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과 그분의 실제적인 인성(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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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4-10 08:32 조회5,595회 댓글0건본문
제 3과 그분의 실제적인 인성
4월 19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1분)
도입)
신성(神性) 또는 인성(人性)이라는 말에서 성(性, nature)이라는 말은 ‘속성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들의 총체이며, 인성은 사람의 속성들의 총체이다. ‘본질’이라는 말이 그 개념을 나타낼 수 있다. 신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인성은 사람의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이해는 신성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인성 본질을 가지신 존재로서, 인간의 몸을 가지시고 육신으로 태어나서 지구 위를 걸으신 인간 예수로서, 인성을 소유하심으로 피곤함과 주리심 그리고 고통을 느끼시고 죽음의 두려움을 아셨던 인간예수로서의 이해를 말한다. 바울은 서신서들 속에서 예수가 정통 유대 가문에서 탄생하신 것과 인간적인 한계 내에서 생활하신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마가는 세상의 끝 날을 예언하는 내용으로 즉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에서 인간예수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십자가상의 절규에서 인간 예수의 한계를 밝히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 예수가 최고의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의 연약함을 충분히 동정하실 수 있다고 기술하여 예수의 본질인 신인성의 조화를 말해 주고 있다(히4:14)
기억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연구범위: 갈 4:4, 딤전 2:5, 3:16, 히 4:15-16, 요일 4:1-3.
안식일 오후
신약에서는 별다른 이성적 설명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과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은 그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고 한 후에 놀랍게도 이 말씀에 관하여 선언하기를, 이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고 하였다. 그리고 훗날에, 예수께서 악에 물드셨는지에 관한 논쟁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인지 신약성경은 그분의 무죄한 생애에 관해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히 7:26, 벧전 2:22). 뿐만 아니라 신약의 기자들은 사실상 예수님을 경배와 존경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행 7:59, 롬 9:5, 히 1:6).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인(神人, God-man)의 개념이 갖는 철학적 문제에 얽매이거나 나중에 사상가들에 의해 제기될지도 모르는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연결시키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금고리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연구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인 인간이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당신의 겸비에 대한 증거를 주셨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육신으로 계신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연구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하신 말씀을 주의깊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연구할 때에 배우는 자의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가려뽑은 기별, 1권, 244).
일요일(4월 13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딤전 3:16)
도입)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는 육체로 나타난 바 되시고..여기에서 ‘그’는 '그것'(which)이 아니고 '그'(who)이다. 즉, ‘경건의 비밀’이 ‘그는’으로 전환된 것은 육체 안에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경건의 비밀임을 의미한다. 우주의 참된 의의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와 이야기에 있다. 이 관계와 이야기는 계속해서 비밀 안에 있었다. 골로새서 2장 2절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비교적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비밀’은 ‘이야기’로 바꿀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이고 사람이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절대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9절은 또한 “그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어떠함과 그분에 관한 모든 이야기, 사람들이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모든 비밀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지난 주 교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신비에 관해 배웠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인성에 대해 탐구하면서 다시 한 번 그 오묘한 신비에 접하게 된다. 바울은 외쳤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그리스도교가 신성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주장은 로마 세계에서 그리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황제들도 항상 신성(神性)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인성(人性)과 관련되시고, 인성으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휴스턴 스미스, 예화로 엮은 세계의 종교들, 하퍼콜린스 출판사, 1986년, 219). 비록 그레코-로만(Greco-Roman) 세계에서는 이상하게 여겨졌을지 모르지만 신약성경은 분명히 그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1. 다음 구절들은 이 놀라운 겸비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 1:18-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1:26-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1, 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갈 4: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빌 2:5-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약의 기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진진한 일이다. 사실상 그들은 후세에 비평이 빗발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냥 말했을 뿐이다. 이 사실은 그들이 신약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 주기 위해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우리가 신약에서 보듯이 초기 제자들도 물론 예수님의 본성과 신원에 관해 많은 논쟁에 부딪혀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격에 대한 그들의 논증은 분명 이성적 혹은 과학적 반대자들을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목격한 바를 생생하게 증거하였을 뿐이다.
교훈: 초기의 제자들은 그들이 직접 목격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놀라운 신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가적용)
경건의 비밀의 주인공이 그리스도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경건은 단순히 어떤 일이 아니라 한 인격임을 함축한다. 이 인격은 개인적인 그리스도만 아니라, 몸을 가지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시(顯示)를 하나의 위대한 신비로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가 에베소서 3장 18-19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혜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가장 적합한 묘사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에 담겨 있다. 첫째, 우리는 여기서 양성에 대한 뚜렷한 확증을 볼 수 있다. 곧 그는 동시에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심을 밝혀주고 있다. 둘째, 그는 양성에 대한 구별을 짓고 있으니, 곧 그는 먼저 하나님으로 부르고 다음에 육신으로 나타나심을 밝히고 있다. 셋째는 그는 그의 위격이 하나님이시며, 육신으로 나타난 동일한 위격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이 위격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점은 아주 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이 인간의 육신과 결합되며, 그 결과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고 있다.
