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기 제 1 과 부흥: 우리의 가장 절실한 필요(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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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3-06-25 10:49 조회4,691회 댓글2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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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1 과 부흥: 우리의 가장 절실한 필요
기억절:“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첫째 날(일) 라오디게아인들에게 주는 소망
*도입질문: 라오디게아 교회에 소개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계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적용은,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편지로 보낸 당시의 일곱 교회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계시를 받았던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실제적인 상황에 맞는 권면 형식의 편지입니다.
둘째 적용은 역사주의 해석원칙에 따라 일곱 교회를 요한이 계시를 받았던 당시부터(에베소 교회) 예수님의 재림까지(라오디게아 교회)의 일곱 시대를 일곱 교회로 상징하여 적용하는 것입니다.
셋째 적용은 일곱 교회 교인들의 상황을 오늘날의 교회 교인 혹은 하나님의 백성 개개인의 상황과 형편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의 영적 상태에 맞는 칭호를 가지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아멘”, “충성된 증인”,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는 표현 중에 “근본”이란 원어의 단어가 사람을 지칭할 때는 어떤 사건이나 행위를 시작한 사람이란 의미에서 “시작”을 뜻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창조의 첫째 원인 또는 창조를 시작하신 분이라는 의미로서 창조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창조주로서 소개하신 이유는 “심판 받은 백성”이란 의미의 라오디게아 교회와 교인들이 일반 신처럼 조건적, 상대적 개념의 하나님에게 심판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으로부터 창조주 하나님이 가지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의 하나님에게 심판 받고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 대신 희망과 소망을 갖게 하고자 하신 의도입니다.(요일4:18)
둘째 날(월) 사랑의 책망
*도입질문: 사랑과 책망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사랑과 책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원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13:5),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고전13:7)딥니다.
그동안의 삶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고 그 삶이 하나님의 생명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사랑으로 호소하십니다.(겔33:11, 롬2:4)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고 사랑으로 호소하시지만 그 사람이 끝끝내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여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음으로 생명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 상황이 되어버리면, 하나님께서 가지신 “무례히 행치 아니하”시는 사랑의 모습대로 그 사람의 선택을 인정하게 되지만, 그때에도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 사람의 선택의 결과로 인한 것을 마치 하나님 자신의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하셔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사람들이 하는 책망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선택을 바꾸길 원하셔서 호소하시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음으로 그 선택을 인정하는 것을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표현법으로 책망이라고 하십니다.(딤전1:20-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바울이 사단에게 내어준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사단의 길을 선택한 것을 인정할 때 사울의 책임지는 표현법으로 기록한 것이고, 사단의 길을 선택한 결과로 인한 고통이 바로 징계입니다. 최후로 그들의 선택을 인정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선택의 결과로 인한 고통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돌아올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미지근한 신앙을 하고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형식화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의 핵심인 예수님을 절대적 사랑의 확신 속에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행위에 근거한 신앙을 하고 있었습니다.(마15:8)
예수님을 절대적 사랑의 확신 속에서 알지 못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품성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날(화) 자각과 실재
*도입질문: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품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교리나 성경만 알고 있을 뿐, 교리와 성경의 핵심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요5:39)
성경과 교리를 통해 지식이 많았지만, 잘 못된 하나님의 품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다른 하나님(고후11“4)을 믿고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님은 생명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다른 하나님과 연결시키고 다른 하나님은 생명이 없으므로 행위로는 생명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망 속에 있는 것입니다.(사1:11-15)
넷째 날(수) 신령한 치료제
*도입질문: 영적 무관심과 냉소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 방법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불로 연단한 금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고, 흰 옷은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이루신 의이며, 안약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보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구하게 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하십니다.(요16:13-14)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의 감동으로 인한 신뢰가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신뢰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사랑을 확신하고 믿게 합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모든 시작과 과정과 결과는 하나님의 행위로 인해 이루어집니다.(빌1:6)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택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품성을 보여주시고, 그 품성을 오해하지 않고 잘 보게 하기 위해 성령 하나님을 구하도록 말씀하셨고(눅11:13),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하셔서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변화와 믿음과 역사를 이루어 냅니다.(고후5:17, 빌4:13, 고후5:14)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며 예수님의 품성에 대한 확신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열게 되면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하나님의 일(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요14:10)
다섯째 날(목) 끝없는 사랑
*도입질문: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하나님께서 끝없는 사랑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품성이 절대적 사랑이기 때문이며, 절대적 사랑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사49:14-15)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보게 될 때 그 사랑의 에너지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감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하게 될 때 사랑이 그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부흥과 개혁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선택하게 되며,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력 충만한 부흥과 새로운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개혁을 이루키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이 필요합니다.(마7:7)
기억절:“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첫째 날(일) 라오디게아인들에게 주는 소망
*도입질문: 라오디게아 교회에 소개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계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적용은,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편지로 보낸 당시의 일곱 교회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계시를 받았던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실제적인 상황에 맞는 권면 형식의 편지입니다.
