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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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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08-02-27 20:18 조회8,3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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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음
1월 19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41분)

도입)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의 특유의 부르심은 “나를 본받으라”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였다. 예수가 우리에게 최고의 해방자가 아니면 최고의 짐이라고 한 신학자 포사이스(P.T Forsyth)의 말은 옳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요구하신다면 그분은 우리의 모범인 동시에 우리 삶의 최고의 짐이 될 것이다. 예수의 완전한 삶을 본받으려는 수고는 일종의 “행위”나 의의 성취마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극도로 감당 못할 짐이 되어버린 이상으로 인해 허덕이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그분의 인생을 살아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르심이다. 그분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오늘도 부르신다.

기억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연구범위: 마 4:18-22, 5:46, 9:10-11, 막 1:16-20, 눅 5:1-11, 18:10-11, 요 1:35-51.

중심 사상: 첫 제자들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들이 부르심에 응할 수 있도록 성경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레위 마태의 부르심에서 우리가 배울 교훈은 무엇인가? 제자로의 부르심에 여러 차이점들이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무엇인가? 초기 제자들에 비해 오늘날의 제자들은 어떤 유리한 입장에 있는가?

안식일 오후
“가리발디(Garibaldi)는 로마의 습격이 있은 후에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제군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배고픔과 목마름, 고생과 죽음뿐이다. 그러나 조국을 사랑하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그는 많은 용감한 젊은이들이 배고픔과 목마름과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따를 것을 알았다”(고든 네스비 편, 그리스도인 세계의 보물, 뉴욕, 1953년, 92)
가리발디와는 달리 예수께서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호소하셨다. 그분을 따르는 자들 또한 배고픔과 목마름, 고생과 죽임을 당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겐 영생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날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초기 제자들을 부르신 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일요일(1월 13일)
첫 제자들을 부르심

도입)
예수님은 예수님의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제자들을 부르셨다.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시고 그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복음을 하나님은 오늘날 조용히 이루고 계신다. 이 땅의 수없이 많은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해 급하게 어떤 큰 것을 가지고 이루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셔서 그 분의 복음 사역의 통로가 되게 하셨다. 그것이 믿음의 법칙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복음이 되셨다는 사실은 아주 놀라운 사실인데 그 놀라운 사실을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을 통해 전하게 하신다는 사실 또한 아주 놀라운 것이다. 하나님의 그 위대한 비밀과 위대한 사역에 우리 같은 연약하고 나약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 복음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를 통하여 전하게 하신 그 놀라운 비밀과 책무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아들의 그 귀한 피가 바로 우리를 통하여 전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피가 우리를 통해 전해지기도 하고 막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요한복음 1:35-51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예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그들이 부르심에 응하도록 침례자 요한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답:

2. 사람들이 기꺼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성경이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답:

3. 부르심에 응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습니까? 우리를 위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답:

4.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편견을 극복하도록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답:
안드레는 예수님과 함께 한 후에 그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었을 뿐 아니라, 곧바로 제자 됨의 기쁨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자도가 몇몇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며 어느 친목 단체나 모임에 의해 독점될 수 없다는 지극히 중대한 원칙을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드레가 부르심에 응한 사례는 전도의 좋은 모형이 된다. 안드레는 침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형 베드로에게 자신의 경험을 말함으로 예수님을 소개하여 그도 그분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우리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듣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기로 헌신하였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그분에 관한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교훈: 안드레는 침례자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에 관해 들었으며, 그분의 제자가 된 후에 즉시 베드로에게 그분을 소개하였다. 나는 누구에게 전하기를 원하는가?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제자로 삼으신 베드로와 안드레는 직업이 어부였다.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도시로 전도하러 가시지 않고 갈릴리 어촌으로 전도하시며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그들은 당시 풍부한 부나 교육적인 부분을 누리지 못하는 소시민들이었으며 사회적으로 어떠한 지위도 확보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무식한 자들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을 제자로 삼으신 것은 그리스도의 관심이 소외자와 멸시자에게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빈부귀천과 유식, 무식의 구별에 따라 제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들을 즐겨 부르셨다. 그런데 이 같은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말로써든, 행위로서든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게 하려 하심이다(마 5:16; 막 16:15). 물론 소외되고 멸시받는다 하여 무조건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소외와 멸시가운데 예수님을 경시하는 것은 스스로를 매우 불행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

월요일(1월 14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의 부르심

도입)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부르심에 공통된 점은 “버려두고”이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물을 버려두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따라나섰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그의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겪게 될 갈등을 아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정의 책임보다 우선이 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일과 가정을 버렸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결혼한 것과 결혼하지 않은 것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를 비교했다. 그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긴 것은 그는 이 세상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최고의 우선권을 두었다. 그는 결혼을 권면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독신생활도 권면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결단이며 그를 따른 결단을 위해서 그 어떤 것이라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말씀이다.

