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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제자가 되기 위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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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08-02-27 21:02 조회6,4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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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제자가 되기 위한 준비
2월 16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11분)

도입)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같은 형식으로 “누구든지 … 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의 길을 제시하셨다. 먼저 “나에게 오면서 심지어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평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던 분이 유독 제자가 되려면 이웃과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하라고 하시니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여기서 "미워하다"는 개념은 흔히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뜻이 아니라 셈족어의 표현으로서 어떤 것을 덜 사랑하는 것, 이차적인 자리에 둔다는 것, 소홀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과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모든 것에 우선하여 더 사랑하는 말씀일 것이다. 신앙은 삶의 부차적 실제가 아니라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것이어야 하는 이유는 어정쩡한 신앙은 결실을 맺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결실을 맺으려면 삶의 모든 것은 예수님께 맞추라는 초대이다. 예수님은 220볼트의 전원인데 자기 인생은 구식인 110볼트로 놓아두고 자꾸 갔다가 꼽아놓는 일은 소용이 없다. 전기불도 안 들어오고 선풍기도 안 돌아간다. 잘못하면 기계만 태워먹는다. 둘째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고 이르신다. 우리가 잘 알 듯 십자가는 본래 범죄인들의 처형도구로 수치스러운 형구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거기에서 처형되심으로써 구원의 도구로 바뀌었다. 주님 앞에 제자가 되려고 놓아버린 우리 앞에 그러나 아직도 걸림돌처럼 가로막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환경, 지난날 상처와 바꿀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가족적 한계와 아쉬움 바로 그것이 우리 십자가일 것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부끄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처형 도구이다. 그러나 회피할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받아들여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질 때, 우리에 앞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당신의 뒤를 따를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때,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주신 주님께서 내 십자가를 통해 바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셋째로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무엇이든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악습의 굴레에 사로잡힐 것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이라도 버려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맛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찬 그릇을 비로소 비울 때 그 빈 곳에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이 채워질 것이다. 그 기쁨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바친 예수께서 맛보신 기쁨이며, 그분께서 주시는 기쁨이다.

기억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연구범위: 마 5-7장, 10:1, 5-42, 막 3:1-19, 눅 6:12-16.

학습 포인트: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어떻게 준비시키셨는가? 그분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제자도에 관한 어떤 원칙을 배울 수 있는가? 제자도에 관한 중요한 말씀인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떤 반대에 부딪힐 것을 예상할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으로부터 배우는 자로서, 끊임없이 스승과 같이 되고자 애쓰는 자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보내신 것처럼 모든 교회는 제자의 길을 독려하고 계발할 수 있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침례 준 사람들이 곧 떠나가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 못한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르치다’로 번역된 이 단어는 ‘제자를 만들다’의 뜻이 있는 헬라어에서 왔다(실제로 많은 번역본들이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이번 주에 제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2월 10일)
사도들을 지명하심

도입)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선발하는 장소로 산을 택하셨다. 산은 예로부터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장소로서 여기서 소명과 결단이 이루어졌다.(출 3:1; 4:27; 18:5; 24:13; 왕상 19:8)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기도하는 장소이며, 하나님의 권위와 계시가 드러나는 장소였다.(마 17:1; 막9:2; 눅 9:28) 예수께서는 여기서 밤을 새워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이 대목 외에 어느 곳에서도 예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적은 없으시다. 12제자를 선발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특별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12제자들은 이렇게 산에서 사도로 뽑혔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굶주리고, 병고에 허덕이며,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고쳐 주셨다. 누가는 그의 책 눅 9장에서 산(山)과 평지(平地)를 구분하고 있다. 산은 기도와 소명의 장소요, 평지는 선포와 활동의 장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누가복음이 산과 평지, 즉 소명과 활동을 함께 묶어둔 이유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에서 기도하셨고, 평지에서 치유의 활동을 계속하셨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 중에 12제자가 뽑혀 사도가 되었다면 12사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스승이신 예수의 모범을 따를 일이다. 바로 예수님처럼 산에서 기도하고 평지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산과 평지를 분명히 구분되나 서로 뗄 수는 없듯이, 제자와 사도 또한 분명히 구분되나 뗄 수 없는 것이다. 통상 ‘제자(弟子)’란 역사적 예수의 공생활 중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을 일컫는 말이요, ‘사도(使徒)’란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복음 선포의 지상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산에서는 제자이나 평지에서는 사도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신자란 예수님 앞에서는 제자로 불림을 받았고, 세상 앞에서는 사도로 파견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는 충실한 제자로, 세상을 향해서는 용감한 사도로 말이다. 예수 없는 제자 없고, 세상없는 사도는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3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한 편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유명한 안식일의 치유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이야기(막 3:1-12)에서 우리는 굉장한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되는데, 지도자들은 그분을 죽일 기회를 찾는 한편 큰 무리는 그분을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 편에서는 그분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그 능력의 은총을 받는 것을 시기하고 있었다.

