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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바울의 전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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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7-04 18:24 조회7,9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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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07월12일(안) 일몰(日沒) 오후7시54분

제2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模樣)으로” 바울의 전도법(傳道法)

<나누고 싶은 말>
☞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種類)의 사람이 있다.
1. 목적(目的)을 가지고 인생(人生)을 살아가는 사람과
2. 목적(目的)없이 인생(人生)을 허비(虛費)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낙수(落水)가 바위를 뚫듯이 분명한 목적을 향(向)해 살아가는 인생(人生)은 반듯이 열매를 거두게 된다.
반면에 흔들리는 과녁을 맞출 수 없듯이, 인생의 분명한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사는 사람은 삶의 진정한 열매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목적(目的)을 발견하여 의미(意味)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 중요(重要)한 질문(質問)에 답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注目)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질문(質問)은 ?
“나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이며
(두 번째) 질문(質問)은 ?
“나는 어떻게 그 일을 할 것인가?” 이다.
성공적(成功的)인 삶은 뚜렷한 목적을 발견(發見)한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목적을 발견한 것만으로는 충분(充分)하지는 않다. 반드시 목적을 바른 방법으로 이루어 가야 한다.
목적을 발견했다 할지라도 바른 방법을 활용하여 그것을 이루어 가지 못하면 그 목적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목적에 대한 합당한 대가(代價)를 지불해야만 좋은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 인생의 원리이다.
따라서 목적을 발견한 사람은 반드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대답 할 수 있어야 한다.
①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②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맡겨진 일을 어떻게 해 갈 것인가?
이 두 질문 앞에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사도 바울은 서두(序頭)에 기록한 대로의 그의 인생을 산 사람으로 성경에서 확인 할 수가 있다.
우리 모두가 깨어 기도(祈禱)하며 나의 삶에 접목(椄木)해 봅시다.

日 7월6일
<바울이 선교사업(宣敎事業)에 가담(加擔)함> (행 11:19-26)
◎ “제자들이 박해(迫害)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추방(追放)된 후(後)에, 복음기별(福音奇別)은 팔레스틴 지역(地域) 너머 지방(地方)들에 신속(迅速)히 전파(傳播)되었고 작은 예배소들이 많이 생겨 중요한 중심지를 이루게 되었다. 그 당시 수리아의 수도(首都)였던 안디옥이 있었다.

사람이 붐비는 그 도시(都市)는 광범위(廣範圍)한 무역(貿易)의 중심지(中心地)였으므로 다양(多樣)한 나라의 많은 백성들이 그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 외(外)에도 안디옥은 건강(健康)에 좋은 위치(位置)와 아름다운 주위(周圍)환경, 그리고 부(富)와 교양(敎養)과 세련미(洗練味)를 찾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안락(安樂)과 쾌락(快樂)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휴양지(休養地)로 잘 알려져 있었다. 사도시대(使徒時代)에 있어서 안디옥은 사치(奢侈)와 죄악(罪惡)의 도시(都市)가 되었다.
안디옥에서의 바나바의 수고는 크게 축복을 받아서 신자(信者)의 수효가 많이 증가(增加)하였다.
사업이 발전하자 바나바는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섭리(攝理)가운데 사업을 진전(進展)시키기 위하여 적절(適切)한 조력자(助力者)의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바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갔는데, 그는 얼마 전 예루살렘을 떠나 “전에 잔해(殘害)하던 그 믿음”을 전파(傳播)하면서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 수고하고 있었다(갈 1:23, 21).

바나바는 바울을 찾아 목회사업(牧會事業)의 동역자로서 그와 함께 돌아갈 것을 권유(勸誘)하는데 성공(成功)하였다.
사람이 붐비는 도시 안디옥에서 바울은 가장 좋은 일터를 발견하였다.
바울의 학식(學識)과 지혜(智慧)와 열심(熱心)은 그 문화도시의 주민들과 자주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힘 있는 감화(感化)를 끼쳤으므로, 그는 바나바가 필요로 한 바로 그 조력자임이 증명되었다.
일 년간 이 두 제자는 충성스럽게 봉사하는데 연합하여 수고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구속주(救贖主), 나사렛 예수의 구원(救援)하는 지식(知識)을 전달(傳達)하였다.
제자들이 최초(最初)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곳도 안디옥이었다.

그들의 설교(說敎)와 가르침과 담화(談話)의 주제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과 같이 계심으로 축복을 주셨던 그분의 지상 봉사 기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계속적으로 자세히 열거하였다. 끈기 있게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병(病)고치는 이적(異蹟)을 강론(講論)하였다. 떨리는 입술과 눈물어린 눈으로 그들은 동산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민, 배반당하심, 심문 그리고 처형, 원수들이 그분께 가한 모욕적 처사와 고문을 참으신 그 인내와 겸손, 그리고 당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하나님의 동정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타락한 인류를 위한 중보자로서 하늘에서의 그분의 사업 등은 그들이 명상하기 좋아한 주제들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고로 이방인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름은 지당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바나바와 연합(聯合)하여 수고한 안디옥에서의 경험(經驗)은 바울로 하여금 주께서 이방(異邦) 세계를 위한 특별한 사업(事業)에 그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굳게 하였다.
바울의 개심(改心)시에, 주께서는 그가 이방의 목자(牧者)가 되어 그들로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權勢)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罪赦)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행 26:18)도록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아나니아에게 나타난 천사(天使)도 바울에 대하여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고 말했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후에 자기의 그리스도인 경험 가운데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는 동안 그에게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행 22:21)고 명한 하늘에서 온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바울에게 이방(異邦) 세계의 넓은 선교지(宣敎地)에 들어가도록 사명(使命)을 맡기셨다.

