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과 제자도의 모본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13과 제자도의 모본

페이지 정보

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3-21 23:20 조회6,078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2008년3월29일(안) 오후6시52분 <李奉周>

第13課 弟子道의 模本

<돋보기>
◎ 신앙위인(信仰偉人)들의 공통적인 특징(特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앙위인(信仰偉人)들은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 중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2. 신앙위인(信仰偉人)들은 전통이나 교리보다 성경말씀을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3. 신앙위인(信仰偉人)들은 생명을 살리고 뜻을 이루기 위해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4. 신앙위인(信仰偉人)들은 성령 충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습니다.
5. 신앙위인(信仰偉人)들은 말보다 실천을 앞세우는 적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6. 신앙위인(信仰偉人)들은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 무결한 깨끗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7. 신앙위인(信仰偉人)들은 이웃을 내 몸보다 더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했습니다.

◎ (점검)
1. 나는 그리스도를 위(爲)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2. 나는 복음(福音)과 진리(眞理)를 위하여 어떤 희생(犧牲)을 치루고 있는가?
3. 나는 승리(勝利)하고 있는가? 패배(敗北)하고 있는가?
4.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무(義務)를 신실(信實)하게 수행(修行)하고 있는가?
5.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하여 이기적(利己的)인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6. 나는 정욕(情慾)을 억제하고 매사에 절제하며 그리스도의 뜻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있는가?

日 3월23일
<同情心과 容恕의 情神>

◎ 남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동정심(同情心)이라고 하며,
지은 죄(罪)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罰)하지 아니하고 덮어주는 것을 용서(容恕)라고 한다.

☞ 4복음서(福音書)중에 사랑의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성육신(聖肉身)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예수님"의 본성과 그분의 지상생애(地上生涯)의 사명에 관한 설교들로 48개의 사건(事件)중에 31개는 요한복음에만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사건(事件)자체보다 사건의 의미에 관심을 보이는 내용으로 기록 하고 있다.
주님의 사역은 나병(癩病)에 걸린 사람이나, 중풍병자나, 한편 손이 마른 사람이나. 두 소경이나,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자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열 두해를 혈우증으로 앓은 여인이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친히 닦아 가시어서 이들 모두에게는 그들의 이웃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의 소외(疏外)당함과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을 주심을 주님의 제자들은 깊이 자신의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해타산(利害打算)이 맞을 때 만 대가(代價)를 철저히 계산하여 행동으로 옮긴다.
사단의 정신은 모든 이웃에게 경쟁의식과 자아 만족에 도취되어 자신과 자기의 가족만을 생각하며 사는 정신이므로 자기의 이웃들이 고통당하거나 죄를 지으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귀찮은 존재로 여기며 그들에게 더한 고통과 갈취를 일삼는다. 그 일예를 생각해보자.
경쟁의식과 빈민(貧民)한 자 들에게 고리대금(高利貸金)의 이자(利子)와 매점매석(買占賣惜)으로의 폭리(暴利)와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약자(弱者)에게 갈취(喝取)하는 수단과 방법으로 법(法)을 남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힘을 남용(濫用)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우리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파도처럼 늘 닦아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나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어떤 면에서는 가룟유다 보다도 더 나쁜 사람으로서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否認)하는 의리 없고 배은망덕(背恩忘德)한 형편없는 그를 요한복음21장에서의 기록을 보면 갈릴리 호숫가에서 행하신 사랑의 이야기는 베드로 그 보다도 더 나쁜 우리(나)에게 참으로 주님의 동정심과 용서와 사랑에 대하여 공짜로 받은 은혜에 비하면 천분의 일이라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땅에서 주님의 흉내만이라도 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 신앙경험에 사랑이 없으면 거기에는 "예수님"도 안 계신다. 즉 예의 임재의 빛이 없게 된다.
바리세인들의 특성 = 냉랭하고, 비판적이고, 용서를 모르는 정신이다.
그런 반면에 타인(他人)의 결점(缺點)을 찾아내는 데는 남다른 예민(叡敏)함을 갖인 사람이다.
(토의)
1. 지금까지 용서 받은 것이 더 크고 많은가? 아니면
용서 해주고 관용해준 경우가 더 많은가?
2. 지금도 용서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나(불편한 사람으로 분류해 놓고 만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3. 주위에 동정심(同情心)이 많다고 생각하는 분의 이름을 이야기 해 보자.
4. 남의 잘못을 대신 뒤 집어 쓰고 채벌이나 대가를 치른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 해보자.

