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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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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7-18 21:49 조회6,5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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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7월26일(안) 일몰(日沒) 오후7시46분

제4과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아들
<푸른 초장(草場)으로>
♡ 1. 위대(偉大)한 그리스도인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그렇게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사람이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人生)에 있어서 가장 중요(重要)합니다.
학생은 스승을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서 인생관(人生觀)과 인생의 목표(目標)가 달라집니다.
여호수아가 모세를 만남으로 그가 모세에 버금가는 위대한 지도자(指導者)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그토록 훌륭한 이스라엘의 선지자의 역할을 한 것은 엘리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敎人)들은 어느 집사(執事)님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또 집사님들은 어느 장로(長老) 님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또 장로들은 어느 목회(牧會)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참으로 좋으신 예수님을 가장 중요한 삶에 주인(主人)으로 모시며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이런 말을 들어 보셨나요?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우리들이 요즘에 눈만 뜨면 늘 상 대하는 것이 있다면 TV와 컴퓨터와 핸드폰들을 눈과 손에 달고 다니며 일상(日常)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도록 중독(中毒)이 되어 살고 있다는 사실(査實)을 절감하십니까?
오늘 하루도 나 자신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더 많은 시간을 할애(割愛)하며 살고 있습니까?

○ 만약에 에덴에서 하와가 뱀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합왕이 이세벨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떠하였을까요?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도 온 종일(終日) 예수님과 동행(同行)합시다.

2. 천하(天下)에 무식(無識)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므로 그 들의 인생관(人生觀)이 바꿔지고 그들의 생애(生涯)가 성경의 기록으로 수천 년 동안은 물론이고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그들의 삶의 위대(偉大)함이 전(傳)하여질 것이며,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以後)에도, 바나바를 만남으로 훌륭한 사역을 하게 되었다.

日 7월20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 1 (막 9:12)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께 어떤 분인가요?
이 질문(質問)에 당신의 진솔(眞率)한 대답(對答)을 듣고 싶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어느 시대(時代)를 막론(莫論)하고 최고의 인격을 갖춘 분은 누구일까요?
최고(最高)의 지도자(指導者)는?
최고(最高)의 선생(先生)은?
인류를 위해 가장 많은 선행(善行)을 베푼 사람은?
가장 거룩하게 살다 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진짜 사랑의 근본(根本)이 되시는 분은 어느 분이시며 누구이실까?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다, 그 모든 종교들 가운데 진정(眞情)한 종교의 이념(理念)이 자신(自身)이외에 남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는 종교가 어디 있을까?
아무리 교리(敎理)나 모양(模樣)이나 사상(思想)이 좋다 하더라도 자신을 위해서 이기적(利己的)인 신앙으로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이기적(利己的)인 종교라고 단정(斷定)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고 또 자신을 낮추면서 이웃을 향해 낮아지고 섬기며 사랑하라는 진정한 사랑의 종교는 이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 밖에는 없다고 단정적(斷定的)으로 말할 수가 있다.

