더 높은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샤의 입장에서는 아모스가 자비량으로, 국경을 넘어서 멸망을 예언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역사를 섬기는 것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모스의 고향은 유다의 드고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에서 예언하도록 파송하셨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로 가서 그 땅이 감당할 수 없는 말과 능력으로 설교하였다(암 7:10).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스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전령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거부에도 그는 선지자의 책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였다.
  암 7:10~17을 읽어 보라. 여기에 어떤 비슷한 유형이 보이는가? 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경우가 또 어디 있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경우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아모스의 설교를 싫어했던 무리 가운데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 왕에 대해 역모를 꾸미고 있다며 아모스를 고소하였다. 벧엘은 타락한 예배의 중심지로서 북방 왕조가 세운 두 개의 성소 가운데 하나가 있었다. 아모스는 공공연하게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면 왕이 칼에 죽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리라고 예언하였다. 아마샤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기별이 더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아모스에게 명령하였다.
  아마샤에게 대답하면서 아모스는 선지자로서 그의 소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식을 위하여 고용된 직업적인 선지자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아모스는 소득을 얻고자 예언하는 직업적인 선지자들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진리를 말한다고 항상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종종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것이 특히 권력자들을 방해할 경우 심각한 저항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모스로 하여금 자신을 반역자로 몰아가는 북방 이스라엘에서 왕과 귀족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대담하게 밝히게 하였다.

부가적용)
아모스의 자기 소개를 이렇게 하고 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7:14,15). 아모스는 철저히 하나님의 권위에 의지하여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직업선지자가 아니다. 예언한다고 생계가 유지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직업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배신한 이스라엘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고, 이를 위해서 아모스의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셨다. 아모스는 다만 이에 순종하였을 뿐이다. 아모스는 사역을 위한 타이틀이 없었다. 전임사역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의 외모를 취했다면, 당시에는 그의 예언 사역이 전혀 열매를 얻지 못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이 말씀이 후대에 알려짐으로써 이스라엘이 말씀을 통하여 다시 회개할 수 있는 밑바탕은 되었을 것이다.

  교훈: 아모스는 유다 출신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북방 이스라엘에 가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왕과 귀족들의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죄와 잘못을 지적받을 때 잘 수용하는 편입니까?
구약 선지자들의 기별은 때로 매우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며 신랄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심령이 아니라면, 성령의 도움이 없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잘못에 대하여 지적을 받습니다. 그때 그것을 사람의 평가로 듣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느냐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 적용 |
경고와 비판과 지적에 대하여 그대는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진리를 전하는 자의 의무-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진리를 전하는 자의 의무가 무엇인가? 진리를 전하는 결과로 사람들이 그 진리의 명령을 거절하거나 회피하게 할 뿐이므로 차라리 전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초기의 개혁자들이 당한 것과 같은 반대나 그 이상의 반대를 당한다 할지라도 거룩한 말씀을 증거 하는 일을 중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각 시대의 대쟁투, 459).

    기도
  아버지, 저는 잘못과 결점 투성이입니다. 저를 훈계하시고 단련시켜 주옵소서. 저의 교만한 마음과 고집을 내려 놓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심지어 형제 자매의 조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제게 겸손한 마음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최악의 기근
5월 1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교사 강해 4)
아모스서 7,8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환상이 나온다. 이는 메뚜기 재앙과 바다와 육지에 임하는 불 재앙이요, 외부의 침략으로 시체가 처처에 깔리게 되는 칼 재앙이다(7:7-8:3). 그러면 마지막 재앙은 무엇인가? 마지막 재앙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데서 오는 영적인 기근이다(8:11-14) 그것 참 이상한 것은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이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그 때문에 맨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인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영적인 기근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되는가?

  아모스 8장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에 미칠 파괴적인 영향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그 땅에 기근을 보내 백성들을 벌하실 것이다. 그런데 11~12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굶주림과 갈증을 언급하였다. 비극 중에 비극은 하나님이 침묵하시기 때문에 이르러 오는 말씀의 기근이다. 그 어떤 비극도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들을 소망으로 인도해 주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여호와께 돌이키곤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이 묵묵부답하실 예정이다. 자기 백성에 대한 심판의 일부로써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전할 말씀을 거두시려고 한다. 선지자는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속 불순종한다면 정말 말씀을 듣고 싶은 때가 올지라도 심판을 모면해 보려는 소망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기에는 때가 너무 늦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고집스럽게 거절한 결과이다. 최후의 전투직전의 사울처럼(삼상 28:6 참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선지자가 있던 당시 거절했던 동일한 말씀을 온 백성이 미친듯이 찾게 될 것이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자들은 젊은이들이다. 이전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 거절했지만, 젊은 세대는 선지자의 기별을 들을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었다. 다음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침묵이 가져올 끔찍한 결과는 무엇인가?(삼상 14:37, 시 74:9, 잠 1:28, 애 2:9, 호 5:6, 미 3:5~7)

