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과 제자가 될 뻔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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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08-02-27 20:25 조회5,841회 댓글0건본문
제 4과 제자가 될 뻔했던 사람들
1월 26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48분)
도입)
아프리카의 어느 학생을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장학금을 주어 공부시키려고 했다. 공부를 시켜서 장차 그곳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똑똑한 학생을 한 명 선발해서 초청장을 보냈다. 그에게서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가겠다고 하는 회답이 왔다. 그런데 그 회답이 있은 뒤 몇 년이 지나도 오지를 않아서 알아보니, 그 학생은 돌아가시지도 않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기다리느라고 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겨우 마흔인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기다리고 어느 세월에 공부를 하겠다는 것인가? 모름지기 좀 더 높은 차원에서 효도를 생각해야 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기억절: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1-62).
연구범위: 마 8:19-22, 19:16-26, 막 10:17-23, 눅 4:16-30, 18:18-30, 요 3:1-21.
중심 사상: 복음서에는 제자가 될 뻔 했던 사람들에 대해 어떤 기록이 있는가? 그들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제자도를 재확인하고, 믿음을 굳게 하며, 헌신을 새롭게 하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온통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원자보다 더 작은 미립자의 작용으로부터 공간과 시간의 본질과 같이 우리가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다.
이 모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들 중에서도 마음의 작용보다 더 측량하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들이 잘 알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삶에 영원한 영향을 미치게 될 중대한 결정을 순식간에 내려버리고 만다. 성경에서 인간의 마음에 관해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라고 말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제자가 될 뻔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마음에서 내려진 결정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1월 20일)
어떤 서기관
도입)
어느 날 공자에게 제자인 자공이 물었다. ‘이 사람이 배운 것이 있는데, 그 배운 것을 곧 실천해야 합니까? 아니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는 ‘그야 곧바로 실천해야지’라고 대답하였다. 조금 뒤에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와서 자공과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배운 바와 깨달은 바가 있는데 곧바로 실천할까요, 아니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실천할까요?’ ‘많이 생각해본 뒤에 실천하는 것이 좋다’ 라고 공자는 대답하였다. 그러자 옆에서 죽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이 공자 보고 “선생님, 누구에게는 즉시 실천하라 하시고, 누구에게는 좀 더 생각해보고 실천하라 하시니 어찌된 연유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물음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먼저 물어본 사람은 이미 생각을 많이 해보고 묻는 것이므로 이제는 실천만 하면 되지만, 뒤에 물어본 사람은 별반 생각도 안 해보고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이므로 좀 더 많이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아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당신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은 마다하시고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따르겠다는 제자에게는 무조건 따르라고 하셨다. 왜 누구에게는 따르라 하시고, 누구에게는 따르지 말라 하시는 것인가?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많은 시련을 겪은 연후에 결심하고 따르겠다고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허락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은 아무 생각 없이 이적만 보고 즉흥적으로 예수님을 좇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서기관의 뜻을 물리치신 것이다.
1. 마태복음 8:19-20을 읽으십시오(참조 눅 9:57-58). 이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원칙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까?
답:
여기에 예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지 않고 자원하여 그분께 나아온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열렬했는지 주목해 보라. 그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노라고 장담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이와 같은 공언을 하기는 쉽다(눅 22:33). 그러나 공언한 바를 지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55-61절).
2. 하나님을 신실히 따르겠노라고 담대히 약속했으나 오래지 않아서 그 서약을 깨뜨려버렸던 기억이 있습니까? 그러한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무엇입니까?
답:
흥미롭게도 예수님을 따르겠노라고 고백했던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교양 있는 엘리트 계급 중 하나인 서기관이었다. 서기관들은 “교양이 있고 교육을 받았으며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83). 예수께서 만나셨던 몇몇 서기관들은 대단히 고결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려 하기보다는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고 마침내 자원하여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 그분의 대답을 통해 우리는 이 서기관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둠으로써 세상적인 면에서 유익할 것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대답을 듣고 나서 그는 그러한 생각을 버렸어야 했다. 결국 이 서기관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미루어 볼 때 그가 떠나갔음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던 한 서기관은 순수하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떤 동기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가?
부가적용)
쉐인 클레어본의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는‘ 책에서 ’예수님은 노숙자였다’라고 주장한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서기관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노숙자였다. 현대에 우리나라에 늘어나는 노숙자는 아닐지라도,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노숙자라는 표현이 맞다. 그런데 서기관이라면 제법 안정성이 있고, 가정을 가진 중류층 이상은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좇겠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겁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실제로 거처가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시면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좇으려면 이런 유랑생활에 익숙해야만 한다. 어쩌면 서기관의 충동에 대하여 경계를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말을 하면 예수님을 좇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현대 그리스도인은 고생스러운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를 좇으라면 그 교회는 텅 빈 교회가 될지 모른다. 이런 위험한 설교를 감수하고 할 설교자도 드물다. 적당히 얼버무리든지 아니면 이런 구절은 설교를 하지 않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수님을 좇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이 처형당하자 비겁하게 뿔뿔이 흩어졌지만 대단한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좇은 사람들이었다.
