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과 제자도의 모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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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08-03-22 22:31 조회6,409회 댓글0건본문
제13과 제자도의 모본
3월 29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2분)
기억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연구범위: 마 14:14, 15:32, 20:34, 막 1:41, 눅 6:12-13, 16:19-31, 17:4-5, 18:9-14, 골. 1:14, 딤전 5:16.
학습 포인트: 제자들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께서는 소외된 계층, 우리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어떤 모본을 남겨주셨는가? 제자 훈련을 위하여 교회는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신 예수님의 생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번 한 기 동안 우리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그분께서 따르도록 택하신 사람들과, 그분의 제자 훈련, 그리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본과 교훈들도 살펴보았다. 우리는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을 그분으로부터 배웠다.
이번 기에 공부한 것들 중 몇 가지 주요한 부분들을 이번 주에 다시 한번 살펴보자.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제자인 우리의 사역에 기초를 이루어야 할 요소들 즉 그분께서 적극 강조하신 특성들과 개념들과 활동들을 재확인해 보자.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21세기 제자도의 모형이 될 수 있는 원리들을 찾아내어 적용하는 것이다.
핵심본문: 막 1:40-45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께서 보이신 동정심을 우리도 본받아야 함을 깨닫는다.
느끼기: 예수께서 소외된 자들에게 느끼셨던 동정심을 우리도 느낀다.
행하기: 모든 사람에게 보이신 예수님의 동정심을 나타내며 살아간다.
< 교과 개요 >
I. 예수님 - 동정심의 모본
A. 문둥병자의 간구에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셨는데, 이는 전 존재가 깊이 감응되었음을 뜻한다. 예수님의 어떤 행동이 이를 증명해 주는가?
B. 마가는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셨을 뿐 아니라, 그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사 깨끗케 하셨다고 기록한다. 참된 동정심에는 왜 행동이 따르게 되는가? 역으로 말해서, 왜 모든 행동은 사랑에서 나와야 하는가?
II. 제자도와 동정심
A.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우리도 누군가를 도울 때 예수님과 같은 자원하는 마음이 필요한가?
B. 예수께서 그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굳이 손을 대지 않으셔도 되었다. 멀리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례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손을 대신 일은 왜 그처럼 중요했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돕고자 할 때에 사랑의 마음으로 인간적인 접촉을 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III. 모본을 따름
A. 우리가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나타내거나 누군가로부터 동정을 받는 일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B. 우리가 남을 대할 때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은 왜 중요한가?
C. 어떻게 하면 우리의 동정심을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요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생애와 동정심을 본받는 것이다.
일요일(3월 23일)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동정심을 나타내셨다(참조 마 14:14, 15:32, 20:34, 막 1:41, 6:34, 눅 7:13). 헬라어로 ‘불쌍히 여기다’ 또는 ‘민망히 여기다’로 번역된 단어(스플랑크니조마이)는 사람의 전 존재가 깊이 감응된 상태를 가리킨다. 타락하여 딱딱해진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도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는데 하물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고통 받는 인간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더 깊은 아픔을 느끼셨겠는가?
1. 위에 열거된 참조 성경절들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무엇에 대하여 동정심을 느끼셨습니까? 그분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와 같은 동정심을 갖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마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마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막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막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눅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답: 예수께서는 인간의 가련한 모습들을 보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병든 자들, 배고픈 자들, 사별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자들을 보시고 가엾게 여기셨다.
예수께서는 동정심뿐 아니라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들은 그분께서 전에 문둥병자였던 시몬이 마리아를 멸시할 때 어떻게 대응하시는지를 보았다(눅 7:36-50). 예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궁극적인 용서의 모습을 보이셨다(눅 23:34). 베드로 또한 예수님의 특별한 용서를 경험했다. 그분께서 잡히시던 때에 베드로는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다. 또한 재판받으실 때에는 세 번이나 그분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동료 제자들 앞에서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요 21:9-17).
2. 우리는 그분의 제자로서, 또한 다른 이들을 제자로 삼는 자로서 얼마나 많이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야 합니까?(참조 눅 17:3-5, 엡 1:7, 4:32, 골 1:14).
눅17:3-5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답: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용서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용서를 베푸시기로 결심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제자로서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을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용서의 정신이 없으면…
“가장 불행한 결과로 이끌어 가는 죄는 바리새인의 특성인, 냉랭하고 비판적이고 용서를 모르는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신앙 경험에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도 거기에 계시지 않으신다. 즉, 그분의 임재의 빛이 거기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부지런히 활동하고 그리스도와 무관한 열성을 아무리 낸다 해도, 이 부족을 메울 수는 없다.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는 데 남다른 지각과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에 빠져 있는 각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신다”(산상보훈, 126).
