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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주님을 따름: 행도하는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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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08-03-01 21:41 조회5,5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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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주님을 따름: 행동하는 제자도
3월 1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6분)

도입)
제자도란, 마음속으로 믿는 것을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 유진 피터슨
교회와 세상을 고치고 싶다면 나 자신부터 시작해야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분명하게 실행하여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이다. 예수의 제자도와 그 작용원리를 안다면 말이다. 우리의 거장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고치거나 어떤 종교기관도 개혁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으로 충만해지면 '땅 끝까지 이르러' 그분의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영적으로 변화되려면 반드시 사고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바울은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했다(롬 1:28). 사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어떠하심에 관한 생각을 배겨 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주님 되신 그리스도께 실제로 순종하면 일상생활이 완전히 변화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제자들은 그들의 삶이 닿는 곳 어디에서나 순종을 통해 하나가 된다. 삶의 현실적인 정황들 속에서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인들은 즉시 서로 동화한다. 그들 속에 명백하게 흐르고 있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삶, 영원한 종류의 삶 때문이다. 주변의 악에 협력하지 않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그들은 자석과 쇠붙이처럼 서로 끌린다. 자신의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면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 연합 안에서 다른 모든 차이는 의미를 잃는다."

기억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5-37).

연구범위: 마 8:14-15, 10:34-37, 28:18-20, 눅 5:17-26.

학습 포인트: 우리는 제자로서 어떤 동기를 가지고 봉사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종류의 반대에 부딪칠 것을 예상해야 하는가? 우리가 제자의 일을 시작할 때에 어떤 약속이 주어져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는 제자도에 무엇이 포함되는지에 관해 숙고해 보자.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으나, 각 사람은 그 부르심을 깨닫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토머스 캐머런(Thomas Cameron)은 다음과 같은 어느 유명한 설교가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헨델(Handel)의 파이프 오르간을 위해 바람을 잣거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떨어진 붓을 주워 주거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쌍안경을 들어주거나,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가방을 들어 주는 일을 기꺼이 하겠습니다. 세상의 위대한 영웅들을 위해 하찮은 봉사를 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영예가 된다면, 하물며 인류의 구세주를 위해 봉사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을 얼마나 더 큰 특권이 되겠습니까?”(A. 고든 내스비 편, 기독교 세계의 보물, 327).

일요일(2월 24일)
봉사와 제자도

도입)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이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우리가 잘 아는 황금률이라는 말씀이다. 우리 동양의 성현으로 우리가 존경하는 공자도 논어에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였다. 내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其所不慾, 勿拖於人, 기소불욕, 물타어인)는 것이다.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이나 자유파 바리새인 힐렐이나 혹은 구약 외경 토비트 편에도 다 비슷한 내용의 교훈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모두 소극적인 것으로 교훈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교훈은 지금 말한 모든 다른 교훈보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즉 예수님의 교훈은 적극적인 교훈이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즉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이와 같이 소극적으로 가르쳐 주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이 진리를 가르칠 때 적극적으로 가르쳐주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네게 하기 원하는 대로 그대로 남을 먼저 대접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렇게 우리 주님의 교훈의 중심은 그 원칙은 옳은 생활을 하기 위하여서 악한 것을 제하여 없이 하는 것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황금률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권면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봉사와 제자도는 보다 적극적인 선을 베푸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봉사는 소극적인 봉사가 아닌 세상을 향한 보다 적극적인 봉사가 되어야 한다. [시37:3]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1. 마태복음 8:14-15, 마가복음 1:29-31, 누가복음 4:38-39을 읽으십시오. 이 기사에서 우리는 제자도에 관해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주어진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이 세 기사는 모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만이 그녀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어떤 학자들은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상세한 기록을 했다고 믿는데, 특히 헬라어 상으로 특정한 열병으로 분류된 하나의 질병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2. 이 기사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녀의 병든 사실을 말하고 도와주시기를 요청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물론 예수께서 그녀의 문제를 이미 알고 계셨다고 가정할 수 있지만 그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당신께 그 사실을 말하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능력으로 고쳐주시도록 간청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역할에 관해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까?

답:

베드로의 장모는 나음을 입은 후에 봉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회복되자마자 자신을 걱정해주던 많은 사람들로 집안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지치고 배고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병으로 인해 아직도 피곤한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즉시 그들을 위해 시중을 들면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어근은 아킨(akin)인데 ‘종,’ ‘봉사자,’ ‘집사’ 등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한 그녀는 나음을 입자마자 즉시 봉사를 시작하였다.