월요일(1월 21일)
이름 없는 한 제자
도입)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아주 박절하게 대하신 분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장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요 복음 전하는 일은 산 자를 위한 것이라고 예수님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장례식은 이미 끝난 일을 두고 뒤치다꺼리 하는 것이다. 유해를 모시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복음 전하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생을 위하여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례와 복음, 이 두 가지의 문제를 놓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서 장례식을 치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죽은 자를 위하여 하는 일은 없다. 특히, 교회에서는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없다.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을 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렇듯 장례식이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간혹 장례식을 가리켜서 영결식이라고도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영결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영원히 결별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어디까지나 장례식일 뿐이다. 영결식이 아니라 장례식이다. 시신을 매장하는 예식이다. 그것밖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사실 이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의미가 없는 일이다. 묻으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그 주위에 있는 산 사람들이다. 애도하기 위해 모인 조문객들, 그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장례식이 필요한 것이다. 장례식이란 죽은 사람을 천국 보내려고 기도하고 예식을 치르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의 본문말씀 역시 죽은 자는 죽은 자요 중요한 것은 산자다. 산자의 생명을 인도하는 일이 먼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 마태복음 8:21-22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무슨 일이 전개되고 있습니까? 왜 예수께서는 먼저 가서 그 부친을 장사하기 원하는 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답:
어제 우리는 제자가 되기를 원했던 한 서기관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도 제자가 되기 원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 사람의 이름이나 그가 속한 계층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대답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부모를 정성스레 장사하는 일은 신성한 의무에 속하였는데, 이 사람의 요청은 먼저 부친을 장사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흔히 추측하는 것과는 달리, 그 젊은이의 부친은 죽었거나 위독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부친은 당시 건강했으며, 죽음은 막연한 미래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84). 만일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은 그렇게 대답했는가? 하나의 핑계였는가? 당시에는 대체로 죽은 사람을 당일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만약 그의 부친이 실제로 죽었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부친을 장사지내고 돌아와 제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대답은 그의 성격을 나타낸다. 어제 살펴본 그 서기관은 서두르고 충동적인 성향이 있는 반면에, 이 사람은 느리고 둔감하며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고 꾸물거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헌신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제자가 되는 일을 막연한 미래로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적당한 때가 오면 그 때 가서 제자가 되겠노라고 말했을지 모르지만, 만약 그가 바로 그 때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결코 헌신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역을 맡기시고 훈련시키는 일에 제한된 시간만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분산되지 않은 주의력과 전적인 헌신이 요구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교훈: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열정과 단호한 결단이 요구된다. 지금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일을 막연한 미래로 미루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
부가적용)
주님의 부르심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높다는 원칙을 이 말씀 속에서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리 쉬운 길이 아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훈련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걸어야할 길에 필요한 훈련이지 세상의 일을 좇도록 훈련하지 않는다. 세상의 일과 주의 일은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지 않다. 세상의 일은 자신에게 영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화를 누리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다. 자기 부모, 처자,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자신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제자가 되는 길은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며 그 길을 온전히 걷기 위해 여러 가지 시험과 갈등 속에서 여러 형태의 시도를 경험해 보기도 한다. 세상과 주의 일 사이에 얼마의 기간 동안 양다리를 걸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종국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기로 온전히 복종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이 시대 모든 주의 종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화요일(1월 22일)
젊은 부자 관원
도입)
성경은 기도에 대해 400번을 말하는데 돈에 대해서는 무려 2000번을 말한다. 공관복음서의 여섯 절 중 한 절이 물질에 관한 것이고 신약성경 의 38개의 비유 중에서 12개가 물질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그 만큼 기독교 신앙이 물질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는 반증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사람(누가복음 16:13에서는 ‘두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재물을 마치 하나님과 대응할 정도의 권세를 지닌 어떤 인격체로 취급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주인’, ‘섬기다’, ‘미워하다’, ‘사랑하다’라는 말들은 인격체에 주로 사용하는 말들이다. 그만큼 물질은 마치 인격체처럼 힘과 권력을 갖는다는 말이다. 리처드 포스터도 그의 책 (돈, 섹스 그리고 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언명하실 때에는 맘몬을 하나의 경쟁신(a rival god)으로 인격화시키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돈이란 어떤 비인격적인 교환의 매개물이 아니라는 것을 오해의 여지없이 밝히고 계신다. 돈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단지 그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만 좋거나 나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자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맘몬은 우리를 지배하려고 추구해 오는 하나의 힘인 것이다.(, 리처드 포스터 지음) 예수께서 부자법관에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은 이 두 신중에 선택해야 할 진정한 신의 선택을 요구받은 것이다.