月 3월24일
<排斥당하고 疏外된 者들>

◎ 우리 주위에는 따돌림을 당하거나 어떤 무리에서 멀리 당함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특히나 경제적(經濟的)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나, 병마(病魔)에 시달림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웃이나 동기간이나 일가친척들로부터도 배척(排斥)을 당하고 소외당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하며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 주님께서는 남녀노소(男女老少) 직업(職業)불문하고 계층(階層)도 신분(身分)도 차별을 두시지 않았다. 그러나 말세의 징조에 나타날 일들을 말씀해 놓으셨는데. 깊이 유념할 말씀이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末世)에 고통(苦痛)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模樣)은 있으나 경건(敬虔)의 능력(能力)은 부인(否認)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1-5)

(토의)
1. 예수님당시의 계층은 어떻게 분류되어 있었습니까? (눅 16:19-31)
2. 지금 우리 주위에는 어떤 계층으로 분류 되어 있습니까?
3. 지금 우리 교회나 가정의 이웃에게,
그대 자신이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을까?
4. 그대가 소외당했다고 느껴졌던 때가 있었는가? 말해보자.

火 3월25일
<多樣性과 差別의 情神>

◎ 꽃밭에서도 한 가지 색만있 것과, 다양한 색의 꽃이 있을 때 보기가 어느 것이 더 예쁠까?
◎ 숲속을 거닐 때 똑같은 종류의 나무와 똑같은 키의 나무만 가득차 있는 것과,
여러 종류가 많이 섞여있고 여러 종류의 색갈이 어우러져있다고 할 때의 보기와 감정은 어떠할까.
피아노나 키보드의 건반이 즉 음질이 한 가지 음(소리만) 난다고 하면 그 음악은 듣기가 어떨까?
◎ 교회에도 모두가 나이가 똑같고 성별도 똑같고 학벌도 고향도 똑같다면 그 교회가 어떨까요?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모양이나, 빛깔이나, 형태나, 양식이나, 많은 것들이 다른 특성을 안고,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인종도 직업도 취향도 환경도 국적도 종족도 혈통도 종교도 너무나 다양(多樣)고 성격도 취미도 참으로 다양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모든 편견(偏見)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정신으로 돌아갈 때 이 세상에서의 삶이 행복하고 보람이 넘칠 것이다.

(토의)
1. 교회생활에서의 기분 나쁜 일로 다른 교회로 옮겨 본 경험이 있다면
지금의 생각은 잘된 것이라고 생각 하는가? 아니면 후회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2. 나에게 인종(피부색)의 차이로 차별을 받아 본 경험이 있다면 ? 그때의 기분을 이야기 해보자.
3. 나에게 버려야 할 편견이 있다면 모두 이야기 해보자.

水 3월26일
<敎會>

◎ 어느 “M목사님”은 가난(家難)때문에 아내와 하나 밖에 없는 자식(子息)마저 잃고 일자리도 없이 좌절(挫折)과 슬픔에 잠긴 인쇄공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M목사님”에게는 그리스도인이 실제 생활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된다. 그 후 그 인쇄공이 요절(夭折)하는 비극적(悲劇的)인 사건 앞에서 “M목사님”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질문을 던지면서 삶의 매(每)순간(瞬間)을 책임지기로 각오(覺悟)한다. 그 다음 안식일(安息日)의 대 예배의 설교에서 전 교인들에게 같은 질문(質問)으로 도전(挑戰)을 한다. 이에 감동된 교인들 수십 명이 앞으로 1년간 그렇게 살기로 작정을 한다. 이러한 실제적인 헌신(獻身)의 삶이 연못에 던져진 조약돌 한 알이 파문을 일으키듯 사랑의 파문(波紋)을 일으켜 교회가 크게 부흥(復興)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내용이다.