<부가설명> 성경 신앙의 가장 중심 되는 자리에 용서가 있다. 하나님의 용서하는 사랑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이 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 안에서 얻은 새 생명의 생리이다. 용서하는 정신을 잃는 것이 사단에게 속아서 그의 궤계에 빠지는 것이다. “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0,11).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 새 생명의 나타내는 생태이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죄로 멸망해 가는 자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야 한다. 냉혹한 마음은 예수님의 정신과 배치(背馳)된다.
월요일(3월 24일) 배척당하고 소외된 자들
예수께서는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다. 계층간의 경계선은 남자와 여자, 종교적 지도계층과 평민들, 부자와 빈자, 바리새인과 세리 등과 같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어져 있었다. 특히 여자들은 집 안에서 한정된 역할만을 수행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1. 누가복음 16:19-31을 읽으십시오. 여기에는 계층간의 차별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부자들의 태도와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까?
눅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답: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호화로운 거실에서 좋은 상에서 음식을 먹었으나 나사로라는 거지는 그 집 대문에 누워 있었다. 아마도 부자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이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부자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지는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았다.
2. 누가복음 18:9-14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예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과 태도를 어떻게 바라보셨습니까?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답: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경건한 모습 뒤에 가려져 있는 위선과 교만과 이기심을 보셨다. 이 바리새인은 세리와 자신을 완전히 구별하여 차별하였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인하여 감사한다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회적 현상을 옹호하거나 동조하지 않으셨는데, 거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공개적으로 사회의 소외계층들과 교제하시고 가르치시며 그들을 대변해 주셨다. 사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봉사하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분께서는 상류계층의 사람들과도 접촉하셨지만 동시에 이방인들, 평판이 나쁜 여인들, 나환자들, 세리들, 귀신들린 자들, 로마인들, 여러 종류의 장애를 가진 자들, 가난한 자들 등 그 사회에서 여러 모로 소외된 자들을 위해 봉사하셨다.
다시 한 번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즉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한 그분의 목적을 고려해 볼 때, 그분께서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사명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외된 이들을 위해 봉사함
“봉사의 문은 어느 곳에나 열려 있다. 우리의 모든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부, 고아, 병자, 죽어가는 사람, 마음 아픈 사람, 낙심한 자, 무식한 자, 소외된 자들은 도처에 있다.
우리는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우리의 특별한 의무임을 느껴야 한다. 그대는 종교적 사물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잘 도와 줄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하라. 그대가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방문할 때, 그들의 세속적 복리에는 물론이요 그들의 영적 복리에도 흥미를 나타내라”(치료봉사, 152).
<부가설명> 죄가 주장하는 세상에서는 계급과 신분과 빈부와 인종간의 차별이 만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이 타파되고 통일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일이 완전히 없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정에 대하여 동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봉사하는 정신을 발휘하고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되어야 하는데, 연약에 싸인 우리들의 처지가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내부에서도 성격상으로 신분상으로 물질상으로 교육상으로 차별이 자행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론은 분명하지만 현실이 그 이론을 마음 놓고 실천할 수 있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우리는 이 말씀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상류계층의 사람들뿐 아니라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화요일(3월 25일) 다양성과 차별의 정신
어제 우리는 예수께서 억압당하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해 어떻게 봉사하셨는지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특히 민족적 혹은 인종적 다양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보고자 한다.
인종적 편견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여러 그룹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들 주변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문헌들에서 이러한 편견의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헬라인들은 비헬라인들을 야만인으로 보았다.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그 신앙의 깊이와 관계없이 이와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 출애굽기 12:38, 18:1, 민수기 12:1, 룻 1:16-17, 마 23:15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을 구성한 인종의 다양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출12:38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출18:1 모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으니라.
민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룻1:16,17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마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답: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당시에 ‘중다한 잡족’(출 12:38)이 함께 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족속들이 이스라엘의 혈통과 섞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순수한 단일민족이라고 자부할 수 없다. 특히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께서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고 모든 인류를 위해 대속의 보혈을 흘리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모든 민족적 편견을 버리고 아무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 구스 여자라고 기록된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 사람이었다.
“즉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않고 다른 민족의 여인을 선택한 것은 그 여자의 가족과 민족적 자존심에 모욕을 주는 처사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십보라는 교묘히 변장된 방법으로 멸시를 당하고 있었다.