1. 마가복음 10:17-23을 읽으십시오(비교, 마 19:16-26, 눅 18:18-30). 예수님의 제자가 될 뻔 했던 이 사람의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답:
오늘 교과에서 우리는 활달한 성격의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은밀히 찾아오거나 소심한 모습으로 오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주님께로 나아왔다. 마가는 그가 달려와서 주님 앞에 꿇어앉았다고 기록했다. 마가와 마태는 이 사람의 신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가는 그가 관원이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유대인 공회 의원이 아니었나 싶다. 한편 마태는 그를 청년이라고 했다. ‘젊은 부자 관원’이라는 호칭은 이 세 복음서의 묘사된 내용을 종합한 이름이다.
그는 주님께 아첨하는 듯한 말을 하면서 즉시 토론을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아첨에 귀 기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키시면서 곧바로 그가 던진 질문의 핵심으로 접근해 가셨다.
1.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롬 3:28, 갈 2:16)는 사실을 아시는 예수께서 왜 그에게 율법을 가리키셨을까요?
답: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청년의 대답에서 발견할 수 있다. 비록 그는 율법을 지켰으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직도 부족한 그것이 무엇입니까?”(참조 마 19:20)라고 물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외형적 또는 행위적으로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인 것 같으나 뭔가 더 필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청년의 대답을 통하여 우리는 그의 심령이 완전히 회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계명들을 제시하심으로써 참된 구원은 자아의 죽음을 포함하는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재물은 그의 우상이 되어 있었으며, 그의 보화는 하늘이 아닌 땅에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더욱 철저한 마음의 변화가 필요했다.
교훈: 젊은 부자 관원은 외형적으로 계명에 충실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재물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더욱 철저한 회심이 필요되었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맘몬을 비교하신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수사학적인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실체를 정확히 지적하셨다.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인격체인 맘몬이 서로 상충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또는 우리와 맘몬의 관계를 동일한 방법으로 묘사하셨다. 그것은 종과 주인의 관계다. 맘몬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신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즉 맘몬은 인격적인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비인격적인 물체 사이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능동적인 행위자 사이의 관계를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가 돈을 지혜롭게 사용하거나 정직하게 벌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애쓰는 힘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힘은 스스로 우리의 주인 행세를 하며 스스로 정해 놓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돈은 비록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본질적으로 그 내부에 영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돈은 우상숭배를 부추기는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고 인간은 돈을 신격화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돈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신성화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수요일(1월 23일)
니고데모
도입)
니고데모(뜻: 승리한 백성)는 정통 바리새인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인 유대 관원출신이다. 그는 아마도 침례요한의 설교를 통해 소개된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 어떤 영적인 끌림을 느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거듭남과 구원에 진리를 영접하게 된다.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해 볼 때 니고데모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외적인 의식을 엄밀히 지키는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어둔 밤을 골라 주님께 말씀드리러 온 것을 보면 니고데모는 적어도 처음에는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알려지는 것에 겁을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복음서에서 "밤에 등장하는 인물" 인 것 같다. 니고데모를 만나게 되는 때는 항상 밤이다. 첫 번째 니고데모가 방문한 것은 밤이었으며, 나중에 최고 평의회의 일원으로서 어느 누구도 재판을 받지 않고 판결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주님을 변호한 것도 밤이었다.
신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는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와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물었던 니고데모의 이야기이다.
1. 요한복음 3:1-21을 읽으십시오. 니고데모는 어떤 ‘일’에 관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까?
답:
흥미로운 사실은, 니고데모 자신이 실제로 성령의 감화를 받고 있음을 그의 말과 행동으로 분명히 드러내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성령의 사역에 관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 배우기 위해 왔으며, 그의 진실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2.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속에는 제자도에 관한 어떤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까?
답: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대답은 니고데모의 필요에 맞추어져 있고 요한복음의 주제와 온전히 부합될 뿐 아니라, 제자가 되기에 합당한 특성과 그렇지 못한 특성을 말해 준다. 육신의 출생과 유대 민족의 혈통을 이어받는 것만으로는 참된 제자가 되기에 충분치 않다. 제자도는 하늘의 영역과 연합하고 성령의 끊임없는 사역에 마음을 여는 거듭남을 전제로 한다. 니고데모가 이 모든 것을 오해했다는 것은 그가 단지 유대인으로 출생하고 어떤 가문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는 불충분함을 더 분명히 드러내 줄 뿐 아니라 제자도의 본질에 대하여 더욱 명확한 이해를 갖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다. 비록 니고데모는 즉시 제자가 되겠다고 공언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은밀한 제자로서 활동하였다. 그가 적어도 초기에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가 될 뻔한 사람들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그 후에 그는 변화되었다(요 19:39).
