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그분의 신비로운 신성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목사 작성일08-04-04 06:29 조회7,118회 댓글0건본문
제2과 그분의 신비로운 신성
4월 1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분)
기억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연구범위: 사 9:6, 미 5:2, 마 16:13-17, 요 1:1, 14, 18, 8:58, 17:5, 20:28, 고전 1:3, 고후 13:14.
안식일 오후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역사적 개관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성경 자체를 탐구해 보자. 수세기 동안 그렇게도 많은 관심을 끌어 왔던 예수님의 생애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살펴보자.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나눈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중요한 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베드로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고백이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 16:17)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참조 마 16:13-17, 마 11:25-27). “혈육”(마 16:17), 즉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만세(萬歲)의 지고한 신비를 풀 수 없다.
예수님을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기원(起源)이 마리아의 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것이 된다. 또한 그분이 여러 면에서 우리와 같을지라도 근본적으로 나머지 인류와는 차이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된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분은 선재(先在)하신 분이시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골 1:15-16).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17절).
핵심본문: 요 17:5
학습 목표
깨닫기: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셨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우리와 교통하시는 예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린다.
행하기: 선재(先在)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산다.
교과 개요
I.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
A. 선지자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하나님으로 언급함
B.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탄생하시기 전,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이심을 성경 기자들은 보여줌
C.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음
II.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同等性)
A.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독생자로 묘사함
B.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가지신 영원한 교제와 교통은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계속되었음
III. 예수님의 신성(神性)
A.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선언하심으로 당신의 신성을 밝히셨음
B. 신약의 기자들은 예수님을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으로 나타냄
C.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죽임을 당하심
요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세상이 있기 전부터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계신 신인(神人)이시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아버지와 함께 계셨음을 말씀하셨고, 지상에 계신 동안에도 변함없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유지하셨다.
일요일(4월 6일) 그분의 선재성과 그 의미
1.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그분의 선재성은 우리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다음 구절들에서 그 대답에 대한 어떤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히 1:1-4, 골 1:15-20).
히1:1-4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골1:15-20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답: 예수님이 선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의 타락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온 우주를 화목하게 하는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피조물은 존재와 생명이 창조주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타락한 자에게 생명을 시여할 능력이 없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혹은 잉태되었을 때)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달랐다. 그분은 마리아의 태에서 처음 존재하시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이미 계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분의 선재성이다. 그분은 모든 시간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다.
2.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대해 어떤 힌트를 줍니까?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리스도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묘사했음.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리스도를 상고(上古)와 태초(太初)로부터 계신 분으로 서술하였음.
(비교 마 2:1-6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미가 5:2에 나오는 모사아(mosa'ah-우리성경에 근본이라고 번역됨)라는 단어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의 다른 부분은 장차 다스릴 자의 선재성을 분명히 언급할 뿐 아니라 상고(上古)로부터 존재해온 그분의 영원한 선재성을 말해 준다(참조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8권, 757)..
이사야 9:6은 세상에 오셨던 이 특별한 분의 영원한 선재성에 대해 가르쳐 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명백히 유일신을 섬기는 백성에게 선지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사야가 이 아들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언급한 사실은 놀라움을 줄 뿐 아니라 선지자 자신이 친숙하게 생각해 오던 관념을 깨뜨리는 거룩한 계시였던 것이다. 이 아들이 아버지요,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말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
“하나님의 말씀은 이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증거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선재성에 관하여서도 결정적인 증언을 하고 있다. 말씀은 거룩하신 존재자이시며 하늘 아버지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존재하셨다. 주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언약의 중보자이셨으며 유대인들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이 지상의 모든 민족이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한 분이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요 1:1). 인류와 천사들이 창조되기 이전에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47).
