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제자도의 개관(槪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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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08-02-25 14:02 조회8,936회 댓글0건본문
제1과 제자도의 개관(槪觀)
총 론
그리스도의 제자들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는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끌어온 주제이지만, 예수님의 첫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훨씬 더 중대한 문제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제자도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경험이었다. 제자도의 핵심은 관계인데, 그것은 변화시키고 자유케 하며 능력을 부여하는 그런 관계이다. 이것은 초기 제자들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시켜나가는 사람으로서, 성령을 통해 예수께서 주님 되심을 일상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체현(體現)하는 사람을 말한다. 제자는 교회의 사명에 활발하고도 지속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책임감 있는 교인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동기에 의하여 움직인다.
우리는 제자도를 여러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다. 첫째로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상호 교감했던 역사적인 배경에서 고찰할 수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숙고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 제자도의 특성과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관점을 다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제자도는 다른 제자도와 다르다. 1세기에 꽤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그 가르침으로 존경을 받던 여러 교사들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인 제자도는 좀 독특한 형식을 나타내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모방하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제자도에는 예수님과의 동행과 모방이 수반되었다.
또한 우리는 제자도를 (1)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의 제자도, (2) 그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제자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경험했던 제자도를 생각해 볼 때, 몇 가지 물음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고 가르침과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생생한 경험이었을까? 그분의 행동을 목격하고 그분의 모본을 직접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실감나는 일이었을까?
한편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이 있은 지 수세기 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자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제자도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예수님과 그분의 처음 제자들이 살던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자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이번 기 교과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된 사람들이 주님과 나누게 되는 경험이라는 차원에서 제자도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제자도의 의미와 참된 제자의 특성에 관해 탐구할 것이다. 또한 제자가 되는 과정과 제자도의 주요 특징들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도와 당시에 추앙받던 다른 교사들의 제자도를 비교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제자가 될 뻔했던 사람들, 여성과 제자도, 인종(人種)과 제자도, 제자도를 위한 지침, 빗나간 제자도 등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제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숙고해 볼 것이다.
이번 기 교과를 집필한 버트럼 멜버른(Betram Melbourne)은 자메이카(Jamaica) 태생으로, 본 교과를 집필할 당시 워싱턴 DC에 소재한 하워드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아내와의 사이에 장성한 세 자녀가 있다.
클리포드 골드스틴
1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27분)
기억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8-19).
연구 범위: 마 4:18-22, 10:24-25, 막 3:13-14, 8:34-35, 눅 14:25-26.
중심 사상: 제자도란 무엇인가? 누가 제자인가? 자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제자가 되기 위한 자격 조건은 무엇인가? 제자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안식일 오후
스티븐슨(Dwight E. Stevenson)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할 당시의 한 일화를 통해 제자도의 중요한 측면을 설명해 주었다. “꼬르떼즈(Cortez)는 500명의 자기 부하들을 멕시코 동부 연안에 상륙시킨 다음, 배에 불을 질러버렸다”(찰스 L 월리스 편, 특별한 날을 위한 설교 예화, 베이커 북 하우스, 1975년, 25).
정복자들은 그들이 퇴각할 수 있는 수단인 배가 불꽃에 휩싸인 것을 바라보며, 조국 스페인을 위해 신대륙 정복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그 일에 전적으로 헌신해야만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제자의 사역에 몸 바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항구에서 배를 불살라버려야 한다. 우리에겐 물러설 여지가 없다. 돌아갈 길은 없다. “후퇴는 없고 오직 전진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한 자들의 표어가 되어야 한다.
핵심본문: 마 4:18-22
학습 목표
깨닫기: 제자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깨닫는다.
느끼기: 예수님께 아낌없이 헌신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다.
행하기: 다른 사람을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교과 개요
I. 주님의 부르심
A.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떻게 배를 버리고 즉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했는가? 부르심에 신속히 반응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B. 제자란 헬라어로 마쎄테스(mathetes)인데,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자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부르심에 응하므로 제자가 될 수 있다.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가?
C. 예수께서는 일하고 있는 베드로를 왜 부르셨는가? 베드로는 왜 모든 것을 버리는 경험을 가져야만 했는가?
II. 우리의 배(船)를 불태워버림
A. 꼬르떼즈가 멕시코에 상륙하자마자 배를 태워버렸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섬기기 위해 어떻게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가?
B.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열두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분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부르셨는가?
III. 부르심을 따름
A.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이 우리 삶에 어려움을 줄 수 있는가?
B. 우리는 어떻게 제자로 자라날 수 있는가?
C. 예수께서는 안드레를, 안드레는 베드로를 불렀다. 제자가 제자를 부른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그분께로 인도할 수 있는가?
요점: 제자도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사이에 맺어진 친밀한 관계이다.
