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6 그분의 도전적인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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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년 작성일08-05-04 23:11 조회5,504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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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학습 목표>
1. 주님의 도전적인 말씀에서 주님의 본심을 깨닫는다.
2.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라도 순종해야 함을 배운다.
<서론>
☆교회 다니는 건 좋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
교회나 교인들의 극단적인 모습은 대개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함으로 생겨나는 현상들이다.
주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하면 원래의 뜻을 지나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말씀들을 대할 때 본뜻이 무엇인지 먼저 주님의 의중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후문맥을 살펴보고 그 말씀을 하신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와 관련된 구절들을 비교해 보고 성경전체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마 4:4)
예수님의 도전적인 말씀들 중 몇 가지만 살펴보자.
<본론>
1. 마 19:3~10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무엇인가?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은 당시에나 오늘에나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다.
1) 그 당시: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처럼 생각되어, 남자의 맘에 안들면 언제든지 여자를 내보낼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맘에 안드는 여자와 평생 사느니 차라리 결혼 안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2) 오늘날: 남녀평등을 넘어 가히 여성상위시대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에게 폭언, 폭력을 행하거나, 알코올중독, 도박에 빠지거나 가정을 파괴하는데도 간음 외의 이유로는 이혼할 수 없다는 말인가?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너무나 비현실적인 말씀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아내들을 버리고 다른 데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결혼관계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부부관계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성스러운 것이니 그만큼 소중히 여기고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교과 80, 81 참조
1-1. 마 19:11~12은 앞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독신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이 말(독신생활)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는 주의 말씀은 독신주의를 찬양하는 것인가? 독신생활은 결혼생활보다 더 고상하고 종교적으로도 더 차원이 높은 삶인가? 아니다.
☞교과 90 [“독신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또한 독신 생활이 다른 가능한 방법보다 더 월등하게 성스러운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은 사단의 기만에 불과하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결코 독신생활을 권장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균형진 품성계발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404).]
11절 말씀을 잘 읽어보라. 주님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된다고 하셨다. 즉 보통사람에게는 금욕이나 독신생활이 매우 부자연스럽고 어려운 일이요, 원래 고자로 태어난 사람이라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2. 마 18:21~22은 용서에 대해 어떤 교훈을 말씀하신 것인가?
▷예수님이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다는 말씀을 핑계삼아, 뻔뻔스럽게도 자기가 받아야 할 댓가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곡해한 것이다. 이 말씀은 악인이 무조건 죄의 댓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법정에서 범법자에게 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라, 죄는 밉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흔번씩 일곱 번’이나 용서하라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미칠 수 없는 표준이다. 그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분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분의 그 위대한 용서에 대해 온 하늘이 경탄할 정도였다.(☞교과 83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참조) 그분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용서받고 또다시 죄가운데 빠지는 배반자인 우리들을 여전히 용서하고 계신다. “창조의 하나님 이전에 용서의 하나님이 계셨다”(독일의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
‘일흔번씩 일곱 번’, 그것은 주님의 용서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토록 놀라운 주님의 용서를 맛본 자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서 우리는 용서할 능력을 얻게 된다.
‘일흔번씩 일곱 번’, 그것은 내 자신이 주님께 그렇게 용서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며, 따라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신 것이다.
3. 눅 18:18~22에서, 젊은 부자관원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신 주님의 진정한 뜻은?
▷주님을 따르려면 모든 소유를 버리고 알거지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세상에 살면서 어느 누가 물질을 초월해 살 수 있는가? 이 말씀은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라는 말씀이다. 그 관원은 영생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재물에 눈이 가리워 영생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영생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보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재물에 집착하고 있을 때는 그토록 고귀한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 뻔했다. 주님은 그런 그를 보시고 안타까이 여기셨다.
“예수가 가진 것을 모두 팔라고 제안한 것은 그가 섬기는 재물 신의 손아귀에서 그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을 얻을 수 있는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했으나 그것들을 올바르게 다스릴 하늘의 지혜가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저주가 될 것이다.”(본교주석 마태복음 19장 22절 부분)
우리를 주님과 하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것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세상은 바햐흐로 멸망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 것들을 언제까지나 누릴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교과 84쪽 1문 아래 참조(성경의 다른 부분을 비교해 보면 눅 18:22의 말씀을 오해하지 않게 된다.)