○ 세상에 어느 곳, 어느 종교(宗敎)를 믿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봐도 역사(歷史)를 안다면 나사렛 예수님 같은 분은 없다고 인정(認定)할 것 입니다. 예수님만큼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분도 없으니까요.
예수님은 역사(歷史)의 방향(方向)을 바꿔놓으셨습니다.
성경 말고도,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문(記錄文)은 대략 2000년 전 나사렛 예수께서가 살았었노라고 증명(證明)하고 있다. B.C.는 “Before Christ(그리스도 기원전),” A.D.는 “Anno Domini(그리스도 기원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탄생(誕生)은 예언(豫言)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부터 성경은 이사야 선지자(先知者)를 통해 그의 탄생을 예언하였습니다.
수많은 저자들이 1,500년이라는 방대(方大)한 세월을 거쳐 기록한 구약성경은 300여개의 예언을 통해 예수의 오심을 상세(詳細)하게 설명(說明)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예언(豫言)을 다 들어맞았습니다.(성취(成就)되었습니다.)
(그 분의 기적적(奇蹟的)인 탄생(誕生)과, 죄 없는 삶,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奇蹟)들, 그의 죽음과 부활까지도. 예수가 산 삶, 그가 행한 기적, 그가 한 말 십자가(十字架)의 죽음과 부활(復活), 그리고 승천(昇天))등 이 모든 사실은 예수는 단지 인간(人間)이 아니요, 그 이상(以上) 이었다는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 언제부터인가 노하우(Know how)라는 말을 흔히들 말하고 또한 많이 듣게 되는데 그 노하우(Know how)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면 = “특허(特許)하지 아니한 기술(技術)로써 기술경쟁의 유력(有力)한 수단이 될 수 있는 정보(情報)나 경험(經驗) 따위의 비밀(秘密)정보(情報)를 노하우라고” 한다.
쉽게 이야기 한다면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기술이나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는 말로써 우리들은 직(直),간접(間接)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單語)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노하우(Know how)라는 말보다 → 노 웨이 (Know way) 라는 말이 한 단계(段階) 더 업그레이드 된 말이라고 한다. 즉
노 웨이 (Know way)란 → 노하우 (Know how)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더 중요 하다고 한다. 그러나
노 웨이 (Know way)보다 더 더욱 좋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이 곧 ONLY JESUS (오직 예수)라는 이름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인생의 시작이며 끝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모양으로 인간을 구원(救援)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하여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約束)하신 분이시며 곧 이 땅에 재림(再臨)하신다고 약속(約束)하신 분이시다.

月 7월21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 2 (막 10:42-44)
◎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사는 삶의 3가지 비결(秘結)을 생각해봅시다.
Ⅰ.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Ⅱ 겸손(謙遜)하게 사는 것.
Ⅲ. 사명(使命)을 알고 실천 하는 삶.

☞ 인생 한평생 사는 동안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① 재물(財物)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② 명예(名譽)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요
③ 건강(健康)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덧붙여서 추가(追加)해 본다면
※ ☞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신앙(信仰)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답답한 사람입니다.

