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과 빗나간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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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08-03-03 22:24 조회5,326회 댓글0건본문
제 10과 빗나간 제자도
3월 8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3분)
도입)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척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혈기 왕성하고 성급한 베드로, 주님으로부터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으리만치 활화산 같은 성격의 소유자 요한과 야고보, 그런가 하면 타산적인 빌립과 의심 많던 도마, 광적인 테러리스트로서 로마에 항거하던 셀롯인 시몬, 그리고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 이들은 모두 참으로 다루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그들을 모두 감싸 안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본다. 우리 주변에는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매우 타산적이고 배타적인 사람들이 있다. 격렬한 성품과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사고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확실히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래서 싫다고 골라내고 저래서 싫다고 골라내면 내 주변에 남는 사람이 없다. 주님의 말씀처럼 가라지는 뽑는 것이 아니다. 조화로운 인간관계란 주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문을 열기는커녕 경계하는 마음이 된다. 주는 마음은 열린 마음이다.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그의 말을 들어주고 그의 마음을 받아 주는 것, 그것이 열린 마음이다.
기억절: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렘 12:5).
연구범위: 왕상 18장, 마 26:56, 눅 9:51-56, 요 6:1-15, 12:1-6, 18:1-11, 21:15-19.
학습 포인트: 정치적 권력을 얻으려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경고가 되는가? 유다에게서 취할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들을 불로 소멸하기 원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베드로의 경솔한 행동과 회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제자들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목도하였으면서도 왜 예수께서 가장 도움이 필요하실 때 모두 버리고 떠났는가?
안식일 오후
머피의 법칙(Murphy's law)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중력의 법칙이나 자기(磁氣)의 법칙처럼 널리 퍼져 있는 자연의 기본 법칙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잘못 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잘못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악의 순간에!’
우리 모두는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나 날들을 보낸 적이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경험했듯이 때때로 우리도 이 법칙을 따라가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낙심하지 않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이 약속에도 불구하고 절망 중에 포기해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기가 쉽다. 물론 어떤 경우에든지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몇몇 제자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들의 유감스런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일요일(3월 2일)
권력을 추구하는 제자들
도입)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고 예수님께 물었다. 보통 <크다>는 말은 '위대하다', '훌륭하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올수록 누가 제 일인자로 지목 받는가에 대해 온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삶에 아무런 방향도, 희망도 없이 소시민적으로 형편 되는 데로 살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훈련을 받으면서 자신들에게도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제자들 모두 한결 같이 위대하게 살고 싶은 꿈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거의 똑같이 부르심 받았다. 똑같이 훈련받았다. 똑같이 고생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누구도 가장 위대한 자의 자리를 양보할 수 없었다. 이것은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나 큰 자, 위대한 자가 되고자 한다. 위대한 자가 되고자 소원을 갖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위대한 존재로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당대는 물론이요 후세에까지 길이 길이 기억되는 위대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위대한 삶인지 모르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 사람이 됩니까?"라는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근처에 있던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3∼4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큰 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크다 작다'를 떠난 근본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그것이 중요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크게 되느냐, 적게 되느냐는 그 다음 문제이다. 우선 천국에 입장하는 것이 우선이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종교적 신념은 선악 간에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신념에 따라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가 하면(마 16:25),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자폭 테러를 감행하기도 한다. 결국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이 서면 그 앞에 놓여 있는 세상적인 문제들을 두려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국가에서는 백성이 더 높은 권위에 충성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종교 억제 정책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결코 하나님보다 더 높은 권위를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나라는 엄청난 종교 세력과 결탁하여 그 세력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교적인 힘을 남용하는 것과 관련된 다양한 위험에 대하여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요한복음 6:1-15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정치적 세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물론 예수님의 목적은 이 지상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는 것은 제자들의 할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권세를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권력을 사용하게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치적 세력을 모으는 일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며 제자들의 몫이 아니다. 신약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복음의 권력적 모델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도 이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다윗의 보좌를 물려받을 정당한 분이라고 선동하는 데 있어서 무리들과 합세한다. 예수께서 이런 명예를 거절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겸손하시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 그들은 저희의 목적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열심으로 계획한다”(시대의 소망, 378). 군중의 열렬한 기대와 열망이 고조됨에 따라 그들은 강제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요 6:14-15).
교훈: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세상의 정치적 권력과 결탁하고 그 세력을 힘입어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시한 곳을 찾아볼 수 없다.