월요일(4월 14일)
대립되는 주장이 생겨남
도입)
지금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그분의 삶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 뒤덮여 있다. 서점이나 극장가에는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논하는 책과 영화가 나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는 돈을 위하여 만들어진 책과 영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삶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갖 오해와 편견을 갖도록 이끌어 갈 뿐이다. 지금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한 쪽에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셔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본으로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우리와 전혀 다른 육체를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취하고 태어나신 본성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구원을 논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복음의 연결 고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믿고 따라가는 복음과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으로 확산되고 세대가 바뀌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들을 제기했다. 같은 육체에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공존할 수 있는가? 신성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 존재로 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에 있으셨는가?
1세기에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더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신성을 더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 중에 에비온파(Ebionites)가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초기 그리스도인들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침례를 받으실 때였으며 그때로부터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분은 신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으셨고 다만 그들을 순종으로 이끄셨다고 주장했다. 그 후 3세기 말에 시작된 아리우스파(Arians)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어느 정도 수용하였으나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Council of Nicea)에서 강하게 정죄되었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 중에 그노시스파(Gnostics)가 있는데, 이들은 영(spirit)은 선하고 물질(matter), 특히 우리의 육체는 악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 요한은 그노시스파에 대해 어떻게 말했습니까?(요일 4:1-3)
답:
예수님이 누구이셨는가에 대한 논쟁은 2세기부터 6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그분의 신성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는가? 그렇다면 그분과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관계에 계셨는가?’ 마침내 논쟁은 그분의 인성에 관한 주제로 옮겨갔다.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한 몸에 결합될 수 있는가?’ 진술과 반박, 선언과 반론, 비난과 정죄와 출교가 이어졌고, 새로운 주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놀랍게도 이러한 소동과 논쟁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본성과 신원에 관한 성경적 정통이 궁극적으로 우세하였다.
교훈: 2세기에서 6세기까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과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나 결국 성경적 정통이 우세하였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본성을 연구하다가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셨다는 것을 강조하다가 그분을 사람들 앞에 죄의 경향을 가진 한 사람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제2의 아담이시다. 그분은 죄의 유혹에 굴복하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셨지만, 유혹에 한 번도 넘어가거나 시험에 굴복하시지 않았고,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죄를 한 번도 지으신 적이 없었기 때문에, 죄지은 사람이 가지는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없으셨다. 죄 없는 경향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우리가 계속 반복함으로 생기는 것이다. 죄의 경향이란,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 타락한 경향에 따라 우리가 선택을 하고, 그런 선택을 함으로 만들어진 습관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쓰셨을지라도, 어떤 죄의 습관을 가지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죄의 유혹들을 인식하셨고,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과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4:15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화요일(4월 15일)
우리의 인성을 취하심 (갈 4:4)
도입)
경건이란 무엇인가? 디모데 전서 3장 16절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라고 했다. 경건은 바로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당초에 하나님의 생명이 주 예수님(교회의 머리)의 몸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오늘도 역시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믿는 사람에게서(교회) 나타나는 것이 경건이다. 그러므로 경건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참으로 구원받았다면 우리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태도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곧 경건의 생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계속 우리 육신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디모데 후서 3장 12절의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곧 다른 사람이 우리의 언어와 태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우리의 행동과 처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복장이나 가구, 실내장식, 우리의 일거일동에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이것이 바로 경건이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분을 비범한 분으로 여겼으나 여전히 그분을 한 인간으로 알고 있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로 달려가 우물가에서 만났던 낯선 유대인에 관해 사람들에게 전파했을 때 “이 사람을 와 보라”(요 4:29)고 한 것은 그녀의 꾸밈없는 표현이었다. 그녀의 말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분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신 후에도 그분의 가장 가까운 이들은 “이 어떠한 사람”인가?(마 8:27)하고 외쳤던 것이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께서 참으로 혈육을 지닌 인간이셨음을 어떻게 입증해 줍니까?
마 8: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1: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4:5-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4:7, 19:2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1:33-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종종 신성을 자유로이 사용하실 수 있는 상황에 놓이셨다. 그분께서는 여전히 신성을 지니고 계셨으며, 언제든지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하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직면하신 시험의 주요한 부분은, 자신이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모든 점들에 대해 성경이 세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성경은 예수님의 본성 중 인간적인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정확히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결합된 분이셨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성경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완전하게 결합되었는지에 대해 전문용어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여자에게서 나신 그 아들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갈 4:4)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한 것처럼 믿게 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성을 취하셨다”(엘렌 G. 화잇, 그분을 높이라, 74).