1. 마가복음 3:13-19(참조 눅 6:12-16)에는 어떤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답:
이 두 기사를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어느 시점에 당신을 따르는 큰 무리로부터 떠나시어 선택된 제자들의 무리와 함께 다니셨다. 예수께서는 이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아 사도의 일을 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임무를 위하여 원하시는 자들을 택하셨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 대로 이것은 그분께 주도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분께서는 그 부르심을 우리에게까지 확대하셨다. 이 말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영역에서 얼마나 능력을 가졌든지 간에 그 봉사를 위해 전심전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와 사도는 어떻게 다른가? 제자는 배우는 자이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공부하기 위하여 스승을 따른다. ‘사도’라는 용어는 헬라어의 두 단어 즉 아포(apo)와 스텔로(stello)에서 왔는데, 이는 ‘누군가로부터 보냄을 받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사도(使徒)란 주인이나 나라를 대표하기 위해 파견된 대사(大使) 또는 밀사(密使)이다. 제자나 사도는 둘 다 배우는 자이지만, 사도는 주인이나 조직체의 대표로서 보냄을 받기 때문에 별도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열두 명을 지명하여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복음전파를 위해 보내실 것이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고 마태는 기록하였다. 그분께 택함을 받은 자들을 그분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르는 큰 무리를 돌보기 위해 훈련을 받아야 했다.

교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신 것은 사도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오늘날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떤 임무와 권능을 받았는가?

부가적용)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하여 세 가지로 요약해보자.
1. 제자가 되는 길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막 1:16절에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주님이 그들을 만나주시는 장면이다. 이 만남이 없었다면 어찌 제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 만남이 없었다면 오늘도 내일도 고기를 잡다가 평생 갈릴리 호수에서 살아다가 끝날 어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 제자의 길 첫 단계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세일즈는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만나라’라는 책에서 부자가 되는 방법의 첫걸음은 바로 부자를 많이 만나는 것이며 부자와 인맥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만남도 이렇게 귀한 것이다. 어떤 부모, 어떤 친구, 어떤 스승, 어떤 책, 어떤 직업, 어떤 지도자, 어떤 종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2. 제자가 되는 길은 버릴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막 1:18절에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했다. 이처럼 제자의 길 두 번째 단계는 버림이다. 그물을 붙잡고 있으면서 제자가 될 수는 없다. 변화는 버림을 통해 성숙하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함으로 헌 부대는 버려야 한다. 옷 역시 헌 옷을 벗어야 새 옷을 입을 수 있다. 매미도 허물을 벗어야 날 수 있고, 뱀도 바닷게도 허물을 벗어야 자란다. 사람도 자기 고정관념을 자꾸 자꾸 벗어야 큰 사람이 되지 어릴 때 그 생각을 계속 가져서는 어린이일 뿐이다. 버리지 않으면 변화를 위한 두 번째 단계를 넘어갈 수가 없다.

