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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 그리스도로 꼴 지은 삶, 성령이 이끄는 말-(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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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3-08-14 02:16 조회2,3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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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그리스도로 꼴 지은 삶, 성령(聖靈)이 이끄는 말

                        (8월 19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20분) 


<기억절(記憶節)>

 “너희는 유혹(誘惑)의 욕심(慾心)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舊習)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心靈)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義)와 진리(眞理)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서언(緖言)>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구원(救援)받은 성도(聖徒)는 그리스도로 꼴 지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의 변화(變化)는 언어생활(言語生活)에서부터 부정적(否定的)인 말을 하지 않고 긍정적(肯定的)인 언어로 은혜가 있는 말로 하나님의 용서(容恕)와 사랑을 담은 말로 세상에 감화(感化)를 끼쳐야 한다. 이는 절대적(絶對的)으로 성령께서 이끄는 말을 통해서만이 가능(可能)하다.


(8월 13일) (日) 죄(罪)의 하향곡선(下向曲線) 


(Q)~사도 바울은 “영적(靈的)인 암흑(暗黑)과 영적인 삶의 대조(對照)됨”(엡4:17~24절)과 “개혁(改革)된 생활의 모습”(엡4:25~32절)에서 어떻게 죄(罪)의 하향곡선(下向曲線)에 대해 경고(警告)하고 있습니까?


(A)~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거듭난 새 삶에 대하여 새로운 삶을 언급(言及)한다. 그것은 ①.이교도(異敎徒)의 옛 생활이 아니라 ②.예수 그리스도를 본(本)받아 ③.실제로 나 자신의 부패(腐敗)한 지난 이방인(異邦人)의 행실(行實)을 버리고 ④.적극적(積極的)으로 죄의 무감각(無感覺)에 빠져 죄에 대한 분명(分明)한 자각(自覺)과 경계(警戒)를 갖고, 이웃을 위해 봉사(奉仕)하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의 부요(富饒)함을 세상에 나타내 보여주는 실천적(實踐的)인 삶이다. 즉 이방인(異邦人)의 생활 방식(生活方式)에 대한 바울의 경고(警告)는 죄에 관한 것보다 연합(聯合)을 해치고 구원(救援)에서 멀어지게 하는 죄를 따르는 삶의 “하향곡선(下向曲線)”(수치(數値)나 한도(限度)나 기준(基準) 따위가 점점 더 낮게 나타나는 곡선(曲線))에 대하여 경고(警告)하는 말씀이다. 


(8월 14일) (月) 최상(最上)의 옷으로 바꾸어 주심 


(Q)~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는 것”과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의 결정적(決定的)인 차이(差異)는 무엇이며? (엡 4:20)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形像)을 본받는 삶을 옷 입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바 최상(最上)의 옷으로 바꾸어 주심에 대한 영적의미(靈的意味)는? 


(A)~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는 것”과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의 결정적(決定的)인 차이(差異)는 ①.“그리스도에 대하여”라 함은 순종(順從)이나 인격적(人格的)인 관계없이 지식적(知識的)으로 아는 것을 의미(意味)하며, ②.“그리스도를” 이라 함은 주님과의 인격적(人格的)인 연합(聯合)으로 순종(順從)하며 따름으로써 배운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흠 정역), "그 안에서"(엡 4:21) 또는 "그분에게서"(흠정역)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면서 "진리(眞理)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엡 4:21)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실천(實踐)하라고 말하면서, 다음의 세 단계의 과정 즉, 

(1) 옛 삶의 방식을 "벗어 버리고"(엡 4:22) 거기서 돌아서는 것, 

(2) 내면의 새로움을 경험(엡 4:23), 

(3) 거룩한 새 삶의 방식을 "입"는(엡 4:24) 은유(隱喩)를 통해 말씀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옷(衣)”이 죄의 상징(象徵)과 (시편 73:6, 슥 3:3, 4, 말 2:16)과 구원(救援)(사 61:10, 겔 16:8, 슥 3:4, 5)의 상징(象徵)으로 사용된 구약성경(舊約聖經)의 은유(隱喩)를 인용(引用)했다.


