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과 열국의 주(아모스)[교사들을위한연구식과정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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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4-19 22:14 조회5,35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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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4과 열국의 주(아모스)
4월 27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8분
기억절: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8).
연구범위: 암 1~2장, 사 58장, 눅 12:47~48, 왕상 8:37~40, 암 4:12~13, 옵 1장.
중심 사상: 비인간적인 행위는 하나님께 죄가 되며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따른다.
도입)
아모스는 세상의 불의를 향해 하나님의 진리를 외친 선지자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풍요로움에 가리어져 소외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내면에 있는 아픔과 눈물을 간과하고 지날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뉴스에 보도되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우리의 마음을 답답하게만 할 뿐이고 이제는 끔찍한 사건을 접하고도 크게 놀랍지도 않다. 과연,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선지자 아모스가 활동하던 당시 북이스라엘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경제가 부흥하고 많은 부요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소외되고 가난한 계층은 더 큰 아픔을 겪고 있었다. 하나님을 등진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담아 하나님의 경고를 가지고 북이스라엘을 향해 진리의 사자였던 아모스처럼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으로 나아가야할 때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는다(암 1:2)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 "부르짖는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사자가 부르짖는다고 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사자가 "어흥!"하고 부르짖을 때는 먹이를 잡기 전이 아니다. 이미 먹이를 잡고 난 후에 부르짖는다.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암3:4)에서 지금 아모스가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범죄한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아모스의 눈에는 하나님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너희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안타깝게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것이다. 아모스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사로잡혀서 잠시 뒤면 갈가리 찢길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놓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가 불려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인하여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을 인하여 굴복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영위에서 싸울 것이(사31:4)고 말씀하고 계시다.
성경에서 사자는 동물의 왕으로 통한다. 그의 모습은 난폭함과 파괴력뿐 아니라 덤빌 수 없는 위세와 위엄을 자랑한다. 꼭 사냥을 할 때가 아닐지라도 그것이 포효하는 소리는 멀리까지 울려퍼진다. 목동이었던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자의 소리가 들린다고 경고하였다. 그런데 그 사자란 다름 아닌 그들의 주였다. 성령의 감동으로 선지자 아모스는 하나님이 열방과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을 사자의 포효로 비유하였다(암 1:2 참고).
아모스는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나라에 예언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또한 선택받은 믿음의 백성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회로 파송되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정직하지 않은 사업을 허용하며, 법정에서 뇌물을 받았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이런 비열한 행위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들을 예정이다.
결론: 하나님의 예언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첫째날(일) 비인간적인 범죄
4월 21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암 1:9).
도입)
아모스는 아모스 1장과 2장에서 다메섹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7개국(아람,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에 대한 심판을 먼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난 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왜 아모스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지 않았을까? 구태여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심판을 경고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는 주변의 이웃 나라들이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이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죄로 인해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이스라엘도 똑같은 죄를 짓게 되었을 때 저들도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각 나라의 심판의 순서가 어떠한 순서로 되어 있을 것 같은가? 아람, 곧 다메섹부터 시작해서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 이스라엘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 순서가 과연 어떤 순서냐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히던 대적의 순서로 정해진 것 같다. 아무튼 우리가 이것을 지도 위에 그려보면 맨 먼저 멀리 북쪽에 있는 다메섹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남쪽 블레셋으로, 다시금 북쪽 두로로, 또 다시 남쪽 에돔으로 오면서 바깥에서 시작하여 점점 안쪽으로 소용돌이치면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조여 오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아모스의 메시지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는 기분 좋게 그 메시지를 듣고 있다가 점차로 얼굴 표정이 굳어지면서 나중에는 새하얗게 질려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족속들의 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누구를 가리지 않고 심판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모스 1~2장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왜 벌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시는가?
아모스의 첫 두 장은 주변 국가에 대한 예언이며 그다음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 이어진다. 이방 나라가 심판을 받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원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성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책망을 보면 특별히 두 가지, 곧 신의와 자비의 부재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대표적인 무역 도시였다. 난공불락의 요새 덕택에 누리는 안정성은 그 도시의 자랑거리였다. 게다가 두로의 왕들은 블레셋과 같은 주변 국가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다윗과 솔로몬 심지어 아합 왕 치세에도 그 도시는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었다(왕상 5:1, 12,16:30~31). 그래서 왕상 9:13을 보면 두로왕 히람은 솔로몬을 “내 형제”라고 불렀다.
하지만 두로의 백성들은 “형제와의 언약”을 어겼다. 그들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포로들을 끌고 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이스라엘의 원수 에돔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포로들이 원수의 손에 당한 끔찍한 고통의 책임이 두로 백성에게 있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범죄를 돕고 지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행한 사람과 똑같다.
하나님은 만유를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온 세상의 운명이 그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분의 목표와 관심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국의 주인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 역사가 그분의 관심사이다. 그분은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의 책임 아래에 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일곱 나라를 살펴보면 요단강 동편에 암몬, 사해 바다 동편의 모압, 그 밑으로 에돔, 지중해변의 남쪽 블레셋, 지중해변의 북쪽 두로, 시돈, 한 바퀴를 돌아오면 애굽이다. 심판은 달팽이 모양으로 요단강 동편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곱 나라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숫자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소아시아에도 일곱 교회가 있고,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교회를 향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모든 교회의 일곱 가지 유형을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일곱 나라는 모든 시대, 모든 이방국가의 유형을 이 나라가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일곱 나라를 심판하신 가장 큰 이유는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이사야54장4ㅡ8절).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보낸 요나의 도망과 폭풍을 통해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나 니느웨에 심판의 기별을 통해 저들을 살리신 것은 우리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교훈: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한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며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사회정의에 얼마나 관심이 많습니까?
사회의 정의와 부정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과 무관하게 여기거나 심지어 금기시하는 것들도 하나님께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소선지서를 읽으며 우리는 이 땅의 문제로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진지한 마음과 태도로 우리의 주변을 다시 보게 됩니다.
| 적용 |
구원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나라들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가 만유를 다스린다는 보증은 초기의 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기쁨이 된다. 다가오는 사건들에 대한 계획이 창조주의 손에 쥐어져 있다. 하늘의 주권자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대한 이해관계와 마찬가지로 나라들의 운명도 친히 주관하신다”(산상보훈, 121).
