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과 그분이 왕과 친구로서 재림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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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6-19 00:51 조회6,178회 댓글0건본문
제 13과 그분이 왕과 친구로서 재림하심
6월 28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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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시계를 보면 언제나 현재의 시각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항상 현재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고 또한 마지막이 있다. 우리의 삶은 ‘모래시계’인 것이다. 인생에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묵상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진 삶의 순간들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된다. 예수님은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분은 삶의 마지막 때를 알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매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한 삶을 선물로 받았다. 우리는 모래시계에 모래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릴 세상의 것들을 채우겠는가, 영원의 삶의 준비할 것인가? 성경에서의 종말론적 관심은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이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영멸,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들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마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한다(벧후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 문명, 반 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든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 내세적, 반 종말적 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가장 확실한 우리의 미래이다. 역사란 마치 마지막 날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과도 같다. 마지막 날, 하늘 문이 열리고 영광스러운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왔다. 때로 우리는 종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성경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한 결말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로만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주님께서 당신을 기다리는 백성들의 친구요 왕으로서 재림할 것이라는 확신은 오늘의 능력이 될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종말적인 신앙으로 힘 있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억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연구범위: 단 9:24-27, 마 24장, 눅 21:25-31, 요 14:1-3, 살전 4:13-18, 히 9:28.
안식일 오후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라는 책과 영화는 재림에 관한 진리를 왜곡시키긴 했지만,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줄거리는 하나님을 독재적이고 변덕스러운 분으로 묘사함으로, 성경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묘사한 것과는 반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재림에 관한 일종의 공포심을 조장했다.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대체로 영광스럽고 지극히 기쁜 사건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시고 또한 우리의 친구이시다.
재림의 사건에는 비록 두려움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그 두려움의 요소 때문에 사람들의 눈이 하늘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의 요소는 물론 중요하며, 우리가 그것을 전혀 배제한 채 재림의 진리를 선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려움에 관해 언급할 때에는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것만을 조심스럽게 말할 것이며, 불안을 자아내는 악몽 같은 것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재림에 관한 다양한 측면을 전할 때에 우리는 성경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마치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는 것과 같은 그런 기대감을 심어 주어야 한다.
재림의 기별은 반드시 좋은 소식이어야 하며, 사람들이 불안을 달래기 위해 안정제를 먹어야 하는 그런 식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
일요일(6월 22일)
바깥뜰에서 기다림(히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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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오신다는 약속은 수세기에 걸쳐 신자의 커다란 소망이 되어 왔다. 에밀 브루너는 “폐에 산소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찰스 웨슬리는 7,000개의 찬송가를 썼는데 그 중 5,000개의 찬송가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내용으로 담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주관했던 켄터베리 대주교는 왕관을 그녀의 머리 위에 얹으며 이같이 말했다. “오, 여왕 전하, 제가 이 왕관을 드리오니 마땅히 쓸 권리를 가지신 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전하께서 쓰시옵소서.” 그러나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세상에 대하여, 한 유명한 칼럼니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모두에게 세상은 무질서하고 위험하며, 통제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누가 질서를 회복시킬 것인가? 누가 핵 위험을 막아줄 수 있겠는가? 누가 에이즈와 우리 시대의 다른 전염병을 박멸시킬 수 있는가? 누가 홀로 세상을 통치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약속하셨고 어느 날엔가 완전히 그의 통치 아래 둘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해방되고 그들의 억울함이 신원될 것이다. 그때에 비 그리스도인들은 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속죄일에 미리 예시(豫示)되어 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일 년에 한 번 행하는 의식을 수행하는 동안 백성은 바깥뜰에서 숨을 죽인 채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나온다는 사실은 민족과 개인의 죄를 도말하는 그의 일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1844년 이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속죄일에 예시된 사역의 국면으로 들어가셨다. 그 사업이 완료되는 때에는 그분께서 당신의 백성을 받으시기 위해 하늘 성소에서 나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9:28에는,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고 말씀하고 있다.
1. 다음은 기대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눅 12:40-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딛 2:11-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전 1: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윌리엄 밀러와 그를 따르던 이들은 1844년에 하늘 대제사장께서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고대하였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들은 실망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을 움직이게 했던 열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친밀한 임재를 느꼈으며, 그분 뵙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그들에게 그분은 친구이셨다. 후에 하이람 에드슨(Hiram Edson)이 기록한 소감을 보면 그 무리가 느꼈던 감정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을 보고자 열망하였다.”고 에드슨은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자, “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한 서러운 생각이 우리를 엄습했다.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하이람 에드슨, 단편 원고, 앤드류스 대학교, 제임스 화잇 도서관, 재림교회 연구센터 유산관리소). 이들 신자들은 예수께서 오시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교훈: 우리는 이스라엘의 속죄일과 같은 엄숙한 시기에 살고 있다. 우리는 죄를 자복하고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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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종말을 이렇게 비유한 적이 있다. 초만원 극장 밖에서 불이 났다. ‘불이야!’ 소리를 지르면 많은 사람이 넘어져 발에 밟혀 죽게 될 아비규환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한 배우가 공연을 멈추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차분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다. “여러분, 지금 밖에서 불이 났습니다. 여러분이 한꺼번에 뛰어나가면 모두 죽습니다. 출입구는 뒤와 좌우에 하나씩 있습니다. 출입구 가까이에 있는 분부터 차례로 나가시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관중은 그의 말이 연극의 일부인 줄 알고 박수를 치며 웃고 떠드는 것이었다. 실제 상황이라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연기가 스며들어 오고 불길이 순식간에 극장 안을 뒤덮었다. 