교훈: 베드로의 장모는 질병에서 회복되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참된 제자도는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섬기는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는 무엇인가에 기여하기 위해서 지음 받은 존재다. 우리는 자원을 소비하기 위해 지음 받은 것이 아니다. 먹고 숨 쉬고 자리를 차지하라고 지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변화를 만들라고 우리를 창조하셨다. 많은 베스트셀러들은 우리가 인생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조언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에 살게 하시는 이유가 아니다. 이 땅에 지금보다 무엇을 더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저 축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사역'은 혹은 섬김이라 불린다.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여기서 '선한 일' 이란 우리의 섬김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을 섬길 때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골 3;23-24, 마 25;34-45, 엡6;7),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섬김' 과 '사역' 그리고 '종' 과 '사역자' 라는 단어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로 우리가 사역자요,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고 있다면 우리는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병상에 있던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을 때, 그녀가 즉시 되찾은 건강의 선물을 가지고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기" (마 8;15) 시작한 것과 같이 우리도 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고침을 받은 것이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서 복을 받은 것이다. 그저 빈둥거리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구원받은 것이다.

월요일(2월 25일)
예수님과 중풍병자

도입)
2005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중국의 고비사막에서, 아시아 최초의, 사막 마라톤 대회가 열린 일이 있다. 약 253킬로미터, 무려 600리의 사막 길을, 하루도 아니고, 6박 7일 동안, 22나라에서 온, 90여명의 선수가, 사막의 모래 폭풍, 그리고 사막의 뜨거운 태양을 견디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그런 아주 특이한 마라톤이 열렸다. 그런데 이 경기를 취재하던 기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 두 명의 한국 선수가 있었다. 한 사람은, 시각 장애인이었던 이용술씨라는 분이고, 또 한 분은, 그분을 곁에서 인도하기 위해서 같이 참여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강북구 구청 직원이었던 김경수씨였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무려 253킬로미터를, 계속해서 함께하면서, 허리끈으로 묶고, 그렇게 계속해서 달려갔다고 한다. 이 경기를 취재하던 조선일보의 이석우 기자는, 이런 글을 남겼다. ‘우정은, 자연 속에서, 이렇게 위대해 질수가 있는가?’ 라는 기사를 남겼다. 아마도, 우정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글을 남긴 분은, 고 함석헌 선생이 아니었나 싶다. 그분의 유명한 시 가운데,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를, 제가 소개해 드리고 싶다.
‘만리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 맡기며 / 맘 놓고 갈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꺼지는 시간 /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 놓고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 하며 / 빙긋히 눈을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송보다도 /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섬김은 진정한 의미로 나아가는 통로다. 사역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리라" (롬 12;5).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서로 섬길 때 우리의 삶은 영원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몸은 한 지체뿐이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고전 12;14, 19).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기 원하신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삶을 베풀며 사느냐이다. 얼마나 오래(how long)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how) 사느냐이다.

누가복음 5:17-26에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하여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누가복음 5:17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힘 있고 중요한 핵심을 발견하게 됩니까? 또한 우리를 위한 어떤 경고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유대 지도자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각처로부터 왔다. 본문은 그 때에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에 있었으며, 도움과 치유와 구원이 거기에 있었다. 단 하나의 문제점은 자아와 죄와 교만이 이 일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힘 있는 경고가 되는가?

한편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첫째,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자들을 보면 그들이 참으로 적극적으로 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무리를 뚫고 지나갈 수 없음을 알고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그들은 얼마든지 쉽게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친구를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일했던가!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인정해 주셨는지 주목해 보라.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드러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분께 데리고 오는 일을 실천하였다.

중풍병자는 나음을 입은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떠나갔다. 그의 회복된 몸과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간증은 강력한 전도의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참조 26절).

한편 이 모든 과정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참람됨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가르침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경험을 방해하고 있었다. 우리를 위한 귀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교훈: 중풍병자를 낫게 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그의 친구들처럼, 도움이 필요한 자를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제자도의 기본이다.

