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그분의 의미심장한 죽음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10과 그분의 의미심장한 죽음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목사 작성일08-06-02 09:26 조회6,600회 댓글0건

본문

제10과 그분의 의미심장한 죽음
6월 7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1분)

기억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연구범위: 마 27:45-46, 눅 2:25-35, 고전 15:3, 고후 5:18-21, 갈 6:14, 히 2:17.

안식일 오후
기독교 한 주요 잡지의 표지 기사로 어떤 성경연구 모임에서 벌어졌던 토론 내용이 게재되었다. 토론의 주제는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 였다. 그 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던져졌다. “만일 예수께서 오셔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와 같은 좋은 가르침만 주셨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분은 반드시 고난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왜 가르침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는가?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은 수세기 후에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거의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십자가의 의미는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안겨주는 주제이다. 사실상 그분의 죽음 이전의 선지자들도 성령의 증거하심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그 후에 얻으실 영광이 어느 시,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를 계속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벧전 1:10-11).
그래서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께서 왜 죽으셔야만 했고, 그분의 죽음을 통해 어떤 목적이 성취되었으며,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노력할 것이다.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느낌을 바꾸어주기 위해 죽으셨는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제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이 모든 주제는 깊은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다.

핵심본문: 갈 2:8

학습 목표
깨닫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치르신 죽음의 희생은 그분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것임을 이해한다.
느끼기: 우리의 삶에서 죄를 제거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기쁨으로 체험한다.
행하기: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교과 개요
I. 그분은 죽으시기 위해 오셨음
A. 시므온은 예수께서 어느 날 무서운 고통을 경험하시게 될 것을 모친 마리아에게 예언했음
B.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그 구원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피하실 수가 없으셨음

II. 구원의 계획이 예정됨
A. 주님께서는 창세전에 스스로 자원하여 세상 죄를 위해 죽으시기로 예정하셨음
B.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자들은 집단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게 될 것임

III. 그분이 죽으셨으므로
A.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단번에 희생을 바치심
B. 구주의 죽음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길을 열어 놓았음
C.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와 화목하게 되었음

요점: 예수께서는 자원하여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분께서는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일요일(6월 1일) 죽으시기 위해 탄생하심

1. 누가복음 2:25-35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리아에게 예수님에 관한 어떤 메시지가 주어졌습니까?
눅2:25-3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답: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 2:34-35).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고 함축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를 마침내 만났던 경건한 시므온은 그 아기의 미래에 관해 신비스럽고 간결한 말로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4-35). 여기서 ‘칼’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골리앗이 쓰던 것 같은 큰 칼을 뜻한다. 그런데 그것이 마리아의 마음을 찌를 것이라고 한 것은 그녀가 십자가에서 겪게 될 고통을 예언한 것이었다. “시므온의 신비스런 이 표현은 틀림없이 다가올 사건들에 대한 오싹하고 불길한 전조처럼 마리아의 생각을 스쳐갔을 것이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222).

2. 다음 구절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던 사건이었습니까?(마 16:21, 26:52-54, 막 10:45, 눅 18:31-33, 요 3:14, 히 9:25-28).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26:52-5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눅18:31-33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히9:25-28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답: 예수께서는 당신의 고난과 죽음이 예언의 성취이며,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불가피한 일임을 인식하셨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눅 18:31-33)

이 구절들의 일치하는 주제는, 예수께서 죽으시기 위해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었다. 왜 그분은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이성적 논리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그것이 비이성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초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영역에 속하며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다가 이제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난”바 된 비밀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골 1:26). 성경은 그것을 굳이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데, 이는 인간의 논리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주 역사 가운데 유일한 것으로서 이와 비교할 만한 어떤 사건도 없었다. 우리는 다만 그 의미를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뿐이다.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셔야만 했음
“그리스도는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셔야 하였다. 인간은 배신자이며, 반역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이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대속자는 악인으로 죽어야 하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의 거룩한 영혼 위에 인간이 쌓아놓은 죄를 지시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서셔야 했기 때문이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27).

<부가설명>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에게 발꿈치를 상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생명의 씨를 잃어버렸다. 이제 그에게는 생명의 씨가 없어졌고 사망의 씨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서 생육하는 자손들은 다 사망의 씨들이기 때문에 죽는 존재로 잠시 동안만 세상에 지나가면서 여자의 후손이 마련한 생명의 씨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된 것이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생명의 씨이다. 그가 아담의 사망의 대신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영생의 생명의 씨를 아담의 모든 후손이 회복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아담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그것을 대신 죽어주셔서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더 이상 사망으로 있을 필요가 없도록 하신 것이다. 그들의 사망을 예수께서 처리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아담의 죽음을 대신 처리하셔서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죽음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죽음은 처리되었고 그 안에서 아담의 후손들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믿는다.

교훈: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속죄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었다. 이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하자.