☞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장 가치(價値)있게 산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도 가치(價値)있는 삶을 삽시다.
Ⅰ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삶의 출발입니다.
내가 얼마나 빨리 가는 것보다, 내가 어디로 가는가의 방향(方向)이 더 중요한 것처럼,
내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며 어떤 가치(價値)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의미(意味)와 정체성(正體性)은 자신이 배운 것을 통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자(王子)의 가치(價値)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왕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요,
거지의 가치(價値)를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거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알고 신앙(信仰)하는, 사람과, 나의 가는 방향(方向)도 망각(妄覺)하거나(잃어버리고)사는 사람과의 인생의 길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예(例))
1. 어부(漁夫)로, 세리(稅吏)로 그들의 정체성(正體性)이 거기에 머물렀을 때에는 그들은 그대로 어부로 세리로 살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제자로써의 정체성을 알고 나서는 제자로써 삶을 살았다.
2. 침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누가 물으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짧은 단어(單語)이지만 그 의미는 엄청나게 크고 깊습니다.
침례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말”이라 하지 않고 “소리” 라고 말했습니다.
침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기 때문에 “소리”라는 순종의 사역을 하였고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자라고” 길을 닦는 자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은 결코 왕(王)보다 높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내 뒤에 오시는 분 예수님께 모든 관심과 시선(視線)이 왕(王)에게 집중(集中)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Ⅱ. 둘째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사는 삶이란. 겸손(謙遜)하게 사는 것입니다.
1. 겸손(謙遜)함이란 마음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겸허(謙虛)히 받아들이고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모본(模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同等)되신 분이시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形體)를 입고 가장 천(賤)하고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참으로 겸손에 근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죄(罪)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에게 허락된 십자가(十字架)의 사랑과 은혜(恩惠)를 알고 나를 구원(救援)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身分)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내가 겸손(謙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겸손하지 못하고 왜 교만한 이유는 스스로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다고 여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교만한자들의 특징은 내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2. 사도 바울은 고백(告白)합니다. “나는 죄인(罪人)중에 괴수(魁帥)”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사도 바울의 신분이 어떠했습니까.
① 그는 바리새인의 혈통(血統)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율법을 잘 준수하는 그 바리새파에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② 히브리 인중에 히브리인입니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후예(後裔)였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그는 왕족(王族)에 왕손(王孫)이였습니다.
③ 당대(當代)에 가장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철학(哲學)과 수사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넘볼 수없는 당대(當代)의 석학(碩學)이였습니다.
④ 바울은 입법(立法), 사법(司法), 행정(行政)의 3권(權)을 갖이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議員)이였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나는 죄인(罪人)중에 괴수(魁帥)라고” 그에 신분의 정체성을 긍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3. 베드로에 고백을 들어 보셨습니까?
어부(漁夫)로 평생을 살았던 그가 밤이 맞도록 얻은 것이 없는 그 허탈한 그 아침에,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우편(右便)에 그물을 던지라고 할 때 자기는 어부(漁夫)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고, 예수님은 목수(木手)의 아들로써 고기 잡는 데에는 무지(無知)한 사람으로 생각하였지만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였을 때에 두 배(船)가 가득 차도록 고기가 잡혔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 소서 나는 죄인(罪人)이로소이다”라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한 것처럼 겸손해졌습니다.
4. 역사(歷史)에 거룩한 빛을 남긴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경(聖經)속에 기록된 믿음의 거장들의 공통된 한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분명(分明)히 알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① <모세>
모세의 나이 80세에 호렙산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네가 네 민족을 구원(救援)하기위하여 바로에게 가라고 할 때,
모세는 "하나님"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라는 것입니까?
"하나님"내가 40년 전에 애굽사람을 죽이고 애굽에서 도망 나온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 내 나이 80살이나 되는 쓸모없는 노인(老人)이 아닙니까? "하나님" 내가 광야에 살 은지가 40년이나 되어서 애굽의 말도 다 잊어 버렸고 입이 둔하고 혀가 뻣뻣해서 이젠 말도 할 줄 모르는 형편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저 같은 존재가 바로 왕에게 가겠습니까? 즉 모세는 자신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현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현재의 자신을 알고 정체성을 잊고 아주 쓸모없는 사람으로 낮을 대로 낮은 곳으로 전락한 아주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학식과 자신의 능력을 뽐낼 때 쓰시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그때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를 지으시고 너의 입과 혀를 만든 분이 누구인지 깨닫도록 질문하십니다. 이는 오늘의 주제가 되는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를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될 말씀인 것입니다. 모세가 이젠 "하나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전능하신분이요 창주주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났을 때 모세는 바로왕 앞으로 가는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모세가 지난날에 알았던 그 하나님과 지금 만난 "하나님"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인간으로써의 “예수님”을 역사의 한 인물로 알고 그냥 무의미(無意味)하게 책(冊)속의 예수님으로 알고 나의 어려울 때에 혹은 나의 비상 연락용으로 알고 있던 막연한 그 예수님으로 지금까지 신앙했던 일에 금번의 교과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믿음에 거장(巨匠)들의 신앙을 내가 체험하는 교과 공부가 됩시다.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분으로 가슴으로 마음으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Ⅲ. 셋째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사는 삶이란 “사명(使命)”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내는 왜 나의 뜻대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어떻게 해서 지금의 부모님을 통하여 태어나서 지금 내가 여기까지 살아 왔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의 사명(使命)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또한 내가 무엇을 하라고 가정(家庭)에서나 직장(職場)에서나 교회(敎會)에서 나의 위치(位置)와 직분(職分)을 왜 주셨는지?
이 모든 일들이 내가 내 맘대로 하고 있지는 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引導)해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認定)은 하고 있는지? 왜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인도 해주셨는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자기의 사명(使命)을 깨닫게 되며 사명(使命)대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누구이셨습니까? >
◎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居)하신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을 통(通)해서 우리는 영생(永生)의 소망(所望)을 갖일 수 있음에 감사(感謝)와 찬양(讚揚)을 돌리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실(確實)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1. (마태복음 1: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百姓)을 그들의 죄(罪)에서 구원(救援)하실 것이다."<표준새번역개정판>
2. (사도행전 4:12)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救援)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依支)하여 구원(救援)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

