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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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08-03-28 13:55 조회7,136회 댓글0건본문
제1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총 론
불멸의 큰 소망
수 천 년에 걸친 역사의 페이지에 불후의 명성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나사렛 예수님은 가장 짧은 기간의 공생애를 보내셨다. 그분의 활동 기간은 단지 3년 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3년 반은 얼마나 놀라운 기간이었던가!
소크라테스는 40년간 제자들을 양육했고, 플라톤은 50년간 가르쳤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40년간 활동했으나 예수님은 4년도 채 못 되는 공생애를 사셨다. 그러나 그분의 짧은 사역의 영향력은 위의 세 사람의 헬라 거장들이 활동한 기간을 다 합한 130년의 영향력을 훨씬 능가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장엄한 작품들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드높인 것이었고, 하이든과 헨델, 바흐와 멘델스존이 최상의 멜로디로 만든 위대한 심포니와 오라토리오는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예술과 문화, 음악과 철학, 이 모든 것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풍요롭게 장식해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철학과 예술과 음악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제공해 주셨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지만, 예수께서는 죄지은 인간에게 빛과 생명과 구원을 제공해 주셨다.”
이 진술이 비록 훌륭하긴 하지만 예수님의 귀중한 사역의 의미를 충분히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단지 서양적인 관점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만인을 위한 것이며 정치적, 인종적, 문화적 장벽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경은 그대에게 예수님에 관해 말해 주기 때문에 그것을 상고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그대는 예수님에 대해 무한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갈바리의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그대의 매 발걸음마다 세상을 향하여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대는 불사불멸의 큰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자서전, 293).
그리스도교는 또한 역사적인 종교로서, 그 생애와 사역을 역사적으로 연구하고 확인할 수 있는 한 분 예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틀 속에 국한되실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위격(位格)의 실체는 역사를 초월하며 역사적 분석만으로는 탐구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만으로는 우리가 구원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으며, 인류를 위해 제공된 그리스도의 죽음의 경이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역사만으로는 엘렌 G. 화잇이 말한 ‘불멸의 큰 소망’을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번 기 교과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우리는 그분이 누구이셨고, 무엇을 가르치셨으며, 무엇을 행하셨고, 또한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특히 마지막에 언급한 ‘그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가’라는 사실은 세상의 모든 다른 위인들과의 분명한 차이점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현재 시제의 신비’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다른 모든 역사상 인물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아무리 위대한 역사의 인물들도 지금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 경이로우신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그분은 어떤 모습이셨는가? 그분은 이 땅에 계신 동안 무엇을 행하셨는가? 참으로 그분은 지금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은 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 대답을 이번 한 기 동안 살펴보겠지만, 결코 학문적인 대답만은 아닐 것이다. 그 대답은 각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클리포드 골드스틴
4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8분)
기억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연구 범위: 마 16:13-16, 요 20:26-28, 고전 1:18-27, 15:3-7.
안식일 오후
예수님의 사역 초기로부터 그분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있어 왔다. 이러한 논쟁이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논쟁은 그 당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의 이름은 마리아가 아니냐?”(마 13:54-55)하고 그들은 물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악평’이었다. 메시야는 결코 우리가 잘 아는 곳에서는 올 수 없고 다른 어떤 곳에서 와야 하며,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가족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 지방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 그분의 신원에 대한 이와 같은 관심은 논쟁의 틀을 형성했으며, 그로부터 수세기에 걸쳐 내려오면서 그분의 신원에 대한 호기심은 고조되어 왔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사람들은 왜 그분을 다른 유명한 인물들과 혼동하였는가? 신약 시대로부터 수세기 동안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어떤 도전들이 있었는가? 성경을 기록한 이들은 그분의 신원에 대해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확신의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이번 첫 과에서 이러한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해 탐구해 볼 것이다.
핵심본문: 마 16:13-15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은 신화가 아니며, 그분은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였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신자들이 개인적인 구주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될 필요성을 느낀다.
행하기: 예수께서 세상을 죄의 결과로부터 건지기 위해 오셨음을 고백한다.
교과 개요
I.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A.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의문은 그분의 지상 사역 내내 제기되었음
B.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그 당시의 논쟁을 잘 알고 있었음
C. 예수께서는 제자들 자신이 당신께 대한 확신을 갖기를 원하셨음
II. 구주인가, 위대한 역사적 인물인가?
A. 17~18세기에 제시된 새로운 과학적 기준이 성경 연구에도 적용됨
B.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성경적 견해 대신 이성적 사고가 득세함
C. 예수님을 더 이상 구세주가 아닌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 봄
III. 성경적 믿음이 우세함
A. 20세기에 이르러 예수님에 관한 과학적인 견해가 흔들리기 시작함
B. 오늘날은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높이는 성경의 견해가 우세함
C.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분의 많은 이적을 목격하고 그분을 메시야로 증언했던 제자들에 관한 신약의 기사에 의존함
D. 예수님께서도 친히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하심
요점: 수세기 동안 예수님의 진정한 신원에 관한 논쟁이 있어 왔다. 그러나 과학적 방식이 성경의 가르침에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우세하다.