1. 마태복음 4:18-22과 마가복음 1:16-20에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까? 이 두 경우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좇았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이처럼 성경에서 전적인 헌신의 원리가 나타나는 곳은 여기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2. 다음 성경절들을 살펴보십시오. 비록 상황은 다르지만 동일한 원리가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창 12:1(참조 히 1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왕상 19:19-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빌 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11: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님께서 우리의 온 마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그분께 굴복시키지 않은 것들, 우리 자신이 굳게 붙잡고 포기하기를 거절하는 것들, 주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무엇이나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 더군다나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결국에는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는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데 더 큰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기꺼이 버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 6:24).

교훈: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하며 그분의 제자가 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

부가적용)
마 4: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에서와 막 1: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에서 이 두 구절에 공통된 낱말이 또 있다. 그것은 “곧”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곧”이라는 단어는 결단을 내린 후에 주저하지 않고 곧 바로(Straightway) 실행하였다는 뜻이다. 버리기로 작정한 것은 곧바로 버려야 하고, 따르기로 작정하였으면 곧바로 실천하여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교훈 하는 순종의 도리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부르시는 것을 소명이라고 하는데, 소명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구원을 위한 것이고, 둘째는 사역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따라 오라는 부르심에 하던 것을 버려두고 좇았다. 희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한 사람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저들은 자기가 하던 일을 정리한다든지 인계한다든지 함이 없었다. 믿음은 바로 행하여 좇음이지 잠시후에라 함이 아님을 보여준다. 믿음의 길을 가는 자들이 이와 같이 핑계하거나 미룸이 아닌 바로 지금 현재에 행하여가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자법관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젊은 관원은 자신의 가진 많은 돈 때문에 근심하며 씁쓸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던 베드로가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눅 18:28)고 고백을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 18:29-30)고 하셨다. 희생을 동반하지 않는 결단은 무의미한 것이고, 십자가 없는 결단은 형식에 불과 할 뿐이다.

화요일(1월 15일)
누가복음에서의 부르심

도입)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 때 서로 다른 배경과 묘사를 읽을 때 성경이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에 당혹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알면 이해가 될 수 있다. 4복음서의 기록의 목적은 4가지 다른 상이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접근해 가기 위해서 기록된 기록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해 기록되었고 마가는 네로에 의해 핍박당하는 자들을 위해 기록하였다. 그래서 저들과 함께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기록하였으며, 누가는 누가복음을 이방 죄인들을 위해 기록하였다. 그래서 누가는 창기였고 가난했고, 죄인인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했다. 누가복음에서만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가 나오며 부자와 나사로, 삭개오의 회개, 방탕한 아들, 잃어버린 은전에 대해 나온다. 그리고 십자가의 두 죄수에 대한 기록은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나온다. 이것은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된 복음임을 보여준다. 누가는 핍박당하는 죄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기록을 흥미를 가지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기독교 제 2세대를 위해 기록하였다. 4복음서는 네 부류의 서로 다른 전도의 대상을 위해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기록된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 누가복음의 기록이 다른 제자들과 다른지를 아래 부가적용에 기록해 놓았다.

누가복음 5:1-11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과 함께, 다른 복음서의 기자들이 생략한 부분까지 언급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복음서가 서로 상충되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문제될 것이 없으며, 비록 세세한 부분이나 강조점이 다를지라도 중요한 핵심에 있어서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누가복음 5:1-11을 읽으십시오. 베드로가 이미 예수님께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답:
제자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라. 그들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했다. 바로 이때 예수께서 오셔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아니 한낮에 어떻게 고기를 잡는단 말인가? 그러나 왠지 모르지만 베드로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신뢰할 만한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어떤 면에서 그의 반응은 제자도의 본질과 영원한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 줍니까?(사 53:6, 롬 5:16-21, 요일 1:7-9).
답: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결함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베드로처럼 우리 자신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함으로써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수 있다.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함으로써만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교훈: 베드로는 무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생겨난다(롬 10:17).