교훈: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참으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신성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부가적용)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는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할 뿐 아니라, 그가 참사람이심을 또한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인격이셨고, 신적 인격이신 그가 인성(人性) 혹은 인적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지정의(知情意)는 성(性, nature; 본질)에 속한 특질이라고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의지 뿐만 아니라 인적 의지도 가지고 계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적의지와 그의 인적의지는 조화를 이루셨고 그의 인적의지는 그의 신적의지에 항상 복종하신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수요일(4월 16일)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심(히 4:15-16)
도입)
‘체휼한다’는 말은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이다. 추적 60분’에서 다룬 사건으로 미국에서 276년 형을 받고 도망쳐온 에디 강이란 청년을 놓고 미국에 소환해야하는지의 문제를 다른 적이 있었다. 그 방송에 의하면 에디 강의 옛 애인이 에디 강의 변심으로 일어난 일에 대한 보복으로서 어떤 살인 사건에 대해서 거짓 증언한 것이라는 심증이 간다. 그러나 미국 재판정의 배심원들과 판사는 에디 강에게 276년의 형을 선고해 버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으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변호사가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해 통달한 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미국의 법을 잘 알았고 미국인 미국문화에 대해서는 잘 알았으나 한국인에 대해서는 너무도 몰랐다. 변호사는 재판관과 의뢰인을 둘 다 잘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 옆에 계신 변호사로서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늘 보좌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보좌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부각된다. 같은 병원에 있다 해도 중환자실이나 영안실과 산부인과가 의미가 전혀 다른 것처럼 같은 하늘 보좌이지만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라 함은 가고 싶은 곳이요,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곳이요 나의 연약함을 하소연할 수 있는 곳이요, 설령 내가 죄인이었다 할지라도 용서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있었는가? 이 질문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대답을 찾기 위해 순전히 지성적인 노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철학적, 과학적, 사회학적인 연구를 함으로써 하나의 해답을 이끌어 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우리 마음대로 대답을 꾸며내서도 안 된다. 가장 손쉽고 빠른 길은 이 점에 대해 성경 자체가 보여주는 바를 주의 깊이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이 문제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준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늘 성소에서의 대제사장으로 직접 묘사한 히브리서의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특별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분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구절들은 그분의 낮아지심에 대한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들이 있습니까?
히 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2:14-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2:16-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2: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4:1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5:8-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각 구절은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고난당하신 하나하나의 이유들을 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이 구절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를 향해 팔을 넓게 펴시며, 이 땅에서의 생애를 통해 친히 우리의 곤경을 아시고, 우리의 아픔을 느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무한한 기쁨을 얻게 된다. 이보다 더 자비로운 구주를, 이보다 더 동정심이 많으신 대제사장을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무한한 기쁨과 감사가 우리의 가슴에서 솟아난다.
교훈: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히 4:16).
부가적용)
그분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분이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분이시다(히 2:18). 그러면서도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죄가 없이 온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대제사장과 같이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야 할 필요는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이 드리는 속죄 제사에는 온전한 사함이 있다. 그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나를 위해 준비된 대제사장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 길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그 대제사장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벌거숭이 모습으로 그 앞에 서는 것이 인간의 생각으로는 부끄럽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분이 나와 같이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신 분이시며, 나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는 담대하게 그 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이 앉으신 보좌는 그 이름조차도 ‘은혜의 보좌’다.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 앞에서만이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내게 없어도 된다면, 굳이 담대함을 무릅쓰고 그 앞으로 나가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긍휼 없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없이는 온전히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분이 허락해 주신 긍휼하심과 은혜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 담대할 수 있는 근거조차도 그분께 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또 실제로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오라 해도 어찌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그분의 소망임을 알기 때문에 담대하게 그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전히 내 안에 있는 죄성들은 거룩하신 그분의 빛 앞에 드러나기를 두려워하여 끊임없이 뒷걸음질 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죄성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죄성보다 더 크게 그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임을 알기에 나는 그분 앞으로 날마다 나아갈 수 있다. 그분을 위해서 나아가 드려야 한다. 그것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양떼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의 심정일 것이다. 그것이 지난 구약 선지서들에서 심판을 경고하시되, 동시에 구원에 대한 언약을 생략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이 아니었던가!
목요일(4월 17일)
영원한 결속 (딤전 2:5)
도입)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예수께서 느닷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 어떻게 제자의 발을 스승으로 하여금 씻어 주도록 방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버티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예수께서 제자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제자들과의 강한 연대, 결속을 다지는 뜻이 있었다. 제자들을 남겨 둔 채 죽음의 길로 떠나는 스승의 깊은 뜻이었다. 스승과 제자와의 끈끈한 관계를 다지는 길은 발을 씻어 주는 일이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이 이야기를 좀 더 높은 차원으로 해석하였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하늘나라에서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이제"와 "하늘나라"(현재와 영원)에서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철저한 결속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예수께서 인성을 쓰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영원한 결속을 다짐하신 그분의 강한 의지를 본 것이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모든 삶은 우리와 영원한 결속을 다지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 자신에 비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의 성육신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지상생애를 마치신 후에 우리와의 동질성을 버리시고 온전히 그분 본래의 형상대로 되돌아가셨다 할지라도 우리는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께서 인성의 흔적을 지니신 채 영원히 우리와의 결속을 유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감동을 자아낸다!