기도
구원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이기적인 신앙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와 그 백성의 삶까지 돌보시며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억눌린 자들을 위한 공의
4월 22일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암 2:6).
도입)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면 매우 무섭고 두렵게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에는 사람을 아껴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이 나타나 있다. 그럼으로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을 지라도 그 심판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간과하지 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33:5)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무자비한 폭군과 같이 사람들을 다루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보좌의 특성상 하나님은 그분의 심판이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89:14] .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의롭고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이 세상 사람들이 그분의 심판이 합당하다고 인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인생이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는 심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심판이 이와 같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사용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 세계적인 심판은 아모스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책 서두에서 선지자는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지른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그리고 대범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도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여호와의 진노는 이방 나라뿐 아니라 그분의 택한 백성들에게도 쏟아진다.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동시에 아모스는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너무도 많은 죄를 저지른 연유로 유다보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다룬다. 이스라엘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은 영적 부패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부패는 사회적 부정의로 나타났다.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약자들을 갈취하였다. 그들은 오직 자기만을 돌보았고, 그것이 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희생에서 얻어진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이득을 취하였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한 것이 없지 않은가?)
아모스에 따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관심 있게 보신다. 공의는 단지 어떤 생각이나 규범 이상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관심사이다. 선지자는 돌로 지은 가옥, 상아로 만든 가구, 최고급 식품과 음료 그리고 고급 화장품 등,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사야 58장을 읽어 보라. 이 성경장은 현대 진리를 어떤 식으로 묘사하는가? 세상에게 전할 우리의 기별은 이것보다 얼마나 더 진전된 형태인가?
성경은 사회 정의가 복음의 자연스런 결과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사를 공유하게 된다. 모세오경은 외국인, 과부, 고아를 공정하게 대하라고 주장한다(출 22:21~24).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북방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각 나라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품성에 기초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자하심과 진실함이 그분의 공의 정의를 앞서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에게 행한 악한 일들에 대하여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이 이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기 전에 미리 자신이 왜 분노하고 계신지 진노하고 계신지를 말씀하시고 전하셨다. 그럼으로 각 나라가 미리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돌아와야 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을 미리 알리시고 저들의 심판을 통고하여 저들의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세상에 보이신 것이다.
교훈: 공의는 하나님의 주요한 관심사이며, 그분은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이런 일은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선지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특권에서 소외된 자들을 공정하고 자비롭게 대우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사 58:6~7). 시편 기자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부른다(시 68:5). 그리스도는 사회에서 외면당한 자들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이셨다(막 7:24~30, 요4:7~26). 주의 형제 야고보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서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호소한다(약 2:14~26).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 적용 |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대에게 필요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사 58장을 숙고하라- “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신자들, 진실한 모든 선교사,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고 안식일에 발을 금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사야 58장의 기별을 심사숙고하라고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에 기록된 자선 사업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그분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사업이며 그분께서 친히 맡겨 주신 사업이다”(교회증언 6권, 265).
기도
평생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제 믿음은 아버지의 관심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에는 너무 편협한 신앙을 고집했습니다. 이 무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해 주옵소서.
셋째날(화) 특권의 위험
4월 23일
“이스라엘 자손들아…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1~2).
도입)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출해 내셨다.(1절) 이 기억은 중요한 것이며,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감찰하신다는 중요한 예증이 되는 것이다. 굳이 출애굽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였거든 너희는 어찌 범죄를 저지르느냐' 하는 책망을 하기 위해서이다. 즉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하는 강조의 뉘앙스가 많다. 이 말씀의 의미는 또한 너희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해도 심판을 늦추시거나 멈추시는 일은 없을 것임을 경고하여 아모스의 예언을 경시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너희에게 보응하리라.'는 이 말은 일견 이율배반적으로 들리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극진히 사랑하면서 왜 기필코 보응하심을 선포하실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불신실하심이 아니라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악이 큼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사랑과 징계를 나란히 병행시키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신 데에는 특권과 의무가 함께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아모스의 예언적 기별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에 제한받지 않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초월하여 기별의 범주를 확장시켰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특별하면서도 독점적이지 않은 권리가 있었다.
암 3:1~2을 읽어 보라. 2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yada)’는 ‘안다.’는 의미로서 특별한 친밀감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렘 1:5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태어나기 전부터 ‘안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민족은 단지 여러 민족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한 목적을 위해 구별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 출애굽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을 발판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과 가나안 땅 정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위세와 번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권적 지위는 교만과 안일로 변질되었다.
눅 12:47~48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진술을 읽어 보라. 그분이 가르치신 원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큰 특권을 남용하면 큰 벌을 받게 되는가?
하나님께 영감을 받은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경고한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스라엘은 의무를 감당해야 하고, 만약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형벌을 받는다. 다시 말해, 특권은 책임을 내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은 그분의 심판에 대하여 막중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단지 특권적 지위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세상에 증언할 책임이 있었다.
부가적용)
이스라엘은 그 많은 족속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이스라엘이 상대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수효가 많은 것도 아니고, 기량이 뛰어난 민족도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런 공로나 근거 없이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오늘날 택함 받은 모든 성도의 경우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역시도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별한 사랑과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하심은 이스라엘에게 배반당하신 하나님의 고통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알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알고 그를 섬기지 아니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은 공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은 백성으로 상상도 못할 부패한 길을 걸었다. 구체적으로 아모스는 그것을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다'(암 4:1)고 하였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고통을 잊고 애굽이 지었던 죄를 반복해서 지었던 것이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암 5:7)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권의 사랑을 받고도 우상에게 눈을 돌렸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암 4:4)라고 하였는데 이는 송아지 우상을 벧엘에 설치하고 그것을 신앙의 심벌로 삼았던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1절). 특권의 사랑을 부여받고도 마땅히 지켜야할 생의 책임을 이탈한 이스라엘은 이제 심판대 위에 올려진 것이다. 징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다른 족속과 다름이 없이 매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아직도 사랑의 심정으로 징계하시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 135:4) 그런데 특권은 남용되고 의무인 책임은 소홀하게 여겨진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긴장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책임 없는 특권은 불행을 가져온다.