월요일(6월 2일) 누가 그분을 죽게 했는가?(마 27:45-46)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각각 1/3을, 누가복음은 1/4을, 그리고 요한복음은 1/2을 할애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확실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복음서는 전기(傳記)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에 가깝다.

1.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고 수난주간의 두려운 사건들을 떠올려 보십시오(마 27:27-31, 45-54, 막 15:21-32, 요 19:28-30).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감동이 마음을 적십니까?
마27:27-31, 45-54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45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막15:21-32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 (번역하면 해골의 곳) 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요19:28-30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답: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 구원을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셨으며, 속절없는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다 깨달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분의 재판과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자들이 어느 인종과 민족에 속하였나 하는 것은 신학적인 면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조상이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해서 오늘날 유태인이나 이탈리아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성경적 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태도이다. 그분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손가락질하기 전에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약 내가 거기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실제로 거기에 있었다.

2. 마태복음 26:38을 읽으십시오. 구주의 마음을 그토록 무겁게 짓눌렀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께서는 이 엄청난 시련 중에 어떻게 하셨습니까?(참조 눅 22:43) 엘렌 G. 화잇은 기록하기를, “이와 같은 결정을 하신 후 잠시 일어나시던 몸은 죽은 듯이 땅에 쓰러지셨다”(시대의 소망, 693)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분은 후에 로마 군병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지만 이미 그 이전에 우리의 집단적인 주먹질에 치명타를 맞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우리에게도 죄가 있다는 사실에서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마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눅22:43,44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답: 예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간의 죄로 인한 극심한 번민으로 거의 죽게 되셨다.

한 영혼의 진정한 가치
“한 영혼의 가치를 누가 능히 평가할 수 있으리요? 만일 그대가 그 가치를 알고자 하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그 핏방울과 같은 땀을 흘리시면서 큰 고민을 당하시는 것을 주목하여 보라.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바라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낙담의 부르짖음을 들어 보라. 상처 난 머리, 찔린 옆구리, 상한 발을 바라보자. 그리스도께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시고 행하신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하늘 자체가 위험을 무릅썼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한 죄인만을 위하여서라도 당신의 목숨을 버렸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가면 거기서 그대는 한 영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실물교훈, 196).

<부가설명>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죄를 감당한다면 영원히 그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헛것이 된다(사45:18). 예수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죄가 되심으로 예수 안에서 인간이 의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고후5:21). 여기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담 안에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담의 씨가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생명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죽은 사망의 씨로 오신 분이 아니고 그 안에 생명이 있는 그 생명의 씨로 오신 것이다. 그거을 여자의 후손(씨)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말은 남자의 후손(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계시의 표현이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을 대신 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도 사망의 씨로 태어났으면 아담의 사망을 대신 할 수 없다. 그 자신이 사망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사망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며, 그때 그분은 죄 자체가 되셨고, 그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죄가 그와 함께 죽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은 그 죄로 인하여 고민할 이유가 없어졌다. 아담 안에서 세상에 들어온 죄는 그의 후손인 우리들을 통하여 보편화되었고 예수님의 죽음에는 보편화된 우리들의 죄도 한 몫을 차지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신 것이 된다.

교훈: 예수님은 유대인들이나 로마 군병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으나, 사실은 우리 각자의 죄가 그분으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시게 한 것이다.


화요일(6월 3일) 십자가는 무엇을 성취했는가? - 1

1. 다음 구절들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고전 2:2, 15:3, 갈 6:14).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답: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의 죽음을 처리했으니 이제 우리도 세상에 대하여 그처럼 죽어야 한다.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은유와 표상과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희생, 제물, 대속물의 개념: 에베소서 5:2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서 9:26에는 그분께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리셨다고 하였다. 히브리서 10:14에는 그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이 구절들에 나타난 개념은 대속적인 죽음 즉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죽음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15:3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고, 로마서 5:8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으며, 베드로전서 2:24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셨다(벧전 2:24)고 하였다.

2. 속전의 개념: 속전(贖錢, ransom)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루트론(lutron)에서 파생된 것으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을 일컫는다. 고전 헬라어에서 이 용어는 노예나 전쟁 포로를 되찾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성경의 기자들은 이 개념을 차용하여 더 성스러운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마태복음 20:28(비교 막 10:45)에서 예수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루트론)로 주려”고 오셨다고 했다(여기서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뜻한다).
루트론과 같은 어군(語群)에 속한 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속적 속성을 가리키고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주셨는데, 여기서 ‘주다’라는 동사는 원어상으로 어느 특정한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시사한다.