그 광범위하고 어려운 사업을 위하여 그를 준비시키고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 자신과 밀접한 연결을 맺게 하셨고 황홀(恍惚)해진 그의 시야에 하늘의 아름다움과 영광의 광경을 열어 보이셨다. 그에게 “영세 전부터 감취”(롬 16:25)었던 “비밀”, 즉 “그 뜻의 비밀”(엡 1:9)을 알게 하는 사업이 맡겨졌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5-11).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의 신자들과 함께 머물던 그 해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고를 크게 축복해 주셨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아직 복음 사업을 위하여 공식적으로 안수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신앙 경험에서 하나님께서 그 어려운 선교 사업을 수행하는 일을 위탁하시려는 지점에 도달하였다.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교회라는 기관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모든 편의를 필요로 하였다. (사도행적 155-160)

◎ 사울이었던 바울은 한때 그리스도인을 열심히 핍박(逼迫)하고 박해(迫害)하고 파괴(破壞)했든 사람이다.
그가 이제는 선교사가 되어 교회를 부흥케 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도 그의 삶 전체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첫째로 삼지 않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力士)가 우리에게 임(臨)하도록 준비된 삶을 살자.

月 7월7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模樣)으로”> (고전 9:22)
◎ 1961년도 이후에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라는 기관에 근무하는 특수요원(特殊要員)들이 있었다.
이들은 만나는 상대에 따라서 대화(對話)와 처세가 바뀐다,
즉 엿장수와 만나면 고물(古物)에 대한 이야기와 선생님들과 만나면 학생과 선생들에 관한 이야기와 군인(軍人)들하고 만나면 군대이야기와 법조계 사람들과 만나면 법조계(法曹界)의 이야기와 운동선수들과 만나면 운동에 관한 이야기 등등 만나는 상대에 따라 참으로 다양(多樣)하게 처신하는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사람이라는 것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경험(經驗)하였으리라.

◎ 바울의 일하는 방법(方法)
우리는 그 사도(使徒)가 단 한 점의 원칙(原則)도 희생(犧牲)시키지 않았음을 안다.
그는 인간의 궤변(詭辯)과 격언(格言)으로 정로(正路)를 이탈(離脫)하는 것을 용납(容納)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계명(誡命)으로 교훈(敎訓)을 삼아 가르치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들이나 확신하는 것들과 의견을 같이하지 않았다. 부정(否定)과 범죄(犯罪)가 주도권(主導權)을 잡고 앞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냉랭해지는 것을 용인(容認)하지 않았다. 대단한 열심(熱心)과 열성(熱性)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만 우리 믿음의 어떤 국면은 우리가 취급(取扱)하는 요점(要點)을 가지고 표현(表現)하면 즉시 편견(偏見)을 일으킬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에 기울인 충성으로 하면 어떤 사람보다도 열성적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구약 성경을 완전히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상징들과 그림자들을 자세히 설명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높일 수 있었고,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과 인류를 위하여 행하신 그분의 특별한 일을 말할 수도 있었고, 그가 탐구해 온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이 본 일이 없는 예언들에 관해서도 매우 귀중한 빛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기분을 상해 놓기를 원하지 않았다. 기초가 잘 놓여지고 때가 이르러 그들의 마음이 부드럽게 되면 요한의 말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이방인들에게 그는 그리스도를 설교하되 그리스도가 그들의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하였다.
처음부터 율법에 관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선물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매우 값비싼 희생을 치르신 구속주의 사업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마음이 뜨거워진 후에 그는 가장 단순하게 그리고 가장 웅변적으로 모든 인류 곧 유대인과 이방인(異邦人)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屈伏)시킴으로써 구원(救援)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마음이 녹고 굴복(屈伏)되며 그들은 자신을 주께 바쳤으며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의 순종의 시금석(試金石)으로 제시(提示)하였다. 이것이 그가 영혼(靈魂)을 구원하는데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그가 성급(性急)하고 허술하게 말씀을 취급(取扱)하였더면 유대인이나 이방인(異邦人)이나 간에 복음(福音)을 전(傳)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방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진리를 보게 하였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왜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었겠느냐? 는 질문을 하고 그 다음 그는 표상으로 돌아가서 구약 성경을 죽 섭렵(涉獵)해 내려오면서 율법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나타내어 보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께 회개케 하고 율법으로 돌아오게 하였다(특별증언 시리즈 A. 6. 54, 55).” (화잇주석, 고전 9:20-23-24-27)

◎'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市民權)을 가진(행22:26-28)자(者)로, 유대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격(嚴格)한 교육을 받았고(행22:3). 바리새파에 속한 철저한 유대교도로서 기독교 박해(迫害)에 앞장섰던 사람으로서 동(同) 시대(時代)에 엘리트였다. 바울은 학문(學文)과 이론(理論)과 철학(哲學)등 해박(該博)한 지식인(知識人)이였다. 그가 지난날에 습득(習得)한 모든 지식(知識)과 지혜(智慧)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引導)하는 도구(道具)로 사용토록 섭리(攝理)하셨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확인한바와 같이 바울은 진리(眞理)의 원칙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전도 대상에 따라 그 차원에 맞는 말씀으로 전도의 방법을 활용하였다. 이를 오늘날 우리도 적극응용하자.

