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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제자도의 그때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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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08-02-27 19:52 조회7,2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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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제자도의 그때와 지금
1월 12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33분)

도입)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부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무슨 특별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무슨 사회적인 훌륭한 지위를 가지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택되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무슨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을 보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중에서 선택하셨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보셨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신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셨다. 과거에 그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가 주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주님께 배우면 무엇을 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다.

기억절: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연구범위: 마 24:14, 28:19-20, 막 16:20, 요 3:21-30, 행 5:34-39.

중심 사상: 헬라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제자도란 어떤 것이었는가? 침례자 요한의 제자도와 나사렛 예수님의 제자도는 어떻게 달랐는가?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도에서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제자도(弟子道)는 예수님의 지상봉사 이전 시대에도 있었다. 예수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시기 수세기 전에도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므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헬라와 유대와 중국과 다른 고대 문명사회에 존재했었다. 이 교사들 중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스승으로, 생도들이 제자로 불려지는 것조차도 싫어할 만큼 너무나 친밀한 결속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이러한 교사들의 제자도와 예수님의 제자도를 비교해 보면서,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분의 제자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찰해 볼 것이다.

일요일(1월 6일)
헬라인들 중에서의 제자도

도입)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요 12:20-21).
여기 이른바 "헬라인"은 순전한 헬라인으로서, 개종하고 그 때의 구약 종교에 들어왔던 자들을 의미한다. 이제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장차 이방인들이 무수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사실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직접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빌립의 소개를 받고자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경외하는 증표였다. 그런데, 그들은 하필 다른 제자들보다도 빌립과 접촉한 이유는 무엇일까? "빌립"이란 이름이 헬라식 이름인 사실을 보아서 그가 누구보다도 헬라어를 잘 한 관계였든지, 혹은 그들이 빌립의 고향 뱃새다(헬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온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요 12:20-21).

이 헬라 사람들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갔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미 이들의 신앙적 자세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본문의 앞 구절들을 살펴보면 이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도록 이끌어 준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다음 구절들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을 통해 이 헬라인들에게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렘 29:13, 요 1:9, 6:44, 행 10:34-35).
답: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예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제자들을 택하여 부르셨다. 그런데 위의 구절들은 약간 다른 인상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도 성령께서는 이 헬라인들의 마음에 호소하고 계셨던 것이다.
헬라 문화에서 제자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어떤 교사들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학생들이 교사를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 편에서 관계를 시작하였다. 한편 대부분의 경우에 교사들은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내게 하였다.
본문에 나오는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께 배우고자 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어떤 사실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엘렌 G. 화잇 여사는 기록하기를, “헬라인들은 그분의 사명에 관하여 진실을 알고자 하였다”(시대의 소망, 622)고 했으며, 예수께서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셨다고 하였다.

교훈: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뵙기 위해 찾아온 것은 이들이 이미 예수님의 여러 가지 이적에 관해 들어왔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부가적용)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하였고 이 사실을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께 여쭈었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신 말씀은 이것이었다. 요 12: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헬라인이 예수를 뵙고자 한 것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올 영광은,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실현된다는 의미로, 그는 여기서 말씀하신 것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오는 원리에 따르지 않고 그가 저희를 부르심으로 되는 원리에 따른다. 곧,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저희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만 된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잘 아는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 집사의 사역과 설교 그리고 순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주로 헬라파 회당에 출입하면서 전도하다가 대적들로부터 성전과 율법과 모세를 거스린다는 거짓 증거로써 고소를 당하기도 하였다. 행 7:53에까지 이어지는 그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개괄함으로써 구약 신앙 위인들의 신앙의 본질을 갈파하고 율법의 진의를 드러냄과 아울러 복음의 보편성을 선포하였다. 헬라파 유대인 중에서 훌륭한 그리스도인들로 주님의 아름다운 제자가 있었으며 우리도 그들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월요일(1월 7일)
유대인들 중에서의 제자도
도입)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제자도(Discipleship Before Jesus) -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제자도와 비슷한 패턴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시간을 공적인 장소에서 대화하는 가운데 질문하면서 보냈다. 그가 가장 아끼던 제자였던 플라톤 역시 자신의 제자를 모아 학파를 세우기도 했다.

