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보충자료] - 성령이 충만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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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식일학교 작성일09-01-22 23:36 조회5,392회 댓글0건본문
다음의 글은 김명호 목사님의 사경 강목 중 일부입니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이번 주 교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재림 성도들의 정체성과 예언의 은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해 주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함께 나누고 싶어서 이곳에 올립니다. -윤재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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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충만한 것이 참으로 어떤 상태인가?
신약성경에 성령 충만이라는 말씀이 15회 나타난다.
1.[눅1:15,16]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2.[눅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3.[눅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4.[눅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5.[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6.[행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7.[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8.[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9.[행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10.[행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11.[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2.[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13.[행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4.[행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15.[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충만이라는 말은 플레오에서(플레또 플레로마 플레레스) 파생한 말들인데, 가득 찬, 꽉 찬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 15절이 거의 다 예수를 증거하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것을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적을 행하는 것, 또는 가슴이 뜨거운 열정을 나타내는 것, 방언을 하는 것, 성품이 확 변한 것, 등등. 이런 것도 성령 충만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다(행1:8). 은사는 고전 12장 14장 롬12장 엡4장 등등에 기록되어 있다.
침례요한이 그랬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모든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다.
성령 충만은 성도 개인적으로도 경험하는 일이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경험이다. 성령의 늦은 비 역사는 성도 개인에게 일어날 역사이지만 그 성도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의 성도여야 한다.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사업이 마쳐지는 종말의 때에 성령의 지도하에 헌신한 신자들이 열렬한 노력을 기울이는 데 있어 거룩한 은혜의 특별한 증거가 그 노력에 수반될 것이다. 동방나라들에서 파종기와 추수기에 내리는 이른비와 늦은비의 상징을 통하여 히브리 선지자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 위에 부어질 영적인 은혜를 예언하였다. 사도 시대에 성령을 부어 주심은 이른비, 혹은 먼저의 비의 시작이었고 그 결과는 영광스러웠다. 종말에도 성령의 임재가 참 교회와 함께 할 것이다.”(사도행적, 54).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통하여 나타난다. 모든 경우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 없을는지 몰라도 초대에도 교회에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로 이끌어내셨을 때 그 광야는 교회를 표상하였다(행7:38). 바로 이 광야에서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느9:19,20]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20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오순절 때에도 교회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그처럼 역사적으로 성령의 역사는 교회 안에서 교인인 성도들에게 성령의 뜻을 따라 필요에 응하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가 온전한 것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세상에 예수님이 능력으로 증거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교회에 예수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성령 충만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될 때에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다.
[고전1:5-7]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그리스도의 증거가 없는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일 수 없고 그런 교회에 속해 있는 교인은 성령 충만한 경험을 누릴 수 없다.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어야 재림을 기다릴 수 있다. 부족함이 없는 은사는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될 때 이루어진다. 우리교회에는 예수의 증거가 있다. 예수의 증거가 있음으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교회야 말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이다. 이 교회에 속한 성도 개개인은 성령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다.
재림이 임박한 시기, 그 재림을 기다리는 무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케 됨으로 교회 안에 모든 은사가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충만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태 25장의 열 처녀 비유는 재림 직전의 교회의 상태에 대한 비유이다.
등을 가지고 등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은 10명이 동일하다. 신랑이 더디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5명은 그냥 등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 등에는 기름이 있고 불이 켜져 있었다. 신랑이 더디 오기 때문에 등에 있는 기름으로 밤중까지 불을 밝히 켤 수 없었다. 다른 5명은 등은 물론이요 등(燈) 외의 그릇에 기름을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더디 올지라도 불을 밝히는데 문제가 없었다.
저는 이 등 외의 그릇에 주목하였다. 등 외에 기름 담긴 그릇은 무엇일까? 기름이니까 담을 그릇이 필요한 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했을까? 그렇다면 3절처럼 등도 가지고 기름도 가지고 있더라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마25:3,4]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기름이 성령이시라면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데 왜 그릇에 담기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이라고 했으니 성경에 성령이 역사하여 그 뜻을 바르게 알도록 하시는데, 등 외의 그릇은 성경도 아니고 그것이 사람도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일반 주석들은 등을 사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석이나 실물교훈에 등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한다. 기름은 말씀에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다. 그렇다면 기름이 담긴 등 외의 그릇은 무엇을 뜻할까?
그래서 그릇이라고 말씀한 의도를 생각한다. 이것은 재림이 가까운 때에 있을 사건을 비유로 예언한 것이 아닌가. 재림이 가까운 역사적 시점에 성경 말씀의 빛이 가물거릴 때, 그 빛을 밝게 해줄 기름을 담은 그릇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하면 문제도 있다. 예언의 신의 기별은 얼마든지 원하는 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데, 나누어주면 둘 다 쓰기에 모자란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비유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이야기 요소이다. 이 비유는 풍유적인 면이 포함된 비유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비유가 더러 있다.
[암8:11-1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오늘날 성경은 지천으로 많다. 그러나 그 말씀의 참 뜻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경은 있으나 말씀의 기갈이 심한 시대가 아닌가. 왜? 기름이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등인 성경말씀을 밝힐 기름이 필요하고 그 기름을 담은 그릇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 예언의 신이신 성령을 통하여 한 선지자를 일으키시고 그에게 성령으로 말씀의 불빛을 밝게 빛나도록 인도하셨다.