교훈: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백성은 큰 특권과 함께 큰 책임이 부여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이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특권이란 말에서 재벌가 자녀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쉽게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는 그런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또는 이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과 비교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에 없었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특권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줄을 세운다면 우리는 대부분 상위권에 해당할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나타난다면 우리를 보고 놀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얼마나 큰 특권과 책임이 있습니까?
| 적용 |
그대가 누리는 특권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우리의 특권과 책임- “현시대에 소위 기독교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에게 가장 고상한 특권이 위탁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더욱 큰 빛을 그들에게 주심으로써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우리가 누리는 특권은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졌던 특권보다 훨씬 더 크다”(실물교훈, 317).
기도
아버지, 우리에게 이미 많은 특권을 주셨지만 우리가 그 무게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저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넷째날(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만남
4월 24일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암 4:12).
도입)
하나님께서 하시는 심판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표시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으로 멸망의 선포를 하시면서도 또 한편 마지막 구원의 출구를 열어 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그 구원의 모든 열쇠는 물론 하나님이 쥐고 계시므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만남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예배와 제사 행위이다. 즉 죄를 돌이킨 참된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만남은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출애굽 당시 모세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거대한 역사를 이룩했고, 숱한 선지자는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예언을 행하고 죄악에 빠진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한 결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멸망 중에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만남을 예비하는 것임을 아모스는 거듭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한 번 죽은 것은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따르게 된다(히 9:27). 우리는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를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를 대비하여 준비를 하여야 한다. 준비된 자는 천국의 영광을 누리며 준비되지 못한 자는 심판을 받고 어두운 곳에 내쫓겨 이를 갈며 슬피 울 것이다.
아모스 4장은 이스라엘의 죄를 열거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대가를 치를 날이 올 것이라는 경고로 마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생활방식과 남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특별한 책임을 부여하셨다.
아모스는 일련의 자연재해를 나열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그분께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열된 일곱 재앙들은 레위기 26장에서 모세가 언급한 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대가였다. 그중 일부는 애굽의 열 재앙을 연상케 하고, 마지막 재앙에 관한 묘사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총체적 파멸을 언급하기도 한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에 따르면 백성들은 재난을 당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왕상 8:37~40) 이스라엘 백성은 더이상 보통의 백성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그들의 관심을 끌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셨다.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굳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백성들이 여호와께 돌이키지 않자, 아모스는 마지막으로 회개를 호소하였다.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 심판이 어떠할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아모스의 말 속에 내재해 있는 모호함이 심판의 불길함을 더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기 위해 나서신다. 벌을 주어도 실패했는데, 하나님과의 만남이 과연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암 4:12은 전통적인 맹세의 형식을 빌려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행하리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엄숙한 진술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나타나셨을 때처럼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라고 요구한다(출 19:11, 15 참고).
부가적용)
무엇을 심으면 반드시 거둔다는 것은 자연의 원리이다. 영적인 원리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인간도 그의 삶에 대해 결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또한 이러한 영적인 인과의 원리도 심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의 행한 대로 일체의 착오도 없이 보응을 하신다. 그러하기에 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단적인 예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도 하나님의 명령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 그리고 그에 따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리 엄청난 것이어도 심판을 기다리며 경건히 사는 자에까지 시행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악인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신다. 반드시 그들의 죄를 벌하시고 이 땅에 자신의 공의를 세우신다. 다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악인을 벌하시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실 뿐이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에 대해 심판을 내리시겠다고 경고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함께 심판에 대해 준비하여 피하라고 사랑의 경고를 함께 보내고 계신다. 이러한 하나님은 가인의 범죄에도 그를 살리셨으며(창 4:15),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하시려고 의인을 찾고자 하셨으며, 이스라엘의 수없이 많은 타락에서도 그들을 회개시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시며 애통해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 모습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의 참 의미이다. 어리석은 인간은 이것을 오해하여 신의 죽음을 선언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의 폭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인내와 자비의 폭이 그처럼 넓은 만큼 심판은 엄정하게 실행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재앙을 내리신 이유는 그들을 돌이키기 위함이었으나 이스라엘이 회개를 거부하자 그들을 대면하시기로 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면 어떤 낯으로 대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 19:7).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 6:16). 어떤 사람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날을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환영하면 좋겠습니다.
| 적용 |
그대에게 하나님을 만날 준비란 어떤 것인지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우리가 전해야 할 기별- “우리가 전해야 할 기별은 ‘평안하다 안전하다’(살전 5:3)는 성질의 기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백성으로서 우리에게는 해야 할 사업이 있고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 4:12)고 전해야 할 기별이 있다. 우리는 표준을 높여야 하며 셋째 천사의 기별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전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2권, 150).
기도
아버지, 죄 많은 저로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보혈에 의지합니다. 저를 정결케 해 주옵소서. 야곱처럼 확신을 얻은 후에 ‘브니엘’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교만은 멸망의 선봉
4월 25일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옵 10).
도입)
오바댜는 여호와께서 그토록 가혹한 심판을 내리신 근거를 제시한다. 오바댜는 에돔 족속이 당할 심판과 멸망을 말하던 중 하나님 앞에서 응징 받기에 알맞은 에돔의 죄의 항목을 고발해 가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 고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선민이자 특별히 형제 족속인 이스라엘에 대해 그들이 행한 악독한 가해에 대한 내용이다. 형제인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들고 예루살렘이 함락 당했을 때에 이를 기뻐하고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약탈물 분배에 가담했던 에돔인들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에돔 족속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데 대한 근거는 바로 자신의 형제인 야곱에게 행한 포학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학(하마쓰)은 살인적인 폭력과 범죄를 의미한다. 형제에게 그토록 무서운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은 야만적임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형제'라는 단어는 야곱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에돔 족속의 간악한 범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여호와를 영원히 멸절하리라는 심판을 내리신다. 이후에 그들은 나밧 족속에게 페트라를 빼앗기고 마카베오에게 무서운 보복을 받는 등 소수의 무리를 제외한 전 민족이 멸절되는 결과를 실제로 맞게 되었다. 에돔 족속은 이삭의 장자인 에서의 후손으로서 곧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과는 형제 관계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이스라엘 민족과 끊임없이 싸워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당시 그들의 땅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모세의 요청의 거절을 필두로 하여(민 20:14-20) 사울, 다윗, 솔로몬, 여호사밧, 여호람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대적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삼상 14:47; 왕상 11:14-17; 대하 20:22; 21:8).