부가적용)
누가는 누가복음을 이방 죄인들을 위해 기록하였다. 그럼으로 이 글을 읽고 듣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날 수 있었는지 합리적으로 설득을 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부른다고 그냥 따라간다는 것이 이방사람들에게는 설득되기 어려운 부르심 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을 다른 복음에서는 이 기록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는 비교적 그들이 왜 예수님을 이렇게 신속히 따르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놓음으로 이들이 예수님을 쉽게 따를 수 있었던 당연한 이유를 부연해 설명해 놓은 것이다. 저들의 수고로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저들의 그물이 찢어지도록 건져 올리게 하신 사건을 보여 줌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분이 참으로 보통 분이 아니신 것을 알았고 저들의 삶을 다 바쳐 따를만한 분이심을 느껴 저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떠난 것임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바로 이런 극적인 경험을 소상히 설명하여 줌으로 누가는 이 글을 읽을 대상이 바로 이방사람임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이 그렇게 신속히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이유를 확신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누가가 이방인을 위해 기록된 복음의 기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수요일(1월 16일)
레위 마태를 부르심

도입)
레위지파의 후손인 알패오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이 [레위]("연합하다"라는 뜻)인 그의 그 이름대로 세상과 야합하여 생활하였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특별히 많았던 그는 선민으로서의 긍지를 갖기 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 주의자이기도 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창녀와 죄인들과 같이 가장 천대를 받는 부류였던 세리가 되어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기에 급급했던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인생이 반전되는 상황을 맞는다. 야훼 신앙을 버리고 메시아에 대한 소망마저 등진 철저한 죄인으로 살던 세리의 신분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영광스런 주님의 제자로 변화된 것이다. 로마 황제의 창고를 채우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버나움의 세관에 앉아 동족의 고혈을 짜내는데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던 [레위]가 이제는 회개한 죄인 [마태]로서의 새 인생을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그를 주장하던 육신의 안목과 가치관이 주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자 세상재물에 쏟았던 그의 열심은 주님께로 전이되었다. 불의하게 착복하여 쌓아 두었던 재물로 큰 잔치를 벌여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구원을 증거하며 주님께로 인도하는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또한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생명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사도로서의 훈련을 쌓아갔다. 그러나 성령침례를 받기 이전의 인간의 열심은 주님이 받으시는 고난의 자리를 회피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던 마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오순절날 성령 침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사도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다.

1. 마태복음 9:9, 마가복음 2:14, 누가복음 5:27-28을 읽으십시오. 레위 마태를 부르실 때와 다른 제자들을 부르실 때를 비교해 볼 때 두 부르심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각각 무엇입니까?
답:
지금까지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요한복음 1:44-45에 암시되어 있듯이 경건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레위 마태는 그 사회의 소외 계층에 속해 있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가장 멸시하는 세리였던 것이다.

2. 마태복음 5:46, 9:10-11, 마가복음 2:16, 그리고 누가복음 18:10-11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을 통해 마태와 같은 사람들이 그 당시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답: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가장 가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로마의 문학가들은 세리를 포주(抱主)와 동류로 취급했고, 랍비들은 이들은 강도와 같은 무리로 분류했다. 세리들은 세금을 갈취(喝取)하는 자들로 여겨졌으며(눅 3:12-13), 부정직한 자들로 간주되어 뭇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적국(敵國)을 위해 동족 사람들을 속이고고 유대의 지도세력까지도 속였기 때문이었다.
그처럼 평판이 좋지 못하고 불리한 특성을 지닌 사람을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시다니!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신 사실은 그분께서 제공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해주고, 그분의 왕국의 포용성을 보여주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는 그분의 의지를 드러내 준다.

교훈: 예수께서 레위 마태와 같은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사실은 그분께서 제공하시는 구원의 보편성과 그분의 왕국의 포용성을 잘 드러내 준다.

부가적용)
성령이 충만하여진 마태는 천국복음을 전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예수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 [마태복음]을 기록하여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사랑의 빚을 갚는 헌신된 삶을 살았다. 주안에서 참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마태는 스스로를 "세리 마태"라고 일컬음으로써 은혜 받은 자의 겸손을 보여 주기도 했다. 세상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비천하게 사는 세리에서 목숨을 바치기까지 복음전파에 힘을 기울이는 사도로 발돋음한 마태의 생애는 오늘날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새 지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또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생명의 길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세상의 썩은 재물을 포기하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본 마태의 이름은 믿는 자들만이 들어갈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에 새겨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인생일지라도 하나님께 드려질 때 어떤 위대한 삶을 영위하고 살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 (요한계시록 21: 14 참조)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주 앞에서 낮추는 자를 하늘나라의 큰 자로 높이시는 것이다.

