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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그분의 도전적인 말씀(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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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5-02 08:17 조회5,4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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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그분의 도전적인 말씀
5월 10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0분)

도입)
찰스 웨슬리는 "경이와 사랑과 찬양 가운데 빠져버리는" 것이 예배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예배는 사모함을 이끌어내는 경외함을 말한다. 내가 2000년도에 캐나다 대총회에 참석하고 미국에 처음 방문해 그랜드 캐년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 위대한 장관을 경외함으로 바라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잠깐 보여주고 있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 경외함 그 자체는 예배가 아니었다. 더 위대한 경이와 사랑 그리고 찬양 속에 몰입하게 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날 때 나의 반응은 더욱 달라졌다. 내가 주님의 모든 아름다움을 말씀 속에서 보았을 때 주를 경외함은 사모함으로 바뀌었다. 무엇이 내 영혼을 꽉 붙잡는지 아는가? 그것은 주님의 더럽혀지지 않은 청결,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8:46), 주님의 비할 데 없는 지혜,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 주님의 무한한 자비,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마9:36), 그리고 주님의 압도하는 위엄,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마17:2)이다. 복음서에서 나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나의 경외함은 주님을 사모함으로 변했다. 그리고 경배하며 머리를 숙이면서 도마처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외치게 되었다. 지난 2천년 동안 인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만큼 논쟁과 토론의 대상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인류는 이런 논쟁을 계속할까? 논쟁이 있다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진리이고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도전적인 말씀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흔드는 놀라운 장들을 함께 공부해 보자.

기억절: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연구범위: 마 5:48, 18:21-22, 19:3-12, 눅 12:32-34, 요 19:25-27.

안식일 오후
예수님의 말씀 중 어떤 것들은 종종 보통의 견해와 충돌하는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뺨을 돌려대라고 하셨는데, 이는 우리가 악에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악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원수는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친구와 가족들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더욱 혼동되는 것이 있다. 예수께서는 소위 의롭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보다 버림받은 자들과 창기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애통하는 자들, 긍휼히 여기는 자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들, 권세 있는 자들, 잘 생기고 친구가 많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말씀들보다 더 도전적인 말씀들이 예수님의 입술에서 나왔다. 이번 주 교과에서 예수님의 말씀 중 몇 가지 도전적인 선언들을 살펴볼 것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말씀들은 그분의 가르침과는 구별된다.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신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가?

일요일(5월 4일)
결혼과 금욕에 관하여

도입)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이혼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했다. 힐렐 학파는 남자 중심의 입장에서 이혼을 개방시켰고, 샴마이 학파는 간음 이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반면에, 에세네 학파의 경우에는 아예 독신을 고집하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인간적인 추측에서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복잡한 논쟁을 성경의 원리로 단번에 해결하셨다. ‘말씀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했느냐?“는 반문을 통해 창세기에 나타난 결혼의 성경원리를 제시하심으로 논쟁의 마침표를 찍으셨다. 즉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두 남녀를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원리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이혼에 대한 견해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었다. 왜냐하면 침례 요한이 헤롯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 언급하다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대한 논쟁에 예수님을 끌어들여 헤롯을 자극하려는 악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첫 번째 질문이 성경원리로 막히자 그들은 모세의 이혼증서를 들고 나왔다. 이에 예수님은 모세의 이혼증서는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를 내어 버림을 허락한 것이지 이혼 자체를 허락한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셨다. 즉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혼은 절대 불가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진리이다. 진리를 정치적 수단이나 개인을 시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확고부동한 진리에 뿌리박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우리가 붙잡아야 할 마지막 진리는 성경임을 잊지 말자.

1. 예수님의 강한 진술들 가운데 결혼과 이혼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 것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3-12을 읽으십시오. 어떤 점들이 분명합니까? 그리고 어떤 부분이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적인 기별은 무엇입니까?
답:
바리새인들의 질문에는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남성우위의 성향을 가진 다음의 질문을 주목해 보라.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 물론 예수께서는 명확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셨다(4-6절). 그런데 질문자들의 진정한 의도는 7절에 나온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는 모세의 지시를 뛰어 넘어서, 아내를 버리고자 하는 남자들의 열망을 호되게 꾸짖으시며 결혼관계를 깨뜨리는 조건을 엄격히 강화하셨다. 그분께서는 단 한 가지, 음행한 경우만을 예외로 하셨다. 그 외의 다른 사유로 이혼하는 것은 간음이 될 것이었다(8-9절). 적잖게 놀란 제자들은 토론을 벌였으며,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마 19:10)라고 말했다.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가장 난해한 진술 중 하나를 말씀하시게 했다.