오바댜서를 읽어 보라. 이 책에서 배워야 할 도덕적, 영적 진리는 무엇인가? 오바댜서는 구약에서 가장 짧은 책으로서 에돔 땅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이상과 예언으로 전한다. 이 책의 기별은 세 가지 문제, 즉 에돔의 교만(1~4절), 에돔이 당할 수치(5~9절), 유다에게 범한 에돔의 잘못(10~14절)에 초점을 맞춘다.
에돔 민족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이다. 이스라엘 민족과 에돔 민족 사이의 적대감은 쌍둥이 형제 사이에 존재했던 가족의 불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창세기 33장에 따르면 두 형제는 후에 화해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신 23:7)는 명령을 내리셨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두 민족 사이의 적대감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을 때, 에돔 민족들은 그 사실을 기뻐했을 뿐 아니라 도망하는 백성들을 속이고, 예루살렘의 약탈을 도왔다(시 137:7). 에돔 민족은 가장 혹독한 시기를 보내는 유다 백성들에게 형제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원수의 편에 가담하였다(애 4:21~22). 그래서 선지자 오바댜는 에돔이 그들의 행위를 기준으로 심판을 받게 되리라 경고하였다.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것이라”(옵 15).
에돔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사해 남동쪽이었다. 그곳은 산악지대로서 높은 산봉우리, 험한 바위, 동굴, 군인들이 매복할 수 있는 바위틈이 많았다. 수많은 에돔의 성들이 접근하기조차 힘든 이런 지역에 있었다. 셀라(또는 페트라)는 에돔의 수도였다. 다음의 질문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에돔의 교만을 대변하고 있다.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옵 3).
부가적용)
에돔의 사악함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 대한 적대 감정이 전혀 없었고 그들에게 적대 감정을 가지기는커녕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적대 감정을 가질 때 율법을 통해 오히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희 형제니라'(신 23:7)고 규정함으로써 악을 선으로 갚았다. 그런데도 에돔인들은 역사를 흘러내려오면서 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덧붙여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그들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할례까지 받은 족속이라는 점이다. 즉 같은 믿음의 후예들로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하고 괴롭히고 짓밟는 추태로 연출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한 아버지로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 주로 섬기면서도 마치 원수 대하듯 성도 간에 헐뜯고 인격을 매도하는 자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에돔 족속이 가해하고 포학을 행한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형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이것은 중대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현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포학을 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에 대한 포학을 행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의미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괴로움을 끼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슥 2:8).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대적한 아말렉을 진멸하도록 명하셨고 대대적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출 17:8-16; 삼상 15:2, 3).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맏형 격인 천주교와 동생 격인 개신교 사이에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난 한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대적함으로 오랜 종교싸움으로 서로 대치해 왔다. 에서와 야곱 이 두 쌍둥이, 곧 두 형제간의 오랜 분쟁과 싸움은 바로 천주교와 신교의 싸움을 예표하지 않나 싶다. 우리도 천주교인들에 대하여 적대감을 버리고 저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저들이 우리를 적대시 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먼저 저들을 적대시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교훈: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뻐하고 가해자와 동조하여 그들을 이용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다른 사람의 실패와 고통을 기뻐한 적이 없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나님은 환난을 당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오바댜는 하나님이 교만한 백성 에돔의 머리를 수치스럽게 하시리라고 경고한다. 여호와 앞에서 피할 데가 없다(암 9:2~3). 여호와의 날은 동시에 심판과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에돔은 진노의 잔을 마실 것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복될 것이다.
| 적용 |
그대에게 적대적인 사람이 실패와 고난을 겪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행위대로 갚으심- “반면에 불행한 자에 대해 제사장과 레위인의 무관심을 나타내고, 타인의 불행을 통해 어떠한 이익이라도 챙기고, 스스로의 이기적인 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어려움을 증가시키는 이에 대해서 책에 기록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공정스러운 행위와 우리 중의 환난을 당한 자들을 부주의한 무관심으로 대하는 모든 행동에 대하여 분명히 갚아 주실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위대로 최종적으로 갚음을 받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3권, 513).
기도
아버지는 그 사람도 저와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구원하시려는 줄 압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며 동정하는 마음을 제게 주옵소서. 그에게 아버지의 구원과 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여섯째날(금)
4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스라엘 신앙의 초기부터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행할 백성으로 선택받았다는 믿음은 히브리인 신앙의 초석이자 환난 때의 피난처였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당대 백성들에게 이 초석이 걸림돌이자 도피처와 탈출구가 되어 간다고 느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선민됨을 하나님의 호의 또는 징벌로부터의 면제로 오해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응징에 더욱 가까이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했다. …선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돌보신다는 뜻인가? 출애굽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만 개입하고 다른 나라의 운명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인가?”- Abraham J. Heschel, The Prophets, 32~33.
“선지자들은 저희 시대의 현저한 압정과 극악한 부정, 보통이 넘는 사치와 방종, 수치를 모르는 연락과 술취함, 심한 방탕과 주색에 대하여 음성을 높여 경고하였으나 그들의 항의는 헛되었고 죄에 대한 그들의 탄핵은 허사였다. 아모스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암 5:10, 12)”(선지자와 왕, 28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대에게 무엇인가 유익을 주는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을 당해 그대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고 도리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합니까? 그대는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겠습니까?
2. 우리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 누리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의 복을 모릅니다. 그들 대부분은 사람이 죽자마자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간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과 문자적 재림을 믿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에 그와 같은 진리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책임이 있다는 뜻일까요?