1. 예수님과 우리의 영원한 결속에 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눅 24:36-4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 1:10-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 17: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딤전 2: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죄의 파멸에서 회복하시는 것 이상의 일을 성취하셨다. 하나님과 인간을 영원히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결코 타락하지 아니하였던 때보다 더욱 밀접하게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다. 구주께서는 우리 인성을 취하심으로 결단코 끊어지지 않을 줄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붙들어 매셨다. 그분은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우리와 연결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속죄제물로서 죽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타락한 인류를 위해 아들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변치 않는 평화의 경륜(經綸)을 우리에게 보증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사 우리 인간 가족의 한 사람이 되게 하시되 그 인성을 영원토록 보유하게 하셨다”(시대의 소망, 25). “그리스도께서는 성화되고 거룩한 인성을 지니신 채 하늘로 승천하셨다. 하늘 궁정으로 들어가실 때 그분은 인성을 갖고 들어가셨으며 모든 인간을 구속하신 분으로 영세무궁토록 인성을 입고 계실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6권, 1054)
교훈: 예수께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사실만으로도 감사한데, 그분께서 영원토록 인성을 지니신 채 우리와의 결속을 유지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격스럽다.
부가적용)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사건만으로도 그것은 그분에게 말할 수 없는 치욕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길로 가셨다. 인간 최악의 고난의 길이다. 예수께서는 이 고난의 잔을 피할 수 있는 가에 대하여 기도를 드렸다. 죽음은 고통이다. 슬픔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비겁해지기도 하고 굴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의 고난을 자신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고난은 불행이다. 그러나 성서적 의미에서 고난은 인간의 영광이다. 고난이 아픔이기는 하지만, 슬픔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광이기도 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견해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더 큰 의미가 있는데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주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실천하신 신념을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으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과 인간과 함께 하시려는 주님의 강한 결속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며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실 것이라는 그분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와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영원한 결속을 다짐하신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원히 그분이 인성으로 남아계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의 영원한 결속을 맺으신 것을 말해주고 있다. 호주의 작가 패트릭 화잇트(P.White)는 197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작가수업을 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했다. 열심히 저작활동을 하였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나머지 호주에 돌아와 나무꾼이 되었다. 삼림의 계곡 속에서도 그는 계속 소설을 썼다. 그래서 발표한 작품이 "행복한 계곡"과 "인간의 나무"이다. 마침내 세상의 빛이 그에게 이르렀다. 계곡에서 나무를 자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창피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행복한 계곡"으로 여겼다. 그는 그 작품에서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분량만큼 진보한다"고 말했다. 고난을 통해 그는 자신의 진보를 성취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나무"에서 계속 말하였다. "인간은 진정으로 겸손하게 될 때에,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깨달은 때에 그는 가장 하나님께 가깝다." 예수는 원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 인간과의 영원한 결속을 다짐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영원한 결속을 위하여 주님께서 자원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분의 희생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을 최고로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여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금요일(4월 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님의 위격에 관한 수세기 동안의 논쟁 끝에 칼케돈 종교회의(Council of Chalcedon, A.D. 451)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세워졌다. 이 회의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사실에 대해 동의하고 선포한 것이다. “우리는 한 목소리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이시고 동등하시며, 신격에 있어 동등하실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시므로,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이시요 참으로 인간이시다. 우리와 같이 인간으로 계셨으며 무죄하신 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인용, 유스토 L. 곤살레스, 기독교 사상사, 1권, 애빙던 출판사, 1970년, 390). 이 칼케돈 선언의 의미를 재림교회의 관점에서 평가한 내용을 참조하려면 로이 애덤스(Roy Adams)의 책, 그리스도의 본성(The Nature of Christ,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 1994년, 57-72)을 보라.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묵상할 때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앞에 할 말을 잃고 만다. 그 주제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을 증폭된다. 베들레헴 구유에 누인 무기력한 아기와 그분의 신성 사이에는 얼마나 넓은 간격이 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힘없는 아기 사이의 거리를 우리가 어찌 측량할 수 있으랴? 신성의 충만함 가운데 계셨던 우주의 창조주께서 구유에 누운 연약한 아기로 탄생하셨다. 어떤 천사보다 더 높으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존엄과 영광을 가지셨던 분이 인성을 옷 입으셨다. 신성과 인성은 신비롭게 결합되었으며, 인간과 하나님은 하나가 되었다. 그 결합 안에서 우리 타락한 인류는 소망을 발견한다”(엘렌 G. 화잇, 영문시조, 1896년 7월 30일자).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주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한편 우리가 지나치게 파고들지 말아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2. 이번 주 교과의 내용을 전도하는 일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가 현대인에게 어떤 감명을 줍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4월 19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1분)
도입)
신성(神性) 또는 인성(人性)이라는 말에서 성(性, nature)이라는 말은 ‘속성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들의 총체이며, 인성은 사람의 속성들의 총체이다. ‘본질’이라는 말이 그 개념을 나타낼 수 있다. 신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인성은 사람의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이해는 신성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인성 본질을 가지신 존재로서, 인간의 몸을 가지시고 육신으로 태어나서 지구 위를 걸으신 인간 예수로서, 인성을 소유하심으로 피곤함과 주리심 그리고 고통을 느끼시고 죽음의 두려움을 아셨던 인간예수로서의 이해를 말한다. 바울은 서신서들 속에서 예수가 정통 유대 가문에서 탄생하신 것과 인간적인 한계 내에서 생활하신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마가는 세상의 끝 날을 예언하는 내용으로 즉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에서 인간예수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십자가상의 절규에서 인간 예수의 한계를 밝히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 예수가 최고의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의 연약함을 충분히 동정하실 수 있다고 기술하여 예수의 본질인 신인성의 조화를 말해 주고 있다(히4:14)
기억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연구범위: 갈 4:4, 딤전 2:5, 3:16, 히 4:15-16, 요일 4:1-3.