2. 마태복음 19:11-12을 다시 읽으십시오. 예수님의 이 강경한 말씀을 받지 못할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답:
그들은 면제를 받는다는 의미인가? 여기서 “오직 타고난 자”(마 19:11)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도덕적으로(혹은 성적으로) 은사를 받은 특별한 부류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고자(鼓子)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세 부류의 고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가장 난해한 말씀은 마지막에 나온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 19:12). 이 말은 예수께서 제시하신 표준은 너무 높아서 연약한 사람들이 따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양보하신다는 뜻인가?

교훈: 결혼과 금욕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강경하게 들릴 수 있으나 그분의 말씀의 요지는 신성한 결혼서약을 쉽게 깨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부가적용)
유대의 이혼은 남편의 재량에 달렸었다(신 24:1: “기뻐하지 아니하고”; 3절: “싫어하여”). 팔레스타인의 여자는 자진하여 이혼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가 “소유”로 주장하는 하나의 대상에 불과했다. 이혼증서를 써줌으로써, 남편은 아내에 대한 권리를 양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자만이 부정(몸을 더럽힘)과 연결되었다. 근동의 문화에서, 남자의 명예와 여자의 순결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아내의 순결은 남편의 명예에 속하는 일종의 “모조상품”(pseudo commodity)이었다. 아내는 그녀의 남편의 명예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나 마 5:32/눅 16:18은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한다. 흔히, 이 말씀은 이혼금지, 혹은 예수운동의 정황 가운데 재혼금지의 법적 말씀으로 단순히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예수의 이 말씀은 당연시 되어온 가부장적 사회제도에 도전하며 남성위주의 문화 내에서 여성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말씀이었다. 간음과 몸을 더럽힌다는 것이 남성의 시각에서 본 단지 여성에게만 제재된 굴레이었지만, 여기서 예수의 이 말씀은 이혼과 재혼을 남성의 간음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유대 전통의 가부장적 규정에 도전하고 있다. 예수는 명예가 단지 남성 중심적인 것만이 아니라 또한 (동등하게) 여성 중심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명예는 남자에게 속한 만큼 여자에게도 속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연유로 예수는 매우 놀랍게도 “간음”이라는 극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남성 중심적 명예와 치욕의 고대 근동의 이데올르기를 배경한 “간음”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의미를 우리는 분명하게 간파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아내의 명예의 문제를 첨예화 시켰다. 결혼에 대하여 남자에게 이토록 그 책임을 크게 강조한 사건은 일찍이 없었던 참으로 충격적인 가르침이었고 여권에 대한 주님의 보호하심은 놀라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월요일(5월 5일)
용서에 관하여(마 18:21-22)

도입)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는 자신의 저서에서 “창조의 하나님 이전에 용서의 하나님이 계셨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러모로 하나님 본성에 대한 의미 있는 깨달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 주시는 복음은 ‘용서’에 관한 진실이다. 베드로의 ‘용서의 횟수’에 관한 질문의 밑바닥에는 ‘내가 이만큼 용서 한 후에 행하려는 동기, 행동이나 몸가짐이 빗나가지 않았고 곧아서 훌륭하다’ 라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집행의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거듭되는 용서의 횟수에 기인해 마침내 가해지는 법 집행은 논리적이고 용납이 가능하며 심지어는 매우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나에게 불이익을 끼친 사람에 대하여 몇 차례의 용서는 내가 이윽고 감행하려는 판단과 공격에 대한 탄탄한 심리적 도덕적 뒷받침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공격적인 행동 뒤에서 차분히 타이르시면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신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아들마저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그 참뜻을 우리 인간들도 닮아가도록 가르치신다. 과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당신의 십자가 위에서 그 절정을 이루며 몸소 인간들에게 용서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 우리는 주께서 보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용서의 완전한 모본이시다. 여기서 다시 용서의 주제로 돌아가, 용서에 관한 그분의 진술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해 보자.