교훈: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도의 본질을 말해 준다.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부가적용)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거듭남의 비밀과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던 니고데모, 그는 한동안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18개월 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다. 바로 그 때 니고데모가 다시 등장한다. 그의 모습은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는가?(요 7:50-52)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왔다.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은 구약 시대 때 왕의 장례식에 사용되곤 했다. 아마도 니고데모는 이 행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고백한 듯하다. 니고데모, 처음 그의 신앙은 마치 상한 갈대와도 같았다. 그러나 후에는 백향목과 같은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으로 성장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그의 삶은 이전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목요일(1월 24일)
군중심리(群衆心理)
도입)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 영양은 아프리카에 산다. 이 양은 산 높은 곳에서 주로 풀을 뜯어먹으며 생활하는데, 가끔 산의 절벽 밑에서 많은 수의 스프링영양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그 이유를 살펴보면 참으로 단순하다. 스프링영양은 처음에는 평화롭게 행렬을 이루고 한 곳에서 풀을 뜯어먹지만, 앞쪽에 있던 양들이 풀을 먹어 버리면 곧이어 뒤쪽에 있는 양들이 풀을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그 대열이 앞쪽으로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한다. 뒤쪽의 양들이 점점 속력을 내어 앞으로 달려오기 때문에, 앞쪽에 있던 양들은 선두를 지키려고 더 빨리 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양들은 풀을 뜯어먹는 것보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우선하게 되어 정신없이 앞으로 달리게 된다. 결국 모든 양떼가 전속력으로 앞으로 달리다가 절벽까지 다다랐어도 멈추지 못하고 그 속도에 밀려 밑으로 떨어져 죽게 된다. 이 세상 사람들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세상에 변화를 주어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고, 두 번째 사람들은 변화하는 세상에 따라가기 바쁜 사람들이다. 마지막 세 번째 사람들은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지 없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군중심리를 믿을 수 없는 이유는 이와 같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날을 중심으로 본 시각 속에서 무리들은, 그것이 어떤 마음의 동기였던 간에 예수님의 편에 서기를 원했고, 그리고 그들의 입술을 벌려 예수님을 찬양했으며, 그리고 그것이 비록 제자들을 본 딴 모방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 행렬에 가담하고 있었던 많은 무리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돌변한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폭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이 되었다. 언제나 환경에 따라 돌변할 수 있는 것이 군중심리이고 우리가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 군중들의 심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구원은 개인의 문제이다. 우리는 단체로 구원받지 않으며, 집단적으로 하늘 왕국에 들어가지 않는다(참조 겔 14:20). 결국 우리 각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위가 아닌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답변해야 할 것이다(롬 14: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부분 고립된 채로 살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며, 인간이 타락하기 전(참조 창 3:6)에도 그러한 선악 간의 영향은 서로에게 미쳐졌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러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1. 누가복음 4:16-30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사람들은 왜 집단적으로 그렇게 행동했습니까? 무엇이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이들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습니까?
답:
비록 처음에는 이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이히 여겼으나 그 말씀이 한번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자 집단적으로 그분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만약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어떤 사람이 그들의 분노에 동조하지 않고 겸손히 책망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사람의 영향력이 다른 이들에게 미침으로 어떤 결과가 생겼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분노하였으며 그분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한 사람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미쳐서 급기야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산되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회당에 모인 그들이 그분을 죽이고자 하는 충동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만약 이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예수님의 책망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였더라면 그들은 비록 분노하였을지라도 회당 밖으로 나가버리는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이제 폭도로 변한 그들은 힘을 과시하면서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교훈: 인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한 감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도록 담대함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
부가적용)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요12:12).’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던 예수님에 대하여 명절에 온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서 인정하며 선지자의 기대를 갖고, 그분을 선지자로 믿으며, 예수님 편에 서서 제자들과 더불어 같이 예수님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 무리들의 얼굴은 닷새 후에 완전히 돌변하여 변신하였다. ‘바라바를 놓으소서 십자가에 저를 못 박으소서.’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그 당시에 지도자들의 충동에 의해서 움직여, 예수님을 못 박는 일에 앞장서는 무리들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이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군중들의 얼굴이다. 우리는 집단적 신앙의 위험성을 보게 된다. 군중 심리의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니까, 제자들도 그렇게 하니까, 함께 덩달아 찬양을 하고, 덩달아 주님을 환영했지만, 그것은 개인적 확신에 입각한 행동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개인적 신앙의 추구를 통해서 얻어진 결론에 근거한 신앙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금요일(1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82-284, 405-409, 603-607, 10권, 525-534. 시대의 소망, 제17장 ‘니고데모’(167-177), 제35장 ‘잠잠하라 고요하라’(333-341), 제57장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518-523).
“병적인 경건과 왜곡된 원칙의 시대에 생활과 행습에 있어서 개심한 사람들은 건강하고 감화적인 영성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대로 진리를 알고 있는 이들은 지금 일선으로 나가야 한다.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이것을 요구하신다. 그대의 모든 감화는 올바른 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지금 모든 사람은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굳건히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엘렌 G. 화잇, 의료봉사, 22).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리스도를 공공연히 승인하지는 않았으면서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그리스도를 멸하려는 제사장들의 음모에 대해서는 거듭 반대했었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니고데모는 감람산에서의 밤중의 회견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고 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깨달았다”(사도행적, 10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군중 속에서 감정에 이끌려 군중심리에 휩싸였다가 나중에 후회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그러한 경험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배웠습니까? 그와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2. 이번 주에 공부한 제자가 될 뻔 했던 사람들은 니고데모를 제외하고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헌신하지 못한 이 사람들의 핑계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1월 26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48분)
도입)
아프리카의 어느 학생을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장학금을 주어 공부시키려고 했다. 공부를 시켜서 장차 그곳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똑똑한 학생을 한 명 선발해서 초청장을 보냈다. 그에게서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가겠다고 하는 회답이 왔다. 그런데 그 회답이 있은 뒤 몇 년이 지나도 오지를 않아서 알아보니, 그 학생은 돌아가시지도 않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기다리느라고 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겨우 마흔인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기다리고 어느 세월에 공부를 하겠다는 것인가? 모름지기 좀 더 높은 차원에서 효도를 생각해야 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기억절: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1-62).