일요일(12월 30일)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과 그 후의 제자들
성경에서 제자도의 개념은 역사적 차원의 제자도와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로 나타난다.
먼저 역사적 차원의 제자도란 크신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첫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일컫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나사렛에서 온 랍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친밀하고도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란 그리스도와 회심한 그리스도인, 그리고 세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를 가리킨다.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는 또한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생애로 인해 직면하게 되는 도전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제자도의 개념에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느냐의 문제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나타내느냐의 문제가 함께 포함된다.
바로 여기서 역사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가 함께 만난다. 오늘날의 제자들은 역사 속에 기록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의 경험을 통해 주어진 영감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 마태복음 4:18-22에 나타난 제자도의 개념을 정리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요구하신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를 비교해 보십시오. 이 네 제자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제자도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갖게 됩니까? 요한복음 1:40-42을 참조하십시오. 이 구절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요1:40-42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답: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에서 우리는 제자도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2. 사도행전 11:26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제자도의 의미에 관해 어떤 통찰을 갖게 됩니까?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답: 그리스도인은 누가 보더라도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
“이제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이전 생애를 버리고 그들의 관심을 당신의 관심과 결합시키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그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해안에 도착하시자 예수께서 다른 세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시대의 소망, 246).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옛 교제도 끊어 버리고, 평생의 계획도 포기하며, 이 땅의 희망도 내어 버려야 한다”(복음교역자, 112).
<부가설명> 복음서를 자세히 읽으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적어도 세 단계를 거친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의 기록이 그 첫 단계이다. 침례요한의 제자인 요한과 안드레가 침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가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이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되고 그 즉시 안드레는 그 형제 시몬을 불러왔고, 안드레 다음으로 요한도 그 형제 야고보를 데려왔던 것 같다. 그리고 빌립을 부르셨고 나다나엘을 부르셨다. 이것이 일차 부르심인데, 이때는 와보라는 것이 중심 말이다. 이때는 초기 유대 지방 봉사 때의 일이다. 그런 후에 침례요한이 잡힌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는 유대 지방을 떠나서 갈릴리 지방으로 봉사의 중심지를 옮기셨다. 그때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배에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신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이미 유대 지방에서 일차로 제자들이 되었으나 “와 보는”상태의 제자들이었다. 이제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미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이 두 번째 단계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고 따른 것이다. 이때 중심 말은 “나를 따르라”이다. 이제는 따라다니며 제자도를 배우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사도로 임명되는 단계이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예수님을 따르면서 배운 것을 가서 증거해야 하는 단계이다. 12명의 제자들은 이런 단계를 거쳐서 제자들의 직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우리도 사도의 단계에까지 가여 한다. 즉 예수의 증인으로서 가서 전도하는 단계이다.
아직도 우리는 “와 보는”단계에 있지 않는가? 아지도 따르는 단계도 아닌 것 같다. 언제 가서 증거하는 단계에 이르려는가.
교훈: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좇았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월요일(12월 31일) 누가 제자인가?
제자(disciple)라는 단어는 ‘학습자,’ ‘견습생,’ 또는 ‘신봉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마쎄테스(mathetes)에서 왔다. 즉 한 가지 목적에 마음을 고정시킨 사람을 묘사하는 말이다. 신약 특히 사복음서에서 제자란 대부분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제자는 “어떤 스승이나 운동을 흠모하는 초심자나 추종자로서, 그 스승의 가르침이나 그 운동의 방침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말한다”(폴 J. 아치트마이어 편, 하퍼 성경사전, 1985년, 222). 그러므로 제자는 가르침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스승이나 교사에게 견습을 받는 견습생이나 학습자이다. 스승이 없으면 제자도 없다. 신약에서 제자라는 용어는 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1. 제자도에는 명령에 따르고 헌신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답: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을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분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2. 그리스도인들도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로부터 견습을 받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게 충성과 헌신을 바쳐야 합니까? 교회입니까? 교리입니까? 가르치기를 잘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설교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고린도전서 1:10-17, 특히 12절의 말씀은 이 문제에 관해 어떤 빛을 던져줍니까?
고전1:10-17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 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침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침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침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답: 그리스도인들은 제자로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 배우는 자들이 그분의 참 제자들이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우리의 구주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자아는 그 욕망을 첫 자리에 두고자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온 마음과 모든 애정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둘째 자리로 들어오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첫째 자리,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분이 우리의 존경과 충성의 표시를 요구하셔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것들이 가정과 교회 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속마음의 기초가 된다. 만일 마음과 영혼과 힘과 생명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면, 모든 애정이 그분께 온전히 바쳐지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모든 일에 있어서 최고로 모실 것이다”(교회증언, 6권, 103).