일요일(3월 30일) 침례자 요한이 아님(마 16:14)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의문은 그분의 공생애 동안 계속적으로 대두되었으며,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을 만나실 때마다 다양한 형태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지상생애를 마치시기 약 6개월 전에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통과하시면서 그 당시에 떠돌고 있던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그들의 입으로 답하게 하실 필요를 느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1. 마태복음 16:14에서 제자들이 한 대답을 찾아보십시오. 제자들의 대답은 이들이 그 당시의 이 신학적인 질문에 대해 얼마나 친숙하게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까? 예수께서는 특별히 왜 이 시점에 이 문제를 끌어내셨다고 생각합니까?
마16:14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답: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그분을 누구라 하는지에 대해 익숙히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대답할 수 있었다.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그런데 예수께서 특히 이 시점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신 이유는 이제 곧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상하시고(참조 마 16:21)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한 말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형편에서 어떻게 그분의 사역을 경험했는지를 알 수 있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동시대의 사람인 침례자 요한과 혼동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의 어떤 면이 요한의 사역과 흡사했습니까? 다음 구절들을 참조하여 가능한 대답을 정리해 보십시오(마 3:1-3, 4:12-13, 17, 14:1-2, 막 1:1-5).
마3:1-3 그 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마4:12,13,17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14:1,2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침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막1:1-5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침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답: 예수께서도 침례자 요한과 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참조 마 3:2)는 기별을 외치셨다. 동시대에 활동한 이 두 사람에 대해 사람들은 혼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침례자 요한과 혼동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없고 간접적인 정보나 소문에 의존했을 1세기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이 왜 혼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구절들에서 보듯이 결국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확실히 예수님을 소개하였다(마 3:11-12, 막 1:6-8).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기다리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실 예정이셨다. … 예수께서는 장차 임할 시련을 견딜힘을 얻을 수 있도록 당신께 대한 저희의 믿음을 고백할 기회를 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슬프게도 제자들은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시인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대의 소망, 411).
<부가설명> 예수께서 그 당시 사람들과 같은 환경, 문화적 풍토, 정치적 현실에 함께 사셨다. 사람들과 똑 같이 먹고 마시고 일하며 사셨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뛰어난 능력을 행사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침례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 등으로 인식한 것은 예수님을 좋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세상은 예수님을 4대성인이나 3대성인 중 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좋게 대우하는 것이다. 그를 십자가에 처형된 고약한 죄인이었다고 말하지 않고 성인으로 보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이런 인식은 예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데 아주 교묘한 방해물이 된다. 사단은 사람들을 이런 인식으로 이끌면서 예수님을 단지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며 사랑을 실천한 모본으로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올바르게 인식하는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그분을 침례자 요한과 혼동한 것은 단지 소문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한 자신은 분명하게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였다.
월요일(3월 31일)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가 아님
1. 마태복음 16:14을 다시 읽으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한으로 착각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구약의 다른 선지자로 오해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마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답: 예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들의 위선을 견책하셨으므로 사람들은 그분의 담대함을 보고 엘리야나 예레미야, 혹은 다른 위대한 선지자들에 빗대어 말했던 것이다.
엘리야는 두려움을 모르는 갈멜산의 선지자요, 이스라엘의 고집 센 왕과 비열한 왕비를 대면했던 담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합의 부패한 정권과 결탁한 종교 체제를 홀로 대항하여 싸웠던 사람이었다(참조 왕상 18장).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격렬한 국가적 소요와 위기의 때에 등장하여 특정한 민족적 상황에서 동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였다(렘 20:1-2, 7-8).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같이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을 신랄하게 지적하셨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 23:31)라고 지적하심으로 이 경건한 체하는 자들을 강하게 견책하셨다.
1.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그분을 구약의 몇 인물들과 동일시한 사실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까?
답: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에 비교한 것은 그분에 대한 높은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마태복음 16:14에 나오는 베드로의 대답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그분을 어떤 인물들로 오해했다는 것은 그분께 대한 높은 존경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영적인 거인들로서 유대 사회에 깊은 공감을 일으킨 믿을 만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게 되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어떤 위대한 인물들과 비교한다 해도 진실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가령 만약에 예레미야가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주장했다면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만일 갈멜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 이세벨의 위협에 겁을 냈던 엘리야처럼 행동하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 존경을 표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가 아닌 메시야로 믿음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이적을 보고 그가 다윗의 아들임을 진심으로 선언하였다. 벳새다에서 양식을 먹은 군중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하기를 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선지자로는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으나 그가 메시야라고는 믿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411).
