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성소에서 얻는 교훈(강해식 과정연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10-20 08:38 조회5,341회 댓글0건첨부파일
- 04제4과 성소에서 얻는 교훈.hwp (80.0K) 63회 다운로드 DATE : 2013-10-20 08:38:51
본문
제4과 성소에서 얻는 교훈
10월 26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1분
기억절 :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연구 범위 : 출 40:9~10, 레 19:2, 벧전 1:14~16, 출 31:2~11, 롬 3:25~28, 왕상 8:31~53, 시 73:1~17.
도입)
성소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 성소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렘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17:12) 우리의 성소이신 여호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성소이심을 알게 된다. 이 성소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주님의 몸된 성전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18-21) 이 성소의 이야기 이 성전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고 이 성전은 몸된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썩지 아니할 몸된 성전의 건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가르침을 위해 이 성소는 세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성소를 통해 존귀와 위험,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 모두를 이 성소를 통해서 보게 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시96:6) 우리가 배우게 될 이 성소 속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와 위엄, 그리고 그분의 능력과 아름다움 그리고 영생이 숨겨져 있다.
성소는 복음의 의미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주제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아래 그림은 이번 주의 성소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성소 평면도> 생략
이번 주 교과는 제사 제도 외에 지상 성소에서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성소 기별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다윗이 성소에서 얻은 경험을 모방한다.
➌ 행하기 : ‘성소에서 드리는 기도’뿐 아니라 ‘성소에서의 삶’을 경험하기로 결심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우리가 이웃의 집을 방문하면 그 집주인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습니까?
❷ 시 27편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집을 그리워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우리가 성전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❹ 성전이 요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B. ❶ 각자 자신의 집에서 교회에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말해 봅시다.
❷ 성소가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❸ 성소가 영적인 만남의 장소였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일에 더욱 힘써야 할까요?
❹ 우리는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 누구를 인도해야 할까요?
결론 : 우리는 성소로부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진실 그리고 선하심에 대한 교훈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다음 주에 있을 분반에 대하여 다시 안내합니다.
❷ 영적 후견인 관계가 잘 유지되는지 확인합니다.
❸ 분반 계획과 영적 후견인 관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임재의 공간
10월 20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교사강해 1)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성전이었다. 왜냐하면 이 성소가 하나님께서 거하실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이 낮은 땅에 친히 강림하시어 인간과 함께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때 이것은 놀라운 구속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성소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했던 것은 이 낮고 낮은 땅에 예수께서 육신을 쓰시고 오실 그분의 몸된 장막의 표상이었다. 인간 역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아니던가?(고전 3:16) 이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어 거룩하지 않은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화목제물이 되시고, 세상의 떡과 세상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과 사귐 속에 살도록 이끄신 것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도록 완성시키신 그리스도 사역의 압축인 것이다. 더욱 궁극적인 것은 임시 가건물이었던 성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표상인데 인간을 위해 인간과 같은 육신의 겉옷, 장막 곧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고 있다.
출 25:8에 따르면 광야에 세운 지상 성소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어떤 놀라운 사실을 가르치는가?
죄는 하나님과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직접적인 관계를 파괴시켰다. 그러나 창조주는 여전히 우리를 그분께로 이끌어서 타락한 인류와 깊은 언약적 관계를 맺기 바라셨다. 그래서 그 계획을 바로 에덴에서부터 착수하셨다. 여러 세기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구하시고 성소와 제사 제도를 수립하심으로써 주도적으로 인류를 다시 그분의 임재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성소는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끝없는 열망을 증명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다(시 132:13~14). 그분의 궁극적 목적은 관계에 있다. 그래서 성소 봉사는 그러한 관계를 예증하기 위해 선택된 방편이었다. 성소는 하나님이 지상에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가시적인 증거였다.
민수기 2장을 보면 성막은 정사각형의 야영지 중앙에 위치해 있었는데 고대 근동의 관례에 의하면 중앙은 왕의 장막이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반면 레위인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주위에 장막을 쳤다(민 1:53). 그다음 각 부족이 조금 멀리 떨어져 세 부족씩 사방에 진을 쳤다(민 2:2). 이는 가시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근접성과 거리를 동시에 설명하였다.
성소의 다른 목적은 하나님이 명하신 중앙 집중적인 예배 제도를 위한 위치 마련에 있었다. 백성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의 부정과 도덕적 실패로 말미암아 위태롭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거룩하지 않은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고 머물 수 있도록 희생과 제사 제도를 마련하셨다. 성소는 제사뿐 아니라 제사장 봉사를 포함하여 구원의 계획을 상세하게 계시하였다.
부가적용)
옷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 겉옷과 속옷이다. 겉옷은 남이 볼 수 있는 옷이고 속옷은 자기만 아는 옷이다. 겉옷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속옷은 보이지 않는 숨겨진 옷이다. 진리에도 두 가지가 있다. 겉으로 보이는 진리와 속으로 감추어진 진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요 12:44-45절에 우리가 이해하기 매우 힘든 말씀을 하셨다. 요12:44-45절에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고 하셨다. 예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보낸 분을 믿는 것이 되고 어떻게 예수님을 보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 될까?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 시길래 그럴까? 왜 예수님을 보는 것이 그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 될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입으신 겉옷 때문이다. 지금 예수께서 자신이 입고 계신 겉옷이 있으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육신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인간과 마주 대하기 위해 그 자신이 육신을 쓰신 것은 이 지구별에 오시기 위해서 입으신 지구 옷일 뿐이다. 예수께서 입으신 이 육신의 옷은 “지구복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입으신 육신의 옷은 그분의 겉옷이지만 그렇지만 예수께서 입으신 진정한 그분의 속옷, 곧 그분의 정체는 무엇이었는가? 빌2:5-7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입고 계신 겉옷은 인간의 육신이셨지만 그분의 실제적인 속옷은 하나님 자신이셨음을 보여주셨다. 성막의 겉옷의 진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성막의 진정한 속옷 진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썩지 아니할 몸 영생의 진리에 있다. 예수께서 요 17:3절에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여러분이 참 하나님을 아시려면 그의 보내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걸치신 겉옷만 보시고 예수님을 판단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진정한 속을 잘못 보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가 매우 중요한 구원의 시금석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훈 : 성소는 백성과 함께하려는 하나님의 열망의 가시적 표현으로써 죄인들이 그분을 가까이하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 살 수 있도록 돕는 제도를 포함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삶은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그 사회는 성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신앙이 그들의 일상과 정신세계의 중심축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가 신앙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의 부수적인 요소일 뿐 다른 목적과 관심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최우선적 목적이 신앙과 충돌할 때 너무도 쉽게 신앙은 후순위로 밀려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최우선 순위에 있는데 말입니다.
