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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그분의 유효한 대제사장 사역(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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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6-13 07:12 조회5,7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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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그분의 유효한 대제사장 사역
6월 21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7분)

도입)
어린아이와 어디에 갈 때는 당연히 엄마나 아빠가 손을 잡고 걷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아이가 돌에 걸려 넘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엄마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더 꽉 잡게 된다. 그런데 그 반대로 엄마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엄마는 오히려 아이를 잡은 손을 탁 하고 놓아 버린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넘어지고 다치더라도 자식을 다치지 않게 하게 위해서 손을 빨리 놓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하는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안전하게 살아가도록 붙들어 주셨다. 인간이 악한 권세에 걸려 넘어져서 다치고 죽을 지경이 되자 하나님 쪽에서 손을 놓으셨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는 대제사장으로 삼으
셨다(히 5:6).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다. 그 일로 우리 주님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되었다(히 5:9). 우리는 기쁨 가운데 살 수 있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랑의 줄로 우리를 붙들어 주셨다. 히브리서에서는 진리를 모두 말한 후에 다음의 말씀으로 요약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있는 것이라.” 여기서 제시한 모든 진리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이러한 대제사장”이며 이 모든 진리를 제시한 큰 목적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임을 항상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히브리서 8장 이후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는 진리들이 아무리 뛰어나고 완전하다고 하더라도 계속 마음에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진리들이 모두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한 말의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있는 것이라”는 대 진리가 모든 진리를 능가하며 다른 진리들은 부수적이고 버금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기억절: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히 8:1).

연구범위: 출 25:8, 마 27:50-51, 행 7:54-56, 히 6:19-20, 7:23-28, 8:1-2, 9장.

안식일 오후
창조 후 오래지 않아서 우리의 첫 조상은 죄에 빠지고 말았다. 이 엄청난 사건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의 회복과 우주의 영원한 안전에 관심을 가지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예지(叡智)와 평화의 의논을 통하여 신성의 한 분의 죽음을 결정하셨는데, 그것만이 죄의 문제를 끝낼 수 있는 유일의 방편이었다.
“이 중요한 계획에 인간의 참여와 협력을 확보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첫 조상에게 그 계획을 신속히 알리셨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그들과 그 후손들의 주목을 영구히 끌 수 있는 교육적 장치를 마련하셨다”(로이 애덤스, 성소,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 1993년, 17-18). 물론 이 교육적 장치는 성소 봉사제도였다.
성소는 히브리인들의 예배의 중심이 되었고, 그것의 활동과 의식을 통하여 탄원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참조 히 9장)와 그분의 하늘 성소에서의 사역을 통한 인간 구원의 우주적 실체를 깨닫게 되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하늘 성소와 그곳에서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6월 15일)
고대 성막으로부터의 암시(출 25:9, 40)

도입)
이 세상의 어느 것이든 중심 되는 기초가 있고, 그것을 중심한 일을 진행할 때에 보다 능률적일 수가 있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호주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기업은 사장이, 하나의 국가라면 내외적으로 대표(왕, 대통령)할 수 있는 어떤 구심점, 즉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자연의 세계도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나무가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양분을 흡수하는 뿌리가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고, 이 자연계가 파괴되지 않으려면 태양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같이 성막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앙에 세워진 것은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 이것은 신령 이스라엘인 우리 성도들이 십자가 중심,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진리이다. 고대 성막, 하나님의 집인 성막이 광야에서 세인들이 거하는 중앙에 위치함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늘의 보좌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낮고 천한 광야 같은 세상에 죄인들이 사는 인간세계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이 거주하는 중앙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막들의 옆에 있음과 같이 예수께서도 타락한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시고(마 9:9-13), 또한 곁에 있기를 원하시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보여주신 식양에 따라 성막을 지으라는 지시를 받았다(출 25:9, 40). 일반적으로 판단할 때 성막의 널빤지와 못 하나하나에 무슨 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까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약 성소제도의 교육적인 기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상징들의 의미에 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사실상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약간의 정보와 신약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종합함으로써 성소 제도와 그 봉사 자체를 뛰어넘는 보다 더 큰 실체가 암시되어 있음을 깨닫고, 성소 제도의 다음 각 부분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상당히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 조석으로 드리는 제사(출 29:38-42, 민 28:1-6)
2. 진설병과 등대(출 25:23, 30-31, 37)
3. 속죄일의 의식(레 16장, 히 9:1-12)
4. 대제사장의 예복(출 28:6-21)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희생은 “그 민족이 매일 여호와께 헌신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에 끊임없이 의지한다는 것을 상징하였다”(부조와 선지자, 352). 신약에 나오는 떡에 대한 많은 암시를 통해 우리는 성막 혹은 성소의 떡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참조 마 26:26, 요 6:48-51). “만나와 진설병은 둘 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항상 계시는 산 떡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354쪽). 이와 마찬가지로 등대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 8:12)고 말씀하신 그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제사장의 흉패의 작은 보석들에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엘렌 G. 화잇이 말한 대로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회개하고 믿는 각 영혼의 이름을 당신의 가슴에 새기시고 당신의 보혈의 공로로써 하늘 아버지 앞에서 호소하시는 것을 암시한다”(로이 애덤스, 성소, 38, 비교 부조와 선지자, 351).