‘구스여자’(민 12:1)로 불리웠지만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 사람이었으므로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 그 여자는 외모에 있어서 살빛이 다소 검은 점에서 히브리 사람들과 달랐다. 십보라는 비록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었으나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었다.”(부조 383)
이스라엘은 민족 형성 초기로부터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었다. 순수 혈통이라는 개념은 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서, 진화론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고(행 17:26), 우리는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다. 그리고 우리는 피부색, 국적, 인종, 종족, 종교와 관계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요 1:12).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즉 모든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인종적 혹은 민족적 우월성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더욱이 특정 집단에 대한 모든 편견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분의 제자들은 모든 문화와 사회마다 내재하는 인종적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결국 세상에는 구원받은 사람과 잃어버린바 된 사람 이렇게 두 부류만 있을 뿐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소개해 주어야 한다.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심
“창세기의 족보들은 아담과 하와 이후의 연속적인 세대들이 모두 이 첫 부모에게서 내려온 것임을 보여준다.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는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유전적, 혈통적 통일성을 이루게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행 17:26, 공동 번역)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이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왔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에게 구원이 준비되었다는 성경의 주장 속에서 우리 인류의 유기적 통일성에 관한 암시까지도 볼 수 있다(롬 5:12, 19; 고전 15:21, 22)”(기본교리 27, 82).
<부가설명>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한 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그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므로 여자가 한 사람 남자에게서 나온 것을 확인하게 하셨다. 그리고 두 사람을 결혼시키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인종은 다 순수한 아담의 후손들일 뿐이다. 죄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피부색깔을 다양하게 되도록 했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기후와 지리에 적응하면서 문화도 달라지고 먹는 것도 달라지면서 여러 인종이 된 것처럼 변질 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종이나 문화나 지역이나 빈부 때문에 인간 자체의 차별은 없어야 하는데, 사회 현실이 그렇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도 사람이라 이 원칙을 질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언제나 죽을 것인지.
교훈: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인종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모든 인종적 편견을 버려야 한다.
수요일(3월 26일) 교회
이번 기 내내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고 소외된 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제자를 만드는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이 일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일을 이행해야 하는가?
1. 다음 성경절들은 위의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줍니까?(행 20:28, 고전 12:14-22, 엡 4:11-13, 골 1:17-18).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고전12:14-22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엡4:11-13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답: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통로는 바로 그분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이다. 교회의 각 지체인 신자들은 자신이 받은 바 영적 은사를 최대한 활용함으로 제자를 삼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데,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도록 훈련하는 모든 과정을 ‘제자 훈련’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수님은 참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스승이셨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며 교육하고 양육하실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셨다. 그분은 또한 도움이 필요한 영혼들을 도우실 시간을 내셨다. 제자 훈련은 그분의 사역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며 훈련시키고 양육하는 일이 주요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그 일은 21세기의 모든 교회의 사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제안하는 바이다.
그러나 아무도 혼자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과업은 목사나 성경교사나 장로나 집사나 교회의 어떤 직원에게만 한정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제자들에게 이 일을 맡기셨으므로 그것은 모든 교인들의 임무이다. “너희는 가라”(마 28:19)고 하신 그분의 명령은 당신을 향한 것이다.
어떤 교인들은 훈련이 부족하여 이러한 개념을 불편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 그들도 훈련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훈련시키셔야만 했다. 이와 같이 모든 교회는 교인 각 사람에게 훈련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새 신자들은 각각 제자훈련반에 배치되어 훈련과 양육을 받아야 한다. 더 높은 훈련을 위해 상급반들이 개설되어야 하며, 모든 훈련받은 제자들은 주님을 위한 사역에 배치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는 사명을 주셨다. 이 명령은 변하지 않았으며, 이 과업은 교회를 통해 완수될 수 있다.
사람 낚는 어부로 활동하게 함
“왜 신자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더욱더 깊고, 열렬한 관심을 느끼지 않는가? 왜 두세 사람이 함께 만나 어떤 특별한 사람과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지 않는가? 우리의 교회들에서 봉사를 위한 단체들을 형성하도록 하자. 각기 다른 사람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활동하는 일에 연합하도록 하자. 그들은 세상의 부패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의 구원의 순결 안으로 영혼들을 모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교회증언, 7권, 21).
<부가설명>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교인들은 예수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몸이 건강하려면 지체들이 건강해야 한다. 세포 하나하나가 다 건강해야 한다. 교회인 몸이 건강하기 위하여 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건강해야 한다. 그것은 각 지체가 자기 위치에서 자기 직무에 충실할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받은 영적 은사가 있다. 그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능력있게 일 하셨던 것처럼 일을 이룰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교훈: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장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목요일(3월 27일) 기도의 중요성
1. 다음에 소개하는 엘렌 G. 화잇 선지자의 글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까?
