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9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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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년 작성일08-05-23 17:20 조회5,620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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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학습 목표>
<서론>
☆부드러워야 좋은 것들을 예를 들어보라.
▷이불, 배게, 말투 등
사랑도 부드러운 게 좋다. 부드럽게 감싸안아주는 사랑, 부드럽게 와닿는 사랑...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부드럽고 친절한 사랑이셨다. 그분의 사랑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배우고 체험할 때 우리도 진정한 사랑을 할 수가 있다. 이번 교과를 통해 그분의 사랑에 흠뻑 빠져보자.
<본론>
A. 소외된 자들에게
1. 요 8:2~11에서,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예수님의 어떤 마음을 느끼는가?
▷범죄현장에서 벌거벗은 채로 모든 사람에게 수치가 드러난 가련한 여인, 손가락질하는 자들 앞에서 더 이상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인생 막장에 갇힌 여인, 그녀에게 삶이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속히 그들의 돌에 맞아 없어져버리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길바닥에 벌레처럼 내동댕이쳐진 여인을 둘러싼 사람들은 예수님께 시선을 돌렸다. “모세의 법대로 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쳐 죽이라 했는데, (비꼬는 투로) 모세보다 위대하신 선생님은 어떻게 하라고 명하시겠습니까?”
그들의 의도는 오직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 그분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그들 스스로 재판할 권리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로 치라 하면 로마에 반역하는 것으로 고소할 것이고, 반대로 얘기하면 모세의 법을 어겼다고 정죄하며 비난할 것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스스로를 올무에 걸리게 하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그들에게 주님은 아무런 대답을 안하시고 대신 땅바닥에 엎드려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들이 답답하여 주님을 재촉했다. 그러자 주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 그들은 그 대답을 듣자, 두 주먹에 굳게 쥐고 있던 돌들을 힘없이 내려놓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다른 사람을 돌로 칠 만큼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님의 의외의 말씀과 사람들의 반응에 놀라 여인이 고개를 들어 예수님을 슬쩍 바라보았다.
모두가 자기를 짐승 취급하고 저주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런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이 분은 도대체 누구신가? 잔뜩 움츠리고 떨고 있던 그녀는 그분의 눈빛에서 따스함과 포근함을 느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를 정죄한 자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그녀를 정죄할 만큼 무죄한 자들이 없으니 스스로를 너무 학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마라.”
주님은 사람들의 죄를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 죄를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셨다. 또한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던 여인에게 주님은 정죄치 않으시다고 하심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주셨다.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이 일 가운데서 예수의 성품은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신다. 세상은 이 곁길로 나아간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는 주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하셨다. 무죄하신 분은 죄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시대의 소망 462, ☞교과 122 참조)
사람들은 남의 실수를 보면 박수를 치고 넘어진 자를 보면 비난한다. 그러나 주님은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신다. 사람들은 남의 수치를 들추어내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의 수치를 가리워주고 덮어주기를 좋아하신다. 사람들은 남의 죄를 보지만, 주님은 그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죄인을 보시고 동정하신다. 이 친절한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살아갈 용기를 얻고 삶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교과 122, 123 참조
2. 마 19:13, 14에서,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
요즘 들어 어린이의 인권이 중요시되고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만 해도 어린이들은 사람 축에도 끼지 못했다. 사람 수를 셀 때는 언제나 남자 어른만을 세었다. 어린이들이 어른들 가운데 있는 것은 어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어린이들은 어른들 틈에 낄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보자 다른 어른들과과는 전혀 다른 온화함을 느끼고 거침없이 예수님께 매달렸다. 제자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자 짜증이 났다. 버릇없는 것들을 혼내줘야 다신 얼씬거리지 못할거라 생각하고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하셨음을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은 무례하고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이라도 어른들과 똑같이 중요한 존재이며 똑같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심지어 다른 곳에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당신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마 18:5)고 하셨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셨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 속에서 장차 주의 사업에 충성할 큰 일꾼들을 보셨다.
유명한 전도자 D.L.무디가 주일학교 교사였을 때. 전도활동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저는 오늘 두 사람 반을 전도했습니다." 사회자는 의아해 하다가 곧, "알겠습니다. 어른 두 사람, 어린이 한 사람을 전도하셨군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무디는 ‘반대로 말하셨습니다. 저는 어린이 두 명과 어른 한 명을 전도했습니다. 어른은 벌써 인생을 절반 이상 살았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자면 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는 살아갈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린이를 구원한다는 것은 그의 일생을 구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하며 어린 영혼의 가치를 강조했다.
오늘날 어린이는 어느 때보다 존중받아야 한다. 교회의 미래가 어린이에게 있기 때문이다.
☞교과 124, 125 참조
3. 요 11:5에서, 예수님은 누구를 사랑하셨는가?