<부가설명> 위의 부가설명에서 썼듯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흉악범을 처형하는 십자가 형벌을 받은 죄수였음에도 성인으로 평가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성인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인 영생의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전하면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부인할 때 그 순간에 예수님을 그들에게 하나의 기만자(欺瞞者)로 전락한다. 예수님의 교훈의 가장 독특한 것은 “내가 ···· 이다”라는 교훈이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요 빛이”라고 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길, 진리, 생명, 부활, 빛이 아니면서 이런 주장을 했다면 그는 정말 사기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진짜로 이런 분이시다.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믿는 다면 성인이 주장한 이런 것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할 것이다. 이런 모든 교훈을 전혀 신청(信聽)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성인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일 뿐이다. 세상이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말이지만 그 말 속에는 사단의 무서운 기만이 숨어있는 것이다.
교훈: 예수님을 고대의 영웅적인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 유쾌하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복음서에 묘사된 그분의 실체를 나타내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화요일(4월 1일)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관심이 계속됨 - 1
신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추측하지 않고, 그분을 단순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그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예수님의 존재와 신원에 관한 여러 의문들에 대해 일일이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토론과 논쟁에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신빙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에 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17~18세기에 일어난 소위 계몽주의 운동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성경은 더 이상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의 기초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 대신에 고대의 다른 문서를 연구할 때 적용되었던 방법과 기준이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제 초자연적인 것이나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은 이성적 분석과 비평에 밀려 거절당하고 말았다. 인간이 죄에 빠짐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는 전통적인 성경의 견해는 인도주의(人道主義)로 대체(代替)되었고 인간의 능력과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광범위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머지않아 그리스도교가 쇠망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종교는 진부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한 때 신학의 시녀였던 이성(理性)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은 구원의 예수님으로부터 역사의 예수님으로 그 초점이 옮겨 갔으며, 그때까지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은 복음서나 그 후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신학적으로 미화된 것으로 간주되었고, 진짜 예수님은 역사상 실제로 존재했던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어쨌든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의 구주가 아니시라는 주장이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과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그리스도 앞에서 이상한 수줍음을 느꼈으나 그것을 태연함과 위엄의 풍채로 감추려고 힘썼다. 그는 말하였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교사로서의 드문 재능과 이적을 행하시는 놀라운 능력을 말함으로 그는 면담의 실마리를 찾기를 바랐다. 그는 그 말로 확신을 나타내고 또한 예수님이 자기의 말을 신임하도록 계획했던 것이었지만, 사실 그 말은 불신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개 교사로 인정하였다”(시대의 소망, 168).
<부가설명> 역사적 예수라는 계몽주의 시대의 표현의 숨은 뜻을 나는 잘 모르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살다가 죽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의미가 배어있는 말일 것이다. 예수님은 물론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초역사적인 분이시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주와 이 세상을 위하여 활동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로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냥 성인으로 간주하는 그래도 예수님을 그만큼 봐주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예수가 자기와 동일한 사람인데 좀 뛰어난 분일뿐인 것이다.
이런 인식으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주이신 분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의 인식을 진정 어떤가?
교훈: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나던 17~18세기에도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관심은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예수님을 단지 역사적인 인물로만 묘사하였다.
수요일(4월 2일)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관심이 계속됨 - 2
소위 ‘역사적 예수’를 주장하는 자들은, 비록 초기 교회가 신학적 주석을 가했다 할지라도(계몽주의자들의 주장임) 여전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 묘사한 충분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연구 방법을 주창한 자들은 그 방법이 과학적이고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대의 풍조는 20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역사적 예수’에 관한 개념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이었는지를 입증해 주는 새로운 연구 방법들이 등장하면서 이성주의적 모험심이 얼마나 비참하게 실패했는지를 폭로해 주었다.
예수님의 역사성에 관한 연구는 길고 복잡하며 까다롭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소위 예수님 세미나(Jesus Seminar)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는데, 그 당시의 급진적 학자들은 그 이전에 있던 다른 역사적 요구가 실패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복음서를 기록한 돌팔이 의사들에게서 예수님을 구출한다는 것”이었다(로이 후버, 케네스 L. 우드워드의 “예수님의 죽음,” 뉴스위크, 1994년 4월 4일자, 39).
오늘날에는 아무도 예수님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대신에 그분이 죽으신 후에 개에게 먹혔다고 하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튼튼한 역사적 기초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2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비평과 논쟁의 지나갔으나 예수님은 각 시대의 변함없는 주님으로 살아 계신다.
1. 바울은 당대의 지식이 높은 궤변학자들에 대항하는 가장 유력한 변증자 중 하나였는데, 그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선언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기별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없다면 인류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역사에 뛰어들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완성하신 구세주이시다.
세상의 지혜를 의뢰하는 과오
“사람의 고안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때가 자주 있다. 주의 성전을 짓는 자들은 산에서 보이신 모형 곧 하늘의 모양을 따라 지을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성령의 지도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의 의견에 의지할 때에 하나님은 수치를 당하시고 복음은 배신을 당한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리석다. 세상의 지혜를 의뢰하는 자들은 분명히 과오를 범할 것이다”(시대의 소망, 353).
