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과 그분의 지혜로운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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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4-17 07:03 조회5,493회 댓글0건본문
제 4과 그분의 지혜로운 가르침
4월 26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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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휘트필드가 설교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졸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청중 가운데 몇 사람이 졸고 있었다. 휘트필드는 그렇게 졸고 있는 청중을 향하여 더욱 큰소리로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러 온 것이라면 여러분이 팔꿈치에 기대어 잠이 들거나 고개를 숙여 졸아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이름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 앞에서 설교한 것은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내 말을 경청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놀라서 눈을 번쩍 떴고, 졸고 있던 여러 사람들이 즉시 눈을 뜨고 설교를 경청했다. 설교자의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늘로부터였으며 위로부터 가지고 온 권세요 지혜였다. 현대를 권위 상실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권위주의(포압적인 힘)는 있어도 참권위(설득하는 힘)는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스승과 제자, 정치인과 국민, 경영자와 노동자, 심지어 부모와 자식, 그리고 종종 목회자와 성도 간에도 대립하고 큰 갈등을 겪게 되는 원인은 바로 권위 상실에 기인하고 있다. 권위 상실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불안정을 가져오고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어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도덕적 규범은 무너져서 쾌락과 본능만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 따라서 사회나 공동체가 안정되고 튼튼하게 서려면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부모로서의 권위, 어른으로서의 권위, 지도자로서의 권위,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사람들이 그의 교훈에 놀랐다.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이다(막 1:22). 예수의 권위(세)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분의 권위는 땅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것이었고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하나님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목사의 권위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소명을 확실히 하여 복음을 능력으로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억절: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연구범위: 마 5-7장, 20:25-28, 요 4:22-24, 8:1-11.
안식일 오후
“예수께서는 과학의 가장 어두운 신비들에 관하여 찬란한 광선을 비춰주실 수도 있으셨으나 그분께서는 한 순간도 구원의 과학의 지식을 가르치는 일로부터 떠나 그런 일에 시간을 할애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시간, 그분의 지식, 그분의 기능들, 그분의 생애 자체는 영혼들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수단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었다”(엘렌 G. 화잇,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1권, 245).
우리가 예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에 관해 이야기할 때 쉽게 빠질 수 있는 한 가지 위험은, 우리가 그분과 각 시대의 다른 지혜로운 교사들과의 차이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다른 교사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특별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단언적이고 결정적인 면이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곧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신분에 대해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에는 어떤 독특함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이번 주에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4월 20일)
가장 위대한 설교(마 5-7장)
도입)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도 하고 혹은 산상보훈이라고도 한다. 여기 산상수훈이라는 말은 드릴 '수'(垂) 자를 써서 정말로 우리에게 교훈의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이요,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하는 것은 보배'보'(寶) 자를 써서 보배와 같이 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듀잇트라는 사람은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의 전 교훈의 요약'이라고 말했으며, 도루크라고 하는 사람은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의 대헌장'이라고 말하였다. 신앙의 지도자들이나 훌륭한 민족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산상수훈을 필독하면서 그들이 거기에서 얻은 진리를 통하여 삶을 슬기롭게 하였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를 건져낼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설교가 있다면 산상보훈이 아닐까?
해마다 수천수만 편의 설교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또 어떤 설교는 한 동안 기억되다가 결국에는 잊혀 진다. 그런데 2천년 동안이나 기억되고 인용될 뿐 아니라, 그 설교가 들려진 장소까지도 정확히 기억되는 특별한 설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산상수훈이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프렌드 교회(Society of Friends, 퀘이커 교도를 가리킴)는 연합군에게 나눠주기 위해 별도의 주석이 달리지 않은 산상수훈을 소책자로 인쇄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자국의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도록 조처하였다.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설교를 전쟁터의 군인들에게 읽혔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를 그들은 어느 정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1. 팔복(마 5:3-12)을 읽어 보십시오.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경험에 비춰 볼 때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팔복에는 ‘애통하는 자’와 같이 단순히 우리가 처해 있는 형편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도 있고, 또 한편 온유한 자(혹은 겸손한 자)와 같이 우리가 힘써야 할 부분도 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상태가 아니고 우리가 꾸며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자가 되기 위해 힘쓰라고 권면하신다.
