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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인종(人種)과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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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08-02-27 20:39 조회6,0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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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인종(人種)과 제자도
2월 9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4분)

도입)
제자도란 그를 아는 것이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그가 가는 길을 나도 가는 것이다.-토마스 아켐피스-
삶을 ‘내 최선과’과 ‘하나님의 나머지’로 구분한다면 그것은 기도를 내 자원이 떨어질 때에나 사용하는 최후의 방책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마저도 우리의 조급한 성질의 피해자가 된다. ‘제자도’란 우리 힘으로 더 이상 안될 때 하나님을 이용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제자도란 우리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제자로서 우리는 힘과 희망과 용기와 확신의 일부만 아닌 전부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다. 그러므?기도야말로 우리의 첫 번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 조용히 머무를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시간을 하나님을 위한 시간으로 삼고 싶을지라도, 일분이든 한 시간이든 한나절이든 하루든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특별히 시간을 정해 하나님만을 위한 시간으로 떼어놓지 않는 한 결코 뜻대로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많은 훈련과 모험이 필요하다. -헨리 나우웬-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 않다. 용서받았을 뿐이다…..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 자신이나 그분의 초기 제자들이 가르친 내용 어디를 보아도 예수의 희생으로 용서만 누리고 그 이상은 그분과 아무 관계없이 지내기로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암시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언젠가 토저(A.W. Tozer)는 “복음주의 진영 전반에 확연한 이단이 생겨났다. 우리 인간들이 그저 구주가 필요해서 그리스도를 자진하여 영접할 수는 있으나 그분을 주님으로 삼아 순종하는 일은 우리가 원할 때까지 미룰 권리가 있다는 개념이 널리 용인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첫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일은 항상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앞에 두는 것이다. 다윗은 이 비밀을 알고 이렇게 썼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시1:8-9) 우리의 영혼을 관리하는 기본적인 비밀을 딱 하나만 꼽는다면 단연 이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할 때 우리가 할 몫은 끊임없이 생각을 그분께로 돌리고 다시 돌리는 것이다.

기억절: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2).

연구범위: 마 15:21-28, 눅 7:1-11, 요 1:3, 행 10:28, 34-35, 11:25-30.

학습 포인트: 예수께서 유대인 이외의 사람들에게 봉사하신 어떤 사례가 있는가?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며, 그들에게서 제자도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안디옥의 모본적인 제자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짐(Jim)은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느꼈다. 그 나라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곳 사람들이 외지인을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테스트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나라에 오는 외지인은 토하지 않고 한 잔의 약을 마실 수 있어야 했다. 만약 그 사람이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즉시 떠나든지 아니면 그 부족 사람들에게 잡아먹히든지 해야 했다. 짐은 물끄러미 그 부족 사람들이 우유와 사람의 침과 피와 질근질근 씹어 놓은 풀잎과 다른 목초를 혼합하여 약을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약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고 냄새는 더욱 고약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간절히 기도하고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짐이 그것을 토하지 않고 마시자 사람들은 모두 놀랐으며 특히 짐 자신이 크게 놀랐다. 그는 마침내 그곳에 체류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제자가 되기 위해 이상한 혼합물을 마시는 것 같은 생소한 일을 하도록 요구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다(고전 9:22). 이러한 일들은 특히 새로운 문화권에 복음이 침투해 들어갈 때에 제자들에게 도전을 안겨 준다.

