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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제자도의 그때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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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奉ju 작성일08-02-27 20:17 조회6,2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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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제자도의 그때와 지금

<모두 이야기>
◉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모든 문화는 바뀐다.
제자도(弟子道)의 문화(文化)에도 맥(脈)은 같지만 형태의 차이(差異)가 있기 마련이다.
제자의 길에는 "예수님"의 지상(地上) 봉사이전에도 제자들의 길(道)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제자들을 모아 세상의 헬라인들이나 유대인들의 전통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가르치시며 제자로 양육(養育)하여 세우셨다.

◉ (유대인과 헬라인)에 대해서
별嚥【?유대인과 헬라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롬 1:16 / 롬 2:9-10 / 롬 3:9 / 롬 10:11,12 / 고전 1:22 / 고전 12:13 / 갈 3:28 )
바울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모든 교육이나 문화나 제자도(弟子道) 까지도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이 최고이며 이를 능가(凌駕)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으로
(롬 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종교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이방인)에게로다” 라고 말하면서
거듭 "예수님"의 제자도(弟子道)에 관해서 결론(結論)으로 제시(提示)하기를
(갈 3:28 ) “너희는 유대인(종교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그리스도인) 하나이니라.”라고 일축(一蹴)하여 말하고 있다.

일요일(1월 6일)
헬라인들 중에서의 제자도(弟子道)

◉ 헬라인들의 실상(實相)
성경에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니엘서 2:29-45참조) 바벨론 → 메데, 페르시아 → 헬라 → 로마 → 열국시대로 역사의 흐름에 이어져오고 또한 계속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고대(古代)헬라인들의 교육(敎育)목적과 방법은 주로 ‘호머“의 시(詩)속에 묘사된 인간형(人間型)을 주조(鑄造)하는 것으로 이상(理想)을 삼았다.
그 이상(理想)이란 육체적(肉體的)으로 엄격히 훈련돼 있었서 전쟁(戰爭)에 나가면 용맹(勇猛)하고 무기(武器)를 다루는 솜씨에 우수(優秀)하며 반면(反面)에 평화 시(平和時)에는 시(詩)와 음악(音樂)을 이해(理解)하며 철학(哲學)을 토론(討論)하는 원만(圓滿)한 지성인(知性人)을 이상적(理想的)인 헬라인이라 평(評)하는 교육을 추구(追求)하였다. 이러한 고도(高度)의 교육이념은 일찍부터 결실(結實)하여 대시인(大詩人) 에스킬러, 아리스토파네, 유리피데, 소포클레, 등을 배출(輩出)하였고, 철학(哲學)으로는 쏘클레테스, 풀 라톤, 아리스토틀 등의 거봉(巨峰)을 빚어냈다. 이러한 사상(思想)을 바탕으로 스승과 제자들 간에 형성된 제자도(弟子道) 생각해보자.

◉ 헬라문화에서 제자도는 학생이 교사를 선택한다든지 하는 형태에서 학생들 편에서 관계를 시작하였다.
(요 12:20-21) 본문의 내용은 헬라철학에서 얻지 못 했던 영혼의 평안(平安)을 "예수님"으로부터 찾기 위하여 "예수님"을 만나려 찾아온 것인데 갈급한 심령(心靈)에 "예수님"의 여러 가지 이적(異蹟)에 관하여 소문을 들어왔으며 특히 이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외모(外貌)로 취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만나리라고 약속(約束)하셨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월요일(1월 7일)
유대인들 중에서의 제자도(弟子道)

◉ 유대인들의 실상(實相)
유대인들의 기원을 살펴보면. BC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티나로 이주한 헤브라이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그 자손들을 말하는데. 보통 헤브라이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BC 10세기경 이스라엘왕국이 북쪽 이스라엘왕국과 남쪽 유다왕국으로 갈리고, 바빌론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불렀다.
디아스포라(離散)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종다양(多種多樣)하다. 다시 말해, 형질상 다수(多數)의 유대인은 백인이지만 일부는 유색인(有色人:인도의 Black Jews)이며, 흔히 유대코라고 불리는 갈고리 모양의 코도 지배적인 특징은 아니다.
종교적으로 유대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이디시어(語)·헤브라이어 사용자, 유대적 문화(유대曆, 시나고그, 특유의 풍속·요리 등)의 보존자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또한 디아스포라 뒤에 가속화한 유랑 때문에 유대인은 민족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