완전한 대속물 그리스도
“비유적으로 백성들의 죄는 중보자로 집전중인 제사장에게로 옮겨졌다. 제사장 자신이 속죄제물이 될 수도 없고, 그의 생명을 드려서 속죄를 할 수도 없는 것은 그도 또한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직접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대신 그는 흠없는 한 마리의 양을 죽였다. 죄의 형벌은 그 죄없는 짐승에게로 옮겨지고 그 짐승은 그를 직접 대신하는 대속물이 되어 완전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이러한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하여 사람은 믿음으로 세상 죄를 속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 보았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1권, 1111).

<부가설명> 대속의 개념은 잘 이해해야 하는 사상이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예수께서 도덕적 모범을 보이시므로 우리가 그 모본을 좇아 살면 구원에 이른다는 아주 잘못된 사상에 빠질 우려가 있다.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들의 도덕적 모본이 아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 즉 중생한 사람들의 모본이시다. 구원받아 예수의 생명 곧 영생의 씨를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아담의 후손들의 그 구원받지 못한 상태 곧 사망이 된 상태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것이다. 우리의 사망을 처리하기 위하여 그 사망을 우리 자신에게 맡기지 않고 예수께서 친히 우리 대신 사망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예수 안에서 생명이 되었다. 이일을 이루신 예수님의 희생을 대속, 속량 등의 말로 표현해 준 것이다.

교훈: 우리는 죄의 노예였으며 영원한 죽음이라는 정죄를 받았고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형편에 있었으나 예수께서 우리의 대속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수요일(6월 4일) 십자가는 무엇을 성취했는가? - 2

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취한 바를 표현하기 위해 신약의 기자들이 사용한 여러 은유들 가운데 두 가지를 검토해 보았다. 여기서 두 가지를 더 살펴보자.
3. 속죄(Propitiation)의 개념: 속죄(힐라스테리온)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사명과 관련된 단어인데, 히브리서 2:17에는 그리스도께서 “백성의 죄를 구속(힐라스테리온)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힐라스테리온이라는 단어에는 신의 노여움을 달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 말은 신이 진노하였을 때 사람들이 그 신을 다시 기쁘게(힐라로스) 하기 위해 진정시키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의 기자들은 이 단어를 고전 헬라어나 다른 데서 차용하였으나 전혀 새로운 의미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단어를 속량(expiation)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이해하는 대로 이 개념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덮어 가리시며, 도말하셨다는 의미이다. 신약의 기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달랜다는 개념은 완전히 낯선 개념이었다. 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당한 전 인류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출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를 원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힐라스테리온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덮어 주신다.

4. 화목(Reconciliation)의 개념: 다음 구절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한 가지 개념이 있다(롬 5:10-11, 고후 5:18-21, 엡 2:16, 골 1:20-22).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원(疏遠)한 상태, 즉 죽음으로 끝나는 상태에 놓이게 한다. 화목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조화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화목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롬 5:8-1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고후 5:19). 죄 때문에 온 세상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았으나 십자가를 통하여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영생의 보증을 받게 된다.

우리의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
“당신의 아들을 ‘속죄의 희생 제물’[롬 3:25, NIV,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온(hilasterion)], ‘화목 제물’(KJV, NKJV), ‘속량 제물’(an expiation, RSV)로 드리신 분은 성부이시다. 신약에서 사용된 힐라스테리온의 용례는 ‘분노한 신을 달래’거나 ‘복수적이고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신을 진정시키’는 이교적인 개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로운 뜻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에 대한 당신의 거룩한 진노에 대한 화목 제물로 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당신의 심판을 받도록 그리스도를 인간의 대표자와 하나님의 대속물로 받으셨기 때문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007년, 153).

<부가설명> 히2:17은 정확하게 말하면 “힐라스코마이”이다. 힐라스테히온이라는 말이 이 말에서 파생되었다. 속죄하다는 뜻은 같다. 힐라스테리온은 속죄소라고도 번역되었다(히9:5). 성소 언약궤 위에 시은좌의 이름이다. 히브리어 카포렛은 덮는다는 뜻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은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의 사망을 담당한 표이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고 신약성경은 예수의 피가 우리를 속죄한다고 가르치고 있다(엡1:7, 요일1:7). 피 흘림이 없으면 사유함이 없다(히9:22). 피는 생명이 지불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예수의 피는 인류의 사망을 대신 당하셨다는 증명서이다. 예수의 피는 그 피를 믿는 사람들이 사망의 죄를 이미 당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사망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예수의 피는 말하는 피이다(히12:24).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말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산 자의 하나님과 친교를 할 수 있다. 그것이 화목의 증거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의 노여움을 달래는 것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죽은 자는 산 자와 친교할 수 없다. 예수께서 그 죽음을 처리하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산 자가 되게 했기 때문에 화목하고 친교하는 것이다. 또한 “기업 무를 자”도 예수님의 속량을 표상하는 제도이다.

교훈: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납되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자.