목요일(1월 17일)
하나님의 부르심

도입)
J.M.Boice는 " 20세기 교회에 한가지 치명적인 결함은 진정한 제자도의 결핍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제자도란 그리스도를 좇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 칭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많이 알고 그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고 하시고,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데에는 어떠한 제한이나 한계가 없는 것이었고 인류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 특별한 기준이나 자격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 부름에 순종하여 따라온 것과 순종하지 않은 차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름에 따르는 모든 자는 제자일 수 있는 것이고 제자이어야 한다. 즉 주님을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모든 신자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된 자들에게 제자로서의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며, 제자 삼는 삶을 살며, 제자로서의 직업관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 것을 명하신다.

1.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각각의 경우들을 탐구해 볼 때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히 11:1).
답:
놀랍게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할 당시 그들 앞에 어떤 일이 닥쳐올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으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번 주 교과에서 살펴본 대로,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예수님이 메시야시라는 어느 정도의 성경적 증거를 가지고 있었으나(요 1:45), 복음서들을 연구해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봉사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고, 특히 그분의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그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예수께서 잡히실 때까지도, 아니 그 이후까지도 닥쳐올 일들에 관해 대단히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2. 마가복음 10:35-40, 요한복음 18:10, 그리고 사도행전 1:6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에는 제자들의 무지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답:
오늘날의 제자들인 우리는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이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와 비교해 볼 때 얼마나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지 생각해 보라. 물론 그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이적들을 수없이 목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려 했던 사역과 사명, 그리고 그분의 궁극적인 승리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히브리서 11:1에 묘사되어 있는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교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서는 그분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분께 대한 믿음이다.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믿음이 있는가?

부가적용)
주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6:24-33에서 주님은 우리의 삶에 우리 생업과 사역의 직업 간에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생업이 사역적 직업(제자 사역)에 종속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생업은 사역적 직업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종속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로서의 온전한 직업관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자로서의 직업관은 우리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농업을 해야 할지 어업을 해야 할지, 정신노동을 해야 할지 육체노동을 해야 할지는 먼저 생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하기 전에 전도의 일을 중점적으로 해야 할지 봉사의 일을 해야 할지, 생업 안에서 해야 할지 생업이 끝난 후에 집중적으로 해야 할지가 우선 정해져야 하는 것이고 또는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사역적인 일들을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편하거나 쉬운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를 생업 속에서 제자로서의 사역들을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고 모든 힘과 시간을 빼앗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우리의 참다운 부르심인 제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공허한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은 참으로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경주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우선되는 제자로서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역들을 감당해야 하는 힘든 직업이(임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제자로서의 직업을 이루는 것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기에 참으로 의미 있는 삶이고 풍성한 기쁨과 평안이 함께 하는 복된 삶이 될 것이다.

금요일(1월 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14장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132-143), 제25장 ‘해변에서의 부르심’(244-252),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63-264, 10권, 266-268, 500-503.

“그들이 예전에 잡아 보지 못한 엄청난 양의 고기를 소유하게 된 네 명의 동업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들은 가장 큰 물질적 성공을 거둔 그 순간 자신들의 사업을 버렸다. … 그들이 기적의 더 고귀한 의미를 보았다 해도, 지금까지는 미미한 성과만을 올린 떠돌이 선생의 제자로서 불확실한 생계를 위해 자신들이 선택한 직업을 버리는 데는 참으로 큰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
제자들에게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예수님과 함께 더욱 고귀한 동업을 하기 위해 어부로서의 성공적인 동업을 해체하려는 것은 즉각적이고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도, 가족들의 필요를 제공해 줄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 그들은 평범한 어부로서 깊은 곳으로 나아갔지만, 해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제 그들을 불러 사람을 낚도록 하기 위하여 지시한 ‘깊은 곳’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갔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267-26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분께 더 큰 영광을 돌리기 위해 나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2. 우리는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에 비해 어떤 면에서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까?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목록을 작성해 보십시오. 이러한 유리한 점들은 우리가 은혜 안에서 제자로 자라가도록 어떤 도움을 줍니까?

3.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신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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