제자와 스승의 관계는 필로(Philo)와 요세푸스(Josephus)와 같은 유대인 학자들의 글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끌었던 유명한 두 랍비 힐렐(Hillel)과 샴마이(Shammai)가 경쟁적인 두 학파를 이끌고 있었다. 또한 사도행전에 보면 다소 사람 사울이 1세기의 또 다른 유명한 교사인 랍비 가말리엘(Gamaliel)의 문하에서 배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행 5:34-39, 22:3).

1. 위의 구절들에서 우리는 가말리엘에 관한 어떤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답:
이 교사들은 1세기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들은 세계 여러 곳으로부터 유대교 신학(神學)과 법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제자들을 끌어 모아 그들의 발아래 앉게 하였다. 장차 랍비가 되기를 원하는 젊은 유대인은 열네 살 정도 되었을 때부터 제자로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스승과 개인적으로 교제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제스처를 흉내 내고, 교실에서와 일상생활을 통해서 배움을 계속했다. 교실에서는 스승의 발아래 앉아 배우는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가 전통적인 과정을 이수하였을 때는 서임(敍任)되지 않은 학자로 지명되었다가, 정해진 연령이 되면 랍비의 칭호를 받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는 계속하여 전 세계 유대인들을 위해 매고 푸는 권세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2. 오늘 교과에서 언급된 내용은 우리가 신약에서 발견하는 유대인들의 사제관계에 관한 내용과 일치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마 16:19, 18:18).
답:

교훈: 유대인 교사들이 제자들을 가르친 사례가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성경 기록과 일치한다. 제자들은 오랫동안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부가적용)
유대의 제자도(Jewish Discipleship) - 예전 그리스 철학자들의 가르침 보다 예전 유대인들의 제자도가 예수님의 제자도의 패턴과 조금 더 닮았다고 볼 수 있다. 모세 오경을 가르치던 선생들은 랍비라고 불렸으며(요 1:38) 이 명칭은 제자들이 그의 존경하는 스승을 부를 때 사용되었다. 랍비의 학생들은 탈미드(talmid) 라고 불렸는데 히브리어로 "배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랍비의 가르침을 모은 것은 뒤에 "탈무드"라고 불리우는데 역시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단 탈미드가 랍비가 되면 그는 자신의 제자를 모아 자기가 배웠던 지식을 계승하곤 했다.

화요일(1월 8일)
침례자 요한의 제자도
도입)
요한은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공통된 결함과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거룩한 사랑의 접촉은 그를 변화시켰다. 그는 이기심과 야심에 물들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살았으며 시기의 독기(毒氣)에는 초연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제자들의 불만에 공감을 표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와 메시야와의 관계를 자기가 얼마나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자기가 위하여 길을 예비한 분을 얼마나 반갑게 환영하였는지를 보여 주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약혼한 양가의 사자로서 활동하여 혼인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는 친구라고 하였다. 신랑이 그의 신부를 영접하면 그 친구의 사명은 완성된 셈이었다. 그 친구가 자기가 추진하여 오던 이들의 결합으로 얻는 행복을 기뻐하는 것과 같이 요한도 사람들을 예수에게로 향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구주의 사업이 성공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그의 기쁨이 되었다. 그는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였다. 요한은 믿음으로 구속주를 바라봄으로 자기희생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자기 자신에게 이끌려 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을 높고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하나님의 어린양을 주시하기에 이르기까지 힘썼다. 요한 자신은 한 목소리, 곧 광야의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가 침묵과 은퇴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모든 사람의 눈이 생명의 빛 되신 이에게 향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 요한복음 3:21-30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에 의하면 침례자 요한에게도 제자들이 있었습니까? 그도 역시 제자들을 불러 모은 스승이었습니까? 그는 랍비로서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그를 호칭할 때 사용한 랍비라는 칭호는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답:
어떤 유대인들은 침례자 요한이 메시야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사람을 보내어 요한에게 던졌던 질문 속에 암시되어 있다(요 1:19-28). 그들이 그런 질문을 던진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신구약 중간 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메시야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이 발전해왔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는 레위 지파에서 나오고, ‘왕으로서의 메시야’는 유다 지파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레위 지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람들을 보낸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를 ‘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로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요한이 레위 지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 때문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보낸 사람들은 요한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요한복음에서 침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관하여 한 말이 그처럼 자주 나오는 까닭은, 요한 자신도 예수님을 분명히 메시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려는 복음서 기자의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나면 요한의 제자들도 꽤 많이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요 3:25-26).

