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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개혁 : 새로운 생각을 품음(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9/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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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3-09-06 06:58 조회8,338회 댓글1건

본문

9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42분

연구 범위
골 3:1~4, 고후 3:17~18, 고후 10:3~5, 롬 12:2~3, 요 10:10, 마 5:13~15.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아이작 와츠는 750개의 찬미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많은 곡이 오늘날에도 애창되고 있다. 한번은 런던에서 와츠를 위한 퍼레이드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유명인을 구경하기 위해 거리로 몰려들었다. 와츠를 태운 마차가 구경꾼으로 가득한 한 발코니 아래를 지나갈 때, 어떤 여인은 그토록 감동적인 찬양 작사자가 백 세가 넘은 작은 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외쳤다. “설마, 당신이 아이작 와츠라고요?” 와츠는 마차를 세우도록 손짓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서 이렇게 말했다. “여인이여, 내 키가 양극에 이르고, 내 손이 대양을 움켜쥘 수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영혼에 의해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이야말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작 와츠의 말이 옳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정신이다. 그래서 개혁은 정신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 개혁이 있다면, 우리의 행동에도 개혁이 있을 것이다. 개혁은 성령께서 우리 생각을 그리스도의 생각과 일치시킬 때에 일어난다. 그러면 행동이 따를 것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신약에서 설명하는 생각과 행동의 관계를 탐색한다.
➋ 느끼기 : 우리의 생각에 들어가는 사상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➌ 행하기 :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경건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모본을 따른다.

A.
❸ 나쁜 정보를 차단하거나 여과시키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 생각을 올바른 곳에 기울이는 것이다.
❹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을 집중할 수 있을까요?
※ 성경말씀을 항상 읽고 읽은 말씀을 면상하며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것이다.

B.
❷ 우리의 육체적 기능은 정신적 또는 영적인 기능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까?
※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말은 옛날부터 진리이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강하게 끼친다.
❸ 우리의 생활을 개혁하여 세상에 소개해야 할 하늘의 생활 방식이란 어떤 것일까요?
※ 성경의 진리를 따라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생활하는 것이다.

결론 : 우리의 사고를 변화시키시도록 성령께 우리를 맡길 때에 변화는 이르러 옵니다. 사고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감정은 안전한 안내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를 설득하는 성령께 굴복하고 하늘이 공급하는 변화의 능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것은 품성의 변화로 가는 통로입니다.


첫째날(일) 생각의 중요성
9월 8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7~18).

생각은 행동을 좌우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와 반대 역시 옳다. 반복된 행동은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준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옛 사고방식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대체된다(고후 5:17).
범선이 바다를 향해 출항하려면 돛을 단다. 돛은 배의 방향을 결정한다. 여정 중에 항로를 유지하려면 돛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돛을 무시하면, 배는 신속히 항로를 이탈한다. 돛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영적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골 3:2)라는 바울의 훈계는 생각을 하늘을 향해 집중시키라는 호소이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그 안에 무엇을 넣는지에 따라 꼴 지워지며, 무엇을 생각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형성된다.