<부가설명> 요즘은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고 다만 선생과 학생만 있다고 탄식하는 시대이다.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은데 이렇게 탄식을 한다. 옛날 같은 스승과 제자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없어지고 다만 지식과 학문을 거래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탄식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제자도는 정말 예수님과 그를 믿는 사람들이 인격과 인격이 마주대하여 예수님의 인격을 모방하고 생활하는 관계에 이르러야 한다. 성경이 전적으로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이 예수님께 직접배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며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을 배운 진정한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교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충성과 헌신을 다른 어떤 것에 분산시키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집중하여야 한다.
화요일(1월 1일) 어떻게 제자가 되는가?
1. 마가복음 1:19-20을 읽으십시오(참조 마 4:18-19). 이 구절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추종자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해 줍니까?
막1:19,20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마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답: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가 그분의 제자가 된다. 예수께서 부르실 때에 즉시 응하여 따라가는 자가 바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부르심에 응할 때는 즉시 응해야 한다. 부르심의 없으면 응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먼저 주님의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에 응답이 있을 때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제자들은 선택되었다. 즉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스스로 제자가 될 수는 없다. 다만 부르심에 반응함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2. 다음 구절들은 이 주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막 2:13-14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시니 일어나 좇았다.
막 3:13-14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예수께서 자기의 원하는 열둘을 부르셨다.
눅 5:8-11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시니 모두 버려두고 좇았다.
요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행 9:4-6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고 그에게 지시하셨다.
역사적 상황에서 제자도의 주도권이 제자들에게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 구절들은 보여준다. 주도권은 주님께 있고, 각 제자들은 주님의 그 부르심에 반응하였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조차도 전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 또한 거룩한 주권이 내포되어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 6:44). 제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은혜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편을 제공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까지 손길을 뻗치셔서 부르심에 응하기를 호소하신다.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라는 사실을 누가 의심할 수 있으랴?
3. 이 말씀들을 읽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답: 기쁘게 즉시 반응하렵니다. 모든 반생들도 그렇게 즉시 반응합시다.
예수께서 먼저 나다나엘을 보셨음
“나다나엘이 예수께 나왔을 때에 구주께서 외치시기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셨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 1:48)하고 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고 하셨다”(정로의 계단, 91).
<부가설명>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세 경우가 있다. 첫째는 보편적인 부르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그를 믿도록 부르신 것이다. 이 보편적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실제적인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보편적인 부르심에 응답하여 부르심을 받아들이므로 실제적인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명과 직분을 맡기신다. 그것을 봉사를 위한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실제적인 부르심만이 아니라 봉사를 위한 부르심에도 응답해야 한다. 그들에게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지금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세 천사의 기별을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교훈: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다만 그분의 부르심에 반응함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분의 이끄심과 부르심에 감사드리자.
수요일(1월 2일) 제자도의 조건들
지금까지의 공부를 통해 우리는 제자의 몇 가지 조건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신약에서 제자도는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도록 사람들을 부르심으로 시작되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반응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제자도의 한 조건이 된다.
둘째, 따르는 자는 자기가 추종하는 대상에 대해 구체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 자들은 그분에게서 이전의 다른 이들과는 구별되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들이 주님을 따랐던 것은 그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자도의 세 번째 조건은 앞의 두 가지 조건에 대한 자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즉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과 그 대상에 대한 믿음은 부르심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 나타나야 한다. 적극적인 반응이 없이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자원하는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능동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께서 각 사람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초청하셨을 때 그들은 즉시 그렇게 하였다. 그들이 순종했다는 것은 순종이 제자 됨의 한 조건임을 의미한다. 고집스럽게 불순종하는 사람은 결단코 주님의 성공적인 제자가 될 수 없다.
한편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결별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일터를 버렸고, 가족을 떠났으며, 가진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유의하였다. 그러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직장과 가족과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한 요구가 있을 때에 그렇게 자원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
“십자가는 가장 잔인하고 굴욕적인 형태의 사형 집행 기구였다. 가장 저열한 죄수가 사형 장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종 죄수들의 어깨에 십자가를 메우고자 할 때에는 굴복 당할 때까지 광포하게 항거하다가 마침내 그 고문의 기구가 그들에게 메워지곤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 말씀은 비록 희미하게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가장 치욕적인 수욕,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까지 그들이 복종해야 할 것을 지적하신 것이었다. 이 말씀보다 더 완전한 자아 포기를 묘사한 말씀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그들을 위하여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바 된 동안에는 하늘을 계실 만한 곳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그분은 비난과 모욕의 생애를, 그리고 치욕의 죽음을 받으시기 위하여 하늘 궁정을 떠나셨다. 하늘의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화를 가지시고 부요하시던 그분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당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시대의 소망, 416).