| 적용 |
그대는 신앙 중심의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결심을 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우리 가운데 거하심 - “그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루한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인간의 진영 가운데 당신의 성막을 세우셨다. 그가 사람의 장막 곁에 당신의 장막을 치신 것은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품성과 생애에 친숙하게 만드시기 위해서였다”(시대의 소망, 23).
기도
하나님,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계획하든, 무엇을 행하든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모든 관심과 고려의 가운데 하나님을 첫째 자리로 모시기를 원하오니 우리의 결심을 받아 주시옵소서.
둘째 날(월) “너희는 거룩하라”
10월 21일
“또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너는 또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그 안을 거룩하게 하라 그 제단이 지극히 거룩하리라”(출 40:9~10).
교사강해 2)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에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다. 거룩함을 윤리에만 국한 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물론 거룩과 윤리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마음에 큰 부담을 안고 살고 있는데 이것은 거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거룩한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딤후 1:9-1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9-10) 이곳에 말씀하신 거룩은 인간의 행위와 결부시킨 거룩이 아니라 예수께서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거룩이란 사망을 폐하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어 당신을 믿는 백성들도 거룩하게 곧 썩지 아니할 생명으로 만드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성도라 부르는 것은 우리라는 존재가 깨끗하거나 윤리적으로 완벽해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다. 값없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어 우리의 생명 역시 영생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라 성도,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거룩이란 말에는 겉에 나타난 진리와 속에 보여 지는 진리가 있다. 인간이 거룩지 못하다는 것은 썩어 없어질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래 거룩이란 말은 썩지 아니할 존재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직 죽지 아니함에 거하는 존재에게만 붙일 수 있는 말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은 아무도 거룩할 수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 자만이 거룩한 존재로 여김을 받을 뿐이다.
출 40:9~10은 성소가 거룩하게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거룩성의 기본 개념은 ‘하나님께 속함’이라는 의미와 결합하여 ‘분리됨’ 그리고 ‘특별함’이다.
“상징적 봉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연결 짓는 고리였다. 희생 제물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에 장차 오실 구세주에 대한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갖게 하려는 데에 있었다. 성소와 관련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거룩한 심령, 생활의 순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엄격한 순종이 요구되었던 것은, 주께서 그들의 재물을 받으시고, 계속해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 위함이었으며, 한편 백성들은 구원의 계획과 자신들의 의무를 바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화잇 주석, 삼상 2:12~17).
레 19:2과 벧전 1:14~16을 읽어 보라. 백성들이 거룩해야 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성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를 분리하여 구별시킨다. 그분의 거룩성은 그의 백성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윤리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궁극적인 동기이다(레 19장 참고). 그래서 식사법(레 11:44~45)을 준수하고, 제사장을 존경하며(레 21:8), 이전 욕망에 순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벧전 1:14).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며 그분께 가까워지기를 바라신다. 이런 변화는 오직 죄악의 본성을 굴복시키고 결과와 상관없이 의로운 일을 행하려는 자발성에서 비롯된다.
부가적용)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고 했을 때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여러분은 무슨 옷을 입었다는 것인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고 하셨다. 인간이 그리스도로 옷 입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입게 된 옷은 하나님의 형상 곧 썩지 아니할 영광의 옷을 입게 된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다. 도덕적인 윤리와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요일 5:1)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옷, 썩지 아니할 옷을 입은 영생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다고 해도 내 자신의 속성이나 본성 자체인 인간성 자체가 변화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가려 하는 것이지 윤리적인 거룩을 흉내 내거나 윤리적인 완전을 이룩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윤리적인 거룩을 살지 못했다. 다니엘이라도 그의 윤리적 완전이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 섰을 때 고백을 보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단10:8]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제는 그리스와 같은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할 영생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교훈 : 성소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거룩함 속에서 죄악의 본성을 버리고 의롭게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거룩할까요?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속과 부정으로부터 구별된 생애를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단순히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결코 이 명령을 완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뿐 아니라 목적과 동기, 생각과 행동, 취미 그리고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취향을 모두 포함합니다.
| 적용 |
거룩한 생애를 살기 위해 그대에게 필요한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참된 회개와 거룩함 -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외투가 아니다. 품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 생애의 원칙이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원칙에 마음과 생애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555).
기도
아버지, 저는 스스로 거룩할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하여 아버지의 소유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것으로 구별하여 주시옵소서. 신성한 목적에 합당한 생애를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셋째 날(화) 성소의 기구들
10월 22일
“곧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의 속죄소와 회막의 모든 기구와 상과 그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무릇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출 31:7~11).