2. 산상수훈의 나머지 부분의 교훈들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1.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마 5:13-16) __________________________
2. 하나님의 율법(마 5:17-2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마음으로 범하는 죄(마 5:21-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이혼(마 5:31-3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 보복(마 5:38-4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 원수를 사랑함(마 5:43-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7. 기도(마 6:5-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훈: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각 시대를 통해 가장 많이 기억되고 인용되는 설교로서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매우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
부가적용)
월남 이상재 선생은 사실은 유교 사상이 짙은 사람이었지만 일제 때에 그가 일본을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독방에 갇혀서 정말 혼자서 외롭게 쓸쓸한 때에 어느 날 그 감옥 안의 마루바닥의 마루 틈 사이를 우연히 보았는데 마루바닥의 틈 사이에 왠 쪽지 하나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도 심심하던 차에 그 쪽지를 꺼내서 읽어보니까 바로 산상수훈의 말씀이 적혀 있는 쪽지가 몇 장 구겨진 채 끼어 있었다. 읽어보았더니, 오른 편을 때리거든 왼 편을 돌려 대라,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어라, 5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가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읽어보니까 너무도 허무맹랑한 소리 같았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비웃으면서 그 쪽지를 다시 있던 그대로 구겨서 마루 틈 사이에 끼워 넣었다. 독방에 혼자 있다 보니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도 심심하다 보니 마루 틈 사이에 끼워 뒀던 쪽지를 안 꺼내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꺼내 보고 또 꺼내 보았다. 그런데 이상재 선생은 계속 그 쪽지를 읽고는 비웃고, 다시 읽고는 또 비웃고 하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그 말씀을 읽고 또 읽는 사이에, 그 말씀에 감화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백 번 그 말씀을 읽고 난 다음에 감옥에서 나올 때에는 이미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그가 기독교계의 빛나는 지도자로서 우리 한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꼽히게 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인도의 간디라고 하는 사람은 2000명의 제자가 그를 따라 다녔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도를 서방 강대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독립 국가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산상수훈 책을 들고서 무저항주의로 대항했기 때문에 나라를 건질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평소에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책을 읽으며 항상 가지고 다니라고 함으로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간디와 그의 제자 2000명은 언제든지 산상수훈의 책을 들고 다녔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설교 중에 가장 위대한 설교는 산상수훈 일 것이다. 지금도 그분의 말씀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4월 21일)
하나님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
도입)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의 사실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동안의 두 품성의 관계에 대한 난문제(難問題)를 제기 시킨다. 이 관계는 성육신의 교리를 내포하며, 이 성육신(incarnation)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육(肉)으로 화신을 의미하며, 그리고 신학적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체현(體現)함을 의미한다. 이 성육신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첫째 한 인격 속에 두 품성을 결합을 설명해주는데 있으며 둘째는 구속적 사랑과 소망의 궁극성을 설명해 주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위격과 품성에 대해 오해하는 어두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생애와 말씀을 통해 그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셨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오신 그분께서는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명확한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셨다. 이전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에 관해 말하였으나 이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모든 세계를 지으신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느니라(히 1:2).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지존자(至尊者)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되었다.
1. 다음 구절들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 5:8-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18:5-6, 10, 19:13-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4:22-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0:27-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옛날이든 오늘날이든 그 사회의 품격을 측정하는 중요한 시금석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중 가장 연약한 자들, 즉 어린아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두느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분주한 일과 중에도 어린 꼬마들을 위해 시간을 내셔서 그들을 만져주시고 복을 베푸시며, 이 연약한 존재들을 귀중히 보시고 그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당시 가난한 어머니들에게는 마치 숨통을 터주는 신선한 공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말해 주었다. 그분은 어린아이들뿐 아니라 연약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돌보시는 분이다. 그분은 약자의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들과 앉으셨을 때, 당신 때문에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한 ‘무고한 어린 생명들’(마 2:16-18)을 기억하셨을 것이며, 옛날 바로의 명령에 의해 피 흘리며 죽어간 모든 히브리 남자 아기들(출 1:15-16)을 기억하셨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 모든 정신질환적인 살인자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오셨다.
교훈: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신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과 동정이 많으시고 자비와 은혜가 충만하신 분으로 나타내셨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며,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품성은 곧 하나님의 품성인 셈이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 주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이 땅에 나타내고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셨다.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위로하셨다. 위로할 뿐만 아니라 희망과 소망을 주셨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위인들이 못되었다. 모두가 하나님을 등졌던 사람들이다. 죄를 범한 아담에게 “아담아! 아담아”라고 부르시면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과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셨다. 선지자들을 열심히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치게 했다. 이제 사람을 시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외치게 했다.