답: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특히 그분의 기도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감지하고 하늘의 거룩한 섭리를 따라가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하늘의 대왕께서 당신의 지상봉사를 수행하실 때 그분은 수많은 기도를 당신의 아버지께 드리셨다. 그분은 자주 온 밤을 기도로 지새우셨다. … 감람산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기도하기 위해 즐겨 찾으신 장소였다. 때때로 군중들이 밤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각자의 집으로 떠나간 후에도 그분께서는 하루의 수고로 피곤하셨으나 쉬지 않으셨다. … 성읍이 정적에 잠겨 있고 제자들이 잠을 통하여 원기를 얻기 위해 그분을 떠나간 사이에도 예수께서는 주무시지 않으셨다. 당신의 제자들을 매일 세상에서 직면하는 악한 영향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당신 자신에게 닥쳐올 임무와 시련을 감당할 힘을 얻으시기 위해 탄원하는 그분의 거룩한 기도가 감람산으로부터 당신의 아버지께로 올라갔다. 당신의 제자들이 잠자고 있던 온 밤 동안 거룩한 스승께서는 기도하고 계셨다. 밤이슬과 서리가 기도하기 위해 숙인 그분의 머리 위에 내렸다. 그분의 모본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주어졌다(엘렌 G. 화잇,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167).
2. 다음 구절들을 읽으십시오. 이러한 기도들을 드리게 된 각각의 상황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사역을 수행할 때에 기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눅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허다한 무리가 모여올 때에 그분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눅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택하실 때 밤새 기도하셨다.
눅9:28-31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산에서 기도하셨다.
기도의 모본이신 예수님
“예수님 자신도 사람들 사이에 거하실 때에 자주 기도하셨다. 그분은 범사에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한 형제로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는 자(히 4:15)니 그분의 품성이 악을 물리치셨다. 그분께서는 죄악 세상에서 심령의 투쟁과 고민을 당하였다. 그분의 인성(人性)은 기도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기도가 특권이 되게 하였다.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와 교통하는 가운데서 위안과 기쁨을 얻었다. 인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께서 기도의 필요를 느끼셨다면 하물며 연약하고 죄가 많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은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할 필요를 느껴야 할 것인가?”(정로의 계단, 93).
<부가설명>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기도는 그리스도인 곧 거듭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호흡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의 호흡이 기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 숨을 쉬지 않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다. 걸음마다 호흡마다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생존하고 기도로 생활한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가 되어 살도록 하자.
교훈: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상 사역을 수행하시는 동안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중요한 단계마다 기도에 집중하셨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그 모본을 따르자.
금요일(3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55-259, 539-547, 681-683, 10권, 464-472, 시대의 소망, 제38장 ‘와서 잠간 쉬어라’(359-363), 제40장 ‘호수의 밤’(377-379), 411, 제46장 ‘예수께서 변화하심’(419-421), 제74장 ‘겟세마네’(685-693), 교육, 80, 259.
여기에 우리 교회가 제자도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제적인 일들이 있다.
1. 제자를 만드는 일을 교회의 첫째 목표로 정하라.
2.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과 방법을 공식화하라.
3. 각 프로그램의 지도자로 세울 사람들을 훈련시키라.
4. 모든 교인들을 제자훈련에 참여시키기 위해 동원하라.
5.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개설하라.
6. 교회 주변의 지역 주민들의 유형과 그들의 필요를 확인하라.
7. 장벽을 무너뜨리는 교량적인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지역 주민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그들과 친분을 맺으라.
8. 새 신자들의 역량을 활용할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그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더 깊은 헌신을 하게 하라.
9. 교인들, 특히 새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계발하라.
10. 제자들을 만들고 양육하기 위한 적절한 프로그램을 확대하라.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열거한 단계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십시오. 교회가 성공적인 제자훈련의 장이 되게 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중요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이 일을 어떻게 이행할 수 있을까요?
* 한인 교회들은 구성원이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 상당히 열악한 상태가 아닌지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을 하되 교인들이 하고자하는 마음으로 열성을 다해 참여해야 한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도록 호보하며 먼저 응하는 사람부터 시작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2. 목회자와 평신도로 하여금 제자의 사역이 모든 교인들의 일임을 깨우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지역 교회 단위에서 신자들의 은사와 달란트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교인 개인마다 가장 자연스럽게 참가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찾아서 아주 쉽게 그 몫을 담당하도록 인도하면서 은사를 계발하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 각각 생각하고 대답해보자.