교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으라 하신 성막의 구조와 봉사 제도는 인간의 구속을 위한 과정을 설명하는 교육적 장치로서 성막의 각 부분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부가적용)
성막은 이방의 신전이나 우상의 전각처럼 결코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규모이며 소박한 모습이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 비한다면 겉모습은 정말 초라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외형적인 것에 가치를 두거나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집을 지을 지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있는 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던 이 성막에는 아름다운 표상이 숨겨져 있다. 이것은 구원의 설계도이다. 우리는 성막 문에서 구원론을 배우며 번제단에서는 죄론과 보혈론을 배운다. 등대에서 사명론을 배우고, 떡상에서 말씀과 축복론을 배우고, 분향단에서 기도론을 배우고, 법궤에서 부활론 천국론 계시론 삼위일체론을, 각종 기구에서 하나님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기타 다 열거할 수 없는 여러 진리가 성막에 담겨져 있다. 이것은 신앙생활 전체요, 성경 전체이다. 그래서 성막 공부는 우리를 균형 잡힌 신앙생활로 인도해 준다. 식품에도 완전식품이 있듯이 성막만큼 모든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곳도 드물다. 성막의 제단, 그 장막에 속한 제단은 그리스도의 표상인 생축을 제물로 바치는 곳이고(엡 5:2), 향단에서 되는 일도 그리스도의 공로를 표상하고(계 8:3),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막는 휘장도 그리스도를 표상하고(히 10:19-20), 등대의 빛도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일곱 눈을 상징하고(계 5:6), 시은소도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롬 3:25). 이렇게 구약의 성막도 그리스도의 중심이고 신약의 교회도 그러하다.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자기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주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항상 함께 계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곳이다.

월요일(6월 16일)
모든 것은 그분을 가리킴

도입)
성경에는 모형론이 많이 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예수님 모형이다. 또 홍해의 사건은 고전 10장에 나오는데 침례와 중생의 모형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범죄 했을 때 구리 뱀을 만들어 달았는데 이 역시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었다. 라합의 붉은 줄도 예수님의 구원의 모형이다. 혹은 도피성도 죄인의 도피처가 되시는 예수님의 모형이다. 이 모형을 표상이라 혹은 예표라 이런 용어를 쓴다. 그래서 이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표상학이라는 학문도 있다. 이처럼 성막은 그 구체적인 것 하나 하나가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다. 성막의 양이 또한 예수님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형이다. 성막 안에서 제사함도 예수님이요, 성막 자체도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다. 그래서 성전의 주인은 예수요 성막의 주인도 예수요 그래서 성막을 보이는 복음이라 말 할 수 있다. 마치 성찬식에서 떡과 잔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보이는 복음임과도 같다.