일요일(2월 3일)
사마리아인들 중의 제자들

도입)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편견을 초월한 가르침의 많은 본을 보여주셨다. 사마리아사람에 대하여 배척하거나 그들을 따돌려서는 안 된다고, 다 같은 형제로 생각해야 한다고 암시적으로 가르쳐주신 바가 많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실 뿐더러 사마리아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부끄러운 여인을 만나 일대 일로 전도하셨다. 유대사람이 사마리아사람과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때였다. 그 사마리아 여인마저도 예수님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묻지 않습니까?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좋지 않은 관계, 불편한 관계이지만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를 하는 본을 보이셨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 앞에 나온 열 명의 문둥병자를 다 고 쳐주셨다. 그런데 치유 받은 그 사람들은 어디론가 다 가버리고 단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이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리라"하고 크게 칭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야기는 또 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바 선한 사마리아사람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을 뺏기고 맞아 여리고로 향하는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보고 그냥 지나쳐갔다. 그런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이다.(눅10장) 이 이야기는 비유이기 이 전에 사실이다. 그 얼마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일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돌에 맞아 죽으셨을는지도 모른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말씀에 담긴 주제는 따로 있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사마리아사람을 유대사람과 같이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마음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유대사람이 가지고 있는 편협한 생각을, 사마리아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으려 하는 못된 마음을, 그 자기 우월감을 무엇으로 깨뜨릴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핍박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셔서 깨트리셨다. 저들의 교회생활이나 경건으로도 부족하다. 결국 이것은 핍박만이 해결할 수 있었다. 핍박과 환난이 못된 생각을 품을 겨를 없이, 편협한 생각을 다질 겨를 없이 저들을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것은 피동적으로 이루어 진 여행이었지마는, 그 환난과 핍박이 여기에 선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피난길이 전도길이 된 것이다. 그렇게 의미가 주어진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의 생각을 깨트리신 것도 주님이셨다.

1. 하나님께서는 각 인종(人種)과 민족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계십니까?(요 1:3, 행 10:28, 34-35, 17:26-28, 히 2:9).
답: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고, 인종과 민족에 관계없이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보편성, 즉 그분이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인종적 편견을 갖고 계시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유대인들뿐 아니라 비유대인들을 위해서도 봉사하신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비록 우리는 바울을 가리켜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예수께서 더 오래 전에 이미 이방인들에게 증거하는 일을 행하셨다.

2. 누가복음 17:11-16과 요한복음 4:39-42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어떤 일이 전개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구절에서 어떤 메시지를 취해야 합니까?
답:
지난 주 교과에 나온 우물가의 여인은 자기의 행한 모든 일을 예수께서 알고 계심을 깨닫고 물동이를 버려둔 채 동네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다. 이 여인은 그분께서 메시야시라는 사실을 알렸다. 성경은 많은 동네 사람들이 그 여인의 증언 때문에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며칠만 더 머무시면서 가르침을 주시기를 청하였다.
열 문둥병자의 이야기(눅 17:11-16) 또한 사마리아인들을 위한 예수님의 사역을 말해준다. 돌아와 사례(謝禮)했던 열 번째 문둥병자는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를 표했다. 이 사마리아인에게 예수께서는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이방인이라고 칭하셨으나 그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에 응답하셨다. 그분은 그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편견에 동조하지 않으셨다.

교훈: 모든 인류를 창조하시고,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신 예수께서는 누구에게도 인종적 편견을 갖지 않으셨으며 아무도 차별대우하지 않으셨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에 교회를 세우는 데는 제자들과 같이 아람어를 사용하는 본토 출생의 유대인들을 들어 쓰셨지만, 안디옥과 같이 해외에 교회를 세우는데 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외국태생의 헬라파 유대인들을 들어 쓰셨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주연인물들을 살펴보면,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들어 쓰셨지만, 사마리아지방에서는 빌립을 들어 쓰셨고, 해외선교는 바울과 바나바 등을 들어 쓰셨다. 그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해외선교는 무엇보다도 선교지역의 문화와 언어에 익숙한 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빌립, 스데반, 바나바, 바울, 실라 등은 그 당시 상황으로 보면, 이미 세계화가 이루어진 사람들이었다. 많은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방문화에 익숙하였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처럼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아람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본토출생의 유대인들은 배움도 짧을 뿐 아니라, 배타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말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에게는 준비된 그릇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부활을 믿지 아니한 당대의 정치 종교적 실권자들인 사두개파들에 의해서 간헐적으로 탄압을 받았지만, 본격적으로 박해를 받게 된 것은 바울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로부터였고, 스데반을 비롯해서 박해를 받아 흩어진 사람들도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 그리스말을 하는 이들이 친지들이 사는 외국으로 흩어지면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우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선교의 그릇들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바울이 선교사가 되어 전도할 때에 극심한 박해를 받았는데, 그를 박해한 자들은 다름 아닌 자기와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