3월 29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2분)
기억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연구범위: 마 14:14, 15:32, 20:34, 막 1:41, 눅 6:12-13, 16:19-31, 17:4-5, 18:9-14, 골. 1:14, 딤전 5:16.
학습 포인트: 제자들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께서는 소외된 계층, 우리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어떤 모본을 남겨주셨는가? 제자 훈련을 위하여 교회는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신 예수님의 생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번 한 기 동안 우리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그분께서 따르도록 택하신 사람들과, 그분의 제자 훈련, 그리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본과 교훈들도 살펴보았다. 우리는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을 그분으로부터 배웠다.
이번 기에 공부한 것들 중 몇 가지 주요한 부분들을 이번 주에 다시 한번 살펴보자.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제자인 우리의 사역에 기초를 이루어야 할 요소들 즉 그분께서 적극 강조하신 특성들과 개념들과 활동들을 재확인해 보자.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21세기 제자도의 모형이 될 수 있는 원리들을 찾아내어 적용하는 것이다.
핵심본문: 막 1:40-45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께서 보이신 동정심을 우리도 본받아야 함을 깨닫는다.
느끼기: 예수께서 소외된 자들에게 느끼셨던 동정심을 우리도 느낀다.
행하기: 모든 사람에게 보이신 예수님의 동정심을 나타내며 살아간다.
< 교과 개요 >
I. 예수님 - 동정심의 모본
A. 문둥병자의 간구에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셨는데, 이는 전 존재가 깊이 감응되었음을 뜻한다. 예수님의 어떤 행동이 이를 증명해 주는가?
B. 마가는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셨을 뿐 아니라, 그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사 깨끗케 하셨다고 기록한다. 참된 동정심에는 왜 행동이 따르게 되는가? 역으로 말해서, 왜 모든 행동은 사랑에서 나와야 하는가?
II. 제자도와 동정심
A.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우리도 누군가를 도울 때 예수님과 같은 자원하는 마음이 필요한가?
B. 예수께서 그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굳이 손을 대지 않으셔도 되었다. 멀리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례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손을 대신 일은 왜 그처럼 중요했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돕고자 할 때에 사랑의 마음으로 인간적인 접촉을 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III. 모본을 따름
A. 우리가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나타내거나 누군가로부터 동정을 받는 일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B. 우리가 남을 대할 때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은 왜 중요한가?
C. 어떻게 하면 우리의 동정심을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요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생애와 동정심을 본받는 것이다.
일요일(3월 23일)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동정심을 나타내셨다(참조 마 14:14, 15:32, 20:34, 막 1:41, 6:34, 눅 7:13). 헬라어로 ‘불쌍히 여기다’ 또는 ‘민망히 여기다’로 번역된 단어(스플랑크니조마이)는 사람의 전 존재가 깊이 감응된 상태를 가리킨다. 타락하여 딱딱해진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도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는데 하물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고통 받는 인간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더 깊은 아픔을 느끼셨겠는가?
1. 위에 열거된 참조 성경절들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무엇에 대하여 동정심을 느끼셨습니까? 그분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와 같은 동정심을 갖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마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마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막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막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눅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답: 예수께서는 인간의 가련한 모습들을 보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병든 자들, 배고픈 자들, 사별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자들을 보시고 가엾게 여기셨다.
예수께서는 동정심뿐 아니라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들은 그분께서 전에 문둥병자였던 시몬이 마리아를 멸시할 때 어떻게 대응하시는지를 보았다(눅 7:36-50). 예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궁극적인 용서의 모습을 보이셨다(눅 23:34). 베드로 또한 예수님의 특별한 용서를 경험했다. 그분께서 잡히시던 때에 베드로는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다. 또한 재판받으실 때에는 세 번이나 그분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동료 제자들 앞에서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요 21:9-17).
2. 우리는 그분의 제자로서, 또한 다른 이들을 제자로 삼는 자로서 얼마나 많이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야 합니까?(참조 눅 17:3-5, 엡 1:7, 4:32, 골 1:14).
눅17:3-5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답: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용서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용서를 베푸시기로 결심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제자로서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을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용서의 정신이 없으면…
“가장 불행한 결과로 이끌어 가는 죄는 바리새인의 특성인, 냉랭하고 비판적이고 용서를 모르는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신앙 경험에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도 거기에 계시지 않으신다. 즉, 그분의 임재의 빛이 거기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부지런히 활동하고 그리스도와 무관한 열성을 아무리 낸다 해도, 이 부족을 메울 수는 없다.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는 데 남다른 지각과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에 빠져 있는 각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신다”(산상보훈, 126).