3. 제자가 되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막 1:17-1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름에 따랐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며 말씀을 배우고 주님의 삶을 배우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탈무드에도 나오듯 부모보다 랍비를 더 존중했다. 그러니까 생명까지도 바치며 그 가르침에 따를 수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월요일(2월 11일)
산상수훈 - 1

도입)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타난 아홉 가지의 "복" 은 각기 다른 독립적인 복의 개념이 아니다. 복이란? "심령이 가난한자의 복"이 바로 만복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후의 "복들은" 순서에 의한 룰처럼 그 복들이 한 가지 한 가지씩 나타나는 것이다. 제일먼저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심령이 가난한자 는 어떤 사람일까?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서 "의지 할 곳이 하나도 없이 된 사람"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더 이상 제게는 아무도 의지 할 사람이 없음을 고백하고 시인을 하는 것이다. 이제 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 한분뿐이시며,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가운데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주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하겠다고 시인을 하고 고백하는 일이다. 먼저 심령이 가난한자가 되면 나머지 여덟 가지의 복에 대한 은사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지는 과정이 바로 "산상수훈"의 아홉 가지 복이다. 이 세상에서는 "산상수훈" 의 아홉 가지의 복 중에서 어느 한두 가지의 특별한 복만을 받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교인이든 타 종교계의 신앙인이든 "심령이 가난케 된 자" 는 여러 가지 복을 받는다.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아홉 가지의 복을 모두 다 받을 것이며,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기초석이 되어 질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산상수훈(마 5-7장)을 왕이신 예수님의 취임 설교로 보고, 거기에 그분의 왕국의 윤리가 설명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산상수훈에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기 위한 열쇠가 들어 있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제자도에 관한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1. 마태복음 5:1을 읽으십시오. 이 설교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 설교를 하신 그 당시의 청중은 누구였습니까?
답:
산상수훈을 해설한 책이 과연 몇 권이나 쓰였는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이번 주 교과의 목적에 따라 산상수훈의 주요 내용 가운데서 특히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마태복음 5:13-15을 읽으십시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를 위하여 어떤 기별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 말씀들은 요한계시록 14:6-12에 나오는 세 천사의 기별을 이해하는 우리 재림 신자들에게 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답:

3. 마태복음 6:5-13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제자도에 관해 어떤 중요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까?
답:

교훈: 산상수훈(마 5-7장)에는 제자도의 기본 원칙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지침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자.

부가적용)
우리가 산상수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산상수훈의 직접 배경이 되는 마태복음 4장을 잘 이해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4장 1-1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고 그것을 물리치신 내용이 나온다. 이는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과 '뱀' 사이의 긴장 관계가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2절 이하에는 침례 요한이 분봉왕 헤롯의 정부에 의해 체포 구금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의 길을 평탄케 하는 사자로 보냄을 받은 요한(마3:1-3)이 마귀의 세력인 헤롯 정부에 의해 강제 구금되어 피살 위기에 놓인 것은 전쟁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 사실은 주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에 전투가 구체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적대 세력에 대한 전쟁 선포와도 같다. 그런 정황 가운데서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의 어느 산에서 열두 제자들에게 친히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다. 죄악 가운데 존재하는 세상에 신령한 천국이 침투해 들어온다는 사실은 분명한 전투적 개념을 함유하고 있다. 전투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개념이다. 그런 형편에서 주어진 산상수훈의 성경구절을 주님의 뜻과 관계없이 하나씩 떼어 윤리적 해석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적 경륜을 염두에 두고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산상수훈은 결코 일반 윤리적 강화를 위해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구할 윤리적 실천을 위한 방안으로 주어진 말씀도 아니다. 도리어 산상수훈의 내용은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전투 교범과도 같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세상을 이기는 교회의 기본적 규범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이해하기 위해 주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열둘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의미와 함께 그것 자체로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가진다(계21:12-14. 참조).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고 제자의 숫자가 열한 명으로 줄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맛디아를 뽑아 열두 명이 되도록 수를 채우도록 하신 것이다(행1:21-26). 우리는 여기서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열두 명의 제자들로 정비되고 있는 독특한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구속사의 한 장에서 분명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교회의 기초를 놓으신 것과 같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면 그 위에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신약교회의 기초이다. 즉 신약 시대의 열두 제자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연관되어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고 있다. 열두 제자는 머릿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연결된 열두 기초석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열두 사도가 새 예루살렘성의 기초석이 됨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계21:14). 이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가 교회의 기초석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 기초석이 되는 열두 제자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교회의 기초적 교훈을 베풀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상수훈이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의 기초가 되는 진리의 말씀임을 알고 읽어야 한다. 즉 우리는 산상수훈을 읽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주님의 교회에만 허락된 그 명백한 배타성을 진지하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화요일(2월 12일)
산상수훈 - 2