3. (사도행전 16:18)…….그 귀신(鬼神)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命)하니, 이 여자(女子)에게서 나오라" 하고 말하니, 바로 그 순간(瞬間)에 귀신(鬼神)이 나왔다.<표준새번역개정판>

4. (사도행전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救援)을 얻으리라 하고<개역한글판>

5. (사도행전 3:6-8)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銀)과 금(金)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 '나사렛 사람'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讚揚)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聖殿)으로 들어갔다.”<표준새번역개정판>

火 7월22일
<罪人들과 稅吏들과 섞이신 예수님> (마 11:19)
◎ 재림교회를 중상모략(中傷謀略)을 일삼는 자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이름의 제목으로 명명된 책의 이름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어두움은 죄나 오류(誤謬)를 뜻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이 어두움은 아주 작은 빛만 있어도 충분히 물리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온갖 비방(誹謗)이나 비하(卑下)의 말을 할지라도 재림교회의 신앙과 교리(敎理)를 성경만으로 뒤엎을 사람이나 집단(集團)이나 교단(敎團)이 아직까지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때 뭍고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하려면 세탁(洗濯)을 해야 합니다.
그 세탁(洗濯)할 때에 세탁기(洗濯機) 속에는 더러운 세탁물(洗濯物)과 함께 깨끗한 세제(洗劑)(비누)를 넣고 함께 세탁기를 작동(作動)해야 만 더러운 것들이 깨끗하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시려고 친히 더러운 죄인들과 함께 섞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깨끗한 세제(洗劑)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들과 함께 섞여주신 것이 그 세제(洗劑)ㅔ가 깨끗한 것처럼 예수님은 조금도 더러움이 없는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水 7월23일
<宗敎的 僞善者들을 暴露하심> (마 23:13-14)
누가복음15장11절부터 32절까지에는 흔히 말하는 탕자(蕩子)의 비유(譬喩)가 나온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가서 허랑 방탕(虛浪放蕩)하며 창기(娼妓)와 놀아난 탕진(蕩盡)한 둘째아들만을 생각하기기 쉽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분노하는 큰아들을 생각해보자 (눅15:25-30)
잃어버린 탕자들 중 큰아들은 계속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잃어버린 존재였다는 사실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유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 또한 잃어버린 큰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큰 아들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이유는 그의 인생에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 아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비록 그가 아버지의 집에 남아있었지만 그 역시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랍비들도, 장로들도, 바리새인들도,) 똑 같은 경우이다.
작은 아들이 굶주린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 왔다. 큰 아들은 배를 주리지는 않았지만 굶주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두 아들 모두 길을 잃었다 한 아들은 육신(肉身)이 굶주린 채, 또 다른 아들은 마음이 굶주린 상태로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했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께로 돌아 와야 했다.
우리는 때로 집나간 둘째 아들의 모습으로, 때로는 집에 남은 첫째 아들의 모습으로 "하나님"앞에 번갈아 가며 서게 된다. 이 두 가지 모습이 우리 안에 공존 하고 있으며 이 모습이 "하나님"아버지로부터 우리를 멀어 지게 한다. 그러면 특별히 큰아들의 어떤 모습이 우리가 "하나님"앞에 온전히 서는데 장애(障碍)가 되는가?