火 7월8일
<철학자(哲學者)들에게 전도(傳道)함> (행 17:18-34)
◎ 철학 (哲學, 고대 그리스어 : Φιλοσοφία)이란 ?
① 인간(人間)과 세계(世界)에 대한 근본원리(根本原理)와 삶의 본질(本質)따위를 연구(硏究)하는 학문(學文)으로. 흔히 인식(認識), 존재(存在), 가치(價値)의 세 기준(基準)에 따라 하위(下位)분야(分野)를 나눌 수 있다
② 철학은 전제(前提)나 문제(問題)의 명확화(明確化), 개념(槪念)의 엄밀화(嚴密化), 명제(命題)들 사이의 관계(關係)의 정리(正理) 등 이성적(理性的)인 사고(思考)를 통(通)하여 여러 가지 주제(主題)에 관(觀)해 논(論)하는 학문(學文)을 말하며, 고대(古代)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 지혜(智慧)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由來)하였는데, 여기서의 지혜는 일상생활(日常生活)에서의 실용적(實用的) 지식(知識)이 아닌 인간(人間)자신(自身)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관조적(觀照的) 지식(知識)을 의미(意味)한다.

이를테면, 일상적(日常的)으로 세계관(世界觀), 인생관(人生觀), 가치관(價値觀)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대강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반적(一般的)인 정의(定義)로서의 철학은 어느 문화권(文化圈)에나 오래전부터 존재(存在)하여 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문자(文字)가 없는 사회에서도 세계에 대한 인식(認識)은 발견(發見)된다.
서구화(西歐化) 이후(以後)에 일반적(一般的)으로 한국에서 “철학”이라 함은 고대(苦待) 그리스의 철학자(哲學者)들로부터 시작하는 서양철학(西洋哲學)의 전통(傳統)을 의미(意味)한다.
철학과 깊은 관계(關係)를 가진 학문(學文)으로는 신학(神學), 사회학(社會學), 심리학(心理學), 인류학(人類學), 역사(歷史), 교육(敎育), 수학(數學), 물리학(物理學), 법(法) 등이 있다

◎ <참고로 철학과 관련된 제목들을 보자>
개념론 · 개연론 · 경험론 · 계몽주의 · 공리주의 · 관념론 · 교부철학 · 구성주의 · 기계론 · 실증주의 · 도구주의 · 명목론 · 목적론 · 물질주의 · 실재론 · 분석철학 · 비판론 · 상대론 · 생기론 · 선험주의 · 스콜라 철학 · 스토아 · 실용주의 · 역사주의 · 유물론 · 직관론 · 쾌락주의 · 탐미주의 · 플라톤주의 · 신플라톤주의 · 합리론 · 허무주의 · 실존주의 · 구조주의 · 탈구조주의 · 마르크스주의 · 후기마르크스주의
◎ 영향력(影響力) 있는 철학자(哲學者) 들

☞ 서양 (西洋) 철학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에피쿠로스학파 · 스토아학파 · 플로티노스 · 피론 · 키케로 · 아우구스티누스 · 보이티우스 · 알 파라피 · 안셀무스 · 피에르 아벨라르 · 아베로에스 · 마이모니데스 · 토마스 아퀴나스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둔스 스코투스 · 라몬 루 · 오캄 ·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 몽테뉴 · 데카르트 · 홉스 · 파스칼 · 스피노자 · 존 로크 · 니콜라 말브랑슈 · 라이프니츠 · 잠바티스타 비코 · 라메트리 · 조지 버클리 · 몽테스키외 · 흄 · 볼테르 · 루소 · 디드로 · 헤르더 · 칸트 · 하만 · 벤담 · 슐라이어마허 · 피히테 · 헤겔 · 셸링 · 슐레겔 · 쇼펜하우어 · 키르케고르 · 포이어바흐 · 소로우 · 에머슨 · 밀 · 마르크스 · 바쿠닌 · 니체 · 솔로비에프 · 제임스 · 딜타이 · 퍼스 · 프레게 · 후설 · 베르그송 · 카시러 · 존 듀이 · 크로체 · 젠틸레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화이트헤드 · 러셀 · 비트겐슈타인 · 에른스트 블로흐 · 에볼라 · 루카치 · 하이데거 · 카르나프 · 바타유 · 아도르노 · 베유 · 사르트르 · 피아제 · 아인 랜드 · 보부아르 · 모리스 메를로-퐁티 · 호르크하이머 · 하버마스 · 해나 아렌트 · 카뮈 · 카스토리아디스 등등.........

☞ 동양 (東洋) 철학자
고타마 붓다 ― 묵자 ― 공자 ― 노자 ― 라지 ― 맹자 ― 열자 ― 순자 ― 한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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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哲學)이란 참으로 복잡하다.
철학을 공부하거나 설명(說明)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처럼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철학들로 인해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키 위하여 영혼의 갈급한 인생들을 온갖 우상 숭배와 범신론적 사상과 진화론 불가지론 또 회의론 등등의 사상을 고취 시키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는 교훈 하여 이들로 붙들려 있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傳)하자는데 의의(意義)가 있다.
인생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스스로 해결(解決)한다는 사상으로 즉 창조주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결론이다.

