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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제자도를 경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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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08-02-27 21:31 조회5,4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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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제자도를 경험함
2월 23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19분)

도입)
어느 성도가 몹시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복합적인 문제로 신앙이 밑바닥까지 내려가 주저앉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자신이 엄청나게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데 너무 힘들어 끙끙거리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가고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났다. 이 성도는 예수님께 하소연하였다. 주님 제 십자가가 너무 무겁습니다. 십자가 좀 잘라주세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조금 잘라 주었다. 조금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십자가가 여전히 무겁다고 느껴졌다. 그 성도는 예수님에게 두 번 더 십자가를 잘라 달라 고 부탁하여 십자가를 잘라냈다. 십자가가 많이 짧아지고 가벼워 졌다.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그 성도가 가볍게 십자가를 지고 신바람이 나서 가는데... 앞에 요단강이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를 요단강에 걸쳐놓고 다리를 만들어 건너가고 있었다. 그 성도도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자기가 지고 온 십자가를 요단강에 걸쳐 보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나 많이 짤린 십자가는 요단강에 걸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 성도는 요단강을 건너갈 수가 없었다.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울고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 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스승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참된 제자의 요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당신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당신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가르치셨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데는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의 적극적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 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헬, 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 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렘 17:9; 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기억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연구범위: 마 17:1-13, 18:1-4, 24, 막 8:27-30, 요 6:43-58.

학습 포인트: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변화산 사건에서 우리는 믿음에 관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왜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안식일 오후
사복음서를 통하여, 거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거듭거듭 접하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제자도란 하나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경험을 가져야 하고,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아야 하며, 그분에 의해 변화되는 경험을 가져야 하고,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것에 동참하여야 한다.
머리의 지식만으로는 넉넉지 않고, 성경 구절들을 암송하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으며, 교리들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에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켰으며 여전히 나의 삶도 변화시키실 그분과 개인적인 경험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번 주 교과를 통하여 이러한 경험에 수반되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일요일(2월 17일)
생명의 떡

도입)
생명의 떡은 배고픈 자들에게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육신의 배부름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썩어질 만나나 떡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떡이다. 그것은 육신적인 배고픔이 아니라 영적인 배고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떡이다(요5:39-42). 생명의 떡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목마른 자들이 찾는 양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의 것으로 인생의 의미를 만족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만드신 것 같다. 그렇게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시려한다. 하나님은 이 생명의 떡에 세 가지 특징을 주셨다. 첫째는 오직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으로 생명의 떡을 얻게 하셨다(요6:40). 두 번째는 오직 이 생명의 떡은 하나님이 오게 하심으로써만 접근할 수 있게 하셨다(요6:37-39). 세 번째는 이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마지막 날에 심판의 날에 다시 살아나는 주인공이 된다(요6:40).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있다면 생명의 떡 예수를 찾으시기 바란다.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는 권력자나 부자는 예수님을 찾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는 진정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만을 위한 종교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미워하시고 겸손한 자들을 찾는 다는 것은 잘난척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사랑하고 영적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을 말한다. 마리아는 눅 1:51-53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 영적으로 순수한 자 영적으로 배고픈 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1. 요한복음 6:43-58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예수께서는 어떤 중요한 영적 교훈을 주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또한 이 진리는 다른 사람을 제자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에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답:
5천명을 먹이신 이적(요 6:1-14)을 베푸신 직후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세상적인 것들에 매여 있으며 예수님을 그들의 세속적 필요를 채워줄 세상의 왕으로 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그런 일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며, 그것이 그분의 목적이 아니었다.

2.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임을 말해 줍니까?(참조 요 6:26-27).
답: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분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거기서 깊은 감명을 받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양식이 신체에 영향을 주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에 영향을 끼치셔야만 한다. 음식은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는 한, 또는 그것이 우리 신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칠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지 못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론적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먹고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여야 한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생애에 소화되어야 한다”(시대의 소망, 389).