이미 때는 늦고 만 것이지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롯의 사위들은 심판의 메시지를 농담으로 여기다가 망했다. 종말의 징조가 왔다는 말을 농담으로 흘려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종말론이 실종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칼 바르트는 "철저히 비종말론적인 것은 철저히 비기독교적이다"라고 했다. 기독교에 있어서 종말론은 핵심적 사상이다. 종말론이 상실되면 안일과 나태와 게으름으로 현세 지향적이 된다. 너무 강화되어도, 현실 도피적이 되어 바림직하지 못하다. 이단들의 대부분이 강한 종말사상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핵심을 가져가버리고, 건전한 교회들은 종말론이 실종되고 있다. 윌리엄 밀러의 재림운동의 날짜의 빗나감은 재림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낳게 하였다. 또한 1992년 10월 31일을 "휴거의 날"로 정하고 세상과 교회를 미혹한 다미 선교회 이단들이 있었다.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 사건 이후로 교회가 종말론을 강조하지 않는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종말론을 강조하면 이단으로 지목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까? 그러나 교회는 종말공동체 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성도를 무장해제 시키려는 사단의 전략을 간파해야한다. 임박한 종말론은 바울이나 예수님에게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초대교인들의 인사는 "마라나타"였다. "오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 다시 오신다” 라는 뜻이다. 초대교회에서 임박한 종말 사상 때문에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일도 팽개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경고 하면서 현실에 충실할 것을 권면하였다. 종말론에 관해 이미 실현되었다는 주장과 철저히 미래 사건으로 치부하는 자들이 있으나 이미,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자세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야고보도 본문에서 종말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재림교회는 바로 재림에 대한 소식을 전해야 할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월요일(6월 23일)
두려움의 요소를 언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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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있었던 일인데 갑자기 우리나라에 전쟁의 소문이 돌면서 온 집에서 식량 준비를 하는 대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날 예정이라면 너도 나도 라면을 박스로 사들이고 중요한 생필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서 가게에 있는 라면박스는 모두 동이 났었다. 인간이 절박한 상황에 부딪히면 자기 몸만 생각한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보다. 그저 굶어 죽기는 싫어서....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어떠한가?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예고에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써가며 식량준비를 하면서 정작 주님 오신다는 확실한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영의 식량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의 영혼은 아마도 굶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재림에는 두려운 측면도 있다. 예수께서도 친히 환난의 때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리라(마 24:30). 그분께서는 그 사건을 노아 홍수와 소돔의 심판과 비교하셨다(마 24:37-39, 참조 눅 17:26-30). 그분께서는 마지막 분별하는 과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맷돌질을 하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 두 여인에 관한 예증을 드셨다(마 24:40-41). 그리고 그분께서는 경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강한 어조로 경고하셨다(참조 43-51절). 예수님이 당신의 재림에 관한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을 하실 때 함께 있었던 베드로는, ‘주의 날’이 뜨거운 불과 공포의 날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벧후 3:10-12). 요한은 이상 중에 이 사건을 보고 말하기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계 1:7)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6:15-16에서는 생명으로부터 떠나간 사람들이 재림의 때에 산과 바위에게 호소하기를 자기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 6:16)고 부르짖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1. 다음 구절들은 재림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 25:31-33, 4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살후 1:6-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12:25-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학대한 자들, 살인하고 착취한 자들, 남의 것을 빼앗고 약탈한 자들, 국가의 자산을 훔친 자들, 많은 사람을 빈곤과 불행 중에 고통당하도록 내버려둔 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선량하긴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거만하게 등을 돌리고 그분의 은혜로운 자비와 용서를 거절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재림의 날이 그다지 두려운 날이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면 그것은 지극히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다. 사람들의 영원한 미래가 이 문제에 달려 있는데, 그 상황의 실체를 덮어 버리고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우리에게 죄가 될 것이다.
교훈: 재림의 날은 기쁨의 날이지만 한편 두려움의 날이기도 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 두려운 날에 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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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서 폴크스바겐(Volkswagen) 차량이 도난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경찰은 수사력을 동원해 차량과 그 절도범을 찾기에 주력했다. 경찰은 지역 라디오 방송까지 이용해 차량 절도범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차량 주인이 도난당한 차량 앞좌석에 독극물을 바른 과자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절도범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차주는 쥐를 잡으려고 독을 바른 과자를 차 안에 둔 것이다. 이 사실을 안 경찰과 차주는 차량을 되찾는 것보다 절도범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급선무가 되었다. 하지만 절도범은 그런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을 도우려는 사람들을 피해 더 멀리 도망갔다. 이 이야기는 중요한 진리 한 가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속셈으로 그분에게서 달아난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인생의 실패가 자명해 보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소망을 주신다. 그러나 왜 아직도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인생을 허무하게 마치는 것일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첫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멸망에 있지 않고 우리의 구원에 있다.
화요일(6월 24일)
다른 한편으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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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양병십년 용병일일(養兵十年 用兵一日)’이란 말이 있다. 병사를 키우는 데는 10년이 걸리지만 병사를 사용하는 데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루를 쓰기 위하여 10년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하루를 쓰기 위한 10년의 준비는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루를 쓰기 위하여 평생을 훈련하고 있다. 영국의 윔블던 테니스장은 일 년에 두 주간을 사용하기 위하여 일 년 내내 준비하고 가꾼다. 책임을 맡은 매니저는 한 해 동안 꾸준히 잔디를 관리하며 두 주간의 대회를 기다리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그가 하는 일은 준비하는 일이다. 준비,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절대로 준비 자체를 소홀하게 생각하지 말라.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은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고 이 세상의 마지막이 될 것이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이고 희망의 날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 날을 준비하며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이 날은 가장 희망적인 날이 될 것이다.
어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의 재림에는 두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밝은 광경을 떠올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오실 그분은 왕이실 뿐 아니라 또한 친구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징조가 나타날지라도 즐거운 기대감을 가지라고 예수님이 친히 격려하셨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눅 21:28).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릴 필요가 없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영광스런 재림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열렬한 희망과 흥분 속에 기다리기를 원하신다.