◎ 복음(福音)의 단순성(單純性)과 세상 학문(學文)의 대비(對比) (고전 2:1-4)
전도(傳道)를 마칠 즈음에 바울은 전도의 결과를 챙겨 보았다.
그의 웅변적(雄辯的)인 변론(辯論)을 경청(敬聽)한 그 큰 군중 가운데서 단 세 사람의 회심자만 얻었을 뿐이었다. 그 때부터 그는 단순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였다.
세상 학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과 복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이라는 것을 확신(確信)하였다. (리뷰 1911. 8. 3).” (화잇 주석, 행 17:34)
◉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할 때와는 달리 이교(異敎) 철학자(哲學者)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용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익숙한 문화와 진리를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참 진리와 연결시켜 전도(傳導)하였다.

水 7월9일
<마르스 언덕에서의 기별> (행 17:18-34)
◉ 저 유명한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불멸(不滅)의 설교(說敎)를 하였다.
이것은 장엄(莊嚴)한 역사(歷史)의 사건(事件)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겠는 가 (행 17:32)
바울은 그날의 설교를 아덴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오늘날 여러분과 나에게도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주가까이 계신다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다를 수 없을 만큼 멀리 떠나 계시는 것같이 보이나,
그 분은 우리의 기도(祈禱)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 들으시는 분이시다.
◉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說敎) 요지(要旨) (행 17:22-34)
① 아덴 사람들은 범사(凡事)에 종교성(宗敎性)이 많다.
②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神)에게 단(壇)을 만들어 섬기고,
③ 하나님은 천지(天地) 만물(萬物)의 창조주(創造主)이시며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으신다.
④ 하나님은 만민(萬民)에게 생명(生命)과 호흡(呼吸)과 만물(萬物)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
⑤ 인류의 모든 족속(族屬)을 한 혈통(血統)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居)하게 하시고
⑥ 년대(年代)를 정(定)하시고 거주(居住)의 경계를 한(限)하셨음은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發見)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시다.
⑦ 하나님은 금은동철목석(金銀銅鐵木石)에다 사람들이 기술(技術)고안(考案)하여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기지 말라
⑧ 죽은 자의 부활(復活)을 듣고 기롱(譏弄)하기도 하고 이일에 다시 듣게다 고도 하니 이에 저희 가운데서 바울이 떠나매
⑨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중에 “아래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하는 여자와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즉 자신의 웅변적(雄辯的)인 변론을 경청한 큰 군중 가운데에서 단 세 사람만 얻었을 뿐이다,
◉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의 열렬한 설교(說敎)를 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복음에 결심(決心)자는 친한 사람 단 3명뿐이었다.
이로 인(因)하여 바울이 터득한 것은 세상 학문(學文)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과,
오직 복음(福音)만이 구원(救援)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이라는 것을 바울은 확신(確信)하게 되었다.

◉ 사도 바울은 이교도(異敎徒)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傳導)할 때에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익숙하게 잘 아는 사실(査實)로부터 시작(始作)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진리(眞理)로 전환(轉換)해 갔다.

木 7월10일
<바울의 교회(敎會) 개척(開拓) 방법(方法)> (롬 15:18-23)
◉ 바울의 선교 전략은
1. 로마의 중요 도로(道路)와 항구(港口)에 위치(位置)한 중심지(中心地)를 선별(選別)함
2. 먼저 중심지(中心地)에 등대(燈臺)가 될 교회를 설립(設立)하고
3. 새 그룹들의 신자(信者)들은 중심지(中心地)에서 주변지역(周邊地域)으로 복음(福音)을 전달하도록 계획(計劃)함
4. 지역(地域)선교의 사역(使役)은 새 신자(信者)를 통해서 시작(始作)되었다.
5. 바울과 실라의 2차 선교(宣敎)여행(旅行)때는 마게도냐에서 가장 큰 도시(都市)인 데살로니가에서 교회를 세웠다.
6. 도로(道路)가 교차(交差) 하는 곳 주요 항구(港口)가 있는 곳 등 요지(要地)에 교회를 세움
7. 신자(信者)들의 튼튼한 모임은 하나의 견실(堅實)한 중심점(中心點)될 것이다.
8. 바울이 세운 교회는 다른 교회의 본(本)이 되었다.

◉ 교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헬라어 단어는 본래 그리스도교의 용어(用語)아니었다.
원래의 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여러 장소에서 사람들의 모임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에클레시아”를 사용 했던 것이 였지만,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에클레시아”는 단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것 이상의 의미(意味)가 담겨져 있다. 즉 교회는 특별한 사역(使役)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복음을 가지고 각자에게 할당된 지역(地域)사회로 뻗어나가야 된다.

◉ 바울의 교회 개척(開拓)방법은 먼저 도시(都市)의 중심(中心)에 중심적(中心的)인 교회(敎會)를 세우고 그 곳을 거점(據點)으로 해서 전 지역(地域)으로 복음을 확산(擴散)시켜 나가는 전략(戰略)이었다.