도입)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마귀의 팔복이라는 글이 있다.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란다. “너무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 사단의 가장 믿을 만한 일꾼이 될 수 있음이요. 설교자의 흠이나 과오를 보고 트집만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 받지 못할 것임이요. 자기 교회이면서도 사정사정 해야만 교회에 나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교회 안에서 말썽꾸러기가 될 것임이요. 남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것임이요. 걸핏하면 삐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교회를 곧 그만둘 것임이요. 하나님의 일에 인색하여 헌금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사단인 나의 일을 가장 잘 돕는 자일 것임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 사단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임이요. 성경을 읽고 기도할 시간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꾐임에 쉽게 넘어가 마침내 조롱거리가 될 것임이라.” 이 이야기가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가? 이 말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를 충동시켜 자기 종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종이니 사단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침례 받은 새 신자들의 교회 잔존율 문제이다. 이 모든 문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고 그분의 새로운 왕국의 시민이 되게 가르치는 제자도와 관련이 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배우고 따라야 할 실제적인 교훈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계속 공부하면서 “이 가르침을 어떻게 내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이 문제를 새 신자들에게 잘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더 나은 제자가 되게 할 수 있을까?”하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1. 마태복음 7:1-5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배워야 할 어떤 중요한 교훈과 경고가 주어져 있습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2. 마태복음 7:15-20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까? 이 구절을 읽으면서 과연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답: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공언하는 것과 실제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제자로 만들거나 혹은 우리 자신이 좋은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예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3. 마태복음 7:24-27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는 무엇입니까? 이 구절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성경의 다른 약속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룹니까?
답:

교훈: 새로운 신자들을 포함한 주님의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함으로 그분의 참 제자가 되고 품성의 바른 열매를 맺어야 한다.

부가적용)
산상수훈은 제자들에게 일반 윤리를 교훈하기 위해 주어진 일시적인 말씀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허락된 영속적인 진리의 말씀이다. 그 가르침은 잘못된 종교 윤리를 배제하고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즉 산상수훈의 내용은 일반적인 종교윤리를 거부하고 진리를 배경으로 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기초를 제시함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그것은 일반윤리에 대한 배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을 제자들에게 언약으로 보여주고 계신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주님께서 즉흥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역 이후 세워질 교회를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주신 구속사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 말씀은 세상을 향해 개방적이라기보다 주님의 택한 백성인 교회를 위한 폐쇄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폐쇄적이란 의미는 세상에 일반적으로 주어진 종교 윤리적인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에 주어진 진리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주님께 속한 모든 교회는 열두 제자들에게 주어진 산상수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교회를 세워 가는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마음깊이 새겨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가 소유한 특별한 복(福)이 세상의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하는 점과 진리의 배타성을 알게 된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 사이의 상호 긴장 관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교회는 산상수훈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과 구약성경의 의미를 선명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배워야 한다. 그것은 죄악 세상에 대항해야 할 교회의 본질적 지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교회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가를 배워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회의 본질적인 관계를 말해 주고 있다. 불신자들이 종교심으로 기도하는 내용과 전혀 다르며 자기의 종교적 욕망을 추구하는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들의 기도와도 기본적으로 다름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마6:33)이며, 교회는 결코 세상에 얽매인 존재가 아님을 명백히 말씀하고 계신다. 산상수훈은 성도들에게 세상의 간악함과 세상은 항상 주의해야 할 대상이라 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견제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거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온전히 참여해야 함을 산상수훈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모든 가르침이 주님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기초적 배경이 됨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이 교훈이 지상의 교회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기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므로 우리는 산상수훈의 구체적인 의미를 성경의 총체적 교훈과 더불어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야만 한다. 교사가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로부터 올바른 가르침을 기대하기 어렵다. 산상수훈이 올바르게 가르쳐짐으로써 교회가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수요일(2월 13일)
선교 여행을 위한 지침