1. 마태복음 18:21-22을 숙고해 보십시오. 여기서 예수께서는 어떤 죄를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반복되는 성적 혹은 신체적 학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2004년 12월에 미국 캔자스 주에서 발생했던) 임신부 살해 및 태아 절취(截取)사건과 같은 아주 엄청난 죄를 염두에 두셨을까요? 아니면 예수께서는 복잡하고 사악한 인간 범죄의 사례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시고 일반적인 죄와 실수,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흔히 경험하는 남을 상하게 하는 일 등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일까요?
답:
시카고 법정에 13세 된 소녀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동자의 움직임을 통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는데, 자신을 이처럼 심각한 불구로 만든 1997년의 성폭행 사건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을 성폭행하고 살충제를 목구멍에 부은 혐의로 고소된 29세 된 패트릭 싸이키즈(Patrick Sykes) 씨에 대한 세 번째 증인 자격으로 출두하였던 것이다(마이크 로빈슨, 워싱턴 포스트, 2001년 3월 24일자, A22면)
예수께서는 이처럼 극악한 범죄의 희생자들에게 한 번도 아닌 일곱 번이나 용서하라고 하셨단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자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단 말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가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위에 열거한 잔인하고 무서운 죄를 다루어야 할 때 주님의 은혜로운 권면을 잘못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교훈: 우리에게 용서의 완전한 모본을 보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용서는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부가적용)
경행록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용서할 줄 알아야 사랑할 줄도 안다. 용서는 내면의 평화를 열어주는 열쇠다. 용서하는 마음은 덕을 쌓는 일이다. 친구를 용서하는 것보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먼저 용서하라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용서하라, 용서하지 못해 자신의 하루를 망치지 말라. 용서가 늦으면 승리는 상대에게 넘겨진다. 용서도 화풀이의 방법이다. 용서 받는 사람보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이라”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경이로운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분의 용서는 가히 인간적인 것이 아닌 신적인 용서에 해당하는 충격적인 가르침이시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많은 이들이 용서를 하지 못해서 인간관계에 심한 갈등과 단절로 인해 내면과 삶에 큰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용서해야 함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실제적으로 용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 준다.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용서하는 마음과 삶’을 살기 위해서 끊임없는 내면의 성찰이 필요하며 성숙한 마음과 진실한 사랑으로 겸손하게, 용기 있게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아프고 상한 마음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깊이 용서받았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과 감정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와 관용의 삶을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의 관점이나 시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약함과 허물이나 죄를 간과하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실망과 분노를 바르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실망과 아픔이 상처가 되어 아물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게 되면 용서할 수 있다. 스스로 용서 받은 자임을 잊지 않으면 용서할 수 있다. 아픔이나 분노를 겸손히 내려놓으면 용서할 수 있다. 인간의 실수나 약점을 깊이 이해하면 용서할 수 있다. 다른 이의 생각이나 상황을 관용하면 용서할 수 있다. 진정 성숙하고 자유롭기를 원하면 용서할 수 있다. 기쁨과 평화의 삶을 살기를 바라면 용서할 수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 용서할 수 있다. 겸손하고 온유하기를 원하면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와의 관계와 의미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이기적인 관점과 상황 안에 머물며 자신의 상처 안에 깊이 머무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유와 기쁨과 평화의 삶을 포기하고 내면에 갈등과 아픔과 슬픔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당화하며 고집하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에 상한 감정과 아픈 경험에 묶여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소망과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고 감사와 기쁨과 평화로 충만한 행복한 삶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가히 충격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용서는 우리의 용서의 개념을 뛰어넘는 그런 경이로운 용서이다. 우리도 그분의 경이로운 용서를 우리의 삶에서 실행해 보자.