<부가설명> 성경은 구주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다 취했다. 그 구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성경에 기록된 길을 따라 신원조회를 하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구주는 셈의 후손의 가계로 와야 한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와 다윗의 후손으로 와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남자들의 씨를 받아서 오면 안 되고 순결한 처녀에게서 태어나야 한다(사7:14). 그런데 또 그 순결한 처녀가 전혀 정혼도 하지 않은 처녀이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다윗 가문과 법률적으로나 호적상으로 관계가 없다고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남자와 정혼을 하였으되 결혼하지 않은 순결한 처녀에게서 태어나야 한다. 성경에서 이런 인물이 예수 말고 누가 있으며, 세상의 역사에서도 예수 말고 누가 이런 신원을 가졌는가? 예수님 외에 결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마리아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눅1:27)라는 긴 수식어로 설명하면서 그녀에게서 태어날 아들이 구주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계시한 것이다. 성경을 떠나서 예수의 신원을 확인하려는 것은 족보를 무시하고 그 사람의 혈통을 알아내려는 것과 같이 허황한 노력일 뿐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이런 세상의 헛된 철학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골2:8).
교훈: 예수님을 단지 역사적인 인물로만 생각하려는 시도들이 계속 있어왔으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목요일(4월 3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17:3)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증명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신학적 명제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세상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만약 예수께서 그들이 믿었던 그런 분이 아니시라면, 그들 모두는 거짓말과 꾸며낸 말에 속은 것이며, 결국 잃어버린 바 되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단지 2천여 년 전에 팔레스틴에 살았던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리스도교는 세계 역사상 가장 비난받을 만한 사기극에 가담한 것이 된다.
1. 다음 구절들은 이 문제의 핵심을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마 1:22-23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동정녀의 몸을 빌어 잉태하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심
마 11:2-6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예언된 메시야이심
마 22:41-45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주(主)라 칭한 이는 그리스도이심
막 14:61-64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예수께서도 자신을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심
요 20:26-28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제자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불렀음
제자들은 예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이적을 목격하였을 때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 8:27)라고 부르짖었다. 이 반응은 또한 우리의 반응이 되어야 한다. 그분께서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고 요구하였다.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마 26:64)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총독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마 27:11)라는 동일한 대답을 하셨다.
어쨌든 이 두 대답은 특별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예수께서 단지 나사렛의 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다면 빌라도 앞에서 그처럼 담대하게 자신의 왕권을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분명히 이 세상을 뛰어넘은 실체를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그분께서는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복음서와 나머지 신약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육체로 임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명확히 독립된 개체이시지만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그분은 하늘의 뛰어난 영광이셨다.…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체(하나이심)시라는 진리 속에는 빛과 영광이 있다. 이 진리는 어두운 곳을 하나님의 본래의 영광으로 빛나게 하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 비취는 빛이다. 이 진리는 그 자체가 무한히 오묘한 진리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로운 진리들을 설명해 주지만 그 진리 자체는 가까이 갈 수 없고 불가해한 빛 가운데 안치되어 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26).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 세상이 어떻게 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확증하고 있다. 이미 말한 대로 그의 신원이 그렇다. 그는 예언된 대로 오시고 예언된 대로 일하시고 예언된 대로 승천하셨다. 이 모든 것은 그분 스스로 계획하신 일이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했을 때 그들을 타락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창조주이신 당신 스스로 구속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대로 실행하신 것이다.
이런 모든 증거에 의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확증되었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스스로 증명해보이셨다. 이런 사실들을 우리가 믿을 증거로 제시하신다(행17:31). 믿고 영생을 얻으라고 당부하신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다음과 같은 초청의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금요일(4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문제를 깨닫기 위해 시대의 소망 제24장,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236-243)에서 읽으라.
“이 예수는 누구인가? 라고 그들은 물어보았다. 메시야의 영광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한 자는 목수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일하던 자였다. 그들은 그가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수고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은 그의 형제자매들과 잘 아는 사이였으며 그의 생애와 일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유년기에서 청년기로,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자라나는 것을 보았다. 그분의 생애가 비록 흠이 없었지만 그들은 그분을 약속된 자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
그들은 가난과 비천함에서 일어난 그가 보통 인간 이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237, 239).
“단지 한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말했다면 위대한 도덕성을 갖춘 교사는 아닐 것이다. 그는 미치광이든지 아니면 악마일 것이다.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한다.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거나 아니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간주할 수 있고, 그에게 침을 뱉거나 귀신들린 자로 여기고 죽일 수 있다. 혹은 그분을 주님과 하나님으로 부르며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한낱 위대한 인간 교사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옹호하려 하지 말자. 그분은 우리에게 그러한 생각을 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렇게 할 의향도 없으셨다”(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맥밀란-콜리어 출판사, 1960년 5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께서 생애하시던 그 당시의 사람들보다 2천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분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기가 더 쉽다고 생각합니까,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더 쉽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만나고 그분을 믿고 세상을 이긴 수 많은 증인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는 죄인으로 처형되었으며 가난하고 평범하며 학벌도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가 행하는 이적들이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확신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2. 예수님에 대한 회의적 사상은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 내가 믿어진다는 은혜이다. 많은 부정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그대로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 예수를 바르게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총 론
불멸의 큰 소망
수 천 년에 걸친 역사의 페이지에 불후의 명성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나사렛 예수님은 가장 짧은 기간의 공생애를 보내셨다. 그분의 활동 기간은 단지 3년 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3년 반은 얼마나 놀라운 기간이었던가!
