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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인종과 제자도(영문교사지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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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선인 작성일08-02-27 21:01 조회5,0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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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교과 08년 제1기 제6과 (영문교사지도서)

1단계 - 동기유발!

핵심개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 가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영혼을 주님께 이끄는데 어떤 사람도 배제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여신 "칼리"를 섬기는 힌두교 승려가 누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승려들은 아무도 그를 만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도 캘커타의 가장 가난한 동네에 있는 여신을 위한 사원에서 봉사하였었습니다. 그 동네는 구걸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사람들이 있는 빈민가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옷이 없어 길거리에서 구걸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들조차도 그들에게 등을 돌릴 정도로 혐오스런 질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죽어가는 승려도 이 사람들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수녀가 그 죽어가는 승려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만질 수조차도 없는 나병환자들, 너무 아파 구걸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옷이 없어 구걸도 못하는 사람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가장 가나한 마을인 그곳에서 그녀는 살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버려진 힌두교 사원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수용소로 개조하였습니다. 근처의 칼리 사원의 승려들은 이 알바니인 승려와 그 자매들이 이 일을 시작했을 때 탐탁치않게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이 수녀는 그녀를 반대했던 칼리 사원의 승려 중 한사람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만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려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녀는 팔로 그를 안고 그녀의 집으로 왔습니다. 이 일 후에 그곳의 사람들은 "마더 테레사"로 세상에 알려진 이 수녀가 그곳에 머물러 주기를 간청하게 되었습니다. 여신 칼리 사원의 한 승려는 그녀에게 말하기를 "삼십년 동안 나는 돌로 된 여신 칼리에게 예배드렸는데, 오늘 여신 어머니(마더)가 살아서 내 앞에 서 계십니다."

생각하기: 여러분의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의 무리는 누구입니까? 교회의 일원인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힌두교 승려가 "삼십년 동안 나는 돌로 된 여신 칼리에게 예배드렸는데, 오늘 여신이 살아서 내 앞에 서 계십니다"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하실 수 있습니까?

2단계 - 탐구!

I. 사마리아인 나병환자

(눅 17:11-16절을 반생들과 읽으십시오.)
한 무리의 나병환자들이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들판에 허름한 오두막에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이들 중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 이고 나머지는 유대인 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병환자가 되면 갑자기 아무도 당신이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신경쓰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그들과 똑같이 부정하게 됩니다. 그들의 공통된 불행이 인종적 장벽을 허물게 되며, 그들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치료를 위한 필요가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습니다. 법에 의하면 그들은 건강한 사람으로부터 최소한 45미터는 떨어져있어야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지나가실 때 그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면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요?
율법은 그들이 건강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힘을 합하여 지르는 소리는 먼 거리를 가로질러 예수님에게 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에 이를 마지막 여행길에 계셨습니다. 이제 하시려고 하는 일의 중대성이 예수님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가는 한 걸음은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는 한 걸음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받는 그들을 위해 발검음을 멈추었습니다.
당신이 사마리아인 나병환자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제사장들에게 가서 당신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제사장을 의미하는지 조금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유대인 제사장들 이었습니다.) 당신의 나라와 유대나라 사이는 아주 좋지 않은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이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 유대인 성전으로 걸어가는 데는 다른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병환자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믿을 뿐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은 멸시받아 마땅하다고 믿는 제사장들에게는 질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를 고쳐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예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세상에 말하고 계셨습니다. 사마리아인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은 후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단지 그를 고쳐주신 것에 대해만 감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은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는 영생의 선물을 예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하기: 나병환자들이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 어딘가에 살았던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죄가 어떻게 우리를 나병환자로 만들며, 왜 예수님만이 유일한 치료자가 되십니까? 나병환자들은 예수님 앞에만 머물러서는 치료될 수 없었고 믿음으로 그로부터 멀리 떠날 때 치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나병환자를 고쳐 주심으로 무슨 장벽을 허무셨으며, 우리는 그의 방법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II. 가나안 여인