화요일(4월 22일)
용서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마 6:12-14)
도입)
그리스도께서 무엇인가를 행하실 때마다 그리스도의 행위와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에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이 때로는 찬미에 가득 찬 감탄과 기쁨에 가득 찬 환희일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의심과 불안, 그리고 모독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이 사람은 모독적인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9장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작정으로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자 사람들은 그 말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죄 많은 여자를 향하여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시자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은 죄까지도 용서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마음속으로 불안해하였다. 혹은 병자를 고치신 후 그 사람을 향해서 두 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타이는 장면도 있다. 거기서도 역시 사람들은 놀란다. 그 놀람은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만약 갑자기 우리들의 눈앞에서 어떤 사람이 처음 대면하는 사람을 향하여 '당신의 죄를 용서 합니다' 라고 선언한다면 우리들은 아마 눈을 크게 뜨며 놀랄 것이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나사렛이라는 시골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한 남자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도 당연하다. 그 남자의 정체를 모르는 만큼 그 놀람은 당연하며 오히려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용서에 대하여 그분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가 예수는 망상가이든가 미친 사람이든가 신성을 모독하는 자라고 여김이 합당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분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중요한 말씀이 여기에 숨겨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을 통해 용서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주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이 부분은 바로 예수님께서 주석을 덧붙여야 할 필요를 느끼셨던 유일한 부분이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이 일반적 사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남의 허물을 용서함은 곧 나 자신의 허물을 용서 받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친 기도는 간략한 기도의 모범이다. 그럼에도 그런 간략한 기도 안에서 제시하시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용서이다(마 6:14-15). 예수님께서 죄 용서를 강조하신 까닭은 우리 중에 누군가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주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것이 기도의 필요충분조건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강조하신 마 16:14-15절의 의미는 12절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가 “남을 기꺼이 용서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서 용서를 유보하시리라”고 하신다. 용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노로 인한 상처와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실제적으로 용서를 실천하기 위한 동기의 기초가 된다. 기독교인은 용서를 체험한 이들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관련지을 수 있는 모든 단어들 중에 최상의 말은 ‘용서’일 것이다. 예수님과 ‘용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십자가 위에서의 참기 어려운 고통과 군병들의 모욕, 그리고 사람들의 조롱 중에서도 그분께서는 떨리는 입술로 다음과 같은 애타는 간구를 올리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산상수훈에서도 그분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분께 지은 죄를 용서받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마 6:12, 14-15).
1. 다음 구절들에서 예수께서는 용서에 관해 어떤 가르침을 주셨습니까?(막 2:5-12, 눅 7:36-50, 17:3-4, 요 8:1-11).
답:
2. 용서에 관한 훌륭한 여러 말씀들에도 불구하고,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균형을 잡아주는 어떤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까?(마 12:31-32, 18:6, 막 14:21).
답:
마가복음 14:21에서 예수께서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사람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행동을 대조해 보자. 유다는 예수님을 체포한 자들이 그분을 정죄하는 것을 목격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당국자들에게 ‘배반의 돈’을 되돌려주면서 다음과 같은 매우 적절해 보이는 말을 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
자신의 후회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유다와는 달리, 베드로는 조용히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뿐, 가야바의 법정으로 되돌아가 자신의 부끄러운 배반의 말을 취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한 사람은 정죄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용서받았다. 중요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교훈: 예수께서는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시려고 용서의 선물을 주러 이 땅에 오셨다. 누구든지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를 받는다.
부가적용)
용서에 대하여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서로 용서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보자. '용서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호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사이에 어느 쪽인가가 한쪽 편에게 괴로움을 끼치거나 상처를 입힌 경우에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한다. 그러므로 관계가 없는 제삼자가 용서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면 남편이 아내를 오랫동안 배반하고 있었으나 후에 잘못임을 깨달았다고 하자. 그때 남편은 아내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때 남편을 용서하는 것은 아내뿐이며 전연 관계가 없는 타인은 '용서한다',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남편의 배반 행위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고 괴로움을 당한 것은 아내이기 때문이다. '용서한다'고 하는 행위는 자기의 권리가 짓밟힘에도 불구하고 그 상대방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오히려 감싸주는 그 당사자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무 관계가 없는 지나가던 남자가 갑자기 집에 들어와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우스운 것이 된다. 용서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사이의 일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용서를 해주신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그것이 당연 한 듯 자신의 권세를 주장하셨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서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이 되기도 한다. 만약 그리스도를 인간으로서만 보면 이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인간의 차원에서만 생각할 때는 누군가가 처음으로 대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만나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어떤 실례가 되는 일을 했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이 진실되다고 한다면,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초월한 그리스도 안의 어떠한 다른 세계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처음으로 대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사람과 이전에 접촉하고 있다고 말하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는 그분의 신성(神性)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인정한다면 이 모순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보편적이고 영원하시며 모든 사람들과 접촉하고 계신다.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감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며 만약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동시에 신성이 있다면, 그분이 하나님의 자격으로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어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은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나님으로서 그 이전의 사람들과 접촉하셨고 그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확신을 가지고 용서를 줄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실한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건은 모르는 사람에게는 정말 무례한 사건이지만 그러나 그분은 바로 오래전부터 인간을 만드시고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미 우리를 잘 알고 계시다는 전제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수 있으시며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오신 육신을 쓰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수요일(4월 23일)
겸손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마 20:25-28)
도입)
성경에 나타난 겸손은 대인관계보다 더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겸손의 개념도 대인관계에서 발생된 개념이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되어지는 “관계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겸손은 무엇보다도 선하신 하나님 앞에 놓인 가난한 이의 자세이다. 가난한 이는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로 특징 지울 수 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가난한 이들로서 자신의 것을 소유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언제나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종속시키고 개방시킨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겸손은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정을 가지고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감각을 포함하고 있다.