1. 요한복음 1:29을 읽으십시오.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한 데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답:
광야의 성막은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남아 있는 한 그들은 이 성스러운 건축물을 구원의 장소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화목의 장소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성막 봉헌(참조 출 40:34-35) 시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임재는 그것을 목격한 자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성전 봉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현저한 임재에도 불구하고 그 건물의 험난한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바벨론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후에 다시 지어진 성전은 이전의 영광에는 훨씬 못 미치었다. 그러나 이 성전은 예수님의 발길이 닿은 성전이었다. 2천여 년 전 어느 금요일 오후, 예수께서 예루살렘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바로 이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던 것이다(마 27:51).
“그 때는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이었다. 제사장은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양을 잡기 위하여 끌고 왔다. … 그러나 땅이 떨며 흔들렸다. 성전 안의 휘장이 소리를 내면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한때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했던 곳이 군중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열려졌다. 그 곳에 쉐키나가 거했었다. 하나님께서 그 곳 시은소(施恩所)위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이 부분과 성전의 다른 부분을 갈라놓은 이 휘장을 쳐들 수 없었다. … 지성소는 더 이상 거룩한 장소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공포와 혼란뿐이었다. 제사장은 희생 제물을 죽이려 했으나 칼은 그의 무기력한 손에서 떨어지고 양은 도망쳐 버렸다. 모형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원형과 마주쳤다. 큰 희생이 이루어졌다. … 마치 예배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힘 있는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이제 죄를 위한 모든 희생과 제사는 끝났다. …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오셨다”(시대의 소망, 756-757).

교훈: 수천 년 동안 성소에서 드려진 수많은 희생 제물은 세상 죄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부가적용)
유대 종교당국에서 정식적으로 요한을 수사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네가 누구냐’고 물을 때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한다. 아마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그에게 백성들이 몰려가고 범국민적인 회개 운동이 일어나자 요한의 정체를 밝히고 진상 조사에 나선 것이다. 그는 백성들의 인기와 신임을 받는 지도자로서 백성들이 지지하는 그리스도 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침묵만 하고 있어도 시대 분위기 상 모든 영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며 엘리아도 선지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과 사명을 이사야 말씀에서 찾는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소리 뒤에 본격적으로 행차하는 주인과 비교할 때 신발 끈을 매고 푸는 종의 위치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요한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소리의 역할로 살고 있었다. 고대사회에서 왕이 주인으로 행차할 때 길을 을 곧게 다듬는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요한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시키는 선구자적인 사명을 알았다. 특히 자기는 ‘소리’의 역할을 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소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달을 해주고 사라지는 존재다. 요한은 이런 겸손한 자세가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고 소리로서 사명을 다하고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음 날 주인공인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나오셨다. 그는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구약 시대에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존재였다. 예수님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모든 인간을 대신해서 피를 흘리고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셨다. 백성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생각했지만 요한은 고난의 메시야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도 예수님을 잘 몰랐지만 침례를 베푼 것은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도록 돕는 것이고, 죄사함은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 있다는 복음 진리를 알게 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음성 중에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

화요일(6월 17일)
우리의 대제사장(히 7:25)

도입)
우리는 창조주 그리스도와 그 말씀 앞에 설 때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인 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말씀을 통해 자기의 모든 죄악상을 보고 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실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외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가리켜 주는 말이다.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이나 멜기세덱은 대제사장이라고 불리웠지만, “큰 대제사장”이라고 불리운 적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이유는 그가 인류의 모든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사실상 구약의 모든 대제사장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형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위대하신 대제사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을 “승천하신 자”라고 소개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 땅의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은 “하나님 아들 예수”시이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은 자기 몸으로 인류의 대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 성소에서 인류를 위해 중보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자기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초월성, 그리고 신성은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할“ 근거가 된다. '굳게 잡으라'('크라토멘')는 말은 '단단히 쥐다' 혹은 '들러붙다'의 말로 서 이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끝까지 지키라는 것을 권고한 말이다.

사도는 히브리서의 앞 장들에서 천사와 그들의 지위, 모세와 그의 광야에서의 경험, 여호수아와 가나안 땅, 선지자들과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등 많은 것에 관해 말하였다. 그러나 8장 1절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우리의 시선을 한 곳에 머물게 한다.