4. 마 5:48의 하나님처럼 “온전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완벽해야 한다는 뜻인가?
▷앞의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에게 차별없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온전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과 86쪽 1문 아래 참조(마 5:48에 대한 눅 6장의 평행구절을 살펴보면, 마 5:48의 “온전하라”는 말씀이 “자비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 줄기처럼, 사랑과 빛과 기쁨이 그분에게서 나와서 모든 피조물에게로 흘러간다. 이것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분의 생애 자체가 무아(無我)의, 사랑의 유출(流出)이다.
‘그의 영광은 그 자녀들의 행복이며, 그가 기뻐 하심은 자애로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
그분은 같은 방법으로 당신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라고 말씀하신다.”(산상보훈 77)
즉 온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닮으라는 것.
5. 눅 14:26은 주님을 위해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인가?
▷이 말씀은 많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이 심각하게 곡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주님이 그렇게 가혹한 분인가? 주님은 정말 가정을 그렇게 무가치하게 여기셨는가? 아니다. 주님은 가정을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셨다. 그분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에덴에서 가정을 창조하셨고, 그가 세상에 오셔서 30세까지 육신의 부모 밑에서 순종하였고, 맨처음 기적을 결혼식장에서 행하셨는데 물로 포도즙을 만들어 결혼식에 축복하셨다. 또한 십자가에 운명하시면서 육신의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당부하는 효를 실천하셨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교과 88쪽 1문 아래 ‘예수님의 진술은...’ 이하 참조
☞교과 89쪽 학습도우미 참조; 주님의 말씀은 부모나 형제들보다 하나님의 뜻을 첫째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가족들의 요구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주님의 뜻과 충돌될 때는 주님의 뜻을 따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이 어떤 사람의 생각보다 가장 선하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용>
☆이 번주에 배운 말씀 중 내 삶에 꼭 실천하고 싶은 것은?
▷
<결론>
1. 주의 말씀은 때로 가혹해보이지만 그분의 참뜻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2. 뜻을 깨닫는 것으로 끝이 아니고 순종함으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1. 주님의 도전적인 말씀에서 주님의 본심을 깨닫는다.
2.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라도 순종해야 함을 배운다.
<서론>
☆교회 다니는 건 좋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
교회나 교인들의 극단적인 모습은 대개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함으로 생겨나는 현상들이다.
주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하면 원래의 뜻을 지나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말씀들을 대할 때 본뜻이 무엇인지 먼저 주님의 의중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후문맥을 살펴보고 그 말씀을 하신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와 관련된 구절들을 비교해 보고 성경전체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마 4:4)
예수님의 도전적인 말씀들 중 몇 가지만 살펴보자.
<본론>
1. 마 19:3~10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무엇인가?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은 당시에나 오늘에나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다.
1) 그 당시: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처럼 생각되어, 남자의 맘에 안들면 언제든지 여자를 내보낼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맘에 안드는 여자와 평생 사느니 차라리 결혼 안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2) 오늘날: 남녀평등을 넘어 가히 여성상위시대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에게 폭언, 폭력을 행하거나, 알코올중독, 도박에 빠지거나 가정을 파괴하는데도 간음 외의 이유로는 이혼할 수 없다는 말인가?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너무나 비현실적인 말씀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아내들을 버리고 다른 데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결혼관계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부부관계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성스러운 것이니 그만큼 소중히 여기고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교과 80, 81 참조
1-1. 마 19:11~12은 앞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독신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이 말(독신생활)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는 주의 말씀은 독신주의를 찬양하는 것인가? 독신생활은 결혼생활보다 더 고상하고 종교적으로도 더 차원이 높은 삶인가? 아니다.
☞교과 90 [“독신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또한 독신 생활이 다른 가능한 방법보다 더 월등하게 성스러운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은 사단의 기만에 불과하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결코 독신생활을 권장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균형진 품성계발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404).]
11절 말씀을 잘 읽어보라. 주님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된다고 하셨다. 즉 보통사람에게는 금욕이나 독신생활이 매우 부자연스럽고 어려운 일이요, 원래 고자로 태어난 사람이라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2. 마 18:21~22은 용서에 대해 어떤 교훈을 말씀하신 것인가?