월요일(2월 4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도입)
고넬료는 어떤 사람인가(행 10:1)?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기 어려운 조건들이 있었다. 첫째로 그는 이방인으로서 신앙적 유산이나 믿음의 계승이라는 전통이 전혀 없었다. 둘째로 그는 높은 지위인 백부장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정복자의 군대 장교가 정복당한 백성의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경건한 신앙인이었다(행 10:2,4). 경건은 헬라어로 ‘유세베스’이다. 신앙의 독실함을 말한다. 고넬료의 경건성은 최고의 계명인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 사랑은 그의 기도생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이웃 사랑은 그의 구제하는 삶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온 집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행 10:2). ‘온 집으로 더불어’(행 10:2)의 뜻은 고넬료 부부는 물론이고 자녀들 그리고 그 집에서 일하는 모든 식솔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가정’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다. 그의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른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구제와 기도의 사람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관계라면 구제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가정의 행복은 먼저 가족들의 신앙관이 일치하여 고넬료의 가정처럼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고 항상 기도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도라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행 10:1-2)

1세기의 이방인들 중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God-fearers)로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외견상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회당에 헌금을 바치며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지도 않았고 랍비들의 규례를 따르지는 않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중 하나가 누가복음 7:1-11의 백부장이다.

1. 누가복음 7:1-10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 이방인 제자의 믿음과 품성에 관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답:
이 백부장의 믿음은, “복음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성취될 하나의 전조였다. 예수께서는 모든 민족으로부터 영혼들이 당신의 나라로 모이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리셨다”(시대의 소망, 317).
사도행전 10장에 또 다른 로마 관리가 나온다. 고넬료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부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사를 보내사 그의 구제와 기도가 상달되었음을 알려주시면서 베드로를 청하라는 지시를 주셨다. 한편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관습의 벽을 넘어 그의 집에 들어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정결하게 하신 고넬료와 같은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 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할 때(행 10:44-46) 성령이 임하심으로 함께 온 유대인들은 다 놀랐다.

2. 사도행전 11:1-3을 읽으십시오. 유대인들의 반응은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그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을까요?
답:
그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노라고 고백했으나 복음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원칙과 반대되는 문화적, 교육적, 혹은 사회적 영향력을 허용하는 일에 주의하여야 한다.

교훈: 초기교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도 역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었다. 이처럼 복음은 모든 민족적 편견을 뛰어넘는다.

부가적용)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증언보다 고넬료의 경건한 신앙을 더 분명히 증언해 주는 말이 있다. 행 10:22절 종들이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우리 주인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자라고 말했다. 고넬료는 로마의 장교이다. 유대나라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때니까 민족의 원성의 대상의 되기 쉬운 때였다. 또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니다. 이방사람이다. 그런데 고넬료는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것도 고넬료 집안에 하인들이 그를 의인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한 번씩 만나는 사람에게 칭찬 듣기는 아주 쉽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칭찬보다 더 중요한 칭찬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칭찬이다.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라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고 기도해도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하고 없어지는 기도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인정받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는가?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의 구제와 기도가 진실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모든 민족적 편견을 뛰어 넘은 예수님의 행보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적 선언이 계시와 자연, 하나님 나라와 세상, 그리스도 교회와 일반 다른 종교를 과격하게 분리, 성서적 복음의 우월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구실로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행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말씀했다. 베드로의 이 같은 고백은 고넬료의 믿음을 받아들이신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당신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요일(2월 5일)
가나안 여인