4월 27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8분
기억절: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8).
연구범위: 암 1~2장, 사 58장, 눅 12:47~48, 왕상 8:37~40, 암 4:12~13, 옵 1장.
중심 사상: 비인간적인 행위는 하나님께 죄가 되며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따른다.
도입)
아모스는 세상의 불의를 향해 하나님의 진리를 외친 선지자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풍요로움에 가리어져 소외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내면에 있는 아픔과 눈물을 간과하고 지날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뉴스에 보도되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우리의 마음을 답답하게만 할 뿐이고 이제는 끔찍한 사건을 접하고도 크게 놀랍지도 않다. 과연,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선지자 아모스가 활동하던 당시 북이스라엘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경제가 부흥하고 많은 부요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소외되고 가난한 계층은 더 큰 아픔을 겪고 있었다. 하나님을 등진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담아 하나님의 경고를 가지고 북이스라엘을 향해 진리의 사자였던 아모스처럼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으로 나아가야할 때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는다(암 1:2)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 "부르짖는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사자가 부르짖는다고 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사자가 "어흥!"하고 부르짖을 때는 먹이를 잡기 전이 아니다. 이미 먹이를 잡고 난 후에 부르짖는다.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암3:4)에서 지금 아모스가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범죄한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아모스의 눈에는 하나님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너희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안타깝게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것이다. 아모스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사로잡혀서 잠시 뒤면 갈가리 찢길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놓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가 불려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인하여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을 인하여 굴복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영위에서 싸울 것이(사31:4)고 말씀하고 계시다.
성경에서 사자는 동물의 왕으로 통한다. 그의 모습은 난폭함과 파괴력뿐 아니라 덤빌 수 없는 위세와 위엄을 자랑한다. 꼭 사냥을 할 때가 아닐지라도 그것이 포효하는 소리는 멀리까지 울려퍼진다. 목동이었던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자의 소리가 들린다고 경고하였다. 그런데 그 사자란 다름 아닌 그들의 주였다. 성령의 감동으로 선지자 아모스는 하나님이 열방과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을 사자의 포효로 비유하였다(암 1:2 참고).
아모스는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나라에 예언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또한 선택받은 믿음의 백성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회로 파송되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정직하지 않은 사업을 허용하며, 법정에서 뇌물을 받았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이런 비열한 행위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들을 예정이다.
결론: 하나님의 예언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첫째날(일) 비인간적인 범죄
4월 21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암 1:9).
도입)
아모스는 아모스 1장과 2장에서 다메섹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7개국(아람,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에 대한 심판을 먼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난 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왜 아모스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지 않았을까? 구태여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심판을 경고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는 주변의 이웃 나라들이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이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죄로 인해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이스라엘도 똑같은 죄를 짓게 되었을 때 저들도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각 나라의 심판의 순서가 어떠한 순서로 되어 있을 것 같은가? 아람, 곧 다메섹부터 시작해서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 이스라엘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 순서가 과연 어떤 순서냐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히던 대적의 순서로 정해진 것 같다. 아무튼 우리가 이것을 지도 위에 그려보면 맨 먼저 멀리 북쪽에 있는 다메섹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남쪽 블레셋으로, 다시금 북쪽 두로로, 또 다시 남쪽 에돔으로 오면서 바깥에서 시작하여 점점 안쪽으로 소용돌이치면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조여 오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아모스의 메시지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는 기분 좋게 그 메시지를 듣고 있다가 점차로 얼굴 표정이 굳어지면서 나중에는 새하얗게 질려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족속들의 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누구를 가리지 않고 심판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모스 1~2장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왜 벌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시는가?
아모스의 첫 두 장은 주변 국가에 대한 예언이며 그다음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 이어진다. 이방 나라가 심판을 받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원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성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책망을 보면 특별히 두 가지, 곧 신의와 자비의 부재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대표적인 무역 도시였다. 난공불락의 요새 덕택에 누리는 안정성은 그 도시의 자랑거리였다. 게다가 두로의 왕들은 블레셋과 같은 주변 국가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다윗과 솔로몬 심지어 아합 왕 치세에도 그 도시는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었다(왕상 5:1, 12,16:30~31). 그래서 왕상 9:13을 보면 두로왕 히람은 솔로몬을 “내 형제”라고 불렀다.
하지만 두로의 백성들은 “형제와의 언약”을 어겼다. 그들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포로들을 끌고 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이스라엘의 원수 에돔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포로들이 원수의 손에 당한 끔찍한 고통의 책임이 두로 백성에게 있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범죄를 돕고 지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행한 사람과 똑같다.
하나님은 만유를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온 세상의 운명이 그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분의 목표와 관심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국의 주인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 역사가 그분의 관심사이다. 그분은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의 책임 아래에 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일곱 나라를 살펴보면 요단강 동편에 암몬, 사해 바다 동편의 모압, 그 밑으로 에돔, 지중해변의 남쪽 블레셋, 지중해변의 북쪽 두로, 시돈, 한 바퀴를 돌아오면 애굽이다. 심판은 달팽이 모양으로 요단강 동편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곱 나라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숫자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소아시아에도 일곱 교회가 있고,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교회를 향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모든 교회의 일곱 가지 유형을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일곱 나라는 모든 시대, 모든 이방국가의 유형을 이 나라가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일곱 나라를 심판하신 가장 큰 이유는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이사야54장4ㅡ8절).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보낸 요나의 도망과 폭풍을 통해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나 니느웨에 심판의 기별을 통해 저들을 살리신 것은 우리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교훈: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한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며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사회정의에 얼마나 관심이 많습니까?
사회의 정의와 부정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과 무관하게 여기거나 심지어 금기시하는 것들도 하나님께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소선지서를 읽으며 우리는 이 땅의 문제로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진지한 마음과 태도로 우리의 주변을 다시 보게 됩니다.
| 적용 |
구원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나라들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가 만유를 다스린다는 보증은 초기의 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기쁨이 된다. 다가오는 사건들에 대한 계획이 창조주의 손에 쥐어져 있다. 하늘의 주권자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대한 이해관계와 마찬가지로 나라들의 운명도 친히 주관하신다”(산상보훈, 121).