교훈: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분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없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라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것이 저들의 매일의 양식이었기에 한 표현이다. 저들이 보리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오천명을 먹이신 후 예수께서 이 진리를 가르치셨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은 밥이 되신다. 밥에는 세 가지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밥은 필수적인 음식이다. 밥은 절대로 사치품이 아니다. 밥은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밥을 먹지 못하면 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밥 먹는 것이 자랑일 수 없다. 이것을 예수님이 밥이라는 상징에 적용하면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우리의 악세사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믿어야 하고 반드시 받아들여할 우리의 생명의 구주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근본이 되시는 분이시다. 둘 째, 예수님이 밥이란 뜻은 모든 사람의 구미에 맞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짠 음식을 못 먹고, 어떤 사람은 단 음식을 못 먹는다. 또 어떤 사람은 고기를 못 먹고 어떤 사람은 생선을 못 먹는다. 그러나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밥에 숨겨진 예수님의 뜻이 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이 밥은 모든 인생의 생명의 양식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인생의 양식이 되신다. 셋째, 밥은 매일 먹는 음식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의 교제도 하루도 끊이지 않고 매일같이 이루어져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밥은 매일 먹는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이다. 매일 교제함으로 채워야 할 분이 바로 우리의 영혼의 밥 되신 예수님이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는 자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에게 예수는 없어서는 안 될 우리의 생명의 떡이시다. 이 떡은 배고프게도, 목마르게도 만들지 않는 '기적의 음식'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를 선물하는 음식이다. 이 음식을 취하는 방법은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예수께로 오고,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러면 이 생명의 떡은 내 것이 된다. 예수를 만나고 믿는다. 그럴 때에 비로서 이 생명의 떡이 내 것이 된다.

월요일(2월 18일)
어린아이와 제자도

도입)
하나님은 누군가를 거부하거나 소외시키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포용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정확한 하나님의 형상이며 믿음의 본이 되시는데, 모든 사람을 외모가 아닌 중심으로 이해하시고 수용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반면에 예수님은 역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특별히 악의를 가지고 어린아이를 대하거나 인격모독을 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처신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책망하심은 매우 당혹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중심을 보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책망하신 것이다. 어느덧 제자들의 마음이 높아져 있음을 아시고, 너희들이 거부하고 무시한 이 어린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자가 아닌,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다. 스스로 높아져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노의 대상인 반면에, 무시를 받으며 낮은 자리에 있었던 어린아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며, 예수님의 긍휼과 함께 안수와 축복을 받았다. 낮은 자리에 있지 않을 때, 제자들이 우를 범한 것처럼 남을 정죄하기 쉬우며,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타인을 소외시킨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혼란과 혼돈을 야기하며, 종국에 은혜와 긍휼, 축복을 막는 길이다. 하나님은 겸손한자, 자기를 낮추며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부흥을 이루실 것이다.

마태복음 18:1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천국에서 누가 큰지를 여쭙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왜 그런 질문을 했는가? 평행절들을 살펴보면, 제자들 간에 하나님의 왕국에서 누가 큰지를 놓고 다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막 9:33-34, 눅 9:46-48). 이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의 왕국의 핵심 요소인 겸손과 사랑의 원칙에 무감각했을 뿐 아니라 이해력이 아주 부족했음을 드러내 준다.

1.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마 18:1-4). 어린아이들이 제자도의 좋은 본보기가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답: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라. 우리가 회심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그분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잃어버림을 당할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몇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핵심 단어는 ‘겸손’일 것이다. 우리는 제자로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겸손해야 한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모든 필요를 부모에게 의존하듯이, 우리는 우리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필요가 의존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이 땅에 죄가 시작되었다.
어린아이들은 종종 부모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우리가 예수님에 관해 다 알고, 구원에 관하여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믿지 못할 것이고, 구원을 받지도 못할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중에서도 믿음을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완전히 이해한다면 믿음을 가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교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당부하셨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부가적용)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지 않고서 어떻게 왕의 체면에 춤출 수 있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지 않고서 어떻게 산에 배를 지을 수 있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서 어떻게 홍해를 향하여 지팡이를 갖다 댈 수 있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서 어떻게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무너질 거라고 7바퀴 돌 수 있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지 않고야 어떻게 물을 기대하며 반석을 치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서 어떻게 물위를 걷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야 어떻게 독자를 드릴 수 있었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야 어떻게 전쟁의 선봉에 찬양대가 앞장서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야 어떻게 요단강물에서 7번 들어갔다 나오면 문둥병이 낳는다는 꿈이라고 꾸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야 어떻게 죽어가는 자가 장대의 놋뱀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야 어떻게 영생을 믿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야 어떻게 부활을 믿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야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겠는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야 어떻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겠는가? 옳소이다!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11:25-26)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사랑하셨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수에도 치지 않을 정도로 하찮게 여긴 존재를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이제는 개미에게서 지혜를 배우는 것처럼, 어린아이에게 지혜를 배워야 한다.(잠6:6). 이제부터 어린아이를 세밀히 관찰해 보라. 그 안에 해답이 있다.