1. 다음 구절들에는 기대감과 즐거움의 개념이 어떻게 강조되어 있습니까?
요 14: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 1: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빌 3:20-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살전 4:13-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 7:9-10, 13-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께서는 거만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당신의 위엄과 왕권을 강조하시고 재림의 심판적인 측면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위안과 확신과 기쁨에 초점을 맞추심으로써 강조점을 전환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분께서는 재림의 때에 모든 족속이 통곡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직후에, 마태복음 24:31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초점을 맞추시면서 어조를 바꾸셨다. 그분께서는 천사들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14:1-3에서 예수께서는 ‘근심’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잔잔케 하고, 초조해진 그들의 신경을 안정시키며, 소망에 닻을 내리게 하기 위해 당신의 다시 오심을 약속하셨다.
교훈: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의 날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구원의 날이다. 우리는 머리를 들고 즐거운 기대감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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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히틀러의 그릇된 생각이 600만 유태인을 가스실로 몰고 갔다. 모두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한 유태인 의사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고민을 깊이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리조각 하나를 줍게 되었다. 매일 그는 그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면서 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나치는 매 시간마다 가스실로 보낼 유태인들을 뽑았다. 그러나 매번 새파랗고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활기찬 젊은 의사를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그의 가스실행이 하루 이틀 이렇게 미뤄지다가 드디어 독일이 패망했고 젊은 의사는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도움을 늦추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실 때까지 참지 못할 뿐이다." 이 젊은 의사의 말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고 참고 견디는 사람,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반드시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이다.
수요일(6월 25일)
우리는 언제 예수님을 뵐 것인가?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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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의 묘지는 저 멀리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가운데 혹은 교회당 뜰에 있다. 거기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는 묘비에는 앞서 간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나 아쉬움의 인사가 새겨져 있다. 한 사람이 묘지를 돌며 묘비들을 읽고 다니다 어떤 묘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그 묘비의 글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글은 단 세 줄이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번 째 줄이 이어졌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죽음에 대한 준비만큼 엄숙한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준비는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 해야 한다. 그 준비는 바로 '오늘'을 결코 장난처럼 살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바로 내가 죽는 그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오늘이 바로 예수님을 뵐 바로 그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 얼마 전에 중국 쓰촨 성에서 강진이 발생해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적과 같이 홀연히 ‘종말’이 닥친 것이다. 이 때 우리는 <내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 역시 도적같이 홀연히 닥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중요한 장으로서, 그분의 제자들이 제기했고, 오늘날 우리도 여전히 궁금해 하는, 언제 재림이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강조하셨다.
1.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 기근, 지진, 전쟁이 일어나도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6-8절).
2. 우리는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미움을 받을 수 있다(9-13절).
3.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4-5절, 23-26절). 예수께서는 이 점을 많이 강조하셨다.
4. 끝이 오기 전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14절).
5. 사건은 가시적이며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27절).
6. 재림이 가까워질 때에 우주적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29절).
7. 끝이 가까워올 때에 천사들이 온 세상에서 신실한 자들을 모을 것이다(31절).
8. 재림의 날과 시(時)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36절).
9. 모든 경고와 예언에도 불구하고 재림은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될 것이다(42-44절).
위의 목록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에 강조점을 둘 필요가 있다. 모든 민족에 ‘증거’가 되기 위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며, “그제야 끝이 오리라”(14절)고 하였다. 이 사실은 간접적으로나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역할을 암시하며, 인간의 역사가 마쳐지기 위한 하나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을 말해 준다. 이 구절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시키기 위해 더 많은 열정을 쏟아야 함을 말해 준다.
런던의 어느 교도소에 소속된 한 목사가 유죄 선고를 받은 죄수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죄수가 이렇게 대꾸했다. “목사님, 지금 말씀하신 것을 정말로 믿으시나요? 내가 만일 그 복음이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깨진 유리조각 위를 기어서라도 온 영국을 누비며 사람들에게 그걸 전파하겠소!”(라이튼 포드, 그리스도인 설득자, 하퍼 앤드 로우 출판사, 1966년, 29). 이런 열정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교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재림의 날짜를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다. 또한 우리는 재림을 촉진하기 위해 복음전파에 힘써야 한다.
부가적용)
마지막 때의 중요한 주제는 주님이 언제, 어디에, 어떻게 오시는가 하는 것, 즉 ‘때와 기한을 예측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때의 중요한 주제는 성령충만이다. 행1:7절에,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라고 했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가, 어느 때 오시는가, 몇 시에 오시는가, 이것은 너희의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1: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시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 노릇을 계속하는 것>이다. 주님의 관심과 자기 관심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고, 주님의 관심과 자기 관심이 어긋나는 사람도 있다. 성숙한 사람은, 주님의 재림 전에, 땅 끝까지 복음 전파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며,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을 투신한다. 미성숙한 사람은, 그저 자기가 성공하고 잘 되려고 하는 데, 자신을 투신한다. 노아가 홍수 심판을 앞두고 방주를 지었다면, 우리는 최후 심판을 앞두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에 노아처럼 '방주를 예비하는 일' 이다. 중요한 모임에 가기 위해서 마음속에 입을 옷을 생각한다. 그래서 준비를 다하고 마지막에 옷을 입는다. 옷장에서 꺼내보니 형편없이 구겨져 있다. 구겨진 옷을 펴는 필수적인 기구가 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는 반드시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집가는 색시는 꼭 다리미를 가져간다. 이 다리미가 일을 하려면 반드시 열이 있어야 한다. 자기 혼자서는 절대로 힘을 쓸 수 없는게 바로 다리미다. 요즘에는 편리한 전기다리미를 많이 쓴다. 그러려면 한 쪽 끝이 소켓에 꽂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뜨거워지게 된다. 아무리 좋은 다리미라도 전원에 꽂히지 않으면 절대로 힘을 쓸 수 없다. 그래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끝을 꽂아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슴도 뜨거워지려면 그리스도에게 꽂혀야 한다. 포도나무가 줄기에 붙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삶이 시작된다. 그것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보라. 정말로 그리스도가 내 속에 지금 계신가?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를 대하고 남을 대하는가?