1. 히브리서 8:1-2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에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답:
고대 이스라엘의 진영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지성소와 이스라엘의 일반 예배자 사이에는 몇 가지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었다. 일반인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보호를 받는다 할지라도 거룩한 울타리로 둘러싸인 출입금지 구역에는 실제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제 우리의 하늘 제사장이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알현실(謁見室)인 하늘 성소에 제한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여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비록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중보가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비록 인간적인 견지이긴 하지만 중보에 관한 실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실례들 중 둘을 모세의 생애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가데스의 반역(민 14:10-20)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금송아지 사건(출 32:9-14, 30-32)과 연관된 것이다. 이 구절은 참으로 힘 있는 구절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호소하기를,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절)라고 탄원하였다. 우리는 또한 이와 같은 제사장적 중보의 모습을 다니엘(9장)에게서와,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드린 예수님의 위대한 기도(요 17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교훈: 예수님은 우리의 하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부가적용)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중보기도하시는 목적이 '우리의 온전한 구원'(save them to the uttermost)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히7:24-25은 잘 말해 주고 있다. 주님은 승천하신 이후에도 이 땅을 매우 관심하시고 계신다. 그분은 특별히 그분의 몸의 지체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신다(행9:4-5, 7:55). 왜냐하면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취하신 사실들을 사람들에게 적용하실 수 있는 길은 그분의 하늘에 속한 사역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하늘에서 역사하시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이 땅 위에서 동역한 결과가 바로 신약의 서신서와 계시록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 또한 동일한 원칙을 따라 수행되어 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다 <우리의 온전한 구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온전히 구원받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 알도록 주님께 나아가 빛 비춤 받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구원>은 무엇이고 <온전한 구원>은 무엇인가? 요약하자면, 그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은 저 하늘 어느 공간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사는 우리들의 온전한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저 하늘로 승천 한 후가 아닌 지금 이 땅에서 그분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고 누릴 수 있다. 즉 매일의 삶에서 어려움과 시험을 만날 때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는 대제사장이신 그분께 나아감으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수 있다(히4:14-16).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어떤 사물이나 외적인 축복이 아니라 우리 안에 도달하신 하나님 자신이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생명 안에서 성숙케 하여 그분의 장성한 아들들로 자라가게 한다. 이러한 은혜를 누림으로 인한 우리의 영적 생명의 성숙이 바로 히브리서 7:25이 말하는 '온전한 구원'이다. 주님은 지금 그분의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 이 일을 수행하고 계신다.

수요일(6월 18일)
어떤 차이가 있는가? - 1

도입)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잡아 속죄 제사를 드렸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구약시대 사람들은 오랫동안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을 잡아 제사했다. 이러한 것들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것처럼, 약속어음을 우선 끊어 주는 것과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약속어음만 계속 끊어주면 어떻게 하는가? 실제로 때가 되면 돈을 지불해야 하듯이, 염소와 송아지 피로 제사 드리는 대신에 실체되신 예수님이 오셔야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짐승의 피 아닌, 흠도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단번에 완성하신 것이다. 인류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간을 초월해 효과를 갖도록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贖罪)를 이루시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속죄(贖罪)란 예수님에 의해 우리 죄 값이 치러졌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았다.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버리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찬미가 378). 우리의 죄 값(죽음)을 대속(代贖)하신 일은 예수님이 하셨고, 예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 값은 없어졌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할 일이 없도록 해 두셨다. 죄 값으로 지불하신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의 죄는 물론이고 인류역사 끝 날까지의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씻으셨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태어날 사람까지,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피로 인해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이다.

1. 히브리서 4:16에는 우리를 위한 어떤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우리를 위한 어떤 권면이 주어져 있습니까? 여기에 기록된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답:
예수님을 구주와 대제사장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분을 단지 구주로만 아는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어떤 유리한 입장에 있는가? 우리는 이틀에 걸쳐 이 문제를 다룰 것인데, 이 문제에 관해 언급한 히브리서 9장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피면서 시작해 보자.
물론 이 장을 읽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단어와 구절의 의미를 정의하고, 오로지 학문적인 관점에서 그 의미를 밝혀내는, 순전히 언어학적이고 해석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전자의 방식과는 다르지만 전자의 방법을 통해 얻은 결과는 무시하지 않는다. 즉 단순히 그 구절이 말하는 바대로 읽고 진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앞에서 던졌던 기본적인 질문과 관련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 첫 언약(구약의 성소 봉사) 아래서 일어난 일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본질적으로 내면의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부적합하였으므로, 제물과 의식은 더 큰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2. 더 큰 무언가가 이제 나타났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그분은 참된 대제사장이시다(히 9:11). 그분이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다(히 9:12).
3. 구약의 제도 아래서 제물은 외형적 결과만을 성취했으며(13절), 내면적인 변화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은 내면에까지 미치어, 우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다(14절).
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단번에 당신의 보혈을 흘리사,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24-28절).