1995년에 실시된 한 설문에서, 운동선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만약 어떤 마약을 먹으면 올림픽에서 확실히 금메달을 따는 것이 보장되지만 그 약의 영향으로 5년 만에 죽는다면 그것을 복용하겠습니까?’ 절반 이상이 ‘예’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오늘날 사회에 편만한 명예와 권력에 대한 유혹을 잘 말해준다. 21세기의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 수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열망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정신이 교회 안에도 침투해 들어올 수 있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 첫째가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은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1. 최고를 향한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이라는 관점에서 다음 구절들을 연구해 보십시오.
마 18: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0:25-2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3:1, 5-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전 5: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역사상 가혹한 사건이 발생하면 때때로 거만한 독재자가 일어나 가난한 난민들의 돈을 빼앗고 그들을 고독한 감옥에 던지거나 혹은 가장 열악한 교도소에 가두어 온갖 학대를 가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 독재자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국가의 토지를 사회의 소외계층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발적이든 강압적이든 이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겸비와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 바울은 그분이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말한다. 즉 그분은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그분은 거기서 더 내려가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빌 2:6-8).
교훈: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자기를 비어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사실은 그분이 보여주신 겸손의 깊이를 말해 준다.
부가적용)
성경에 겸손은 교만의 반대의 뜻으로 나타나고 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거만을 떨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렘 13:16)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만이란 죄의 실제적인 근거이다.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에게 의지하거나 복종하기를 거절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의 향락과 쾌락을 쫓으며 죄를 저지른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에 교만은 죄의 뿌리이자 근본인 것이다. 이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겸손은 하나님을 신뢰, 의탁하고 순종하면서 따르게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덕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천대받고 낮은 이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이시다(사 49:13; 61:1-3). 그들과 함께 사시는 분이시다(사 57:15)
목요일(4월 24일)
은혜와 믿음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
도입)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은혜와 믿음이라는 두 단어가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인가?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인가? 이 두 가지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이후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루실 때 사용하신 방식이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믿음을 행위로 여긴다. 분명히 믿음은 인간의 편에 있지만 믿음은 결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완성하신 구원계획을 각자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행위가 없이도 믿음이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위는 믿음을 헛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하노라”(롬 3:28). 성경에서 은혜와 믿음은 칼빈주의자들의 논리처럼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은혜는 하나님의 편에 속하고 믿음은 인간의 편에 속한다고 해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인협력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나 각 사람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은혜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의미 중에는 “호의”라는 뜻도 있다. 이 단어가 어떠한 다른 뜻을 가지고 있건 간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임에 분명하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받을 자격이 없는 이 세상에 주시거나 아니면 받을 자격이 없는 한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거저 주시는 호의이다. 은혜라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구원을 받으려고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거저주시는 은혜의 창구인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구원의 기별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이렇게 묘사하였다. 바울의 표현은 예수님의 표현과는 다르게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믿으셨는가 하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묻는 것은 바울과 예수님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에 관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접근방법이 때때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묘사나 반응이 너무 율법주의적인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는 은혜의 화신으로 오셨다. 그분은 은혜의 전형(全形)이셨다. 그분을 만나는 것은 은혜를 만나는 것이다. 요한은 기록하기를,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하였다.
1. 다음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은혜와 믿음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마 14:28-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0:1-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7:36-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15:11-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8:1-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비유와 당신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은혜에 관한 많은 교훈들을 배우게 된다. 어느 날 밤 베드로는 호수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그는 능력의 주님께 부르짖는 것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다. 도움은 즉각적으로 왔다. 회개할 겨를도 없었다. 복잡한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외쳤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 14:30). 그러자 즉시 예수님의 손이 그를 붙잡았다. 이것이 은혜이다.
교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죄인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당신 자신을 보는 것이다. 스스로가 과거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은혜를 그분의 존재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거룩함도 믿는다. 그분의 자비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공의도 믿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은혜는 창에 찔린 예수님의 허리에서 흘러나왔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항상 자신의 본질을 좇아 행하신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결점들을 단번에 이루셨다. 그 단번에 해결하심으로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대상이 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행전 20:21절을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진실로 믿는 것 외에는 믿음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믿음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믿는 것 외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그분을 믿는 길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알아야 한다.
금요일(4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역사학자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역사상 가장 많이 반복되어 왔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데 감추인 보화, 씨 뿌리는 자, 값진 진주를 사는 상인, 선한 사마리아인 등과 같이 대부분의 경우 그분은 이야기로 가르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아 ‘이 사람처럼 권위 있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외쳤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분이 가르치셨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생애하셨다는 것이다. 성경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분의 전 생애는 겸손과 자신을 온전히 버리신 사랑의 생애였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돌보신 사례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분의 겸비에 대한 최상의 증거가 된다. 그분은 자신을 생각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심이 있으셨다. 그분께서는 관습이 만들어 놓은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허무셨다. 그분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셨다. 그분은 불의를 미워하셨고, 사람들 스스로를 은폐시키는 위선을 더 미워하셨다”(예화로 엮은 세계의 종교들, 212-21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늘날 국가간의 전쟁에 관한 문제와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용서만이 능사가 아닌 상황도 있을까요?