<부가설명>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스승의 제자가 된다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이라도 그는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을 따르는 것은 도덕 행실도를 배우고 지식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얻지는 못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사망이 다시는 그들을 주장하지 못한다. 그들이 얻은 예수의 생명으로 전적으로 예수를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비로소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얻었으면 그 생명이 우리를 그 생명의 생태대로 살게 한다. 그것이 적극적인 반응이요 진정한 순종이다. 우리는 참으로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의 생태대로 살고 있는가?
교훈: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은 그분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순종함으로 직접 따라나서야 한다.
목요일(1월 3일) 제자도의 본질
주님을 따르도록 부르신 데는 공동체와 친교의 삶을 살도록 부르신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분명히 밀접한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계가 제자도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그분의 말씀 곧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예수님의 마음에 영감을 불어넣었는데, 이 긴밀한 관계를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15:9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당신과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로 설명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초청하시면서 우리가 그분께 더 가까이 밀착될 필요가 있음을 더욱 강조하셨다.
1. 다음 구절들은 제자도에 관해 또 어떤 사실을 말해 줍니까?
마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은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한다.
마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심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2. 마태복음 10:24-25과 누가복음 6:40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구절들은 제자도의 어떤 중요한 핵심을 지적해 줍니까?
마10:24,25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눅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답: 제자의 목표는 그 선생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제자된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자도에는 과거를 청산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일깨워준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있기를 고대하고 그분으로부터 배우기를 원하며, 그분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마가복음 3:14에는 예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면 그분으로부터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닮아 가도록 고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그분의 왕국에 관한 비전을 갖게 되고 그 왕국에 들어가기를 열망하였다.
예수님을 닮아간 제자들
“예수께서 배움이 없는 어부들을 선정하신 것은 그들이 그 당시의 유전과 그릇된 관습들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교육할 수 있는 겸손하고 온순한 사람들이었다. … 제자들이 구주께서 주시는 훈련을 받고 나올 때에 그들은 더 이상 무식하지도 교양이 없지도 않았다. 그들의 마음과 품성은 그리스도를 닮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시대의 소망, 250).
<부가설명>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예수의 인격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생과 학생의 사이에는 선생이 가르치는 학문을 잘 습득하면 된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르치는 학문을 지식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사람됨과 그분의 사는 방식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개가 사슴처럼 살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개가 사슴처럼 사는 일이 쉽게 되는 것은 개가 사슴으로 거듭나면 된다. 그처럼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생명이 거듭난 제자들을 예수처럼 살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제자도의 본질이다. 그것이 바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가지들이 되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찔레가 아니다. 포도나무 가지도 포도나무이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의 제자들이 예수 안에서 본질이 예수님과 같아져야 하고 같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를 맺지 않으면 이상하다. 우리는 진정으로 이런 제자들인가?
교훈: 가지가 포도나무에 온전히 붙어 있듯이, 제자는 스승과 함께 거하면서 스승의 인격과 가르침을 통해 배우고 스승을 더욱 닮아가게 된다.
금요일(1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18-219, 226-227, 303, 442, 576-577, 589-591, 10권, 265-266, 280-282, 500-503, 678-680, 시대의 소망, 139-143, 244-251, 292.
“진리의 이론이나 그분의 제자라는 공언만으로는 어떤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것이 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목적 의식이 약해지고 갈망이 늘 변하는 것은 전심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실물교훈, 50).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다. 마태의 마음에는 주저함이나 의심도 없었고 이익이 남는 사업이 가난과 곤란으로 바뀌어지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
이전에 부름을 받은 제자들 역시 그러하였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시자 즉시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렸다. 이 제자 중의 어떤 이들에게는 생계를 그들에게 의존하는 친구가 있었으나 구주의 초청을 받았을 때에 머뭇거리거나 내가 어떻게 생활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할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심에 순종하였다”(시대의 소망, 27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이 차이점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교회의 교인이 되었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 물론 교인이 되었으나 제자가 전혀 아닐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가라지이다. 교회에 출석 잘 하고 교회의 사업에 열심을 내고 교회의 규칙에 성실해도 예수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으면 그는 침된 제자가 아니다. 제자 후보자이다. 후보자는 빨리 제자가 되는 것이 좋다.
2.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악용되거나 오용될 가능성은 없을까요? 다시 말해 사람이 자신의 당연한 책임과 도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지는 않을까요?
*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고르반 되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예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은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다.
3.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 예수님의 뜻과 나의 생각 사이에서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따르는 삶이다. 요행이 예수님의 생각과 자기 생각이 일치하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충돌할 때는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예수님의 생각에 자기를 굴복시켜야 한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 참으로 제자가 되어 예수의 생명으로 예수처럼 살기를 기도한다.