<부가설명>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다. 어떤 존재를 누구의 아들이라고 말하면 그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알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사야 9:6의 계시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셨다. 그런 분이 사람에게 주어질 때 아들로 오셨다. 그래서 성경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다고 계시한 것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분이 인류의 구원을 위항 우리에게 주어질 때 아들의 신분으로 주신 것이다. 예수님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취하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 신분을 취하심으로 인류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만나고 부자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이 아들이 되기 전에 이미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계신 신성이었다는 사실은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교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그분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월요일(4월 7일) 신약의 증언
이제 신약에서 예수님의 선재성을 나타내주는 다른 증거들을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음을 암시하는 말씀들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신원에 대해 자각하고 계셨다는 직접 또는 간접적인 암시를 발견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하신 그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분의 선재성에 대한 간접적 암시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한국 국회에 용무가 있어 서울에 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명백한 진술은 그분의 수난주간에 드리신 기도의 내용 가운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 17:5)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셨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드러내 줍니까?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하심
요 8:23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위에서 났다고 말씀하심
요 8:58-59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다고 말씀하심
요 17:8, 24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함께 계시던 아버지께서 보내셨다고 하심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이 구절을 포함해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내가 있느니라”(I AM)는 표현은 영원성 혹은 영원한 선재성을 암시하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엄청난 신성모독으로 보고 돌로 치려고 하였다(59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선재성을 말씀하시면서 영구한 세월로 거슬러 올라가셨다. 그분은 당신의 영원하신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셨다.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던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다”(엘렌 G. 화잇, 영문시조, 1900년, 8월 29일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바리새인들은 마치 예수께서 미치광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조소하는 태도로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반박하였다.
예수께서는 엄숙하고 품위 있는 어조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고 대답하셨다.
큰 군중들 가운데 침묵이 감돌았다. 갈릴리 출신의 이 랍비가, 영원한 존재의 관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모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자존자(自存者),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었던 분,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미 5:2)인 분으로 선언하셨다”(시대의 소망, 469-470)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지신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으나, 그렇게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그는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자주 세상에 오셨다. 그때는 그가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지지 않았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실 때 아브라함은 처음에 그분을 길손으로 보았었다. 그러나 그가 모시고 대접을 하는 중에 바로 여호와이심을 알았다. 그분이 보이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셨다. 아브라함은 그분을 사람으로 보았다. 그때 그 몸은 육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때 예수님을 보았다. 물로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드릴 때도 예수님을 보았다. 구약성경에 여호와의 사자라는 칭호로 나타나신 분은 대부분 훗날에 예수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분이셨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한 위격이셨다.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예수님은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다.
교훈: 신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그분이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직접 혹은 간접적인 여러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화요일(4월 8일) 명백한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동등성에 대한 명백한 진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설명을 요하는 구절들을 접하게 된다. 그 중의 한 예로, 성경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잘 알려진 성경절인 요한복음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제는 만약 예수께서 영원하신 분이시라면 어떻게 그분을 독생자(獨生子)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그분도 누군가가 낳았다는 말인가?
‘독생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모노게네스(monogenes)라는 하나의 단어인데, 신약에 아홉 번 나오며, 그 중에서 다섯 번은 예수님을 지칭한 것으로 모두 요한의 글에 나온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그런데 이 다섯 번의 언급이 그 복음서의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려고 애쓴 동일한 기자(記者)인 요한의 글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의 서두에 분명한 핵심을 말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유대인인 그가 자신이 피조물이라고 간주하는 누군가에게 이 하나님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1. 다음 구절들에서 모노게네스(monogenes)가 예수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사례들을 살펴보십시오. 헬라어에 익숙지 않다하더라도 이 단어가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 단어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눅 7:11-15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여기서 모노게네스는 죽은 청년이 과부의 독자임을 강조한 말임
눅 8:41-42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죽어가던 야이로의 딸도 어린 ‘외딸’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음
눅 9: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사람도 자기의 ‘외아들’을 돌아보아 달라고 함
죽은 나인 성의 청년을 ‘독자’(그 어머니의 외아들)라고 묘사했다. 여기에 ‘낳았다’라는 개념은 강조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뿐인,’ ‘유일한’의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이로의 딸도 ‘외딸’ 즉 모노게네스로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자녀였다. 누가복음 9:38에서도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독생자를 주신 사랑
“타락한 인류를 위한 신비스런 의논-‘평화의 의논’(슥 6:13)은 오래 계속되었다. 구속의 경륜은 지구의 창조 전에 이미 세워졌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 구역)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왕에게 있어서도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죽도록 내어 주는 것은 큰 투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6). 오! 구속의 오묘함이여! 그분을 사랑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여! ‘지식에 넘치는’ 그 사랑의 깊이를 누가 알 수 있으리요! 영원한 세월을 통하여 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오묘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불후의 지성들은 경탄하고 숭경해 마지않을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63).