교사강해 3)
성소의 기구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루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성소의 진리는 인간의 겉과 속을 어떻게 거룩하게 만드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번제단에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또한 죽음을 경험하고 물두멍에서 씻음을 통해 우리의 신분 세탁을 해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함께 죽음으로 우리로 더 이상 죄의 책임으로부터 분리시켜 주셨다. 우리의 신분의 세탁은 그리스도의 안에서 죽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물두멍의 경험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갈 3:27). 그리고 이제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세탁된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데,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경험, 곧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라”(요 5:39)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떡,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먹고 살면서 하늘의 법도와 하늘에서 이루어질 삶을 배워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분이 변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된다. 어두움에서 기이한 빛으로 불러내신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곱 촛대에 나타난 삶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분향단의 기도처럼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특권과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법도인 십계명을 지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교제와 예배와 교육 등의 모든 과정은 하늘에 들어가 살 하나님의 백성들의 훈련의 장소인 것이다.
출 31:2~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지상 성소에 둘 기구 제작에 관하여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가? 이는 창 1:2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출 25:9 참고)
성소의 모든 기구 가운데 증거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성을 나타내는 최고의 상징이었다. “증거”(출 32:15~16)라고 불리며 그 궤에 보관되었던(출 25:16, 21) 십계명 돌판에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궤위에는 “시은좌(mercy seat)”가 놓였고, 그룹 천사 둘이 날개로 그 위를 덮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출 25:17~21). 그것은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이 백성들과 화목하시고 그들과 언약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속죄소”라고 불릴 만하였다.
여기서 매년 한 차례 속죄일마다 백성과 성소를 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레 16:14~16). 롬 3:25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일컬어 ‘속죄소’(‘화목제물’ 또는 ‘속죄 제물’이라고 번역됨)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속죄가 이루어진 곳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며 하나님도 그분을 통해 우리를 위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성소의 첫째 칸에서 등잔대는 지속적으로 빛을 냈고(레 24:1~4), 분향단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제사장들을 보호하기 위한 연기를 생산했다(레 16:12~13). 떡상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떡 열두 덩이가 진설되어 있었다.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도 상 위에 두었다(출 25:29~30). 비록 이 기구들의 중요성에 대해 정보는 거의 없지만 그것들은 언약적 식사를 대표하는 구성 요소로서 출 24:11을 연상시키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을 항구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가적용)
성막의 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의 변화를 가져온 사람들이 그 신분에 맞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이끄신다. 성소 속의 모든 기구들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표상은 곧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있다.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그분의 생명의 빛을 통해 비추임을 받은 빛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 주님을 이 땅에서도 대면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법도를 따라 순종의 공과를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 성소가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교훈 : 성소의 여러 기구는 하나님이 우리의 속죄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하시고 그분과의 언약적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나타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성소의 여러 기구는 그대에게 어떤 영적 깨달음을 줍니까?
성소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기록한 십계명을 담은 증거궤가 있었고, 그 위에는 속죄의 은혜를 베푸는 시은좌가 있었습니다. 그 위에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번제단에서 바치고, 물두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중생의 씻음을 받으며, 떡상에서 생명의 떡이신 그분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십니다. 그리고 등잔대에서 세상의 빛이신 그분을 반사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분향단에서 그분의 공로를 섞은 기도의 향을 올리며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나눕니다.
| 적용 |
성소를 통해 보았을 때 그대에게 부족한 영적 경험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하늘 성전의 희미한 반영 - “황금 촛대에서 비치는 빛을 반사하는 순금으로 입혀진 벽들과, 찬란한 천사들을 훌륭하게 수놓은 빛나는 커튼의 찬란한 색조, 금빛으로 번쩍이는 떡상과 향단, 둘째 휘장 너머의 거룩한 법궤와 신비한 그룹들, 그 위의 쉐키나 곧 여호와의 임재의 가시적(可視的) 현현(顯現),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구속을 위한 사업의 중심이 되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들의 희미한 반영에 지나지 않았다”(부조와 선지자, 349).
기도
아버지의 보좌로 나아가는 길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가 살아 숨 쉽니다. 생명으로 가는 이 거룩한 길을 계속 걷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희생으로 맺은 이 언약을 끝까지 붙잡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 날(수) 10월 23일
거룩한 공동 활동의 중심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주의 종과 주의 백성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30).
교사강해 4)
성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는 장소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7],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 성소가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 우리의 만남의 시작이 있다. 우리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예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것처럼, 우리의 예배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믿음으로 불리어 지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어지는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되고 성전이 된다.
왕상 8:31~5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성소의 기능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더 가르치는가?
성전 봉헌식에서 솔로몬 왕은 성전에서 드릴 수 있는 일곱 종류의 특별한 기도를 올렸다. 이 일곱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속에서 성전의 광범위한 역할을 예증한다. 성전은 용서를 구하는 곳이고(30절), 맹세하는 곳이며(31~32절), 패배할 때 간구하는 곳이고(33~34절), 가뭄을 만났을 때(35~36절) 또는 다른 재앙을 만났을 때 탄원하는 곳이며(37~40절), 이방인이 기도하는 곳이고(41~43절), 승리를 탄원하는 곳이다(44~45절).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그리고 모든 백성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마음에 그렸다. 이러한 사실에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이 되는 것이 성전의 목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성소는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사의 이상적인 중심지였다. 종교는 삶의 핵심 영역이기도 하지만 신자들에게 그것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자체였다. 이는 신앙이 우리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가?
백성들이 조언이나 판결을 받고 싶거나 또는 죄를 회개해야 할 때, 그들은 성소로 갔다. 성소는 또한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는 동안 생활의 중심축이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대화하기를 원하실 때, 그분은 성소를 통해 그렇게 하셨다(출 25:22). 그래서 ‘회막(tent of meeting)’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레 1:1).
