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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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3-28 23:40 조회7,334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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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제2기 제1과> 2008년4월5일(안) 일몰6시56분
제1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擴大鏡>
◎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 = “백 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라는 말이 있다.
즉 이 말은 경험(經驗)의 중요성(重要性)을 일컫는 말이다.
☞ 사람을 안다는 것은 이름만을 아는 사람도 있고, 외모(外貌)만을 보고 아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의 가문(家門)과 학벌(學閥)과 경력(經歷)만을 아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사람도 있다. 특히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평생의 과제(課題)인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안다고 할 때 귀하(貴下)는 그 상대방(相對方)에 대해서 얼마만큼 어디까지를 알고 있으며, 알려고 하십니까? 흔히들 겉으로만 상대(相對)를 알기 때문에 많은 실수(失手)와 오해(誤解)와 편견(偏見)과 갈등을 갖고 있으므로 많은 실수(失手)를 하게 된다.
☞ 그 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1. 역사적(歷史的)인 위대(偉大)한 인물(人物)로만 알고 계십니까?
2. 4대 성인(聖人) 중에 한사람으로만 알고 계십니까?
3. 선지자(先知者) 같은 분으로만 알고 계십니까?
4.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써 나의 개인적(個人的)으로 구주(救主)와 구원자(救援者)로 알고 영접하고 늘 그분과 동행하고 계시는 분으로 알고 믿고 계십니까?
♡ 예수 그리스도!
따뜻하고, 가슴 뭉쿨 하고, 기분 좋고, 포근하고, 온유하고, 정감이 서리고, 친정식구 같고, 아가들이 생각하는 엄마와 아빠 같고, 편안하고 따스한 이름 그 이름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日 3월30일
<浸禮者 요한이 아님>
◎ 침례요한은 사가랴 엘리사벳의 아들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 와서 AD28년 갈릴리의 분 봉왕 헤롯에게 참수형(斬首刑)을 받고 죽었다.
◎ 사람들이 침례요한을 어떻게 생각 하였는가?
사람들은 요한이 약속하신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애는 겸비와 자기부정으로 특징을 이루었고 이기심이 없었다. 그의 가르침과 권면과 책망은 열렬하고 진지하면서도 대담 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환심이나 친찬을 받기위하여는 그의 사명에서 단 한치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세속적 명예나 권위를 원하지 않았으며 마음과 생애는 겸비하였고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명예를 자기의 것으로 주제넘게 떠맡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예언의 선물2권57)
◎ 침례요한은 구약에 사무엘과 같은 임무를 하였다
엘가나와 한나의 사이에서 한나의 무자(無子)함과, 엘리사벳과 사가랴사이의 침례요한의 성령의 잉태(孕胎)가 똑같고(삼상 1:11-20)
사무엘의 이후에 다윗에게 기름부음을 허락한 것과, 침례요한의 사역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역과 같은 맥락이다.
◎ 교훈: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그분을 침례자 요한과 혼동한 것은 단지 소문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한 자신은 분명하게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였다.
月 3월31일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다른 先知者가 아님>
◎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이스라엘의 고집 센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사벨의 두려움 없는 담대함으로 기별을 선포한 선지자이다.
◎ “아합의 시대에 요단강 동편 길르앗 산중에 신앙과 기도의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두려워할 줄 모르는 봉사는 이스라엘 중에 신속히 퍼지는 배도를 막도록 되어 있었다. 이름 있는 도시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평생 높은 지위를 차지한 일이 없는 디셉 사람 엘리야는 자기 앞에 길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의 사명에 임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신앙과 능력의 말씀이 그의 입술에 있었고 그의 전 생애는 개혁 사업에 바쳐졌다. 그는 죄를 책망하고 악의 조수를 물리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엘리야가 죄를 책망하는 사람으로서 백성들에게 나아갈 때에 그의 기별은 고침을 받고자 하는 죄로 병든 모든 영혼들에게 길르앗의 유향을 제공하였다.”(선지, 119)
◎ 눈물의 선지자 에례미아는 격렬한 국가적 소요와위기의 때에 등장하여 동족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기별을 전달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代價)를 지불한 선지자이다. (렘 20:1-2, 7-8)
◎ “요시야가 일으킨 개혁의 결과로 영구적인 영적 부흥이 있기를 바라던 사람들 중에는 요시야의 치세 제 13년에 아직 젊은 나이에 선지자의 직분을 맡도록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가 있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을 맡을 사람 중에 하나인 예레미야는 그가 모태로부터 “열방의 선지자”가 되도록 세움을 입었다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에 그는 자기의 무가치함에 대한 느낌으로 압도되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5, 6)고 부르짖었다.”(선지, 407)
◎ 선지자가 아닌 메시아로 믿음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이적을 보고 그가 다윗의 아들임을 진심으로 선언하였다. 벳새다에서 양식을 먹은 군중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하기를 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선지자로는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으나 그가 메시야라고는 믿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411).
◎ 교훈: 예수님을 고대의 영웅적인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 유쾌하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복음서에 묘사된 그분의 실체를 나타내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火 4월01일
<예수님의 身元에 대한 觀心이 繼續됨 - 1>
◎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가운데 시각장애인(視覺障碍人) 세분이 처음으로 코끼리를 만져보고 세 사람이 각각(各各) 다른 소감(所感)을 이야기 했다.
(첫째 사람) 코끼리의 다라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
(둘째 사람) 코끼리의 배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벽(壁)과 같다.
(셋째 사람) 코끼리의 코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뱀과 같다.
◎ 사람들이 지식을 얻는데 오감(五感)을 통해서 거의가 지식(知識)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얻는 지식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은 보는 것(시각(視覺))이다.
그러므로 오감(五感)의 느낌을 모두 본다(보다).로 이야기 한다.
① 촉각(觸覺))=만져 본다, ② 청각(聽覺))=들어 본다, ③ 후각(嗅覺)=냄새 맡아 본다. ④ 미각(味覺)맛본다.
⑤ 시각(視覺)= 눈으로 본다.
◎ <하나님을 만난 사람 욥의 이야기>
☞ 성경(聖經)중에서 의(義)로 운 사람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그것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의(義)로운 사람 “욥”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욥은 까닭 없이 사단의 가혹(苛酷)한 시험(試驗)에 들게 된다.
그것도 단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는 의로운 사람인데 말이다.
욥기 1장6절로부터 시작되는 가혹한 시련(試鍊)으로 “욥”은 순식간(瞬息間)에 온 가정이 파괴되고 재산과 재물과 10남매(男妹)의 자녀까지 몽땅 잃고, 욥기 2:1-13절까지의 비극(悲劇) 가운데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혹독(酷毒)한 시련중(試鍊中)에 있는 사람 “욥”에게 위로하여야 할 친구(親舊)들이 계속적인 방향이 다른 설교를 하고 있고, 가장 가까운 아내도 하나님을 욕(辱)하고 죽으라고(욥 2:9) 하며 욥의 곁을 떠나 같다.
이어서 이어지는 기-ㄴ 욥기서에서 욥은 갖은 방법으로 하나님께 질문(기도(祈禱))을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욥기 37장까지 가도록 일체의 응답(應答)이 없으시다.
그동안의 응답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무응답(無應答)을 이해(理解)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욥38:1절까지 “욥”에게 아무 응답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좋으신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시고 욥에 대해서 주야(晝夜)로 눈동자처럼 주시(注視)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의 대답은 욥에게 이상한 질문으로 시작하십니다.
(욥38:1-41)부터 (욥 41:34)까지는 "하나님"의 욥에게 하시는 질문(質問)들 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고통(苦痛)당하는 것을 얼마나 가슴 아프게 욥보다도 더 큰 고통으로 욥을 생산(生産)하고 계시는 것을 욥이나 우리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기를 (욥 42:2)에 3번째로 말씀하시기를 전능(全能)한 나와 다투는 “욥”아 정말 네가 나를(하나님을) 꾸짖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욥 38장 전(前)까지는 당치도 않는 열변(熱辯)으로 말을 하는 사람과, 그것을 합리적(合理的)이지 않고 불평불만(不平不滿)만을 말하는 것을 그냥 듣고 있는 쪽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고통(苦痛)스럽겠습니까?
욥기서 전체는 “욥”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 가운데에서 욥을 다시 낳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도 안 되는 말(기도(祈禱))을 다 할 때 까지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38장까지의 기-ㄴ 장(章)을 듣고만 계셨던 것입니다.