화요일(2월 19일)
주님의 변형되심과 제자들의 실패

도입)
변화산 사건이 있기 전에 16장에서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이 있었고, 이어서 예수께서 고난당하여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사실 것을 처음으로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이를 말리므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책망을 듣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엿새 후에 변화산 사건이 있었다. 이 변화산 사건은 따라서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고백한 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알게 하신 사건이었다. 특별히 마 17:5절에 보면,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고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종임이 확인되었다. 제자들은 사실상 모순과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그가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 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전능한 분이요, 그가 고난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제자들의 이해인데, 예수님은 갑자기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혀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시니 서로 모순된 논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런 모순과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변화산 사건은 이 모든 의문에 대한 확실한 답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제자들은 이 변화산 사건 자체의 의미조차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일 것이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가장 놀라운 경험 중 하나는 주님의 변형(變形)되심에 관한 기록인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몇몇 제자들의 목전에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셨다.

1. 마태복음 17:1-13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 어떤 세 가지 특별한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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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믿을 만한 아무런 증거도 주시지 않은 채 제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물론 모든 의문이 다 해소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중에서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주신다. 비록 우리는 산 위에 있던 세 제자들이 목도한 바와 같은 경험을 갖지는 못했을지라도,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믿을 수 있는 넉넉한 증거를 받았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선물(요 1:9, 엡 2:8)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장하거나 침체되거나 혹은 쇠퇴하게 될 것이다.

2. 그 제자들은 우리 중의 대부분이 이 세상에서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위대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실패하고 말았습니까?(마 26:56, 69-75, 막 9:30-32, 요 20:19). 그들의 경험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까?
답: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를 주신 후에 제자로 부르신다. 우리는 믿음을 활용함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점점 자라가야 한다.

부가적용)
변화산 변형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에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통상 예수 생애의 5대 사건이라 하면 성육신(Incarnation) ·십자가 수난(Crucifixion)·부활(Resurrection)· 승천(Ascension), 그리고 변화산 변형(Transfiguration)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당시 주님의 십자가 예언 때문에 혼란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한 사건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야직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으로의 변형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는 죄인의 구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받으시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신 사건이다. 우리는 변화산에서 큰 체험을 하게 된 제자들에게 초점을 맞춰 보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뜻하지 아니하게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날의 경험은 이들의 일생에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변형되사’의 원형(메타모르포오)은 외적, 내적 성질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을 입으셨지만 이때 죄 없는 내면의 본질적 영광이 외부로까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태양과도 같은 강렬한 빛이 얼굴에서 빛났다. 그 빛이 몸 전체에서 나와 옷을 투과하여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거룩한 신성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광채는 모세의 얼굴에서 빛났던 광채(출 34-29-35)와 비교해보면 그 정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모세의 경우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까이 봄으로 그 얼굴에 투영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덮었을 때 그 빛은 가리워졌다. 그러나 예수님의 광채는 주님의 몸 자체에서 빛났던 영광의 광채였다. 이 광채는 두터운 옷을 투과할 뿐 아니라 그 빛이 겉옷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새하얗게 보이게 할 정도로 강렬하였다. 마 17:2절에 보면 예수님은 ‘저희 앞에서’ 변형되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보고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하도록, 또한 확신 가운데 제자의 길을 걷도록 도우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세 제자는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들이 목격한 예수님의 모습은 성육신하기 전의 영광스런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사도 요한은 훗날 이렇게 표현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수요일(2월 20일)
감람산 담화