부가적용)
성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과 삶의 축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 성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활과 삶의 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정된 성소가 아니시라 어느 곳이든 우리와 함께 움직이시는 성소이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우리의 삶의 장막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든지 제단을 쌓았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성소이며, 바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성소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교훈 : 성소는 단지 신앙이 우리의 중요한 영역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중심이며 심지어 모든 것이 되어야 함을 가르쳤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성소에서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성소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고,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 성도가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건물도 이와 같은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자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 적용 |
그대는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 누구를 인도하기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인 생애의 위대한 중심 -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삶과 뚜렷하게 구별된 생애를 살아야 한다. 세속적인 생애는 값싼 인생의 생애이다. 그런 생애는 영적 생활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 위대한 중심을 가지고 있다”(청년 지도자, 1895. 1. 10.).
기도
아버지를 만나고, 반가운 교인들과 만나며,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인도하기 위해 곧장 교회로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이 교회와 가까워지고 제 집도 교회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10월 24일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교사강해 5)
계란에 겉껍질이 있으면 그 껍질 속에 흰자가 들어있고 흰자 속에 노른자가 들어있다. 그러나 흰자와 노른자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노른자에 붙어 있는 핵 즉 노른자 위의 배아, 즉 생명을 잉태시키는 배아의 눈이 들어 있다. 만약 이 생명을 잉태시키는 배아의 눈이 없다면 달걀은 생명을 잉태시킬 수 없는 무정란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무정란과 같은 우리의 인생의 배아의 눈 곧 생명이 되셨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곧 노른자로 양육을 받고 흰자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 성소는 우리의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양육시키는 생명의 인큐베이터이다. 교회가 바로 그런 양육의 장소이다. 교회인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은 모든 생명 속에 씨를 맺게 하는 열매 속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다.
시편은 여러 번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에 성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다윗은 시 23:6에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결심했다. 다윗의 염원은 여호와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었다(시 27편). 그런데 그분의 임재는 성소 안에서 가장 잘 경험할 수 있었다. 성소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보여주기 위하여 다윗은 성소를 의미하는 모든 단어, 즉 여호와의 집, 성전, 초막, 장막을 총동원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묵상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성소였다(시 27:4).
성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은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예증한다. 그분은 예배자를 안전하게 지키고 환난 날에도 그를 성소에 숨기신다(시 27:5). 하나님은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시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심령의 평안을 보장하신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자기 백성을 위한 그분의 행위와 연결시킨다. 게다가 성소 봉사는 그 상징적인 중요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를 드러낸다.
다윗은 단지 성소 안에서 살 뿐 아니라 야훼가 자신과 함께 계시기를 궁극적으로 바랐다. 그래서 이런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기로 결심한다(시 27:4, 8).
시 73:1~17을 읽어 보라. 성소에 들어간 후에 아삽은 어떤 통찰을 얻었는가?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고통의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의인이 고난을 겪을 때,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4~12절). 그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1~3절). 그러나 그가 성소에 들어갔을 때 관점이 달라졌다(13~17절). 거기서 아삽은 다윗이 시 63:2에 언급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상황이 언젠가 변화될 것이며 공의가 실현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가적용)
인간의 죽을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새생명을 태어나게 할 새생명의 인큐베이터가 성소이다. 어떻게 새생명이 하나님의 생명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곳이 곧 성소이다.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는 그 구원의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인간을 영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아름다운 청사진이 담겨진 이 신비의 장소가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골 1:26-27, 골 2:2-4)이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아름다움을 이 성소가 보여주고 있다. 죄인된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 속에 감추어진 보화를 맛보아 알게 되기를 바란다.
교훈 : 성소는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공간일 뿐 아니라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피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 그리고 그분의 공의를 깨닫는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도 다윗처럼 성전에서 살고 싶다면 그것은 어떤 마음일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는 진리를 새롭게 인식했고 마침내 악인은 넘어질 것이며 의인은 안전하리라는 보증을 받았다(시 73:18~28).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성소는 확신의 장소와 생명의 요새가 되며,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높은 바위 위에 두신다(시 27:5). 성소 봉사가 가르치는 진리로부터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 적용 |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그대의 마음을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악인의 번영을 허락하시는 이유 - “하나님께서 악한 자가 번영하고, 그들이 당신께 대한 적의(敵意)를 나타내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악의 잔이 찰 때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완전한 멸망 가운데서 그분의 공의와 자비를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48).
기도
아버지, 저도 아버지 집에 살 수 있게 하옵소서. 그곳에서 완전한 평화와 위로와 쉼을 찾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어느 고급 주택 주인이라도 아버지 집 문지기보다 행복하지 못할 줄 믿습니다.
여섯째 날(금)
10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343~358 “성막과 그 봉사”를 읽으라.
“성소를 건축하기 위하여 많은 준비와 값진 재료들이 필요하였고 다량의 가장 귀중하고 비싼 재료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원하는 헌물만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출 25:2)으라고 모세를 통하여 회중에게 반복해서 명령하셨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희생의 정신이 지극히 높으신 분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는 데 있어서 첫째 필요조건이었다”(부조와 선지자, 34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하나님의 공의의 문제를 좀 더 묵상하십시오. 이 땅에서는 공의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세상에서 공의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➋ 어떤 이는 “성소란 갈 길을 잃어버린 이 세상 가운데 한 조각의 거룩한 땅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대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➌ 벧전 1:14~16을 읽으십시오. 그대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➍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과 가까웠지만 그분의 거룩함을 인정하지 않았던 백성들의 한 예입니다(삼상 2:12~17).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하여 무감각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자각을 유지하는 데에 기도와 말씀 연구, 순종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➎ “매일의 봉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개인들을 위하여 수행하는 봉사였다. 회개하는 죄인은 자기의 제물을 성막문으로 가져와서 그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들을 고백하였다. 이 상징적인 행위에 의하여 죄는 그에게서 흠 없는 제물에게 옮겨갔다. 그는 자기의 손으로 그 짐승을 죽였고 제사장은 그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죄인이 범한 신성한 율법이 들어 있는 법궤 앞에 있는 휘장 앞에 뿌렸다. 이 의식에 의하여 그 죄는 피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성소에 옮겨졌다”(부조와 선지자, 354). 이 인용문은 성소 봉사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가 계시되어 있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10월 26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1분
기억절 :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연구 범위 : 출 40:9~10, 레 19:2, 벧전 1:14~16, 출 31:2~11, 롬 3:25~28, 왕상 8:31~53, 시 73:1~17.