♡ (욥 42:2)에 욥은 "하나님"께서 못하시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욥 1:1)의 순전(純全)하고 정직한 욥이 (욥 42:2)에 이제야 하나님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욥 42:1)절의 "하나님"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심을(못 이루실 줄 없는 분임을) 욥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 욥은 깨달았다는 말과 함께 그토록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던 것을 이제는
(욥 42:5)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바늘귀 같은 작은 고통의 구멍에서 내가 나오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이로 인하여 (욥 42:11-17절)의 기록은 "하나님"의 축복이 기록 되었습니다 아멘
바늘귀 같은 작은 고통의 구멍에서 내가 나오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듣는 신앙(信仰)에서 금번의 교과를 통하여 우리는 업그레이드 된 신앙(信仰) 신앙으로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만나서 뵙는 큰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水 4월02일
<예수님의 身元에 대한 觀心이 繼續됨 - 2>
◎ 4복음서(福音書)에 나타난 예수님
<마태는 = 왕(王)으로>
마태는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妙思)(나타냈다)
마태복음은 원래 유대인을 위하여 쓰인 책이다.
예수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며 예수님의 왕손(王孫)계보(系譜)가 마태복음1장에 기록 되어 있으며, 마태복음5장-7장까지에 기록된 산상수훈(山上垂訓)에는 그의 왕국(王國)의 법률(法律)과 함께 성명(聲明)이 발표되어 있다.
<마가는 = 종(從)으로>
마가는 예수그리스도를 종으로 묘사(妙思)했다.
마가복음은 본래 로마인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며 여기에는 예수그리스도의 가계보(家系譜)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보통 종의 족보(族譜)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興味)를 갖지 않고 있는 이유는 로마인은 말씀보다 행동(行動)]에 관심(觀心)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 사람으로>
누가는 예수그리스도를 완전(完全)한 인간으로 제시했다.
누가복음은 헬라인을 위해 쓰여 진 것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세계(世系)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로 소급되어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누가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기도의 생활을 하시며 천사의 섬김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다.
<요한은 = 하나님으로>
요한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했다.
이 복음서는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요 20:31).
요한복음에 있는 모든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예증하며 드러내고 있다.
이 복음서의 첫 말씀은 “태초(太初)”로 소급하여 시작되고 있다.
◎ <옛날과 지금의 인간(人間) 형태(形態)>
예수님 당시에는 네 계급(階級)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곧 오늘날의 네 가지 형태의 인간을 대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
유대인들을 생각해보자 유대인은 특별한 교훈을 받아 구약 성경과 선지자들의 말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지상 생활은 곧 유대백성을 위해 기록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위해서 주님은 그들과 같은 백성중에서 난 사람이어야 했고 그들의 선생되는 사람은 구약에 말씀된 유대 풍습(風習)안에서 사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舊約聖經)을 완성키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또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구절을 거듭거듭 보게 되는 것이다.
☞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러한 형태의 그리스도인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언이 성취(成就)되었나 되지 않았나 하는 문제에 열중한다.
그 들은 선지자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열심히 탐구(探究)한다.
(로마인)
다음으로 그 당시 세계의 주인공이었던 로마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특히 로마인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로마인은 구약성경(舊約聖經)에 대하여는 아무 아무것도 아는바가 없었다. 그들은 또한 예언의 성취와 같은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 출현한 위대한 지도자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도자(指導者)는 비상한 권위와 권세를 소유한 사람이었으므로 로마인들은 이 예수님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 하였다. 로마인들은 마가가 한 것과 같은 직선적인 메시지를 좋아했다. 마가복음은 아름다운 문체 속에 기록되어 있으며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분명 마가복음은 그리스도의 사역(事役)에 관한 복음이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인은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실업인과 같은 유형의 인간이었다.
실업인은 왕의 족보(族譜)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다. 마가복음은 실업인의 복음이라고 하겠다.
(헬라인(그리스인))
누가복음은 헬라인 의사에 의하여 아름다움과 시(詩) 그리고 문화를 사랑하는 동족을 위하여 쓰여 진 책이다. 그 들은 커다란 이상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들의 취미는 퍽 까다로웠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생(生)에 관련된 감동적인 송가(頌歌)를 기록하고 있다.
이 복음서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의 인사말을 찾아볼 수 있으며.(눅 1:42-45) 도한 동정녀 어머니의 주를 찬양하는 노래도 볼 수 있다. (눅 1:46-55).
그리고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 함을 받아 다시 말을 하게 되었을 때 크게 찬송하며 예언 하였다. (눅 1:13-14).
구주(救主)의 탄생을 당해 천사들의ㅏ 합창이 울려 퍼지고(눅 2:13-14) 누가복음 2:20)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자의 찬송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의 헬라인들은 진리(眞理)를 행복의 목적으로 믿고 그것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학생(學生)들과 이상주의(理想主義)자들과 같은 형태의 인간들이라고 하겠다.
(모든 사람)
요한복음은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기록된 복음서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임무를 입증하는 비상한 주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요한 당시의 “모든 사람”은 곧 오늘날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대중(大衆)들과 같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 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의 선물을 받기 원하는 사람을 말한다.
木 4월03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요17:3)>
◎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말씀)
☞ 구약성경(舊約聖經)은 한 국가(國家) 히브리에 대하여, 신약성경(新約聖經)경은 인자(人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국가(國家)는 인자(人子)를 세상에 오게 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하여 건립(建立)되었고 양육(養育)되었다. (창 12;1-3).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이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셨다. (요 1:14, 14:9)
세상에서의 그의 출현(出現)은 전 인류역사의 중심사건(中心事件)이며 구약성경(舊約聖經)은 이것을 위한 바탕이 되는 무대(舞臺)이고 신약성경(新約聖經)은 이것을 묘사(描寫)한다.
한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완전(完全)한 생활을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사랑했고 친절하고 온유하셨으며 너그러웠고 동정에 찬분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하여 놀라운 이적(異蹟)을 행하여 그 들을 배불리 먹이셨고, 지친 사람들, 고통(苦痛)받는 사람들 그리고 상심(傷心)한 사람들의 무리가 그에게 왔을 때 그 들을 편히 쉬게 하셨다. (마11:28-30). 만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記錄) 한다면 세상에는 그 많은 책을 담아둘 곳이 없을 것이다. (요21: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罪)를 씻기 위하여, 인간의 구주(救主)가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 가셨다. 그 후(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살아 나셨고 오늘 지금도 살아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역사적(歷史的)인 인물(人物)이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살아 계신 분이시며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원동력(原動力)이 되는 분이시다. 그리고 또한 그에게로 오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永遠)한 생명을 약속(約束)하셨다.
성경(聖經)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와 인간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을 중심(中心)으로 기록(記錄)어 있다.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을 빌어 잉태(孕胎)하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심. (마 1:22-23)
병자(病者)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예언(豫言)된 메시야이심. (마 11:2-6)
다윗이 성령(聖靈)에 감동(感動)하여 주(主)라 칭(稱)한 이는 그리스도이심. (마 22:41-45)
예수께서도 자신(自身)을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심. (막 14:61-64)
제자(弟子) 도마도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불렀음. (요 20:26-28)
<焦點>
1. 예수님에 대하여 역사적(歷史的)인 인물(人物)로, 위대(偉大)한 성인군자(聖人君子)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을 그 분의 신원(身元)에 대하여 논쟁(論爭)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
2. 예수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는가가 참으로 중요하다.
1) 위대한 역사적인 성현군자(聖賢君子)의 인물로만 알고 거기서 멈춘 사람이냐.
2)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지금도 살아계시는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구세주이신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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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Ⅰ】“예수 그리스도”
<그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요?>
이 질문에 당신이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내세(來世)와 영원(永遠)의 삶이 좌우됩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당신의 생각으로는….
시대(時代)를 막론하고 최고의 인격(人格)을 갖춘 분은 누구일까요?
최고의 지도자(指導者)는?
최고의 선생(先生)은?
인류를 위해 가장 많은 선행(善行)을 베푼 사람은?
가장 거룩하게 살다 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세상 어느 곳, 어느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봐도 역사를 안다면 나사렛 예수님 같은 분은 없다고 인정할 것 입니다. 예수님만큼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분도 없으니까요.
예수님은 역사의 방향을 바꿔놓으셨습니다.
성경 말고도,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문은 대략 2000년 전 나사렛 예수께서가 살았었노라고 증명하고 있습니다. B. C.는 “Before Christ(그리스도 기원전),” A. D.는 “Anno Domini(그리스도 기원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탄생은 예언(豫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부터 성경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의 탄생을 예언하였습니다.