1.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분의 영광을 볼 때에 우리의 삶에는 어떤 은혜의 기적이 일어나는가?(고후 3:17~18)
[고후3:17,18]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답: 예수님의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볼 때에 우리는 변화된다. 새로운 생각이 옛 것을 대신한다. 그분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더욱 그분처럼 된다. “지적·영적인 면에서 바라봄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사람의 마음은 숙고하도록 허락된 사물에 점차적으로 적응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습관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에 동화된다. 사람은 자신이 정한 순결과 양선과 진실의 표준 이상으로 향상할 수 없다. 만일 자아를 자신의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다면 그는 자기 이상의 표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점점 더 퇴보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만은 사람을 고상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퇴보할 수밖에 없다”(각 시대의 대쟁투, 555).
개혁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관계가 깊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으로 채우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생각을 빚고 우리의 행동을 지도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은 단순히 엄격한 규율보다 더 높은 표준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의지한다면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그분의 생각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단 하나의 소망, 즉 그분의 뜻을 행하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엘렌 화잇은 오관의 문을 지키라고 권고하였다. 오관은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각으로 느끼는 것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재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위를 바라보라고 권고한다. 그러면 당연히 위엣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됨됨이는 생각에 따라 형성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이 그렇다고 말한다.(잠23: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한다. 이 과목은 끝까지 생각에 대한 성경말씀을 말하고 있다. 다른 날 부가설명에서도 같은 사상을 이야기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훈 : 생각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묵상할 때 우리의 생각과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둘째날(월) 생각의 여과 장치
9월 9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어른들은 자녀들의 인터넷 검색 습관을 염려하여 유해 사이트를 차단시키는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텔레비전에도 비슷한 차단 기능이 있다. 이런 ‘가상의 여과 장치’를 사용하는 목적은 수용할 것과 배제할 것을 가리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위해 ‘영적 여과 장치’를 제공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만 우리의 생각에 들여보내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1. 바울은 동료 신자들에게 악의 영향으로부터 그들의 생각을 지키는 하나의 여과 장치로써 어떤 실질적인 지침을 주었는가? 이 권고는 오늘날 TV, 인터넷, 동영상을 보는 우리의 습관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빌 4:7~8, 롬 12:2)
[빌4:7,8]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답: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도록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럴 때에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분별하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에 폭력, 부도덕성, 탐욕, 물질주의가 들어온다면 깊은 영적 사고를 발전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진리이다. 우리의 감각은 생각의 문과 같다. 우리의 생각이 할리우드 영화의 자극적 장면들로 폭격을 당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보다 감각적인 경험들에 의하여 틀이 잡힌다. 우리의 감각을 조종하고 사고를 길들이며 가치관을 바꾸기 위해 매체 제작사들은 엄청난 재정을 퍼붓는다. 이런 오락 매체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런 작품들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곧 있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게 할까?’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돈이다. 재림을 준비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자신을 매우 깊이 성찰함으로써 세상 오락의 제단에 자신의 영혼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대성당에는 나무로 만든 세 개의 거대한 출입문이 있다. 왼쪽 문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모든 쾌락은 순간이다.’ 오른쪽 문에는 이런 글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 그리고 가운데 문에는 굵은 글씨체로 다음과 같은 명언이 새겨져 있다. ‘영원한 것만이 남으리라.’

<부가설명> 바울은 성도들이 언제나 도덕적, 영적으로 탁월하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성도들이 정신적인 영역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여덟 가지 덕목들을 열거한다.
1. 참되며(알레데) 이것은 허위와 상반된 개념으로 원래 하나님의 속성이며(롬3:4) 믿는 자의 특징이 되어야 하는 덕목이다.
2. 경건하여(셈나) 이 말은 바울 서신에만 나타나는데(딤전3:8,11;딛2:2) 특히 교회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존경할만한 상태를 말한다. 장중(莊重)한 인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3. 옳으며(디카이아)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인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권면이다.
4. 정결하며(하그나) 이것은 도덕적인 정숙함을 강조하며 엄격한 의미의 순결(純潔)을 강조하는 말이다.
5. 사랑할 만하며(프로스필레) 신약성경에서 오직 이곳에 한 번만 나오는 단어인데 “즐겁고 유쾌하며 사랑스럽다”는 뜻이다.
6. 칭찬할 만하며(유페마) 이 말도 역시 본 구절에만 나오는 단어로서 “정중한”, “고상한”, “우아한”이라는 의미이다.
7. 덕(아레테) 도덕적으로 뛰어난 것을 뜻하는 말이다.
8. 기림(에파이노스) 도덕적으로 인정이 되어 칭찬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성도는 생각에 이것들을 담아두고 언제 이런 인격을 나타내도록 예수님을 생각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권고한 것이다.

교훈 : 생각은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에 의하여 틀이 잡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여과 장치를 두어서 세상의 유해한 것들로부터 생각을 지켜야 한다.


셋째날(화) 생각의 보호 장치
9월 10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이 말씀은 위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이 약속을 우리 삶 속에 실현하려면 적극적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우리의 보호 장치를 해제한다. 우리는 이 세상 오락의 오물 속에 빠진다. 우리의 생각은 분노, 괴로움, 후회감에 정복되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쾌락 또는 중독적인 습관의 홍수에 잠기기도 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기면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지켜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

1. 고후 10:3~5을 읽어 보라. 우리의 무기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는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인가? 무엇이 영적 무기일까? 또한 사도 바울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고후 10:5)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고후10:3~5]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답: 바울은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것은 바울이 싸우기 위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육체에 속한 병기를 가졌는데 그것은 세상적 학문, 인간적인 영향력, 권위있는 추천서(3:1), 사람을 현혹시키는 수사학적 달변(고전 2:1)등 인간적인 것들을 가지고 맞서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병기 곧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온유하고 관대한 예수의 성품을 가지고 대응한 것이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바울의 무기는 약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전능으로 덧입혀질 때 그 어떤 대적도 당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고전 2:4, 5).