도입)
성소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 성소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렘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17:12) 우리의 성소이신 여호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성소이심을 알게 된다. 이 성소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주님의 몸된 성전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18-21) 이 성소의 이야기 이 성전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고 이 성전은 몸된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썩지 아니할 몸된 성전의 건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가르침을 위해 이 성소는 세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성소를 통해 존귀와 위험,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 모두를 이 성소를 통해서 보게 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시96:6) 우리가 배우게 될 이 성소 속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와 위엄, 그리고 그분의 능력과 아름다움 그리고 영생이 숨겨져 있다.
성소는 복음의 의미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주제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아래 그림은 이번 주의 성소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성소 평면도> 생략
이번 주 교과는 제사 제도 외에 지상 성소에서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성소 기별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다윗이 성소에서 얻은 경험을 모방한다.
➌ 행하기 : ‘성소에서 드리는 기도’뿐 아니라 ‘성소에서의 삶’을 경험하기로 결심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우리가 이웃의 집을 방문하면 그 집주인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습니까?
❷ 시 27편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집을 그리워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우리가 성전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❹ 성전이 요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B. ❶ 각자 자신의 집에서 교회에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말해 봅시다.
❷ 성소가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❸ 성소가 영적인 만남의 장소였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일에 더욱 힘써야 할까요?
❹ 우리는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 누구를 인도해야 할까요?
결론 : 우리는 성소로부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진실 그리고 선하심에 대한 교훈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다음 주에 있을 분반에 대하여 다시 안내합니다.
❷ 영적 후견인 관계가 잘 유지되는지 확인합니다.
❸ 분반 계획과 영적 후견인 관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임재의 공간
10월 20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교사강해 1)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성전이었다. 왜냐하면 이 성소가 하나님께서 거하실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이 낮은 땅에 친히 강림하시어 인간과 함께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때 이것은 놀라운 구속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성소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했던 것은 이 낮고 낮은 땅에 예수께서 육신을 쓰시고 오실 그분의 몸된 장막의 표상이었다. 인간 역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아니던가?(고전 3:16) 이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어 거룩하지 않은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화목제물이 되시고, 세상의 떡과 세상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과 사귐 속에 살도록 이끄신 것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도록 완성시키신 그리스도 사역의 압축인 것이다. 더욱 궁극적인 것은 임시 가건물이었던 성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표상인데 인간을 위해 인간과 같은 육신의 겉옷, 장막 곧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고 있다.
출 25:8에 따르면 광야에 세운 지상 성소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어떤 놀라운 사실을 가르치는가?
죄는 하나님과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직접적인 관계를 파괴시켰다. 그러나 창조주는 여전히 우리를 그분께로 이끌어서 타락한 인류와 깊은 언약적 관계를 맺기 바라셨다. 그래서 그 계획을 바로 에덴에서부터 착수하셨다. 여러 세기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구하시고 성소와 제사 제도를 수립하심으로써 주도적으로 인류를 다시 그분의 임재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성소는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끝없는 열망을 증명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다(시 132:13~14). 그분의 궁극적 목적은 관계에 있다. 그래서 성소 봉사는 그러한 관계를 예증하기 위해 선택된 방편이었다. 성소는 하나님이 지상에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가시적인 증거였다.
민수기 2장을 보면 성막은 정사각형의 야영지 중앙에 위치해 있었는데 고대 근동의 관례에 의하면 중앙은 왕의 장막이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반면 레위인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주위에 장막을 쳤다(민 1:53). 그다음 각 부족이 조금 멀리 떨어져 세 부족씩 사방에 진을 쳤다(민 2:2). 이는 가시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근접성과 거리를 동시에 설명하였다.
성소의 다른 목적은 하나님이 명하신 중앙 집중적인 예배 제도를 위한 위치 마련에 있었다. 백성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의 부정과 도덕적 실패로 말미암아 위태롭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거룩하지 않은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고 머물 수 있도록 희생과 제사 제도를 마련하셨다. 성소는 제사뿐 아니라 제사장 봉사를 포함하여 구원의 계획을 상세하게 계시하였다.
부가적용)
옷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 겉옷과 속옷이다. 겉옷은 남이 볼 수 있는 옷이고 속옷은 자기만 아는 옷이다. 겉옷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속옷은 보이지 않는 숨겨진 옷이다. 진리에도 두 가지가 있다. 겉으로 보이는 진리와 속으로 감추어진 진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요 12:44-45절에 우리가 이해하기 매우 힘든 말씀을 하셨다. 요12:44-45절에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고 하셨다. 예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보낸 분을 믿는 것이 되고 어떻게 예수님을 보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 될까?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 시길래 그럴까? 왜 예수님을 보는 것이 그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 될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입으신 겉옷 때문이다. 지금 예수께서 자신이 입고 계신 겉옷이 있으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육신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인간과 마주 대하기 위해 그 자신이 육신을 쓰신 것은 이 지구별에 오시기 위해서 입으신 지구 옷일 뿐이다. 예수께서 입으신 이 육신의 옷은 “지구복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입으신 육신의 옷은 그분의 겉옷이지만 그렇지만 예수께서 입으신 진정한 그분의 속옷, 곧 그분의 정체는 무엇이었는가? 빌2:5-7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입고 계신 겉옷은 인간의 육신이셨지만 그분의 실제적인 속옷은 하나님 자신이셨음을 보여주셨다. 성막의 겉옷의 진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성막의 진정한 속옷 진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썩지 아니할 몸 영생의 진리에 있다. 예수께서 요 17:3절에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여러분이 참 하나님을 아시려면 그의 보내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걸치신 겉옷만 보시고 예수님을 판단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진정한 속을 잘못 보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가 매우 중요한 구원의 시금석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훈 : 성소는 백성과 함께하려는 하나님의 열망의 가시적 표현으로써 죄인들이 그분을 가까이하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 살 수 있도록 돕는 제도를 포함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삶은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그 사회는 성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신앙이 그들의 일상과 정신세계의 중심축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가 신앙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의 부수적인 요소일 뿐 다른 목적과 관심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최우선적 목적이 신앙과 충돌할 때 너무도 쉽게 신앙은 후순위로 밀려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최우선 순위에 있는데 말입니다.