수많은 저자들이 1,500년이라는 방대한 세월을 거쳐 기록한 구약성경은 300여 개의 예언을 통해 예수의 오심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예언을 다 들어맞았습니다.(성취(成就)되었습니다.)
(그 분의 기적적인 탄생, 죄 없는 삶,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들, 그의 죽음과 부활까지도.
예수가 산 삶, 그가 행한 기적, 그가 한 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昇天))
이 모든 사실은 예수는 단지 인간(人間)이 아니요, 그 이상 이었다는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9)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삶과 메시지는 변화를 안겨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이 역사(歷史)에 미친 영향을 보면 그분의 삶과 메시지는 언제나 민족과 국가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닿은 곳에서는(있는 곳에는)
결혼의 신성함과 여성인권과 (인간의 차별이 없어졌고) 발언권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학교가 세워지고 아동보호법이 만들어지고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그 외에도 인류를 위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개인의 삶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이름난 군대장군(將軍)이든지, 정치가(政治家)이든지, 재벌가(財閥家)이든지, 끔직한 범죄자(犯罪者)이든지, 노사(勞使)간의 분쟁이나, 고부(姑婦)간의 갈등이나, 신분(身分)과 인종(人種)과 남녀노소(男女老少) 누구라도 변화(變化)가일어났고 그들의 이전의 삶보다 180도로 달라졌고 달라집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C. S.루이스는 수 년 동안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던 불가지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압도적인 증거를 연구한 후 예수님을 자신의 하나님과 구원자로 영접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당신께 어떤 분인가요?
이 질문에 당신이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내세(來世)와 영원(永遠)의 삶이 좌우(左右)됩니다.
타 종교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의 철학(哲學), 법칙(法則), 기준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타 종교들은 각 종교의 창시자(創始者)를 제외(除外)해도 종교의식(宗敎儀式)과 수양(修養)에 별 차이(差異)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基督敎)에서 예수님을 제외(除外)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거한 기독교는 인생철학(人生哲學)도 아니요,
도덕기준(道德基準)이나 종교의식에 대한 복종(僕從) 또한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부활(復活)하시고 살아계신 구세주(救世主)와 함께 생동감 있는 개인관계를 맺는 데에 있습니다.
부활(復活)하신 주님
(마 28:1-15, 막 16:1-11, 눅 24:1-12, 요 20:1-18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남의 무덤에 묻힌 후 3일 만에 부활하였습니다.
기독교의 독특성(獨特性)은 바로 이 부활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타당성(妥當性)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나사렛 예수의 부활의 증거에 근거(根據)합니다.
수세기 동안 부활의 증거를 연구한 뛰어난 학자들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것을 믿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하버드 법대에서 법적인 문제(legal issue)의 권위자인 시몬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한 부활의 증거를 검토한 후 "예수가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다면 성경의 저자들이 그처럼 계속적으로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국 역사학(歷史學)의 가장 뛰어난 지성 중의 한 명인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는 "나는 부활의 증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고 부활의 어떠한 증거도 아직까지 깨어진 적이 없다." 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이유
부활(復活)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핵심입니다. (고린도전서 15:1-19 참조)
부활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언(豫言)>
첫째, 예수님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예언했고 그의 죽음과 부활이 예언한대로 정확하게 일어났습니다(부활(復活). 하셨습니다). ( 누가복음 18:31-33), (고린도전서 15:1-19 부활 참조)
<빈 무덤>
둘째, 부활만이 빈 무덤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뉘여 졌던 무덤은 당시의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지켜졌고 거대한 둥근 돌로 봉해졌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주장한대로 예수님이 죽지 않고 단지 심신(心身)이 약해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무덤을 지키는 군인들과 큰 돌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거나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를 구해내지 못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적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지는 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결코 가져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 28:1-15, 막 16:1-11, 눅 24:1-12, 요 20:1-18 참조)
<개인적인 만남>
셋째, 부활만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을 설명해 줍니다.
예수는 부활한 후(後)에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10번 이상 나타났고 한 번은 5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이 환상이 아닌 것을 보여주셨는데 직접 사람들과 식사를 했으며 대화를 했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요한일서 1:1)
<교회(敎會)의 탄생(誕生)>
넷째, 부활만이 기독교 교회의 시작을 설명해 줍니다.
기독교 교회는 역사상 존재했던 조직이나 단체 중에서 가장 커다란 제도입니다.
초대교회의 첫 번째로 행해진 설교의 반 이상의 메시지가 부활과 관계된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2:14-36).
분명히, 초대교회는 부활이 자신들의 메시지의 핵심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적들은 언제든지 예수님의 몸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변화(變化)된 사람들>
다섯째, 부활만이 제자들의 변화된 생활에 대한 유일한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절망했으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1-11).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의 성령체험을 통하여 이전에 낙심하고 실망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분의 이름으로 제자들은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다른 사람들은 심하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용감한 행동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이 믿음은 죽음을 각오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폐륜(廢倫)아들도 희귀의 살인마(殺人魔)들도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주님>
예수의 부활 때문에 진정한 제자들은 단지 자신들의 종교의 죽은 창시자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과의 생생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시며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축복하시며 그들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십니다. 수 세기 동안 세상에 영향력을 미친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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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누구인가?
☞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하나님은 구원(救援)해 주신다.“구원자(救援者)”라는 뜻이며,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구세주(救世主)를 의미한다.
☞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예수님 탄생(誕生)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태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 16:15; 눅 9:20) 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 16:16)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마 16:17)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했다고 적혀 있다.
☞ 《요한복음서》에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敍述)되어 있다.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太初)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萬物)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生命)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4)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榮光)이었다.
그분에게는 은혜(恩惠)와 진리(眞理)가 충만(充滿)하였다.…
모세에게서는 율법(律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혜(恩惠)와 진리(眞理)를 받았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써 하나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
【생애】 예수는 어머니가 되는 동정녀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이 호구조사(戶口調査)의 등록(謄錄)을 하러 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예수가 태어나던 날 밤 천사(天使)가 목자(牧者)들 앞에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고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14) 라고 하나님을 찬양(讚揚)하였다.
예수 탄생(誕生)후 그 일가는 헤롯왕의 유아(幼兒)살해(殺害)를 피(避)하여 애급(이집트)로 여행하고, 헤롯이 죽은 후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나사렛에서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는데, 열두 살이 되던 해, 유월절(踰越節) 명절(名節)을 맞아, 해마다 그랬듯이 부모를 따라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예수는, 성전(聖殿)에서 학자(學者)들과 성경(聖經)에 관한 토론(討論)을 벌였다.
학자들은 예수의 지혜(智慧)와 그 대답에 경탄(敬歎)하고 있었는데, 그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던 부모를 보고 예수는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는 30세(歲)경 공생애를 시작하였다. 침례자(浸禮者) 요한에게서 침례(浸禮)를 받은 예수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廣野)에 나가 40주야(晝夜)의 금식(禁食)기도를 하면서 마귀(魔鬼)로부터 세 가지의 시험(試驗)을 받았다. 예수님은 성경(聖經)에 기록(記錄)된 말들을 인용, 마귀(魔鬼)의 유혹(誘惑)을 물리치고 광야(廣野)에서 머무른 후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容恕)와 사랑을 전파(傳播)하기 시작(始作)하였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福音書)는 예수의 봉사활동(奉仕活動)에 관한 똑같은 기록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예수의 발자취를 정확히 더듬는다든지, 그가 방문(訪問)한 지역(地域)을 차례대로 추적(追跡)하기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광야(廣野)에서 나와 베다니로 돌아갔는데, 여기서 첫 번째 제자를 얻어 그들과 함께 갈릴리로가, 가나의 혼인(婚姻)잔치에서 물을 포도주(葡萄酒)로 변화(變化)시키는 첫 기적(奇蹟)을 행하였다. 공생활에서의 최초의 유월절(踰越節)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거기서 성전(聖殿)안의 장사꾼들을 몰아내었다.
예수는 유월절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어느 날 밤 조용히 찾아온 바리세파 지도자(指導者)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條件)을 일러 주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중생(重生) 또는 거듭남의 교리(敎理)이다.
침례자(浸禮者)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유다 지방을 떠나 사마리아를 지나서 갈릴리로 향하였다. 도중에 사마리아 지방 사마리아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자기가 메시아임을 밝혔는데, 그녀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구세주(救世主)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내려간 예수는 그곳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신약의 복음을 전하며,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 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었다. 이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은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신들린 사람 ․간질병자 ․중풍병자들을 모두 그의 앞에 데려왔다. 예수는 그들도 모두 고쳐 주었다. 그러자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예수를 따랐다.