2. 비록 산상수훈이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지만, 일상의 실제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에는 그 교훈이 무시되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이 원칙들을 매일의 신앙생애에 잘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4월 26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7분)
도입)
어느 날 휘트필드가 설교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졸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청중 가운데 몇 사람이 졸고 있었다. 휘트필드는 그렇게 졸고 있는 청중을 향하여 더욱 큰소리로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러 온 것이라면 여러분이 팔꿈치에 기대어 잠이 들거나 고개를 숙여 졸아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이름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 앞에서 설교한 것은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내 말을 경청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놀라서 눈을 번쩍 떴고, 졸고 있던 여러 사람들이 즉시 눈을 뜨고 설교를 경청했다. 설교자의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늘로부터였으며 위로부터 가지고 온 권세요 지혜였다. 현대를 권위 상실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권위주의(포압적인 힘)는 있어도 참권위(설득하는 힘)는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스승과 제자, 정치인과 국민, 경영자와 노동자, 심지어 부모와 자식, 그리고 종종 목회자와 성도 간에도 대립하고 큰 갈등을 겪게 되는 원인은 바로 권위 상실에 기인하고 있다. 권위 상실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불안정을 가져오고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어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도덕적 규범은 무너져서 쾌락과 본능만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 따라서 사회나 공동체가 안정되고 튼튼하게 서려면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부모로서의 권위, 어른으로서의 권위, 지도자로서의 권위,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사람들이 그의 교훈에 놀랐다.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이다(막 1:22). 예수의 권위(세)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분의 권위는 땅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것이었고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하나님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목사의 권위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소명을 확실히 하여 복음을 능력으로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억절: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연구범위: 마 5-7장, 20:25-28, 요 4:22-24, 8:1-11.
안식일 오후
“예수께서는 과학의 가장 어두운 신비들에 관하여 찬란한 광선을 비춰주실 수도 있으셨으나 그분께서는 한 순간도 구원의 과학의 지식을 가르치는 일로부터 떠나 그런 일에 시간을 할애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시간, 그분의 지식, 그분의 기능들, 그분의 생애 자체는 영혼들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수단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었다”(엘렌 G. 화잇,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1권, 245).
우리가 예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에 관해 이야기할 때 쉽게 빠질 수 있는 한 가지 위험은, 우리가 그분과 각 시대의 다른 지혜로운 교사들과의 차이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다른 교사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특별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단언적이고 결정적인 면이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곧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신분에 대해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에는 어떤 독특함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이번 주에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4월 20일)
가장 위대한 설교(마 5-7장)
도입)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도 하고 혹은 산상보훈이라고도 한다. 여기 산상수훈이라는 말은 드릴 '수'(垂) 자를 써서 정말로 우리에게 교훈의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이요,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하는 것은 보배'보'(寶) 자를 써서 보배와 같이 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듀잇트라는 사람은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의 전 교훈의 요약'이라고 말했으며, 도루크라고 하는 사람은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의 대헌장'이라고 말하였다. 신앙의 지도자들이나 훌륭한 민족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산상수훈을 필독하면서 그들이 거기에서 얻은 진리를 통하여 삶을 슬기롭게 하였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를 건져낼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설교가 있다면 산상보훈이 아닐까?
해마다 수천수만 편의 설교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또 어떤 설교는 한 동안 기억되다가 결국에는 잊혀 진다. 그런데 2천년 동안이나 기억되고 인용될 뿐 아니라, 그 설교가 들려진 장소까지도 정확히 기억되는 특별한 설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산상수훈이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프렌드 교회(Society of Friends, 퀘이커 교도를 가리킴)는 연합군에게 나눠주기 위해 별도의 주석이 달리지 않은 산상수훈을 소책자로 인쇄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자국의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도록 조처하였다.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설교를 전쟁터의 군인들에게 읽혔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를 그들은 어느 정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1. 팔복(마 5:3-12)을 읽어 보십시오.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경험에 비춰 볼 때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팔복에는 ‘애통하는 자’와 같이 단순히 우리가 처해 있는 형편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도 있고, 또 한편 온유한 자(혹은 겸손한 자)와 같이 우리가 힘써야 할 부분도 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상태가 아니고 우리가 꾸며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자가 되기 위해 힘쓰라고 권면하신다.