목요일(6월 26일)
우리는 언제 예수님을 뵐 것인가? - 2
도입)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올수록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데 큰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우주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벧후3:10~11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잘 들어보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3:12 그렇다. 마지막 때의 참된 주제는 주님이 언제 어느 때 오시는가가 아니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기도원으로, 어느 신령한 집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해 있는 나의 삶의 터전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매일매일 하나님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거룩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다. 성도는 <결국 무너져 버릴 것, 결국 불에 탈 것>을 위해 목숨 걸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현실을 떠나서 등지고 살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살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세우실 성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히11:10) 대학입시가 다가올 때면 두 종류의 학생을 발견하게 된다. 한 학생은 고통스럽지만 날짜가 다가올수록 깨어서 시험에 대비한다. 도시락 2~3개 싸들고 밤 12시, 한 시까지 열심히 공부한다. 놀고 싶은데 놀지 못한다. 연애하고 싶은데 연애도 못한다. 그 집은 초비상이 걸린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공부를 잘 해서 원하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전력을 다해 준비하는 것이다. 반면에 또 이런 학생들이 있다. 시험 때가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스포츠나 놀이에 열심이다. 전자 게 임에 빠져 오락실을 들락날락한다. 고 3인데도 연애에 열심이다. 계획 없이 잠을 자고 적당히 시간을 때우며 졸업하기만 기다린다. 어떤 때는 공부하느라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지속성이 없다. 이 두 학생의 차이는 언제 판명이 날까?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 우리는 공부 안 하는 자식을 보면, 애가 타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대학입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천국입시>를 앞두고 주님은 우리를 보시며 한숨을 푹푹 내 쉬실 수도 있다.
일요일 교과에서 우리는 밀러운동에 가담한 자들이 1844년 10월 22일에 얼마나 열렬히 재림을 기다렸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들과 우리가 발견한 대로 예수께서는 그 다음 날이나 그 다음 주, 혹은 그 다음 달이나 그 다음 해, 혹은 10년 후나 100년 후에도 오시지 않았다! 그리고 164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그 사건의 진실성과 확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맨 처음 이 약속을 주신 분이 누구이신가를 생각하면서 언제 그 사건이 있든지 간에 우리는 그 사실을 붙잡아야 한다. 그 약속은, 믿을 만한 역사적 인물이시며 수세기 동안 그 신뢰성을 검증 받으신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바로 그분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근심과 염려에 눌려 있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직접 약속하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나를 믿으라(요 14:1)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3절)고 약속하셨다.
1. 다음 구절들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재림의 약속을 더 잘 이해하도록 어떤 도움을 줍니까?(창 3:15, 사 40:8, 갈 4:4, 참조 단 9:24-27).
답:
초림의 약속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주어졌으며(창 3:15), 세상은 수천 년 동안 그 성취를 기다려왔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우주의 시계가 정한 시각을 알리자 천사들은 베들레헴 언덕에 있던 놀란 목자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하나님은 그 약속을 어기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흔들릴 수 없는 당신의 말씀 가운데 새겨두셨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도 지켜질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도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다.
부가적용)
서울 총각과 강원도 처녀가 서로 결혼을 약속했다. 식을 치를 날이 됐다.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강원도로 내려갔다. 신랑은 부유해서 뒤따르는 그 행렬도 대단했다. 동네사람들은 서로 누구네 집 잔치냐고 물으면서 모두가 어리둥절한 채 쳐다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당사자인 신부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신랑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아니, 오늘이 결혼식인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어떻게 오늘이 결혼할 날인가요?” “무슨 말이오? 우리가 떠날 때 오늘을 결혼 날로 약속하지 않았소?” 알고 보니 서울 총각은 양력으로, 강원도 처녀는 음력으로 날을 받아놓았던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한 달 차이가 난 것이다. 우리는 혹시 음력으로 날을 받아놓고 예수님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그날을 늘 준비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금요일(6월 2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하늘에 올라가셨다. 제자들은 그분을 감싸는 구름을 보았다. 저희와 같이 걸으시고 이야기하시고 기도하시던 바로 그 예수님, 저희와 같이 떡을 떼시고 호수에 뜬 저희 배 위에 함께 계셨던 그분, 바로 그날 저희와 함께 땀을 흘리며 감람산으로 오르시던 바로 그 예수께서 이제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시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바로 그분이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천사들은 확실하게 말해 주었다. … 제자들이 저희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희망으로 기뻐한 것은 당연했다”(시대의 소망, 832).