소크라테스는 40년간 제자들을 양육했고, 플라톤은 50년간 가르쳤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40년간 활동했으나 예수님은 4년도 채 못 되는 공생애를 사셨다. 그러나 그분의 짧은 사역의 영향력은 위의 세 사람의 헬라 거장들이 활동한 기간을 다 합한 130년의 영향력을 훨씬 능가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장엄한 작품들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드높인 것이었고, 하이든과 헨델, 바흐와 멘델스존이 최상의 멜로디로 만든 위대한 심포니와 오라토리오는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예술과 문화, 음악과 철학, 이 모든 것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풍요롭게 장식해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철학과 예술과 음악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제공해 주셨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지만, 예수께서는 죄지은 인간에게 빛과 생명과 구원을 제공해 주셨다.”
이 진술이 비록 훌륭하긴 하지만 예수님의 귀중한 사역의 의미를 충분히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단지 서양적인 관점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만인을 위한 것이며 정치적, 인종적, 문화적 장벽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경은 그대에게 예수님에 관해 말해 주기 때문에 그것을 상고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그대는 예수님에 대해 무한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갈바리의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그대의 매 발걸음마다 세상을 향하여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대는 불사불멸의 큰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자서전, 293).
그리스도교는 또한 역사적인 종교로서, 그 생애와 사역을 역사적으로 연구하고 확인할 수 있는 한 분 예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틀 속에 국한되실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위격(位格)의 실체는 역사를 초월하며 역사적 분석만으로는 탐구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만으로는 우리가 구원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으며, 인류를 위해 제공된 그리스도의 죽음의 경이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역사만으로는 엘렌 G. 화잇이 말한 ‘불멸의 큰 소망’을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번 기 교과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우리는 그분이 누구이셨고, 무엇을 가르치셨으며, 무엇을 행하셨고, 또한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특히 마지막에 언급한 ‘그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가’라는 사실은 세상의 모든 다른 위인들과의 분명한 차이점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현재 시제의 신비’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다른 모든 역사상 인물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아무리 위대한 역사의 인물들도 지금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 경이로우신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그분은 어떤 모습이셨는가? 그분은 이 땅에 계신 동안 무엇을 행하셨는가? 참으로 그분은 지금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은 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 대답을 이번 한 기 동안 살펴보겠지만, 결코 학문적인 대답만은 아닐 것이다. 그 대답은 각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클리포드 골드스틴
4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8분)
기억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연구 범위: 마 16:13-16, 요 20:26-28, 고전 1:18-27, 15:3-7.
안식일 오후
예수님의 사역 초기로부터 그분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있어 왔다. 이러한 논쟁이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논쟁은 그 당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의 이름은 마리아가 아니냐?”(마 13:54-55)하고 그들은 물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악평’이었다. 메시야는 결코 우리가 잘 아는 곳에서는 올 수 없고 다른 어떤 곳에서 와야 하며,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가족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 지방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 그분의 신원에 대한 이와 같은 관심은 논쟁의 틀을 형성했으며, 그로부터 수세기에 걸쳐 내려오면서 그분의 신원에 대한 호기심은 고조되어 왔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사람들은 왜 그분을 다른 유명한 인물들과 혼동하였는가? 신약 시대로부터 수세기 동안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어떤 도전들이 있었는가? 성경을 기록한 이들은 그분의 신원에 대해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확신의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이번 첫 과에서 이러한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해 탐구해 볼 것이다.
핵심본문: 마 16:13-15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은 신화가 아니며, 그분은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였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신자들이 개인적인 구주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될 필요성을 느낀다.
행하기: 예수께서 세상을 죄의 결과로부터 건지기 위해 오셨음을 고백한다.
교과 개요
I.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A.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의문은 그분의 지상 사역 내내 제기되었음
B.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그 당시의 논쟁을 잘 알고 있었음
C. 예수께서는 제자들 자신이 당신께 대한 확신을 갖기를 원하셨음
II. 구주인가, 위대한 역사적 인물인가?
A. 17~18세기에 제시된 새로운 과학적 기준이 성경 연구에도 적용됨
B.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성경적 견해 대신 이성적 사고가 득세함
C. 예수님을 더 이상 구세주가 아닌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 봄
III. 성경적 믿음이 우세함
A. 20세기에 이르러 예수님에 관한 과학적인 견해가 흔들리기 시작함
B. 오늘날은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높이는 성경의 견해가 우세함
C.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분의 많은 이적을 목격하고 그분을 메시야로 증언했던 제자들에 관한 신약의 기사에 의존함
D. 예수님께서도 친히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하심
요점: 수세기 동안 예수님의 진정한 신원에 관한 논쟁이 있어 왔다. 그러나 과학적 방식이 성경의 가르침에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우세하다.