목요일(6월 5일) 우주의 안전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상징이 되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신약 신학에서 인간의 상태에 관한 몇 가지 사실뿐 아니라, 인간의 차원을 넘어 십자가가 이루게 될 그 궁극적인 성취를 보게 된다.

1. 다음 구절들은 인간의 상태와 예수님의 죽음의 필요성에 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롬 3:10, 23, 고전 2:2, 15:3, 갈 6:14).
롬3:10, 23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답: 성경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필요하였음을 말해 준다.

헬라와 고대 다른 세계에서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했다. 바른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타고난 선량함은 꽃피어 번성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보편적 타락과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말했다. 이 능력은 마침내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할 것이었다(빌 2:10-11).
그러나 십자가가 인간의 구원의 중심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을 넘어선 또 하나의 중요성을 지닌다. “천사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깊은 뜻을 알게 될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없이는 하나님의 낙원에서 집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 천사들도 그리스도께 존귀와 영광을 돌린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을 보지 않았더라면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효능으로 하늘의 천사들이 배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그들도 사단의 타락 전의 천사들보다 더 안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천사의 완전은 하늘에서 무너졌고 인간의 완전은 축복의 낙원 에덴에서 무너졌다.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간에 안전을 원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확연히 드러내는 구원의 경륜은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입을 사람들에게는 물론 타락하지 않은 세계들에게도 또 다른 반역을 방지하는 하나의 영원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줄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2).

반역에 대한 영원한 안전장치
“사단의 반역은 앞으로 오는 영원한 세월을 통하여 우주에 한 교훈, 즉 죄의 본질과 그 무서운 결과에 대한 하나의 영속적인 증언이 될 것이었다. 사단의 통치가 낳은 결과와 그것이 사람들과 천사들 모두에게 끼친 결과는 하나님의 권위를 버린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 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의 행복이 그분의 정부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거할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이 무서운 반역의 경험의 역사는 모든 거룩한 존재자들에게 영원한 안전장치가 되어 저들이 범죄의 본질에 관하여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며, 범죄하거나 그 죄의 형벌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42).

<부가설명> 고대나 현대나 사람들은 죄를 도덕성에 기초를 두고 이해한다. 그래서 인간이 도덕적으로 최대의 선을 성취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의 지배를 받는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사상이다. 사단은 구원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임을 극구 감추고 있다. 인생이 그 사실을 깨달으면 구주가 필요한 것을 깨닫는 첫발을 내디딘다. 그러나 도덕적 선을 추구하게 하면 자기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도덕적 타락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이 교과의 저자도 죄를 인간의 보편적 타락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보편적 타락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썩은 현상이 보편적인 것이다(엡4:22). 죽은 자는 썩을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다 죽었기 때문에(고전15:22)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 죄인이며 타락한 자인 것이다. 죽은 사람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 그래서 생명이신 분이 와서 그들을 죽은 가운데서 살려내야 한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오셨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죽은 아담과 그의 후손의 죽음을 대신 지시고 그 죽음을 처리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딤후1:10). 이것이 복음이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들은 산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봉사는 지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로 온 우주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골1:20). 그전에는 루스벨의 속임수에 대하여 완전히 가시지 않은 의혹이 우주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 모든 의혹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에 완전히 증거된 것이다. 루스벨의 기만이 완전히 폭로된 것이다. 그래서 온 우주가 예수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엡1:10). 사상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완전한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교훈: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우주의 반역을 방지하는 하나의 영원한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금요일(6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78장 ‘갈바리’(744-757), 제79장 ‘다 이루었다’(758-764).

“그러므로 천사들이 구주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뻐한 것은 당연하였다. 왜냐하면 저희가 그 때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죄와 사단의 멸망이 영원히 확실해졌다는 것과, 인류의 구속이 보장되었다는 것과 이 우주가 영원히 안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바리에서 이루신 희생의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셨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내다보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셨다”(시대의 소망, 764).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죄의 창시자의 파멸을 확실하게 하였다. 사단이 멸망하면 죄를 지으라고 유혹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며, 속죄는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우주 안에는 또 다른 반역이 일어날 위험이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지 하나님의 사랑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속죄의 효력은 완전히 무시해 버립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왜 잘못된 것입니까?
* 죄를 도덕성에 근거하여 이해할 때 생기는 오해이다. 예수님의 죽은 인간이 태초에 사망이 된 것을 해결하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사상이며 사단이 그렇게 주도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속죄를 이룬 것이다. 즉 사망을 처리한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지 않았으면 사망이 처리되지 않는다.

2. 십자가로 인해 우주가 안전하게 된다는 개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대쟁투를 이해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더 잘 인식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 목요일 부가설명을 읽어보라.

3.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하면, 신비로 남아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 예수님이 아담의 씨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생명의 씨가 되어 여자에게서 탄생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만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았으면 인류는 여전히 사망에 매여 있는 것이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새 생명을 얻은 사람답게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를 원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