연구범위: 마 8:19-22, 19:16-26, 막 10:17-23, 눅 4:16-30, 18:18-30, 요 3:1-21.
중심 사상: 복음서에는 제자가 될 뻔 했던 사람들에 대해 어떤 기록이 있는가? 그들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제자도를 재확인하고, 믿음을 굳게 하며, 헌신을 새롭게 하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온통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원자보다 더 작은 미립자의 작용으로부터 공간과 시간의 본질과 같이 우리가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다.
이 모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들 중에서도 마음의 작용보다 더 측량하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들이 잘 알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삶에 영원한 영향을 미치게 될 중대한 결정을 순식간에 내려버리고 만다. 성경에서 인간의 마음에 관해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라고 말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제자가 될 뻔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마음에서 내려진 결정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1월 20일)
어떤 서기관
도입)
어느 날 공자에게 제자인 자공이 물었다. ‘이 사람이 배운 것이 있는데, 그 배운 것을 곧 실천해야 합니까? 아니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는 ‘그야 곧바로 실천해야지’라고 대답하였다. 조금 뒤에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와서 자공과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배운 바와 깨달은 바가 있는데 곧바로 실천할까요, 아니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실천할까요?’ ‘많이 생각해본 뒤에 실천하는 것이 좋다’ 라고 공자는 대답하였다. 그러자 옆에서 죽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이 공자 보고 “선생님, 누구에게는 즉시 실천하라 하시고, 누구에게는 좀 더 생각해보고 실천하라 하시니 어찌된 연유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물음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먼저 물어본 사람은 이미 생각을 많이 해보고 묻는 것이므로 이제는 실천만 하면 되지만, 뒤에 물어본 사람은 별반 생각도 안 해보고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이므로 좀 더 많이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아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당신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은 마다하시고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따르겠다는 제자에게는 무조건 따르라고 하셨다. 왜 누구에게는 따르라 하시고, 누구에게는 따르지 말라 하시는 것인가?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많은 시련을 겪은 연후에 결심하고 따르겠다고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허락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은 아무 생각 없이 이적만 보고 즉흥적으로 예수님을 좇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서기관의 뜻을 물리치신 것이다.
1. 마태복음 8:19-20을 읽으십시오(참조 눅 9:57-58). 이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원칙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까?
답:
여기에 예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지 않고 자원하여 그분께 나아온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열렬했는지 주목해 보라. 그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노라고 장담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이와 같은 공언을 하기는 쉽다(눅 22:33). 그러나 공언한 바를 지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55-61절).
2. 하나님을 신실히 따르겠노라고 담대히 약속했으나 오래지 않아서 그 서약을 깨뜨려버렸던 기억이 있습니까? 그러한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무엇입니까?
답:
흥미롭게도 예수님을 따르겠노라고 고백했던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교양 있는 엘리트 계급 중 하나인 서기관이었다. 서기관들은 “교양이 있고 교육을 받았으며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83). 예수께서 만나셨던 몇몇 서기관들은 대단히 고결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려 하기보다는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고 마침내 자원하여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 그분의 대답을 통해 우리는 이 서기관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둠으로써 세상적인 면에서 유익할 것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대답을 듣고 나서 그는 그러한 생각을 버렸어야 했다. 결국 이 서기관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미루어 볼 때 그가 떠나갔음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던 한 서기관은 순수하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떤 동기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가?
부가적용)
쉐인 클레어본의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는‘ 책에서 ’예수님은 노숙자였다’라고 주장한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서기관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노숙자였다. 현대에 우리나라에 늘어나는 노숙자는 아닐지라도,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노숙자라는 표현이 맞다. 그런데 서기관이라면 제법 안정성이 있고, 가정을 가진 중류층 이상은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좇겠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겁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실제로 거처가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시면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좇으려면 이런 유랑생활에 익숙해야만 한다. 어쩌면 서기관의 충동에 대하여 경계를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말을 하면 예수님을 좇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현대 그리스도인은 고생스러운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를 좇으라면 그 교회는 텅 빈 교회가 될지 모른다. 이런 위험한 설교를 감수하고 할 설교자도 드물다. 적당히 얼버무리든지 아니면 이런 구절은 설교를 하지 않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수님을 좇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이 처형당하자 비겁하게 뿔뿔이 흩어졌지만 대단한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좇은 사람들이었다.