<부가설명> 위에 예로 든 말씀들 외에 히브리 11:17에 모노게네스가 나온다. 이삭을 독생자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 의하여 모노게네스가 어떻게 쓰였는지 이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외아들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 있고,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를 취하여 6 아들을(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 창25:1,2) 낳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편으로 말하면 이삭은 외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그를 모노게네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다른 아들이 절대로 없는 외아들로만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모노게네스는 합성어(合成語)인데,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하나를 뜻하는 “모노”와 태어난다는 뜻인 “게나오”의 합성어라는 주장이다. 이렇다면 정말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다른 주장은 모노와 된다는 뜻이 “기노마이”의 합성어라는 주장이다. 이렇다면 이것은 유일한 자라는 뜻이다. 아무리 아들이 많아도 그 일을 할 아들은 둘째 아들뿐이라고 말하면 그 둘째 아들이 모노게네스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자가 그뿐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의 유일자이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독생자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님의 신분에 오해할 필요는 없다.
교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묘사한 것은 그분의 유일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확증하려는 요한이 그분을 피조물로 간주했을 리가 없다.
수요일(4월 9일) 그리스도의 신성
신약의 기자들은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칭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누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기자들은 유대인들로서 유일신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거룩한 칭호를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깊은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 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에 관하여 주(야훼)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 주어졌음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을 태초에 계신 말씀 즉 하나님으로 묘사하였음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셨음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제자 도마가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함
마태복음 3:3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는 구약에서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성호(聖號)인 ‘야훼’라는 이름을 언급하였다.
원어상으로 요한복음 1:1의 문장 구조는 요한이 말하고 있는 핵심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남기지 않는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이 제자는 그분께서 운명하신지 약 65년이 지난 후에도 그분을 명백하게 하나님으로 불렀던 것이다. 사실상 요한복음 1:18의 원어적 의미는 예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복음 20:28은 어떤가? 이 구절은 요즘 사람들이 놀람과 충격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듯이 도마도 자신의 놀라움을 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신약 성경을 현대인의 관습에 맞추어 읽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 거룩한 칭호를 발음하지도 않았었다. 더군다나 도마가 예수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은 “도마가 그분께 대답하여 가로되”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의 표현이었으며 놀라움에 대한 감탄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꾸짖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도마의 고백을 만족히 여기셨음을 보여준다.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
“십자가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춰 나오는 빛과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되고 알게 된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들은 죽기까지 그의 영혼을 쏟아 부으신 그분을 바라본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시야는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확장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증오심을 바라보는 한편 우리는 또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그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2).
<부가설명>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스스로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그냥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이 되셨다. 그날 이후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성에 대하여 논란을 벌려오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으면 된다. 사람 예수님을 바로 옆에서 모신 제자들이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예수님 자신이 또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친히 선언하셨다. 그리고 그는 부활을 통하여 그의 신성을 온 우주에 증명하셨다. 사단도 시인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증거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는다. 그분은 바로 자존자이신 여호와이시다. 동시에 사람이시며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는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약의 기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묘사한 것은 인간적인 지혜나 느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었다.
목요일(4월 10일) 더 많은 증거들
신약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로 가득하지만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께 적용된 영원성과 창조주 되심, 그분의 죄 용서하시는 능력,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자로서의 권능과 같은 몇 가지 속성을 다루었다. 추가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이 침례식 선언(마 28:19)에서와 같이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불려짐으로써 동등성을 나타낸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와 같이, 인간의 입으로 발해졌다면 분명히 신성모독에 해당되었을 말씀을 예수님이 친히 하신 경우도 볼 수 있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고전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계 20:6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계 22:3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위의 구절들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과 그리스도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들은 예수께서 먼지 나는 팔레스틴의 거리를 거니실 때 하신 말씀과 조화를 이룬다.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선언하신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하나’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중성명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밀접한 연합을 암시한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의 신성이시며 개체와 위격은 다르시지만 근본적으로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다. 이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주제를 탐구하면 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 아는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예수님으로 알고 있는 분이 하늘에 머물러 계셨다고 가정해 보라(우리는 요점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다만 이름만 바꾸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신성의 동등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동등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하늘의 사령관이셨고,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이신 분이셨으나 몸을 낮추시고 당신의 왕관을 벗으시며, 왕복을 벗으셨고, 당신의 신성에다 인성의 옷을 입으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신비이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들과는 다른 놀라운 외모를 지닌 분으로 이 땅에 오실 수도 있으셨다. 그분의 얼굴을 영광의 빛으로 빛이 나게 하실 수도 있었으며, 보는 자들의 매력을 끌 수 있는 그런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 궁정에서 세우신 계획에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0).