2. 산상수훈의 나머지 부분의 교훈들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1.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마 5:13-16) __________________________
2. 하나님의 율법(마 5:17-2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마음으로 범하는 죄(마 5:21-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이혼(마 5:31-3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 보복(마 5:38-4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 원수를 사랑함(마 5:43-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7. 기도(마 6:5-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훈: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각 시대를 통해 가장 많이 기억되고 인용되는 설교로서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매우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
부가적용)
월남 이상재 선생은 사실은 유교 사상이 짙은 사람이었지만 일제 때에 그가 일본을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독방에 갇혀서 정말 혼자서 외롭게 쓸쓸한 때에 어느 날 그 감옥 안의 마루바닥의 마루 틈 사이를 우연히 보았는데 마루바닥의 틈 사이에 왠 쪽지 하나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도 심심하던 차에 그 쪽지를 꺼내서 읽어보니까 바로 산상수훈의 말씀이 적혀 있는 쪽지가 몇 장 구겨진 채 끼어 있었다. 읽어보았더니, 오른 편을 때리거든 왼 편을 돌려 대라,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어라, 5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가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읽어보니까 너무도 허무맹랑한 소리 같았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비웃으면서 그 쪽지를 다시 있던 그대로 구겨서 마루 틈 사이에 끼워 넣었다. 독방에 혼자 있다 보니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도 심심하다 보니 마루 틈 사이에 끼워 뒀던 쪽지를 안 꺼내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꺼내 보고 또 꺼내 보았다. 그런데 이상재 선생은 계속 그 쪽지를 읽고는 비웃고, 다시 읽고는 또 비웃고 하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그 말씀을 읽고 또 읽는 사이에, 그 말씀에 감화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백 번 그 말씀을 읽고 난 다음에 감옥에서 나올 때에는 이미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그가 기독교계의 빛나는 지도자로서 우리 한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꼽히게 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인도의 간디라고 하는 사람은 2000명의 제자가 그를 따라 다녔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도를 서방 강대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독립 국가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산상수훈 책을 들고서 무저항주의로 대항했기 때문에 나라를 건질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평소에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책을 읽으며 항상 가지고 다니라고 함으로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간디와 그의 제자 2000명은 언제든지 산상수훈의 책을 들고 다녔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설교 중에 가장 위대한 설교는 산상수훈 일 것이다. 지금도 그분의 말씀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4월 21일)
하나님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
도입)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의 사실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동안의 두 품성의 관계에 대한 난문제(難問題)를 제기 시킨다. 이 관계는 성육신의 교리를 내포하며, 이 성육신(incarnation)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육(肉)으로 화신을 의미하며, 그리고 신학적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체현(體現)함을 의미한다. 이 성육신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첫째 한 인격 속에 두 품성을 결합을 설명해주는데 있으며 둘째는 구속적 사랑과 소망의 궁극성을 설명해 주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위격과 품성에 대해 오해하는 어두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생애와 말씀을 통해 그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셨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오신 그분께서는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명확한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셨다. 이전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에 관해 말하였으나 이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모든 세계를 지으신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느니라(히 1:2).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지존자(至尊者)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되었다.
1. 다음 구절들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 5:8-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18:5-6, 10, 19:13-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4:22-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0:27-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옛날이든 오늘날이든 그 사회의 품격을 측정하는 중요한 시금석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중 가장 연약한 자들, 즉 어린아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두느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분주한 일과 중에도 어린 꼬마들을 위해 시간을 내셔서 그들을 만져주시고 복을 베푸시며, 이 연약한 존재들을 귀중히 보시고 그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당시 가난한 어머니들에게는 마치 숨통을 터주는 신선한 공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말해 주었다. 그분은 어린아이들뿐 아니라 연약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돌보시는 분이다. 그분은 약자의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들과 앉으셨을 때, 당신 때문에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한 ‘무고한 어린 생명들’(마 2:16-18)을 기억하셨을 것이며, 옛날 바로의 명령에 의해 피 흘리며 죽어간 모든 히브리 남자 아기들(출 1:15-16)을 기억하셨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 모든 정신질환적인 살인자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오셨다.
교훈: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신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과 동정이 많으시고 자비와 은혜가 충만하신 분으로 나타내셨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며,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품성은 곧 하나님의 품성인 셈이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 주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이 땅에 나타내고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셨다.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위로하셨다. 위로할 뿐만 아니라 희망과 소망을 주셨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위인들이 못되었다. 모두가 하나님을 등졌던 사람들이다. 죄를 범한 아담에게 “아담아! 아담아”라고 부르시면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과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셨다. 선지자들을 열심히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치게 했다. 이제 사람을 시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외치게 했다.