총 론
그리스도의 제자들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는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끌어온 주제이지만, 예수님의 첫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훨씬 더 중대한 문제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제자도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경험이었다. 제자도의 핵심은 관계인데, 그것은 변화시키고 자유케 하며 능력을 부여하는 그런 관계이다. 이것은 초기 제자들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시켜나가는 사람으로서, 성령을 통해 예수께서 주님 되심을 일상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체현(體現)하는 사람을 말한다. 제자는 교회의 사명에 활발하고도 지속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책임감 있는 교인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동기에 의하여 움직인다.
우리는 제자도를 여러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다. 첫째로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상호 교감했던 역사적인 배경에서 고찰할 수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숙고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 제자도의 특성과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관점을 다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제자도는 다른 제자도와 다르다. 1세기에 꽤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그 가르침으로 존경을 받던 여러 교사들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인 제자도는 좀 독특한 형식을 나타내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모방하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제자도에는 예수님과의 동행과 모방이 수반되었다.
또한 우리는 제자도를 (1)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의 제자도, (2) 그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제자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경험했던 제자도를 생각해 볼 때, 몇 가지 물음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고 가르침과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생생한 경험이었을까? 그분의 행동을 목격하고 그분의 모본을 직접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실감나는 일이었을까?
한편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이 있은 지 수세기 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자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제자도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예수님과 그분의 처음 제자들이 살던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자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이번 기 교과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된 사람들이 주님과 나누게 되는 경험이라는 차원에서 제자도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제자도의 의미와 참된 제자의 특성에 관해 탐구할 것이다. 또한 제자가 되는 과정과 제자도의 주요 특징들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도와 당시에 추앙받던 다른 교사들의 제자도를 비교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제자가 될 뻔했던 사람들, 여성과 제자도, 인종(人種)과 제자도, 제자도를 위한 지침, 빗나간 제자도 등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제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숙고해 볼 것이다.
이번 기 교과를 집필한 버트럼 멜버른(Betram Melbourne)은 자메이카(Jamaica) 태생으로, 본 교과를 집필할 당시 워싱턴 DC에 소재한 하워드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아내와의 사이에 장성한 세 자녀가 있다.
클리포드 골드스틴
1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27분)
기억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8-19).
연구 범위: 마 4:18-22, 10:24-25, 막 3:13-14, 8:34-35, 눅 14:25-26.
중심 사상: 제자도란 무엇인가? 누가 제자인가? 자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제자가 되기 위한 자격 조건은 무엇인가? 제자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안식일 오후
스티븐슨(Dwight E. Stevenson)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할 당시의 한 일화를 통해 제자도의 중요한 측면을 설명해 주었다. “꼬르떼즈(Cortez)는 500명의 자기 부하들을 멕시코 동부 연안에 상륙시킨 다음, 배에 불을 질러버렸다”(찰스 L 월리스 편, 특별한 날을 위한 설교 예화, 베이커 북 하우스, 1975년, 25).
정복자들은 그들이 퇴각할 수 있는 수단인 배가 불꽃에 휩싸인 것을 바라보며, 조국 스페인을 위해 신대륙 정복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그 일에 전적으로 헌신해야만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제자의 사역에 몸 바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항구에서 배를 불살라버려야 한다. 우리에겐 물러설 여지가 없다. 돌아갈 길은 없다. “후퇴는 없고 오직 전진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한 자들의 표어가 되어야 한다.
핵심본문: 마 4:18-22
학습 목표
깨닫기: 제자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깨닫는다.
느끼기: 예수님께 아낌없이 헌신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다.
행하기: 다른 사람을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교과 개요
I. 주님의 부르심
A.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떻게 배를 버리고 즉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했는가? 부르심에 신속히 반응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B. 제자란 헬라어로 마쎄테스(mathetes)인데,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자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부르심에 응하므로 제자가 될 수 있다.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가?
C. 예수께서는 일하고 있는 베드로를 왜 부르셨는가? 베드로는 왜 모든 것을 버리는 경험을 가져야만 했는가?
II. 우리의 배(船)를 불태워버림
A. 꼬르떼즈가 멕시코에 상륙하자마자 배를 태워버렸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섬기기 위해 어떻게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가?
B.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열두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분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부르셨는가?
III. 부르심을 따름
A.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이 우리 삶에 어려움을 줄 수 있는가?
B. 우리는 어떻게 제자로 자라날 수 있는가?
C. 예수께서는 안드레를, 안드레는 베드로를 불렀다. 제자가 제자를 부른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그분께로 인도할 수 있는가?
요점: 제자도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사이에 맺어진 친밀한 관계이다.