월요일(1월 21일)
이름 없는 한 제자
도입)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아주 박절하게 대하신 분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장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요 복음 전하는 일은 산 자를 위한 것이라고 예수님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장례식은 이미 끝난 일을 두고 뒤치다꺼리 하는 것이다. 유해를 모시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복음 전하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생을 위하여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례와 복음, 이 두 가지의 문제를 놓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서 장례식을 치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죽은 자를 위하여 하는 일은 없다. 특히, 교회에서는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없다.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을 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렇듯 장례식이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간혹 장례식을 가리켜서 영결식이라고도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영결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영원히 결별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어디까지나 장례식일 뿐이다. 영결식이 아니라 장례식이다. 시신을 매장하는 예식이다. 그것밖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사실 이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의미가 없는 일이다. 묻으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그 주위에 있는 산 사람들이다. 애도하기 위해 모인 조문객들, 그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장례식이 필요한 것이다. 장례식이란 죽은 사람을 천국 보내려고 기도하고 예식을 치르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의 본문말씀 역시 죽은 자는 죽은 자요 중요한 것은 산자다. 산자의 생명을 인도하는 일이 먼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 마태복음 8:21-22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무슨 일이 전개되고 있습니까? 왜 예수께서는 먼저 가서 그 부친을 장사하기 원하는 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답:
어제 우리는 제자가 되기를 원했던 한 서기관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도 제자가 되기 원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 사람의 이름이나 그가 속한 계층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대답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부모를 정성스레 장사하는 일은 신성한 의무에 속하였는데, 이 사람의 요청은 먼저 부친을 장사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흔히 추측하는 것과는 달리, 그 젊은이의 부친은 죽었거나 위독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부친은 당시 건강했으며, 죽음은 막연한 미래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84). 만일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은 그렇게 대답했는가? 하나의 핑계였는가? 당시에는 대체로 죽은 사람을 당일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만약 그의 부친이 실제로 죽었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부친을 장사지내고 돌아와 제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대답은 그의 성격을 나타낸다. 어제 살펴본 그 서기관은 서두르고 충동적인 성향이 있는 반면에, 이 사람은 느리고 둔감하며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고 꾸물거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헌신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제자가 되는 일을 막연한 미래로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적당한 때가 오면 그 때 가서 제자가 되겠노라고 말했을지 모르지만, 만약 그가 바로 그 때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결코 헌신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역을 맡기시고 훈련시키는 일에 제한된 시간만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분산되지 않은 주의력과 전적인 헌신이 요구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교훈: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열정과 단호한 결단이 요구된다. 지금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일을 막연한 미래로 미루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
부가적용)
주님의 부르심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높다는 원칙을 이 말씀 속에서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리 쉬운 길이 아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훈련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걸어야할 길에 필요한 훈련이지 세상의 일을 좇도록 훈련하지 않는다. 세상의 일과 주의 일은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지 않다. 세상의 일은 자신에게 영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화를 누리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다. 자기 부모, 처자,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자신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제자가 되는 길은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며 그 길을 온전히 걷기 위해 여러 가지 시험과 갈등 속에서 여러 형태의 시도를 경험해 보기도 한다. 세상과 주의 일 사이에 얼마의 기간 동안 양다리를 걸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종국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기로 온전히 복종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이 시대 모든 주의 종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화요일(1월 22일)
젊은 부자 관원
도입)
성경은 기도에 대해 400번을 말하는데 돈에 대해서는 무려 2000번을 말한다. 공관복음서의 여섯 절 중 한 절이 물질에 관한 것이고 신약성경 의 38개의 비유 중에서 12개가 물질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그 만큼 기독교 신앙이 물질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는 반증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사람(누가복음 16:13에서는 ‘두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재물을 마치 하나님과 대응할 정도의 권세를 지닌 어떤 인격체로 취급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주인’, ‘섬기다’, ‘미워하다’, ‘사랑하다’라는 말들은 인격체에 주로 사용하는 말들이다. 그만큼 물질은 마치 인격체처럼 힘과 권력을 갖는다는 말이다. 리처드 포스터도 그의 책 (돈, 섹스 그리고 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언명하실 때에는 맘몬을 하나의 경쟁신(a rival god)으로 인격화시키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돈이란 어떤 비인격적인 교환의 매개물이 아니라는 것을 오해의 여지없이 밝히고 계신다. 돈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단지 그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만 좋거나 나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자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맘몬은 우리를 지배하려고 추구해 오는 하나의 힘인 것이다.(, 리처드 포스터 지음) 예수께서 부자법관에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은 이 두 신중에 선택해야 할 진정한 신의 선택을 요구받은 것이다.