안식일 오후
신약에서는 별다른 이성적 설명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과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은 그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고 한 후에 놀랍게도 이 말씀에 관하여 선언하기를, 이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고 하였다. 그리고 훗날에, 예수께서 악에 물드셨는지에 관한 논쟁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인지 신약성경은 그분의 무죄한 생애에 관해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히 7:26, 벧전 2:22). 뿐만 아니라 신약의 기자들은 사실상 예수님을 경배와 존경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행 7:59, 롬 9:5, 히 1:6).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인(神人, God-man)의 개념이 갖는 철학적 문제에 얽매이거나 나중에 사상가들에 의해 제기될지도 모르는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연결시키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금고리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연구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인 인간이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당신의 겸비에 대한 증거를 주셨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육신으로 계신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연구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하신 말씀을 주의깊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연구할 때에 배우는 자의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가려뽑은 기별, 1권, 244).
일요일(4월 13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딤전 3:16)
도입)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는 육체로 나타난 바 되시고..여기에서 ‘그’는 '그것'(which)이 아니고 '그'(who)이다. 즉, ‘경건의 비밀’이 ‘그는’으로 전환된 것은 육체 안에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경건의 비밀임을 의미한다. 우주의 참된 의의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와 이야기에 있다. 이 관계와 이야기는 계속해서 비밀 안에 있었다. 골로새서 2장 2절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비교적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비밀’은 ‘이야기’로 바꿀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이고 사람이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절대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9절은 또한 “그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어떠함과 그분에 관한 모든 이야기, 사람들이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모든 비밀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지난 주 교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신비에 관해 배웠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인성에 대해 탐구하면서 다시 한 번 그 오묘한 신비에 접하게 된다. 바울은 외쳤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그리스도교가 신성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주장은 로마 세계에서 그리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황제들도 항상 신성(神性)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인성(人性)과 관련되시고, 인성으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휴스턴 스미스, 예화로 엮은 세계의 종교들, 하퍼콜린스 출판사, 1986년, 219). 비록 그레코-로만(Greco-Roman) 세계에서는 이상하게 여겨졌을지 모르지만 신약성경은 분명히 그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1. 다음 구절들은 이 놀라운 겸비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 1:18-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1:26-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1, 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갈 4: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빌 2:5-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약의 기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진진한 일이다. 사실상 그들은 후세에 비평이 빗발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냥 말했을 뿐이다. 이 사실은 그들이 신약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 주기 위해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우리가 신약에서 보듯이 초기 제자들도 물론 예수님의 본성과 신원에 관해 많은 논쟁에 부딪혀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격에 대한 그들의 논증은 분명 이성적 혹은 과학적 반대자들을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목격한 바를 생생하게 증거하였을 뿐이다.
교훈: 초기의 제자들은 그들이 직접 목격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놀라운 신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가적용)
경건의 비밀의 주인공이 그리스도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경건은 단순히 어떤 일이 아니라 한 인격임을 함축한다. 이 인격은 개인적인 그리스도만 아니라, 몸을 가지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시(顯示)를 하나의 위대한 신비로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가 에베소서 3장 18-19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혜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가장 적합한 묘사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에 담겨 있다. 첫째, 우리는 여기서 양성에 대한 뚜렷한 확증을 볼 수 있다. 곧 그는 동시에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심을 밝혀주고 있다. 둘째, 그는 양성에 대한 구별을 짓고 있으니, 곧 그는 먼저 하나님으로 부르고 다음에 육신으로 나타나심을 밝히고 있다. 셋째는 그는 그의 위격이 하나님이시며, 육신으로 나타난 동일한 위격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이 위격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점은 아주 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이 인간의 육신과 결합되며, 그 결과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고 있다.