소위 재림의 지체(遲滯)라는 문제에 관해서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시간 개념은 그것을 열망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특정한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그 사건에 대한 생각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어떤 사건이 어느 시점에 곧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서양적 사고에서는 그것이 속히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 성경 기자들이 살았던 배경인 동양적 사고에서는 그 사건의 진실성과 확실성이 더 중요한 측면이고, 시간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18세기 중엽부터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는 동안 많은 서구 사람들은 과학과 이성과 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크게 향상되어 전쟁과 질병과 재난과 같은 나쁜 일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크게 감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의 2천 년 전에 마태복음 24장에서 세상의 견해와는 반대되는 견해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의 말이 옳았습니까? 마태복음 24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신뢰하게 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2.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촉진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지체의 요인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6월 28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7분)
도입)
주위의 시계를 보면 언제나 현재의 시각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항상 현재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고 또한 마지막이 있다. 우리의 삶은 ‘모래시계’인 것이다. 인생에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묵상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진 삶의 순간들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된다. 예수님은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분은 삶의 마지막 때를 알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매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한 삶을 선물로 받았다. 우리는 모래시계에 모래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릴 세상의 것들을 채우겠는가, 영원의 삶의 준비할 것인가? 성경에서의 종말론적 관심은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이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영멸,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들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마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한다(벧후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 문명, 반 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든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 내세적, 반 종말적 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가장 확실한 우리의 미래이다. 역사란 마치 마지막 날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과도 같다. 마지막 날, 하늘 문이 열리고 영광스러운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왔다. 때로 우리는 종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성경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한 결말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로만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주님께서 당신을 기다리는 백성들의 친구요 왕으로서 재림할 것이라는 확신은 오늘의 능력이 될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종말적인 신앙으로 힘 있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억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연구범위: 단 9:24-27, 마 24장, 눅 21:25-31, 요 14:1-3, 살전 4:13-18, 히 9:28.
안식일 오후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라는 책과 영화는 재림에 관한 진리를 왜곡시키긴 했지만,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줄거리는 하나님을 독재적이고 변덕스러운 분으로 묘사함으로, 성경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묘사한 것과는 반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재림에 관한 일종의 공포심을 조장했다.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대체로 영광스럽고 지극히 기쁜 사건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시고 또한 우리의 친구이시다.
재림의 사건에는 비록 두려움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그 두려움의 요소 때문에 사람들의 눈이 하늘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의 요소는 물론 중요하며, 우리가 그것을 전혀 배제한 채 재림의 진리를 선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려움에 관해 언급할 때에는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것만을 조심스럽게 말할 것이며, 불안을 자아내는 악몽 같은 것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재림에 관한 다양한 측면을 전할 때에 우리는 성경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마치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는 것과 같은 그런 기대감을 심어 주어야 한다.
재림의 기별은 반드시 좋은 소식이어야 하며, 사람들이 불안을 달래기 위해 안정제를 먹어야 하는 그런 식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
일요일(6월 22일)
바깥뜰에서 기다림(히 9:28)
도입)
주가 오신다는 약속은 수세기에 걸쳐 신자의 커다란 소망이 되어 왔다. 에밀 브루너는 “폐에 산소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찰스 웨슬리는 7,000개의 찬송가를 썼는데 그 중 5,000개의 찬송가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내용으로 담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주관했던 켄터베리 대주교는 왕관을 그녀의 머리 위에 얹으며 이같이 말했다. “오, 여왕 전하, 제가 이 왕관을 드리오니 마땅히 쓸 권리를 가지신 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전하께서 쓰시옵소서.” 그러나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세상에 대하여, 한 유명한 칼럼니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모두에게 세상은 무질서하고 위험하며, 통제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누가 질서를 회복시킬 것인가? 누가 핵 위험을 막아줄 수 있겠는가? 누가 에이즈와 우리 시대의 다른 전염병을 박멸시킬 수 있는가? 누가 홀로 세상을 통치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약속하셨고 어느 날엔가 완전히 그의 통치 아래 둘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해방되고 그들의 억울함이 신원될 것이다. 그때에 비 그리스도인들은 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속죄일에 미리 예시(豫示)되어 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일 년에 한 번 행하는 의식을 수행하는 동안 백성은 바깥뜰에서 숨을 죽인 채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나온다는 사실은 민족과 개인의 죄를 도말하는 그의 일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1844년 이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속죄일에 예시된 사역의 국면으로 들어가셨다. 그 사업이 완료되는 때에는 그분께서 당신의 백성을 받으시기 위해 하늘 성소에서 나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9:28에는,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고 말씀하고 있다.
1. 다음은 기대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눅 12:40-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딛 2:11-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전 1: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윌리엄 밀러와 그를 따르던 이들은 1844년에 하늘 대제사장께서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고대하였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들은 실망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을 움직이게 했던 열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친밀한 임재를 느꼈으며, 그분 뵙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그들에게 그분은 친구이셨다. 후에 하이람 에드슨(Hiram Edson)이 기록한 소감을 보면 그 무리가 느꼈던 감정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을 보고자 열망하였다.”고 에드슨은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자, “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한 서러운 생각이 우리를 엄습했다.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하이람 에드슨, 단편 원고, 앤드류스 대학교, 제임스 화잇 도서관, 재림교회 연구센터 유산관리소). 이들 신자들은 예수께서 오시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교훈: 우리는 이스라엘의 속죄일과 같은 엄숙한 시기에 살고 있다. 우리는 죄를 자복하고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부가적용)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종말을 이렇게 비유한 적이 있다. 초만원 극장 밖에서 불이 났다. ‘불이야!’ 