부가적용)
세계 제 1차 대전 중에 남겨진, 두 친구에 대한,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가 있다. 이들은 같은 마을에서 함께 자라나, 함께 징집을 받고, 함께 훈련을 받아, 같은 부대에 배속되어, 함께 전쟁터에서 싸웠다. 그런데 한 날, 한 친구가 적과 싸우다가, 아군의 부대로부터 혼자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참호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온 사방은, 적의 위협적인 포화 아래 있어서, 그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를 구하려는 어떤 시도 그 자체도 자살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그의 친구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참호에서 빠져 나오려고 그러면, 옆에 분대장이 그를 붙들고, ‘꼼짝마, 필요 없는 짓이야! 그대로 있어’계속해서 그를 저지했다. 그러나 한 순간, 자기 상관이 한 눈을 판 사이에, 그는 쏜살같이 참호를 빠져나와, 친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친구를 들쳐 업고, 자기의 참호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친구를 참호로 데리고 왔을 때, 자기의 친구는 이미 등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그 사람까지도 적진의 포화를 입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가까스로 가뿐 쉼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런 그를 바라보면서, 화가 난 분대장이 소리쳤다. ‘거봐!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이때 그는 가픈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분대장님, 하지만 제가, 그의 곁으로 달려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야, 난 네가 올 줄 알았어. 친구야, 난 네가 올 줄 알았어.’ 이렇게 좋은 친구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친구를 위해서, 목숨도 던질 수가 있는데, 아니,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다. 제자도의 가장 기본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남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수고 이와 같은 정신이 제자도의 기본이라고 믿는다.

화요일(2월 26일)
“땅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마 10:34-37, 눅 12:49-53)

도입)
우리는 항상 진리의 양면을 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전혀 다르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화평을 주려함이 아니라 오히려 검을 주러왔다’는 말씀이다. 이어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 그 검이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피터 와그너' 박사는 말한다. 이 시대는 특별히 21세기는 영적 전쟁이 극심할 세계라고 예언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육신의 정욕과 세상적인 모든 인간의 모습들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정면으로 충돌할 어느 세기보다 가능성이 많은 세기라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 도처에 사단의 세력들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대적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이다. 복음을 들고 가정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에는 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화평했던 아들과 아비 사이를, 딸과 어미 사이를,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를, 갈라놓아 서로 불화하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무조건 화평케 하는 분만이 아니심을 알게 된다. 그러면 아들과 아비가, 딸과 어미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과거에는 무엇 때문에 평화(和平)했고,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불화(不和)할까? 그게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정의(正義) 때문인가? 정의 때문에 아들과 아비가, 딸과 어미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화목(和睦)하고 화평(和平)했겠는가? 그리고 이번에는 그 정의를 깨트린 불의(不義) 때문에 서로 불화하겠는가? 그게 전혀 아니다. 그들이 정의 때문에, 아니면 정의를 위해서 화평했던 것도 아니고, 그 정의를 깨뜨린 불의 때문에 불화해진 것도 아니다. 정의니 불의니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바로 생명(生命) 때문이다. 다른 말로하면 빛(陽) 때문이다. 과거에 아들과 아버지는, 딸과 어미는,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같은 사망(死亡) 안에서 화평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모두 어두움(陰) 가운데서 하나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를 통해서 그들 가운데 생명 곧 빛이 들어왔다. 아들과 딸과 며느리가 예수를 믿으므로 생명 곧 빛을 영접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여전히 사망 곧 어두움이다. 그 때로부터 싸움은 시작된다. 생명(生命)과 사망(死亡)이, 빛(陽)과 어두움(陰)이 서로 싸우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아니다. 생명과 사망의 싸움이요. 빛과 어두움의 싸움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싸움을 아예 모르든지, 싸움을 피하려고 하던지, 한술 더 떠서 싸움을 말리려고 하던지, 거기에다가 한술 더 떠서 싸운다고 정죄하고 비난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장 평화로운 이미지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 5:9)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여기서 제자들 중 몇 사람이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 즉 그들이 전해야 했던 기별이 오직 화평만을 가져오리라는 생각을 일소(一掃)하고 있다. 그들이 집집을 방문할 때, 사역의 결과로 다툼이 일어난다고 해도 놀라지 말 것이었다. …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종종 가장 신랄하고 혹독한 원수가 되어 버린다. 이런 일은 이방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일어나며, 종교의 형식만 행하며 생애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하여는 전혀 알지 못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일어난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02-303).

1. 자신의 그리스도인 경험, 혹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 아는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총동원해 볼 때, 여기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이 말씀은 제자의 삶에 있어서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참조 마 10:24-25).