월요일(4월 14일)
대립되는 주장이 생겨남
도입)
지금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그분의 삶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 뒤덮여 있다. 서점이나 극장가에는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논하는 책과 영화가 나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는 돈을 위하여 만들어진 책과 영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삶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갖 오해와 편견을 갖도록 이끌어 갈 뿐이다. 지금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한 쪽에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셔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본으로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우리와 전혀 다른 육체를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취하고 태어나신 본성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구원을 논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복음의 연결 고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믿고 따라가는 복음과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으로 확산되고 세대가 바뀌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들을 제기했다. 같은 육체에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공존할 수 있는가? 신성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 존재로 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에 있으셨는가?
1세기에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더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신성을 더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 중에 에비온파(Ebionites)가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초기 그리스도인들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침례를 받으실 때였으며 그때로부터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분은 신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으셨고 다만 그들을 순종으로 이끄셨다고 주장했다. 그 후 3세기 말에 시작된 아리우스파(Arians)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어느 정도 수용하였으나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Council of Nicea)에서 강하게 정죄되었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 중에 그노시스파(Gnostics)가 있는데, 이들은 영(spirit)은 선하고 물질(matter), 특히 우리의 육체는 악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 요한은 그노시스파에 대해 어떻게 말했습니까?(요일 4:1-3)
답:
예수님이 누구이셨는가에 대한 논쟁은 2세기부터 6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그분의 신성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는가? 그렇다면 그분과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관계에 계셨는가?’ 마침내 논쟁은 그분의 인성에 관한 주제로 옮겨갔다.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한 몸에 결합될 수 있는가?’ 진술과 반박, 선언과 반론, 비난과 정죄와 출교가 이어졌고, 새로운 주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놀랍게도 이러한 소동과 논쟁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본성과 신원에 관한 성경적 정통이 궁극적으로 우세하였다.
교훈: 2세기에서 6세기까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과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나 결국 성경적 정통이 우세하였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본성을 연구하다가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셨다는 것을 강조하다가 그분을 사람들 앞에 죄의 경향을 가진 한 사람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제2의 아담이시다. 그분은 죄의 유혹에 굴복하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셨지만, 유혹에 한 번도 넘어가거나 시험에 굴복하시지 않았고,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죄를 한 번도 지으신 적이 없었기 때문에, 죄지은 사람이 가지는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없으셨다. 죄 없는 경향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우리가 계속 반복함으로 생기는 것이다. 죄의 경향이란,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 타락한 경향에 따라 우리가 선택을 하고, 그런 선택을 함으로 만들어진 습관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쓰셨을지라도, 어떤 죄의 습관을 가지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죄의 유혹들을 인식하셨고,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과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4:15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화요일(4월 15일)
우리의 인성을 취하심 (갈 4:4)
도입)
경건이란 무엇인가? 디모데 전서 3장 16절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라고 했다. 경건은 바로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당초에 하나님의 생명이 주 예수님(교회의 머리)의 몸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오늘도 역시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믿는 사람에게서(교회) 나타나는 것이 경건이다. 그러므로 경건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참으로 구원받았다면 우리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태도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곧 경건의 생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계속 우리 육신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디모데 후서 3장 12절의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곧 다른 사람이 우리의 언어와 태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우리의 행동과 처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복장이나 가구, 실내장식, 우리의 일거일동에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이것이 바로 경건이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분을 비범한 분으로 여겼으나 여전히 그분을 한 인간으로 알고 있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로 달려가 우물가에서 만났던 낯선 유대인에 관해 사람들에게 전파했을 때 “이 사람을 와 보라”(요 4:29)고 한 것은 그녀의 꾸밈없는 표현이었다. 그녀의 말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분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신 후에도 그분의 가장 가까운 이들은 “이 어떠한 사람”인가?(마 8:27)하고 외쳤던 것이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께서 참으로 혈육을 지닌 인간이셨음을 어떻게 입증해 줍니까?
마 8: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1: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4:5-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4:7, 19:2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1:33-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종종 신성을 자유로이 사용하실 수 있는 상황에 놓이셨다. 그분께서는 여전히 신성을 지니고 계셨으며, 언제든지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하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직면하신 시험의 주요한 부분은, 자신이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모든 점들에 대해 성경이 세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성경은 예수님의 본성 중 인간적인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정확히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결합된 분이셨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성경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완전하게 결합되었는지에 대해 전문용어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여자에게서 나신 그 아들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갈 4:4)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한 것처럼 믿게 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성을 취하셨다”(엘렌 G. 화잇, 그분을 높이라, 74).