화요일(5월 6일)
재물과 베풂에 관하여(눅 12:32-34)

도입)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부자법관에게 하늘나라의 보물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을 보여 주셨다. 그 길은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면 된다고 하셨다. 그는 세상물정을 잘 알았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버는지도, 어떻게 하면 돈을 안전하게 불리는지도 잘 알았다. 아마도 그는 율법을 지키면서 돈을 불리기 위해 궁리도 많이 했고 나름대로 힘이 든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 점은 예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시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 그는 자신의 소유도 잃지 않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있는 비방이 이 세상 어딘가에 꼭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려는 용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물정이 공짜는 없고 ‘주고받기’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만한 재력과 성실한 모습이 있다면 뭔가 큼직한 상급을 받을 자격이 되지 않을까하고 자신만만했다. 그는 가진 자의 아량을 베풀 용의가 있었기에 상대방을 극진하게 칭찬하는 호기도 부렸다. 영원한 생명이 그만큼 귀한 것이기에 잠시 머리를 숙이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 싶으셨다. 그가 잘 못 이해하고 있는 점을 바로잡아주시려고 하셨다. 영생을 얻기 위해 그에게 정말 필요하며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가르쳐 주고 싶으셨다. 우선 그는 ‘善’을 무슨 일을 하거나 또는 어떤 사물을 소유하면 되는 줄로 오해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善’이 일이나 사물이 아니라 ‘어떤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얼마만큼 일하고 소유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선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관계를 맺느냐 못 맺느냐가 해결책이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온 젊은 부자 관원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눅 18:22)고 말씀하셨다. 극단적으로 들리는 이 명령은 선지자적인 통찰력을 통해 이 관원의 필요를 아신 예수께서 이 관원에게만 하신 명령으로 우리는 보통 해석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이 관원과 구원 사이에 놓여 있는 커다란 장애물 즉 재물에 대해 지적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 동일한 명령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는 않으셨는가?
누가복음 12:33에서는 예수께서 그 젊은 부자 관원에게 주신 동일한 명령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신 것으로 보인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라.

1.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소유를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까? 그분의 명령을 문자대로 실행한다면 실제로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까? 어떤 공동체에서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다면 그리스도인들의 경제적 상황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겠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개척지에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해나갈 자금은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답:
이 문제를 바로 이해하는 데에는 다음 세 사례가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실제로 어떻게 하셨는지 주목해 보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자금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다가 그것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요 12:6, 13:29). 둘째, 예수님의 진술과 밀접한 환경에서 살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보자. 사도행전 4:32-37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힘쓰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질서 있게 실행해 나갔다. 셋째, 사도행전 이 외의 글에서 초기교회가 어떻게 했는지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과 요한과 베드로의 서신에는 재산을 다 팔아 나누어 준 사례가 없다.

교훈: 예수께서 부자 관원에게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하신 말씀은 그가 사로잡혀 있던 재물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신 것이다.

부가적용)
그분의 요구는 단 한 가지였다. 하나님과 인간끼리의 관계에 사랑과 나눔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 기준으로 살아가라는 요구이시다. 그 부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그가 그 재산을 얻기 위해 공들였던 시간과 정열이 아까웠다. 그가 누려왔던 우월감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남들이 우러러 받드는 존경어린 시선을 내 팽개치기 싫었다. 아무 노력도 안하고 무위도식 하는 사람들과 똑 같이 취급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 자기가 천민과는 달리 올바른 인물이라는 자존심을 꺾고 그들과 어울리게 되면 받게 될 친구들의 수군덕거림이 두려웠다. 한마디로 그는 여태껏 누려왔던 인간관계를 새롭게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는 똑똑한 인간이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세 알아챘다. 자기가 더럽다고 무시했던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나눔을 가지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았던 나름의 지혜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재산을 두 판에 분산투자해서 성공했던 방법대로 '명예를 포함한 재산'과 '영생', 이 두 가지를 모두 걸머지고 싶었다. 둘 중하나에만 전부를 투자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분의 요구는 여태껏 든든하게 믿어 왔던 발판을 송두리째 없애 버리고 낭떠러지로 몸을 던지라는 말씀이었다. 그에겐 땅에서 발을 떼고 걸으라는 요구였다. “다 팔아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요구는 오직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발판이었던 자기의 소유에서 떠나 이 분과 관계를 맺으라는 요구였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가르침이었고 그가 실행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는 너무 슬펐다.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스승을 따른 것을 크게 인정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새로운 관계에 모든 것을 건 제자들의 모험이 성공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안 하시는 그 “새로운 관계”가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깨닫는 다면 그 때엔 과감히 “새로운 관계가 가져다주며 여태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자유”와 “더 나은 질적인 비약을 가져다 줄 역설 같은 요구”를 선택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일도 하실 수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으니 제자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박해를 받겠지만 행복의 조건인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현세에서 다시 백배나 받을 것이라 약속하신다.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도 받으리라 말씀하신다.