화요일(4월 22일)
용서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마 6:12-14)
도입)
그리스도께서 무엇인가를 행하실 때마다 그리스도의 행위와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에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이 때로는 찬미에 가득 찬 감탄과 기쁨에 가득 찬 환희일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의심과 불안, 그리고 모독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이 사람은 모독적인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9장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작정으로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자 사람들은 그 말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죄 많은 여자를 향하여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시자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은 죄까지도 용서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마음속으로 불안해하였다. 혹은 병자를 고치신 후 그 사람을 향해서 두 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타이는 장면도 있다. 거기서도 역시 사람들은 놀란다. 그 놀람은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만약 갑자기 우리들의 눈앞에서 어떤 사람이 처음 대면하는 사람을 향하여 '당신의 죄를 용서 합니다' 라고 선언한다면 우리들은 아마 눈을 크게 뜨며 놀랄 것이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나사렛이라는 시골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한 남자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도 당연하다. 그 남자의 정체를 모르는 만큼 그 놀람은 당연하며 오히려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용서에 대하여 그분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가 예수는 망상가이든가 미친 사람이든가 신성을 모독하는 자라고 여김이 합당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분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중요한 말씀이 여기에 숨겨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을 통해 용서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주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이 부분은 바로 예수님께서 주석을 덧붙여야 할 필요를 느끼셨던 유일한 부분이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이 일반적 사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남의 허물을 용서함은 곧 나 자신의 허물을 용서 받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친 기도는 간략한 기도의 모범이다. 그럼에도 그런 간략한 기도 안에서 제시하시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용서이다(마 6:14-15). 예수님께서 죄 용서를 강조하신 까닭은 우리 중에 누군가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주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것이 기도의 필요충분조건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강조하신 마 16:14-15절의 의미는 12절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가 “남을 기꺼이 용서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서 용서를 유보하시리라”고 하신다. 용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노로 인한 상처와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실제적으로 용서를 실천하기 위한 동기의 기초가 된다. 기독교인은 용서를 체험한 이들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관련지을 수 있는 모든 단어들 중에 최상의 말은 ‘용서’일 것이다. 예수님과 ‘용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십자가 위에서의 참기 어려운 고통과 군병들의 모욕, 그리고 사람들의 조롱 중에서도 그분께서는 떨리는 입술로 다음과 같은 애타는 간구를 올리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산상수훈에서도 그분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분께 지은 죄를 용서받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마 6:12, 14-15).
1. 다음 구절들에서 예수께서는 용서에 관해 어떤 가르침을 주셨습니까?(막 2:5-12, 눅 7:36-50, 17:3-4, 요 8:1-11).
답:
2. 용서에 관한 훌륭한 여러 말씀들에도 불구하고,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균형을 잡아주는 어떤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까?(마 12:31-32, 18:6, 막 14:21).
답:
마가복음 14:21에서 예수께서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사람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행동을 대조해 보자. 유다는 예수님을 체포한 자들이 그분을 정죄하는 것을 목격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당국자들에게 ‘배반의 돈’을 되돌려주면서 다음과 같은 매우 적절해 보이는 말을 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
자신의 후회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유다와는 달리, 베드로는 조용히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뿐, 가야바의 법정으로 되돌아가 자신의 부끄러운 배반의 말을 취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한 사람은 정죄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용서받았다. 중요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교훈: 예수께서는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시려고 용서의 선물을 주러 이 땅에 오셨다. 누구든지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를 받는다.
부가적용)
용서에 대하여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서로 용서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보자. '용서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호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사이에 어느 쪽인가가 한쪽 편에게 괴로움을 끼치거나 상처를 입힌 경우에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한다. 그러므로 관계가 없는 제삼자가 용서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면 남편이 아내를 오랫동안 배반하고 있었으나 후에 잘못임을 깨달았다고 하자. 그때 남편은 아내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때 남편을 용서하는 것은 아내뿐이며 전연 관계가 없는 타인은 '용서한다',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남편의 배반 행위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고 괴로움을 당한 것은 아내이기 때문이다. '용서한다'고 하는 행위는 자기의 권리가 짓밟힘에도 불구하고 그 상대방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오히려 감싸주는 그 당사자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무 관계가 없는 지나가던 남자가 갑자기 집에 들어와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우스운 것이 된다. 용서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사이의 일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용서를 해주신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그것이 당연 한 듯 자신의 권세를 주장하셨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서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이 되기도 한다. 만약 그리스도를 인간으로서만 보면 이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인간의 차원에서만 생각할 때는 누군가가 처음으로 대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만나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어떤 실례가 되는 일을 했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이 진실되다고 한다면,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초월한 그리스도 안의 어떠한 다른 세계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처음으로 대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사람과 이전에 접촉하고 있다고 말하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는 그분의 신성(神性)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인정한다면 이 모순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보편적이고 영원하시며 모든 사람들과 접촉하고 계신다.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감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며 만약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동시에 신성이 있다면, 그분이 하나님의 자격으로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어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은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나님으로서 그 이전의 사람들과 접촉하셨고 그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확신을 가지고 용서를 줄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실한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건은 모르는 사람에게는 정말 무례한 사건이지만 그러나 그분은 바로 오래전부터 인간을 만드시고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미 우리를 잘 알고 계시다는 전제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수 있으시며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오신 육신을 쓰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수요일(4월 23일)
겸손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마 20:25-28)
도입)
성경에 나타난 겸손은 대인관계보다 더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겸손의 개념도 대인관계에서 발생된 개념이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되어지는 “관계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겸손은 무엇보다도 선하신 하나님 앞에 놓인 가난한 이의 자세이다. 가난한 이는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로 특징 지울 수 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가난한 이들로서 자신의 것을 소유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언제나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종속시키고 개방시킨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겸손은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정을 가지고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감각을 포함하고 있다.
1995년에 실시된 한 설문에서, 운동선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만약 어떤 마약을 먹으면 올림픽에서 확실히 금메달을 따는 것이 보장되지만 그 약의 영향으로 5년 만에 죽는다면 그것을 복용하겠습니까?’ 절반 이상이 ‘예’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오늘날 사회에 편만한 명예와 권력에 대한 유혹을 잘 말해준다. 21세기의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 수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열망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정신이 교회 안에도 침투해 들어올 수 있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 첫째가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은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1. 최고를 향한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이라는 관점에서 다음 구절들을 연구해 보십시오.