교훈: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참으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신성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부가적용)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는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할 뿐 아니라, 그가 참사람이심을 또한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인격이셨고, 신적 인격이신 그가 인성(人性) 혹은 인적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지정의(知情意)는 성(性, nature; 본질)에 속한 특질이라고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의지 뿐만 아니라 인적 의지도 가지고 계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적의지와 그의 인적의지는 조화를 이루셨고 그의 인적의지는 그의 신적의지에 항상 복종하신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수요일(4월 16일)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심(히 4:15-16)
도입)
‘체휼한다’는 말은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이다. 추적 60분’에서 다룬 사건으로 미국에서 276년 형을 받고 도망쳐온 에디 강이란 청년을 놓고 미국에 소환해야하는지의 문제를 다른 적이 있었다. 그 방송에 의하면 에디 강의 옛 애인이 에디 강의 변심으로 일어난 일에 대한 보복으로서 어떤 살인 사건에 대해서 거짓 증언한 것이라는 심증이 간다. 그러나 미국 재판정의 배심원들과 판사는 에디 강에게 276년의 형을 선고해 버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으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변호사가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해 통달한 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미국의 법을 잘 알았고 미국인 미국문화에 대해서는 잘 알았으나 한국인에 대해서는 너무도 몰랐다. 변호사는 재판관과 의뢰인을 둘 다 잘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 옆에 계신 변호사로서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늘 보좌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보좌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부각된다. 같은 병원에 있다 해도 중환자실이나 영안실과 산부인과가 의미가 전혀 다른 것처럼 같은 하늘 보좌이지만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라 함은 가고 싶은 곳이요,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곳이요 나의 연약함을 하소연할 수 있는 곳이요, 설령 내가 죄인이었다 할지라도 용서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있었는가? 이 질문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대답을 찾기 위해 순전히 지성적인 노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철학적, 과학적, 사회학적인 연구를 함으로써 하나의 해답을 이끌어 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우리 마음대로 대답을 꾸며내서도 안 된다. 가장 손쉽고 빠른 길은 이 점에 대해 성경 자체가 보여주는 바를 주의 깊이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이 문제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준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늘 성소에서의 대제사장으로 직접 묘사한 히브리서의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특별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분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구절들은 그분의 낮아지심에 대한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들이 있습니까?
히 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2:14-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2:16-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2: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4:1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5:8-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각 구절은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고난당하신 하나하나의 이유들을 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이 구절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를 향해 팔을 넓게 펴시며, 이 땅에서의 생애를 통해 친히 우리의 곤경을 아시고, 우리의 아픔을 느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무한한 기쁨을 얻게 된다. 이보다 더 자비로운 구주를, 이보다 더 동정심이 많으신 대제사장을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무한한 기쁨과 감사가 우리의 가슴에서 솟아난다.
교훈: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히 4:16).
부가적용)
그분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분이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분이시다(히 2:18). 그러면서도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죄가 없이 온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대제사장과 같이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야 할 필요는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이 드리는 속죄 제사에는 온전한 사함이 있다. 그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나를 위해 준비된 대제사장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 길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그 대제사장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벌거숭이 모습으로 그 앞에 서는 것이 인간의 생각으로는 부끄럽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분이 나와 같이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신 분이시며, 나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는 담대하게 그 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이 앉으신 보좌는 그 이름조차도 ‘은혜의 보좌’다.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 앞에서만이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내게 없어도 된다면, 굳이 담대함을 무릅쓰고 그 앞으로 나가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긍휼 없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없이는 온전히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분이 허락해 주신 긍휼하심과 은혜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 담대할 수 있는 근거조차도 그분께 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또 실제로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오라 해도 어찌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그분의 소망임을 알기 때문에 담대하게 그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전히 내 안에 있는 죄성들은 거룩하신 그분의 빛 앞에 드러나기를 두려워하여 끊임없이 뒷걸음질 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죄성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죄성보다 더 크게 그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임을 알기에 나는 그분 앞으로 날마다 나아갈 수 있다. 그분을 위해서 나아가 드려야 한다. 그것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양떼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의 심정일 것이다. 그것이 지난 구약 선지서들에서 심판을 경고하시되, 동시에 구원에 대한 언약을 생략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이 아니었던가!
목요일(4월 17일)
영원한 결속 (딤전 2:5)
도입)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예수께서 느닷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 어떻게 제자의 발을 스승으로 하여금 씻어 주도록 방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버티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예수께서 제자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제자들과의 강한 연대, 결속을 다지는 뜻이 있었다. 제자들을 남겨 둔 채 죽음의 길로 떠나는 스승의 깊은 뜻이었다. 스승과 제자와의 끈끈한 관계를 다지는 길은 발을 씻어 주는 일이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이 이야기를 좀 더 높은 차원으로 해석하였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하늘나라에서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이제"와 "하늘나라"(현재와 영원)에서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철저한 결속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예수께서 인성을 쓰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영원한 결속을 다짐하신 그분의 강한 의지를 본 것이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모든 삶은 우리와 영원한 결속을 다지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 자신에 비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의 성육신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지상생애를 마치신 후에 우리와의 동질성을 버리시고 온전히 그분 본래의 형상대로 되돌아가셨다 할지라도 우리는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께서 인성의 흔적을 지니신 채 영원히 우리와의 결속을 유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감동을 자아낸다!