<부가설명> 성경 신앙의 가장 중심 되는 자리에 용서가 있다. 하나님의 용서하는 사랑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이 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 안에서 얻은 새 생명의 생리이다. 용서하는 정신을 잃는 것이 사단에게 속아서 그의 궤계에 빠지는 것이다. “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0,11).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 새 생명의 나타내는 생태이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죄로 멸망해 가는 자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야 한다. 냉혹한 마음은 예수님의 정신과 배치(背馳)된다.
월요일(3월 24일) 배척당하고 소외된 자들
예수께서는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다. 계층간의 경계선은 남자와 여자, 종교적 지도계층과 평민들, 부자와 빈자, 바리새인과 세리 등과 같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어져 있었다. 특히 여자들은 집 안에서 한정된 역할만을 수행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1. 누가복음 16:19-31을 읽으십시오. 여기에는 계층간의 차별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부자들의 태도와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까?
눅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답: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호화로운 거실에서 좋은 상에서 음식을 먹었으나 나사로라는 거지는 그 집 대문에 누워 있었다. 아마도 부자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이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부자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지는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았다.
2. 누가복음 18:9-14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예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과 태도를 어떻게 바라보셨습니까?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답: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경건한 모습 뒤에 가려져 있는 위선과 교만과 이기심을 보셨다. 이 바리새인은 세리와 자신을 완전히 구별하여 차별하였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인하여 감사한다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회적 현상을 옹호하거나 동조하지 않으셨는데, 거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공개적으로 사회의 소외계층들과 교제하시고 가르치시며 그들을 대변해 주셨다. 사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봉사하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분께서는 상류계층의 사람들과도 접촉하셨지만 동시에 이방인들, 평판이 나쁜 여인들, 나환자들, 세리들, 귀신들린 자들, 로마인들, 여러 종류의 장애를 가진 자들, 가난한 자들 등 그 사회에서 여러 모로 소외된 자들을 위해 봉사하셨다.
다시 한 번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즉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한 그분의 목적을 고려해 볼 때, 그분께서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사명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외된 이들을 위해 봉사함
“봉사의 문은 어느 곳에나 열려 있다. 우리의 모든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부, 고아, 병자, 죽어가는 사람, 마음 아픈 사람, 낙심한 자, 무식한 자, 소외된 자들은 도처에 있다.
우리는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우리의 특별한 의무임을 느껴야 한다. 그대는 종교적 사물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잘 도와 줄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하라. 그대가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방문할 때, 그들의 세속적 복리에는 물론이요 그들의 영적 복리에도 흥미를 나타내라”(치료봉사, 152).
<부가설명> 죄가 주장하는 세상에서는 계급과 신분과 빈부와 인종간의 차별이 만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이 타파되고 통일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일이 완전히 없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정에 대하여 동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봉사하는 정신을 발휘하고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되어야 하는데, 연약에 싸인 우리들의 처지가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내부에서도 성격상으로 신분상으로 물질상으로 교육상으로 차별이 자행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론은 분명하지만 현실이 그 이론을 마음 놓고 실천할 수 있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우리는 이 말씀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상류계층의 사람들뿐 아니라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화요일(3월 25일) 다양성과 차별의 정신
어제 우리는 예수께서 억압당하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해 어떻게 봉사하셨는지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특히 민족적 혹은 인종적 다양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보고자 한다.
인종적 편견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여러 그룹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들 주변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문헌들에서 이러한 편견의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헬라인들은 비헬라인들을 야만인으로 보았다.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그 신앙의 깊이와 관계없이 이와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 출애굽기 12:38, 18:1, 민수기 12:1, 룻 1:16-17, 마 23:15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을 구성한 인종의 다양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출12:38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출18:1 모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으니라.
민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룻1:16,17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마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답: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당시에 ‘중다한 잡족’(출 12:38)이 함께 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족속들이 이스라엘의 혈통과 섞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순수한 단일민족이라고 자부할 수 없다. 특히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께서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고 모든 인류를 위해 대속의 보혈을 흘리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모든 민족적 편견을 버리고 아무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 구스 여자라고 기록된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 사람이었다.
“즉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않고 다른 민족의 여인을 선택한 것은 그 여자의 가족과 민족적 자존심에 모욕을 주는 처사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십보라는 교묘히 변장된 방법으로 멸시를 당하고 있었다.