☞ “M목사님”은 안식일 대 예배의 설교를 준비하고자 책상머리에 앉아서 설교에 인용할 성경구절은 베드로전서 2장21절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本)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M목사님” 설교 원고의 첫 머리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犧牲)으로 바친 대속(代贖)을 역설하고 이와 아울러 그리스도가 살아있었을 때뿐만 아니라 죽음에 처하여 당한 갖가지 시련(試鍊)과 고난(苦難)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그 다음엔 그리스도를 본 보기로 하여 그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에서 실례로 들어 대속(代贖)을 더욱 강조하려고 했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인간들을 구원(救援)하는 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를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이는 오로지 그리스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하기 위해 보여준 본보기나 인격(人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고자 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M목사님”은 예수님의 희생과 본보기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면 되었다.
“M목사님”의 “세 가지 단계란 무엇일까?” 라고 설교 제목을 써 놓은 다음 그 세 가지 단계를 하나하나 논리적(論理的)인 순서에 따라 정리 하려 하는데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M목사님”은 의자에 앉은 채 얼굴을 찌푸렸다.
초인종 소리가 급하게 다시 울렸다. 할 수 없이 일어나서 현관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으로 갔다.
한 사나이가 현관 계단에 서 있었는데, 나이는 젊었으나 옷차림이 아주 초라했다.
“비렁뱅이.(거지)로군. 내려가 봐야겠는데........”
“M목사님”은 방금 쓰던 문장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아래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이윽고 초라한 행색의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 저는 직장을 잃었습니다.
목사님이라면 제게 일거리 같은 것을 마련해 주실 것 같아서 ........”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구려. 요즘은 직장이 하도 귀 해서…….”
M목사님”은 마지못해 이렇게 대답하면서 현관문을 천천히 닫으려고 했다.
“그런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지만 목사님께서는 다른 곳의 일자리를 주선해 주실 수 있을 걸로 생각합니다만.......”
그 젊은이는 초조한 표정으로 색(色)이 바랜 모자를 한쪽 손에서 다른 쪽 손으로 옮겨 쥐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아무런 도움도 되어 드릴 수 없어서 미안합니다.
더구나 나는 지금 무척 바쁘답니다.
당신스스로 일거리를 구했으면 하는데요.
안됐지만 지금은 우리 집에도 당신이 할 일은 없답니다.
“M목사님”이 현관문을 닫아 버리자 그 사나이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층 서재(書齋)로 들어가서 창밖을 내다보니 그 사나이는 모자를 여전히 양손에 쥔 채 천천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목사는 창가에 우뚝 서서 그 사나이의 행색을 바라보다가 버림받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모습이 그 사나이에게서 너무나 완연히 드러나 보이자 순간적으로 마음에 찔렸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으로 가서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원고를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 했다. 더 이상(以上)의 방해(妨害) 같은 것은 없었다.
두어 시간이 자나 설교 원고가 끝났다 흐트러진 원고지를 한데 모아 깔끔하게 간추려 철(綴)한 다음에 성경위에 얹어 놓았다. 비로소 안식일 대 예배의 설교 준비가 완전히 끝난 셈이다.

오늘 “M목사님”의 설교 준비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따르자는 것이고, 즉 희생과 본보기로써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에 대해서 설교할 것이었다.
틀림없이 훌륭한 설교가 될 것으로 마음 흡족해 하며 안식일의 마치는 찬미도 515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로 선택을 했다.
드디어 안식일이 되었다 예배의 순서에 따라 설교 시작 전(始作前)에 소프라노 가수가
찬미가426장의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의 특창(特唱)도 멋지게 불렀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이어서 “M목사님”의 준비된 설교를 멋지게 서론과 본론과 결론을 지어서 끝내고 나자
갑자기 한 사나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으니 온 회중이 깜짝 놀랄 수밖에…….
그 목소리는 교회당 뒤쪽에서 들려왔다.
잇달아 한 사나이의 모습이 어두컴컴한 그늘 속에서 나타났다.
그는 교회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놀란 교인들이 미처 사태(事態)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설교단상 앞까지 걸어 나가 교인들을 향해 돌아서있었다.