예수는 이 무렵 유명한 산상 설교를 하였으며, 또한 12제자를 선발하였다. 예수는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갔는데, 나사렛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낭독하였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사람들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예수는 예언자 엘리야가 동족(同族)인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이방의 어떤 과부에게로 보내졌다는 사실, 예언자 엘리사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는 고쳐주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알려, 그가 말하는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구원에 그치지 않고 전 인류의 구원이라는 뜻을 비쳤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산(山)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으나, 예수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갔다. 침례자 요한이 헤롯왕에게 살해된 사실을 안 후,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떠났는데, 그 길에 제자들에게 구세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말해주었다. 예수가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을 때 예수가 그들 앞에서 변모(變貌)하여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같이 눈부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 즉, 예수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계시 방법으로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예언자의 신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깨달았던 것이다. 그 후 예수는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가 설교도 하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곤 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지닌 권위에 놀란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인가의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예수는 요단강을 건너 뵈뢰아 지방으로 가,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동생 라사로를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었다. 이때 예수는 마리아의 자매 마르다 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復活)】 죽은 라사로를 예수가 살려냈다는 이야기가 전파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세파 사람들은 예수를 위험시하여 의회를 소집하고,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하며 의논하였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유월절(踰越節) 전날 목요일 밤에 예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들고, 그날 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였다. 겟세마네에서 잡힌 예수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선고받고, 이튿날 아침 십자가를 지고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며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 거기서 강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중죄인으로서 십자가 나무틀에 못 박혀 죽었다.
일요일 아침, 예수가 묻힌 무덤은 비어 있었다. 예수는 생전에 자신이 예언한 바와 같이 부활하였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제자들은 그 후 여러 곳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복음서들은 그 사실과 함께 그가 감람산(橄欖山)에서 승천(昇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재림(再臨)>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어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9-11)
“이것들을 증거(證據)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恩惠)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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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Ⅱ】“침례(浸禮)요한”
1. 빛을 기다리는 자(침례(浸禮)요한)
구약성경(舊約聖經)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서다.
말라기 마지막 장과 신약성경(新約聖經) 사이에는 약 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들어 있다.
그 시기에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와 같은 대제국들이 팔레스틴 지역을 지배하면서 유대사회에는 거대한 격변이 일어난다.
신약의 대부분의 주요 사상들이 이 시기에 형성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부활(復活)’이란 개념은 구약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개념(槪念)은 신구약중간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중심주제였다.
이스라엘은 원(願)하건 원(願)하지 않건 타(他) 문명을 접하면서 차츰 동화(同化)되어 갔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가 죽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했다.
고레스 왕은 점령지의 소수 민족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거주이전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聖殿)을 건축하겠다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과 본래 그 자리에 그대로 살고 있던 사람들 간의 갈등이었다.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계속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귀향 유대인이 성전을 재건축 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포로기 동안 그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주도권을 잡은 지주(地主)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제2차 성전이 BC 515년에 완성되었다(에6:15).
그 후로 역사는 흘러서 B. C. 333년에 알렉산더가 이스라엘을 점령한다.
알렉산더(Alexander)는 헬레니즘 문명을 가지고 세계 정복에 나섰다.
이때 이들은 또 한 번 그리스 문명에 깊숙이 젖어들어야 했다.
그리스 문화 중 하나를 소개한다면 운동경기를 들 수 있겠다.
그 시대의 경기장에는 남자들만 들어가서 관람할 수 있었다.
이는 남자들이 나체로 운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의 귀족 여인들이 남장을 하고 구경하다가 발각되어서 처형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경기장(gymnasium)이 예루살렘에도 세워졌고 유대 랍비들이 경기를 구경하러 갔다가 이방인(異邦人)들의 할례(割禮) 받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앞 다투어 할례의 흔적을 지우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하나는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시몬 베드로와 같은 이중 이름을 갖는 것이다.
시몬은 전형적인 히브리식 이름이고 베드로는 그리스어이다.
마치 우리가 미국에 가면 그레이스 리, 크리스티나 김 등으로 이름을 쓰듯이 그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랬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것들을 보전하기 위하여 갈등과 반목이 있었으나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헬라화 되어버렸다.
정통파 유대 랍비들은 자녀에게 헬라어를 가르치면 헬라화가 될 위험이 있다고 하며 반대했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국제화(國際化)시대에 적응하려면 반드시 그리스어를 배워야 한다면서 상반된 주장을 했다.
마치 이 시대에 영어를 못하면 어려움을 느끼듯이, 그 시대는 헬라어가 그러했다.
유대인들은 앞다투어가며 자녀들에게 헬라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종파(宗派)가 등장한다. 가장 먼저 생긴 종파는 바리새파다(B. C. 100).
바리새파는 상당히 전통적인 삶을 추구한 사람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부활(復活)을 믿고, 내세(來世)를 지향했지만 여전히 과거 중심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어서 사두개파가 생겼다.
그들은 현실(現實) 중심적인 사람들이며 기득권층이었고 귀족이었다.
그리고 열심당원이 있었는데, 이들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고자 했다.
쿰란 종파(宗派)는 바리새파의 일부로서 사해 근방으로 도망(逃亡)가서 살면서 묵시문학적이고 종말론적(終末論的)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다.
금식(禁食)하며, 결혼(結婚)도 하지 않으며, 사유재산(私有財産)도 없이 산 계층(階層)이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빛의 자녀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특권의식이 있었고 비현실적(非現實的)이며 초월적(超越的)인 삶을 추구했다. 그 외(外)에도 여러 종파(宗派)가 있었다.
2. 빛을 증거(證據)하는 자(침례(浸禮)요한)
이러한 상황에서 침례요한이 나타나서 회개(悔改)를 외쳤다.
그에 대한 인상이 얼마나 깊었던지 예수가 승천하시고 한 참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은 요한을 마음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도 그곳의 신자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저자는 침례요한에게 있는 빛은 참 빛이 아니며, 다만 그 증거(證據)하는 등불이며, 없어져야 할 빛임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6-8절에서 저자는 침례요한과 예수를 대비(對比)시키되 빛을 화두로 삼았다.
저자는 침례요한을 소개하되,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났으니”라는 표현은 침례요한의 탄생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따른 것임을 알게 한다. 그의 사명은 세상에 비췬 유일한 참 빛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세상의 불의를 질책하며 침례를 받으러 나오는 자들을 회개로 이끌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에서 볼 때 그의 선포는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기 위한 것이며,
침례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회개(悔改)할 것 없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침례요한을 빛이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식은 ‘났으니’(εγενετο 에게네토)라는 말을 통해서 수정된다. 에게네토는 일반적으로 ‘난 것’, ‘된 것’, ‘지은 것’ 등의 의미로 쓰이며, 누군가에 의해서 발생한 것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침례요한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명을 받아서 태어난 자요, 참 빛이 아니며, 참 빛에 대해서 ‘증거하러 온 자’인 셈이다.
그에 비하여 예수그리스도는 태초에 계시는 선재(先在)하신 분이며, 사람처럼 ‘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오신 분이다.
7절은 침례요한의 직무를 말한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자(messenger)였다.
그는 아무런 이적(異蹟)도 행하지 않았지만 그의 독특한 생활과 가르침의 엄정함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빛에 대해서 증거하고,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어린양으로 믿게 하고자 했다.
예수에게 있는 빛은 참되다.
예수에게 있는 빛은 이제까지 발견할 수 없던 새로운 빛이며 그 빛이 사람을 구원(救援)한다.
그에 비하여 침례요한은 율법에 속한 자요, 참 빛을 증거(證據)하러 온 등불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 빛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공관복음에서는 침례요한에게 매우 큰 영예(榮譽)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저자는 그를 예수 앞에서 쇠(衰)해야 할 자요(3:30),
예수를 밝혀 주는 등불에 불과한 자요(1:8),
예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15절은 침례요한의 증거 내용이다.
그것은 예수를 목격(目擊)한 자의 진술이며,
예수의 선재(先在)성을 암시(暗示)하는 증언으로서 의미가 있다.
침례요한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저자는 그러한 침례요한의 입을 빌려서 그보다 우월(優越)하신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
예수는 침례요한보다 “앞선”(εμπροσθεν, 엠프로센)분이다. 전치사 ‘엠프로센’은 장소 혹은 시간에서 ‘전에’(before)를 나타낸다.
침례요한은 예수를 자기보다 먼저 계시는 분이라고 하며,
신분(身分)상의 우위(優位)를 부여하는 의미에서 앞섰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침례요한은 선지자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선지자가 증거 해 온 그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아멘.