1. 예수님과 우리의 영원한 결속에 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눅 24:36-4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 1:10-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 17: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딤전 2: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죄의 파멸에서 회복하시는 것 이상의 일을 성취하셨다. 하나님과 인간을 영원히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결코 타락하지 아니하였던 때보다 더욱 밀접하게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다. 구주께서는 우리 인성을 취하심으로 결단코 끊어지지 않을 줄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붙들어 매셨다. 그분은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우리와 연결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속죄제물로서 죽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타락한 인류를 위해 아들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변치 않는 평화의 경륜(經綸)을 우리에게 보증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사 우리 인간 가족의 한 사람이 되게 하시되 그 인성을 영원토록 보유하게 하셨다”(시대의 소망, 25). “그리스도께서는 성화되고 거룩한 인성을 지니신 채 하늘로 승천하셨다. 하늘 궁정으로 들어가실 때 그분은 인성을 갖고 들어가셨으며 모든 인간을 구속하신 분으로 영세무궁토록 인성을 입고 계실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6권, 1054)
교훈: 예수께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사실만으로도 감사한데, 그분께서 영원토록 인성을 지니신 채 우리와의 결속을 유지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격스럽다.
부가적용)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사건만으로도 그것은 그분에게 말할 수 없는 치욕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길로 가셨다. 인간 최악의 고난의 길이다. 예수께서는 이 고난의 잔을 피할 수 있는 가에 대하여 기도를 드렸다. 죽음은 고통이다. 슬픔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비겁해지기도 하고 굴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의 고난을 자신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고난은 불행이다. 그러나 성서적 의미에서 고난은 인간의 영광이다. 고난이 아픔이기는 하지만, 슬픔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광이기도 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견해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더 큰 의미가 있는데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주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실천하신 신념을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으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과 인간과 함께 하시려는 주님의 강한 결속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며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실 것이라는 그분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와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영원한 결속을 다짐하신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원히 그분이 인성으로 남아계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의 영원한 결속을 맺으신 것을 말해주고 있다. 호주의 작가 패트릭 화잇트(P.White)는 197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작가수업을 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했다. 열심히 저작활동을 하였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나머지 호주에 돌아와 나무꾼이 되었다. 삼림의 계곡 속에서도 그는 계속 소설을 썼다. 그래서 발표한 작품이 "행복한 계곡"과 "인간의 나무"이다. 마침내 세상의 빛이 그에게 이르렀다. 계곡에서 나무를 자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창피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행복한 계곡"으로 여겼다. 그는 그 작품에서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분량만큼 진보한다"고 말했다. 고난을 통해 그는 자신의 진보를 성취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나무"에서 계속 말하였다. "인간은 진정으로 겸손하게 될 때에,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깨달은 때에 그는 가장 하나님께 가깝다." 예수는 원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 인간과의 영원한 결속을 다짐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영원한 결속을 위하여 주님께서 자원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분의 희생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을 최고로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여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금요일(4월 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님의 위격에 관한 수세기 동안의 논쟁 끝에 칼케돈 종교회의(Council of Chalcedon, A.D. 451)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세워졌다. 이 회의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사실에 대해 동의하고 선포한 것이다. “우리는 한 목소리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이시고 동등하시며, 신격에 있어 동등하실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시므로,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이시요 참으로 인간이시다. 우리와 같이 인간으로 계셨으며 무죄하신 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인용, 유스토 L. 곤살레스, 기독교 사상사, 1권, 애빙던 출판사, 1970년, 390). 이 칼케돈 선언의 의미를 재림교회의 관점에서 평가한 내용을 참조하려면 로이 애덤스(Roy Adams)의 책, 그리스도의 본성(The Nature of Christ,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 1994년, 57-72)을 보라.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묵상할 때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앞에 할 말을 잃고 만다. 그 주제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을 증폭된다. 베들레헴 구유에 누인 무기력한 아기와 그분의 신성 사이에는 얼마나 넓은 간격이 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힘없는 아기 사이의 거리를 우리가 어찌 측량할 수 있으랴? 신성의 충만함 가운데 계셨던 우주의 창조주께서 구유에 누운 연약한 아기로 탄생하셨다. 어떤 천사보다 더 높으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존엄과 영광을 가지셨던 분이 인성을 옷 입으셨다. 신성과 인성은 신비롭게 결합되었으며, 인간과 하나님은 하나가 되었다. 그 결합 안에서 우리 타락한 인류는 소망을 발견한다”(엘렌 G. 화잇, 영문시조, 1896년 7월 30일자).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주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한편 우리가 지나치게 파고들지 말아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2. 이번 주 교과의 내용을 전도하는 일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가 현대인에게 어떤 감명을 줍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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