1. 마가복음 10:17-23을 읽으십시오(비교, 마 19:16-26, 눅 18:18-30). 예수님의 제자가 될 뻔 했던 이 사람의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답:
오늘 교과에서 우리는 활달한 성격의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은밀히 찾아오거나 소심한 모습으로 오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주님께로 나아왔다. 마가는 그가 달려와서 주님 앞에 꿇어앉았다고 기록했다. 마가와 마태는 이 사람의 신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가는 그가 관원이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유대인 공회 의원이 아니었나 싶다. 한편 마태는 그를 청년이라고 했다. ‘젊은 부자 관원’이라는 호칭은 이 세 복음서의 묘사된 내용을 종합한 이름이다.
그는 주님께 아첨하는 듯한 말을 하면서 즉시 토론을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아첨에 귀 기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키시면서 곧바로 그가 던진 질문의 핵심으로 접근해 가셨다.
1.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롬 3:28, 갈 2:16)는 사실을 아시는 예수께서 왜 그에게 율법을 가리키셨을까요?
답: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청년의 대답에서 발견할 수 있다. 비록 그는 율법을 지켰으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직도 부족한 그것이 무엇입니까?”(참조 마 19:20)라고 물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외형적 또는 행위적으로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인 것 같으나 뭔가 더 필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청년의 대답을 통하여 우리는 그의 심령이 완전히 회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계명들을 제시하심으로써 참된 구원은 자아의 죽음을 포함하는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재물은 그의 우상이 되어 있었으며, 그의 보화는 하늘이 아닌 땅에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더욱 철저한 마음의 변화가 필요했다.
교훈: 젊은 부자 관원은 외형적으로 계명에 충실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재물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더욱 철저한 회심이 필요되었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맘몬을 비교하신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수사학적인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실체를 정확히 지적하셨다.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인격체인 맘몬이 서로 상충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또는 우리와 맘몬의 관계를 동일한 방법으로 묘사하셨다. 그것은 종과 주인의 관계다. 맘몬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신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즉 맘몬은 인격적인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비인격적인 물체 사이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능동적인 행위자 사이의 관계를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가 돈을 지혜롭게 사용하거나 정직하게 벌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애쓰는 힘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힘은 스스로 우리의 주인 행세를 하며 스스로 정해 놓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돈은 비록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본질적으로 그 내부에 영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돈은 우상숭배를 부추기는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고 인간은 돈을 신격화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돈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신성화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수요일(1월 23일)
니고데모
도입)
니고데모(뜻: 승리한 백성)는 정통 바리새인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인 유대 관원출신이다. 그는 아마도 침례요한의 설교를 통해 소개된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 어떤 영적인 끌림을 느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거듭남과 구원에 진리를 영접하게 된다.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해 볼 때 니고데모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외적인 의식을 엄밀히 지키는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어둔 밤을 골라 주님께 말씀드리러 온 것을 보면 니고데모는 적어도 처음에는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알려지는 것에 겁을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복음서에서 "밤에 등장하는 인물" 인 것 같다. 니고데모를 만나게 되는 때는 항상 밤이다. 첫 번째 니고데모가 방문한 것은 밤이었으며, 나중에 최고 평의회의 일원으로서 어느 누구도 재판을 받지 않고 판결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주님을 변호한 것도 밤이었다.
신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는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와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물었던 니고데모의 이야기이다.
1. 요한복음 3:1-21을 읽으십시오. 니고데모는 어떤 ‘일’에 관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까?
답:
흥미로운 사실은, 니고데모 자신이 실제로 성령의 감화를 받고 있음을 그의 말과 행동으로 분명히 드러내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성령의 사역에 관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 배우기 위해 왔으며, 그의 진실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2.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속에는 제자도에 관한 어떤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까?
답: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대답은 니고데모의 필요에 맞추어져 있고 요한복음의 주제와 온전히 부합될 뿐 아니라, 제자가 되기에 합당한 특성과 그렇지 못한 특성을 말해 준다. 육신의 출생과 유대 민족의 혈통을 이어받는 것만으로는 참된 제자가 되기에 충분치 않다. 제자도는 하늘의 영역과 연합하고 성령의 끊임없는 사역에 마음을 여는 거듭남을 전제로 한다. 니고데모가 이 모든 것을 오해했다는 것은 그가 단지 유대인으로 출생하고 어떤 가문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는 불충분함을 더 분명히 드러내 줄 뿐 아니라 제자도의 본질에 대하여 더욱 명확한 이해를 갖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다. 비록 니고데모는 즉시 제자가 되겠다고 공언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은밀한 제자로서 활동하였다. 그가 적어도 초기에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가 될 뻔한 사람들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그 후에 그는 변화되었다(요 19:39).