(부가적용)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 것,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는 것,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 권력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왜 사단적인 것인지 알아야 한다. 힘에 대한 욕심, 높아지려는 욕심, 섬김을 받으려는 욕심, 지배하려는 욕심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의 시초는 사단이다. 사단은 바로 이러한 욕망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을 반역한 자였다. 그의 죄는 교만이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처럼 되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향한 유혹과 욕망은 이 모두가 사단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사단의 교만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권력을 탐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그의 죄이며 타락이었다. 그리고 사단은 자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힘과 권력의 유혹으로 우리 곁에 손쉽게 가까이 다가온다. 권력에의 유혹은 밤 그림자처럼 그렇게 은밀하고도 어두운 것이다. 마 8:20절을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에게는 화려한 집무실도, 멋진 왕의 복장도 없었다. 그는 갈릴리 사람들의 일상의 옷을 입었고, 먼지 나는 광야를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다니셨다. 그는 온갖 더러운 질병에 걸린 병자들을 일일이 만지고 고치셨다. 그게 예수님께서 보여준 왕의 모습이었다.
월요일(3월 3일)
탐욕적인 제자들
도입)
무엇이든 지나치면 욕심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를 빌려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 받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은 문제의 본질을 보셨고 그의 문제를 지적하셨다.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예수님이 이 사람과 함께 주변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비유를 말씀하셨다(16-21절). 이른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 비유 속의 부자 농부는 잘 한 일도 있었다. 밭에 소출이 풍성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날씨도 좋았겠으나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곡간을 헐고 새로 짓는 사업 확장을 계획한 것도 잘못이 아니다. 지혜로운 생각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진 탐심은 무엇일까?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도 자기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눅 12:17절부터 19절까지 부자 농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나”, “내가”라는 표현이 여섯 번이나 나온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이 부분을 직역하면 무려 열 한 번이나 “나”를 강조한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것(21절)이 바로 탐욕이다. 이 탐욕을 버려야 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부자가 되기 원하면 종교를 창설하라.” 유감스럽지만 이 냉소적인 말 속에는 많은 진리가 담겨 있다. 종교적 신념 가운데는 인간 존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면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의 신앙에는 삶의 의미와 영생의 소망, 그리고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 등의 문제가 포함된다. 우리의 모본이신 예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빈곤한 삶을 사셨으며, 그토록 자주 이 세상 사물에 몰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건만,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소유를 착취하여 부(富)를 축적한 사례가 무수히 많았다.
요한복음 12:1-6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마리아의 행동에서 우리는 어떤 상징을 발견하게 됩니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 가져야 할 어떤 자세를 보게 됩니까?(참조 마 13:46, 빌 3:8).
답:
2. 이 이야기는 행동의 동기가 중요함을 어떻게 말해 줍니까?
답:
3. 본문에 의하면 부활한 나사로가 함께 식사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은 유다의 행동의 모순됨을 어떻게 드러냈으며 그가 얼마나 탐심에 눈이 멀어 있었는지를 나타내 줍니까?
답:
바울은 디모데전서 6:10의 유명한 진술을 하게 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유다는 돈을 사랑함으로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첫째가 되고자 했으며, 그 자신의 유익을 위해 물질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그의 모든 삶에 얽혀 있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전혀 이기적이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유다가 가장 두드러졌다.
교훈: 가룟 유다는 탐욕의 늪에 빠져 그 영혼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약 1:15).
부가적용)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영양분을 섭취하면 만족감, 포만감을 느껴야 하는데, 먹을 만큼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해서 계속해서 음식을 섭취하는 폭식증이 있다. 신체적으로 폭식증이 있듯이, 영적인 폭식증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탐욕이다. 영적 폭식증인 탐욕은 자기학대적인 영적 병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병이다. 먼저 탐욕이나 탐심에 빠지면, 물질에 집착하고, 소유에 집착하여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한다. 또한 탐심에 빠지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할 뿐더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에도 또 다른 것을 취하면 그때 만족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한다. 이렇게 탐심은 계속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만족을 늘 미래로 유보시키는 병이다. 마지막으로 탐심에 빠지면 모든 것이 순환되지 않고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 병에 걸린다. 탐심으로 물질이 순환되지 못하고, 사랑이 순환되지 못하고, 축복이 순환되지 못하여 모든 것이 막히게 된다. 신체적 병에서도 합병증으로 몸이 총체적으로 어렵게 되듯이 탐심도 우리 삶을 총체적 난국으로 몰아가는 위험이 있다. 바로 삶의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되는 시발점이 탐욕이라는 것을 알면, 탐욕이 얼마나 심각하게 위험한 것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화요일(3월 4일)
우레 같은 제자들
도입)
치약 때문에 이혼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성격이 무척 꼼꼼해서 치약을 쓸 때면 맨 끝에서부터 눌러 썼다. 그러나 아내는 성격이 낙천적이고 덜렁대는 편이어서 치약을 아무렇게나 쓰고 내팽개쳤다. 이 때문에 이 부부는 늘 투덜대며 다투다가 어느 날 심하게 싸우고 헤어졌다. 이 사건은 인간관계의 파국이 인생의 파국임을 보여준다. 인간이란 글자 그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하고 인간관계에 실패하면 인생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형제가 함께 제자가 된 경우가 둘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들 중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신 후에 보아너게(Boanerges) 즉 ‘우레의 아들들’(막 3:17)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들에게 이 이름을 주신 것은 그들의 격렬한 기질과 불같은 성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유형의 제자들을 우레 같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1. 누가복음 9:51-56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들에 대한 이 제자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 구절들을 읽을 때 두 제자들의 입장에서 읽어 보십시오. 이들이 그렇게 반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어떤 말을 떠올렸으며, 구약의 어떤 사례를 기억하고 그렇게 반응했을까요?(참조 창 6, 7장, 마 8:12, 13:42, 막 6:11).