도입)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삶은 핍박을 당해도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고, 그리스도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면서 높은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였다. 또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는 인종, 성별, 계층 그리고 교육의 장벽을 넘어섬으로써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코이노니아로 지칭되는 이 단어는 세속적인 용법에 있어서 식사모임, 장례모임, 상인조직과 같이 공동활동을 일으키기 위한 조직된 비공식적 연합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로마인들의 생활에 잘 알려졌기 때문에 로마법에 저촉되지 않았으므로 허용되었던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므로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 되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기까지 출산의 고통을 치루었다. 그리스도와 만난 그들은 그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하나님께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과 최고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주는 이 기쁨은 교회의 영원한 소유물이며 아무도 그들로 부터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약속을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령께서 주신 기쁨으로 충만하여 고통 속에서도 감옥에서도 순교하면서 기뻐하면서 찬양하였다. 핍박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선포하였다.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이것을 예수께서 가르친 죄에 대한 비타협정신이 초대교회에 깊게 뿌리박혔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독교인으로서의 행위로 인하여 투옥되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위험을 당할 때에도 소리를 지르거나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료들과 함께 기도하고 부활의 주님을 전파하였다. 그들이 메세지를 전파함에 있어서 역사는 능력으로 나타났다. 병 고침과 귀신의 쫓아냄을 포함하여 기적을 행하였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마 4:19)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은 곧바로 성취되지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그분의 활동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봉사 동안에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마 9:35).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36절)을 보시고 저들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37절) 주인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하라고 요청하셨다.

1. 열두 제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마 10:1, 5-42). 오늘날 우리가 제자를 만들기 위해 애쓸 때에 적용할 만한 어떤 원리를 이 구절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이 구절들에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배울 수 있는 많은 교훈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반대와 소동, 심지어는 박해가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닥칠 때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일이 없는 때를 염려해야 한다.

2. 마태복음 10장의 내용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종류의 반대와 소동과 시련을 당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미 2천여 년 전에 말씀하신 그 일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겪었던 적이 있습니까?
답:

교훈: 예수께서 당신의 열두 제자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위하여 전도의 중요한 원리들을 제시해 주셨다. 우리는 반대와 박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사단은 복음전하는 교회, 성도, 교역자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전도는 영적인 전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포로된 자를 풀어 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라도 사단은 복음 전파를 막으려고 하고 방해를 시도한다(고후4:4, 살후2:10-11). 복음을 많이 전하다보면, 소동이 일어난다(행13, 19장). 왜냐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가 있기 때문에 마귀도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래서 소동이 있고 정확한 복음이 증거 되는 데는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된다. 전도가 되고, 제대로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반대와 핍박과 소동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대와 박해를 두려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목요일(2월 14일)
70인의 전도

도입)
누가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를 뽑아 그들을 현장으로 파송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70명을 가리켜 70인 요원이라 한다. 유대인들에게 70이란 세계열국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70인의 전도자를 세웠다는 것은 전 세계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70인 요원이란 지역, 민족, 세계복음화를 이루어 나갈 요원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음을 알고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를 말한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기에 기도해야 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먼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도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의사소통)이 아니다. 전도는 컨프런테이션(confrontation, 대결)이다. 사단의 편에 설 것인가?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인가?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는 영적 전쟁이다. 또한 전도는 죄로 인해 죽어가던 영혼을 하나님께로 되찾아오는 일인데 사단이 가만히 있겠는가? 무엇으로 대적하여 이길 것인가? 성경은 엡 6장 11절에서 말씀한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무엇인가?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그런데 이 다섯 가지는 어찌 보면 방어용 무기이다. 마지막으로 보다 적극적인 공격용 무기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다. 성령이 어떤 분이신가? 복음을 들고 나가는 증인된 우리들에게 권세를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은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령님 없이 무엇을 하겠는가?