◎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유대인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은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사 중심의 삶을 포기하고 토라에 중점을 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토라는 주후 220년 랍비 예후다 하나시가 집대성하였으며 이것을 미쉬나라고 부릅니다.
미쉬나는 씨앗(농사에 관하여), 절기(명절), 여성(결혼, 이혼 등 가정사에 관하여), 손해(민법, 형법, 재판에 관하여), 성물(聖物, 희생제사와 성전 제사에 관하여), 정결(제의적인 정결과 부정에 관하여)의 여섯 개의 큰 주제로 나뉘고 큰 주제는 약 10여개의 소주제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미쉬나는 유대인 삶의 모든 영역을 규범화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대교 현자들은 미쉬나를 해석하고 설명해 나갔습니다.
이 미쉬나에도 추가적인 설명이 덧붙여졌고, 미쉬나를 본문으로 하고 이를 해석하는 주석 그마라가 덧붙여진 것이 탈무드의 형태입니다.
주후 5세기에 갈릴리에서 편찬된 탈무드는 후에 편찬된 바벨론 탈무드와 비교하여 팔레스타인 탈무드 또는 예루살렘 탈무드라고 불립니다.
그 후 한 세기가 지나서 바벨론의 유대교 현자들은 더 광범위한 바벨론 탈무드를 완성시켰고, 바벨론은 남유다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정착하면서부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었고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율법연구는 팔레스타인이 아닌 바벨론의 수라(Sura)와 품베디타(Pumbadita)에서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토라는 이렇게 유대인의 삶에 있어서 탄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관습의 모체이자 생각과 가치관을 결정지으며, 종교적인 부분에서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토라는 유대교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교의 이해는 정확한 토라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고 유대인에게는 토라이다.
그들의 가장 신성한 율법 서에 대한 충성심이 생존의 도구였고, 죄악이 만연하는 바다를 표류하는 동안 성결을 지키게 한 결정체일 것입니다.
또한 3천 년 이상을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구별되게 한 교육의 기법,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자자손손 끊어지지 않는 연결 고리로 유대주의의 메시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유대인의 생활방식
유대인이 자신들의 생생한 역사를 진솔하게 기록해 놓은 이 책을 접하고 나서 많은 감동과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이 오늘날 전 세계를 선도해 나가는 저력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타고나면서부터 머리가 좋은 민족이라는 고정관념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들의 선민사상과 메시아사상이 그들의 고난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퍼져 살면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견디며 살아남았다.
위대한 승리를 이룩한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의 승리이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은 교육을 통해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들의 교재(敎材)는 토라와 탈무드이다. 탈무드에서 "만일에 부모가 자식을 올바로 교육시키지 못했거나 그런 환경을 자식에게 마련해 주지 못했을 때에는 그 자식이 저지른 죄는 그 사회 전체가 져야 하고 그 자식 혼자서만 지게 할 수는 없다." 라고 한 점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지혜는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굳게 믿으며 교육을 시킨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교육에 공을 들인 결과로 현재 어느 민족보다 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은 아버지의 책임이다.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적 자녀 교육이다.
유대인들은 돈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자녀들의 교육이다.
아이는 세 살 때부터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친다. 토라는 모세의 말로 된 다섯 권의 책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들로 엮어져 있다. 탈무드는 1000여년에 걸쳐서 수만 명의 랍비들이 토론한 과정과 결론을 잇대어서 엮은 계율서요, 성전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돈이 없으면 옷을 팔아서라도 책을 사는 민족이다.
아버지는 어린 자녀를 자기 무릎 위에 앉혀놓고, 대화식으로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친다.
절대로 답을 가르쳐 주지 않고 몇 번이고 자녀가 스스로 대답할 때까지 질문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정을 보면 모든 자녀의 교육은 오로지 어머니의 몫으로만 돌리고 아버지는 수수방관하는 형편이며,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의 교육도 조급한 마음으로 암기 위주, 지식 위주의 IQ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 잘 모르는 형편에 있다.