소리를 지르면 많은 사람이 넘어져 발에 밟혀 죽게 될 아비규환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한 배우가 공연을 멈추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차분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다. “여러분, 지금 밖에서 불이 났습니다. 여러분이 한꺼번에 뛰어나가면 모두 죽습니다. 출입구는 뒤와 좌우에 하나씩 있습니다. 출입구 가까이에 있는 분부터 차례로 나가시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관중은 그의 말이 연극의 일부인 줄 알고 박수를 치며 웃고 떠드는 것이었다. 실제 상황이라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연기가 스며들어 오고 불길이 순식간에 극장 안을 뒤덮었다. 이미 때는 늦고 만 것이지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롯의 사위들은 심판의 메시지를 농담으로 여기다가 망했다. 종말의 징조가 왔다는 말을 농담으로 흘려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종말론이 실종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칼 바르트는 "철저히 비종말론적인 것은 철저히 비기독교적이다"라고 했다. 기독교에 있어서 종말론은 핵심적 사상이다. 종말론이 상실되면 안일과 나태와 게으름으로 현세 지향적이 된다. 너무 강화되어도, 현실 도피적이 되어 바림직하지 못하다. 이단들의 대부분이 강한 종말사상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핵심을 가져가버리고, 건전한 교회들은 종말론이 실종되고 있다. 윌리엄 밀러의 재림운동의 날짜의 빗나감은 재림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낳게 하였다. 또한 1992년 10월 31일을 "휴거의 날"로 정하고 세상과 교회를 미혹한 다미 선교회 이단들이 있었다.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 사건 이후로 교회가 종말론을 강조하지 않는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종말론을 강조하면 이단으로 지목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까? 그러나 교회는 종말공동체 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성도를 무장해제 시키려는 사단의 전략을 간파해야한다. 임박한 종말론은 바울이나 예수님에게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초대교인들의 인사는 "마라나타"였다. "오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 다시 오신다” 라는 뜻이다. 초대교회에서 임박한 종말 사상 때문에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일도 팽개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경고 하면서 현실에 충실할 것을 권면하였다. 종말론에 관해 이미 실현되었다는 주장과 철저히 미래 사건으로 치부하는 자들이 있으나 이미,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자세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야고보도 본문에서 종말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재림교회는 바로 재림에 대한 소식을 전해야 할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월요일(6월 23일)
두려움의 요소를 언급함
도입)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인데 갑자기 우리나라에 전쟁의 소문이 돌면서 온 집에서 식량 준비를 하는 대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날 예정이라면 너도 나도 라면을 박스로 사들이고 중요한 생필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서 가게에 있는 라면박스는 모두 동이 났었다. 인간이 절박한 상황에 부딪히면 자기 몸만 생각한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보다. 그저 굶어 죽기는 싫어서....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어떠한가?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예고에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써가며 식량준비를 하면서 정작 주님 오신다는 확실한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영의 식량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의 영혼은 아마도 굶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재림에는 두려운 측면도 있다. 예수께서도 친히 환난의 때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리라(마 24:30). 그분께서는 그 사건을 노아 홍수와 소돔의 심판과 비교하셨다(마 24:37-39, 참조 눅 17:26-30). 그분께서는 마지막 분별하는 과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맷돌질을 하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 두 여인에 관한 예증을 드셨다(마 24:40-41). 그리고 그분께서는 경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강한 어조로 경고하셨다(참조 43-51절). 예수님이 당신의 재림에 관한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을 하실 때 함께 있었던 베드로는, ‘주의 날’이 뜨거운 불과 공포의 날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벧후 3:10-12). 요한은 이상 중에 이 사건을 보고 말하기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계 1:7)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6:15-16에서는 생명으로부터 떠나간 사람들이 재림의 때에 산과 바위에게 호소하기를 자기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 6:16)고 부르짖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1. 다음 구절들은 재림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 25:31-33, 4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살후 1:6-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12:25-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학대한 자들, 살인하고 착취한 자들, 남의 것을 빼앗고 약탈한 자들, 국가의 자산을 훔친 자들, 많은 사람을 빈곤과 불행 중에 고통당하도록 내버려둔 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선량하긴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거만하게 등을 돌리고 그분의 은혜로운 자비와 용서를 거절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재림의 날이 그다지 두려운 날이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면 그것은 지극히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다. 사람들의 영원한 미래가 이 문제에 달려 있는데, 그 상황의 실체를 덮어 버리고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우리에게 죄가 될 것이다.
교훈: 재림의 날은 기쁨의 날이지만 한편 두려움의 날이기도 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 두려운 날에 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부가적용)
캘리포니아에서 폴크스바겐(Volkswagen) 차량이 도난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경찰은 수사력을 동원해 차량과 그 절도범을 찾기에 주력했다. 경찰은 지역 라디오 방송까지 이용해 차량 절도범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차량 주인이 도난당한 차량 앞좌석에 독극물을 바른 과자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절도범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차주는 쥐를 잡으려고 독을 바른 과자를 차 안에 둔 것이다. 이 사실을 안 경찰과 차주는 차량을 되찾는 것보다 절도범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급선무가 되었다. 하지만 절도범은 그런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을 도우려는 사람들을 피해 더 멀리 도망갔다. 이 이야기는 중요한 진리 한 가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속셈으로 그분에게서 달아난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인생의 실패가 자명해 보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소망을 주신다. 그러나 왜 아직도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인생을 허무하게 마치는 것일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첫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멸망에 있지 않고 우리의 구원에 있다.
화요일(6월 24일)
다른 한편으로는 …
도입)
옛말에 ‘양병십년 용병일일(養兵十年 用兵一日)’이란 말이 있다. 병사를 키우는 데는 10년이 걸리지만 병사를 사용하는 데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루를 쓰기 위하여 10년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하루를 쓰기 위한 10년의 준비는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루를 쓰기 위하여 평생을 훈련하고 있다. 영국의 윔블던 테니스장은 일 년에 두 주간을 사용하기 위하여 일 년 내내 준비하고 가꾼다. 책임을 맡은 매니저는 한 해 동안 꾸준히 잔디를 관리하며 두 주간의 대회를 기다리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그가 하는 일은 준비하는 일이다. 준비,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절대로 준비 자체를 소홀하게 생각하지 말라.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은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고 이 세상의 마지막이 될 것이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이고 희망의 날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 날을 준비하며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이 날은 가장 희망적인 날이 될 것이다.
어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의 재림에는 두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밝은 광경을 떠올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오실 그분은 왕이실 뿐 아니라 또한 친구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징조가 나타날지라도 즐거운 기대감을 가지라고 예수님이 친히 격려하셨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눅 21:28).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릴 필요가 없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영광스런 재림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열렬한 희망과 흥분 속에 기다리기를 원하신다.