<부가설명> 모든 이론을 파하며 “이론”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스무스”는 하나님과 분리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도모(圖謀), 사고(思考)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특히 본문에서 이 말은 “허황된 이론”이나 “궤변”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한 것 같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은 공동번역에는 “하나님을 아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오만”이라고 번역했다. 이 교만의 가장 치명적인 불행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장애가 된다는 점이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복종케 하니” “생각”이라는 말은 헬라어 “노에마”인데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 같다. 이를 공동번역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계략”으로 번역하여, “어떠한 계략이든지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라고 하였다. “사로잡아”라는 말은 (아이크말로티존테스)인데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헬라어의 명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말은 “복종케 하니”와 합하여 생각하면 “전쟁 포로로 삼아 강제적으로 복종 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로 가지고 싸우는 최종적 목적이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사도적 권위로써 적대자들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따르려는 바울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복종 시킨다는 것은 육체의 병기를 가지고(4절) 육체의 방식으로(3절) 싸우는 자들이 상대를 완전히 파탄(破綻)시키는 것과 달리 선한 목적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빌리 그레이엄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대가 머리 위로 나는 새를 막지는 못해도, 그것이 머리에 둥지를 틀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있다.” 다시 말해, 여러 사상이 우리의 생각을 파고든다. 우리의 사고를 자극하는 다양한 장면과 소리와 냄새가 있다. 각각의 경험은 각각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우리 생각 속에 흐르는 사상들을 항상 골라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곰곰이 생각할 것인지 또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도록 허용할 것인지 선택할 수는 있다.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려면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께 굴복시켜야 한다. 육체적 사상은 단지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란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의 생각이 다른 무엇으로 채워질 때만 밀려난다. 하나님 말씀의 긍정적인 원리에 초점을 맞춘 마음은 안전 보호 장치가 구비된 마음이며, 악한 자의 간교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지키는 마음이다.

교훈 :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생각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육에 속한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넷째날(수) 마음과 육체의 관계
9월 11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종의 이원론을 가르쳤다. 그들은 육체와 정신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믿었다. 반면 성경은 인간이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측면이 있는 전인적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쪽 측면이 다른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사도들은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인 건강이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따로 분리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1. 살전 5:23은 이 사상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답: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전인(全人)적 사실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온전함이란 영적 온전함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고 호소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대가를 지불하고 인류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고전 6:19). 더욱 건강한 생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우리 몸을 돌보는 것은 단지 수명을 몇 년 늘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바른 동기로 우리 몸을 돌보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배 행위이다.

2. 롬 12:2~3, 요 10:10, 고전 10:31은 우리의 신체와 영적 건강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롬12:2,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답: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서 먹고 마시고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몸이 건강하고 튼튼하고 건전해야 한다. 생명력을 날로 풍성하게 유지해야 하며 그런 중에서 건강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장의 필요성을 깨우쳐 주실 때에 그분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에만 자신을 제한시키지 않으신다. 개혁은 단면적이지 않다. 성령께서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뜻에 완전히 순응하도록 돕기를 바라신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육체적인 생활 습관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그것들을 내려놓도록 권유하신다.
사탄은 우리의 육체를 통해 정신을 지배하려고 한다. 반면 예수님은 우리의 정신을 통해 육체를 지배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몸은 유령의 집이 아니라 성전이다. 하늘의 원칙들을 따를 때에 우리는 더욱 기쁨에 충만하고, 생산적이며,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부가설명> 사람이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게 느껴진다. 건강을 회복하려는데 모든 생각을 집중하게 되고 건강을 회복하는데 필요하다고하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집착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일상생활의 다반사들에 대한 생각을 올바르게 할 수 없다. 올바른 판단과 올바른 결정을 하기 위하여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정신적 장애가 있으면 더욱 바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 건강한 생각은 필수적이다. 살전5:23을 신학자들은 인간 3분구조설의 근거로 사용한다. 즉 사람은 몸,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본문을 기록한대로 잘 살피면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는 주장인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이 구절을 바르게만 읽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 즉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구절이다. 예수 재림하실 때까지 그들의 주장대로 하면 혼과 영은 영원한 존재이니까 재림하실 때까지 흠 없이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은 죽어 썩는데 어떻게 그때까지 흠 없이 보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당찮은 말이다. 이 말은 전인적으로 흠 없는 인격자로 생활하라는 뜻이다.

교훈 : 인간은 육체와 정신과 감정과 영적 측면이 있는 전인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써 우리 몸을 건강하게 보존할 책임이 있다.