<부가설명> 우리는 하나님의 오묘를 다 측량할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믿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오신 사람 예수 그분은 바로 하나님 예수님이시다. 그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예수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고 계실 그때도 여전히 하나님 예수이셨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아마 다음 과목이 사람 예수님에 대한 공부인 것 같다. 우리는 사람이시면 동시에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감사하고 감격하며 믿고 따르며 즐거워할 것이다. 그 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교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동등하신 분이시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그분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
금요일(4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19-26).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계보(마 1:16, 18, 눅 3:23, 비교 눅 1:26-35))를 얼마나 솜씨 있게 다루었는지를 볼 때 귀한 교훈을 얻게 된다. 이 성경 기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이보다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에 관해 가장 강하게 피력한 요한복음(요 1:1-3, 14)과 어떠한 상충되는 요소도 남기지 않았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전체 계획에 있어서 동정녀 탄생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그분의 선재성과 신성의 확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사복음서에 분명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위험한 오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교리로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하는 교리이다. 이 이론은 성경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구주께서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 당신의 신격(神格), 당신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것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품을 수 없는 견해이다. 그것은 속죄 사업에 대한 인류의 관념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런 사상은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을 설복시키는 것 역시 어렵다. … 그런 오류를 주장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품성과 그분의 사명, 그리고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각 시대의 대쟁투, 5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인용된 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아버지와의 동등성에 관한 교리를 고수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가르침을 버리는 것은 구원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초래합니까?
* 그것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품을 수 없는 견해이다. 그것은 속죄 사업에 대한 인류의 관념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을 위태롭게 만든다.
예수님을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신성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곧 창조주시라는 뜻도 된다. 그가 창조주가 아니시면 구원의 주가 될 수 없다. 구원을 재창조이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아니시면 재창조를 할 수 없다. 성경은 의와 구원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고 계시한다(사45:8).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예수 안에서 우리도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4월 1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분)
기억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연구범위: 사 9:6, 미 5:2, 마 16:13-17, 요 1:1, 14, 18, 8:58, 17:5, 20:28, 고전 1:3, 고후 13:14.
안식일 오후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역사적 개관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성경 자체를 탐구해 보자. 수세기 동안 그렇게도 많은 관심을 끌어 왔던 예수님의 생애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살펴보자.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나눈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중요한 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베드로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고백이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 16:17)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참조 마 16:13-17, 마 11:25-27). “혈육”(마 16:17), 즉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만세(萬歲)의 지고한 신비를 풀 수 없다.
예수님을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기원(起源)이 마리아의 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것이 된다. 또한 그분이 여러 면에서 우리와 같을지라도 근본적으로 나머지 인류와는 차이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된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분은 선재(先在)하신 분이시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골 1:15-16).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17절).
핵심본문: 요 17:5
학습 목표
깨닫기: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셨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우리와 교통하시는 예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린다.
행하기: 선재(先在)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산다.
교과 개요
I.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
A. 선지자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하나님으로 언급함
B.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탄생하시기 전,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이심을 성경 기자들은 보여줌
C.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음
II.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同等性)
A.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독생자로 묘사함
B.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가지신 영원한 교제와 교통은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계속되었음
III. 예수님의 신성(神性)
A.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선언하심으로 당신의 신성을 밝히셨음
B. 신약의 기자들은 예수님을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으로 나타냄
C.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죽임을 당하심
요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세상이 있기 전부터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계신 신인(神人)이시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아버지와 함께 계셨음을 말씀하셨고, 지상에 계신 동안에도 변함없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유지하셨다.
일요일(4월 6일) 그분의 선재성과 그 의미
1.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그분의 선재성은 우리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다음 구절들에서 그 대답에 대한 어떤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히 1:1-4, 골 1:15-20).
히1:1-4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골1:15-20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답: 예수님이 선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의 타락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온 우주를 화목하게 하는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피조물은 존재와 생명이 창조주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타락한 자에게 생명을 시여할 능력이 없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혹은 잉태되었을 때)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달랐다. 그분은 마리아의 태에서 처음 존재하시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이미 계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분의 선재성이다. 그분은 모든 시간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다.