기도
구원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이기적인 신앙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와 그 백성의 삶까지 돌보시며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억눌린 자들을 위한 공의
4월 22일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암 2:6).
도입)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면 매우 무섭고 두렵게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에는 사람을 아껴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이 나타나 있다. 그럼으로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을 지라도 그 심판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간과하지 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33:5)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무자비한 폭군과 같이 사람들을 다루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보좌의 특성상 하나님은 그분의 심판이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89:14] .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의롭고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이 세상 사람들이 그분의 심판이 합당하다고 인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인생이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는 심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심판이 이와 같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사용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 세계적인 심판은 아모스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책 서두에서 선지자는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지른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그리고 대범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도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여호와의 진노는 이방 나라뿐 아니라 그분의 택한 백성들에게도 쏟아진다.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동시에 아모스는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너무도 많은 죄를 저지른 연유로 유다보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다룬다. 이스라엘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은 영적 부패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부패는 사회적 부정의로 나타났다.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약자들을 갈취하였다. 그들은 오직 자기만을 돌보았고, 그것이 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희생에서 얻어진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이득을 취하였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한 것이 없지 않은가?)
아모스에 따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관심 있게 보신다. 공의는 단지 어떤 생각이나 규범 이상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관심사이다. 선지자는 돌로 지은 가옥, 상아로 만든 가구, 최고급 식품과 음료 그리고 고급 화장품 등,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사야 58장을 읽어 보라. 이 성경장은 현대 진리를 어떤 식으로 묘사하는가? 세상에게 전할 우리의 기별은 이것보다 얼마나 더 진전된 형태인가?
성경은 사회 정의가 복음의 자연스런 결과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사를 공유하게 된다. 모세오경은 외국인, 과부, 고아를 공정하게 대하라고 주장한다(출 22:21~24).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북방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각 나라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품성에 기초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자하심과 진실함이 그분의 공의 정의를 앞서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에게 행한 악한 일들에 대하여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이 이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기 전에 미리 자신이 왜 분노하고 계신지 진노하고 계신지를 말씀하시고 전하셨다. 그럼으로 각 나라가 미리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돌아와야 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을 미리 알리시고 저들의 심판을 통고하여 저들의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세상에 보이신 것이다.
교훈: 공의는 하나님의 주요한 관심사이며, 그분은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이런 일은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선지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특권에서 소외된 자들을 공정하고 자비롭게 대우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사 58:6~7). 시편 기자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부른다(시 68:5). 그리스도는 사회에서 외면당한 자들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이셨다(막 7:24~30, 요4:7~26). 주의 형제 야고보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서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호소한다(약 2:14~26).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 적용 |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대에게 필요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사 58장을 숙고하라- “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신자들, 진실한 모든 선교사,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고 안식일에 발을 금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사야 58장의 기별을 심사숙고하라고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에 기록된 자선 사업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그분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사업이며 그분께서 친히 맡겨 주신 사업이다”(교회증언 6권, 265).
기도
평생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제 믿음은 아버지의 관심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에는 너무 편협한 신앙을 고집했습니다. 이 무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해 주옵소서.
셋째날(화) 특권의 위험
4월 23일
“이스라엘 자손들아…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1~2).
도입)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출해 내셨다.(1절) 이 기억은 중요한 것이며,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감찰하신다는 중요한 예증이 되는 것이다. 굳이 출애굽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였거든 너희는 어찌 범죄를 저지르느냐' 하는 책망을 하기 위해서이다. 즉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하는 강조의 뉘앙스가 많다. 이 말씀의 의미는 또한 너희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해도 심판을 늦추시거나 멈추시는 일은 없을 것임을 경고하여 아모스의 예언을 경시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너희에게 보응하리라.'는 이 말은 일견 이율배반적으로 들리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극진히 사랑하면서 왜 기필코 보응하심을 선포하실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불신실하심이 아니라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악이 큼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사랑과 징계를 나란히 병행시키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신 데에는 특권과 의무가 함께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아모스의 예언적 기별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에 제한받지 않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초월하여 기별의 범주를 확장시켰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특별하면서도 독점적이지 않은 권리가 있었다.
암 3:1~2을 읽어 보라. 2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yada)’는 ‘안다.’는 의미로서 특별한 친밀감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렘 1:5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태어나기 전부터 ‘안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민족은 단지 여러 민족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한 목적을 위해 구별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 출애굽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을 발판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과 가나안 땅 정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위세와 번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권적 지위는 교만과 안일로 변질되었다.
눅 12:47~48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진술을 읽어 보라. 그분이 가르치신 원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큰 특권을 남용하면 큰 벌을 받게 되는가?
하나님께 영감을 받은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경고한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스라엘은 의무를 감당해야 하고, 만약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형벌을 받는다. 다시 말해, 특권은 책임을 내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은 그분의 심판에 대하여 막중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단지 특권적 지위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세상에 증언할 책임이 있었다.
부가적용)
이스라엘은 그 많은 족속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이스라엘이 상대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수효가 많은 것도 아니고, 기량이 뛰어난 민족도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런 공로나 근거 없이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오늘날 택함 받은 모든 성도의 경우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역시도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별한 사랑과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하심은 이스라엘에게 배반당하신 하나님의 고통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알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알고 그를 섬기지 아니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은 공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은 백성으로 상상도 못할 부패한 길을 걸었다. 구체적으로 아모스는 그것을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다'(암 4:1)고 하였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고통을 잊고 애굽이 지었던 죄를 반복해서 지었던 것이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암 5:7)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권의 사랑을 받고도 우상에게 눈을 돌렸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암 4:4)라고 하였는데 이는 송아지 우상을 벧엘에 설치하고 그것을 신앙의 심벌로 삼았던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1절). 특권의 사랑을 부여받고도 마땅히 지켜야할 생의 책임을 이탈한 이스라엘은 이제 심판대 위에 올려진 것이다. 징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다른 족속과 다름이 없이 매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아직도 사랑의 심정으로 징계하시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 135:4) 그런데 특권은 남용되고 의무인 책임은 소홀하게 여겨진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긴장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책임 없는 특권은 불행을 가져온다.