‘구스여자’(민 12:1)로 불리웠지만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 사람이었으므로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 그 여자는 외모에 있어서 살빛이 다소 검은 점에서 히브리 사람들과 달랐다. 십보라는 비록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었으나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었다.”(부조 383)
이스라엘은 민족 형성 초기로부터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었다. 순수 혈통이라는 개념은 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서, 진화론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고(행 17:26), 우리는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다. 그리고 우리는 피부색, 국적, 인종, 종족, 종교와 관계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요 1:12).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즉 모든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인종적 혹은 민족적 우월성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더욱이 특정 집단에 대한 모든 편견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분의 제자들은 모든 문화와 사회마다 내재하는 인종적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결국 세상에는 구원받은 사람과 잃어버린바 된 사람 이렇게 두 부류만 있을 뿐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소개해 주어야 한다.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심
“창세기의 족보들은 아담과 하와 이후의 연속적인 세대들이 모두 이 첫 부모에게서 내려온 것임을 보여준다.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는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유전적, 혈통적 통일성을 이루게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행 17:26, 공동 번역)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이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왔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에게 구원이 준비되었다는 성경의 주장 속에서 우리 인류의 유기적 통일성에 관한 암시까지도 볼 수 있다(롬 5:12, 19; 고전 15:21, 22)”(기본교리 27, 82).
<부가설명>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한 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그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므로 여자가 한 사람 남자에게서 나온 것을 확인하게 하셨다. 그리고 두 사람을 결혼시키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인종은 다 순수한 아담의 후손들일 뿐이다. 죄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피부색깔을 다양하게 되도록 했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기후와 지리에 적응하면서 문화도 달라지고 먹는 것도 달라지면서 여러 인종이 된 것처럼 변질 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종이나 문화나 지역이나 빈부 때문에 인간 자체의 차별은 없어야 하는데, 사회 현실이 그렇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도 사람이라 이 원칙을 질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언제나 죽을 것인지.
교훈: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인종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모든 인종적 편견을 버려야 한다.
수요일(3월 26일) 교회
이번 기 내내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고 소외된 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제자를 만드는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이 일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일을 이행해야 하는가?
1. 다음 성경절들은 위의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줍니까?(행 20:28, 고전 12:14-22, 엡 4:11-13, 골 1:17-18).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고전12:14-22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엡4:11-13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답: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통로는 바로 그분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이다. 교회의 각 지체인 신자들은 자신이 받은 바 영적 은사를 최대한 활용함으로 제자를 삼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데,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도록 훈련하는 모든 과정을 ‘제자 훈련’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수님은 참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스승이셨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며 교육하고 양육하실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셨다. 그분은 또한 도움이 필요한 영혼들을 도우실 시간을 내셨다. 제자 훈련은 그분의 사역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며 훈련시키고 양육하는 일이 주요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그 일은 21세기의 모든 교회의 사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제안하는 바이다.
그러나 아무도 혼자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과업은 목사나 성경교사나 장로나 집사나 교회의 어떤 직원에게만 한정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제자들에게 이 일을 맡기셨으므로 그것은 모든 교인들의 임무이다. “너희는 가라”(마 28:19)고 하신 그분의 명령은 당신을 향한 것이다.
어떤 교인들은 훈련이 부족하여 이러한 개념을 불편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 그들도 훈련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훈련시키셔야만 했다. 이와 같이 모든 교회는 교인 각 사람에게 훈련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새 신자들은 각각 제자훈련반에 배치되어 훈련과 양육을 받아야 한다. 더 높은 훈련을 위해 상급반들이 개설되어야 하며, 모든 훈련받은 제자들은 주님을 위한 사역에 배치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는 사명을 주셨다. 이 명령은 변하지 않았으며, 이 과업은 교회를 통해 완수될 수 있다.
사람 낚는 어부로 활동하게 함
“왜 신자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더욱더 깊고, 열렬한 관심을 느끼지 않는가? 왜 두세 사람이 함께 만나 어떤 특별한 사람과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지 않는가? 우리의 교회들에서 봉사를 위한 단체들을 형성하도록 하자. 각기 다른 사람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활동하는 일에 연합하도록 하자. 그들은 세상의 부패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의 구원의 순결 안으로 영혼들을 모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교회증언, 7권, 21).
<부가설명>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교인들은 예수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몸이 건강하려면 지체들이 건강해야 한다. 세포 하나하나가 다 건강해야 한다. 교회인 몸이 건강하기 위하여 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건강해야 한다. 그것은 각 지체가 자기 위치에서 자기 직무에 충실할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받은 영적 은사가 있다. 그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능력있게 일 하셨던 것처럼 일을 이룰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교훈: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장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목요일(3월 27일) 기도의 중요성
1. 다음에 소개하는 엘렌 G. 화잇 선지자의 글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까?