답:
이 제자들의 반응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 열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제자들이 가져야 할 좋은 덕목이다. 하지만 그릇 인도된 열심은 비록 의도가 좋다 할지라도 유익보다는 해를 끼치기가 쉽다. 예를 들어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행동의 모델로 엘리야를 떠올렸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 모델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여 그 제물을 사르게 하였지(왕상 18장), 고집 센 백성들을 사르게 하지는 않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죄인들에 대한 그들의 거칠고 비판적인 태도였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의 할 일은 죄인들을 십자가 아래로 인도하는 방법을 찾아 그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과거에 얼마나 죄 가운데서 살았든지 관계없이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죄사함을 입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자인 우리가 할 일이며, 심판은 다 주님께 맡겨 버려야 한다.
교훈: 야고보와 요한처럼 격렬한 기질과 불같은 성미를 가진 사람도 예수님에게서 배우면 그 열정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
부가적용)
격렬한 성품과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사고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래서 싫다고 골라내고 저래서 싫다고 골라내면 내 주변에 남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처럼 가라지는 뽑아내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요셉은 시기와 질투가 많으며 매사에 불평과 원망이 많던 형들과 함께 해야 했고 그로 인하여 끝내는 애굽의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경험했어야 했음에도 그는 그 형들과 함께 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성이다. 사람들을 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람을 품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관계야말로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좋은 인간관계는 좋은 인생을 보장한다. 좋은 친구와 좋은 이웃이 생기게 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 영국 속담처럼 다리를 놓아야 강을 건널 수 있다. 이처럼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처럼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주님처럼 넓은 마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기도로 이루어진다. 현명한 사람은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이야기한다. 사람 때문에 낙담하고 상처받은 마음, 분노로 일그러진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냄으로써 먼저 치유 받는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얻어진 영적인 힘은 인생을 사는 힘이 된다. 도저히 포용할 수 없는 사람을 포용하게 되고 감쌀 수 없던 사람을 감쌀 수 있게 된다. 기도는 그래서 하는 것이다.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행복을 더해주는 사람이 되자. 그러기 위해서 사람을 감싸고 함께 하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수요일(3월 5일)
베드로 유형의 제자들
도입)
베드로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베드로를 가장 잘 표현하는 형용사가 있다면 바로 "성질 급한"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베드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천방지축, 성질 급한 베드로의 모습이다. 이 속 없는 제자의 한심한 모습의 절정은 바로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런 그가 예수님에 의해 다시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베드로는 나서기를 좋아하는 충동적인 제자로 알려졌다. 누가복음 22:33-34에는 그가 예수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는 데도 가기로 준비하였다고 장담하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오래지 않아서 그는 자신이 한 말을 돌이켜 보아야만 했다(마 26:69-75).
1. 요한복음 18:1-11을 읽으십시오. 이 일화를 통해 베드로의 성격과 품성의 어떤 면을 엿볼 수 있습니까?(마 26:69-75).
답: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에 관해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에게 교훈이 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없다. 날마다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분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므로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특히 신실한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을 위한 열정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펼쳐져야 한다.
2. 요한복음 21:15-19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 특히 실수를 뉘우치고 당신을 붙잡는 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까?
답:
“여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위한 한 가지 교훈이 주어졌다. 복음은 악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죄를 변명할 수 없다. 은밀한 죄는 은밀히 하나님께 자복해야 하며 드러난 죄는 공공연하게 자복하여야 한다. …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공공연하게 부인했었다. 예수께서도 세 번씩이나 화살같이 날카로운 질문을 그의 상처받은 마음에 화급하게 던짐으로써 그의 사랑과 충성의 보증을 끌어내셨다. 모인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회개의 깊이를 나타내셨으며 한때 자만스럽던 제자가 얼마나 완전히 겸손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셨다”(시대의 소망, 811-812).
교훈: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 가운데 신실한 제자로 변화되었으며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참된 제자가 되었다.