마 18: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0:25-2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3:1, 5-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전 5: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역사상 가혹한 사건이 발생하면 때때로 거만한 독재자가 일어나 가난한 난민들의 돈을 빼앗고 그들을 고독한 감옥에 던지거나 혹은 가장 열악한 교도소에 가두어 온갖 학대를 가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 독재자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국가의 토지를 사회의 소외계층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발적이든 강압적이든 이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겸비와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 바울은 그분이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말한다. 즉 그분은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그분은 거기서 더 내려가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빌 2:6-8).
교훈: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자기를 비어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사실은 그분이 보여주신 겸손의 깊이를 말해 준다.
부가적용)
성경에 겸손은 교만의 반대의 뜻으로 나타나고 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거만을 떨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렘 13:16)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만이란 죄의 실제적인 근거이다.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에게 의지하거나 복종하기를 거절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의 향락과 쾌락을 쫓으며 죄를 저지른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에 교만은 죄의 뿌리이자 근본인 것이다. 이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겸손은 하나님을 신뢰, 의탁하고 순종하면서 따르게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덕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천대받고 낮은 이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이시다(사 49:13; 61:1-3). 그들과 함께 사시는 분이시다(사 57:15)
목요일(4월 24일)
은혜와 믿음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
도입)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은혜와 믿음이라는 두 단어가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인가?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인가? 이 두 가지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이후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루실 때 사용하신 방식이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믿음을 행위로 여긴다. 분명히 믿음은 인간의 편에 있지만 믿음은 결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완성하신 구원계획을 각자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행위가 없이도 믿음이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위는 믿음을 헛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하노라”(롬 3:28). 성경에서 은혜와 믿음은 칼빈주의자들의 논리처럼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은혜는 하나님의 편에 속하고 믿음은 인간의 편에 속한다고 해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인협력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나 각 사람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은혜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의미 중에는 “호의”라는 뜻도 있다. 이 단어가 어떠한 다른 뜻을 가지고 있건 간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임에 분명하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받을 자격이 없는 이 세상에 주시거나 아니면 받을 자격이 없는 한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거저 주시는 호의이다. 은혜라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구원을 받으려고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거저주시는 은혜의 창구인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구원의 기별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이렇게 묘사하였다. 바울의 표현은 예수님의 표현과는 다르게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믿으셨는가 하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묻는 것은 바울과 예수님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에 관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접근방법이 때때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묘사나 반응이 너무 율법주의적인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는 은혜의 화신으로 오셨다. 그분은 은혜의 전형(全形)이셨다. 그분을 만나는 것은 은혜를 만나는 것이다. 요한은 기록하기를,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하였다.
1. 다음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은혜와 믿음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마 14:28-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0:1-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7:36-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15:11-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8:1-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비유와 당신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은혜에 관한 많은 교훈들을 배우게 된다. 어느 날 밤 베드로는 호수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그는 능력의 주님께 부르짖는 것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다. 도움은 즉각적으로 왔다. 회개할 겨를도 없었다. 복잡한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외쳤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 14:30). 그러자 즉시 예수님의 손이 그를 붙잡았다. 이것이 은혜이다.
교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죄인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당신 자신을 보는 것이다. 스스로가 과거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은혜를 그분의 존재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거룩함도 믿는다. 그분의 자비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공의도 믿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은혜는 창에 찔린 예수님의 허리에서 흘러나왔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항상 자신의 본질을 좇아 행하신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결점들을 단번에 이루셨다. 그 단번에 해결하심으로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대상이 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행전 20:21절을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진실로 믿는 것 외에는 믿음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믿음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믿는 것 외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그분을 믿는 길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알아야 한다.
금요일(4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역사학자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역사상 가장 많이 반복되어 왔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데 감추인 보화, 씨 뿌리는 자, 값진 진주를 사는 상인, 선한 사마리아인 등과 같이 대부분의 경우 그분은 이야기로 가르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아 ‘이 사람처럼 권위 있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외쳤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분이 가르치셨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생애하셨다는 것이다. 성경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분의 전 생애는 겸손과 자신을 온전히 버리신 사랑의 생애였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돌보신 사례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분의 겸비에 대한 최상의 증거가 된다. 그분은 자신을 생각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심이 있으셨다. 그분께서는 관습이 만들어 놓은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허무셨다. 그분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셨다. 그분은 불의를 미워하셨고, 사람들 스스로를 은폐시키는 위선을 더 미워하셨다”(예화로 엮은 세계의 종교들, 212-21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늘날 국가간의 전쟁에 관한 문제와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용서만이 능사가 아닌 상황도 있을까요?
2. 비록 산상수훈이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지만, 일상의 실제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에는 그 교훈이 무시되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이 원칙들을 매일의 신앙생애에 잘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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