2.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대해 어떤 힌트를 줍니까?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리스도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묘사했음.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리스도를 상고(上古)와 태초(太初)로부터 계신 분으로 서술하였음.
(비교 마 2:1-6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미가 5:2에 나오는 모사아(mosa'ah-우리성경에 근본이라고 번역됨)라는 단어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의 다른 부분은 장차 다스릴 자의 선재성을 분명히 언급할 뿐 아니라 상고(上古)로부터 존재해온 그분의 영원한 선재성을 말해 준다(참조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8권, 757)..
이사야 9:6은 세상에 오셨던 이 특별한 분의 영원한 선재성에 대해 가르쳐 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명백히 유일신을 섬기는 백성에게 선지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사야가 이 아들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언급한 사실은 놀라움을 줄 뿐 아니라 선지자 자신이 친숙하게 생각해 오던 관념을 깨뜨리는 거룩한 계시였던 것이다. 이 아들이 아버지요,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말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
“하나님의 말씀은 이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증거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선재성에 관하여서도 결정적인 증언을 하고 있다. 말씀은 거룩하신 존재자이시며 하늘 아버지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존재하셨다. 주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언약의 중보자이셨으며 유대인들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이 지상의 모든 민족이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한 분이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요 1:1). 인류와 천사들이 창조되기 이전에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47).
<부가설명>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다. 어떤 존재를 누구의 아들이라고 말하면 그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알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사야 9:6의 계시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셨다. 그런 분이 사람에게 주어질 때 아들로 오셨다. 그래서 성경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다고 계시한 것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분이 인류의 구원을 위항 우리에게 주어질 때 아들의 신분으로 주신 것이다. 예수님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취하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 신분을 취하심으로 인류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만나고 부자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이 아들이 되기 전에 이미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계신 신성이었다는 사실은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교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그분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월요일(4월 7일) 신약의 증언
이제 신약에서 예수님의 선재성을 나타내주는 다른 증거들을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음을 암시하는 말씀들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신원에 대해 자각하고 계셨다는 직접 또는 간접적인 암시를 발견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하신 그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분의 선재성에 대한 간접적 암시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한국 국회에 용무가 있어 서울에 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명백한 진술은 그분의 수난주간에 드리신 기도의 내용 가운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 17:5)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셨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드러내 줍니까?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하심
요 8:23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위에서 났다고 말씀하심
요 8:58-59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다고 말씀하심
요 17:8, 24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함께 계시던 아버지께서 보내셨다고 하심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이 구절을 포함해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내가 있느니라”(I AM)는 표현은 영원성 혹은 영원한 선재성을 암시하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엄청난 신성모독으로 보고 돌로 치려고 하였다(59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선재성을 말씀하시면서 영구한 세월로 거슬러 올라가셨다. 그분은 당신의 영원하신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셨다.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던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다”(엘렌 G. 화잇, 영문시조, 1900년, 8월 29일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바리새인들은 마치 예수께서 미치광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조소하는 태도로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반박하였다.
예수께서는 엄숙하고 품위 있는 어조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고 대답하셨다.
큰 군중들 가운데 침묵이 감돌았다. 갈릴리 출신의 이 랍비가, 영원한 존재의 관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모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자존자(自存者),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었던 분,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미 5:2)인 분으로 선언하셨다”(시대의 소망, 469-470)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지신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으나, 그렇게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그는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자주 세상에 오셨다. 그때는 그가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지지 않았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실 때 아브라함은 처음에 그분을 길손으로 보았었다. 그러나 그가 모시고 대접을 하는 중에 바로 여호와이심을 알았다. 그분이 보이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셨다. 아브라함은 그분을 사람으로 보았다. 그때 그 몸은 육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때 예수님을 보았다. 물로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드릴 때도 예수님을 보았다. 구약성경에 여호와의 사자라는 칭호로 나타나신 분은 대부분 훗날에 예수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분이셨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한 위격이셨다.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예수님은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다.