제1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擴大鏡>
◎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 = “백 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라는 말이 있다.
즉 이 말은 경험(經驗)의 중요성(重要性)을 일컫는 말이다.
☞ 사람을 안다는 것은 이름만을 아는 사람도 있고, 외모(外貌)만을 보고 아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의 가문(家門)과 학벌(學閥)과 경력(經歷)만을 아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사람도 있다. 특히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평생의 과제(課題)인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안다고 할 때 귀하(貴下)는 그 상대방(相對方)에 대해서 얼마만큼 어디까지를 알고 있으며, 알려고 하십니까? 흔히들 겉으로만 상대(相對)를 알기 때문에 많은 실수(失手)와 오해(誤解)와 편견(偏見)과 갈등을 갖고 있으므로 많은 실수(失手)를 하게 된다.
☞ 그 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1. 역사적(歷史的)인 위대(偉大)한 인물(人物)로만 알고 계십니까?
2. 4대 성인(聖人) 중에 한사람으로만 알고 계십니까?
3. 선지자(先知者) 같은 분으로만 알고 계십니까?
4.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써 나의 개인적(個人的)으로 구주(救主)와 구원자(救援者)로 알고 영접하고 늘 그분과 동행하고 계시는 분으로 알고 믿고 계십니까?
♡ 예수 그리스도!
따뜻하고, 가슴 뭉쿨 하고, 기분 좋고, 포근하고, 온유하고, 정감이 서리고, 친정식구 같고, 아가들이 생각하는 엄마와 아빠 같고, 편안하고 따스한 이름 그 이름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日 3월30일
<浸禮者 요한이 아님>
◎ 침례요한은 사가랴 엘리사벳의 아들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 와서 AD28년 갈릴리의 분 봉왕 헤롯에게 참수형(斬首刑)을 받고 죽었다.
◎ 사람들이 침례요한을 어떻게 생각 하였는가?
사람들은 요한이 약속하신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애는 겸비와 자기부정으로 특징을 이루었고 이기심이 없었다. 그의 가르침과 권면과 책망은 열렬하고 진지하면서도 대담 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환심이나 친찬을 받기위하여는 그의 사명에서 단 한치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세속적 명예나 권위를 원하지 않았으며 마음과 생애는 겸비하였고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명예를 자기의 것으로 주제넘게 떠맡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예언의 선물2권57)
◎ 침례요한은 구약에 사무엘과 같은 임무를 하였다
엘가나와 한나의 사이에서 한나의 무자(無子)함과, 엘리사벳과 사가랴사이의 침례요한의 성령의 잉태(孕胎)가 똑같고(삼상 1:11-20)
사무엘의 이후에 다윗에게 기름부음을 허락한 것과, 침례요한의 사역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역과 같은 맥락이다.
◎ 교훈: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그분을 침례자 요한과 혼동한 것은 단지 소문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한 자신은 분명하게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였다.
月 3월31일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다른 先知者가 아님>
◎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이스라엘의 고집 센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사벨의 두려움 없는 담대함으로 기별을 선포한 선지자이다.
◎ “아합의 시대에 요단강 동편 길르앗 산중에 신앙과 기도의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두려워할 줄 모르는 봉사는 이스라엘 중에 신속히 퍼지는 배도를 막도록 되어 있었다. 이름 있는 도시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평생 높은 지위를 차지한 일이 없는 디셉 사람 엘리야는 자기 앞에 길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의 사명에 임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신앙과 능력의 말씀이 그의 입술에 있었고 그의 전 생애는 개혁 사업에 바쳐졌다. 그는 죄를 책망하고 악의 조수를 물리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엘리야가 죄를 책망하는 사람으로서 백성들에게 나아갈 때에 그의 기별은 고침을 받고자 하는 죄로 병든 모든 영혼들에게 길르앗의 유향을 제공하였다.”(선지, 119)
◎ 눈물의 선지자 에례미아는 격렬한 국가적 소요와위기의 때에 등장하여 동족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기별을 전달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代價)를 지불한 선지자이다. (렘 20:1-2, 7-8)
◎ “요시야가 일으킨 개혁의 결과로 영구적인 영적 부흥이 있기를 바라던 사람들 중에는 요시야의 치세 제 13년에 아직 젊은 나이에 선지자의 직분을 맡도록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가 있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을 맡을 사람 중에 하나인 예레미야는 그가 모태로부터 “열방의 선지자”가 되도록 세움을 입었다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에 그는 자기의 무가치함에 대한 느낌으로 압도되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5, 6)고 부르짖었다.”(선지, 407)
◎ 선지자가 아닌 메시아로 믿음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이적을 보고 그가 다윗의 아들임을 진심으로 선언하였다. 벳새다에서 양식을 먹은 군중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하기를 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선지자로는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으나 그가 메시야라고는 믿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411).
◎ 교훈: 예수님을 고대의 영웅적인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 유쾌하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복음서에 묘사된 그분의 실체를 나타내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火 4월01일
<예수님의 身元에 대한 觀心이 繼續됨 - 1>
◎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가운데 시각장애인(視覺障碍人) 세분이 처음으로 코끼리를 만져보고 세 사람이 각각(各各) 다른 소감(所感)을 이야기 했다.
(첫째 사람) 코끼리의 다라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
(둘째 사람) 코끼리의 배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벽(壁)과 같다.
(셋째 사람) 코끼리의 코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뱀과 같다.
◎ 사람들이 지식을 얻는데 오감(五感)을 통해서 거의가 지식(知識)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얻는 지식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은 보는 것(시각(視覺))이다.
그러므로 오감(五感)의 느낌을 모두 본다(보다).로 이야기 한다.
① 촉각(觸覺))=만져 본다, ② 청각(聽覺))=들어 본다, ③ 후각(嗅覺)=냄새 맡아 본다. ④ 미각(味覺)맛본다.
⑤ 시각(視覺)= 눈으로 본다.
◎ <하나님을 만난 사람 욥의 이야기>
☞ 성경(聖經)중에서 의(義)로 운 사람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그것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의(義)로운 사람 “욥”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욥은 까닭 없이 사단의 가혹(苛酷)한 시험(試驗)에 들게 된다.
그것도 단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는 의로운 사람인데 말이다.
욥기 1장6절로부터 시작되는 가혹한 시련(試鍊)으로 “욥”은 순식간(瞬息間)에 온 가정이 파괴되고 재산과 재물과 10남매(男妹)의 자녀까지 몽땅 잃고, 욥기 2:1-13절까지의 비극(悲劇) 가운데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혹독(酷毒)한 시련중(試鍊中)에 있는 사람 “욥”에게 위로하여야 할 친구(親舊)들이 계속적인 방향이 다른 설교를 하고 있고, 가장 가까운 아내도 하나님을 욕(辱)하고 죽으라고(욥 2:9) 하며 욥의 곁을 떠나 같다.
이어서 이어지는 기-ㄴ 욥기서에서 욥은 갖은 방법으로 하나님께 질문(기도(祈禱))을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욥기 37장까지 가도록 일체의 응답(應答)이 없으시다.
그동안의 응답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무응답(無應答)을 이해(理解)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욥38:1절까지 “욥”에게 아무 응답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좋으신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시고 욥에 대해서 주야(晝夜)로 눈동자처럼 주시(注視)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의 대답은 욥에게 이상한 질문으로 시작하십니다.
(욥38:1-41)부터 (욥 41:34)까지는 "하나님"의 욥에게 하시는 질문(質問)들 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고통(苦痛)당하는 것을 얼마나 가슴 아프게 욥보다도 더 큰 고통으로 욥을 생산(生産)하고 계시는 것을 욥이나 우리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기를 (욥 42:2)에 3번째로 말씀하시기를 전능(全能)한 나와 다투는 “욥”아 정말 네가 나를(하나님을) 꾸짖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욥 38장 전(前)까지는 당치도 않는 열변(熱辯)으로 말을 하는 사람과, 그것을 합리적(合理的)이지 않고 불평불만(不平不滿)만을 말하는 것을 그냥 듣고 있는 쪽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고통(苦痛)스럽겠습니까?
욥기서 전체는 “욥”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 가운데에서 욥을 다시 낳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도 안 되는 말(기도(祈禱))을 다 할 때 까지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38장까지의 기-ㄴ 장(章)을 듣고만 계셨던 것입니다.