교훈: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도의 본질을 말해 준다.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부가적용)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거듭남의 비밀과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던 니고데모, 그는 한동안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18개월 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다. 바로 그 때 니고데모가 다시 등장한다. 그의 모습은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는가?(요 7:50-52)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왔다.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은 구약 시대 때 왕의 장례식에 사용되곤 했다. 아마도 니고데모는 이 행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고백한 듯하다. 니고데모, 처음 그의 신앙은 마치 상한 갈대와도 같았다. 그러나 후에는 백향목과 같은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으로 성장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그의 삶은 이전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목요일(1월 24일)
군중심리(群衆心理)
도입)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 영양은 아프리카에 산다. 이 양은 산 높은 곳에서 주로 풀을 뜯어먹으며 생활하는데, 가끔 산의 절벽 밑에서 많은 수의 스프링영양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그 이유를 살펴보면 참으로 단순하다. 스프링영양은 처음에는 평화롭게 행렬을 이루고 한 곳에서 풀을 뜯어먹지만, 앞쪽에 있던 양들이 풀을 먹어 버리면 곧이어 뒤쪽에 있는 양들이 풀을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그 대열이 앞쪽으로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한다. 뒤쪽의 양들이 점점 속력을 내어 앞으로 달려오기 때문에, 앞쪽에 있던 양들은 선두를 지키려고 더 빨리 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양들은 풀을 뜯어먹는 것보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우선하게 되어 정신없이 앞으로 달리게 된다. 결국 모든 양떼가 전속력으로 앞으로 달리다가 절벽까지 다다랐어도 멈추지 못하고 그 속도에 밀려 밑으로 떨어져 죽게 된다. 이 세상 사람들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세상에 변화를 주어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고, 두 번째 사람들은 변화하는 세상에 따라가기 바쁜 사람들이다. 마지막 세 번째 사람들은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지 없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군중심리를 믿을 수 없는 이유는 이와 같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날을 중심으로 본 시각 속에서 무리들은, 그것이 어떤 마음의 동기였던 간에 예수님의 편에 서기를 원했고, 그리고 그들의 입술을 벌려 예수님을 찬양했으며, 그리고 그것이 비록 제자들을 본 딴 모방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 행렬에 가담하고 있었던 많은 무리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돌변한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폭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이 되었다. 언제나 환경에 따라 돌변할 수 있는 것이 군중심리이고 우리가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 군중들의 심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구원은 개인의 문제이다. 우리는 단체로 구원받지 않으며, 집단적으로 하늘 왕국에 들어가지 않는다(참조 겔 14:20). 결국 우리 각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위가 아닌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답변해야 할 것이다(롬 14: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부분 고립된 채로 살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며, 인간이 타락하기 전(참조 창 3:6)에도 그러한 선악 간의 영향은 서로에게 미쳐졌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러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1. 누가복음 4:16-30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사람들은 왜 집단적으로 그렇게 행동했습니까? 무엇이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이들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습니까?
답:
비록 처음에는 이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이히 여겼으나 그 말씀이 한번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자 집단적으로 그분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만약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어떤 사람이 그들의 분노에 동조하지 않고 겸손히 책망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사람의 영향력이 다른 이들에게 미침으로 어떤 결과가 생겼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분노하였으며 그분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한 사람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미쳐서 급기야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산되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회당에 모인 그들이 그분을 죽이고자 하는 충동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만약 이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예수님의 책망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였더라면 그들은 비록 분노하였을지라도 회당 밖으로 나가버리는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이제 폭도로 변한 그들은 힘을 과시하면서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교훈: 인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한 감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도록 담대함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
부가적용)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요12:12).’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던 예수님에 대하여 명절에 온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서 인정하며 선지자의 기대를 갖고, 그분을 선지자로 믿으며, 예수님 편에 서서 제자들과 더불어 같이 예수님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 무리들의 얼굴은 닷새 후에 완전히 돌변하여 변신하였다. ‘바라바를 놓으소서 십자가에 저를 못 박으소서.’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그 당시에 지도자들의 충동에 의해서 움직여, 예수님을 못 박는 일에 앞장서는 무리들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이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군중들의 얼굴이다. 우리는 집단적 신앙의 위험성을 보게 된다. 군중 심리의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니까, 제자들도 그렇게 하니까, 함께 덩달아 찬양을 하고, 덩달아 주님을 환영했지만, 그것은 개인적 확신에 입각한 행동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개인적 신앙의 추구를 통해서 얻어진 결론에 근거한 신앙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금요일(1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82-284, 405-409, 603-607, 10권, 525-534. 시대의 소망, 제17장 ‘니고데모’(167-177), 제35장 ‘잠잠하라 고요하라’(333-341), 제57장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518-523).
“병적인 경건과 왜곡된 원칙의 시대에 생활과 행습에 있어서 개심한 사람들은 건강하고 감화적인 영성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대로 진리를 알고 있는 이들은 지금 일선으로 나가야 한다.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이것을 요구하신다. 그대의 모든 감화는 올바른 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지금 모든 사람은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굳건히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엘렌 G. 화잇, 의료봉사, 22).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리스도를 공공연히 승인하지는 않았으면서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그리스도를 멸하려는 제사장들의 음모에 대해서는 거듭 반대했었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니고데모는 감람산에서의 밤중의 회견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고 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깨달았다”(사도행적, 10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군중 속에서 감정에 이끌려 군중심리에 휩싸였다가 나중에 후회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그러한 경험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배웠습니까? 그와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2. 이번 주에 공부한 제자가 될 뻔 했던 사람들은 니고데모를 제외하고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헌신하지 못한 이 사람들의 핑계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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