(8월 15일) (火) 공동체(共同體) 만들기, 은혜(恩惠)를 담은 말

 

(Q)~신자(信者)들 사이의 언어생활(言語生活)에 관한 바울의 권면(勸勉) 중에서 말이 얼마나 중요(重要)한지 말(언어(言語)의 공동체(共同體)를 헐기도 하고 분쟁(忿爭)과 많은 폐해(弊害)를 안겨준다고 경고(警告)하면서 말에 대한 어떤 권면(勸勉)을 하고 있습니까? (엡 4:25~29)


(A)~우리는 눈만 뜨면 하는 게 '말'이다. 자신의 감정(感情)이나 욕구(慾求)의 전달, 표현(表現)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말로 주고받는다. 말이 얼마나 위력(威力)이 있는가를 야고보는 (약 3:4~8절)에 3가지로 소개(紹介)했다. (1) 큰 배를 움직이는 키로 비유했고, (2) 세상을 태우는 불로 비유를 했고, (3) 길들일 수 없는 혀로 비유했다. 이처럼 말은 참으로 중요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권면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어서 언어(言語)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고 은혜가 있는 말을 통하여 덕(德)을 세우는 말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엡 4:25~29)


(8월 16일) (水) 신자(信者)들의 삶에 함께하시는 성령(聖靈)


(Q)~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共同體)에서 발생하는 말의 죄를 논(論)하면서 성령의 임재(臨在)에 대해 신자(信者)들에게 무엇이라 호소(呼訴)하며, 잘못된 말이 하나님의 성령(聖靈)을 근심케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엡 4:30)


(A)~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恩賜)인 “말”을 오용(誤用)하여 남을 헐뜯고 비방(誹謗)하며 다투므로 성령을 근심케 한다. 이는 말의 은사(恩賜)를 잘못 사용하므로 성령을 근심케 하지만 성령께서 떠나시는 것이 아니며 그분을 슬프게 하고 모독(冒瀆)을 당할 수 있지만, 성령이 떠나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님은 신자(信者)들과 함께하시기를 원(願)하신다. (엡4:30)


(8월 17일) (木) 친절(親切)


(Q)~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준비(準備)하는 자로서 우리는 말과 관련된 어떤 태도(態度)와 행동(行動)을 벌여야 하고, 어떤 모습과 행동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엡 4:31, 32)


(A)~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의 서신(書信)에서 말씀하시기를 신자(信者)들에게 구속(救贖)즉 구원(救援)의 날까지 인(印)치심을 언급(言及)하면서 언행(言行)에 대하여 명심(銘心)해야 할 맥락(脈絡)을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信者)들에게 베푸신 용서(容恕)가 “수직적 용서(垂直的容恕)”를 우리가 서로에게 베푸는 용서를 “수평적 용서(水平的容恕)”로 적용(適用)하는 설명을 하고 계신다. 이는 악(惡)한 말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恩惠)스러운 언어(言語)로 대체(代替)하라는 권면(勸勉)이다. 이것이 곧 선악간(善惡間)의 열매 맺는 씨가 된다는 것이다.



 




******************<말미부록(末尾附錄)>**************** 


<말의 위력(威力)에 대해서>

(잠 18:20~21) 외에 성경 여러 곳에서 말에 대한 명언(名言)을 말씀하시고 있다. (잠언 21:23 절)는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란에서 보전하느니라“

⑴.말의 힘 : 살리는 능력(能力) vs. 죽이는 능력(能力)

⑵. 살리는 말 : 지혜(知慧)로운 말, 선(善)한 말 

<① 존경(尊敬)의 말 : ② 격려의 말 : ③ 축복(祝福)의 말 : ④ 생명(生命)의 말:>

⑶.지혜(知慧)의 말을 하는 비결(祕訣) : 말씀 충만(=성령충만(聖靈充滿))에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혜로운 말을 잘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한 마디로 ‘말씀 충만’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마음속에는 죄성이 있습니다. 죄 (赦)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책(罪責)에서 벗어났을 뿐 죄성(罪性)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肉身)의 욕망(欲望)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생각(生覺)을 하게 되고 나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이 변화(變化)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회개(悔改)함으로 마음속의 나쁜 것을 제거(除去)하고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로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充滿)하면 하나님께 찬송(讚頌)과 기도(祈禱)가 나오고, 서로에게 지혜로운 권면(勸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님처럼 말하게 됩니다. 말씀 충만하면 성령 충만(聖靈充滿)해지고,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컨트롤해 주십니다. 