▷나사로의 가정은 일찍 부모님을 잃고 오누이가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힘도 없고 백도 없고 내세울 것 없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들 가정에 자주 가서 쉬셨다. 그 가정은 주님께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최고의 안락처였다. 기대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가정에서 주님은 최고의 쉼과 평안을 누리고 그들에게 가장 든든한 백이 되어 주셨다.
☞교과 126, 127 참조
B. 원수들에게
4. 마 5:44을 통해 주님은 어떤 사랑을 가르치셨는가?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갈며 악착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원수를 갚진 못할 망정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게 말이 되는가? 당신이 당해보면 그렇게 못할 걸. 이게 상식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온 몸으로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사실 원수의 땅에 오셔서 원수들을 위해 사시다가 원수들을 위해 돌아가셨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온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원수의 영토가 되었고,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원수 된 지구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범죄한 지구를 쓸어버리기 위해 천사의 군대를 보내셨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을 끝장내는 대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다.](☞교과 128, 1문 아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원수는 바로 나였다. 나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다. 주님은 나 혼자만을 위해서라도 그런 희생을 즐겨 하셨을 만큼 당신의 원수인 이 죄인을 그렇게 사랑하신 것이다.
“나는 가장 악한 원수였는데, 오 나 혼자만을 위해서라도 돌아가신 예수님은 신빌세.”(복음성가 일부)
5. 마 23:37에 나타난 주님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끊임없이 배반하고 불순종하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애달픈 사랑, 짝사랑, 그렇게 간절히 부르시고 용서하고 오래 참고 기다리건만 끝까지 그분을 거절하고 마는 이스라엘 백성,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멸망받아야 하는 그들을 생각할 때 “그래, 그렇게 봐줘도 소용없으니 어디 한번 당해봐라.”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을 끝내 잃어야 한다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부모의 애통함이었다.
주님은 원수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돌이켜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교과 130, 1문 아래, 131 참조
6. 마 23:25-35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강경함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
☞교과 130, 2문 아래 참조
[구주께서는 결코 진리를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외식과 불신과 죄악은 기탄없이 책망하셨다. 그러면서도 책망하시는 그분의 음성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복음 교역자, 117).](☞교과 132 참조)
<적용>
1.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가? 그 사랑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
2.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나는 어떻게 그 사랑에 보답하겠는가?
▷
<결론>
1. 주님은 소외된 자들이나 원수들이라도 차별없이 사랑하셨다.
2. 우리도 그러한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자.
<서론>
☆부드러워야 좋은 것들을 예를 들어보라.
▷이불, 배게, 말투 등
사랑도 부드러운 게 좋다. 부드럽게 감싸안아주는 사랑, 부드럽게 와닿는 사랑...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부드럽고 친절한 사랑이셨다. 그분의 사랑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배우고 체험할 때 우리도 진정한 사랑을 할 수가 있다. 이번 교과를 통해 그분의 사랑에 흠뻑 빠져보자.
<본론>
A. 소외된 자들에게
1. 요 8:2~11에서,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예수님의 어떤 마음을 느끼는가?
▷범죄현장에서 벌거벗은 채로 모든 사람에게 수치가 드러난 가련한 여인, 손가락질하는 자들 앞에서 더 이상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인생 막장에 갇힌 여인, 그녀에게 삶이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속히 그들의 돌에 맞아 없어져버리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길바닥에 벌레처럼 내동댕이쳐진 여인을 둘러싼 사람들은 예수님께 시선을 돌렸다. “모세의 법대로 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쳐 죽이라 했는데, (비꼬는 투로) 모세보다 위대하신 선생님은 어떻게 하라고 명하시겠습니까?”
그들의 의도는 오직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 그분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그들 스스로 재판할 권리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로 치라 하면 로마에 반역하는 것으로 고소할 것이고, 반대로 얘기하면 모세의 법을 어겼다고 정죄하며 비난할 것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스스로를 올무에 걸리게 하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그들에게 주님은 아무런 대답을 안하시고 대신 땅바닥에 엎드려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들이 답답하여 주님을 재촉했다. 그러자 주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 그들은 그 대답을 듣자, 두 주먹에 굳게 쥐고 있던 돌들을 힘없이 내려놓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다른 사람을 돌로 칠 만큼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님의 의외의 말씀과 사람들의 반응에 놀라 여인이 고개를 들어 예수님을 슬쩍 바라보았다.
모두가 자기를 짐승 취급하고 저주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런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이 분은 도대체 누구신가? 잔뜩 움츠리고 떨고 있던 그녀는 그분의 눈빛에서 따스함과 포근함을 느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를 정죄한 자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그녀를 정죄할 만큼 무죄한 자들이 없으니 스스로를 너무 학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마라.”