1. 다음 구절들에는 기대감과 즐거움의 개념이 어떻게 강조되어 있습니까?
요 14: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 1: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빌 3:20-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살전 4:13-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 7:9-10, 13-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께서는 거만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당신의 위엄과 왕권을 강조하시고 재림의 심판적인 측면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위안과 확신과 기쁨에 초점을 맞추심으로써 강조점을 전환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분께서는 재림의 때에 모든 족속이 통곡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직후에, 마태복음 24:31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초점을 맞추시면서 어조를 바꾸셨다. 그분께서는 천사들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14:1-3에서 예수께서는 ‘근심’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잔잔케 하고, 초조해진 그들의 신경을 안정시키며, 소망에 닻을 내리게 하기 위해 당신의 다시 오심을 약속하셨다.
교훈: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의 날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구원의 날이다. 우리는 머리를 들고 즐거운 기대감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자.
부가적용)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히틀러의 그릇된 생각이 600만 유태인을 가스실로 몰고 갔다. 모두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한 유태인 의사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고민을 깊이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리조각 하나를 줍게 되었다. 매일 그는 그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면서 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나치는 매 시간마다 가스실로 보낼 유태인들을 뽑았다. 그러나 매번 새파랗고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활기찬 젊은 의사를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그의 가스실행이 하루 이틀 이렇게 미뤄지다가 드디어 독일이 패망했고 젊은 의사는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도움을 늦추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실 때까지 참지 못할 뿐이다." 이 젊은 의사의 말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고 참고 견디는 사람,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반드시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이다.
수요일(6월 25일)
우리는 언제 예수님을 뵐 것인가? - 1
도입)
서양인들의 묘지는 저 멀리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가운데 혹은 교회당 뜰에 있다. 거기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는 묘비에는 앞서 간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나 아쉬움의 인사가 새겨져 있다. 한 사람이 묘지를 돌며 묘비들을 읽고 다니다 어떤 묘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그 묘비의 글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글은 단 세 줄이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번 째 줄이 이어졌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죽음에 대한 준비만큼 엄숙한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준비는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 해야 한다. 그 준비는 바로 '오늘'을 결코 장난처럼 살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바로 내가 죽는 그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오늘이 바로 예수님을 뵐 바로 그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 얼마 전에 중국 쓰촨 성에서 강진이 발생해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적과 같이 홀연히 ‘종말’이 닥친 것이다. 이 때 우리는 <내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 역시 도적같이 홀연히 닥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중요한 장으로서, 그분의 제자들이 제기했고, 오늘날 우리도 여전히 궁금해 하는, 언제 재림이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강조하셨다.
1.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 기근, 지진, 전쟁이 일어나도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6-8절).
2. 우리는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미움을 받을 수 있다(9-13절).
3.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4-5절, 23-26절). 예수께서는 이 점을 많이 강조하셨다.
4. 끝이 오기 전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14절).
5. 사건은 가시적이며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27절).
6. 재림이 가까워질 때에 우주적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29절).
7. 끝이 가까워올 때에 천사들이 온 세상에서 신실한 자들을 모을 것이다(31절).
8. 재림의 날과 시(時)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36절).
9. 모든 경고와 예언에도 불구하고 재림은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될 것이다(42-44절).
위의 목록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에 강조점을 둘 필요가 있다. 모든 민족에 ‘증거’가 되기 위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며, “그제야 끝이 오리라”(14절)고 하였다. 이 사실은 간접적으로나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역할을 암시하며, 인간의 역사가 마쳐지기 위한 하나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을 말해 준다. 이 구절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시키기 위해 더 많은 열정을 쏟아야 함을 말해 준다.
런던의 어느 교도소에 소속된 한 목사가 유죄 선고를 받은 죄수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죄수가 이렇게 대꾸했다. “목사님, 지금 말씀하신 것을 정말로 믿으시나요? 내가 만일 그 복음이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깨진 유리조각 위를 기어서라도 온 영국을 누비며 사람들에게 그걸 전파하겠소!”(라이튼 포드, 그리스도인 설득자, 하퍼 앤드 로우 출판사, 1966년, 29). 이런 열정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교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재림의 날짜를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다. 또한 우리는 재림을 촉진하기 위해 복음전파에 힘써야 한다.
부가적용)
마지막 때의 중요한 주제는 주님이 언제, 어디에, 어떻게 오시는가 하는 것, 즉 ‘때와 기한을 예측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때의 중요한 주제는 성령충만이다. 행1:7절에,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라고 했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가, 어느 때 오시는가, 몇 시에 오시는가, 이것은 너희의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1: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시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 노릇을 계속하는 것>이다. 주님의 관심과 자기 관심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고, 주님의 관심과 자기 관심이 어긋나는 사람도 있다. 성숙한 사람은, 주님의 재림 전에, 땅 끝까지 복음 전파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며,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을 투신한다. 미성숙한 사람은, 그저 자기가 성공하고 잘 되려고 하는 데, 자신을 투신한다. 노아가 홍수 심판을 앞두고 방주를 지었다면, 우리는 최후 심판을 앞두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에 노아처럼 '방주를 예비하는 일' 이다. 중요한 모임에 가기 위해서 마음속에 입을 옷을 생각한다. 그래서 준비를 다하고 마지막에 옷을 입는다. 옷장에서 꺼내보니 형편없이 구겨져 있다. 구겨진 옷을 펴는 필수적인 기구가 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는 반드시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집가는 색시는 꼭 다리미를 가져간다. 이 다리미가 일을 하려면 반드시 열이 있어야 한다. 자기 혼자서는 절대로 힘을 쓸 수 없는게 바로 다리미다. 요즘에는 편리한 전기다리미를 많이 쓴다. 그러려면 한 쪽 끝이 소켓에 꽂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뜨거워지게 된다. 아무리 좋은 다리미라도 전원에 꽂히지 않으면 절대로 힘을 쓸 수 없다. 그래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끝을 꽂아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슴도 뜨거워지려면 그리스도에게 꽂혀야 한다. 포도나무가 줄기에 붙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삶이 시작된다. 그것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보라. 정말로 그리스도가 내 속에 지금 계신가?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를 대하고 남을 대하는가?