교훈: 많은 사람들이 침례자 요한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가리키면서 자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들의 부르심에 신실한 이들은 자신을 위한 명예로 구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 안에 삼키워질 것이다. 경쟁심 때문에 귀중한 복음 사업을 망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역시 그렇다. 즐겨 자아를 비울 때에만 우리는 하늘의 빛을 받을 수가 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로 동의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을 식별할 수도 없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 이렇게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한량없이 주어진다.

수요일(1월 9일)
예수님의 제자도

도입)
음악가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연주를 마쳤을때, 한 젊은 음악도가 그의 손을 잡고 훌륭한 연주를 극찬하면서 "저도 선생님처럼만 연주할 수 있다면 제 자신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이런 대답을 남겼다고 한다. "오늘의 제 연주는 지금까지 제 자신을 바친 결과지요. 그렇지만 친구여, 나는 당신이 음악을 위해 자신을 바칠 때 왜, 무엇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지를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는 헌신과 소명의 목적을 상기시켰던 것이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적을 망각한 채 공부하고 일하며 돈 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음악으로 음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 시간, 재능, 노력, 정성, 물질을 바쳤다. 단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을 주님의 영광과 복음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있는가?

예수님께는 공중 봉사의 초기부터 제자들이 있었다. 그분께서는 헬라인 교사들과 유대인 교사들의 전통을 따라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교사로서 1세기 유대교적 배경 가운데서 등장하셨다. 한편 그분께서는 사명을 위해 예비하시는 과정에서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신 이래 그와의 접촉도 가지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전통을 따라, 각처로부터 와서 당신을 따르며 그 가르침을 배우고 본받기를 원하는 자들을 제자로 삼으셨다(마 5:1-2, 요 1:35-40, 2:1-2).

1. 마태복음 4:18-20을 주의 깊게 읽고, 일요일과 월요일 교과로 돌아가 예수님을 따른 자들과, 헬라 교사들을 따른 자들과, 기존 유대교 랍비들을 따른 자들 사이에 제자가 된 방법들을 각각 비교해 보십시오. 이들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답:
“이때까지는 제자 중의 아무도 예수님의 동역자로서 그분과 온전히 연합한 자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많은 이적들을 목격하였고 그분의 교훈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의 생업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침례자 요한의 투옥은 그들에게는 매우 쓰라린 실망이었다. 만일 요한의 전도의 결과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그들은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연합하여 대적하고 있는 그들의 선생에게 거의 소망을 걸 수가 없었다. 이런 환경 아래서 잠시나마 돌아가서 고기잡이를 하는 것이 그들에겐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이전 생애를 버리고 그들의 관심을 당신의 관심과 결합시키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그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해안에 도착하시자 예수께서 다른 세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시대의 소망, 246-249).