<(골 3:16~17)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말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다는 걸 일찍부터 우리 조상님(祖上 任)들께서는 지혜가 담긴 말씀으로 남겨주셨다.①.'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②.'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③.'세 치 혀가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라고 까지 했으니 이는 말이 갖는 위력(威力)을 대변(代辨)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말의 현주소(現住所)는 그 사람의 마음 밭이다. 

칼에 찔린 상처(傷處)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말로 인(因)한 상처(傷處)는 마음에서 평생 치유(治癒)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말에는 무한(無限)한 생명력(生命力)(능력)이 있다. 말이란 생각이나 사상(思想)을 담는 그릇이며 생명력의 원천(源泉)이다. 말은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이다. 꿈이 미래를 창조하는 재료인 것처럼, 말이나 언어도 행동을 창조하는 씨앗이 된다. 비전은 사람의 생각 속에 담겨 있지만, 그 생각을 표현해 말을 하는 순간 에너지 파동으로 굉장한 위력이 나타난다. 


사람의 뇌(腦)는 우리가 하는 말 그대로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라고 말하면 정말 세상은 그 순간(瞬間)부터 좋아지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현실은 점점 팍팍해진다. 마음과 마음을 표현하는 말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조정한다고들 한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활용하고 말하고 믿고 인정할 때 이 정보는 입력되어 뇌 쪽으로 건너간다. 제어장치(制御裝置)에서 나쁜 것을 걸러낸 후 긍정적(肯定的)인 에너지로 변환(變換)되어 뇌로 간다. 뇌는 이 정보를 손과 발 혀에 전달한다. 우리 손과 발, 그리고 혀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입력하여 역시 긍정적이고 건강한 행동과 말을 출력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늘 희망(希望)과 용기(勇氣), 그리고 행복(幸福)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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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지체가. 거짓말로 인해 형제의 연합이 깨지기 쉬우며, 속임으로 인해 지체들이 서로 대적하게 된다(참조 고전 12:15). 완전한 확신에 기초하지 않는 한, 사람 사이에는 진정한 연합이 생기지 못한다(참조 슥 8:16). (엡 4:17~25, 재림교주석)


거룩함의 비밀(히 12:14)(살전 4:3 참조)

날 때부터 거룩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서 거룩함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거룩함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들은 그분의 영적 자녀들로서 거듭나고,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새롭게 된다. 그들의 마음은 변화되었고, 보다 분명한 시력으로 영원한 실재(實在)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속으로 입양되었고, 그분의 형상을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된다. 자아에 대해서 최고의 사랑을 품고 있던 것을 떠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최고의 사랑을 품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의 모본을 따라 자기 부정의 길을 따르는 것- 이것이 거룩함의 비밀이다(사인즈 1902. 12. 17).


매일 매 순간마다 필요한 은혜(고후 3:18)

영혼의 성화는 믿음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확고부동하게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리의 능력은 마음과 품성을 변화시킨다. 그 결과는 화판 위에다 여기저기 물감을 조금씩 묻혀 놓는 것과 같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품성 전체가 변화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모습이 말과 행동에 나타나는 것이다. 새로운 본성을 나누어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아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매일 매시간 꼭 필요하다. 만약 그리스도의 은혜가 계속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면 타고난 마음의 이중성이 드러날 것이며, 생활에는 이중 봉사의 징후가 나타날 것이다. 품성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역사하는 곳은 어느 곳에서나 그것은 땅에 있는 기쁨보다 더 많은 기쁨, 땅에 속한 평화보다 더 차원 높은 평화로써 생활의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밝게 하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편지 2a, 1892).


(엡4:20) 그리스도를…배우지. 

이것은 이교도의 생애와는 대조적으로 제시돼 있다. 

이 구절은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안다.”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인다(고후 5:16; 빌 3:10; 요일 4:7). 


“그리스도를 배웠다”라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해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이자 변론자와 중보자인 그분의 직분과 사업을 잘 알고 그분이 이루신 속죄 사업의 은전을 생애에 누리는 것이다. 