도입)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안 다니고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로 꼽는 내용 중에 첫째가 󰡒기독교는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하나님, 예수님, 천국, 영생, 구원 따위는 실감 나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독백에 불과할 뿐 현실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지적은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위선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세 번째 이유는 󰡒신앙을 이야기할 때 본인은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신앙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신앙의 소외감, 거절감이 마음 가운데 팽배해 있다는 말이다.위의 사례들은 우리가 신앙을 갖기 위해 뛰어넘어야 할 벽이다. 가나안 여자는 바로 이러한 벽을 뛰어넘은 여자의 이야기로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의 귀감이 된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에는 세 가지 장애 요소가 있다. 그 첫째는 침묵이다. 가나안 여자는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이방 사람이었다. 이 가나안 여자는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마 15:22절).그런데 마 15:23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반응을 보라.󰡒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가나안 여자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절박한 문제를 호소할 때 예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아무리 외쳐도 대답이 없다.󰡒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도와주십시오.󰡓내 소리만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올 뿐이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 비현실의 종교로 인식되기도 한다.그런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둘째는 방해이다. 가나안 여자가 애타게 주님을 부를 때 제자들이 사이에 끼어든다.󰡒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23절).이를 다시 말하면 󰡒선생님 귀찮습니다.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데 쫓아 보내지요󰡓이다. 놀랍게도 도움이 필요해서 예수님 앞에 나온 여자를 방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려 할 때 그들을 실족시키는 요인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을 격려하고 이끌어 주어야 할 목사가,혹은 장로가 집사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들이 신앙의 방해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조심하여야 한다. 셋째는 거절이다. 제자들의 요청이 있은 후에 마침내 예수께서 입을 여셨다.󰡒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4,26절).예수께서 이 여자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도움 주기를 거부하셨다. 이때 이 여자는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그 꿈이 산산조각 났다. 자신이 이방인임을 한탄하며 발걸음을 돌릴 판이다.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문제는 침묵과 방해와 거절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려는 사람이 부딪치는 장벽들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 같고, 주변 사람들은 도움은커녕 방해나 하고, 예수께는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절망에 싸이게 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이 유대 지도자들과의 사이에서 긴장을 가져오자 한번은 두로와 시돈으로 물러가셨다. 그분께서는 이 이방 지역에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려 하셨다(막 7:24). 그러나 한 가나안 여인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찾아왔다.

마태복음 15:21-28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그녀는 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메시야적 칭호임)이라고 불렀을까요? 그녀는 예수님에 관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답:

2.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녀에게 어떻게 반응했으며, 그들이 그렇게 반응하게 된 것은 어떤 관습 때문이었습니까?
답:

3. 그녀는 어떤 식으로 호소했으며, 얼마나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였습니까?
답:

4. 그녀를 낙심시킬 만한 일들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낙심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 멸시받는 민족으로부터 나와 예수님께로 왔으나 그분으로부터 무시당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그분께만 희망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힘 있는 교훈을 주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비유대인들을 위해서도 일할 필요가 있음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이 열두 제자들은 참된 제자들이 되기 위해 아직도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았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호소하는 가나안 여인의 경우를 지켜보면서 또다시 참된 제자의 길에 대하여 배웠다.