교훈: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백성은 큰 특권과 함께 큰 책임이 부여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이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특권이란 말에서 재벌가 자녀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쉽게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는 그런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또는 이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과 비교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에 없었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특권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줄을 세운다면 우리는 대부분 상위권에 해당할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나타난다면 우리를 보고 놀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얼마나 큰 특권과 책임이 있습니까?
| 적용 |
그대가 누리는 특권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우리의 특권과 책임- “현시대에 소위 기독교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에게 가장 고상한 특권이 위탁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더욱 큰 빛을 그들에게 주심으로써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우리가 누리는 특권은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졌던 특권보다 훨씬 더 크다”(실물교훈, 317).
기도
아버지, 우리에게 이미 많은 특권을 주셨지만 우리가 그 무게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저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넷째날(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만남
4월 24일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암 4:12).
도입)
하나님께서 하시는 심판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표시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으로 멸망의 선포를 하시면서도 또 한편 마지막 구원의 출구를 열어 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그 구원의 모든 열쇠는 물론 하나님이 쥐고 계시므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만남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예배와 제사 행위이다. 즉 죄를 돌이킨 참된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만남은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출애굽 당시 모세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거대한 역사를 이룩했고, 숱한 선지자는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예언을 행하고 죄악에 빠진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한 결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멸망 중에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만남을 예비하는 것임을 아모스는 거듭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한 번 죽은 것은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따르게 된다(히 9:27). 우리는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를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를 대비하여 준비를 하여야 한다. 준비된 자는 천국의 영광을 누리며 준비되지 못한 자는 심판을 받고 어두운 곳에 내쫓겨 이를 갈며 슬피 울 것이다.
아모스 4장은 이스라엘의 죄를 열거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대가를 치를 날이 올 것이라는 경고로 마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생활방식과 남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특별한 책임을 부여하셨다.
아모스는 일련의 자연재해를 나열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그분께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열된 일곱 재앙들은 레위기 26장에서 모세가 언급한 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대가였다. 그중 일부는 애굽의 열 재앙을 연상케 하고, 마지막 재앙에 관한 묘사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총체적 파멸을 언급하기도 한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에 따르면 백성들은 재난을 당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왕상 8:37~40) 이스라엘 백성은 더이상 보통의 백성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그들의 관심을 끌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셨다.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굳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백성들이 여호와께 돌이키지 않자, 아모스는 마지막으로 회개를 호소하였다.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 심판이 어떠할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아모스의 말 속에 내재해 있는 모호함이 심판의 불길함을 더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기 위해 나서신다. 벌을 주어도 실패했는데, 하나님과의 만남이 과연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암 4:12은 전통적인 맹세의 형식을 빌려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행하리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엄숙한 진술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나타나셨을 때처럼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라고 요구한다(출 19:11, 15 참고).
부가적용)
무엇을 심으면 반드시 거둔다는 것은 자연의 원리이다. 영적인 원리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인간도 그의 삶에 대해 결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또한 이러한 영적인 인과의 원리도 심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의 행한 대로 일체의 착오도 없이 보응을 하신다. 그러하기에 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단적인 예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도 하나님의 명령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 그리고 그에 따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리 엄청난 것이어도 심판을 기다리며 경건히 사는 자에까지 시행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악인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신다. 반드시 그들의 죄를 벌하시고 이 땅에 자신의 공의를 세우신다. 다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악인을 벌하시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실 뿐이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에 대해 심판을 내리시겠다고 경고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함께 심판에 대해 준비하여 피하라고 사랑의 경고를 함께 보내고 계신다. 이러한 하나님은 가인의 범죄에도 그를 살리셨으며(창 4:15),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하시려고 의인을 찾고자 하셨으며, 이스라엘의 수없이 많은 타락에서도 그들을 회개시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시며 애통해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 모습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의 참 의미이다. 어리석은 인간은 이것을 오해하여 신의 죽음을 선언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의 폭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인내와 자비의 폭이 그처럼 넓은 만큼 심판은 엄정하게 실행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재앙을 내리신 이유는 그들을 돌이키기 위함이었으나 이스라엘이 회개를 거부하자 그들을 대면하시기로 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면 어떤 낯으로 대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 19:7).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 6:16). 어떤 사람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날을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환영하면 좋겠습니다.
| 적용 |
그대에게 하나님을 만날 준비란 어떤 것인지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우리가 전해야 할 기별- “우리가 전해야 할 기별은 ‘평안하다 안전하다’(살전 5:3)는 성질의 기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백성으로서 우리에게는 해야 할 사업이 있고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 4:12)고 전해야 할 기별이 있다. 우리는 표준을 높여야 하며 셋째 천사의 기별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전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2권, 150).
기도
아버지, 죄 많은 저로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보혈에 의지합니다. 저를 정결케 해 주옵소서. 야곱처럼 확신을 얻은 후에 ‘브니엘’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교만은 멸망의 선봉
4월 25일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옵 10).
도입)
오바댜는 여호와께서 그토록 가혹한 심판을 내리신 근거를 제시한다. 오바댜는 에돔 족속이 당할 심판과 멸망을 말하던 중 하나님 앞에서 응징 받기에 알맞은 에돔의 죄의 항목을 고발해 가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 고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선민이자 특별히 형제 족속인 이스라엘에 대해 그들이 행한 악독한 가해에 대한 내용이다. 형제인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들고 예루살렘이 함락 당했을 때에 이를 기뻐하고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약탈물 분배에 가담했던 에돔인들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에돔 족속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데 대한 근거는 바로 자신의 형제인 야곱에게 행한 포학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학(하마쓰)은 살인적인 폭력과 범죄를 의미한다. 형제에게 그토록 무서운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은 야만적임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형제'라는 단어는 야곱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에돔 족속의 간악한 범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여호와를 영원히 멸절하리라는 심판을 내리신다. 이후에 그들은 나밧 족속에게 페트라를 빼앗기고 마카베오에게 무서운 보복을 받는 등 소수의 무리를 제외한 전 민족이 멸절되는 결과를 실제로 맞게 되었다. 에돔 족속은 이삭의 장자인 에서의 후손으로서 곧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과는 형제 관계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이스라엘 민족과 끊임없이 싸워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당시 그들의 땅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모세의 요청의 거절을 필두로 하여(민 20:14-20) 사울, 다윗, 솔로몬, 여호사밧, 여호람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대적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삼상 14:47; 왕상 11:14-17; 대하 20:22; 21:8).