다섯째날(목) 감화력의 이미지
9월 12일

예수님은 자신과 교회를 묘사하기 위해 여러 이미지를 사용하셨다. 그 가운데 하나가 ‘빛’이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시다(요 8:12). 그분은 또한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빛”이시다(요 1:9). 그분은 우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다니고 “빛을 믿으라”고 격려하였다(요 12:35~36).

1. 마 5:13~15과 빌 2:14~16을 비교해 보라. 이 세상에서 그분의 백성에게 바라시는 주님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마5:13~15]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빌2:14~16]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답: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는 생활하기를 바라신다.

모든 부흥과 개혁의 목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 은혜 그리고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삶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세상의 삶과 구별된 방식으로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그분은 우리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자비롭고, 서로를 돌보고, 관심을 기울이며 살도록 요구하신다. 그분은 쾌락에 도취한 사회에서도 우리가 유희의 높은 표준을 유지하도록 요구하신다(골 3:1~2).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해하는 퇴행적인 질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어 가는 시대에 그분은 건강한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요 10:10). 과도하고, 성에 탐닉하며, 설렘이 사라진 세대 속에서 예수님은 뭔가 특별한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은 우리를 단정함과 적당함과 도덕적 순수함으로 부르신다(벧전 3:3~4).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칠백 년 전에 이스라엘 여론을 향하여 개혁을 호소하였다. 그의 말은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와도 관련이 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교회와 우리 개인을 위한 그분의 이상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높다. 하늘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품성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착한행실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착한행실을 하기 위하여 힘써야한다고 강조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착한행실에 초점을 맞추시지 않았다. 빛에 초점을 맞추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세상의 빛이 되면 그 빛이 드러나는 삶이 착한행실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빛은 생명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고 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진정으로 영접하면 예수님의 생명이 그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빛으로 드러나는데 그 드러나는 모습이 착한행실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빛의 열매일 뿐이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고 분명히 가르쳐주셨다. 아래 적어놓은 “교훈”에 그분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면서 하늘의 표준과 생활방식대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썼는데, 반사하면서 그렇게 살도록이 아니고 빛이 되면 그렇게 살아지게 되어 있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정말 빛인가? 아니면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는 것인가? 잘 생각해보자.

교훈 :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면서 하늘의 표준과 생활 방식대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월 13일

“많은 사람이 주님의 편에 있다고 공언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렇지 않고, 그들의 모든 행동의 비중을 사탄의 편에 둔다. 우리가 어느 편에 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누가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가 있는가? 누구에 대하여 우리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가? …만일 우리가 주님 편에 있다면, 우리의 생각은 그분에게 가 있게 될 것이며 그분에 대한 생각이 가장 달콤한 생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우정을 맺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 자신을 그분께 이미 드렸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나타내며, 그분의 영을 호흡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소원한다”(교회증언 2권, 262).

“모든 사람은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귀한 은혜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이 세상에 나누어질 수 있는 산 통로가 될 특권을 가졌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그분의 영과 품성을 대표할 자들을 가장 크게 원하신다. 사람을 통하여 구주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보다 더 절실한 요구는 없다. 온 하늘은 사람의 마음에 즐거움과 축복이 될 거룩한 기름을 부어 줄 수 있는 통로의 역할을 할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실물교훈, 41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하나님의 백성들의 높은 부르심을 묘사하기 위해 바울은 어떤 용어들을 사용했습니까?(고후 5:18~20, 6:17~18) 이런 이미지들은 실질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여기서 말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고후5:18~2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6:17,18]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그리스도의 사신(대사大使)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였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보여주는 생활을 하라는 권고이다.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을 연구하고 명상하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깨닫고 깨달은 생각대로 행동하면 될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그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➋ 우리가 정직하다면 성경에서 읽은 약속들을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혹의 순간 우리가 바람직한 것에 마음을 고정하기로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혹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유혹이 올 때, 그대의 생각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원칙 또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 기도와 성경말씀을 생각하고 그 생각으로 자기를 통제하며 성령의 역사를 의지할 것이다.

➌ “생각은 어쩔 수 없지만 행동과 생활에 흠이 없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대는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 생각은 행동과 생활을 결정하는 원천이기 때문에 생각에 흠이 있으면 행동과 생활에도 흠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근원이 생각이 올발라야 하는 것이다.

댓글목록

이기명님의 댓글

이기명 작성일

김목사님, 저는 이기명입니다.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매주일 과정과 해답, 부가설명을 올려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저는 매주 매우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연구와 복사, 답변 준비 등 시간을 많이 할애하셔야 할 텐데, 꾸준히 올려주시는 열의에 찬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간단 명료한 해답이 저에겐 신뢰감과 감탄을 자아냅니다. 목사님, 계속 수고해 주세요. 재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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