부가적용)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깨달은 놀라운 사실은 이 가나안 여자가 침묵과 방해와 거절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응답을 얻어냈다는 것이다.󰡒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절).이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복음서에서 백부장과 이 여자밖에 없다(눅 7:9 참조). 우리는 예수님의 칭찬을 대하면서 예수님의 처음의 냉정한 태도가 어떤 뜻을 두고 일부러 그러신 것임을 알 수 있다.세 가지 장애 요인은 더욱 큰 믿음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여자를 시험하신 것이다. 결국 그는 이 시험에 합격했다. 어떻게 가나안 여자가 침묵과 방해와 거절의 시험을 극복했는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 째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확신했다.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이는 메시야에게만 사용되는 독특한 호칭이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에서 구세주가 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방인이었던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믿었다. 그래서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다.그런데 예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침묵에 좌절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침묵 앞에 물러서지 않았다. 예수께서 마침내 말씀하실 것임을 확신하였다. 자신의 간구를 들으실 줄로 믿고 기다렸다.이 여자는 자신의 진실된 믿음을 보여 주었다. 예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신뢰하였다. 이것이 믿음이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험을 이겨 낼 수 있었다.우리도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된다.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볼 때, 침묵을 견디는 일은 어렵지 않다.둘 째로,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그런데 제자들이 중간에서 방해한다. 하지만 여자는 제자들이 뭐라 해도 상관하지 않고 잠잠히 있다. 이 여자의 안중에는 제자들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있다.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큰 도움을 얻는다. 그러나 때로 가나안 여자를 방해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신앙의 방해꾼들을 만나기도 한다. 혹시 당신이 제자들처럼 누군가의 신앙 성장을 막은 일은 없는가?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예수께서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두셨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약 제자들이 완벽한 사람들이었다면 이 여자는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에게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다른 사람에게 실망을 주기 쉬운 성품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의뢰할 수 있는 분이시다. 제자들의 부족함이 예수님의 위대함을 깎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이 진리가 되심을 명백히 증거하는 것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자는 방해꾼의 소리가 높아지고 주님과 멀어지는 듯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았다. 제자들을 만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구세주가 도움을 청해야 할 바로 그분이었다.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목사나 장로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출 때 우리 신앙이 흔들리지 않으며 실망하지 않게 된다. 어떤 방해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결국 그러한 구도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셋째로, 자존심을 버리고 문제 해결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마르틴 루터는 󰡒신앙생활 최대의 적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보는 순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외쳤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고백했다.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내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믿는 경우가 많다. 내가 세운 계획, 내가 쌓은 학문, 내 가치관을 고집하고 그것들을 따라 행동한다. 이것은 마치 병원을 찾아간 환자가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는 일과 같다. 의사 앞에 앉아 스스로 진찰하고 병명을 말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오만한 태도이다.칼 바르트는 󰡒자존심이야말로 원죄의 뿌리다󰡓라고 단언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 앞에서 자존심이 깨어진 사람들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가나안 여자를 냉혹하게 대하시는 이유는 자존심의 벽을 헐어야 겸손하게 주 앞에 나올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요일(2월 6일)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

도입)
빌립이 전도한 이는 에디오피아 내시이다. 당시 에디오피아에는 왕이 있었지만 너무 종교적이어서 세상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래서 왕의 어머니가 여왕으로 실제로 통치했다고 한다. 여왕을 모셔야 하니, 지근에서 모시는 사람은 아마도 내시로 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간다게로 불리는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라는 것은 고위직이고 여왕의 신임을 받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평상시 유대교에 관심이 있던 자로서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귀의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먼 길이고, 많은 비용이 드는 여행이었지만 예루살렘까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축제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쓰는 아람어는 하지 못했을 것이고, 또 히브리어 성경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칠십인 역 성서)은 읽을 수 있었다. 귀국하는 길에 그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 요즘 우리는 성서를 눈으로 읽는 경우가 많지만 과거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모두 큰 소리로 읽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사람은 수레를 타고 큰 소리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 이 때 성령은 빌립에게 그 수레로 나아가라고 명령한다. 성령은 어떤 타이밍에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묻는다. 빌립: 당신이 지금 읽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내시: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빌립은 질문을 잘 했고, 이제 내시가 궁금해 하는 것을 대답해 줄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내시는 빌립에게 수레에 올라타라고 말하고 자기가 읽은 성경 구절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유명한 고난당하는 야웨의 종의 노래인 이사야 52:13-53:12중의 한 구절이었다. 이 구절은 본래 바벨론 포로시기에 활동했던 무명의 예언자를 지칭했던 것인데, 신약에서는 모두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는 메시아 예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중요한 구절이다. 어쨌든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 구절을 읽고 빌립에게 질문한다. 사실 이 구절의 뜻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을까 기대되었는데, 그 내시는 여기서 말하는 고난당하는 종이 누구인지를 질문한다. 선지자 자신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지 묻는다. 이것만 보면 내시는 벌써 반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다.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으니까? 바로 이 고난당하는 종은 구약에 예표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라는 것이 답이었다. 빌립은 이 질문에 대해서 입을 열어 대답한다. 빌립은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이방인에게 그 말씀을 풀어서 전도를 했다. 그런데 결국 전도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구약에서 선지자가 지칭하는 분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전도란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예수가 바로 구약 성서에 예언되었던 그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자도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는 사도행전 8:26-40에 나오는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행 8:26-40)를 다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이 사람이 이미 어느 정도의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이었다는 단서는 무엇입니까?
답:

2. 그가 제자가 되는 과정에서 성경의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3. 빌립이 한 어떤 말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침례를 받도록 했습니까?
답:

4. 이 이야기에서 빌립이 수행한 역할은 우리에게 제자도에 관하여 어떤 교훈을 줍니까? 빌립은 주님을 위해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는 어떤 특성을 소유하고 있었습니까?
답: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빌립은 천사의 말에 순종함으로 길에서 내시를 만났다. 또한 흥미롭게도 그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갔다. 그 에디오피아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그는 또한 우연찮게도 성경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메시야에 관해 가장 놀랍게 예언된 제53장을 읽고 있었다. 물론 그 장에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묘사되어 있다. 빌립은 내시에게 그 말씀의 의미를 풀어주었고 그는 물로 내려가 침례를 받았다. 모든 일이 척척 맞아 떨어졌다.

교훈: 빌립은 하나님의 사자가 지시하는 말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다.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즉각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는 먼저 내시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멀리 지나가는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예민한 관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디오피아의 내시는 예루살렘에서 옛날 블레셋의 수도였던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을 가고 있었고, 빌립은 사마리아에 있었다. 빌립과 내시 사이의 거리를 우리나라 지역을 예로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 부산 가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속초에서 출발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런데 내시는 빌립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지나가는 흑인 나그네이다. 또 육체적으로는 불구이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지만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불구는 유대인 남자라도 들어갈 수 없도록 율법상 규정되어 있다. 이런 하찮은 이방인 내시를 부르기 위해 하나님은 천사를 동원하시고 빌립을 내려 보내신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공간도 그의 광대하신 존재를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지만 먼지보다 작은 한 개인에게 놀라우리만큼 관심을 표현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구원 받았고 죄 용서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열심에 마음을 모아 여기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려는 진지한 하나님의 태도이다.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사마리아와 유대를 다니며 전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핍박 초기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외각 지역에서 사람들이 전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지나가면 내시는 전도자를 만날 수 있는 거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읽고 있었고, 종교적인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드디어 그 영혼을 구원하신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예기치 않던 사고, 재난, 실패, 회의, 종교적인 관심 등의 기회를 만나게 되는데 하나님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셔서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신다. 셋째, 사마리아교회의 목회와 지역사회의 부흥보다 이디오피아의 내시 한 사람의 영혼을 중요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빌립을 부르실 때 사마리아에는 대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에 빌립이 없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는데도 하나님은 저 광야를 가고 있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빌립을 광야로 보내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의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한 영혼의 내시를 중요하게 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시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나 가능성보다도 그 사람의 영혼을 아끼셨다. 한 영혼을 위하여 불타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절대로 전도에 무관심 할 수가 없다.

목요일(2월 7일)
안디옥 교회

도입)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와 환난을 인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진 피난민 신자들이 안디옥에 와서 세운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의 씨앗은 스데반의 순교의 피였고, 안디옥 교회의 기초는 피난민 신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는 순수한 교회였고 보배로운 교회였다. 후에 로마교회는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의 피로 튼튼하게 세워진 교회가 되었고, 서머나교회는 폴리캅의 순교의 피로 순결하게 세워진 교회가 되었고, 칼타고 교회는 페루페투아의 순교의 피로 뜨겁게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다.

스데반의 순교에 뒤따른 박해와 다소 사람 사울의 회심 전(前) 활약으로 복음은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그러한 지역들 가운데 시리아 안디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이 조직적으로 소개되었다. 누가는 기록하기를, 주께서 처음부터 저들과 함께 하시므로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21)고 하였다.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자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바나바를 보내어 그들을 돕게 하였다.
바나바는 도착하자마자 제자를 만드는 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다소 사람 사울의 도움을 확보하였다. 이 일은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교회는 성장했을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얻게 되고, 청지기 직분에 대한 감각도 갖게 되었다.