| 적용 |
그대는 신앙 중심의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결심을 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우리 가운데 거하심 - “그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루한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인간의 진영 가운데 당신의 성막을 세우셨다. 그가 사람의 장막 곁에 당신의 장막을 치신 것은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품성과 생애에 친숙하게 만드시기 위해서였다”(시대의 소망, 23).
기도
하나님,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계획하든, 무엇을 행하든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모든 관심과 고려의 가운데 하나님을 첫째 자리로 모시기를 원하오니 우리의 결심을 받아 주시옵소서.
둘째 날(월) “너희는 거룩하라”
10월 21일
“또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너는 또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그 안을 거룩하게 하라 그 제단이 지극히 거룩하리라”(출 40:9~10).
교사강해 2)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에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다. 거룩함을 윤리에만 국한 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물론 거룩과 윤리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마음에 큰 부담을 안고 살고 있는데 이것은 거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거룩한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딤후 1:9-1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9-10) 이곳에 말씀하신 거룩은 인간의 행위와 결부시킨 거룩이 아니라 예수께서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거룩이란 사망을 폐하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어 당신을 믿는 백성들도 거룩하게 곧 썩지 아니할 생명으로 만드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성도라 부르는 것은 우리라는 존재가 깨끗하거나 윤리적으로 완벽해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다. 값없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어 우리의 생명 역시 영생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라 성도,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거룩이란 말에는 겉에 나타난 진리와 속에 보여 지는 진리가 있다. 인간이 거룩지 못하다는 것은 썩어 없어질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래 거룩이란 말은 썩지 아니할 존재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직 죽지 아니함에 거하는 존재에게만 붙일 수 있는 말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은 아무도 거룩할 수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 자만이 거룩한 존재로 여김을 받을 뿐이다.
출 40:9~10은 성소가 거룩하게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거룩성의 기본 개념은 ‘하나님께 속함’이라는 의미와 결합하여 ‘분리됨’ 그리고 ‘특별함’이다.
“상징적 봉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연결 짓는 고리였다. 희생 제물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에 장차 오실 구세주에 대한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갖게 하려는 데에 있었다. 성소와 관련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거룩한 심령, 생활의 순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엄격한 순종이 요구되었던 것은, 주께서 그들의 재물을 받으시고, 계속해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 위함이었으며, 한편 백성들은 구원의 계획과 자신들의 의무를 바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화잇 주석, 삼상 2:12~17).
레 19:2과 벧전 1:14~16을 읽어 보라. 백성들이 거룩해야 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성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를 분리하여 구별시킨다. 그분의 거룩성은 그의 백성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윤리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궁극적인 동기이다(레 19장 참고). 그래서 식사법(레 11:44~45)을 준수하고, 제사장을 존경하며(레 21:8), 이전 욕망에 순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벧전 1:14).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며 그분께 가까워지기를 바라신다. 이런 변화는 오직 죄악의 본성을 굴복시키고 결과와 상관없이 의로운 일을 행하려는 자발성에서 비롯된다.
부가적용)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고 했을 때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여러분은 무슨 옷을 입었다는 것인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고 하셨다. 인간이 그리스도로 옷 입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입게 된 옷은 하나님의 형상 곧 썩지 아니할 영광의 옷을 입게 된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다. 도덕적인 윤리와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요일 5:1)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옷, 썩지 아니할 옷을 입은 영생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다고 해도 내 자신의 속성이나 본성 자체인 인간성 자체가 변화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가려 하는 것이지 윤리적인 거룩을 흉내 내거나 윤리적인 완전을 이룩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윤리적인 거룩을 살지 못했다. 다니엘이라도 그의 윤리적 완전이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 섰을 때 고백을 보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단10:8]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제는 그리스와 같은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할 영생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교훈 : 성소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거룩함 속에서 죄악의 본성을 버리고 의롭게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거룩할까요?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속과 부정으로부터 구별된 생애를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단순히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결코 이 명령을 완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뿐 아니라 목적과 동기, 생각과 행동, 취미 그리고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취향을 모두 포함합니다.
| 적용 |
거룩한 생애를 살기 위해 그대에게 필요한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참된 회개와 거룩함 -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외투가 아니다. 품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 생애의 원칙이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원칙에 마음과 생애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555).
기도
아버지, 저는 스스로 거룩할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하여 아버지의 소유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것으로 구별하여 주시옵소서. 신성한 목적에 합당한 생애를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셋째 날(화) 성소의 기구들
10월 22일
“곧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의 속죄소와 회막의 모든 기구와 상과 그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무릇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출 31:7~11).
교사강해 3)
성소의 기구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루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성소의 진리는 인간의 겉과 속을 어떻게 거룩하게 만드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번제단에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또한 죽음을 경험하고 물두멍에서 씻음을 통해 우리의 신분 세탁을 해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함께 죽음으로 우리로 더 이상 죄의 책임으로부터 분리시켜 주셨다. 우리의 신분의 세탁은 그리스도의 안에서 죽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물두멍의 경험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갈 3:27). 그리고 이제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세탁된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데,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경험, 곧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라”(요 5:39)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떡,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먹고 살면서 하늘의 법도와 하늘에서 이루어질 삶을 배워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분이 변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된다. 어두움에서 기이한 빛으로 불러내신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곱 촛대에 나타난 삶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분향단의 기도처럼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특권과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법도인 십계명을 지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교제와 예배와 교육 등의 모든 과정은 하늘에 들어가 살 하나님의 백성들의 훈련의 장소인 것이다.