눅 15:28에 “저가 노(怒)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 하거늘”
큰 아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忿怒)와 동생에 대한 분노(忿怒)있었다. 그러면 이 분노(忿怒)는 어디에서부터 시작(始作)된 것인가? 이 질문(質問)에 답(答)은 먼저 우리가 가장 많이 분노하는 현장(現場)이 어디인지 이해(理解)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장 많이 분노(忿怒)하는 장소(場所)는 가정(家庭)과 교회(敎會)이다. 그런데 이곳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模型)으로 허락(許諾)하신 곳이기 때문에 사탄의 영적(靈的)공격(攻擊)이 가장 많이 집중(集中)된 곳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곳은 내 마음의 모(角)가 난 부분(部分)이 드러나는 곳이며 내가 감추고 싶은 부분들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내 맘에 안든 다고 그가 우리를 직접적으로 힘들게 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수상이 망언(妄言)을 해도 우리를 분개하게 만들더라도 우리가 가족의 말 한마디에 상처(傷處)를 입고 화(禍)를 내는 것 보다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정치인이나 유명(有名)인의 말, 또는 행동에 잠시 화를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 가운데 직접 적이고 개인적인 상처로 남지는 않는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정이나 교회 안에서 우리와 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직접적이고 치명적(致命的)인 마음의 상처(傷處)를 주는 사람은 우리기 가깝다고 느끼는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학교(學校)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심각(深刻)하게 화(禍)를 낼 때가 있는데 그 역시 가까운 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아닌가?
우리가 형제와 아버지에 대하여 분노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숨기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때이다.
우리 안에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共存)한다.
하나는 밖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는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밖으로 내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전자(前字)의 나는 남에게 인정받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대외(對外)용 자신(自身)며,
후자(後字)는 나는 남에게 숨기고 싶은 내면용(內面用) 자신(自身)이다.
나 자신은 그 둘을 다 알고 그 둘의 차이(差異)도 잘 안다. 그런데 숨기고 싶은 내 안의 나의 모습은 스스로 거부(拒否)하고 싶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꾹꾹 눌러 버린다. 그렇지만 그 모습은 숨기려 할수록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상(以上)의 것들이 종교적(宗敎的) 위선자(僞善者)들의 마음 밭(田)이며 나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을 온전히 치유(治癒)하는 길이 있다면 곧 죄(罪)를 도말(塗抹)하시는 빛 자체가 되시는 전능자(全能者)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 것을 깨닫고 그것을 터득한 사람이 바울사도가 고백한 “나는 죄인(罪人)중에 괴수(魁帥)”라고 자기 진단을 내렸기에 그는 완전한 특방(特防)으로 처방(處方)을 받고 죄를 도말(塗抹)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드린 사도(使徒)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木 7월24일
<僞善者들을 向한 사랑> (롬 5:8)
◎ 낮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고통(苦痛)을 잘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자신이 겸손하고 바리새인이나 예수님당시의 위선자(僞善者)들이 아니라고 자위(自慰)하고 살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죄인(罪人)인 동시에 위선자들이다.
우리 주위에서 실수(失手)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떠한 눈초리로 보면서 생각하고 질타(叱咤)하고 방심(放心)하는가. 정말로 우리 주위에 한때에 실수(失手)로 인해서 힘들게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이웃들에게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위로(慰勞)와 기도(祈禱)와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實踐)해 보았는가?
우리 교회의 주위에서 한때 실수로 인해서 지금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힘겹게 신앙하는 교우님들에게 조석(朝夕)으로 뜨거운 기도로 사랑을 실천해보자.
위선자들이란 용어가 성경에서 거론되는 자들만이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겠다는 심령으로 나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자.
빈 컵에 공기를 빼려고 노력하면 무척 힘이 들지만 빈 컵에 공기를 제거하는 쉬운 방법은 물을 채우면 쉽게 공기를 뺄 수가 있는 것처럼 위선(僞善)으로 가득찬 나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사랑인 말씀으로 채울 때 자연히 위선(僞善)인 불순물(不純物)은 쉽게 제거(除去)될 것이다.
오늘도 위선자(僞善者)인 것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러한 위선자(僞善者)인 나를 향(向)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함을 우리 이웃에게 전하는 헌신(獻身)으로 반응(反應)하는 우리 모두의 사도들이 됩시다.



<초점(焦點)>

1. 예수님을 단지 역사적(歷史的)으로나 위인(偉人)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과,
그분이 누구인지를 온전히 깨닫는 것의 차이(差異)는 영생(永生)이냐 영멸(永滅)이냐의 차이(差異)이다.

2. 예수님은 창조주로써 우리 가운데 계시는 사랑의 구주(救主)가 되시며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시다.


(행복한 안식일을 맞이 하세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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