예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지명하여 선교여행을 보내신 사실은 누가복음에만 언급되어 있다(눅 10:1-23, 참조 출 24:1, 9). 그분께서 이들에게 주신 지침은 여러 면에서 열두 제자들에게 주신 지침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교육하신 후에 둘씩 짝을 지어, 당신께서 가실 각동 각처로 앞서 보내셨다. 이들의 사명은 예수님의 사역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일은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사람들이 그분을 영접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사람들을 준비시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일과 얼마나 흡사한가?

1. 그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데는 어떤 유리한 점이 있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이 원리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답:
누가복음 10:17에는 70인이 기쁨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는데, 이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그들에게 항복”했기 때문이었다(눅 10:17).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그 능력으로 인해 전율을 느꼈으며, 그 능력이 그분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받은 바 능력을 인정하시면서도, 그들이 진정으로 기뻐해야할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하셨다.

2. 누가복음 10:20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 줍니까?
답: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어떤 위대한 행위도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마 7:22-23). 종교적인 지위나 교회의 권위, 심지어 영혼구원을 통해 얻은 큰 성공도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실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고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계 3:5). 왜냐하면 하늘에 기록된 이름은 곧 예수님을 통한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훈: 70인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나갔으며 그 결과로 그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원리를 우리도 적용해야 한다.

부가적용)
주님께서 보내신 70인의 전도요원들이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각종 능력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자 많은 영혼들이 돌아오는 증거가 있었다.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이들이 전도현장에서 돌아와 예수님께 현장의 역사를 보고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7~18) 사단은 배후에서 세상의 모든 문화를 조종하고 있다. 과거 왕조시대에 수렴청정을 하는 것과 같이 뒤에 숨어 조종하면서 창 3장의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마침내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됐다는 것을 말한다.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에는 사단의 세력이 드러나게 된다. 복음의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숨을 곳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선포될 때 귀신들이 쫓겨나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기쁨을 아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19~20) 우리가 더욱 중요하게 보고 놓치지 말아야 할 근원적인 기쁨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귀신이 쫓겨나는 것은 복음을 전하면 따라오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이다. 우리가 가장 기뻐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며,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창 3장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서 근원적인 기쁨을 상실한 채 죄와 저주 가운데 사단 종노릇하다가 영원한 멸망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가장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기쁨이다. 죽은 영혼, 불신하는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 예수님께서는 가장 크게 기뻐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주 큰 기쁨을 느끼게 될 때는 시시하고 사소한 걱정 따위는 사라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큰 기쁨인 구원의 기쁨을 삶 속에서 누린다면 어떤 것도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이다.

금요일(2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25-229, 10권, 276-282, 시대의 소망, 312-314, 제37장 ‘최초의 복음 전도자들’(349-358), 교육, 79-80, 마가복음 6:6-13.

“마태복음 5:1-2의 짧은 구절 속에 우리는 산상수훈의 중요한 세 가지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1) 예수께서는 ‘앉으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유대 랍비가 공식적인 가르침을 베풀 때에는 앉아서 가르쳤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앉아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는 것은 이 가르침이 중요하고 공식적인 가르침임을 암시해 준다. (2) 마태는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구절은 이중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a) 헬라어에서 이 구절은 엄숙하고 근엄한 어조로 기록되어 있다. b) 이것은 또한 가슴을 열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온전히 쏟아 내는 말임을 가리킨다. 이것은 대체로 서로 간에 격이 없는 친밀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3) 이제 우리가 연구하는 이 구절의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부정(不定) 과거가 아니라 미완료 시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분이 그들에게 가르치시곤 하던 것’이라 번역해야 한다. 산상 수훈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상황에서 하신 예수님의 한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마태는 헬라어 어법상으로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계속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던 것의 핵심이라는 것이다”(윌리엄 바클레이, 마태복음, 웨스트민스터 출판사, 1975년, 86-8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어떤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까? 그 프로그램의 강점과 약점은 각각 무엇입니까? 교회가 제자훈련을 더 잘 시키려면 어떤 실제적인 단계를 밟아야 할까요?

2. 안식일학교 자체를 하나의 제자훈련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들은 무엇입니까? 함께 논의해 봅시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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