오바댜서를 읽어 보라. 이 책에서 배워야 할 도덕적, 영적 진리는 무엇인가? 오바댜서는 구약에서 가장 짧은 책으로서 에돔 땅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이상과 예언으로 전한다. 이 책의 기별은 세 가지 문제, 즉 에돔의 교만(1~4절), 에돔이 당할 수치(5~9절), 유다에게 범한 에돔의 잘못(10~14절)에 초점을 맞춘다.
에돔 민족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이다. 이스라엘 민족과 에돔 민족 사이의 적대감은 쌍둥이 형제 사이에 존재했던 가족의 불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창세기 33장에 따르면 두 형제는 후에 화해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신 23:7)는 명령을 내리셨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두 민족 사이의 적대감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을 때, 에돔 민족들은 그 사실을 기뻐했을 뿐 아니라 도망하는 백성들을 속이고, 예루살렘의 약탈을 도왔다(시 137:7). 에돔 민족은 가장 혹독한 시기를 보내는 유다 백성들에게 형제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원수의 편에 가담하였다(애 4:21~22). 그래서 선지자 오바댜는 에돔이 그들의 행위를 기준으로 심판을 받게 되리라 경고하였다.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것이라”(옵 15).
에돔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사해 남동쪽이었다. 그곳은 산악지대로서 높은 산봉우리, 험한 바위, 동굴, 군인들이 매복할 수 있는 바위틈이 많았다. 수많은 에돔의 성들이 접근하기조차 힘든 이런 지역에 있었다. 셀라(또는 페트라)는 에돔의 수도였다. 다음의 질문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에돔의 교만을 대변하고 있다.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옵 3).
부가적용)
에돔의 사악함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 대한 적대 감정이 전혀 없었고 그들에게 적대 감정을 가지기는커녕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적대 감정을 가질 때 율법을 통해 오히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희 형제니라'(신 23:7)고 규정함으로써 악을 선으로 갚았다. 그런데도 에돔인들은 역사를 흘러내려오면서 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덧붙여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그들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할례까지 받은 족속이라는 점이다. 즉 같은 믿음의 후예들로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하고 괴롭히고 짓밟는 추태로 연출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한 아버지로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 주로 섬기면서도 마치 원수 대하듯 성도 간에 헐뜯고 인격을 매도하는 자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에돔 족속이 가해하고 포학을 행한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형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이것은 중대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현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포학을 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에 대한 포학을 행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의미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괴로움을 끼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슥 2:8).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대적한 아말렉을 진멸하도록 명하셨고 대대적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출 17:8-16; 삼상 15:2, 3).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맏형 격인 천주교와 동생 격인 개신교 사이에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난 한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대적함으로 오랜 종교싸움으로 서로 대치해 왔다. 에서와 야곱 이 두 쌍둥이, 곧 두 형제간의 오랜 분쟁과 싸움은 바로 천주교와 신교의 싸움을 예표하지 않나 싶다. 우리도 천주교인들에 대하여 적대감을 버리고 저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저들이 우리를 적대시 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먼저 저들을 적대시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교훈: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뻐하고 가해자와 동조하여 그들을 이용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다른 사람의 실패와 고통을 기뻐한 적이 없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나님은 환난을 당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오바댜는 하나님이 교만한 백성 에돔의 머리를 수치스럽게 하시리라고 경고한다. 여호와 앞에서 피할 데가 없다(암 9:2~3). 여호와의 날은 동시에 심판과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에돔은 진노의 잔을 마실 것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복될 것이다.
| 적용 |
그대에게 적대적인 사람이 실패와 고난을 겪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행위대로 갚으심- “반면에 불행한 자에 대해 제사장과 레위인의 무관심을 나타내고, 타인의 불행을 통해 어떠한 이익이라도 챙기고, 스스로의 이기적인 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어려움을 증가시키는 이에 대해서 책에 기록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공정스러운 행위와 우리 중의 환난을 당한 자들을 부주의한 무관심으로 대하는 모든 행동에 대하여 분명히 갚아 주실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위대로 최종적으로 갚음을 받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3권, 513).
기도
아버지는 그 사람도 저와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구원하시려는 줄 압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며 동정하는 마음을 제게 주옵소서. 그에게 아버지의 구원과 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여섯째날(금)
4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스라엘 신앙의 초기부터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행할 백성으로 선택받았다는 믿음은 히브리인 신앙의 초석이자 환난 때의 피난처였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당대 백성들에게 이 초석이 걸림돌이자 도피처와 탈출구가 되어 간다고 느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선민됨을 하나님의 호의 또는 징벌로부터의 면제로 오해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응징에 더욱 가까이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했다. …선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돌보신다는 뜻인가? 출애굽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만 개입하고 다른 나라의 운명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인가?”- Abraham J. Heschel, The Prophets, 32~33.
“선지자들은 저희 시대의 현저한 압정과 극악한 부정, 보통이 넘는 사치와 방종, 수치를 모르는 연락과 술취함, 심한 방탕과 주색에 대하여 음성을 높여 경고하였으나 그들의 항의는 헛되었고 죄에 대한 그들의 탄핵은 허사였다. 아모스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암 5:10, 12)”(선지자와 왕, 28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대에게 무엇인가 유익을 주는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을 당해 그대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고 도리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합니까? 그대는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겠습니까?
2. 우리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 누리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의 복을 모릅니다. 그들 대부분은 사람이 죽자마자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간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과 문자적 재림을 믿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에 그와 같은 진리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책임이 있다는 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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