▷예수님이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다는 말씀을 핑계삼아, 뻔뻔스럽게도 자기가 받아야 할 댓가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곡해한 것이다. 이 말씀은 악인이 무조건 죄의 댓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법정에서 범법자에게 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라, 죄는 밉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흔번씩 일곱 번’이나 용서하라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미칠 수 없는 표준이다. 그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분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분의 그 위대한 용서에 대해 온 하늘이 경탄할 정도였다.(☞교과 83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참조) 그분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용서받고 또다시 죄가운데 빠지는 배반자인 우리들을 여전히 용서하고 계신다. “창조의 하나님 이전에 용서의 하나님이 계셨다”(독일의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
‘일흔번씩 일곱 번’, 그것은 주님의 용서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토록 놀라운 주님의 용서를 맛본 자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서 우리는 용서할 능력을 얻게 된다.
‘일흔번씩 일곱 번’, 그것은 내 자신이 주님께 그렇게 용서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며, 따라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신 것이다.
3. 눅 18:18~22에서, 젊은 부자관원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신 주님의 진정한 뜻은?
▷주님을 따르려면 모든 소유를 버리고 알거지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세상에 살면서 어느 누가 물질을 초월해 살 수 있는가? 이 말씀은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라는 말씀이다. 그 관원은 영생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재물에 눈이 가리워 영생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영생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보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재물에 집착하고 있을 때는 그토록 고귀한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 뻔했다. 주님은 그런 그를 보시고 안타까이 여기셨다.
“예수가 가진 것을 모두 팔라고 제안한 것은 그가 섬기는 재물 신의 손아귀에서 그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을 얻을 수 있는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했으나 그것들을 올바르게 다스릴 하늘의 지혜가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저주가 될 것이다.”(본교주석 마태복음 19장 22절 부분)
우리를 주님과 하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것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세상은 바햐흐로 멸망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 것들을 언제까지나 누릴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교과 84쪽 1문 아래 참조(성경의 다른 부분을 비교해 보면 눅 18:22의 말씀을 오해하지 않게 된다.)
4. 마 5:48의 하나님처럼 “온전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완벽해야 한다는 뜻인가?
▷앞의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에게 차별없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온전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과 86쪽 1문 아래 참조(마 5:48에 대한 눅 6장의 평행구절을 살펴보면, 마 5:48의 “온전하라”는 말씀이 “자비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 줄기처럼, 사랑과 빛과 기쁨이 그분에게서 나와서 모든 피조물에게로 흘러간다. 이것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분의 생애 자체가 무아(無我)의, 사랑의 유출(流出)이다.
‘그의 영광은 그 자녀들의 행복이며, 그가 기뻐 하심은 자애로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
그분은 같은 방법으로 당신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라고 말씀하신다.”(산상보훈 77)
즉 온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닮으라는 것.
5. 눅 14:26은 주님을 위해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인가?
▷이 말씀은 많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이 심각하게 곡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주님이 그렇게 가혹한 분인가? 주님은 정말 가정을 그렇게 무가치하게 여기셨는가? 아니다. 주님은 가정을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셨다. 그분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에덴에서 가정을 창조하셨고, 그가 세상에 오셔서 30세까지 육신의 부모 밑에서 순종하였고, 맨처음 기적을 결혼식장에서 행하셨는데 물로 포도즙을 만들어 결혼식에 축복하셨다. 또한 십자가에 운명하시면서 육신의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당부하는 효를 실천하셨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교과 88쪽 1문 아래 ‘예수님의 진술은...’ 이하 참조
☞교과 89쪽 학습도우미 참조; 주님의 말씀은 부모나 형제들보다 하나님의 뜻을 첫째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가족들의 요구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주님의 뜻과 충돌될 때는 주님의 뜻을 따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이 어떤 사람의 생각보다 가장 선하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용>
☆이 번주에 배운 말씀 중 내 삶에 꼭 실천하고 싶은 것은?
▷
<결론>
1. 주의 말씀은 때로 가혹해보이지만 그분의 참뜻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2. 뜻을 깨닫는 것으로 끝이 아니고 순종함으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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