교훈: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희생제물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보혈을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 보혈은 우리의 내면을 정결케 한다.

부가적용)
성경에 영원(永遠)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나와 있다. 단순히 긴 시간이나 역사를 영원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 하나이고,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무한대의 개념의 것이 다른 하나이다. 우리는 한정된 시간 속에 살고 있으므로 몇 천 년 전이니, 몇 천 년 후이니 하는 시간 개념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다. 천국에 가면 거기에는 시계가 없고 달력도 없을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는지 그런 것 계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영원 속에 들어가 버린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영원하신 그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를 시작하셨다. 원(圓)과 같은 영원의 세계에서 한 자락 베어내어 펴놓은 것이 인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그렇게 시작된 역사가 쭉 진행되다가 또 어느 땐가 끝나면 다시 영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포함한 인류의 역사는 영원과 영원 사이의 한 막간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아담 때부터 세상 끝 날까지 단지 하나이다. 인간이 생각할 때 시간이 긴 것이지, 하나님에게는 아무리 긴 시간도 순간일 뿐이다. “영원한 속죄”(eternal redemption)라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리신 “죄를 위”한 “한 영원한 제사”는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하는 효력이 있다(히브리서 10:12,14). 우리 모든 죄는 하나님께 영원히, 완전하게 사함을 받은 것이다. 전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개인에게 있어서는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그 효과가 미친다. 태어나서 오늘까지 사는 동안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이 사해 주신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사해 주실 것을 믿었고, 우리는 이미 사해 주신 것을 믿는다. 그런데, 앞으로 죄 지어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후로 살면서 우리는 죄 지을 수 있다. 육신이 사는 동안 혹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 한 번도 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할지라도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죄 지을 수 있다. 이후에 짓는 죄는 어떻게 할까? 그것도 사해 주셨는가? 앞으로 지을 죄도 물론 사하셨다. 누가 그렇다고 했는가? 이것을 기록한 제가 그랬다고 하면 안된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으며, 성경말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도 변치 않는다. 영원한 속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 받은 것도 영원토록 효력이 있다. 과거의 죄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죄까지 하나님이 이미 사하셨다. “나의 죄를 씻기는 주의 보혈밖에 없네. 다시 정케 되기도 주의 보혈 밖에 없네”(찬미가 366).

목요일(6월 19일)
어떤 차이가 있는가? - 2

도입)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고맙기는 고마웠지만, 그런데도 안심이 안 된 적이 있었다.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가만 있자, 예수님은 천구백 몇 십 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예수님의 피도 흘러 말라붙어 버렸는데, 그것이 지금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회의와 마음에 의심이 들을 때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죽으셨고 나는 나대로 죄 때문에 답답한 적이 있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옛날 2천 년 전에 죽으셨던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그것이다. 이상한 말 같지만, 믿는데 안 믿어졌다.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죽고 나는 나대로 답답하고…. 여러분도 이럴 때가 있었는가? 교회 다니며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데도, 죄 때문에 항상 답답하고 괴롭지는 안았는가? 믿기는 믿는데 안 믿어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예수님 보혈의 능력이 우리에게 어떤 효력이 있는지를 확실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라는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는 말씀이다. 우리의 눈이 가리워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못 본 것이다. 성경은 눈으로 본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지혜를 주셔야 진리를 깨닫게 된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도 내 보증인으로 살아 계시다는 그 말씀인 것이다. 얼마나 감격적인가? 사형이 확정된 죄수에게 사형집행은 시간문제인데 어느 날 “아무게 000번 죄수 나오라”고 불리면, 그날 사형수는 죽는다. 그와 달리 어느 날 특별사면(特別赦免)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면, 그는 사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떤 수감자들이 대통령 특사(特赦)로 석방되는 것을 더러 볼 수 있다. 만일 정당한 법적 근거가 있는 사면장을 받았다면, 그 죄수는 그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을 것이다. 감옥 문을 나오면서 얼씨구나 하고 춤이라도 추고 싶을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도 그분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특성인 친절과 관용과 인내를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분께서 나타내신 자비와 은혜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도덕적으로 바르게 생활할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치르신 그분의 뜻 깊은 희생에 대해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다른 교파에 속한 사람들도 똑 같이 은혜롭고 자비롭고 인내하고 너그럽고 친절하며 도덕적으로 바르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진실로 우리의 ‘성소 기별’은 어떤 차이점을 만드는가?
아마도 성실함과 신실함의 차이를 만들 것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 글을 수신하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영적으로 회복시키기 원하여 ‘성소의 주제’로 돌아갔던 것이다.