일요일(3월 30일) 침례자 요한이 아님(마 16:14)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의문은 그분의 공생애 동안 계속적으로 대두되었으며,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을 만나실 때마다 다양한 형태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지상생애를 마치시기 약 6개월 전에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통과하시면서 그 당시에 떠돌고 있던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그들의 입으로 답하게 하실 필요를 느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1. 마태복음 16:14에서 제자들이 한 대답을 찾아보십시오. 제자들의 대답은 이들이 그 당시의 이 신학적인 질문에 대해 얼마나 친숙하게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까? 예수께서는 특별히 왜 이 시점에 이 문제를 끌어내셨다고 생각합니까?
마16:14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답: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그분을 누구라 하는지에 대해 익숙히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대답할 수 있었다.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그런데 예수께서 특히 이 시점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신 이유는 이제 곧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상하시고(참조 마 16:21)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한 말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형편에서 어떻게 그분의 사역을 경험했는지를 알 수 있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동시대의 사람인 침례자 요한과 혼동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의 어떤 면이 요한의 사역과 흡사했습니까? 다음 구절들을 참조하여 가능한 대답을 정리해 보십시오(마 3:1-3, 4:12-13, 17, 14:1-2, 막 1:1-5).
마3:1-3 그 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마4:12,13,17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14:1,2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침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막1:1-5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침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답: 예수께서도 침례자 요한과 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참조 마 3:2)는 기별을 외치셨다. 동시대에 활동한 이 두 사람에 대해 사람들은 혼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침례자 요한과 혼동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없고 간접적인 정보나 소문에 의존했을 1세기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이 왜 혼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구절들에서 보듯이 결국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확실히 예수님을 소개하였다(마 3:11-12, 막 1:6-8).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기다리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실 예정이셨다. … 예수께서는 장차 임할 시련을 견딜힘을 얻을 수 있도록 당신께 대한 저희의 믿음을 고백할 기회를 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슬프게도 제자들은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시인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대의 소망, 411).
<부가설명> 예수께서 그 당시 사람들과 같은 환경, 문화적 풍토, 정치적 현실에 함께 사셨다. 사람들과 똑 같이 먹고 마시고 일하며 사셨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뛰어난 능력을 행사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침례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 등으로 인식한 것은 예수님을 좋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세상은 예수님을 4대성인이나 3대성인 중 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좋게 대우하는 것이다. 그를 십자가에 처형된 고약한 죄인이었다고 말하지 않고 성인으로 보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이런 인식은 예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데 아주 교묘한 방해물이 된다. 사단은 사람들을 이런 인식으로 이끌면서 예수님을 단지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며 사랑을 실천한 모본으로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올바르게 인식하는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그분을 침례자 요한과 혼동한 것은 단지 소문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한 자신은 분명하게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였다.
월요일(3월 31일)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가 아님
1. 마태복음 16:14을 다시 읽으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한으로 착각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구약의 다른 선지자로 오해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마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답: 예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들의 위선을 견책하셨으므로 사람들은 그분의 담대함을 보고 엘리야나 예레미야, 혹은 다른 위대한 선지자들에 빗대어 말했던 것이다.
엘리야는 두려움을 모르는 갈멜산의 선지자요, 이스라엘의 고집 센 왕과 비열한 왕비를 대면했던 담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합의 부패한 정권과 결탁한 종교 체제를 홀로 대항하여 싸웠던 사람이었다(참조 왕상 18장).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격렬한 국가적 소요와 위기의 때에 등장하여 특정한 민족적 상황에서 동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였다(렘 20:1-2, 7-8).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같이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을 신랄하게 지적하셨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 23:31)라고 지적하심으로 이 경건한 체하는 자들을 강하게 견책하셨다.
1.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그분을 구약의 몇 인물들과 동일시한 사실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까?
답: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에 비교한 것은 그분에 대한 높은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마태복음 16:14에 나오는 베드로의 대답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그분을 어떤 인물들로 오해했다는 것은 그분께 대한 높은 존경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영적인 거인들로서 유대 사회에 깊은 공감을 일으킨 믿을 만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게 되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어떤 위대한 인물들과 비교한다 해도 진실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가령 만약에 예레미야가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주장했다면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만일 갈멜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 이세벨의 위협에 겁을 냈던 엘리야처럼 행동하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 존경을 표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가 아닌 메시야로 믿음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이적을 보고 그가 다윗의 아들임을 진심으로 선언하였다. 벳새다에서 양식을 먹은 군중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하기를 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선지자로는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으나 그가 메시야라고는 믿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411).