(마 15:21-28절을 반생들과 읽으십시오.)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예수님께서 하늘의 선물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너무 값없이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께서 이 가나안 여인보다 더 나쁜 여인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전에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친절도 그들에겐 충분히 불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지는 않았으며, 또한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은 복음을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교도요 이방인일 뿐 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여자였습니다. 그녀의 종족들은 참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녀가 예수님께 무언가를 요청할 무슨 권리가 있단 말인가? 한 랍비는 지옥이 이방인들의 유일한 운명이라고 썼습니다. “조세퍼스”는 페니키아인들에 대해 쓰면서, 모든 이방인들 중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가장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고 썼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에 여호수아의 때에 가나안 사람들의 조상의 땅을 빼앗었습니다. 그들 사이는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그녀는 길거리를 다니며 빵부스러기를 훔치는 잡종 들개만도 못하게 여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마음속에 그녀에 대해 생각했던 바로 그 단어를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을 듣고 제자들은 희열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개’라는 단어는 제자들의 것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주인의 발 앞에 앉는 길들여진 개를 지칭하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편견에 눈이 멀어서 예수님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깊은 동정심을 분간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녀 자신의 신들은 그녀를 실망시켰습니다. 그녀는 귀신들도 복종하게 하신다는 위대한 치유자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개라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개였습니다. 그녀는 식탁위의 빵덩어리나 빵조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분의 발밑에 떨어져있는 빵부스러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녀를 다루듯 그녀에게 대함으로써,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셨을 때 그들의 편견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그들이 느끼도록 하셨습니다. 이 여인을 보살펴줌으로써 예수님은 값진 교훈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 뿐 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보살펴야 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원자가 아니라 모든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기: 예수님은 제자들의 편견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슨 방법을 쓰셨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요청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신 것은 계급제도나 인종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대한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단계 3 - 실천!

증언.
내 눈을 파랗게 해주세요.
당신은 파란 눈을 원하지 않았었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한 때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길 원했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파란 눈을 달라고 기도했던 아일랜드 소녀인 에이미는 그녀의 기도를 응답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녀는 자라서 선교사가 되어 인도로 갔습니다. 그녀는 젊은 소녀들이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사원으로 팔려가서 승려들을 위한 창녀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가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지 알았습니다. 그녀는 머리카락과 피부를 커피로 염색하였습니다. 그곳 사람들처럼 그녀는 사리를 입고 이 버려진 소녀들을 위한 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인도 친구들이 말하길 “갈색눈을 지닌 아일랜드인” “갈색눈을 가진 것은 잘된 일이다. 만일 당신 눈이 파란색이었으면 이 소녀들을 구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지 않아.” 에이미는 이제 왜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파란눈 대신 갈색눈을 주셨는지 압니다. 이번 주 기억절에서 바울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에이미 카미카엘도 그저 살러 인도에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갈색눈 대신 파란눈을 주셨다면 온전히 이것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에이미도 이제 느낍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은 우리의 몸과 피부, 머리카락 그리고 눈을 취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버림받은 자들처럼 되셨습니다.

생각하기: 당신의 생애에서 당신 자신이나 상황이 다르게 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시거나 다른 사람의 생애를 긍정적으로 바꾸시기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바꿀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 에이미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우리자신을 변화시켜야 할 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말한 것처럼 몇몇을 구원하기위해 우리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사람 모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에이미처럼 우리의 피부를 염색하라고 부르시지는 않으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애에서 이 진리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단계 4 - 적용!

당신의 교회 내에 존재하는 장벽들을 허물기 위한 단계를 밟기 위해 다음 질문들을 반생들과 생각해 보십시오:

1. 새로 개종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교회의 사교구조에 편안해 하십니까?
2. 새로 온 사람들이 6개월 이내에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까?
3. 새로 온 사람들에게 교회 예식이나 예배에서 옆에 함께 앉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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