교훈: 신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그분이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직접 혹은 간접적인 여러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화요일(4월 8일) 명백한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동등성에 대한 명백한 진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설명을 요하는 구절들을 접하게 된다. 그 중의 한 예로, 성경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잘 알려진 성경절인 요한복음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제는 만약 예수께서 영원하신 분이시라면 어떻게 그분을 독생자(獨生子)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그분도 누군가가 낳았다는 말인가?
‘독생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모노게네스(monogenes)라는 하나의 단어인데, 신약에 아홉 번 나오며, 그 중에서 다섯 번은 예수님을 지칭한 것으로 모두 요한의 글에 나온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그런데 이 다섯 번의 언급이 그 복음서의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려고 애쓴 동일한 기자(記者)인 요한의 글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의 서두에 분명한 핵심을 말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유대인인 그가 자신이 피조물이라고 간주하는 누군가에게 이 하나님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1. 다음 구절들에서 모노게네스(monogenes)가 예수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사례들을 살펴보십시오. 헬라어에 익숙지 않다하더라도 이 단어가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 단어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눅 7:11-15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여기서 모노게네스는 죽은 청년이 과부의 독자임을 강조한 말임
눅 8:41-42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죽어가던 야이로의 딸도 어린 ‘외딸’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음
눅 9: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사람도 자기의 ‘외아들’을 돌아보아 달라고 함
죽은 나인 성의 청년을 ‘독자’(그 어머니의 외아들)라고 묘사했다. 여기에 ‘낳았다’라는 개념은 강조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뿐인,’ ‘유일한’의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이로의 딸도 ‘외딸’ 즉 모노게네스로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자녀였다. 누가복음 9:38에서도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독생자를 주신 사랑
“타락한 인류를 위한 신비스런 의논-‘평화의 의논’(슥 6:13)은 오래 계속되었다. 구속의 경륜은 지구의 창조 전에 이미 세워졌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 구역)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왕에게 있어서도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죽도록 내어 주는 것은 큰 투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6). 오! 구속의 오묘함이여! 그분을 사랑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여! ‘지식에 넘치는’ 그 사랑의 깊이를 누가 알 수 있으리요! 영원한 세월을 통하여 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오묘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불후의 지성들은 경탄하고 숭경해 마지않을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63).
<부가설명> 위에 예로 든 말씀들 외에 히브리 11:17에 모노게네스가 나온다. 이삭을 독생자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 의하여 모노게네스가 어떻게 쓰였는지 이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외아들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 있고,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를 취하여 6 아들을(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 창25:1,2) 낳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편으로 말하면 이삭은 외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그를 모노게네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다른 아들이 절대로 없는 외아들로만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모노게네스는 합성어(合成語)인데,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하나를 뜻하는 “모노”와 태어난다는 뜻인 “게나오”의 합성어라는 주장이다. 이렇다면 정말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다른 주장은 모노와 된다는 뜻이 “기노마이”의 합성어라는 주장이다. 이렇다면 이것은 유일한 자라는 뜻이다. 아무리 아들이 많아도 그 일을 할 아들은 둘째 아들뿐이라고 말하면 그 둘째 아들이 모노게네스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자가 그뿐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의 유일자이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독생자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님의 신분에 오해할 필요는 없다.
교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묘사한 것은 그분의 유일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확증하려는 요한이 그분을 피조물로 간주했을 리가 없다.
수요일(4월 9일) 그리스도의 신성
신약의 기자들은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칭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누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기자들은 유대인들로서 유일신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거룩한 칭호를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깊은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 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에 관하여 주(야훼)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 주어졌음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을 태초에 계신 말씀 즉 하나님으로 묘사하였음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셨음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제자 도마가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함
마태복음 3:3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는 구약에서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성호(聖號)인 ‘야훼’라는 이름을 언급하였다.
원어상으로 요한복음 1:1의 문장 구조는 요한이 말하고 있는 핵심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남기지 않는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이 제자는 그분께서 운명하신지 약 65년이 지난 후에도 그분을 명백하게 하나님으로 불렀던 것이다. 사실상 요한복음 1:18의 원어적 의미는 예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복음 20:28은 어떤가? 이 구절은 요즘 사람들이 놀람과 충격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듯이 도마도 자신의 놀라움을 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신약 성경을 현대인의 관습에 맞추어 읽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 거룩한 칭호를 발음하지도 않았었다. 더군다나 도마가 예수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은 “도마가 그분께 대답하여 가로되”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의 표현이었으며 놀라움에 대한 감탄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꾸짖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도마의 고백을 만족히 여기셨음을 보여준다.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
“십자가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춰 나오는 빛과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되고 알게 된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들은 죽기까지 그의 영혼을 쏟아 부으신 그분을 바라본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시야는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확장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증오심을 바라보는 한편 우리는 또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그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2).