“저는 이곳에 온 이후(以後)로 계속 떠돌아 다녔습니다.
“예배가 끝나기 전에 꼭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었어. 찾아왔습니다.
저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해(害)치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죽는다면 아마 며칠 못가서 죽겠지만 말씀입니다.
저는 여기에 모이신 훌륭한 분들에게 한 말씀드렸다는 것을 더할 수 없이 만족스럽게 여기며 이 세상을 하직할 겁니다.

“M목사님”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낯선 사나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는 지난주 금요일 아침에 자기를 찾아왔던 바로 그 초라하기 짝이 없고 추한 몰골을 한 젊은이였다.

이 젊은이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오늘 목사님께서 이렇게 설교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며 그 발자취란 곧 ‘순종, 믿음, 사랑 그리고 모방‘·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께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말씀하시지 않더군요. 특히 모방(模倣)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이 도시(都市)를 사흘 동안이나 샅샅이 헤매면서 일자리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저에게 동정이나 위로의 말씀이라도 해 주신 분은 여기 계신 목사님 한 분밖에 없었답니다.

저는 지금 며칠을 굶어서 힘이 없어서 이 모양입니다.
여러분에게 추궁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게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이 바로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고 말하며
그 젊은이는 쓰러졌고…….
그 젊은이를 목사님의 사택(舍宅)으로 옮겼는데 이내 그는 죽었다.

장례를 통하며 “M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았고.
머리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그의 말이 늘 떠나질 않았고 …….
그 목사님은 모든 목회(牧會)일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입장으로 돌아가서 목회를 하기로 하여 그 마음을 설교시간에 말씀하였고, 교우님들이 하나 둘. 점점 많이 동참하였고 그 교회는 모두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슬로건(slogan)으로 온 교우님들의 각성으로 이 교회가 크게 번창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 예찬사,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적용>
◎ 1. 나는 지금까지 과연 몇 명을 주님께로 인도 하였는가? 침례자수를 이야기 해보자.
지금 구도자(求道者)와 접촉하고 있는 방법과 사람들의 이름을 말해보자.
2. 나는 나의 주위에 도움이 필요 되는 사람들이 한사람도 없다고 생각 하고 있는가?
(물질(物質)이나, 도우미, 시간,)
3. 나는 지금 나의 교회 직분에 맞는 예수님의 제자도(弟子道)를 배운 금번 2008년도의 제1기의 내용을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하기로 결심했는지 반생들 앞에서 솔직히 이야기 해보자.

木 3월27일
<祈禱의 重要性>

◎ 5만 번 기도(祈禱) 응답으로 고아원을 운영한 “조지 물러”
역사상 기도응답을 가장 많이 받기로 소문 난 인물이 있다.
5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은 영국의 죠지뮬러이다.
죠지 뮬러(1805_1898년)는 프러시아인으로 크로펜스타트에서 출생했다.
그는 아버지의 주머니를 상습적으로 뒤져 돈을 훔칠 정도로 문제아였던 그는 1825년 11월, 어느 토요일 저녁기도모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회심(悔心)하게 된다.

1835년 할레대학을 졸업한 그는 선교사로 영국으로 건너 가 브리스톨 애슐리 다운에 고아원을 세워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했다.
1898년 3월10일 93세의 일기로 잠들기까지 그는 15만 명의 고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주었고 오늘날까지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고아원 사역을 했던 프랑케의 생애를 읽고 크게 감동받아 고아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던 중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시 81:10)는 말씀에 힘입어 이 일을 시작하게 된다. 고아원 사역을 통해 그 자신이 주님께 더 가까이 갈수 있기를 바랐으며,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며,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기꺼이 그리고 넉넉히 도우시는 분임을 눈으로 보여줌으로써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했다.

그는 성경연구와 고아원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經濟的), 물질적(物質的) 필요와 개인적 삶의 필요를 단지 하나님 한 분께 아뢰고 응답 받음으로써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임을 눈으로 보여주었다.