♡ (욥 42:2)에 욥은 "하나님"께서 못하시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욥 1:1)의 순전(純全)하고 정직한 욥이 (욥 42:2)에 이제야 하나님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욥 42:1)절의 "하나님"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심을(못 이루실 줄 없는 분임을) 욥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 욥은 깨달았다는 말과 함께 그토록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던 것을 이제는
(욥 42:5)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바늘귀 같은 작은 고통의 구멍에서 내가 나오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이로 인하여 (욥 42:11-17절)의 기록은 "하나님"의 축복이 기록 되었습니다 아멘
바늘귀 같은 작은 고통의 구멍에서 내가 나오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듣는 신앙(信仰)에서 금번의 교과를 통하여 우리는 업그레이드 된 신앙(信仰) 신앙으로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만나서 뵙는 큰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水 4월02일
<예수님의 身元에 대한 觀心이 繼續됨 - 2>
◎ 4복음서(福音書)에 나타난 예수님
<마태는 = 왕(王)으로>
마태는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妙思)(나타냈다)
마태복음은 원래 유대인을 위하여 쓰인 책이다.
예수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며 예수님의 왕손(王孫)계보(系譜)가 마태복음1장에 기록 되어 있으며, 마태복음5장-7장까지에 기록된 산상수훈(山上垂訓)에는 그의 왕국(王國)의 법률(法律)과 함께 성명(聲明)이 발표되어 있다.
<마가는 = 종(從)으로>
마가는 예수그리스도를 종으로 묘사(妙思)했다.
마가복음은 본래 로마인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며 여기에는 예수그리스도의 가계보(家系譜)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보통 종의 족보(族譜)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興味)를 갖지 않고 있는 이유는 로마인은 말씀보다 행동(行動)]에 관심(觀心)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 사람으로>
누가는 예수그리스도를 완전(完全)한 인간으로 제시했다.
누가복음은 헬라인을 위해 쓰여 진 것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세계(世系)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로 소급되어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누가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기도의 생활을 하시며 천사의 섬김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다.
<요한은 = 하나님으로>
요한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했다.
이 복음서는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요 20:31).
요한복음에 있는 모든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예증하며 드러내고 있다.
이 복음서의 첫 말씀은 “태초(太初)”로 소급하여 시작되고 있다.
◎ <옛날과 지금의 인간(人間) 형태(形態)>
예수님 당시에는 네 계급(階級)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곧 오늘날의 네 가지 형태의 인간을 대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
유대인들을 생각해보자 유대인은 특별한 교훈을 받아 구약 성경과 선지자들의 말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지상 생활은 곧 유대백성을 위해 기록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위해서 주님은 그들과 같은 백성중에서 난 사람이어야 했고 그들의 선생되는 사람은 구약에 말씀된 유대 풍습(風習)안에서 사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舊約聖經)을 완성키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또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구절을 거듭거듭 보게 되는 것이다.
☞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러한 형태의 그리스도인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언이 성취(成就)되었나 되지 않았나 하는 문제에 열중한다.
그 들은 선지자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열심히 탐구(探究)한다.
(로마인)
다음으로 그 당시 세계의 주인공이었던 로마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특히 로마인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로마인은 구약성경(舊約聖經)에 대하여는 아무 아무것도 아는바가 없었다. 그들은 또한 예언의 성취와 같은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 출현한 위대한 지도자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도자(指導者)는 비상한 권위와 권세를 소유한 사람이었으므로 로마인들은 이 예수님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 하였다. 로마인들은 마가가 한 것과 같은 직선적인 메시지를 좋아했다. 마가복음은 아름다운 문체 속에 기록되어 있으며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분명 마가복음은 그리스도의 사역(事役)에 관한 복음이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인은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실업인과 같은 유형의 인간이었다.
실업인은 왕의 족보(族譜)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다. 마가복음은 실업인의 복음이라고 하겠다.
(헬라인(그리스인))
누가복음은 헬라인 의사에 의하여 아름다움과 시(詩) 그리고 문화를 사랑하는 동족을 위하여 쓰여 진 책이다. 그 들은 커다란 이상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들의 취미는 퍽 까다로웠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생(生)에 관련된 감동적인 송가(頌歌)를 기록하고 있다.
이 복음서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의 인사말을 찾아볼 수 있으며.(눅 1:42-45) 도한 동정녀 어머니의 주를 찬양하는 노래도 볼 수 있다. (눅 1:46-55).
그리고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 함을 받아 다시 말을 하게 되었을 때 크게 찬송하며 예언 하였다. (눅 1:13-14).
구주(救主)의 탄생을 당해 천사들의ㅏ 합창이 울려 퍼지고(눅 2:13-14) 누가복음 2:20)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자의 찬송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의 헬라인들은 진리(眞理)를 행복의 목적으로 믿고 그것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학생(學生)들과 이상주의(理想主義)자들과 같은 형태의 인간들이라고 하겠다.
(모든 사람)
요한복음은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기록된 복음서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임무를 입증하는 비상한 주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요한 당시의 “모든 사람”은 곧 오늘날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대중(大衆)들과 같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 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의 선물을 받기 원하는 사람을 말한다.
木 4월03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요17:3)>
◎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말씀)
☞ 구약성경(舊約聖經)은 한 국가(國家) 히브리에 대하여, 신약성경(新約聖經)경은 인자(人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국가(國家)는 인자(人子)를 세상에 오게 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하여 건립(建立)되었고 양육(養育)되었다. (창 12;1-3).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이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셨다. (요 1:14, 14:9)
세상에서의 그의 출현(出現)은 전 인류역사의 중심사건(中心事件)이며 구약성경(舊約聖經)은 이것을 위한 바탕이 되는 무대(舞臺)이고 신약성경(新約聖經)은 이것을 묘사(描寫)한다.
한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완전(完全)한 생활을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사랑했고 친절하고 온유하셨으며 너그러웠고 동정에 찬분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하여 놀라운 이적(異蹟)을 행하여 그 들을 배불리 먹이셨고, 지친 사람들, 고통(苦痛)받는 사람들 그리고 상심(傷心)한 사람들의 무리가 그에게 왔을 때 그 들을 편히 쉬게 하셨다. (마11:28-30). 만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記錄) 한다면 세상에는 그 많은 책을 담아둘 곳이 없을 것이다. (요21: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罪)를 씻기 위하여, 인간의 구주(救主)가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 가셨다. 그 후(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살아 나셨고 오늘 지금도 살아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역사적(歷史的)인 인물(人物)이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살아 계신 분이시며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원동력(原動力)이 되는 분이시다. 그리고 또한 그에게로 오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永遠)한 생명을 약속(約束)하셨다.
성경(聖經)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와 인간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을 중심(中心)으로 기록(記錄)어 있다.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을 빌어 잉태(孕胎)하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심. (마 1:22-23)
병자(病者)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예언(豫言)된 메시야이심. (마 11:2-6)
다윗이 성령(聖靈)에 감동(感動)하여 주(主)라 칭(稱)한 이는 그리스도이심. (마 22:41-45)
예수께서도 자신(自身)을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심. (막 14:61-64)
제자(弟子) 도마도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불렀음. (요 20:26-28)
<焦點>
1. 예수님에 대하여 역사적(歷史的)인 인물(人物)로, 위대(偉大)한 성인군자(聖人君子)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을 그 분의 신원(身元)에 대하여 논쟁(論爭)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
2. 예수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는가가 참으로 중요하다.
1) 위대한 역사적인 성현군자(聖賢君子)의 인물로만 알고 거기서 멈춘 사람이냐.
2)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지금도 살아계시는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구세주이신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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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Ⅰ】“예수 그리스도”
<그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요?>
이 질문에 당신이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내세(來世)와 영원(永遠)의 삶이 좌우됩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당신의 생각으로는….
시대(時代)를 막론하고 최고의 인격(人格)을 갖춘 분은 누구일까요?
최고의 지도자(指導者)는?
최고의 선생(先生)은?
인류를 위해 가장 많은 선행(善行)을 베푼 사람은?
가장 거룩하게 살다 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세상 어느 곳, 어느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봐도 역사를 안다면 나사렛 예수님 같은 분은 없다고 인정할 것 입니다. 예수님만큼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분도 없으니까요.
예수님은 역사의 방향을 바꿔놓으셨습니다.
성경 말고도,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문은 대략 2000년 전 나사렛 예수께서가 살았었노라고 증명하고 있습니다. B. C.는 “Before Christ(그리스도 기원전),” A. D.는 “Anno Domini(그리스도 기원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탄생은 예언(豫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부터 성경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의 탄생을 예언하였습니다.