일요일(12월 30일)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과 그 후의 제자들
성경에서 제자도의 개념은 역사적 차원의 제자도와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로 나타난다.
먼저 역사적 차원의 제자도란 크신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첫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일컫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나사렛에서 온 랍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친밀하고도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란 그리스도와 회심한 그리스도인, 그리고 세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를 가리킨다.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는 또한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생애로 인해 직면하게 되는 도전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제자도의 개념에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느냐의 문제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나타내느냐의 문제가 함께 포함된다.
바로 여기서 역사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가 함께 만난다. 오늘날의 제자들은 역사 속에 기록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의 경험을 통해 주어진 영감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 마태복음 4:18-22에 나타난 제자도의 개념을 정리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요구하신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를 비교해 보십시오. 이 네 제자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제자도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갖게 됩니까? 요한복음 1:40-42을 참조하십시오. 이 구절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요1:40-42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답: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에서 우리는 제자도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2. 사도행전 11:26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제자도의 의미에 관해 어떤 통찰을 갖게 됩니까?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답: 그리스도인은 누가 보더라도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
“이제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이전 생애를 버리고 그들의 관심을 당신의 관심과 결합시키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그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해안에 도착하시자 예수께서 다른 세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시대의 소망, 246).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옛 교제도 끊어 버리고, 평생의 계획도 포기하며, 이 땅의 희망도 내어 버려야 한다”(복음교역자, 112).
<부가설명> 복음서를 자세히 읽으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적어도 세 단계를 거친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의 기록이 그 첫 단계이다. 침례요한의 제자인 요한과 안드레가 침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가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이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되고 그 즉시 안드레는 그 형제 시몬을 불러왔고, 안드레 다음으로 요한도 그 형제 야고보를 데려왔던 것 같다. 그리고 빌립을 부르셨고 나다나엘을 부르셨다. 이것이 일차 부르심인데, 이때는 와보라는 것이 중심 말이다. 이때는 초기 유대 지방 봉사 때의 일이다. 그런 후에 침례요한이 잡힌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는 유대 지방을 떠나서 갈릴리 지방으로 봉사의 중심지를 옮기셨다. 그때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배에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신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이미 유대 지방에서 일차로 제자들이 되었으나 “와 보는”상태의 제자들이었다. 이제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미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이 두 번째 단계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고 따른 것이다. 이때 중심 말은 “나를 따르라”이다. 이제는 따라다니며 제자도를 배우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사도로 임명되는 단계이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예수님을 따르면서 배운 것을 가서 증거해야 하는 단계이다. 12명의 제자들은 이런 단계를 거쳐서 제자들의 직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우리도 사도의 단계에까지 가여 한다. 즉 예수의 증인으로서 가서 전도하는 단계이다.
아직도 우리는 “와 보는”단계에 있지 않는가? 아지도 따르는 단계도 아닌 것 같다. 언제 가서 증거하는 단계에 이르려는가.
교훈: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좇았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월요일(12월 31일) 누가 제자인가?
제자(disciple)라는 단어는 ‘학습자,’ ‘견습생,’ 또는 ‘신봉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마쎄테스(mathetes)에서 왔다. 즉 한 가지 목적에 마음을 고정시킨 사람을 묘사하는 말이다. 신약 특히 사복음서에서 제자란 대부분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제자는 “어떤 스승이나 운동을 흠모하는 초심자나 추종자로서, 그 스승의 가르침이나 그 운동의 방침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말한다”(폴 J. 아치트마이어 편, 하퍼 성경사전, 1985년, 222). 그러므로 제자는 가르침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스승이나 교사에게 견습을 받는 견습생이나 학습자이다. 스승이 없으면 제자도 없다. 신약에서 제자라는 용어는 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1. 제자도에는 명령에 따르고 헌신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답: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을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분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2. 그리스도인들도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로부터 견습을 받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게 충성과 헌신을 바쳐야 합니까? 교회입니까? 교리입니까? 가르치기를 잘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설교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고린도전서 1:10-17, 특히 12절의 말씀은 이 문제에 관해 어떤 빛을 던져줍니까?
고전1:10-17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 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침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침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침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답: 그리스도인들은 제자로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 배우는 자들이 그분의 참 제자들이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우리의 구주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자아는 그 욕망을 첫 자리에 두고자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온 마음과 모든 애정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둘째 자리로 들어오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첫째 자리,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분이 우리의 존경과 충성의 표시를 요구하셔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것들이 가정과 교회 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속마음의 기초가 된다. 만일 마음과 영혼과 힘과 생명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면, 모든 애정이 그분께 온전히 바쳐지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모든 일에 있어서 최고로 모실 것이다”(교회증언, 6권, 103).