출 31:2~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지상 성소에 둘 기구 제작에 관하여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가? 이는 창 1:2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출 25:9 참고)
성소의 모든 기구 가운데 증거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성을 나타내는 최고의 상징이었다. “증거”(출 32:15~16)라고 불리며 그 궤에 보관되었던(출 25:16, 21) 십계명 돌판에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궤위에는 “시은좌(mercy seat)”가 놓였고, 그룹 천사 둘이 날개로 그 위를 덮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출 25:17~21). 그것은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이 백성들과 화목하시고 그들과 언약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속죄소”라고 불릴 만하였다.
여기서 매년 한 차례 속죄일마다 백성과 성소를 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레 16:14~16). 롬 3:25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일컬어 ‘속죄소’(‘화목제물’ 또는 ‘속죄 제물’이라고 번역됨)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속죄가 이루어진 곳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며 하나님도 그분을 통해 우리를 위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성소의 첫째 칸에서 등잔대는 지속적으로 빛을 냈고(레 24:1~4), 분향단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제사장들을 보호하기 위한 연기를 생산했다(레 16:12~13). 떡상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떡 열두 덩이가 진설되어 있었다.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도 상 위에 두었다(출 25:29~30). 비록 이 기구들의 중요성에 대해 정보는 거의 없지만 그것들은 언약적 식사를 대표하는 구성 요소로서 출 24:11을 연상시키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을 항구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가적용)
성막의 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의 변화를 가져온 사람들이 그 신분에 맞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이끄신다. 성소 속의 모든 기구들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표상은 곧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있다.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그분의 생명의 빛을 통해 비추임을 받은 빛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 주님을 이 땅에서도 대면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법도를 따라 순종의 공과를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 성소가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교훈 : 성소의 여러 기구는 하나님이 우리의 속죄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하시고 그분과의 언약적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나타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성소의 여러 기구는 그대에게 어떤 영적 깨달음을 줍니까?
성소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기록한 십계명을 담은 증거궤가 있었고, 그 위에는 속죄의 은혜를 베푸는 시은좌가 있었습니다. 그 위에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번제단에서 바치고, 물두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중생의 씻음을 받으며, 떡상에서 생명의 떡이신 그분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십니다. 그리고 등잔대에서 세상의 빛이신 그분을 반사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분향단에서 그분의 공로를 섞은 기도의 향을 올리며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나눕니다.
| 적용 |
성소를 통해 보았을 때 그대에게 부족한 영적 경험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하늘 성전의 희미한 반영 - “황금 촛대에서 비치는 빛을 반사하는 순금으로 입혀진 벽들과, 찬란한 천사들을 훌륭하게 수놓은 빛나는 커튼의 찬란한 색조, 금빛으로 번쩍이는 떡상과 향단, 둘째 휘장 너머의 거룩한 법궤와 신비한 그룹들, 그 위의 쉐키나 곧 여호와의 임재의 가시적(可視的) 현현(顯現),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구속을 위한 사업의 중심이 되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들의 희미한 반영에 지나지 않았다”(부조와 선지자, 349).
기도
아버지의 보좌로 나아가는 길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가 살아 숨 쉽니다. 생명으로 가는 이 거룩한 길을 계속 걷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희생으로 맺은 이 언약을 끝까지 붙잡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 날(수) 10월 23일
거룩한 공동 활동의 중심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주의 종과 주의 백성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30).
교사강해 4)
성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는 장소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7],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 성소가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 우리의 만남의 시작이 있다. 우리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예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것처럼, 우리의 예배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믿음으로 불리어 지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어지는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되고 성전이 된다.
왕상 8:31~5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성소의 기능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더 가르치는가?
성전 봉헌식에서 솔로몬 왕은 성전에서 드릴 수 있는 일곱 종류의 특별한 기도를 올렸다. 이 일곱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속에서 성전의 광범위한 역할을 예증한다. 성전은 용서를 구하는 곳이고(30절), 맹세하는 곳이며(31~32절), 패배할 때 간구하는 곳이고(33~34절), 가뭄을 만났을 때(35~36절) 또는 다른 재앙을 만났을 때 탄원하는 곳이며(37~40절), 이방인이 기도하는 곳이고(41~43절), 승리를 탄원하는 곳이다(44~45절).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그리고 모든 백성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마음에 그렸다. 이러한 사실에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이 되는 것이 성전의 목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성소는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사의 이상적인 중심지였다. 종교는 삶의 핵심 영역이기도 하지만 신자들에게 그것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자체였다. 이는 신앙이 우리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가?
백성들이 조언이나 판결을 받고 싶거나 또는 죄를 회개해야 할 때, 그들은 성소로 갔다. 성소는 또한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는 동안 생활의 중심축이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대화하기를 원하실 때, 그분은 성소를 통해 그렇게 하셨다(출 25:22). 그래서 ‘회막(tent of meeting)’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레 1:1).
부가적용)
성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과 삶의 축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 성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활과 삶의 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정된 성소가 아니시라 어느 곳이든 우리와 함께 움직이시는 성소이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우리의 삶의 장막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든지 제단을 쌓았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성소이며, 바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성소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교훈 : 성소는 단지 신앙이 우리의 중요한 영역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중심이며 심지어 모든 것이 되어야 함을 가르쳤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성소에서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성소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고,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 성도가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건물도 이와 같은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자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 적용 |
그대는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 누구를 인도하기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인 생애의 위대한 중심 -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삶과 뚜렷하게 구별된 생애를 살아야 한다. 세속적인 생애는 값싼 인생의 생애이다. 그런 생애는 영적 생활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 위대한 중심을 가지고 있다”(청년 지도자, 1895. 1. 10.).