부가적용)
아모스는 B.C 767년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였다. 당시 북 이스라엘은 외세의 위협이 없는 평화와 유례없이 경제적인 번영도 누리고 있었다. 겉으로 볼 때는 영적인 기근하며 하나님의 심판 운운하는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은 허무맹랑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사회를 자세히 보면 극심한 빈부 격차와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그리고 상업 윤리, 성 윤리가 땅에 떨어져 전체적인 사회 기강이 매우 문란했던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도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드려졌으나 이미 가나안 이방 문화가 깊이 들어와 혼합 종교적인 양상을 띄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 선지자 아모스는 죄악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경우 이스라엘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다. 이제 아모스 선지자는 마지막 재앙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8장 11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잘만 돌아가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고 대학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취직 시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 무슨 재앙이 될 수 있겠는가? 선지자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영적인 기근을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의 하나로 예언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바람에 나는 겨는 그 삶에 생명력이 없다. 바람에 나는 겨는 마음에 중심이 없이 자주 흔들리게 된다. 바람에 나는 겨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다. 조그마한 인생의 바람에도 흩날리게 된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허무하고 무가치한 인생을 살게 된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생명력이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분명한 중심이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간다. 이렇게 여기저기에 흔들리는 사람은 인생의 열매가 없다. 순간순간의 즐거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생의 허무와 무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떠한 소망도 가질 수 없다. 어떠한 삶의 비젼도 가질 수 없습.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것은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일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이 대단히 큰 착각에 빠지기 쉬운 것이 안개처럼 잠깐 있다 사라지는 세상물질, 명예, 부귀, 영화는 언제까지나 영원할 줄 알고 생명 걸고 매달리고 태초부터 영원토록 세세 무궁할 영생복락에 대해선 있으나 마나 몰라도 되고 굳이 믿지 아니해도 별 상관없는 듯 무관심으로 대하고 있다. 그러나 인생이 가장 불쌍한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영적 가난뱅이인 것이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물질이 부족한 가난보다는 영혼이 구원 받지 못한 영적기근이 영원한 불행임을 깨달아야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어야 하는 것은 영원불변의 진리이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쌀독에 쌀이 떨어지고 은행에 돈이 떨어진 것 보다 더욱 급하고 심각한 일이 하나님 말씀에 무지한 일이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 암 8 : 11) "

  교훈: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하게 거부해 왔던 사람들에게 가장 혹독한 심판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그때는 그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게 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말씀의 기근을 경험해 보았습니까?
알고 보면 말씀의 기근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 그분의 뜻을 거절하고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은 결과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원칙이 사라지고 기준이 모호해지고 있다면, 또는 삶의 목적과 내적인 확신 그리고 방향이 불분명해졌다면 말씀에서 멀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마다 즉시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말씀을 펴야 합니다. 너무 늦지 않도록 말입니다.

| 적용 |
그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교회 내 기근의 원인- “교회 내에서, 기근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발해진다. 답은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서 떠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삼고, 경의와 존경으로 그 말씀을 취급한다면, 여러 반복적인 증언이 필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단순한 말씀의 선포를 받아들이고 실천할 것이다”(증언보감 3권, 44).

    기도
  아버지, 마음과 귀를 닫고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 없이 살아온 많은 순간을 후회하며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제 삶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제게 말씀해 주시고, 순종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도와주옵소서.

다섯째날(목) 유다의 폐허가 복구됨
5월 2일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암 9:11~12).

(교사 강해 5)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은 심판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섯 가지 회복의 약속을 하고 계시다. 그런데 갑자기 축복의 분위기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유명한 구약학자 벨 하우젠(Julius Wellhausen)은 이 부분이 후대의 누군가가 첨가한 내용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만큼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종말이 되면 완전하신 제사장이 오시고, 완전한 성전에서 완전한 제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남편이시고, 이스라엘은 부인인데 부인이 바람을 폈지만, 남편과 아내가 갈등이 없는 행복한 날이 온다고 했다. 아모스 선지자도 전형적인 종말론을 말하고 있다.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심판을 하시고,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영원한 축복과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다. 아모스도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종말론을 말하고 있다.