<초점(焦點)>
1. 진정(眞情)한 사도(使徒)란 복음(福音)전달자(傳達者)를 말한다.
2. 복음전도는 세상의 학문과 경력과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依支)할 때 가장 효과적이 된다.
3. 전도(傳導)는 대상과 형편에 따라 다양(多樣)한 방법을 개발(開發)하여 본(本)을 보인 바울의 경험(經驗)을 적용(適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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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 <복음의 사자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형제들로부터 안수를 받은 후에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갔다. 이와 같이 사도들은 그들의 최초의 선교 여행을 시작하였다. 구브로는 스데반의 죽음에 뒤따른 박해 때문에 신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도망한 곳들 중의 하나였다.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에 와서 “주 예수를 전파” (행 11:20)한 것도 구브로에서 간 것이었다. 바나바 자신도 “구브로에서 난” (행 4:36) 사람인데, 이제 그와 바울은 바나바의 친척인 마가 요한과 함께 이 섬 지방을 방문하였다.
마가의 어머니는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이었으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집은 제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언제나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편안한 휴식을 얻었다. 마가가 그들의 선교 여행에 동행할 것을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의한 것도 사도들이 그의 어머니의 집을 방문하던 때였다. 마가는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느꼈으며 복음 전도 사업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고 싶었다.
살라미에 도착하여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하였고,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썼다.
사단은 투쟁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세워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악의 군대는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임명된 대리자들과 끊임없는 싸움을 일으키며, 이 흑암의 세력은 특히 신망과 순수한 성실성을 가진 사람들 앞에 진리가 선포될 때에는 강력하게 활동한다.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복음 기별을 듣고 있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총독은 그들이 전하러 온 기별을 듣고자 사도들을 불렀으나 박수 엘루마를 통하여 일하던 악의 군대는 열심히 악한 제안을 함으로 그를 신앙에서 떠나게 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타락한 원수는 만일 개심하면 하나님의 사업에 효과적인 봉사를 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자기 대열에 잡아 두고자 항상 노력한다. 그러나 충성된 복음 교역자는 원수의 손에 패배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이는 그가 모든 사단의 감화를 저항할 수 있도록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단에게 철저히 포위되어 있었으나, 바울은 용기를 가지고 원수의 대리자로 일하는 사람을 책망하였다. 사도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박수가 복음의 진리에 대한 증거로부터 그의 눈을 감았으므로, 주께서는 의분으로 그의 육신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 한낮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셨다. 이처럼 소경이 되게 한 것은 그가 경고를 받아 회개하여 그처럼 크게 범죄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게 하려고 한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에게 이른 혼란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대적하는 그의 간교한 계책을 바꾸는 데 아무 효험이 없었다. 그가 눈먼 가운데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 사도들이 행한 이적이 엘루마의 비난대로 요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증명되었다. 총독은 사도들이 가르친 교훈이 진리임을 확신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엘루마는 교육받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사단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이들은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교활한 원수를 만날 것이다. 사단이 영혼을 기만하는 데 성공적인 도구가 되도록 훈련시킨 자들은 때때로 유식한 자도 있겠지만 흔히는 무식한 자가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그분의 능력의 권세로서 자기의 직무를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사의 의무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사단의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주의 이름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여행을 계속하여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갔다. 그들의 길은 고생스러웠고, 그들은 고난과 궁핍을 당하였으며 또한 도처에서 위험에 둘리워 있었다. 지나는 촌락과 도시에서 그리고 외로운 큰길에서, 그들은 보이는 위험과 보이지 않는 위험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를 배웠다. 그들의 마음은 멸망하는 영혼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충만하였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충실한 목자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안일과 편의를 생각지 아니하였다. 자아를 잊어버린 그들은 피곤하고, 주리고, 추울 때에도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한 가지 목적, 곧 양의 우리에서 떠나 방황하는 자들의 구원만을 바라보았다.
마가가 공포와 낙담에 억눌려 한동안 전심으로 주의 사업에 헌신하려던 그의 목적에서 흔들린 것도 이 곳에서였다. 고난에 익숙하지 않은 마가는 그 길의 위험과 궁핍으로 낙심하였다. 그는 좋은 환경 아래서는 성공적으로 일하였으나, 이제 흔히 개척자들이 당하는 반대와 위험 가운데서 훌륭한 십자가의 군병으로 고난을 견디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는 위험한 박해와 반대를 용감한 마음으로 맞아야 할 것을 배워야 하였다. 사도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에 마가는 더 큰 어려움을 우려하고 겁이 나서 용기를 완전히 잃어 앞으로 나아갈 것을 거절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이탈은 바울로 하여금 한동안 마가를 나쁘게 생각하여 혹독하게 판단하게 하였다. 한편 바나바는 그가 경험이 없는 까닭이라고 그를 변명하였다. 그는 마가가 목회 사업을 포기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이는 그가 마가에게서 그리스도를 위한 유용한 일꾼이 될 자격이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후년에 마가를 위한 그의 애씀은 넘치는 보상을 받게 되었으며 이는 그 젊은이가 자신을 주님과 어려운 지방에서 복음 기별을 선포하는 사업에 아낌없이 바친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축복과 바나바의 현명한 훈련 아래, 마가는 쓸모 있는 일꾼으로 자라났다.
바울은 후에 마가와 화해하고 그를 동역자로 영접하였다. 또한 바울은 마가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동역자요 “나의 위로”(골 4:11)라고 골로새인 들에게 추천하였다. 바울은 그가 죽기 얼마 전에 마가에 대하여 자기의 “일에 유익하”(딤후 4:11)다고 말하였다.