예수는 친히 “내게 배우라”(마 11:29)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모본으로 제시하셨는데, 이는 자신을 위대한 교사가 아니라 지식과 믿음의 대상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엡 4:20, 재림교주석)


친절한 말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음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가져다주고, 할 수 있는 모든 친절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친절한 말들은 결코 사라져 버리지 않고, 예수 님은 그 말을 예수 님 자신이 직접 들으신 것같이 기록해 두신다. 친절과 사랑과 부드러움의 씨를 뿌리라. 그리하면 그것들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것이다(원고 33, 1911). (엡 4:25~32, 화잇주석)


더러운 말은 불가함

우리는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더러운 말은 단순히 야비하고 저속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보는 시야를 흐리게 하는 어떤 말이며, 영혼으로부터 참된 동정과 사랑을 지워버리는 어떤 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표현되지 않고 오히려 비그리스도인 적 품성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다. (편지 43, 1895).


완전한 표적에 이름(골 2:10; 계7:2, 3; 14:1-4) (겔 9:2-4; 행 2:1-4, 14,41)

성령의 강력한 힘이 인간 대리자의 품성 속에 완전한 변화를 일으켜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 어떤 사람이 성령이 충만해졌을 때 그가 심한 시련과 시험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만큼 더욱 분명하게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입증한다. 영혼 속에 있는 평화가 얼굴에 나타난다. 말과 행동은 구주의 사랑을 나타낸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애쓰지 않는다. 자아를 포기하고 그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 위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적힌다.


우리는 성령의 축복에 관하여 이야기할는지 모르지만,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분의 충만하심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 앞에 있는 푯대, 곧 그의 품성의 완전을 위하여 언제나 달려 나아가고 있는가? 주의 백성들이 이 푯대에 다다랐을 때 그들의 이마에는 인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할 것이며, 기록하는 천사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것이다(리뷰 1902. 6. 10).


선(善)한 말.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부적절한 말을 삼가는 정도에 머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말로 유용한 목적을 성취해야 한다. 예수는 무익한 말, 즉 선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다. (마 12:36).(엡 4:25~32, 재림교주석)


용서(容恕)하기를. 

인자함과 불쌍히 여김이 용서의 정신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유익함이 별로 없게 된다. 기꺼이 용서의 단계를 취하지 않는다면 인자함은 일종의 공손함이나 예의 바른 것에 불과할 것이다. 용서의 정신은 이상이나 덕성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마음과 영혼의 확신 있는 태도이다.

주님은 친히 우리가 따르고자 노력해야 할 유일한 모본이 되신다(마 6:12; 눅 6:36). 인간을 위한 용서는 무한한 값으로 산 바 되었지만, 인간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데는 개인의 자존심을 희생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값도 지불하지 않는다. 우리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에 비추어 헤아려야 하는데(참조 마 18:32, 33), 그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경탄하게 되는 사실이다. (엡 4:25~32, 재림교주석)


그리스도 안에서(For christ’s sake). 

문자적으로 서신의 핵심 구절인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리스도를 위해서”(for Christ’s sake)라고 번역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런 독법은 하늘 아버지가 용서하기 전에 죄인을 향한 가혹한 의향을 포기하도록 그리스도에게 설득당해야 했다는 잘못된 개념을 지지하게 된다(롬 5:10; 고후 5:19).


너희를(you).

우리를”(us) 이라는 독법(讀法)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 문상의 증거(證據)를 인용할 수 있다. (엡 4:25~32, 재림교주석)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인자’는 본서에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타난다(2:7). 이것은 타인의 필요를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다(고후 6:6, 갈 5:22, 골 3:12). 또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자비’, ‘인자’와 함께 신약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타인의 필요에 공감하고 동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서로’에게 표현해야 하는 덕목이다.


(16)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 … 과같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도스 카이’은 ‘일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하신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동 기준과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Lincoln).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구원 행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위인 원형(原型)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용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타인에 대해 용서해야 하며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용서 자세는 반드시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Wood). 한편 ‘하라’의 헬라어 ‘기네스데’은 실제로 ‘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를 본받아 그렇게 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를 본받아 그렇게 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서로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 가운데서 반드시 드러나야 할 행위이다. (엡 4:25~32, 만나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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