기도
아버지를 만나고, 반가운 교인들과 만나며,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인도하기 위해 곧장 교회로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이 교회와 가까워지고 제 집도 교회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10월 24일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교사강해 5)
계란에 겉껍질이 있으면 그 껍질 속에 흰자가 들어있고 흰자 속에 노른자가 들어있다. 그러나 흰자와 노른자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노른자에 붙어 있는 핵 즉 노른자 위의 배아, 즉 생명을 잉태시키는 배아의 눈이 들어 있다. 만약 이 생명을 잉태시키는 배아의 눈이 없다면 달걀은 생명을 잉태시킬 수 없는 무정란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무정란과 같은 우리의 인생의 배아의 눈 곧 생명이 되셨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곧 노른자로 양육을 받고 흰자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 성소는 우리의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양육시키는 생명의 인큐베이터이다. 교회가 바로 그런 양육의 장소이다. 교회인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은 모든 생명 속에 씨를 맺게 하는 열매 속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다.
시편은 여러 번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에 성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다윗은 시 23:6에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결심했다. 다윗의 염원은 여호와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었다(시 27편). 그런데 그분의 임재는 성소 안에서 가장 잘 경험할 수 있었다. 성소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보여주기 위하여 다윗은 성소를 의미하는 모든 단어, 즉 여호와의 집, 성전, 초막, 장막을 총동원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묵상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성소였다(시 27:4).
성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은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예증한다. 그분은 예배자를 안전하게 지키고 환난 날에도 그를 성소에 숨기신다(시 27:5). 하나님은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시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심령의 평안을 보장하신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자기 백성을 위한 그분의 행위와 연결시킨다. 게다가 성소 봉사는 그 상징적인 중요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를 드러낸다.
다윗은 단지 성소 안에서 살 뿐 아니라 야훼가 자신과 함께 계시기를 궁극적으로 바랐다. 그래서 이런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기로 결심한다(시 27:4, 8).
시 73:1~17을 읽어 보라. 성소에 들어간 후에 아삽은 어떤 통찰을 얻었는가?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고통의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의인이 고난을 겪을 때,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4~12절). 그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1~3절). 그러나 그가 성소에 들어갔을 때 관점이 달라졌다(13~17절). 거기서 아삽은 다윗이 시 63:2에 언급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상황이 언젠가 변화될 것이며 공의가 실현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가적용)
인간의 죽을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새생명을 태어나게 할 새생명의 인큐베이터가 성소이다. 어떻게 새생명이 하나님의 생명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곳이 곧 성소이다.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는 그 구원의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인간을 영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아름다운 청사진이 담겨진 이 신비의 장소가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골 1:26-27, 골 2:2-4)이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아름다움을 이 성소가 보여주고 있다. 죄인된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 속에 감추어진 보화를 맛보아 알게 되기를 바란다.
교훈 : 성소는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공간일 뿐 아니라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피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 그리고 그분의 공의를 깨닫는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도 다윗처럼 성전에서 살고 싶다면 그것은 어떤 마음일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는 진리를 새롭게 인식했고 마침내 악인은 넘어질 것이며 의인은 안전하리라는 보증을 받았다(시 73:18~28).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성소는 확신의 장소와 생명의 요새가 되며,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높은 바위 위에 두신다(시 27:5). 성소 봉사가 가르치는 진리로부터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 적용 |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그대의 마음을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악인의 번영을 허락하시는 이유 - “하나님께서 악한 자가 번영하고, 그들이 당신께 대한 적의(敵意)를 나타내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악의 잔이 찰 때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완전한 멸망 가운데서 그분의 공의와 자비를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48).
기도
아버지, 저도 아버지 집에 살 수 있게 하옵소서. 그곳에서 완전한 평화와 위로와 쉼을 찾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어느 고급 주택 주인이라도 아버지 집 문지기보다 행복하지 못할 줄 믿습니다.
여섯째 날(금)
10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343~358 “성막과 그 봉사”를 읽으라.
“성소를 건축하기 위하여 많은 준비와 값진 재료들이 필요하였고 다량의 가장 귀중하고 비싼 재료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원하는 헌물만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출 25:2)으라고 모세를 통하여 회중에게 반복해서 명령하셨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희생의 정신이 지극히 높으신 분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는 데 있어서 첫째 필요조건이었다”(부조와 선지자, 34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하나님의 공의의 문제를 좀 더 묵상하십시오. 이 땅에서는 공의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세상에서 공의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➋ 어떤 이는 “성소란 갈 길을 잃어버린 이 세상 가운데 한 조각의 거룩한 땅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대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➌ 벧전 1:14~16을 읽으십시오. 그대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➍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과 가까웠지만 그분의 거룩함을 인정하지 않았던 백성들의 한 예입니다(삼상 2:12~17).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하여 무감각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자각을 유지하는 데에 기도와 말씀 연구, 순종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➎ “매일의 봉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개인들을 위하여 수행하는 봉사였다. 회개하는 죄인은 자기의 제물을 성막문으로 가져와서 그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들을 고백하였다. 이 상징적인 행위에 의하여 죄는 그에게서 흠 없는 제물에게 옮겨갔다. 그는 자기의 손으로 그 짐승을 죽였고 제사장은 그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죄인이 범한 신성한 율법이 들어 있는 법궤 앞에 있는 휘장 앞에 뿌렸다. 이 의식에 의하여 그 죄는 피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성소에 옮겨졌다”(부조와 선지자, 354). 이 인용문은 성소 봉사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가 계시되어 있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