목요일(6월 26일)
우리는 언제 예수님을 뵐 것인가? - 2
도입)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올수록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데 큰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우주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벧후3:10~11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잘 들어보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3:12 그렇다. 마지막 때의 참된 주제는 주님이 언제 어느 때 오시는가가 아니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기도원으로, 어느 신령한 집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해 있는 나의 삶의 터전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매일매일 하나님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거룩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다. 성도는 <결국 무너져 버릴 것, 결국 불에 탈 것>을 위해 목숨 걸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현실을 떠나서 등지고 살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살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세우실 성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히11:10) 대학입시가 다가올 때면 두 종류의 학생을 발견하게 된다. 한 학생은 고통스럽지만 날짜가 다가올수록 깨어서 시험에 대비한다. 도시락 2~3개 싸들고 밤 12시, 한 시까지 열심히 공부한다. 놀고 싶은데 놀지 못한다. 연애하고 싶은데 연애도 못한다. 그 집은 초비상이 걸린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공부를 잘 해서 원하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전력을 다해 준비하는 것이다. 반면에 또 이런 학생들이 있다. 시험 때가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스포츠나 놀이에 열심이다. 전자 게 임에 빠져 오락실을 들락날락한다. 고 3인데도 연애에 열심이다. 계획 없이 잠을 자고 적당히 시간을 때우며 졸업하기만 기다린다. 어떤 때는 공부하느라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지속성이 없다. 이 두 학생의 차이는 언제 판명이 날까?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 우리는 공부 안 하는 자식을 보면, 애가 타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대학입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천국입시>를 앞두고 주님은 우리를 보시며 한숨을 푹푹 내 쉬실 수도 있다.
일요일 교과에서 우리는 밀러운동에 가담한 자들이 1844년 10월 22일에 얼마나 열렬히 재림을 기다렸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들과 우리가 발견한 대로 예수께서는 그 다음 날이나 그 다음 주, 혹은 그 다음 달이나 그 다음 해, 혹은 10년 후나 100년 후에도 오시지 않았다! 그리고 164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그 사건의 진실성과 확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맨 처음 이 약속을 주신 분이 누구이신가를 생각하면서 언제 그 사건이 있든지 간에 우리는 그 사실을 붙잡아야 한다. 그 약속은, 믿을 만한 역사적 인물이시며 수세기 동안 그 신뢰성을 검증 받으신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바로 그분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근심과 염려에 눌려 있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직접 약속하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나를 믿으라(요 14:1)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3절)고 약속하셨다.
1. 다음 구절들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재림의 약속을 더 잘 이해하도록 어떤 도움을 줍니까?(창 3:15, 사 40:8, 갈 4:4, 참조 단 9:24-27).
답:
초림의 약속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주어졌으며(창 3:15), 세상은 수천 년 동안 그 성취를 기다려왔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우주의 시계가 정한 시각을 알리자 천사들은 베들레헴 언덕에 있던 놀란 목자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하나님은 그 약속을 어기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흔들릴 수 없는 당신의 말씀 가운데 새겨두셨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도 지켜질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도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다.
부가적용)
서울 총각과 강원도 처녀가 서로 결혼을 약속했다. 식을 치를 날이 됐다.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강원도로 내려갔다. 신랑은 부유해서 뒤따르는 그 행렬도 대단했다. 동네사람들은 서로 누구네 집 잔치냐고 물으면서 모두가 어리둥절한 채 쳐다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당사자인 신부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신랑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아니, 오늘이 결혼식인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어떻게 오늘이 결혼할 날인가요?” “무슨 말이오? 우리가 떠날 때 오늘을 결혼 날로 약속하지 않았소?” 알고 보니 서울 총각은 양력으로, 강원도 처녀는 음력으로 날을 받아놓았던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한 달 차이가 난 것이다. 우리는 혹시 음력으로 날을 받아놓고 예수님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그날을 늘 준비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금요일(6월 2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하늘에 올라가셨다. 제자들은 그분을 감싸는 구름을 보았다. 저희와 같이 걸으시고 이야기하시고 기도하시던 바로 그 예수님, 저희와 같이 떡을 떼시고 호수에 뜬 저희 배 위에 함께 계셨던 그분, 바로 그날 저희와 함께 땀을 흘리며 감람산으로 오르시던 바로 그 예수께서 이제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시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바로 그분이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천사들은 확실하게 말해 주었다. … 제자들이 저희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희망으로 기뻐한 것은 당연했다”(시대의 소망, 832).
소위 재림의 지체(遲滯)라는 문제에 관해서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시간 개념은 그것을 열망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특정한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그 사건에 대한 생각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어떤 사건이 어느 시점에 곧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서양적 사고에서는 그것이 속히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 성경 기자들이 살았던 배경인 동양적 사고에서는 그 사건의 진실성과 확실성이 더 중요한 측면이고, 시간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18세기 중엽부터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는 동안 많은 서구 사람들은 과학과 이성과 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크게 향상되어 전쟁과 질병과 재난과 같은 나쁜 일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크게 감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의 2천 년 전에 마태복음 24장에서 세상의 견해와는 반대되는 견해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의 말이 옳았습니까? 마태복음 24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신뢰하게 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2.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촉진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지체의 요인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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