답: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여러 면에서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의 삶을 살기 때문에 우리와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가운데서 불화와 분쟁을 일으키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언제나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일이 닥칠 때에 놀라지 말기를 바라신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불화와 분쟁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진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진리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세상 사람들은 평안을 원하고 평화하고 마음이 편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사단은 그것을 미끼로 사용한다. 사단은 일시적인 평화를 가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게 만들고 사단은 일시적인 평화를 가지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든다. 진정한 평화와 영원한 평화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믿지 않는 집안에 어느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면 그 집안은 그 때부터 평화를 얻기 위한 불화가 시작된다. 그 불화는 지금까지 계속 있어 왔던 것으로 예수를 믿는 한 사람으로 인해 참 평화를 얻고자 함인데 사단은 그 예수 믿는 사람으로 불화가 생겼다고 인식하게 되며 사단은 쉽게 그 자리를 내어 주지 않는다. 인간은 평화를 가장한 내면의 죽음 속에 살고 있다. 진정한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한다. 구원은 각 개인과의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서로 화해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예수님은 화해시키는 분이심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의 화해나 평화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있는 진리의 빛 가운데서이다. 그러므로 참된 평안은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의 빛 안에서의 이루어지며 화해와 평화는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내가 행복하고 도덕적이었다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예수님이 오신 까닭은 이전의 행복과 평안이 그릇된 수준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와 개인적인 관계에 상관없이 일체의 평안을 찔러 가르는 검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수요일(2월 27일)
우리 영혼의 가치

도입)
사람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가 가진 것(What he has)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가 가진 재물, 재능, 외모 등과 같은 것들이 사람의 평가 기준이다. 소위 이런 것들이 ‘몸 값’이 된다. 또 사람들은 그가 한 것(What he does)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매긴다. 업적, 성취, 명예 등이 그런 것들이다. 우리의 몸값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려는 것도 이런 ‘몸 값’을 높이기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결코 이 ‘몸 값 올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나, 우리가 한 것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 with God)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귀한 존재들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갈바리 십자가에서 그분의 생명을 희생하셨다. 잃어버린 여러분과 저를 위해 예수님께서 지불하신 대가는 그분의 생명이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바 된 사람들이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 아무리 나 자신을 놓고 봐도 부족하고 결점 투성이 일 뿐이다. 그야말로 무가치한 존재이다. 그러나 나를 자녀로 삼아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그분의 희생이 무가치한 존재인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 주신 것이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여해 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5-37)

어느 잡지의 기사에 어떤 특별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매우 비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되었다. 그들의 학업 성취도는 같은 연령대의 다른 학생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들은 놀라운 성공의 사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잡지는 이 학생들 중 하나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하였다. 그 학생은 말하기를, “우리는 죽음을 없애버리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하였다. 죽음을 없앤다고?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공부를 더 잘해야 할까?

우리가 누구이든, 우리의 인생에서 성취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조만간 우리에겐 죽음이 닥쳐오며 머지않아 모든 것이 무덤으로 끝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얼마나 살겠는가? 우리 중 대부분은 100살을 채우지 못할 것이며, 아마도 거기에 훨씬 못 미칠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만약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어떤 유산을 남겨놓을 것인가? 수천 년 전에 솔로몬은 이와 동일한 문제를 묵상하고(참조 전 1, 2장), 이렇게 결론지었다. “인생은 그 모든 수고와 고생을 다하여도 다 헛된 것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우리 인생이 ‘숨결’에 불과하며, ‘안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교훈: 우리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죽음보다 강한 사명이 주어져 있다.

부가적용)
“한 영혼의 가치를 누가 능히 평가할 수 있으리요? 만일 그대가 그 가치를 알고자 하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그 핏방울과 같은 땀을 흘리시면서 큰 고민을 당하시는 것을 주목하여 보라.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바라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낙담의 부르짖음을 들어 보라. 상처 난 머리, 찔린 옆구리, 상한 발을 바라보자. 그리스도께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시고 행하신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하늘 자체가 위험을 무릅썼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한 죄인만을 위하여서라도 당신의 목숨을 버렸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가면 거기서 그대는 한 영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실물 194,195).”