도입)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날마다 영을 좇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믿는 이들을 항구적인 신령함에 머물게 할 것이다. 또한 믿는 이를 육체의 세력에서 지키며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단의 공격을 받지 않게 한다. 우리가 영의 기능을 안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즉시 그것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 시도 풀어 놓아서는 안 될 순간순간의 일이다. 오늘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성령의 가르침만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것이다. 많은 믿는 이가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단지 성령의 가르침만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또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영적 지식으로 만족하지 말고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자주 사람들에게서 「십자가의 길」에 대해 듣는다. 대체 「십자가의 길」이란 무엇인가? 십자가의 길은 다름이 아닌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은 자기의 뜻과 애호와 자기의 사상까지도 죽음에 넘기는 것을 요한다. 영의 직감과 계시를 좇으려면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예수께서는 감람산 담화(감람산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로 불리는 말씀을 주셨다. 제자들이 헤롯 성전의 장엄함을 가리키는 행동에서 우리는 이 말씀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 예수께서 감람산 담화에서 주신 몇 가지 주요한 재림의 징조들은 무엇입니까?
마 24:4-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4:9-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4:11-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4:23-2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4:36-4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여기서 제자도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제자인 우리가 영적 위험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과 악의 대쟁투 가운데 있으며, 심지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려는(마 24:24) 수많은 기만의 표적(標的)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주신 기별의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마지막 때가 될 수록 이 기만들에 대해 더욱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믿는 바와 그 믿음의 근거 위에 확고히 서야 하며, 새롭게 제자가 된 새 신자들에게도 역시 이 기만들을 인식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물론 언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확실히 아는 것이다. 바른 진리 위에 굳게 서는 것만이 오류를 분별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옴에 따라, 모든 신자들 특히 새로운 신자들로 하여금 시대의 징조들과 이 시대에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위험을 깨닫게 하는 일에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훈: 예수께서는 감람산 담화를 통해 모든 제자들이 경계해야 할 마지막 시대의 기만에 대해 말씀하셨다. 진리를 아는 것이 기만에 대응하는 최선의 길이다.

부가적용)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당신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생기는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기근과 지진과 전쟁에 대해서는 각각 한번 씩만 언급하신 반면에, 사단의 대리자들이 펼치는 "미혹과 기만"에 대해서는 6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셨다(마태복음 24:4,5,11,23,24,26). 사단은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빼앗을 때에만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 사단이 만들어낸 대부분의 위장 전술은, 인간이 사단에게 마음을 굴복하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어떤 다른 사람이나 능력의 영향력 아래에 굴복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그들의 정신력과 의지의 힘을 가장 조심스럽게 사용해야만 할 때가 있다면, 그 때는 바로 지금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인 지금이야말로 사단의 기만과 미혹이 가장 극심한 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신적인 사고 능력을 다른 사람이 지배하거나 조종하도록 허용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의지력은 점점 더 약해지고 결정하는 능력을 행사하는 힘도 약화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깊이 연구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단은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 진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결코 미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단이 사람들을 미혹하는 방법은 오류와 거짓 교리를 통해서 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을 분별하는 기준으로써,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이사야 8:20) 성경이 진리의 말씀을 영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진리 자체는 영원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의 덫에 걸려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악령들의 기적을 토대로 진리를 검증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자신이 경험한 기적들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두게 된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진리를 기준으로 자신이 체험한 기적을 검증해야 한다. 즉,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토대로 자신이 경험한 기적이 하늘에서 온 것인지 또는 마귀의 장난인지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

목요일(2월 21일)
십자가를 짐

도입)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따를만한 분이시다. 예수님을 따라본 사람치고 그를 믿지 않는 분이 없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따라가 보고 믿었다.(막2:14) 빌립이 예수님을 따라가 보고 믿었다.(요1:43) 나다나엘도 그렇게 믿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고 보배중의 보배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당하는 시험과 유혹을 다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시험을 이기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인내의 본을 보여주셨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대신 위협하지 아니하셨다. 그 까닭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부탁하셨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과 내가 싸우면 하나님이 싸우실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원수에게 내가 비켜서면 하나님께서 나 대신 싸워주실 것이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가시는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의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바르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란다.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은 세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을 향한 사랑은 자기를 향한 사랑이다.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은 자기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떠한 순결도 지킬 수 없다.

마가복음 8:27-30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물으셨다. 그들의 대답을 들으신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 자신의 견해를 물으셨다. 그들 중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자,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알게 하는 것이 그분의 사역의 핵심적 부분이 아니었던가?