  선지자는 백성의 죄악과 그 결과 이른 심판의 어두운 장면에서 회복의 약속과 영광스런 미래로 화제를 바꾼다(암 9:11~15). 이전에는 여호와의 날이 형벌의 날이었지만(암 5:18), 이제는 구원의 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내릴 결론은 징계가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은 징계를 대신하기보다는 그다음에 이르러 온다.
  암울한 예언이 많았지만 그래도 아모스는 소망의 기별로 그의 책을 마무리한다. 포로로 끌려갈 날을 앞두고 다윗 왕조는 처참하게 무너져서 더 이상 가문이라 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다윗 왕조는 한 통치자 아래서 재건될 것이었다. 국경을 초월하여 다른 나라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이 베푸신 복을 이스라엘과 함께 누릴 것이다. 아모스서는 이같이 행복하고 희망찬 글로 끝난다.
  선지자들은 징벌을 위한 하나님의 징계을 가르치지 않는다. 거의 모든 경고 다음에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 있다. 포로로 끌려갈 날이 임박했으나 여호와는 고국으로 돌아올 소망을 품으라고 남은 자들을 격려한다. 남은 자들은 새롭게 된 언약을 누릴 게 될 것이다. 심판을 경험한 자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 회복시키려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되리라는 아모스의 약속은 어떻게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인가?(눅 1:32~33, 행 15:13~18 참고)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암 9:11을 아브람에서 시작해서 다윗에게서 재확인한 구약의 메시아적 약속으로 간주하다. 다윗 혈통의 새로운 왕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로서 많은 나라를 통치할 것이다(창 12:1~3). 메시아는 심지어 에돔과 같은 적국도 다스릴 것이다. 폐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는 다시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부가적용)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고, 이방나라 백성이 다윗의 장막에 들어오게 된다는 약속은 무었을 의미하는가?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소집이 되었다. 종교회의가 소집된 이유는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성령을 받는데 이들이 회원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되는지, 안 받아도 되는지에 대해서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에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 회의의 회장이며,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었던 야보고는 “이방인들도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성령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할례는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야고보는 아모스서의 9장 11절과 12절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5장 14절로 17절이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야고보가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고, 이방인들이 다윗의 장막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다윗의 장막은 교회이며, 거기 에돔 사람과 만국 백성이 들어온다는 것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약속인 것이다. 다윗의 장막이 회복된다는 의미는 분명하다. 이 예언은 1세기에도 실현되었고, 21세기에도 계속해서 실현이 되고 있다.

  교훈: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재건하고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떤 약속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자애로운 약속을 지키셨다. 야고보는 아모스서를 인용하면서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기 때문에 그들도 교회에 위탁된 언약적 특권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다윗의 후손으로 온 약속의 메시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구속의 복을 제공하시려 한다.
| 적용 |
재림의 약속에 소망을 두고 살기 위해 그대는 어떤 결심을 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불순종한 자녀들을 여전히 구원하심- “각 시대를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방종하는 자녀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고 그들의 도전적인 반역에도 여전히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마음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셨다”(선지자와 왕, 285).

    기도
  자비하신 아버지, 제 삶에 아무리 큰 상처와 고통이 있다할지라도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날에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환하게 웃으며 주를 맞이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5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입장은 우리가 받은 빛의 분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활용하는 여하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이 분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올바른 것을 선택하는 이방인들은 큰 빛을 받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은 하나, 그 빛을 무시하고 그들의 일상 생활로써 자신들의 고백을 부인하는 자들보다 더 유리한 형편에 있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23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지금은 성경이 금하는 행위나 생활방식, 태도 또는 가치를 수용하는 시대입니다.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게 여기는 조류가 거세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의 문화적 경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수년 동안 그대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문화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는 수치스럽게 여기고 금기시했지만 이제는 공개적으로 노출되거나 표현되어서 오히려 괜찮게 보이거나 최소한 더이상 나쁘게 보이지 않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이런 인식의 변화는 그런 행동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악을 선으로 여길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반대로 사회의 어떤 긍정적인 변화들이 예수님의 삶에서 나타난 사랑과 용납의 정신을 더욱 가깝게 실현하는 방향으로 교회에 영향을 주었습니까?
  2. ‘말씀의 기근’에 대하여 좀 더 묵상해 보십시오. 말씀의 기근은 어떻게 생깁니까? 하나님이 진리를 숨기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백성들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입니까? 토론해 보십시오.
  3. 많은 빛과 진리를 가지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 이런 놀라운 진리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위험한 것일까요?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어진 진리들은 교회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남을 대하는 태도에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에게 위탁된 진리를 우리는 어떻게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행함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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