1. 사도행전 11:25-30을 읽으십시오. 어떤 문제가 발생했으며 교회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오늘날 우리의 사명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답:

2. 한편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갔을 때 1년 동안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주목해 봅시다. 이 사실은 제자가 되는 과정에서 가르침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 줍니까?
답:
사도행전 13:1-3은 초기 교회의 구성에 대해 좀더 자세히 나타내 준다. 바나바(Barnabas)는 구브로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사울(Saul)은 이스라엘의 본 영토가 아닌 다른 성 다소에서 왔으며, 마나엔(Manaen)은 헤롯 안티파스의 젖동생 혹은 절친한 친구였고, 시므온(Simeon)은 니게르(Niger)라 불리었는데, 그 말은 라틴어로 ‘흑인’을 의미했으며, 루기오(Lucius)는 북 아프리카 구레네 출신이었다. 이 사실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었으며 어떤 지도자들은 전혀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교훈: 유대인뿐 아니라 여러 인종들로 구성된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여 일함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다.

부가적용)
행 13:1절에 안디옥교회의 다양한 일꾼들을 소개한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에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신분과 민족과 계급을 초월하여 다양한 일꾼을 세운 것을 본다. 이것은 이미 주안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안디옥교회는 다양한 평신도 일꾼들이 세워졌다. 먼저 인종의 다양성이다. 행 13:1절에 보면 지도자 중 흑인이 있었다.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이 소개된다. 니게르는 니그로와 같은 말 흑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소개된다. 구레네 지역은 북아프리카 지역임으로 이 사람도 흑인일 가능성이 있다. 이것을 보면 안디옥교회는 이미 흑인을 수용하는 열린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이다. 여기 보면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 소개된다. 헤롯은 주전 4년 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리리 베뢰아지역을 통치한 헤롯안디바스였을 것이다. 그와 함께 젖을 먹고 자란 왕실의 귀족도 안디옥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왕실의 귀족이 안디옥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평범한 서민지도자와 함께 공존하였다. 안디옥 교회는 좋은 일꾼들을 잘 선임하는 교회였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바나바와 사울이다. 특히 바나바는 행11:24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나바는 큰 부자였다. 사울과 더불어 안디옥교회에서 중추적인 일꾼으로 활동하였다. 또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서 바울로 개명을 한다. 그는 바로 안디옥 교회의 좋은 일꾼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11:24 안디옥 교회는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튼튼하게 세워졌다. 성경은 바나바를 소개하면서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라고 했고 행4:37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했다. 행11:24 성경은 안디옥 교회를 튼튼하게 세운 사람이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다고 지적했다. 믿음도 중요하지만 착함과 겸손을 구비하지 못한 믿음은, 재건파 신자들처럼, 교만해져서 교회에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성령충만도 중요하지만 착함과 겸손을 구비하지 못한 성령충만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처럼, 교회 안에서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안디옥 교회는 무엇보다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 튼튼하게 세워졌던 아름다운 교회였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고 뜻하신 일이었다.

금요일(2월 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632, 10권, 658-664, 시대의 소망, 제32장 ‘백부장’(315-318), 제43장 ‘장벽이 무너짐’(399-403), 제68장 ‘바깥 뜰에서’(621-623), 요한복음 12:20-33, 사도행전 9:1-31, 22:1-21, 26:2-18.

“백부장은 구주를 보지 못하였으나 그가 들은 소식은 그의 믿음을 북돋워 주었다. 유대인들이 형식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인은 유대인들의 종교가 자신의 종교보다 우수하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갈라놓은 국가적인 편견과 증오의 장벽을 이미 무너뜨렸다. 그는 하나님의 사업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대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에게 이미 보고된 바대로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서 그는 영혼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의 마음에 있던 영적인 모든 것이 구주의 말씀에 응답하였다”(시대의 소망, 31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안디옥 교회의 모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한 더욱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해 이 모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2. 재림교회는 침례자 수가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침례 받은 이후에 제자로 키워내는 문제에 있어서는 기대하는 만큼 성공적이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너무나 많은 새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침례를 받고 교회에 연합한 이들을 제자화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새 신자들을 제자로 삼기 위해 지역교회에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3. 구스 내시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에 두는 것은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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