우리도 이제는 자식들에게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아버지들도 열심히 자녀들의 교육에 동참한다면 유대인들보다 더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앞으로 전 세계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 또한 유대인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식일(安息日)은 유대인을 유대인 스럽게 만드는 날이다. 그리고 유대인이 엄청난 고난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는 큰 무기(武器)였다.
이 안식일(安息日)은 유대인의 "가정의 날"이다. 안식일(安息日)을 통하여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육을 매우 존중했으며 애정과 따뜻함이 넘치는 가정으로 만드는데 노력을 경주한다.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사람들이 사랑을 하거나 서로를 생각해 줌은 가르쳐서 아는 것이 아니라 느껴서 저절로 익히는 그런 것이 되게 한다.
부모의 말 한마디와 행동거지 하나에 있어서까지 모범을 보여준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매를 들거나 크게 꾸중하지 않고 다정하게 감싸 안으며 격려해 주어서 자녀 스스로가 자기의 잘못을 알고 고칠 수 있도록 끈질기게 기다려 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고난을 겪으면서 커다란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끈기, 투혼, 자신감, 높은 교육 수준, 조국애, 도덕심 등이다.
이러한 그들만의 무기로 자유로운 세계에서 자기들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의 언어로 말을 한다.
하나는 토라에 사용된 히브리말이며 다른 하나는 이디쉬 말이다.
이디쉬 말은 유대인들만이 쓰는 말이다. 그리고 식사할 때에도 계율을 지킨다.
이러한 식사계율이 유대인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끈질기게 살아남게 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고난 속에서도 웃음을 배우며 살았다. 유대인의 유머는 유대인이 살아남는 데에 강력한 무기의 구실을 했다.

◉ 유대인이라고 하면 몇 가지 의미(意味) 를 포함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국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유대교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유대인인데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니면 그 사이에서 난 자녀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외국인인데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자녀는 유대인입니다. 이는 유대인의 자녀교육이 모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 후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을 보면 각양각색입니다. 아랍인 유대인도 있고, 아프리카인 유대인도 있고, 중국인 유대인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어머니가 자녀교육을 시킵니다.
물론 아버지도 교육에 개입을 하지만 어머니가 교육의 중심이 됩니다.
모세가 애굽 궁중에 들어가 살았지만 그를 어릴 때 교육시킨 것은 어머니 요베겟입니다.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은 모세는 자기 민족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장성하였을 때 자기 민족을 돌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네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디모데의 신앙교육을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주로 시켰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받은 유대인들이 세계 곳곳의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낸 성과는 대단합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30% 정도를 차지합니다. 특히 과학상 수상자는 60%에 이릅니다. 미국에서 인정받는 3천 개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의 25%가 유대인입니다. 재계에서도 뛰어납니다. 미국에서 큰 빌딩이나 은행, 백화점, 회사 등의 주인의 90%가 유대인입니다.
신앙교육은 자녀를 성공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교육시키는 부모가 되십시다.

※ ☞ 이상(以上)의 장황(張皇)한 유대인의 설명을 한 것은 교과 내용과 직접관련은 없으나 유대인의 대 선배(先輩)가 되는 사도 바울의 신분(身分)과 그가 당시의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지난 그의 과거(過去)의 공부와 모든 배움의 지식(知識)들이 헛수고와 헛된 학문과 열심으로 살았는지를 간증한 성경말씀으로 확인하며 상기하고자 유대인들의 실상을 장황하게 서술하였음을 이해(理解)바랍니다.
(사도행전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城)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행22:3-15참조)

◉ 유대인의 교사의 위치
“가말리엘은 교법사요, 학문 있는 바리새인이요,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사려가 깊은 사람으로 죄수를 위하여 변호하기 전에 잠깐 동안 밖으로 데리고 나가게 하였다. 죄수들이 밖으로 나가자 신중하고 침착하게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듣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들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 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 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였다.
제사장들은 그 말을 옳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으로 때리고는 말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 하고 석방하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느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살아, 257-258)

◉ 제자와 스승의 관계는 필로(Philo)와 요세푸스(Josephus)와 같은 유대인 학자들의 글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끌었던 유명한 두 랍비 힐렐(Hillel)과 샴마이(Shammai)가 경쟁적인 두 학파를 이끌고 있었다. 또한 사도행전에 보면 다소 사람 사울이 1세기의 또 다른 유명한 교사인 랍비 가말리엘(Gamaliel)의 문하에서 배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행 5:34-39, 22:3). (교과 26)

◉ 가말리엘은 백성의 존경(尊敬)을 받는 바리새인 교법사 중 하나로서, 공회 의원들이 사도들을 해(害)하려고 할 때에 그 일을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제안하였다. 사도 바울 역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다.