답: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특히 그분의 기도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감지하고 하늘의 거룩한 섭리를 따라가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하늘의 대왕께서 당신의 지상봉사를 수행하실 때 그분은 수많은 기도를 당신의 아버지께 드리셨다. 그분은 자주 온 밤을 기도로 지새우셨다. … 감람산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기도하기 위해 즐겨 찾으신 장소였다. 때때로 군중들이 밤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각자의 집으로 떠나간 후에도 그분께서는 하루의 수고로 피곤하셨으나 쉬지 않으셨다. … 성읍이 정적에 잠겨 있고 제자들이 잠을 통하여 원기를 얻기 위해 그분을 떠나간 사이에도 예수께서는 주무시지 않으셨다. 당신의 제자들을 매일 세상에서 직면하는 악한 영향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당신 자신에게 닥쳐올 임무와 시련을 감당할 힘을 얻으시기 위해 탄원하는 그분의 거룩한 기도가 감람산으로부터 당신의 아버지께로 올라갔다. 당신의 제자들이 잠자고 있던 온 밤 동안 거룩한 스승께서는 기도하고 계셨다. 밤이슬과 서리가 기도하기 위해 숙인 그분의 머리 위에 내렸다. 그분의 모본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주어졌다(엘렌 G. 화잇,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167).
2. 다음 구절들을 읽으십시오. 이러한 기도들을 드리게 된 각각의 상황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사역을 수행할 때에 기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눅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허다한 무리가 모여올 때에 그분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눅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택하실 때 밤새 기도하셨다.
눅9:28-31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산에서 기도하셨다.
기도의 모본이신 예수님
“예수님 자신도 사람들 사이에 거하실 때에 자주 기도하셨다. 그분은 범사에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한 형제로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는 자(히 4:15)니 그분의 품성이 악을 물리치셨다. 그분께서는 죄악 세상에서 심령의 투쟁과 고민을 당하였다. 그분의 인성(人性)은 기도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기도가 특권이 되게 하였다.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와 교통하는 가운데서 위안과 기쁨을 얻었다. 인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께서 기도의 필요를 느끼셨다면 하물며 연약하고 죄가 많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은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할 필요를 느껴야 할 것인가?”(정로의 계단, 93).
<부가설명>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기도는 그리스도인 곧 거듭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호흡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의 호흡이 기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 숨을 쉬지 않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다. 걸음마다 호흡마다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생존하고 기도로 생활한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가 되어 살도록 하자.
교훈: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상 사역을 수행하시는 동안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중요한 단계마다 기도에 집중하셨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그 모본을 따르자.
금요일(3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55-259, 539-547, 681-683, 10권, 464-472, 시대의 소망, 제38장 ‘와서 잠간 쉬어라’(359-363), 제40장 ‘호수의 밤’(377-379), 411, 제46장 ‘예수께서 변화하심’(419-421), 제74장 ‘겟세마네’(685-693), 교육, 80, 259.
여기에 우리 교회가 제자도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제적인 일들이 있다.
1. 제자를 만드는 일을 교회의 첫째 목표로 정하라.
2.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과 방법을 공식화하라.
3. 각 프로그램의 지도자로 세울 사람들을 훈련시키라.
4. 모든 교인들을 제자훈련에 참여시키기 위해 동원하라.
5.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개설하라.
6. 교회 주변의 지역 주민들의 유형과 그들의 필요를 확인하라.
7. 장벽을 무너뜨리는 교량적인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지역 주민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그들과 친분을 맺으라.
8. 새 신자들의 역량을 활용할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그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더 깊은 헌신을 하게 하라.
9. 교인들, 특히 새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계발하라.
10. 제자들을 만들고 양육하기 위한 적절한 프로그램을 확대하라.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열거한 단계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십시오. 교회가 성공적인 제자훈련의 장이 되게 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중요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이 일을 어떻게 이행할 수 있을까요?
* 한인 교회들은 구성원이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 상당히 열악한 상태가 아닌지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을 하되 교인들이 하고자하는 마음으로 열성을 다해 참여해야 한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도록 호보하며 먼저 응하는 사람부터 시작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2. 목회자와 평신도로 하여금 제자의 사역이 모든 교인들의 일임을 깨우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지역 교회 단위에서 신자들의 은사와 달란트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교인 개인마다 가장 자연스럽게 참가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찾아서 아주 쉽게 그 몫을 담당하도록 인도하면서 은사를 계발하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 각각 생각하고 대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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