수요일(5월 7일)
완전에 관하여(마 5:48)

도입)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 하라는 권면은 꼭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모두 온전함 같이 우리 사람이 동등 적인 의미에서는 같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온전함 같이 사람은 사람으로서 온전 하라는 그 뜻인 것이다. 완전이라는 의미도 행위적 완전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의 완전을 의미한다. 마치 노아의 경험과 같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하나님이 당신의 영역에서 완전하셨듯이, 인간은 인간의 영역에서 완전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마치 해와 달의 차이일 것이다. 해는 빛을 내지만, 달은 해가 준 빛을 반사하는 완전 말이다. 작은 촛불이 햇빛과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햇빛이 온전한 낮에 비치는 것과 같이 작은 촛불이라도 가리우는 것이 없으면 작은 촛불로써 온전히 비칠 수 있다. 봄 동산에 나가 보면 여러 가지 꽃이 피어 있다. 그 중에 앉은뱅이 꽃은 큰 모란이나 장미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란꽃이 온전히 피는 것과 같이 앉은뱅이 꽃도 앉은뱅이 꽃으로서 온전히 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산상수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예수님의 말씀을 당혹스럽게 생각한다. 수세기 동안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 대항하여 온전한 승리를 거두고자 애써 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고, 어떤 이들은 순례를 떠났으며, 또 어떤 이들은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께서 의도하신 바였는가?

1. 다음의 짝지어진 구절들은 어떻게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까?
마 10:34-39과 눅 14:26-2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7:7-11과 눅 11:9-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5:48과 눅 6:32-3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누가복음 1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과격해 보이지만 평행절인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은 훨씬 완화된 것으로서 예수께서 의도하신 바를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고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약속에서 ‘좋은 것’(11절)을 구하라는 말씀이 물질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성령’을 구하라고 호소함으로써 시각에 변화를 주고 있다.
세 번째 구절들에서도 이와 같은 조화가 잘 나타나 있다. 마태복음 5장에는 “너희도 온전하라”(48절)고 되어 있으나 누가복음 6장에는 “너희도 자비하라”(36절)고 되어 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해 보면 예수께서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누가복음의 문맥을 살펴보면, 원수를 사랑하고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함으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35절)고 되어 있다. 이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구절이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36절)는 말씀이다. 마태복음에서도 마찬가지로,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 바로 앞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과,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차별 없이 비를 내리신다는 말씀이 나온다.

교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은 우리도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의미이다.

부가적용)
여기의 온전 하라는 뜻은 장성하고 성숙 하다는 뜻이 있다. 가령 어른과 아이를 비교하면, 어른은 장성해서 성숙한 의미에서 온전하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는 불완전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장성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온전하게 자라서 온전한 자리에까지 이르라는 뜻인 줄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재적으로 주신 모든 능력을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뜻하신 그 온전한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인격 완성의 최고 표준을 하나님께서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라고 하신다. 에베소서 4:13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했는데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온전 하라는 뜻이다.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와 같이 성장해 자라간다면 모든 사람을 차별이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게 될 것이다.

목요일(5월 8일)
가족에 관하여(요 19:25-27)

도입)
요한복음 13장 23절을 보면,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는 대목이 나온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젖먹이 아기가 엄마 품에 안긴 듯한 묘사이다. 이처럼 그는 각별한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쓴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고 19절에서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한다. 먼저 사랑받았기에 요한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가 자녀들을 많이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랄 때 사랑을 받지 못하면 커서도 남을 사랑하지 못한다. 받은 게, 배운 게 없기 때문이다. 요한은 처음에는 아주 거칠고 공격적인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 사랑을 듬뿍 받고나서 변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자기가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 고백하고 싶었으면 자기 책에 자신을 가리켜 ‘주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했겠는가? 그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빚진 자 의식을 가졌다. 마태복음 26장 56절을 보면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고 하였다. 요한도 달아났었다. 그러나 지금 십자가 밑에는 요한만 있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주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을 우리는 빚지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안식일 다음날에 주님의 무덤에서 주님을 만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던 것도 마리아가 주님께 대한 사랑의 빚을 많이 졌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채무자 의식을 상실하면 안 된다.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했다. 엄연히 큰 빚을 지고도 채무의식 없이 살아가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 요한처럼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랑의 빚을 조금씩 이나마 갚으며 살아야겠다.