화요일(1월 8일)
침례자 요한의 제자도

◉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는 요한, 안드레, 시몬,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름으로 시작되었다.
요한은 자기 제자 중 두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 중 하나인 안드레가 그의 형제를 찾아 그를 불러 구주께로 인도하였다.”(소망, 141)
◉ “하나님께서 침례(浸禮)요한에게 광야에서 살도록 지시하신 것은 그를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감화로부터 보호하여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그를 준비시키려 하심이었다. 그러나 엄격하고 고립된 그의 생애는 백성들의 모본은 아니었다. 요한 자신도 청중들에게 이전 의무들을 버리도록 지시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회개한 증거를 보이라고 말했다.”(소망, 150)
◉ “요한은 믿음으로 구속주(救贖主)를 바라봄으로 자기희생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자기 자신에게 이끌려 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을 높고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하나님의 어린양을 주시하기에 이르기까지 힘썼다. 요한 자신은 한 목소리, 곧 광야의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가 침묵과 은퇴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모든 사람의 눈이 생명의 빛 되신 이에게 향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소망, 179)
◉ “침례요한 자신의 극기(克己)의 생애의 원칙은 메시아의 왕국의 원칙이었다.
요한은 이런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원칙과 소망에 얼마나 어긋나는 것인가를 잘 알았다.
요한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신시킨 증거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되지 않은 그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은 구주의 전도가 그들에게서 단지 증오와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선구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남김없이 마셔야 했던 그 잔을 마시고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소망, 217)
◉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을 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로 기대하고 그를 랍비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한 자신은 분명히 제자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예수님을 높이는 말을 하였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 많은 사람들이 침례자 요한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가리키면서 자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수요일(1월 9일)
예수님의 제자도(弟子道)

◉ 이 세상의 모든 방식과 제도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존경쟁(生存競爭)과 약육강식(弱肉强食)과 빈익빈(貧益貧)부익부(富益富)와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의 섭리(攝理)에 살도록 교육(敎育)을 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삼고 또한 모든 제도(制度)가 그렇게 초점(焦點)을 맞추어 놓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추구(追求)한다.
그와 같은 것을 바탕으로 해서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로 편향(偏向)하여 있다. 그러나
◉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전자(前字)에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正反對)의 가르침으로 영원한 행복(幸福)의 비결(秘訣)을 제시하고 상하(上下)관계가 아닌 생명의 혈연(血緣)으로써의 관계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 이는 영혼을 구원(救援)하는 생명(生命)의 교사(敎師)로써 제자들을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셨다.
◉ 예수님 당시의 소위 랍비들도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베풀었으나 예수님은 특히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강력(强力)한 지시(指示)를 주셨다.
이것은 이전의 생애를 온전히 버리고 당신께 전적으로 마음을 바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것이 당시 랍비들이나 헬라의 선생들과 아주 다른 점이었다.

목요일(1월 10일)
오늘날의 제자도(弟子道)

◉ 자아(自我)의 발견(發見)이 중요하다. 나는 과연 누구이며 나의 신분(身分)은 무엇인가? 나의 스승은 누구인가? 나의 스승의 목적과 목표를 어디에 설정되어 있는가?
시골의 장터에 대장간에 가면 갖가지 형태의 농기구들과 연장들이 많이 있는데 그 도구(연장)들은 용도(用度) 는 다르지만 그 원료(재료)는 하나같이 철(鐵)을 불에 달구어서 자르고 두드리고 망치로 쳐서 대장장이의 목적에 맞게 제품을 만들어 놓으면 필요로 하는 소비자(消費者)들이 선택하여 사용하듯이 우리 제자들도 "예수님"의 제자로써 그 주인의 용도에 맞게 사용(使用)됨이 지당(至當)하지 않을까요.
◉ 거룩한 품성의 씨를 심어서 싹이 트고 성숙하여 후(後)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稟性)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갈 5:22-23). "예수님"은 남녀(男女)들을 있는 그대로 취하셔서 그들이 자원하여 순종하기만하면 그들을 만들고자 한 대로 변화시킨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책임 있는 자리를 위하여 온전히 준비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임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잠재력이 "하나님"의 인도아래서 그의 영광과 왕국의 발전을 위하여 고무되고 계발될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본교주석 9권590)
◉ 예수께서는 오늘날의 제자들에게도 초기의 제자들 못지않게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結論>
1.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초기 제자들의 삶에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2. 이 세상의 어떠한 제자도(弟子道)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도(弟子道)는 목숨을 버릴 만큼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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