부가적용)
예수님이 분명 베드로가 성질이 급하고 충동적인 것을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 주님은 이 베드로를 수제자로 인정하시고, 또한 그의 고백에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다. 특별이나 열쇠라면 당연히 사려 깊고, 조심성 있고, 침착한 제자를 찾을 법 한데, 주님은 베드로를 가리켜 열쇠를 맡기신다. 또한 그를 반석이라 부르시고 그가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한 기초가 되도록 약속하신다. 베드로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하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베드로는 분명 완전하지 못했다. 실수 투성 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간절하고, 열정적인 주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있었음을 주님은 귀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주님이 붙여주신 그의 이름처럼 처음에 그는 거친 돌덩이였다. 하지만 주님은 그가 돌임을 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깨닫고, 성숙하고, 다듬어 질 때 언젠가 빛나고 탄탄한 반석이 될 수 있음을 보셨던 것이다. 거칠었고,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순수하게 드렸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깎이고 깎여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화되어 반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요일(3월 6일)
도망하는 제자들
도입)
제자들의 도망과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사건은 자신들의 연약성을 잊고 자신을 의지한 연고이다. 주님의 가르침 보다는 항상 자신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육신의 자신감을 앞세울 때 한 순간에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약함이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언제나 주님 말씀과 가르침에 깊이 귀를 기울이는 자만이 바로 세움을 입게 된다. 온갖 비난과 모욕 가운데서의 냉철한 중심, 침묵할 때와 말할 때를 아는 지혜와 용기, 약함을 인정하고 위의 분을 직시하는 믿음이 우리를 바로 세우는 복음의 핵심임을 깨달아 알아 가는 삶이되기를 바란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 26:56).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반을 보냈다. 그들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일들을 목도했다. 이 세상 수십억의 인구 가운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그분께서 육신으로 계신 동안 날마다 교제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 제자들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특권을 누린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타락한 인간인지라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교훈을 쉽게 배우지 못하였다.
1. 사복음서 중 어느 하나를 택하여 쭉 훑어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어떤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으며, 어떤 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그분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놀라운 증거들을 얼마나 많이 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두려운 경고가 됩니까?
답:
예수께서는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할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아시고 당신의 수난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으며 아무런 준비 없이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제자들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듣기보다는 그분께서 행하신 일을 바라보기만 한 것 같다. 그분의 행동은 그들의 마음속에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게 해 주었으므로, 그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음성이 울리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으나, 그들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큰 유익을 놓치고 말았다.
교훈: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자리와 감람산 담화 등 여러 경우에 당신의 수난에 관해 예고하셨으나 제자들은 듣지 않았고 결국은 다 도망하고 말았다.
부가적용)
주님은 제자들을 버리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지만 제자들은 죽음이 두려워 주님이 고난당하실 바로 그 순간에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 이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힘만 의지할 때는 얼마나 약한지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모든 제자들이나 성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모두 양떼에 불과하다. 이리가 오면 도망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위험에 대해 이미 경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때가 오면 주님을 위해 죽을 지언정 절대 주님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그 때가 되자 갑자기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치고 만다. 약속하는 것과 약속을 지키는 것은 별개이다. 우리는 변하기 쉬운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믿지 말고 날마다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금요일(3월 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416-418, 499-505, 592-595, 644-645, 10권, 315-316, 574-575, 656-657, 시대의 소망, 제39장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64-371), 제40장 ‘호수의 밤’(377-380), 437-438, 제60장 ‘새 나라의 율법’(547-551), 제62장 ‘시몬의 집에서 열린 잔치’(557-565), 제85장 ‘다시 한 번 바닷가에서’(808-817). 사도행적, 제53장 ‘사랑받은 제자 요한’(539-543).
“유다는 그의 약삭빠른 재능을 활용함으로써 돈에 대한 사랑을 그의 마음에서 키우고 있었다. 만약 그의 실제적인 재정 관리 능력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꼴지워지고 계발되고 잘 활용되었더라면 그것은 그 어린 교회에 큰 봉사가 되었을 것이며 그의 마음은 성화되어서 그는 하늘 사물을 바르게 인식하는 정확한 식별력과 분명한 통찰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세상적인 술수를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다. 밖으로 드러나는 죄는 없었지만,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극도로 교활하고 이기적이고 인색한 정신은 결국 얼마 안 되는 적은 돈으로 그의 주님을 팔게 하였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01).