마가가 떠난 후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 디아에 있는 안디옥을 방문하여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 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말하라는 초청을 받아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놀라운 설교가 뒤따랐다. 바울은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신 때로부터 시작하여 주께서 유대인을 다루신 방법의 역사를 말하고 또한 구주께서 다윗의 자손을 약속하심을 말하고는 담대히 선언하였다.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침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능력을 가지고 예수를 “사람들의 구주요 예언의 메시아”라고 전파하였다.
이렇게 선언한 후에 바울은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구주를 거절함에 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고 사도는 선언하였다.
사도는 계속하여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제 익숙한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을 밝히 말하고서 바울은 회개와 그들의 구주 예수의 공로를 통한 죄 사함을 그들에게 전파하였다. 그는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이 바울의 말에 함께하셨으므로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구약의 예언들을 통한 사도의 호소, 그리고 그 예언들이 나사렛 예수의 봉사에서 성취되었다는 그의 선언은 약속된 메시야의 초림을 사모하는 많은 영혼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된 설교자의 그 확신의 말은 육체를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헤아림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도 희망과 기쁨을 주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나가자 이방인들이 간청하기를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로 설교해 달라고 하였다”(영어성경). “폐회한 후에” 그날 그들이 들은 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의 설교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난 그 관심으로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셨음을 크게 기뻐하였고, 감사한 마음으로 설교 말씀을 들었다. 믿는 사람들은 열심히 복음 기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으므로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여러 세기 전에 영감의 붓은 이와 같이 이방인들이 돌아올 것을 묘사하였으나 이 예언의 말씀은 매우 희미하게 이해되어 왔다. 호세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그리고 계속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고 말하였다(호 1:10, 2:23).
구주께서는 친히 당신의 지상 봉사기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언하셨다. 포도원의 비유에서 그분은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나아가 “모든 족속”을 가르치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들은 경고 받지 못한 사람이 없도록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였다(마 28:19; 막 16:15).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로 향한 바울과 바나바는 그밖에 다른 곳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하여도 수고하기를 쉬지 아니하였고, 어디서나 청중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후에는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에서, 에베소에서 그리고 다른 중요한 중심지들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힘써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그들의 주된 노력을 이교도 지역에서 참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거의 알지 못하거나 전혀 모르는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쏟았다.
바울과 그의 동료 일꾼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일하였다.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들의 끈기 있는 봉사를 통하여, “전에 멀리 있던” “외인”과 “손”이었던 그들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으며, 그분의 속죄의 희생을 믿는 신앙을 통하여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엡 2:12, 13, 19).
믿음으로 전진하면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교사들이 무시했던 이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수고하였다. 계속적으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로 높였고 신자들에게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 믿음에 굳게 서”(골 2:7)라고 권고하였다.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확고한 기초가 되신다. 이 산 돌 위에 유대인과 이방인은 다 같이 세움을 입었다. 그것은 만인에게 충분한 만큼 넓고, 온 세계의 걱정과 근심을 지기에 충분할 만큼 튼튼하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분명히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의 봉사 말년에 복음 진리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 굳게 선 이방 신도들의 무리에게 편지하면서 사도는 기록하기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고 하였다.
복음 기별이 비시디아에 전파될 때에 안디옥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맹목적인 편견으로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그 지방에서 “쫓아 내”었다.
사도들은 이러한 취급에 낙심하지 아니하였고,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 12).
복음 기별이 계속 전파되었으므로, 사도들이 용기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수고로 안디옥에 있는 비시디아인들은 큰 축복을 얻었고, 그들이 잠시 그 사업을 홀로 감당하도록 맡긴 신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해”였다.