둘째 적용은 역사주의 해석원칙에 따라 일곱 교회를 요한이 계시를 받았던 당시부터(에베소 교회) 예수님의 재림까지(라오디게아 교회)의 일곱 시대를 일곱 교회로 상징하여 적용하는 것입니다.
셋째 적용은 일곱 교회 교인들의 상황을 오늘날의 교회 교인 혹은 하나님의 백성 개개인의 상황과 형편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의 영적 상태에 맞는 칭호를 가지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아멘”, “충성된 증인”,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는 표현 중에 “근본”이란 원어의 단어가 사람을 지칭할 때는 어떤 사건이나 행위를 시작한 사람이란 의미에서 “시작”을 뜻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창조의 첫째 원인 또는 창조를 시작하신 분이라는 의미로서 창조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창조주로서 소개하신 이유는 “심판 받은 백성”이란 의미의 라오디게아 교회와 교인들이 일반 신처럼 조건적, 상대적 개념의 하나님에게 심판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으로부터 창조주 하나님이 가지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의 하나님에게 심판 받고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 대신 희망과 소망을 갖게 하고자 하신 의도입니다.(요일4:18)
둘째 날(월) 사랑의 책망
*도입질문: 사랑과 책망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사랑과 책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원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13:5),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고전13:7)딥니다.
그동안의 삶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고 그 삶이 하나님의 생명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사랑으로 호소하십니다.(겔33:11, 롬2:4)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고 사랑으로 호소하시지만 그 사람이 끝끝내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여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음으로 생명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 상황이 되어버리면, 하나님께서 가지신 “무례히 행치 아니하”시는 사랑의 모습대로 그 사람의 선택을 인정하게 되지만, 그때에도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 사람의 선택의 결과로 인한 것을 마치 하나님 자신의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하셔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사람들이 하는 책망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선택을 바꾸길 원하셔서 호소하시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음으로 그 선택을 인정하는 것을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표현법으로 책망이라고 하십니다.(딤전1:20-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바울이 사단에게 내어준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사단의 길을 선택한 것을 인정할 때 사울의 책임지는 표현법으로 기록한 것이고, 사단의 길을 선택한 결과로 인한 고통이 바로 징계입니다. 최후로 그들의 선택을 인정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선택의 결과로 인한 고통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돌아올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미지근한 신앙을 하고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형식화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의 핵심인 예수님을 절대적 사랑의 확신 속에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행위에 근거한 신앙을 하고 있었습니다.(마15:8)
예수님을 절대적 사랑의 확신 속에서 알지 못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품성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날(화) 자각과 실재
*도입질문: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품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교리나 성경만 알고 있을 뿐, 교리와 성경의 핵심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요5:39)
성경과 교리를 통해 지식이 많았지만, 잘 못된 하나님의 품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다른 하나님(고후11“4)을 믿고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님은 생명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다른 하나님과 연결시키고 다른 하나님은 생명이 없으므로 행위로는 생명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망 속에 있는 것입니다.(사1:11-15)
넷째 날(수) 신령한 치료제
*도입질문: 영적 무관심과 냉소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 방법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불로 연단한 금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고, 흰 옷은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이루신 의이며, 안약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보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구하게 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하십니다.(요16:13-14)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의 감동으로 인한 신뢰가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신뢰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사랑을 확신하고 믿게 합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모든 시작과 과정과 결과는 하나님의 행위로 인해 이루어집니다.(빌1:6)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택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품성을 보여주시고, 그 품성을 오해하지 않고 잘 보게 하기 위해 성령 하나님을 구하도록 말씀하셨고(눅11:13),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하셔서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변화와 믿음과 역사를 이루어 냅니다.(고후5:17, 빌4:13, 고후5:14)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며 예수님의 품성에 대한 확신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열게 되면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하나님의 일(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요14:10)
다섯째 날(목) 끝없는 사랑
*도입질문: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하나님께서 끝없는 사랑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품성이 절대적 사랑이기 때문이며, 절대적 사랑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사49:14-15)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보게 될 때 그 사랑의 에너지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감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하게 될 때 사랑이 그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부흥과 개혁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선택하게 되며,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력 충만한 부흥과 새로운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개혁을 이루키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이 필요합니다.(마7:7)
댓글목록
서순석님의 댓글
서순석 작성일
항상 감사히 보고 갑니다
부족함을 많이 채우고 간답니다.
마음을 울리는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요.....
좋은 날 맞으십시요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작성일
서순석님의 답글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생명력 충만한 안식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