<부가설명> 요즘은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고 다만 선생과 학생만 있다고 탄식하는 시대이다.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은데 이렇게 탄식을 한다. 옛날 같은 스승과 제자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없어지고 다만 지식과 학문을 거래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탄식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제자도는 정말 예수님과 그를 믿는 사람들이 인격과 인격이 마주대하여 예수님의 인격을 모방하고 생활하는 관계에 이르러야 한다. 성경이 전적으로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이 예수님께 직접배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며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을 배운 진정한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교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충성과 헌신을 다른 어떤 것에 분산시키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집중하여야 한다.
화요일(1월 1일) 어떻게 제자가 되는가?
1. 마가복음 1:19-20을 읽으십시오(참조 마 4:18-19). 이 구절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추종자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해 줍니까?
막1:19,20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마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답: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가 그분의 제자가 된다. 예수께서 부르실 때에 즉시 응하여 따라가는 자가 바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부르심에 응할 때는 즉시 응해야 한다. 부르심의 없으면 응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먼저 주님의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에 응답이 있을 때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제자들은 선택되었다. 즉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스스로 제자가 될 수는 없다. 다만 부르심에 반응함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2. 다음 구절들은 이 주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막 2:13-14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시니 일어나 좇았다.
막 3:13-14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예수께서 자기의 원하는 열둘을 부르셨다.
눅 5:8-11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시니 모두 버려두고 좇았다.
요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행 9:4-6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고 그에게 지시하셨다.
역사적 상황에서 제자도의 주도권이 제자들에게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 구절들은 보여준다. 주도권은 주님께 있고, 각 제자들은 주님의 그 부르심에 반응하였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조차도 전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 또한 거룩한 주권이 내포되어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 6:44). 제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은혜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편을 제공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까지 손길을 뻗치셔서 부르심에 응하기를 호소하신다.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라는 사실을 누가 의심할 수 있으랴?
3. 이 말씀들을 읽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답: 기쁘게 즉시 반응하렵니다. 모든 반생들도 그렇게 즉시 반응합시다.
예수께서 먼저 나다나엘을 보셨음
“나다나엘이 예수께 나왔을 때에 구주께서 외치시기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셨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 1:48)하고 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고 하셨다”(정로의 계단, 91).
<부가설명>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세 경우가 있다. 첫째는 보편적인 부르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그를 믿도록 부르신 것이다. 이 보편적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실제적인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보편적인 부르심에 응답하여 부르심을 받아들이므로 실제적인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명과 직분을 맡기신다. 그것을 봉사를 위한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실제적인 부르심만이 아니라 봉사를 위한 부르심에도 응답해야 한다. 그들에게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지금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세 천사의 기별을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교훈: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다만 그분의 부르심에 반응함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분의 이끄심과 부르심에 감사드리자.
수요일(1월 2일) 제자도의 조건들
지금까지의 공부를 통해 우리는 제자의 몇 가지 조건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신약에서 제자도는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도록 사람들을 부르심으로 시작되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반응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제자도의 한 조건이 된다.
둘째, 따르는 자는 자기가 추종하는 대상에 대해 구체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 자들은 그분에게서 이전의 다른 이들과는 구별되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들이 주님을 따랐던 것은 그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자도의 세 번째 조건은 앞의 두 가지 조건에 대한 자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즉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과 그 대상에 대한 믿음은 부르심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 나타나야 한다. 적극적인 반응이 없이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자원하는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능동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께서 각 사람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초청하셨을 때 그들은 즉시 그렇게 하였다. 그들이 순종했다는 것은 순종이 제자 됨의 한 조건임을 의미한다. 고집스럽게 불순종하는 사람은 결단코 주님의 성공적인 제자가 될 수 없다.
한편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결별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일터를 버렸고, 가족을 떠났으며, 가진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유의하였다. 그러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직장과 가족과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한 요구가 있을 때에 그렇게 자원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
“십자가는 가장 잔인하고 굴욕적인 형태의 사형 집행 기구였다. 가장 저열한 죄수가 사형 장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종 죄수들의 어깨에 십자가를 메우고자 할 때에는 굴복 당할 때까지 광포하게 항거하다가 마침내 그 고문의 기구가 그들에게 메워지곤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 말씀은 비록 희미하게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가장 치욕적인 수욕,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까지 그들이 복종해야 할 것을 지적하신 것이었다. 이 말씀보다 더 완전한 자아 포기를 묘사한 말씀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그들을 위하여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바 된 동안에는 하늘을 계실 만한 곳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그분은 비난과 모욕의 생애를, 그리고 치욕의 죽음을 받으시기 위하여 하늘 궁정을 떠나셨다. 하늘의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화를 가지시고 부요하시던 그분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당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시대의 소망, 416).