1990년대에 텍사스 웨이코(Waco)에 소재한 데이비드 코레쉬(David Koresh)의 집단에 가담하였던 한 젊은 여인은 캐나다에서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가지 않았다. 그녀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그 교주는 그녀의 계획을 가로막으며, 그런 일 말고도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시간과 재정을 써가며 그와 같은 세속적인 일로 여행을 하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지 않았던 것이다.

1. 다음 구절들은 자연스런 가족의 유대를 훼손하는 코레쉬와 같은 사람들을 지지해 준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마 10:34-37, 12:46-50, 눅 9:59-62, 12:49-53, 14:26).
답:
“이와 같이 가족의 가치를 변형시키고 땅의 가족과 하늘 가족 사이에 쐐기를 박는 듯한 말씀이 누가복음에 자주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진정한 가족이라고 하신 진술(눅 8:19-21, 11:27-28)에 덧붙여 예수께서는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서 ‘부모를 미워하고, 돌아가신 부친을 장사하지도 말라’(눅 9:57-62, 14:25)는 충격적인 명령을 하신 것처럼 보인다”(F. 스코트, 스펜서, 예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 국제 트리니티 출판사, 2003년, 35)
예수님의 진술은 현대인들의 귀에도 확실히 과격하게 들린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의미일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눅 9:60)는 말씀을 예로 들어 보자. 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던 그 사람의 부친은 실제로 죽었는가? 아니다. 그 사람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재산을 챙긴 다음에 따르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누가복음 14:26에 나오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고 하신 예수님의 진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행절인 마태복음 10:37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에서 ‘미워하라’는 말은 종종 ‘덜 사랑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366).

교훈: 예수께서는 가족적 가치를 왜곡시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그분은 가족제도를 제정하신 분이시다.

부가적용)
요한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자기도 사랑했기에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본문 27절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주님이 모친을 부탁하자 요한은 곧바로 자기 어머니로 모셨다는 것이다. 이후에 요한은 팔레스틴을 떠나 소아시아 선교에 나서는데 에베소까지 마리아를 모시고 갔다. 마리아는 에베소에서 살다가 에베소에 묻혔다. 지금 터키에 가면 마리아와 관련된 유적지가 있다. 이렇게 요한이 행한 이유는 바로 주님이 사랑했던 모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한다. 주님은 또 다시 우리에게 충격적인 말씀 경이로운 말씀으로 교훈을 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원수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겠다는 말이 맞다. 주님은 사랑하셨지만 나는 못 한다고 하면 안 된다. 내 본능과 의지로는 되지 않지만 주님이 포용하셨기에 나도 포용하는 것이다. 왜냐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게 주님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옳은 자세이다. 이것이 실천적인 주님의 사랑이다.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은 반드시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 확인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보라 내 어머니다, 내 아버지다, 내 형제다, 내 이웃이다’고 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모든 이웃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사랑하여 요한과 같은 사랑의 사도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금요일(5월 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는데, 특히 따로 떼어 놓을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균형지게 표현된 평행 구절을 참조하거나 문맥을 통하여 보면 많은 구절들이 더 쉽게 이해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적당한 타협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우리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지 않는다면 그분께 전혀 드리지 않는 것과 같다.
“독신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또한 독신 생활이 다른 가능한 방법보다 더 월등하게 성스러운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은 사단의 기만에 불과하다. 유대인들은 독신자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거나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으며, 이러한 독신주의는 에세네파와 같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에 의해서만 행해졌다. 성경의 기록은 베드로도 결혼했음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아마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결코 독신생활을 권장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균형진 품성계발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만일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성경 전체의 취지에 역행하는 것이다. 신체를 불구가 되게 한다는 사상은 잘못된 것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마태복음 5:30에서 그리스도께서 천명하신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40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독신에 관한 위의 진술은 어떤 특정 종교의 독신제도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미혼이나 배우자와의 사별, 혹은 다른 부득이한 이유로 인해 독신생활을 하고 있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의 아니게 실망을 안겨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들의 선택을 우리는 어떻게 지지해 줄 수 있을까요?

2.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함으로 인해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이 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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