“구주의 공생애 기간 전체를 유다는 내내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다 가졌다. … 그러나 유다는 공로만 일삼는 자였다. 그는 교회의 재정 관리를 잘 할 수 있고 그의 예리한 사업적 수완으로 교회에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두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칭송을 좋아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을 포기하는 일을 거절하였다. 그는 한 번도 그의 영원한 복리를 그리스도께 위탁해 본 적이 없었다. … 유다는 하나의 종교적 사기꾼이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01-110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이번 주에 공부한 것 외에 어떤 유형의 제자들이 있을까요? 그러한 유형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3월 8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3분)
도입)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척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혈기 왕성하고 성급한 베드로, 주님으로부터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으리만치 활화산 같은 성격의 소유자 요한과 야고보, 그런가 하면 타산적인 빌립과 의심 많던 도마, 광적인 테러리스트로서 로마에 항거하던 셀롯인 시몬, 그리고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 이들은 모두 참으로 다루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그들을 모두 감싸 안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본다. 우리 주변에는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매우 타산적이고 배타적인 사람들이 있다. 격렬한 성품과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사고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확실히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래서 싫다고 골라내고 저래서 싫다고 골라내면 내 주변에 남는 사람이 없다. 주님의 말씀처럼 가라지는 뽑는 것이 아니다. 조화로운 인간관계란 주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문을 열기는커녕 경계하는 마음이 된다. 주는 마음은 열린 마음이다.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그의 말을 들어주고 그의 마음을 받아 주는 것, 그것이 열린 마음이다.
기억절: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렘 12:5).
연구범위: 왕상 18장, 마 26:56, 눅 9:51-56, 요 6:1-15, 12:1-6, 18:1-11, 21:15-19.
학습 포인트: 정치적 권력을 얻으려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경고가 되는가? 유다에게서 취할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들을 불로 소멸하기 원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베드로의 경솔한 행동과 회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제자들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목도하였으면서도 왜 예수께서 가장 도움이 필요하실 때 모두 버리고 떠났는가?
안식일 오후
머피의 법칙(Murphy's law)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중력의 법칙이나 자기(磁氣)의 법칙처럼 널리 퍼져 있는 자연의 기본 법칙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잘못 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잘못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악의 순간에!’
우리 모두는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나 날들을 보낸 적이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경험했듯이 때때로 우리도 이 법칙을 따라가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낙심하지 않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이 약속에도 불구하고 절망 중에 포기해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기가 쉽다. 물론 어떤 경우에든지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몇몇 제자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들의 유감스런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일요일(3월 2일)
권력을 추구하는 제자들
도입)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고 예수님께 물었다. 보통 <크다>는 말은 '위대하다', '훌륭하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올수록 누가 제 일인자로 지목 받는가에 대해 온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삶에 아무런 방향도, 희망도 없이 소시민적으로 형편 되는 데로 살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훈련을 받으면서 자신들에게도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제자들 모두 한결 같이 위대하게 살고 싶은 꿈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거의 똑같이 부르심 받았다. 똑같이 훈련받았다. 똑같이 고생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누구도 가장 위대한 자의 자리를 양보할 수 없었다. 이것은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나 큰 자, 위대한 자가 되고자 한다. 위대한 자가 되고자 소원을 갖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위대한 존재로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당대는 물론이요 후세에까지 길이 길이 기억되는 위대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위대한 삶인지 모르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 사람이 됩니까?"라는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근처에 있던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3∼4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큰 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크다 작다'를 떠난 근본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그것이 중요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크게 되느냐, 적게 되느냐는 그 다음 문제이다. 우선 천국에 입장하는 것이 우선이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종교적 신념은 선악 간에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신념에 따라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가 하면(마 16:25),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자폭 테러를 감행하기도 한다. 결국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이 서면 그 앞에 놓여 있는 세상적인 문제들을 두려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국가에서는 백성이 더 높은 권위에 충성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종교 억제 정책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결코 하나님보다 더 높은 권위를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나라는 엄청난 종교 세력과 결탁하여 그 세력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교적인 힘을 남용하는 것과 관련된 다양한 위험에 대하여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요한복음 6:1-15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정치적 세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물론 예수님의 목적은 이 지상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는 것은 제자들의 할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권세를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권력을 사용하게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치적 세력을 모으는 일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며 제자들의 몫이 아니다. 신약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복음의 권력적 모델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도 이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다윗의 보좌를 물려받을 정당한 분이라고 선동하는 데 있어서 무리들과 합세한다. 예수께서 이런 명예를 거절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겸손하시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 그들은 저희의 목적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열심으로 계획한다”(시대의 소망, 378). 군중의 열렬한 기대와 열망이 고조됨에 따라 그들은 강제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요 6:14-15).
교훈: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세상의 정치적 권력과 결탁하고 그 세력을 힘입어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시한 곳을 찾아볼 수 없다.