<부가설명>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스승의 제자가 된다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이라도 그는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을 따르는 것은 도덕 행실도를 배우고 지식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얻지는 못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사망이 다시는 그들을 주장하지 못한다. 그들이 얻은 예수의 생명으로 전적으로 예수를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비로소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얻었으면 그 생명이 우리를 그 생명의 생태대로 살게 한다. 그것이 적극적인 반응이요 진정한 순종이다. 우리는 참으로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의 생태대로 살고 있는가?
교훈: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은 그분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순종함으로 직접 따라나서야 한다.
목요일(1월 3일) 제자도의 본질
주님을 따르도록 부르신 데는 공동체와 친교의 삶을 살도록 부르신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분명히 밀접한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계가 제자도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그분의 말씀 곧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예수님의 마음에 영감을 불어넣었는데, 이 긴밀한 관계를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15:9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당신과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로 설명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초청하시면서 우리가 그분께 더 가까이 밀착될 필요가 있음을 더욱 강조하셨다.
1. 다음 구절들은 제자도에 관해 또 어떤 사실을 말해 줍니까?
마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은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한다.
마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심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2. 마태복음 10:24-25과 누가복음 6:40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구절들은 제자도의 어떤 중요한 핵심을 지적해 줍니까?
마10:24,25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눅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답: 제자의 목표는 그 선생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제자된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자도에는 과거를 청산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일깨워준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있기를 고대하고 그분으로부터 배우기를 원하며, 그분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마가복음 3:14에는 예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면 그분으로부터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닮아 가도록 고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그분의 왕국에 관한 비전을 갖게 되고 그 왕국에 들어가기를 열망하였다.
예수님을 닮아간 제자들
“예수께서 배움이 없는 어부들을 선정하신 것은 그들이 그 당시의 유전과 그릇된 관습들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교육할 수 있는 겸손하고 온순한 사람들이었다. … 제자들이 구주께서 주시는 훈련을 받고 나올 때에 그들은 더 이상 무식하지도 교양이 없지도 않았다. 그들의 마음과 품성은 그리스도를 닮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시대의 소망, 250).
<부가설명>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예수의 인격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생과 학생의 사이에는 선생이 가르치는 학문을 잘 습득하면 된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르치는 학문을 지식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사람됨과 그분의 사는 방식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개가 사슴처럼 살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개가 사슴처럼 사는 일이 쉽게 되는 것은 개가 사슴으로 거듭나면 된다. 그처럼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생명이 거듭난 제자들을 예수처럼 살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제자도의 본질이다. 그것이 바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가지들이 되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찔레가 아니다. 포도나무 가지도 포도나무이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의 제자들이 예수 안에서 본질이 예수님과 같아져야 하고 같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를 맺지 않으면 이상하다. 우리는 진정으로 이런 제자들인가?
교훈: 가지가 포도나무에 온전히 붙어 있듯이, 제자는 스승과 함께 거하면서 스승의 인격과 가르침을 통해 배우고 스승을 더욱 닮아가게 된다.
금요일(1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18-219, 226-227, 303, 442, 576-577, 589-591, 10권, 265-266, 280-282, 500-503, 678-680, 시대의 소망, 139-143, 244-251, 292.
“진리의 이론이나 그분의 제자라는 공언만으로는 어떤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것이 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목적 의식이 약해지고 갈망이 늘 변하는 것은 전심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실물교훈, 50).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다. 마태의 마음에는 주저함이나 의심도 없었고 이익이 남는 사업이 가난과 곤란으로 바뀌어지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
이전에 부름을 받은 제자들 역시 그러하였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시자 즉시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렸다. 이 제자 중의 어떤 이들에게는 생계를 그들에게 의존하는 친구가 있었으나 구주의 초청을 받았을 때에 머뭇거리거나 내가 어떻게 생활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할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심에 순종하였다”(시대의 소망, 27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이 차이점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교회의 교인이 되었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 물론 교인이 되었으나 제자가 전혀 아닐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가라지이다. 교회에 출석 잘 하고 교회의 사업에 열심을 내고 교회의 규칙에 성실해도 예수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으면 그는 침된 제자가 아니다. 제자 후보자이다. 후보자는 빨리 제자가 되는 것이 좋다.
2.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악용되거나 오용될 가능성은 없을까요? 다시 말해 사람이 자신의 당연한 책임과 도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지는 않을까요?
*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고르반 되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예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은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다.
3.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 예수님의 뜻과 나의 생각 사이에서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따르는 삶이다. 요행이 예수님의 생각과 자기 생각이 일치하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충돌할 때는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예수님의 생각에 자기를 굴복시켜야 한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 참으로 제자가 되어 예수의 생명으로 예수처럼 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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