주님은 사람들의 죄를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 죄를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셨다. 또한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던 여인에게 주님은 정죄치 않으시다고 하심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주셨다.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이 일 가운데서 예수의 성품은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신다. 세상은 이 곁길로 나아간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는 주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하셨다. 무죄하신 분은 죄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시대의 소망 462, ☞교과 122 참조)
사람들은 남의 실수를 보면 박수를 치고 넘어진 자를 보면 비난한다. 그러나 주님은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신다. 사람들은 남의 수치를 들추어내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의 수치를 가리워주고 덮어주기를 좋아하신다. 사람들은 남의 죄를 보지만, 주님은 그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죄인을 보시고 동정하신다. 이 친절한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살아갈 용기를 얻고 삶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교과 122, 123 참조
2. 마 19:13, 14에서,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
요즘 들어 어린이의 인권이 중요시되고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만 해도 어린이들은 사람 축에도 끼지 못했다. 사람 수를 셀 때는 언제나 남자 어른만을 세었다. 어린이들이 어른들 가운데 있는 것은 어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어린이들은 어른들 틈에 낄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보자 다른 어른들과과는 전혀 다른 온화함을 느끼고 거침없이 예수님께 매달렸다. 제자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자 짜증이 났다. 버릇없는 것들을 혼내줘야 다신 얼씬거리지 못할거라 생각하고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하셨음을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은 무례하고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이라도 어른들과 똑같이 중요한 존재이며 똑같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심지어 다른 곳에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당신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마 18:5)고 하셨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셨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 속에서 장차 주의 사업에 충성할 큰 일꾼들을 보셨다.
유명한 전도자 D.L.무디가 주일학교 교사였을 때. 전도활동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저는 오늘 두 사람 반을 전도했습니다." 사회자는 의아해 하다가 곧, "알겠습니다. 어른 두 사람, 어린이 한 사람을 전도하셨군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무디는 ‘반대로 말하셨습니다. 저는 어린이 두 명과 어른 한 명을 전도했습니다. 어른은 벌써 인생을 절반 이상 살았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자면 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는 살아갈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린이를 구원한다는 것은 그의 일생을 구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하며 어린 영혼의 가치를 강조했다.
오늘날 어린이는 어느 때보다 존중받아야 한다. 교회의 미래가 어린이에게 있기 때문이다.
☞교과 124, 125 참조
3. 요 11:5에서, 예수님은 누구를 사랑하셨는가?
▷나사로의 가정은 일찍 부모님을 잃고 오누이가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힘도 없고 백도 없고 내세울 것 없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들 가정에 자주 가서 쉬셨다. 그 가정은 주님께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최고의 안락처였다. 기대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가정에서 주님은 최고의 쉼과 평안을 누리고 그들에게 가장 든든한 백이 되어 주셨다.
☞교과 126, 127 참조
B. 원수들에게
4. 마 5:44을 통해 주님은 어떤 사랑을 가르치셨는가?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갈며 악착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원수를 갚진 못할 망정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게 말이 되는가? 당신이 당해보면 그렇게 못할 걸. 이게 상식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온 몸으로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사실 원수의 땅에 오셔서 원수들을 위해 사시다가 원수들을 위해 돌아가셨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온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원수의 영토가 되었고,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원수 된 지구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범죄한 지구를 쓸어버리기 위해 천사의 군대를 보내셨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을 끝장내는 대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다.](☞교과 128, 1문 아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원수는 바로 나였다. 나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다. 주님은 나 혼자만을 위해서라도 그런 희생을 즐겨 하셨을 만큼 당신의 원수인 이 죄인을 그렇게 사랑하신 것이다.
“나는 가장 악한 원수였는데, 오 나 혼자만을 위해서라도 돌아가신 예수님은 신빌세.”(복음성가 일부)
5. 마 23:37에 나타난 주님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끊임없이 배반하고 불순종하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애달픈 사랑, 짝사랑, 그렇게 간절히 부르시고 용서하고 오래 참고 기다리건만 끝까지 그분을 거절하고 마는 이스라엘 백성,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멸망받아야 하는 그들을 생각할 때 “그래, 그렇게 봐줘도 소용없으니 어디 한번 당해봐라.”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을 끝내 잃어야 한다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부모의 애통함이었다.
주님은 원수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돌이켜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교과 130, 1문 아래, 131 참조
6. 마 23:25-35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강경함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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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 130, 2문 아래 참조
[구주께서는 결코 진리를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외식과 불신과 죄악은 기탄없이 책망하셨다. 그러면서도 책망하시는 그분의 음성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복음 교역자, 117).](☞교과 132 참조)
<적용>
1.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가? 그 사랑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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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나는 어떻게 그 사랑에 보답하겠는가?
▷
<결론>
1. 주님은 소외된 자들이나 원수들이라도 차별없이 사랑하셨다.
2. 우리도 그러한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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