1. 히브리서 10:19-25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관한 어떤 실제적인 메시지가 주어져 있습니까?
답: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히 4:16)로 나아가라고 초청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서 지금 우리 앞에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늘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예수님을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성소로 들어가는 경험은 그분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영혼의 정결을 얻게 할 뿐 아니라, 그분의 변경할 수 없는 율법(참조 히 8:10)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 준다. 이러한 인식은 재림교인들이 말하는 ‘선악 간의 대쟁투’의 맥락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성소로 들어간다. 거기서 우리는 언약궤로 상징된 불변의 약속을 주신 분께 매달린다. 이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포기하도록 이끄는 견해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주에서 끌어내리는 진화론적 사상에 물들지도 않을 것이다.

교훈: 성소의 교리는 우리를 반역으로부터 보호해 주며, 이 반역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는 신실한 남은 백성으로 남도록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다.

부가적용)
어떤 이는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치러주었지만 우리의 선행이 뒷받침되어야 구원이 완전해진다고까지 한다. 정말 그러한가?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값을 갚기에 부족한가? 그래서 예수님의 피에다 또 뭘 보태야 구원이 완전해지는가? 예수님의 공로에 우리가 무엇을 더 보태야 할까? 예수님의 거룩한 피에다 우리의 행위를 감히 더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죄 사함을 얻게 해 주셨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피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피이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지옥에 갈 운명, 영원한 사망에 처할 운명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천국에까지 인도하는 데 넉넉하다. 다만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기까지 하는 것은, 천국 가는 공로를 보태고자 함이 아니라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주님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다. 기쁘고 좋아서 하는 것 이상의 다른 것은 없다. 예수님의 피에다 또 뭘 보태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인 줄로 생각하면 틀림없다. 영원한 속죄가 아니고서는 구원이 안 된다. 이제까지 지은 죄는 사해졌고 앞으로 지을 죄는 사해지지 않았다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속죄가 되지 않는다면, 구약시대에 끊임없이 양을 잡아 제사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끝날 까지 계속해서 죽으셔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를 단번에 속죄제사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효과를 갖게 한 것이다. 한 번 죽으심으로써 영원히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고, 그것으로 죄의 심판은 끝났다. 구약시대 사람들의 죄도 거기서 끝났고, 신약시대 사람들의 죄도 십자가에서 끝났다. 한 번에 영원히 끝났다. 그것이 영원한 속죄이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자 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그 뜻을 좇아 예수님의 몸을 단번에 속죄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은 죄 없이 됐다는 말이다.

금요일(6월 2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제24장 ‘지성소에서의 봉사’(423-426), 부조와 선지자, 제30장 ‘성막과 그 봉사’(350-358).

“성소 문제는 1844년에 있었던 실망의 신비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이 큰 재림운동을 지도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의 위치와 현재의 의무를 가르쳐 줌으로 진리의 전체적인 체계가 상호 연결되고 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 보여 주었다”(각 시대의 대쟁투, 423).
“나는 하늘 성소를 하나님의 거처, 그분의 통치하시는 보좌, 우주의 중심으로 본다. 하늘 성소는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타락과 함께 추가적인 기능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곧 우주적인 반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고대의 희생 제도를 생각할 때 이러한 관점이 지배적일 수 있다. 우리는 죄의 근절을 위한 사역이라는 채색 유리를 통해 하늘 성소를 보는 것이다”(로이 애덤스, 성소, 71).
“나는 하늘 성소를 텅 비어 있는 곳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보좌가 어떤 형태이든 간에, 그곳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옹위하고 있으며, 가장 기쁜 것은 우리의 죄를 넉넉히 해결하실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곳에 계신다! 그분은 하늘 성소에 충만하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계신다. 나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71쪽)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재림 전 심판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하늘 성소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이해와 어떻게 조화를 이룹니까? 그리고 예수께서 심판 날에 우리의 대리인으로 서신다는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파할 수 있을까요?

2.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을 우리 개인의 영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인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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