(부가적용)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 것,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는 것,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 권력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왜 사단적인 것인지 알아야 한다. 힘에 대한 욕심, 높아지려는 욕심, 섬김을 받으려는 욕심, 지배하려는 욕심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의 시초는 사단이다. 사단은 바로 이러한 욕망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을 반역한 자였다. 그의 죄는 교만이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처럼 되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향한 유혹과 욕망은 이 모두가 사단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사단의 교만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권력을 탐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그의 죄이며 타락이었다. 그리고 사단은 자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힘과 권력의 유혹으로 우리 곁에 손쉽게 가까이 다가온다. 권력에의 유혹은 밤 그림자처럼 그렇게 은밀하고도 어두운 것이다. 마 8:20절을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에게는 화려한 집무실도, 멋진 왕의 복장도 없었다. 그는 갈릴리 사람들의 일상의 옷을 입었고, 먼지 나는 광야를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다니셨다. 그는 온갖 더러운 질병에 걸린 병자들을 일일이 만지고 고치셨다. 그게 예수님께서 보여준 왕의 모습이었다.
월요일(3월 3일)
탐욕적인 제자들
도입)
무엇이든 지나치면 욕심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를 빌려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 받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은 문제의 본질을 보셨고 그의 문제를 지적하셨다.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예수님이 이 사람과 함께 주변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비유를 말씀하셨다(16-21절). 이른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 비유 속의 부자 농부는 잘 한 일도 있었다. 밭에 소출이 풍성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날씨도 좋았겠으나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곡간을 헐고 새로 짓는 사업 확장을 계획한 것도 잘못이 아니다. 지혜로운 생각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진 탐심은 무엇일까?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도 자기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눅 12:17절부터 19절까지 부자 농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나”, “내가”라는 표현이 여섯 번이나 나온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이 부분을 직역하면 무려 열 한 번이나 “나”를 강조한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것(21절)이 바로 탐욕이다. 이 탐욕을 버려야 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부자가 되기 원하면 종교를 창설하라.” 유감스럽지만 이 냉소적인 말 속에는 많은 진리가 담겨 있다. 종교적 신념 가운데는 인간 존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면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의 신앙에는 삶의 의미와 영생의 소망, 그리고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 등의 문제가 포함된다. 우리의 모본이신 예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빈곤한 삶을 사셨으며, 그토록 자주 이 세상 사물에 몰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건만,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소유를 착취하여 부(富)를 축적한 사례가 무수히 많았다.
요한복음 12:1-6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마리아의 행동에서 우리는 어떤 상징을 발견하게 됩니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 가져야 할 어떤 자세를 보게 됩니까?(참조 마 13:46, 빌 3:8).
답:
2. 이 이야기는 행동의 동기가 중요함을 어떻게 말해 줍니까?
답:
3. 본문에 의하면 부활한 나사로가 함께 식사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은 유다의 행동의 모순됨을 어떻게 드러냈으며 그가 얼마나 탐심에 눈이 멀어 있었는지를 나타내 줍니까?
답:
바울은 디모데전서 6:10의 유명한 진술을 하게 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유다는 돈을 사랑함으로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첫째가 되고자 했으며, 그 자신의 유익을 위해 물질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그의 모든 삶에 얽혀 있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전혀 이기적이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유다가 가장 두드러졌다.
교훈: 가룟 유다는 탐욕의 늪에 빠져 그 영혼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약 1:15).
부가적용)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영양분을 섭취하면 만족감, 포만감을 느껴야 하는데, 먹을 만큼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해서 계속해서 음식을 섭취하는 폭식증이 있다. 신체적으로 폭식증이 있듯이, 영적인 폭식증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탐욕이다. 영적 폭식증인 탐욕은 자기학대적인 영적 병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병이다. 먼저 탐욕이나 탐심에 빠지면, 물질에 집착하고, 소유에 집착하여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한다. 또한 탐심에 빠지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할 뿐더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에도 또 다른 것을 취하면 그때 만족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한다. 이렇게 탐심은 계속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만족을 늘 미래로 유보시키는 병이다. 마지막으로 탐심에 빠지면 모든 것이 순환되지 않고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 병에 걸린다. 탐심으로 물질이 순환되지 못하고, 사랑이 순환되지 못하고, 축복이 순환되지 못하여 모든 것이 막히게 된다. 신체적 병에서도 합병증으로 몸이 총체적으로 어렵게 되듯이 탐심도 우리 삶을 총체적 난국으로 몰아가는 위험이 있다. 바로 삶의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되는 시발점이 탐욕이라는 것을 알면, 탐욕이 얼마나 심각하게 위험한 것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화요일(3월 4일)
우레 같은 제자들
도입)
치약 때문에 이혼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성격이 무척 꼼꼼해서 치약을 쓸 때면 맨 끝에서부터 눌러 썼다. 그러나 아내는 성격이 낙천적이고 덜렁대는 편이어서 치약을 아무렇게나 쓰고 내팽개쳤다. 이 때문에 이 부부는 늘 투덜대며 다투다가 어느 날 심하게 싸우고 헤어졌다. 이 사건은 인간관계의 파국이 인생의 파국임을 보여준다. 인간이란 글자 그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하고 인간관계에 실패하면 인생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형제가 함께 제자가 된 경우가 둘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들 중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신 후에 보아너게(Boanerges) 즉 ‘우레의 아들들’(막 3:17)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들에게 이 이름을 주신 것은 그들의 격렬한 기질과 불같은 성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유형의 제자들을 우레 같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1. 누가복음 9:51-56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들에 대한 이 제자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 구절들을 읽을 때 두 제자들의 입장에서 읽어 보십시오. 이들이 그렇게 반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어떤 말을 떠올렸으며, 구약의 어떤 사례를 기억하고 그렇게 반응했을까요?(참조 창 6, 7장, 마 8:12, 13:42, 막 6:11).