<부가설명> 위의 부가설명에서 썼듯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흉악범을 처형하는 십자가 형벌을 받은 죄수였음에도 성인으로 평가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성인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인 영생의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전하면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부인할 때 그 순간에 예수님을 그들에게 하나의 기만자(欺瞞者)로 전락한다. 예수님의 교훈의 가장 독특한 것은 “내가 ···· 이다”라는 교훈이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요 빛이”라고 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길, 진리, 생명, 부활, 빛이 아니면서 이런 주장을 했다면 그는 정말 사기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진짜로 이런 분이시다.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믿는 다면 성인이 주장한 이런 것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할 것이다. 이런 모든 교훈을 전혀 신청(信聽)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성인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일 뿐이다. 세상이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말이지만 그 말 속에는 사단의 무서운 기만이 숨어있는 것이다.
교훈: 예수님을 고대의 영웅적인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 유쾌하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복음서에 묘사된 그분의 실체를 나타내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화요일(4월 1일)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관심이 계속됨 - 1
신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추측하지 않고, 그분을 단순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그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예수님의 존재와 신원에 관한 여러 의문들에 대해 일일이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토론과 논쟁에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신빙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에 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17~18세기에 일어난 소위 계몽주의 운동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성경은 더 이상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의 기초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 대신에 고대의 다른 문서를 연구할 때 적용되었던 방법과 기준이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제 초자연적인 것이나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은 이성적 분석과 비평에 밀려 거절당하고 말았다. 인간이 죄에 빠짐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는 전통적인 성경의 견해는 인도주의(人道主義)로 대체(代替)되었고 인간의 능력과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광범위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머지않아 그리스도교가 쇠망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종교는 진부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한 때 신학의 시녀였던 이성(理性)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은 구원의 예수님으로부터 역사의 예수님으로 그 초점이 옮겨 갔으며, 그때까지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은 복음서나 그 후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신학적으로 미화된 것으로 간주되었고, 진짜 예수님은 역사상 실제로 존재했던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어쨌든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의 구주가 아니시라는 주장이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과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그리스도 앞에서 이상한 수줍음을 느꼈으나 그것을 태연함과 위엄의 풍채로 감추려고 힘썼다. 그는 말하였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교사로서의 드문 재능과 이적을 행하시는 놀라운 능력을 말함으로 그는 면담의 실마리를 찾기를 바랐다. 그는 그 말로 확신을 나타내고 또한 예수님이 자기의 말을 신임하도록 계획했던 것이었지만, 사실 그 말은 불신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개 교사로 인정하였다”(시대의 소망, 168).
<부가설명> 역사적 예수라는 계몽주의 시대의 표현의 숨은 뜻을 나는 잘 모르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살다가 죽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의미가 배어있는 말일 것이다. 예수님은 물론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초역사적인 분이시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주와 이 세상을 위하여 활동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로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냥 성인으로 간주하는 그래도 예수님을 그만큼 봐주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예수가 자기와 동일한 사람인데 좀 뛰어난 분일뿐인 것이다.
이런 인식으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주이신 분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의 인식을 진정 어떤가?
교훈: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나던 17~18세기에도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관심은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예수님을 단지 역사적인 인물로만 묘사하였다.
수요일(4월 2일)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관심이 계속됨 - 2
소위 ‘역사적 예수’를 주장하는 자들은, 비록 초기 교회가 신학적 주석을 가했다 할지라도(계몽주의자들의 주장임) 여전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 묘사한 충분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연구 방법을 주창한 자들은 그 방법이 과학적이고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대의 풍조는 20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역사적 예수’에 관한 개념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이었는지를 입증해 주는 새로운 연구 방법들이 등장하면서 이성주의적 모험심이 얼마나 비참하게 실패했는지를 폭로해 주었다.
예수님의 역사성에 관한 연구는 길고 복잡하며 까다롭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소위 예수님 세미나(Jesus Seminar)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는데, 그 당시의 급진적 학자들은 그 이전에 있던 다른 역사적 요구가 실패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복음서를 기록한 돌팔이 의사들에게서 예수님을 구출한다는 것”이었다(로이 후버, 케네스 L. 우드워드의 “예수님의 죽음,” 뉴스위크, 1994년 4월 4일자, 39).
오늘날에는 아무도 예수님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대신에 그분이 죽으신 후에 개에게 먹혔다고 하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튼튼한 역사적 기초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2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비평과 논쟁의 지나갔으나 예수님은 각 시대의 변함없는 주님으로 살아 계신다.
1. 바울은 당대의 지식이 높은 궤변학자들에 대항하는 가장 유력한 변증자 중 하나였는데, 그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선언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기별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없다면 인류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역사에 뛰어들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완성하신 구세주이시다.
세상의 지혜를 의뢰하는 과오
“사람의 고안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때가 자주 있다. 주의 성전을 짓는 자들은 산에서 보이신 모형 곧 하늘의 모양을 따라 지을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성령의 지도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의 의견에 의지할 때에 하나님은 수치를 당하시고 복음은 배신을 당한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리석다. 세상의 지혜를 의뢰하는 자들은 분명히 과오를 범할 것이다”(시대의 소망, 353).