제 18 장
<이교도 가운데서 전파함>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갔다. 그들은 안디옥에서처럼 이곳에서도 동족의 회당으로부터 일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현저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고니온에서도 사도들이 수고한 다른 곳에서처럼,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사명을 피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까닭이었다. 반대와 시기와 편견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사업을 계속하였고,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이와 같은 증거들이 마음을 열어 죄를 깨닫는 이들에게 힘 있는 감화를 끼쳤고, 복음으로 개종하는 이들이 증가하였다.
사도들이 전한 기별이 인기가 올라가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시기와 증오로 충만하여 그 즉시 바울과 바나바의 노력을 중단시키고자 결심하였다. 그들은 거짓되고 과장스럽게 보고를 함으로 당국자들로 온 성읍에 폭동의 선동 위험이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그들은 많은 무리가 사도들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하였고 그것은 은밀하고 위험한 음모라고 암시하였다.
이러한 비난의 결과로 제자들은 빈번히 당국자들에게 소환되었으나, 그들의 명확하고 분별력 있는 변론과 그들이 가르치는 일에 대한 아주 침착하고 종합적인 진술로 당국자들은 감화를 받아 오히려 큰 호의를 갖게 되었다. 비록 행정 장관들이 거짓 진술로 인해 그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그들의 말을 듣자 감히 그들을 정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정숙하게 하고,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 되게 한다는 것과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 성읍의 도덕과 질서가 향상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들이 당한 반대를 통하여 진리의 기별은 크게 대중성을 얻게 되었으며, 유대인들은 새로운 교사들의 사업을 좌절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이 그 새 신앙의 교인 수를 더 늘려 놓은 것을 보았다.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잇”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사태가 그렇게 전개되는데 매우 분노하여, 폭력으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들은 무식하고 야비한 군중의 비열한 격정을 자극시킴으로 폭동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고, 그것을 제자들의 가르침의 탓으로 돌렸다. 이러한 거짓 비난으로 그들의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 그들은 행정 장관들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아니하고 폭도들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 그들의 수고를 끝내려고 결심하였다.
비록 불신자들이지만 사도들의 친구들은 그들에게 유대인들의 악한 음모에 관하여 경고하고 불필요하게 폭도의 분노에 자신을 노출 시키지 말고,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당분간 신자들이 홀로 그 사업을 수행하도록 맡기고 은밀히 이고니온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최종적인 이별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흥분이 가라앉으면 돌아와서 시작한 그 사업을 마치려고 계획하였다.
각 시대의 모든 나라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고의로 하늘의 빛을 거절하기로 작정한 사람들로부터 참혹한 반대를 당하였다. 종종 허위 진술과 거짓으로 복음의 원수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백성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문들을 닫아 버림으로 승리를 얻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문들이 영원히 닫힐 수는 없었으며, 때때로 하나님의 종들이 그들의 일을 다시 계속하려고 돌아올 때에, 주께서는 당신의 이름의 영광에 대한 기념비를 세울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힘 있게 일하셨다.
이고니온에서 박해로 내어 쫓김을 당한 사도들은 루가오니아에 있는 루스드라와 더베로 갔다. 이 성읍들은 주로 이교도들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그들 중 더러는 즐겨 복음 기별을 듣고 받아들였다. 사도들은 유대인의 편견과 박해를 피해 이러한 곳들과 인근 지역에서 일하기로 결정하였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기는 했으나 루스드라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다. 많은 루스드라 주민들은 쓰스에게 봉헌한 신전에서 예배하였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 성읍에 나타나 루스드라 사람들을 모으고 복음의 단순한 진리들을 설명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 교리들을 쓰스를 예배하는 그들 자신의 미신적 신앙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사도들은 이 우상숭배자들에게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 구주이신 그의 아들에 대한 지식을 나누어 주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첫째로 하나님의 놀라운 업적들, 곧 해와 달과 별들과 아름다운 계절의 순환질서, 눈 덮인 장엄한 산들, 높은 수목들 그리고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 솜씨를 드러내는 또 다른 자연의 경이들에 주목을 끌게 하였다. 이와 같은 전능자의 업적을 통하여, 사도들은 이교도들의 마음을 크신 우주의 통치자를 묵상하도록 인도하였다.
창조주에 대한 이 기본 진리를 설명한 사도들은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인간 자녀들을 사랑하신 까닭에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생애와 봉사, 그분께서 구원하러 오신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심, 심문받으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과 승천, 그 곳에서 인류의 중보자가 일하심 등을 말하였다. 이와 같이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한번은 바울이 백성들에게 병자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낫게 하신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때에, 청중 가운데서 한 앉은뱅이를 보았는데 그는 바울을 주목하고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믿었다. 바울의 마음은 이 고통당하는 자를 동정하게 되었고,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분별하였다. 바울은 우상숭배자들인 청중 앞에서 그의 발로 일어서라고 그에게 명하였다. 지금까지 이 앉은뱅이는 앉은 자세밖에 취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는 바울의 명령을 즉시 순종하여 평생 처음으로 자기 발로 일어섰다. 이와 같은 믿음의 노력에 능력이 임하였고, 이제까지 앉은뱅이였던 그는 “뛰어” 걸었다.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였다. 이 말은 때때로 신들이 세상을 방문한다는 그들의 유전과 일치하였다. 그의 덕망 있는 모습, 품위 있는 태도 그리고 그의 얼굴에 나타난 온화함과 자비스러움 때문에 그들은 바나바를 신들의 아비 “쓰스”라고 불렀다. 그들은 바울을 “허메”라고 믿었는데, 그것은 바울이 열렬하고 활동적이며, 웅변적으로 경고와 권고의 말을 하고, “그 중에 말하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감사를 표시하고 싶어서 루스드라인들은 사도들을 영화롭게 하라고 쓰스 신당의 제사장을 설복하였다. 그래서 그는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였다. 물러가 쉬기를 구했던 바울과 바나바는 이러한 준비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은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온 큰 군중들의 음악 소리와 열광적인 외침을 주목하게 되었다.