답:
이 제자들의 반응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 열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제자들이 가져야 할 좋은 덕목이다. 하지만 그릇 인도된 열심은 비록 의도가 좋다 할지라도 유익보다는 해를 끼치기가 쉽다. 예를 들어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행동의 모델로 엘리야를 떠올렸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 모델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여 그 제물을 사르게 하였지(왕상 18장), 고집 센 백성들을 사르게 하지는 않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죄인들에 대한 그들의 거칠고 비판적인 태도였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의 할 일은 죄인들을 십자가 아래로 인도하는 방법을 찾아 그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과거에 얼마나 죄 가운데서 살았든지 관계없이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죄사함을 입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자인 우리가 할 일이며, 심판은 다 주님께 맡겨 버려야 한다.
교훈: 야고보와 요한처럼 격렬한 기질과 불같은 성미를 가진 사람도 예수님에게서 배우면 그 열정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
부가적용)
격렬한 성품과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사고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래서 싫다고 골라내고 저래서 싫다고 골라내면 내 주변에 남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처럼 가라지는 뽑아내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요셉은 시기와 질투가 많으며 매사에 불평과 원망이 많던 형들과 함께 해야 했고 그로 인하여 끝내는 애굽의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경험했어야 했음에도 그는 그 형들과 함께 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성이다. 사람들을 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람을 품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관계야말로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좋은 인간관계는 좋은 인생을 보장한다. 좋은 친구와 좋은 이웃이 생기게 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 영국 속담처럼 다리를 놓아야 강을 건널 수 있다. 이처럼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처럼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주님처럼 넓은 마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기도로 이루어진다. 현명한 사람은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이야기한다. 사람 때문에 낙담하고 상처받은 마음, 분노로 일그러진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냄으로써 먼저 치유 받는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얻어진 영적인 힘은 인생을 사는 힘이 된다. 도저히 포용할 수 없는 사람을 포용하게 되고 감쌀 수 없던 사람을 감쌀 수 있게 된다. 기도는 그래서 하는 것이다.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행복을 더해주는 사람이 되자. 그러기 위해서 사람을 감싸고 함께 하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수요일(3월 5일)
베드로 유형의 제자들
도입)
베드로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베드로를 가장 잘 표현하는 형용사가 있다면 바로 "성질 급한"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베드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천방지축, 성질 급한 베드로의 모습이다. 이 속 없는 제자의 한심한 모습의 절정은 바로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런 그가 예수님에 의해 다시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베드로는 나서기를 좋아하는 충동적인 제자로 알려졌다. 누가복음 22:33-34에는 그가 예수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는 데도 가기로 준비하였다고 장담하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오래지 않아서 그는 자신이 한 말을 돌이켜 보아야만 했다(마 26:69-75).
1. 요한복음 18:1-11을 읽으십시오. 이 일화를 통해 베드로의 성격과 품성의 어떤 면을 엿볼 수 있습니까?(마 26:69-75).
답: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에 관해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에게 교훈이 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없다. 날마다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분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므로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특히 신실한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을 위한 열정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펼쳐져야 한다.
2. 요한복음 21:15-19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 특히 실수를 뉘우치고 당신을 붙잡는 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까?
답:
“여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위한 한 가지 교훈이 주어졌다. 복음은 악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죄를 변명할 수 없다. 은밀한 죄는 은밀히 하나님께 자복해야 하며 드러난 죄는 공공연하게 자복하여야 한다. …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공공연하게 부인했었다. 예수께서도 세 번씩이나 화살같이 날카로운 질문을 그의 상처받은 마음에 화급하게 던짐으로써 그의 사랑과 충성의 보증을 끌어내셨다. 모인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회개의 깊이를 나타내셨으며 한때 자만스럽던 제자가 얼마나 완전히 겸손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셨다”(시대의 소망, 811-812).
교훈: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 가운데 신실한 제자로 변화되었으며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참된 제자가 되었다.