<부가설명> 성경은 구주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다 취했다. 그 구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성경에 기록된 길을 따라 신원조회를 하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구주는 셈의 후손의 가계로 와야 한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와 다윗의 후손으로 와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남자들의 씨를 받아서 오면 안 되고 순결한 처녀에게서 태어나야 한다(사7:14). 그런데 또 그 순결한 처녀가 전혀 정혼도 하지 않은 처녀이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다윗 가문과 법률적으로나 호적상으로 관계가 없다고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남자와 정혼을 하였으되 결혼하지 않은 순결한 처녀에게서 태어나야 한다. 성경에서 이런 인물이 예수 말고 누가 있으며, 세상의 역사에서도 예수 말고 누가 이런 신원을 가졌는가? 예수님 외에 결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마리아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눅1:27)라는 긴 수식어로 설명하면서 그녀에게서 태어날 아들이 구주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계시한 것이다. 성경을 떠나서 예수의 신원을 확인하려는 것은 족보를 무시하고 그 사람의 혈통을 알아내려는 것과 같이 허황한 노력일 뿐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이런 세상의 헛된 철학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골2:8).
교훈: 예수님을 단지 역사적인 인물로만 생각하려는 시도들이 계속 있어왔으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목요일(4월 3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17:3)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증명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신학적 명제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세상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만약 예수께서 그들이 믿었던 그런 분이 아니시라면, 그들 모두는 거짓말과 꾸며낸 말에 속은 것이며, 결국 잃어버린 바 되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단지 2천여 년 전에 팔레스틴에 살았던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리스도교는 세계 역사상 가장 비난받을 만한 사기극에 가담한 것이 된다.
1. 다음 구절들은 이 문제의 핵심을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마 1:22-23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동정녀의 몸을 빌어 잉태하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심
마 11:2-6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예언된 메시야이심
마 22:41-45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주(主)라 칭한 이는 그리스도이심
막 14:61-64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예수께서도 자신을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심
요 20:26-28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제자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불렀음
제자들은 예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이적을 목격하였을 때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 8:27)라고 부르짖었다. 이 반응은 또한 우리의 반응이 되어야 한다. 그분께서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고 요구하였다.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마 26:64)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총독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마 27:11)라는 동일한 대답을 하셨다.
어쨌든 이 두 대답은 특별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예수께서 단지 나사렛의 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다면 빌라도 앞에서 그처럼 담대하게 자신의 왕권을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분명히 이 세상을 뛰어넘은 실체를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그분께서는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복음서와 나머지 신약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육체로 임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명확히 독립된 개체이시지만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그분은 하늘의 뛰어난 영광이셨다.…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체(하나이심)시라는 진리 속에는 빛과 영광이 있다. 이 진리는 어두운 곳을 하나님의 본래의 영광으로 빛나게 하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 비취는 빛이다. 이 진리는 그 자체가 무한히 오묘한 진리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로운 진리들을 설명해 주지만 그 진리 자체는 가까이 갈 수 없고 불가해한 빛 가운데 안치되어 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26).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 세상이 어떻게 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확증하고 있다. 이미 말한 대로 그의 신원이 그렇다. 그는 예언된 대로 오시고 예언된 대로 일하시고 예언된 대로 승천하셨다. 이 모든 것은 그분 스스로 계획하신 일이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했을 때 그들을 타락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창조주이신 당신 스스로 구속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대로 실행하신 것이다.
이런 모든 증거에 의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확증되었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스스로 증명해보이셨다. 이런 사실들을 우리가 믿을 증거로 제시하신다(행17:31). 믿고 영생을 얻으라고 당부하신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다음과 같은 초청의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금요일(4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문제를 깨닫기 위해 시대의 소망 제24장,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236-243)에서 읽으라.
“이 예수는 누구인가? 라고 그들은 물어보았다. 메시야의 영광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한 자는 목수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일하던 자였다. 그들은 그가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수고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은 그의 형제자매들과 잘 아는 사이였으며 그의 생애와 일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유년기에서 청년기로,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자라나는 것을 보았다. 그분의 생애가 비록 흠이 없었지만 그들은 그분을 약속된 자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
그들은 가난과 비천함에서 일어난 그가 보통 인간 이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237, 239).
“단지 한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말했다면 위대한 도덕성을 갖춘 교사는 아닐 것이다. 그는 미치광이든지 아니면 악마일 것이다.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한다.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거나 아니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간주할 수 있고, 그에게 침을 뱉거나 귀신들린 자로 여기고 죽일 수 있다. 혹은 그분을 주님과 하나님으로 부르며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한낱 위대한 인간 교사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옹호하려 하지 말자. 그분은 우리에게 그러한 생각을 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렇게 할 의향도 없으셨다”(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맥밀란-콜리어 출판사, 1960년 5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께서 생애하시던 그 당시의 사람들보다 2천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분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기가 더 쉽다고 생각합니까,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더 쉽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만나고 그분을 믿고 세상을 이긴 수 많은 증인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는 죄인으로 처형되었으며 가난하고 평범하며 학벌도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가 행하는 이적들이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확신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2. 예수님에 대한 회의적 사상은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 내가 믿어진다는 은혜이다. 많은 부정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그대로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 예수를 바르게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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