교훈: 예수님도 그 당시의 다른 교사들처럼 제자들을 두셨으나 그분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생명의 교사로서 제자들을 당신의 동역자로 부르셨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제자도가 유대인의 제자도와는 중요하게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큰 자가 되려면 섬기라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부활하신 후에는 제자들을 위해 떡과 물고기로 아침을 준비하여 스스로 섬기는 모습을 보이셨다. 랍비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주로 다른 랍비의 말을 인용하곤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어떤 랍비의 가르침도 인용하지 않으셨다(마 7:29). 랍비가 소수의 제자들만을 가르친데 비해 예수님은 여러 무리들을 가르치셨다(마 5:1-3). 예수님의 제자도 중 파격적인 것은 여자를 기꺼이 가르치셨다는 것이다(눅 10:39-42). 또한 그분은 당신의 제자를 당신의 동역자로 여기셨다는 것이다.

목요일(1월 10일)
오늘날의 제자도

도입)
비록 신약에서는 "베드로의 제자도" 같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 사도들은 제자를 모아 가르쳐 그들이 다음 시대의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말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의 멘토 역할을 감당하여 그들과 함께 여행하고 그들을 가르쳤으며 후에 그들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보냈다. 그 시대의 제자들은 살아있는 모범이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라고 믿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진정한 제자도를 실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1. 위의 본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를 위한 어떤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참조 마 24:14, 28:19-20, 계 14:6-12).
답: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했다는 사실 외에도, 마가는 주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초기 제자들과 함께 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당신의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셨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제자들도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통해 그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가? 우리가 보는 이적과 기사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는 이적과 기사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는가? 우리는 모든 문화와 시대와 사회에서 같은 종류의 이적과 기사를 기대해야 하는가?

2.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당신의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기 위해 이적과 기사 외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십니까?
답:
예수께서는 당신의 초기 제자들 못지않게 오늘날의 제자들에게도 많은 기대를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임무에 대해 동일한 헌신을 요구하신다. 그분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라고 말씀하신다. 더욱이 그분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고 말씀하신다.

교훈: 예수께서는 오늘날의 제자들에게도 초기의 제자들 못지않게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부가적용)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제자도를 실행해야 하는가? 효과적인 제자도는 시간이 걸린다. 바울과 제자들과의 관계는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일정 기간의 코스는 단지 한 부분일 수 있다. 또한 진정한 제자도는 단지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인 가르침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적인 사역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가르친 후에 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가 완성되면 다시 그들을 모아 보고를 듣고 설명해 주셨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소수의 사람일 때 가능하다. 흔히 제자훈련을 하다 실패하는 것은 어떤 방법적인 문제이기보다는 제자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이다. 제자훈련은 단순한 성경공부나 훈련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 제자도는 그 이상의 의미였다. 진정한 제자도는 몇 가지 코스를 연속으로 마치는 것으로 정의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한 공식(formulas)이나 방법(technique) 혹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진정한 제자도는 평생 지속되는 관계인 것이다(True discipleship is a life-long relationship).

금요일(1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보고: 재림교 성경주석, 9권 370-373, 577-580, 10권 531-532, 659,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442

“침례자 요한이 백성에게 미친 영향은 한 때 관원들, 제사장들, 방백들의 감화보다 더 컸다. 만일 그가 자신을 메시야라고 선언하고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다면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그의 깃발 아래로 뭉쳤을 것이다. 사단은 세상의 정복자들의 야심에 호소하는 온갖 수단을 침례 요한에게 강요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능력의 증거를 앞에 가지고도 그 화려한 매수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집중된 사람들의 주의를 다른 분에게로 향하게 하였다.
이제 요한은 인기의 조류가 자기 자신에게서 구주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자기 주위에 둘러선 군중들은 나날이 그 수가 줄어들었다. …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인기가 상승하는 것을 시기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시대의 소망, 17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 속에는 어떤 것이 포함됩니까?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와 같은 헌신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2. 우리의 교육 기관들은 제자를 만드는 일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와 학교들이 이 중요한 도전을 더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3. 이적과 기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믿습니까? 이적과 기사는 무엇을 증명해 주며, 또한 무엇을 증명해 줄 수 없습니까? 우리는 왜 이러한 문제에 접근할 때 깊은 주의와 겸손함으로 나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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