사도들은 그 방문의 동기와 거기에 따른 흥분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일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갔”다. 바울은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능가하는 높고도 우렁찬 음성으로 그들로 주목하기를 요구하자 갑자기 그 소동이 멎었다. 그는 말하기를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고 하였다.
그들을 신이라고 하는 것을 확고히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경배하기에 합당한 유일한 대상이신 참 하나님께 백성들의 마음을 향하게 하려는 바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드리려는 이교도들의 의도를 돌이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 사람들은 진실로 신이라는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 확고하고, 열성이 너무도 컸으므로, 그들은 저희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싫어하였다. 성경에는 그들을 “겨우 … 말”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루스드라인들은 저희가 사도들이 행한 이적의 능력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전에 결코 걸을 수 없었던 앉은뱅이가 온전한 건강과 힘을 얻은 것을 보았다. 바울 편에서 많이 설득하고, 하늘의 하나님과 크신 치료자이신 그분의 아들의 대표자로서의 그 자신과 바나바의 사명에 관하여 주의 깊이 설명한 후에야 백성들은 겨우 설득되어 그들의 목적을 포기하였다.
루스드라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의 노력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악의로 말미암아 갑자기 제지되었다. 그들은 루가오니아 사람들 가운데서 사도들의 사업이 성공한 것을 알자, 그들을 따라가 핍박하려고 결심하였다. 루스드라에 도착하자 이 유대인들은 곧 저희 마음에 작용한 그 같은 악독한 정신을 백성들에게 성공적으로 불어넣었다. 조금 전에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겼던 그 사람들은 이제 그릇된 설명과 비방의 말을 듣고 사도들이 사실은 살인자들보다 더 악한 자들이며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제사 드리는 특권을 사도들에게 거절당함으로 겪은 실망은 그들을 신이라고 만세를 부르고 접근하던 열성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의 충동을 받은 그들은 폭력으로 사도들을 공격하고자 계획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로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못하게 만들었고, 만일 그들이 이러한 특권을 준다면 그는 백성들을 현혹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곧 복음의 원수들은 살인적인 음모를 진행시켰다. 악한 감화에 굴복한 루스드라 사람들은 악마적인 분노를 가지고 바울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돌로 쳤다. 사도는 자신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하였다. 스데반의 순교와 그 때에 자기가 행했던 잔인한 행동이 그의 마음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상처와 고통으로 기절하여 그는 땅에 엎드러졌으며, 격분한 폭도들은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쳤다.
이 암흑 같은 시련의 시간에도 바울과 바나바의 봉사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개종한 루스드라의 신도들은 충성되고 진실하게 남아 있었다. 원수들의 부당한 반대와 잔인한 박해는 오히려 이 헌신적인 형제들의 신앙을 굳게 할 따름이었고, 이제 그들은 위험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죽었다고 믿는 바울 주위에 슬픔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애통하고 있는 가운데 사도가 갑자기 머리를 치켜들고 발로 일어나 그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들은 대단히 놀랐다. 이 예기치 못했던 하나님의 종의 회복은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기적으로 간주되었고, 그들의 개종에 하늘이 인을 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였고, 새로운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루스드라에서 개종한 사람으로 바울의 고통을 목격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후에 그리스도를 위한 탁월한 일꾼이 되고 어려운 선교 지역에서 사도와 함께 개척 사업의 시련과 기쁨을 나누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디모데라는 청년이었다. 바울이 성 밖으로 끌려 나갔을 때에, 이 젊은 제자는 분명 죽은 듯이 보이는 시체 곁에 서 있었으며,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가운데서도 일어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당하게 된 것을 찬양하는 바울을 목도했던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
바울이 돌에 맞은 다음날, 사도들은 더베로 떠났는데, 그 곳에서의 그들의 수고는 축복을 받아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있을 때에도 바울과 바나바는 다 같이 저희가 근자에 일한 곳에서 잠시 홀로 남겨 둘 수밖에 없는 개종자들의 신앙을 굳게 하지 않고서는 다른 곳의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만족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고, 이리하여 그들 자신은 비난과 반대에 노출되었다. 사도들이 믿음 안에 굳게 세우려고 노력한 것은 이미 이룬 사업이 계속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개종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한 요인으로서 사도들은 복음 질서라는 안전장치로 그들을 조심스럽게 둘렀다. 신자들이 있는 루가오니아와 비시디아의 모든 곳에 정식으로 교회들이 조직되었다. 각 교회는 직원들을 임명하였고, 신자들의 영적 복리에 속한 모든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정당한 질서와 제도를 세웠다.

그 일은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시키는 복음의 계획과 일치하였고 바울은 그의 모든 봉사를 통하여 이 계획을 따르고자 주의하였다. 어느 곳이든 그의 수고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적절한 때에 교회를 조직하였다. 신자들이 매우 적을 때에라도 이 일을 행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고 하신 약속을 기억하면서 서로 도와야 함을 배웠다.
바울은 이와 같이 세워진 교회들을 잊지 아니하였다. 이 교회들에 대한 염려는 점점 증가하는 짐처럼 그의 마음을 차지했다. 무리가 아무리 적을지라도 그것은 그의 끊임없는 염려의 대상이었다. 바울은 보다 작은 교회들을 친절하게 돌보았는데, 이는 그 교회의 교인들이 진리 가운데 확고히 서서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열렬하고 무아적인 노력을 쏟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들을 특별히 돌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모든 선교적인 노력에 있어서 영혼을 위해 자원하여 희생하시고 충성스럽게 열심으로 수고하신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방심치 않고, 열심 있고 끈기 있게 개인적인 기호나 안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경건한 염원과 끊임없는 활동으로 진리의 씨를 뿌렸다. 씨를 뿌림에 있어서 사도들은 복음에 확고히 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실제적인 교훈을 주고자 주의하였다. 이 열렬하고 거룩한 근심의 정신은 새로운 제자들의 마음에 복음 기별의 중요성에 대해 지속적인 감명을 끼쳤다.
디모데의 경우처럼 유망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개종할 때에는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포도원에서 일해야 할 필요성을 가르치고자 열렬히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에도 이 사람들의 신앙은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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