목요일(2월 28일)
“그러므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

도입)
그리스도의 제자란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전하는 것이다. 전해도 두루 전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인 삶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주장과 의견 자신의 뜻과 욕심을 포기하는 것은 그냥 되는대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우리는 이전의 방식대로 그렇게 세상과 동화되어 내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어주어서는 안된다. 믿음은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나의 지혜, 나의 경험, 나의 판단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가장 적극적인 삶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인생이 구원받기 전보다 구원받은 이후에 훨씬 더 적극적이고도 놀라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대의 율법주의 안에서 하나님을 제한하고 살았을 때 그가 알았던 하나님은 금욕적이고 종교적인 하나님이었지만 그가 구원받은 이후에 알게 된 하나님은 자신의 인생을 축복하시고 기대하지 않았던 새롭고 활력 있는 삶을 살게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셨다. 에베소서 5:14-17을 찾아 읽어보자!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하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주의하여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로서 조심스럽게 걸어 시간을 되찾으라. 이는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한 가장 위대한 말씀 중 하나를 우리는 마태복음 28:18-20에서 발견한다. 이 구절을 읽어보라. 여기에 나오는 ‘가라,’ ‘제자 삼으라,’ ‘침례를 주라,’ ‘가르치라’ 등의 모든 동사들을 살펴보라. 제자들은 반드시 제자를 만드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원리는 이처럼 단순한 것이다.

1. 마태복음 28:18-20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참조 눅 1:32, 행 10:36, 엡 1:20, 히 1:13)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제자 삼는 일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에게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답: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제자 삼는 일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모든 족속을 가르쳐야 한다. 여기에는 인종적 차별이나 남녀의 구별이나 민족적 경계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온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롬 5:17-19, 히 2:9). 따라서 복음의 지상명령도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계 14:6-7).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모든 족속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의깊이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행동하는 제자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자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순종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이 순전히 교리적 진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 주어진다는 관념을 완전히 깨뜨리셨다. 물론 그러한 일도 제자가 되는 일의 한 부분이 되겠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며, 우리는 그분을 순종함으로 따른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그분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훈: 진정한 제자의 삶은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순히 교리에 동의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순종함으로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내는 멋진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행동보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물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26)’는 사도 야고보의 말을 인용해 행동을 강조하고 앞세운다. 그러나 야고보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었지, 단지 행동을 보여주려고 행동을 강조했던 것이 아니었다. 야고보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벗이라는 아브라함을 내세워 행동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믿음의 순종을 강조했다(약 2:23-24). 행동의 강조도 단순히 밖으로 나타난 한 가지 행동이나 선행이 아니라, 온전히 율법을 지킨 자의 행동, 긍휼로 나타나는 행동에 역점을 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신 긍휼로 나타난-우리의 행동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믿음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약 2:10-13). 우리 인간으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이요 사랑이다.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행동을 강조하다 보면,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는 말처럼 그런 가벼운 행동으로 삶을 유지하려고 애쓰게 되고, 그런 행동의 가벼움이 금방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로 드러나게 돼 있다. 삶이란 단절돼서 어쩌다 한 두 번씩 보여주는 멋진 행동과는 다르다. 삶은 별로 요란치 않더라도 그저 숨을 쉬듯이, 강물이 흐르듯이 끊임없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삶이어야 한다. 믿음의 사람들의 행동은 늘 그러했다.

금요일 (2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01-304, 10권, 278-282, 시대의 소망, 제37장 ‘최초의 복음 전도자들’(349-358), 제48장 ‘누가 가장 크냐’(433-442), 마가복음 16:15-20, 요한복음 14-17장.

“구주께서는 복음에 대한 세상의 증오는 정복될 것이며 잠시 후에 그 반대가 그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분께서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투쟁이 생기는 것은 복음의 영향이 아니라 복음에 반대하는 결과로 생긴다. 모든 박해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박해는 가정 안에서의 알력이요 절친한 세상 친구들과의 사이가 소원(疎遠)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선언하신다”(시대의 소망, 357).

“예수께서는 다섯 번째 계명의 구속력을 재가(裁可)하셨고, 자녀들이 그 부모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려는 어떠한 시도도 책망하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에 대한 사랑이 모든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가로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두 의무가 서로 상충될 경우에 그러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을 섬김이 인생의 최고 규칙, 곧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5계명을 포함하고 있는 십계명의 ‘둘째’ 돌판은 그 성격과 중요성에 있어서 첫째와 같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나 안교활동반에서, 혹은 교회 차원에서 도와 줄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2. 이번 주에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의 삶에 관해 배웠습니다.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이 분야에 대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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