1. 예수께서 왜 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행동하기 전에 반드시 때와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에 관하여 어떤 교훈을 얻게 됩니까?(참조 요 4:25-30).
답:
마가복음의 그 다음 말씀을 주목해 보라.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대답은 근본적으로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확인하신 말씀이었다. 그분께서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씀하셨을 때(막 8:31) 제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갔을지 상상해 보라. 대표적으로 예수님을 붙들고 간(諫)한 사람(32절)은 다름 아닌 몇 절 앞에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했던 베드로였음을 주목해 보라.

2.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신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막 8:33-38).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주셨습니까?
답:
34절에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발견한다. 예수께서는 무리와 제자들을 부르시고 당신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강력한 말씀을 주셨다. 그 당시에 어떤 교훈은 선택된 몇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특권이었지만, 여기에 주어진 이 메시지, 즉 자기를 부인하고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이 기별은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교훈이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부가적용)
서울 어느 개신교회의 표어가 ‘너나 잘해라’였다고 한다. 재미있고 이색적이며 교훈이 크다.
첫째, 하나님 노릇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완전하시고, 전능자이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전지하시고, 사랑이시다. 불완전한 인간이 어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둘째, 심판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운동 경기에서 관객은 구경에 전념하며 응원하고 즐기면 된다. 선수는 수비와 공격에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떤 부당한 경우라도 심판에게 불평하여 심판 노릇하면 옐로카드가 나오고 다음에는 레드카드가 나와 퇴장되고 만다. 비판하는 것은 인생의 심판 노릇을 하는 일이다.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신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실로 공평하게 오차 없이 심판하신다. 셋째, 너나 잘하라는 말이다. 베드로가 순교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요한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여기 두어도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교회에서 자기 일에 불충한 사람들이 남의 일에 간섭하고 평가한다. 자기 일 잘하는 사람은 남의 일에 간섭하고 비판할 시간이 없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주위 환경을 돌아보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따라가야 한다. 값싼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 곧 쉽게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리고 제자가 되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는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린다. 값싼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쉽게 용서하고 쉽게 천당에 보내주는 할인 매장의 주인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네 소유를 포기하라"라는 비싼 대가를 요구하셨다. 신자는 열매가 빈약하고, 제자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신자는 자기 혼자의 영혼을 겨우 건지나, 제자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불리기는 쑥스러우나, 제자는 큰소리로 "그는 그리스도 인이다"라고 불릴 수 있다. 신자는 싼 값을 지불하며 살고, 제자는 비싼 값을 치르며 산다. 신자는 빈 어깨로 천국에 가려하고, 제자는 남의 십자가까지 지고 천국으로 향한다. 신자는 혼자 기뻐하고 혼자 만족한다. 그러나 제자는 눈물과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존경하라' '나를 예배하라'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라는 말 대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나도 희생하고 예수님처럼 나도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예수 사랑이다.

금요일(2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278-282, 587-588, 시대의 소망, 제41장 ‘갈릴리에서의 위기’(383-394), 제45장 ‘십자가의 예표’(410-418), 제46장 ‘예수께서 변화하심’(419-425), 제47장 ‘봉사’(426-431), 제56장 ‘아이들을 축복하심’(511-517).

“우리 주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적 생활에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 세상 생애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은혜를 입고 있다. 우리가 먹는 떡도 그분의 찢어진 육체로 산 것이다. 우리가 마시는 물도 그분의 흘리신 보혈로 산 것이다. 날마다 자기의 음식을 먹는 자는 그가 성자이건 죄인이건 간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양육을 받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 모든 떡덩이마다 갈바리 십자가의 인이 찍혀 있다. 모든 샘물에도 십자가가 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이 당신의 큰 희생의 상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다락방에서 거행된 성만찬에서 비취는 빛이 매일의 생활양식을 거룩하게 한다. 가족 식탁은 주님의 식탁처럼 되며 끼니마다 식사는 성만찬과 같이 된다”(시대의 소망, 66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린아이로부터 배워야 할 또 다른 특성들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한편 우리가 어린아이의 특성 중에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3.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많은 미혹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만은 무엇이며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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