부가적용)
예수님이 분명 베드로가 성질이 급하고 충동적인 것을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 주님은 이 베드로를 수제자로 인정하시고, 또한 그의 고백에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다. 특별이나 열쇠라면 당연히 사려 깊고, 조심성 있고, 침착한 제자를 찾을 법 한데, 주님은 베드로를 가리켜 열쇠를 맡기신다. 또한 그를 반석이라 부르시고 그가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한 기초가 되도록 약속하신다. 베드로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하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베드로는 분명 완전하지 못했다. 실수 투성 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간절하고, 열정적인 주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있었음을 주님은 귀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주님이 붙여주신 그의 이름처럼 처음에 그는 거친 돌덩이였다. 하지만 주님은 그가 돌임을 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깨닫고, 성숙하고, 다듬어 질 때 언젠가 빛나고 탄탄한 반석이 될 수 있음을 보셨던 것이다. 거칠었고,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순수하게 드렸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깎이고 깎여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화되어 반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요일(3월 6일)
도망하는 제자들
도입)
제자들의 도망과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사건은 자신들의 연약성을 잊고 자신을 의지한 연고이다. 주님의 가르침 보다는 항상 자신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육신의 자신감을 앞세울 때 한 순간에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약함이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언제나 주님 말씀과 가르침에 깊이 귀를 기울이는 자만이 바로 세움을 입게 된다. 온갖 비난과 모욕 가운데서의 냉철한 중심, 침묵할 때와 말할 때를 아는 지혜와 용기, 약함을 인정하고 위의 분을 직시하는 믿음이 우리를 바로 세우는 복음의 핵심임을 깨달아 알아 가는 삶이되기를 바란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 26:56).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반을 보냈다. 그들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일들을 목도했다. 이 세상 수십억의 인구 가운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그분께서 육신으로 계신 동안 날마다 교제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 제자들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특권을 누린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타락한 인간인지라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교훈을 쉽게 배우지 못하였다.
1. 사복음서 중 어느 하나를 택하여 쭉 훑어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어떤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으며, 어떤 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그분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놀라운 증거들을 얼마나 많이 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두려운 경고가 됩니까?
답:
예수께서는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할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아시고 당신의 수난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으며 아무런 준비 없이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제자들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듣기보다는 그분께서 행하신 일을 바라보기만 한 것 같다. 그분의 행동은 그들의 마음속에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게 해 주었으므로, 그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음성이 울리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으나, 그들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큰 유익을 놓치고 말았다.
교훈: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자리와 감람산 담화 등 여러 경우에 당신의 수난에 관해 예고하셨으나 제자들은 듣지 않았고 결국은 다 도망하고 말았다.
부가적용)
주님은 제자들을 버리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지만 제자들은 죽음이 두려워 주님이 고난당하실 바로 그 순간에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 이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힘만 의지할 때는 얼마나 약한지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모든 제자들이나 성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모두 양떼에 불과하다. 이리가 오면 도망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위험에 대해 이미 경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때가 오면 주님을 위해 죽을 지언정 절대 주님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그 때가 되자 갑자기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치고 만다. 약속하는 것과 약속을 지키는 것은 별개이다. 우리는 변하기 쉬운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믿지 말고 날마다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금요일(3월 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416-418, 499-505, 592-595, 644-645, 10권, 315-316, 574-575, 656-657, 시대의 소망, 제39장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64-371), 제40장 ‘호수의 밤’(377-380), 437-438, 제60장 ‘새 나라의 율법’(547-551), 제62장 ‘시몬의 집에서 열린 잔치’(557-565), 제85장 ‘다시 한 번 바닷가에서’(808-817). 사도행적, 제53장 ‘사랑받은 제자 요한’(539-543).
“유다는 그의 약삭빠른 재능을 활용함으로써 돈에 대한 사랑을 그의 마음에서 키우고 있었다. 만약 그의 실제적인 재정 관리 능력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꼴지워지고 계발되고 잘 활용되었더라면 그것은 그 어린 교회에 큰 봉사가 되었을 것이며 그의 마음은 성화되어서 그는 하늘 사물을 바르게 인식하는 정확한 식별력과 분명한 통찰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세상적인 술수를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다. 밖으로 드러나는 죄는 없었지만,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극도로 교활하고 이기적이고 인색한 정신은 결국 얼마 안 되는 적은 돈으로 그의 주님을 팔게 하였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01).
“구주의 공생애 기간 전체를 유다는 내내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다 가졌다. … 그러나 유다는 공로만 일삼는 자였다. 그는 교회의 재정 관리를 잘 할 수 있고 그의 예리한 사업적 수완으로 교회에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두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칭송을 좋아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을 포기하는 일을 거절하였다. 그는 한 번도 그의 영원한 복리를 그리스도께 위탁해 본 적이 없었다. … 유다는 하나의 종교적 사기꾼이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01-110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이번 주에 공부한 것 외에 어떤 유형의 제자들이 있을까요? 그러한 유형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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