<부가설명>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스스로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그냥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이 되셨다. 그날 이후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성에 대하여 논란을 벌려오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으면 된다. 사람 예수님을 바로 옆에서 모신 제자들이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예수님 자신이 또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친히 선언하셨다. 그리고 그는 부활을 통하여 그의 신성을 온 우주에 증명하셨다. 사단도 시인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증거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는다. 그분은 바로 자존자이신 여호와이시다. 동시에 사람이시며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는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약의 기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묘사한 것은 인간적인 지혜나 느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었다.
목요일(4월 10일) 더 많은 증거들
신약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로 가득하지만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께 적용된 영원성과 창조주 되심, 그분의 죄 용서하시는 능력,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자로서의 권능과 같은 몇 가지 속성을 다루었다. 추가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이 침례식 선언(마 28:19)에서와 같이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불려짐으로써 동등성을 나타낸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와 같이, 인간의 입으로 발해졌다면 분명히 신성모독에 해당되었을 말씀을 예수님이 친히 하신 경우도 볼 수 있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고전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계 20:6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계 22:3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위의 구절들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과 그리스도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들은 예수께서 먼지 나는 팔레스틴의 거리를 거니실 때 하신 말씀과 조화를 이룬다.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선언하신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하나’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중성명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밀접한 연합을 암시한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의 신성이시며 개체와 위격은 다르시지만 근본적으로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다. 이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주제를 탐구하면 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 아는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예수님으로 알고 있는 분이 하늘에 머물러 계셨다고 가정해 보라(우리는 요점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다만 이름만 바꾸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신성의 동등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동등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하늘의 사령관이셨고,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이신 분이셨으나 몸을 낮추시고 당신의 왕관을 벗으시며, 왕복을 벗으셨고, 당신의 신성에다 인성의 옷을 입으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신비이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들과는 다른 놀라운 외모를 지닌 분으로 이 땅에 오실 수도 있으셨다. 그분의 얼굴을 영광의 빛으로 빛이 나게 하실 수도 있었으며, 보는 자들의 매력을 끌 수 있는 그런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 궁정에서 세우신 계획에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0).
<부가설명> 우리는 하나님의 오묘를 다 측량할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믿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오신 사람 예수 그분은 바로 하나님 예수님이시다. 그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예수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고 계실 그때도 여전히 하나님 예수이셨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아마 다음 과목이 사람 예수님에 대한 공부인 것 같다. 우리는 사람이시면 동시에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감사하고 감격하며 믿고 따르며 즐거워할 것이다. 그 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교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동등하신 분이시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그분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
금요일(4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19-26).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계보(마 1:16, 18, 눅 3:23, 비교 눅 1:26-35))를 얼마나 솜씨 있게 다루었는지를 볼 때 귀한 교훈을 얻게 된다. 이 성경 기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이보다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에 관해 가장 강하게 피력한 요한복음(요 1:1-3, 14)과 어떠한 상충되는 요소도 남기지 않았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전체 계획에 있어서 동정녀 탄생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그분의 선재성과 신성의 확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사복음서에 분명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위험한 오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교리로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하는 교리이다. 이 이론은 성경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구주께서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 당신의 신격(神格), 당신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것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품을 수 없는 견해이다. 그것은 속죄 사업에 대한 인류의 관념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런 사상은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을 설복시키는 것 역시 어렵다. … 그런 오류를 주장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품성과 그분의 사명, 그리고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각 시대의 대쟁투, 5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인용된 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아버지와의 동등성에 관한 교리를 고수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가르침을 버리는 것은 구원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초래합니까?
* 그것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품을 수 없는 견해이다. 그것은 속죄 사업에 대한 인류의 관념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을 위태롭게 만든다.
예수님을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신성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곧 창조주시라는 뜻도 된다. 그가 창조주가 아니시면 구원의 주가 될 수 없다. 구원을 재창조이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아니시면 재창조를 할 수 없다. 성경은 의와 구원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고 계시한다(사45:8).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예수 안에서 우리도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