수많은 저자들이 1,500년이라는 방대한 세월을 거쳐 기록한 구약성경은 300여 개의 예언을 통해 예수의 오심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예언을 다 들어맞았습니다.(성취(成就)되었습니다.)
(그 분의 기적적인 탄생, 죄 없는 삶,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들, 그의 죽음과 부활까지도.
예수가 산 삶, 그가 행한 기적, 그가 한 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昇天))
이 모든 사실은 예수는 단지 인간(人間)이 아니요, 그 이상 이었다는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9)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삶과 메시지는 변화를 안겨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이 역사(歷史)에 미친 영향을 보면 그분의 삶과 메시지는 언제나 민족과 국가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닿은 곳에서는(있는 곳에는)
결혼의 신성함과 여성인권과 (인간의 차별이 없어졌고) 발언권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학교가 세워지고 아동보호법이 만들어지고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그 외에도 인류를 위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개인의 삶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이름난 군대장군(將軍)이든지, 정치가(政治家)이든지, 재벌가(財閥家)이든지, 끔직한 범죄자(犯罪者)이든지, 노사(勞使)간의 분쟁이나, 고부(姑婦)간의 갈등이나, 신분(身分)과 인종(人種)과 남녀노소(男女老少) 누구라도 변화(變化)가일어났고 그들의 이전의 삶보다 180도로 달라졌고 달라집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C. S.루이스는 수 년 동안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던 불가지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압도적인 증거를 연구한 후 예수님을 자신의 하나님과 구원자로 영접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당신께 어떤 분인가요?
이 질문에 당신이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내세(來世)와 영원(永遠)의 삶이 좌우(左右)됩니다.
타 종교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의 철학(哲學), 법칙(法則), 기준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타 종교들은 각 종교의 창시자(創始者)를 제외(除外)해도 종교의식(宗敎儀式)과 수양(修養)에 별 차이(差異)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基督敎)에서 예수님을 제외(除外)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거한 기독교는 인생철학(人生哲學)도 아니요,
도덕기준(道德基準)이나 종교의식에 대한 복종(僕從) 또한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부활(復活)하시고 살아계신 구세주(救世主)와 함께 생동감 있는 개인관계를 맺는 데에 있습니다.
부활(復活)하신 주님
(마 28:1-15, 막 16:1-11, 눅 24:1-12, 요 20:1-18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남의 무덤에 묻힌 후 3일 만에 부활하였습니다.
기독교의 독특성(獨特性)은 바로 이 부활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타당성(妥當性)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나사렛 예수의 부활의 증거에 근거(根據)합니다.
수세기 동안 부활의 증거를 연구한 뛰어난 학자들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것을 믿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하버드 법대에서 법적인 문제(legal issue)의 권위자인 시몬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한 부활의 증거를 검토한 후 "예수가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다면 성경의 저자들이 그처럼 계속적으로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국 역사학(歷史學)의 가장 뛰어난 지성 중의 한 명인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는 "나는 부활의 증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고 부활의 어떠한 증거도 아직까지 깨어진 적이 없다." 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이유
부활(復活)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핵심입니다. (고린도전서 15:1-19 참조)
부활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언(豫言)>
첫째, 예수님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예언했고 그의 죽음과 부활이 예언한대로 정확하게 일어났습니다(부활(復活). 하셨습니다). ( 누가복음 18:31-33), (고린도전서 15:1-19 부활 참조)
<빈 무덤>
둘째, 부활만이 빈 무덤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뉘여 졌던 무덤은 당시의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지켜졌고 거대한 둥근 돌로 봉해졌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주장한대로 예수님이 죽지 않고 단지 심신(心身)이 약해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무덤을 지키는 군인들과 큰 돌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거나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를 구해내지 못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적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지는 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결코 가져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 28:1-15, 막 16:1-11, 눅 24:1-12, 요 20:1-18 참조)
<개인적인 만남>
셋째, 부활만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을 설명해 줍니다.
예수는 부활한 후(後)에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10번 이상 나타났고 한 번은 5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이 환상이 아닌 것을 보여주셨는데 직접 사람들과 식사를 했으며 대화를 했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요한일서 1:1)
<교회(敎會)의 탄생(誕生)>
넷째, 부활만이 기독교 교회의 시작을 설명해 줍니다.
기독교 교회는 역사상 존재했던 조직이나 단체 중에서 가장 커다란 제도입니다.
초대교회의 첫 번째로 행해진 설교의 반 이상의 메시지가 부활과 관계된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2:14-36).
분명히, 초대교회는 부활이 자신들의 메시지의 핵심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적들은 언제든지 예수님의 몸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변화(變化)된 사람들>
다섯째, 부활만이 제자들의 변화된 생활에 대한 유일한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절망했으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1-11).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의 성령체험을 통하여 이전에 낙심하고 실망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분의 이름으로 제자들은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다른 사람들은 심하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용감한 행동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이 믿음은 죽음을 각오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폐륜(廢倫)아들도 희귀의 살인마(殺人魔)들도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주님>
예수의 부활 때문에 진정한 제자들은 단지 자신들의 종교의 죽은 창시자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과의 생생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시며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축복하시며 그들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십니다. 수 세기 동안 세상에 영향력을 미친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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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누구인가?
☞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하나님은 구원(救援)해 주신다.“구원자(救援者)”라는 뜻이며,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구세주(救世主)를 의미한다.
☞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예수님 탄생(誕生)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태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 16:15; 눅 9:20) 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 16:16)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마 16:17)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했다고 적혀 있다.
☞ 《요한복음서》에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敍述)되어 있다.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太初)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萬物)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生命)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4)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榮光)이었다.
그분에게는 은혜(恩惠)와 진리(眞理)가 충만(充滿)하였다.…
모세에게서는 율법(律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혜(恩惠)와 진리(眞理)를 받았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써 하나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
【생애】 예수는 어머니가 되는 동정녀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이 호구조사(戶口調査)의 등록(謄錄)을 하러 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예수가 태어나던 날 밤 천사(天使)가 목자(牧者)들 앞에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고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14) 라고 하나님을 찬양(讚揚)하였다.
예수 탄생(誕生)후 그 일가는 헤롯왕의 유아(幼兒)살해(殺害)를 피(避)하여 애급(이집트)로 여행하고, 헤롯이 죽은 후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나사렛에서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는데, 열두 살이 되던 해, 유월절(踰越節) 명절(名節)을 맞아, 해마다 그랬듯이 부모를 따라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예수는, 성전(聖殿)에서 학자(學者)들과 성경(聖經)에 관한 토론(討論)을 벌였다.
학자들은 예수의 지혜(智慧)와 그 대답에 경탄(敬歎)하고 있었는데, 그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던 부모를 보고 예수는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는 30세(歲)경 공생애를 시작하였다. 침례자(浸禮者) 요한에게서 침례(浸禮)를 받은 예수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廣野)에 나가 40주야(晝夜)의 금식(禁食)기도를 하면서 마귀(魔鬼)로부터 세 가지의 시험(試驗)을 받았다. 예수님은 성경(聖經)에 기록(記錄)된 말들을 인용, 마귀(魔鬼)의 유혹(誘惑)을 물리치고 광야(廣野)에서 머무른 후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容恕)와 사랑을 전파(傳播)하기 시작(始作)하였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福音書)는 예수의 봉사활동(奉仕活動)에 관한 똑같은 기록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예수의 발자취를 정확히 더듬는다든지, 그가 방문(訪問)한 지역(地域)을 차례대로 추적(追跡)하기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광야(廣野)에서 나와 베다니로 돌아갔는데, 여기서 첫 번째 제자를 얻어 그들과 함께 갈릴리로가, 가나의 혼인(婚姻)잔치에서 물을 포도주(葡萄酒)로 변화(變化)시키는 첫 기적(奇蹟)을 행하였다. 공생활에서의 최초의 유월절(踰越節)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거기서 성전(聖殿)안의 장사꾼들을 몰아내었다.
예수는 유월절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어느 날 밤 조용히 찾아온 바리세파 지도자(指導者)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條件)을 일러 주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중생(重生) 또는 거듭남의 교리(敎理)이다.
침례자(浸禮者)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유다 지방을 떠나 사마리아를 지나서 갈릴리로 향하였다. 도중에 사마리아 지방 사마리아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자기가 메시아임을 밝혔는데, 그녀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구세주(救世主)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내려간 예수는 그곳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신약의 복음을 전하며,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 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었다. 이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은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신들린 사람 ․간질병자 ․중풍병자들을 모두 그의 앞에 데려왔다. 예수는 그들도 모두 고쳐 주었다. 그러자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예수를 따랐다.