몰러는 이러한 믿음과 기도로 63년 동안 750 만 달러(한화로 약 30억 원)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그가 처음 고아원 사역을 시작할 때 준비된 것이라곤 선물 받은 접시 3개, 쟁반 스물여덟게, 물병하나 , 컵 한 개, 소금병 받침 세 개, 칼 네 개와 포크 네 개, 채소를 깎는 강판 한 개뿐이었다.

그는 수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데 정부의 힘을 빌리지도 않았고, 특정한 부자에게 손을 내민 일도 없었다. 단지 순수하고 온전하게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하고 기도해 기도의 응답으로 매일 양식을 공급받았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곧 `생명줄'을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물러 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기도했다. 또 기도할 때 자신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그는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바르게 기도하는 것도 얼마동안 기도를 계속한다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끝까지 기도를 계속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대 부분의 경우 우리는 축복을 받을 때 까지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축복을 쉬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뮬러가 얻은 신앙의 승리가 너무나 위대했기에 우리는 “뮬러가 언제 사련을 겪을 때가 있었나” 하고 반문하기 쉽다. 또한 그가 받은 응답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5만 번 이상이라고 함) 그 응답이 하나님께로부터 즉각적으로 오지 않아서 “언제 실망할 때가 있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며 , 지난 세월동안 조금씩 신장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다. (중략)

◎ 우리의 가정(家庭)이나 직장(職場)의 전기(電氣)불들은 발전소(發電所)에서부터 그 선(線)이 연결(連結) 되어야만 전기불이 들어온다. 기도(祈禱)하는 것은 마치 전등불의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은 것이고, 기도(祈禱)를 하지 않고 쉬는 것의 경우는 마치 전등에 스위치를 끄는 것의 경우(境遇)와 같다.

◎ 기도(祈禱)는 하늘의 능력(能力)의 보급(普及) 통로(通路)이다.
보급 통로가 끈긴 다는 것은 기도의 줄을 끄는 것을 말한다.

◎ “기도(祈禱) 그것은 영혼(靈魂)의 호흡(呼吸)이요 전능(全能)하신 분의 무한(無限)한 자원(資源)이 저장(貯藏)되어 있는 하늘 창고(倉庫)를 여는 믿는 자(者)의 수중(手中)에 있는 열쇠이며 마치 친구(親舊)에게 하듯이 하나님께 마음을 펴 놓는 것이다.” (정로의 게단229)

◎ 성경에 기도(祈禱)에 대해서 총299회 정도 언급한 가운데,
구약에서 169회, 신약에서 130회 언급 하였고,
☞ 제자들이 귀신들린 소년에게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예수님께 여쭈오니,
그 이유는 기도(祈禱)에 대한 귀중한 말씀의 교훈을 주십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외(祈禱外)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8-29)
☞ 다니엘의 기도(祈禱) (단 6:1-24)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로 사자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분명히 기록해놓은 말씀과.
☞ 요나의 회개(悔改)의 기도(祈禱)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이야기(욘 2:1-10)등
많은 기도(祈禱)에 중요성을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확인 하고 있다.

(적용)
1. 귀하는 24시간 속에 기도(祈禱)간이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시간(祈禱時間)안에 24시간이 있습니까?
2. 기도(祈禱)의 응답 받은 것 중에서 기억에 남는 간증(干證)이 있다면 소개하여 보자.
3. 자신의 기도 시간은 몇 시부터 시작 되며,
하루에 몇 시간정도 기도(祈禱)하며,
자기를 위한 기도시간은 몇 시간 정도이며,
구도자(求道者)나 이웃을 위한 기도시간은 몇 시간이나 할애하려고 결심하십니까?
4. 성경에서 가장 기도(祈禱)에 대해서 나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은 누구이며,
어느 성경절의 이야기가 기억(記憶)에 남으며, 나는 어떤 면을 나에게 적용하고자 하는가?

<(焦點)>
1. 제자들의 삶과 사역은 동정심(同情心)과 용서(容恕)의 정신을 실천(實踐)하는 삶이여야 한다.

2. 이 세상은 다양(多樣)하고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사람과 환경이 있다.
특히 기도(祈禱)의 중요성을 인식하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