예수는 이 무렵 유명한 산상 설교를 하였으며, 또한 12제자를 선발하였다. 예수는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갔는데, 나사렛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낭독하였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사람들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예수는 예언자 엘리야가 동족(同族)인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이방의 어떤 과부에게로 보내졌다는 사실, 예언자 엘리사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는 고쳐주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알려, 그가 말하는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구원에 그치지 않고 전 인류의 구원이라는 뜻을 비쳤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산(山)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으나, 예수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갔다. 침례자 요한이 헤롯왕에게 살해된 사실을 안 후,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떠났는데, 그 길에 제자들에게 구세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말해주었다. 예수가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을 때 예수가 그들 앞에서 변모(變貌)하여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같이 눈부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 즉, 예수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계시 방법으로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예언자의 신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깨달았던 것이다. 그 후 예수는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가 설교도 하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곤 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지닌 권위에 놀란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인가의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예수는 요단강을 건너 뵈뢰아 지방으로 가,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동생 라사로를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었다. 이때 예수는 마리아의 자매 마르다 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復活)】 죽은 라사로를 예수가 살려냈다는 이야기가 전파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세파 사람들은 예수를 위험시하여 의회를 소집하고,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하며 의논하였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유월절(踰越節) 전날 목요일 밤에 예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들고, 그날 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였다. 겟세마네에서 잡힌 예수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선고받고, 이튿날 아침 십자가를 지고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며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 거기서 강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중죄인으로서 십자가 나무틀에 못 박혀 죽었다.
일요일 아침, 예수가 묻힌 무덤은 비어 있었다. 예수는 생전에 자신이 예언한 바와 같이 부활하였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제자들은 그 후 여러 곳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복음서들은 그 사실과 함께 그가 감람산(橄欖山)에서 승천(昇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재림(再臨)>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어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9-11)
“이것들을 증거(證據)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恩惠)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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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Ⅱ】“침례(浸禮)요한”
1. 빛을 기다리는 자(침례(浸禮)요한)
구약성경(舊約聖經)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서다.
말라기 마지막 장과 신약성경(新約聖經) 사이에는 약 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들어 있다.
그 시기에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와 같은 대제국들이 팔레스틴 지역을 지배하면서 유대사회에는 거대한 격변이 일어난다.
신약의 대부분의 주요 사상들이 이 시기에 형성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부활(復活)’이란 개념은 구약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개념(槪念)은 신구약중간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중심주제였다.
이스라엘은 원(願)하건 원(願)하지 않건 타(他) 문명을 접하면서 차츰 동화(同化)되어 갔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가 죽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했다.
고레스 왕은 점령지의 소수 민족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거주이전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聖殿)을 건축하겠다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과 본래 그 자리에 그대로 살고 있던 사람들 간의 갈등이었다.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계속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귀향 유대인이 성전을 재건축 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포로기 동안 그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주도권을 잡은 지주(地主)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제2차 성전이 BC 515년에 완성되었다(에6:15).
그 후로 역사는 흘러서 B. C. 333년에 알렉산더가 이스라엘을 점령한다.
알렉산더(Alexander)는 헬레니즘 문명을 가지고 세계 정복에 나섰다.
이때 이들은 또 한 번 그리스 문명에 깊숙이 젖어들어야 했다.
그리스 문화 중 하나를 소개한다면 운동경기를 들 수 있겠다.
그 시대의 경기장에는 남자들만 들어가서 관람할 수 있었다.
이는 남자들이 나체로 운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의 귀족 여인들이 남장을 하고 구경하다가 발각되어서 처형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경기장(gymnasium)이 예루살렘에도 세워졌고 유대 랍비들이 경기를 구경하러 갔다가 이방인(異邦人)들의 할례(割禮) 받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앞 다투어 할례의 흔적을 지우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하나는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시몬 베드로와 같은 이중 이름을 갖는 것이다.
시몬은 전형적인 히브리식 이름이고 베드로는 그리스어이다.
마치 우리가 미국에 가면 그레이스 리, 크리스티나 김 등으로 이름을 쓰듯이 그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랬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것들을 보전하기 위하여 갈등과 반목이 있었으나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헬라화 되어버렸다.
정통파 유대 랍비들은 자녀에게 헬라어를 가르치면 헬라화가 될 위험이 있다고 하며 반대했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국제화(國際化)시대에 적응하려면 반드시 그리스어를 배워야 한다면서 상반된 주장을 했다.
마치 이 시대에 영어를 못하면 어려움을 느끼듯이, 그 시대는 헬라어가 그러했다.
유대인들은 앞다투어가며 자녀들에게 헬라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종파(宗派)가 등장한다. 가장 먼저 생긴 종파는 바리새파다(B. C. 100).
바리새파는 상당히 전통적인 삶을 추구한 사람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부활(復活)을 믿고, 내세(來世)를 지향했지만 여전히 과거 중심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어서 사두개파가 생겼다.
그들은 현실(現實) 중심적인 사람들이며 기득권층이었고 귀족이었다.
그리고 열심당원이 있었는데, 이들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고자 했다.
쿰란 종파(宗派)는 바리새파의 일부로서 사해 근방으로 도망(逃亡)가서 살면서 묵시문학적이고 종말론적(終末論的)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다.
금식(禁食)하며, 결혼(結婚)도 하지 않으며, 사유재산(私有財産)도 없이 산 계층(階層)이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빛의 자녀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특권의식이 있었고 비현실적(非現實的)이며 초월적(超越的)인 삶을 추구했다. 그 외(外)에도 여러 종파(宗派)가 있었다.
2. 빛을 증거(證據)하는 자(침례(浸禮)요한)
이러한 상황에서 침례요한이 나타나서 회개(悔改)를 외쳤다.
그에 대한 인상이 얼마나 깊었던지 예수가 승천하시고 한 참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은 요한을 마음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도 그곳의 신자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저자는 침례요한에게 있는 빛은 참 빛이 아니며, 다만 그 증거(證據)하는 등불이며, 없어져야 할 빛임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6-8절에서 저자는 침례요한과 예수를 대비(對比)시키되 빛을 화두로 삼았다.
저자는 침례요한을 소개하되,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났으니”라는 표현은 침례요한의 탄생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따른 것임을 알게 한다. 그의 사명은 세상에 비췬 유일한 참 빛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세상의 불의를 질책하며 침례를 받으러 나오는 자들을 회개로 이끌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에서 볼 때 그의 선포는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기 위한 것이며,
침례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회개(悔改)할 것 없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침례요한을 빛이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식은 ‘났으니’(εγενετο 에게네토)라는 말을 통해서 수정된다. 에게네토는 일반적으로 ‘난 것’, ‘된 것’, ‘지은 것’ 등의 의미로 쓰이며, 누군가에 의해서 발생한 것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침례요한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명을 받아서 태어난 자요, 참 빛이 아니며, 참 빛에 대해서 ‘증거하러 온 자’인 셈이다.
그에 비하여 예수그리스도는 태초에 계시는 선재(先在)하신 분이며, 사람처럼 ‘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오신 분이다.
7절은 침례요한의 직무를 말한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자(messenger)였다.
그는 아무런 이적(異蹟)도 행하지 않았지만 그의 독특한 생활과 가르침의 엄정함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빛에 대해서 증거하고,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어린양으로 믿게 하고자 했다.
예수에게 있는 빛은 참되다.
예수에게 있는 빛은 이제까지 발견할 수 없던 새로운 빛이며 그 빛이 사람을 구원(救援)한다.
그에 비하여 침례요한은 율법에 속한 자요, 참 빛을 증거(證據)하러 온 등불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 빛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공관복음에서는 침례요한에게 매우 큰 영예(榮譽)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저자는 그를 예수 앞에서 쇠(衰)해야 할 자요(3:30),
예수를 밝혀 주는 등불에 불과한 자요(1:8),
예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15절은 침례요한의 증거 내용이다.
그것은 예수를 목격(目擊)한 자의 진술이며,
예수의 선재(先在)성을 암시(暗示)하는 증언으로서 의미가 있다.
침례요한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저자는 그러한 침례요한의 입을 빌려서 그보다 우월(優越)하신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
예수는 침례요한보다 “앞선”(εμπροσθεν, 엠프로센)분이다. 전치사 ‘엠프로센’은 장소 혹은 시간에서 ‘전에’(before)를 나타낸다.
침례요한은 예수를 자기보다 먼저 계시는 분이라고 하며,
신분(身分)상의 우위(優位)를 부여하는 의미에서 앞섰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침례요한은 선지자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선지자가 증거 해 온 그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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