마지막 때에 진리 교회에 선지자가 회복될 것은 두 가지 확실한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언의 증거와 역사의 증거이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증거에 의하여 우리는 성경이 말한 선지자인지 스스로 선지자라고 하는지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다.
[계10: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이 말씀은 계10:1부터 예언된 사건이 이루어진 결과로 나타날 사실을 계시한 것이다. 그것은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먹고 입에는 다나 배에는 쓴 경험이 있은 후에 다시 예언하는 일이 있게 된다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 말씀은 다시 예언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선지자를 일으키신다는 예언이다.
이것이 예언의 증거이다.
그리고 펴 놓인 작은 책은 다니엘서이다. 구약성경에서 봉함된 책은 다니엘서뿐이며, 과연 다니엘서를 해석하는 일로 입에는 다나 배에는 쓴 경험을 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1844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꿀 같이 달았으나 그때 예수께서 재림하시지 않음으로 당한 큰 실망이다. 즉 배에는 쓴 경험이다. 그런 후에 주님은 다시 예언할 종을 일으키셨다. 이것이 역사의 증거이다. 바로 이런 역사적 시점에 선지자를 일으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언의 선물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 예언의 증거와 그 예언이 성취된 역사적 증거를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11장은 다시 예언할 내용에 대하여 가르친다. 곧 성소 문제를 깨달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세 천사의 기별,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에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기별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교회이다. 우리교회는 아주 특별한 교회이며 진리 교회이다. 우리는 바로 이 교회의 교인들이다. 홀로 처할 백성이요 열방 중에 하나일 수 없다. 우리의 이런 위치와 신분을 확실히 하고 그리고 확실한 이런 진리를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 실천하고 증거해야 한다.
그래서 여자의 남은 자손인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하심으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 이 교회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교회는 예언의 신의 은사를 가진 교회이다. 예언의 신께서 선지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증거를 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증거이고 예수의 증거이다. 이 증거를 주신 분이 예언의 신이시다. 증거의 말씀 자체를 예언의 신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아주 합당한 것은 아니다. 화잇 선지자 자신이 예언의 신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다. 화잇 선지자에게 임하신 예언의 신 그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이 일에 우리는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준비시키기 원하는 총명한 젊은 남녀들의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시일 내에 영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는 여러 선교지를 위한 많은 훌륭한 일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예언의 신을 통해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며,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자서전, 373)
“믿음으로 전진한 사람은 풍성한 보상을 받았다. 일을 해 가면서, 그들은 그들이 내딛은 발걸음이 현명하였음을 더욱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1904년 2월 25일자 리뷰지 편집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기록하였다.”달이 갈수록 우리는 본부를 워싱턴으로 이전해야 했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또한 이 기별을 위해 광범위한 감화를 끼칠 진리의 기념물을 이곳에 설립하는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언의 신을 통해 주어진 지시를 통해서 볼 때, 출판, 교육, 의료 사업 등 각 분야의 기관 사업은 표본적으로 이곳에 설립되어야 하며, 계속적으로 복음 전도의 활동을 추진하여, 이 나라의 수도와 교단 사업 본부에 한 선교 운동으로서의 이 기별을 적절히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있도록 해야 한다.”(자서전, 396).
“나의 사업은, 하나님의 인을 지니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인을 지니고 있다. 이 사업에는 양편에 다 관련된 일이 없다. 증언들은 하나님의 영에서 나온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서 나온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의 신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내 앞에 지나갔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93).
이런 말씀들은 예언의 신이 성령이심을 증거한다.
우리교회야말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이다. 이 교회에서 성도 개인마다 자신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께 굴복시키고(고후10:5) 예언의 신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말씀을 깨달을 때 성도 개인이 성령 충만한 경험에 이를 것이다. 저는 이렇게 믿는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이번 주 교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재림 성도들의 정체성과 예언의 은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해 주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함께 나누고 싶어서 이곳에 올립니다. -윤재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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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충만한 것이 참으로 어떤 상태인가?
신약성경에 성령 충만이라는 말씀이 15회 나타난다.
1.[눅1:15,16]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2.[눅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3.[눅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4.[눅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5.[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6.[행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7.[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8.[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9.[행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10.[행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11.[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2.[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13.[행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4.[행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15.[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충만이라는 말은 플레오에서(플레또 플레로마 플레레스) 파생한 말들인데, 가득 찬, 꽉 찬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 15절이 거의 다 예수를 증거하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것을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적을 행하는 것, 또는 가슴이 뜨거운 열정을 나타내는 것, 방언을 하는 것, 성품이 확 변한 것, 등등. 이런 것도 성령 충만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다(행1:8). 은사는 고전 12장 14장 롬12장 엡4장 등등에 기록되어 있다.
침례요한이 그랬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모든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다.
성령 충만은 성도 개인적으로도 경험하는 일이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경험이다. 성령의 늦은 비 역사는 성도 개인에게 일어날 역사이지만 그 성도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의 성도여야 한다.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사업이 마쳐지는 종말의 때에 성령의 지도하에 헌신한 신자들이 열렬한 노력을 기울이는 데 있어 거룩한 은혜의 특별한 증거가 그 노력에 수반될 것이다. 동방나라들에서 파종기와 추수기에 내리는 이른비와 늦은비의 상징을 통하여 히브리 선지자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 위에 부어질 영적인 은혜를 예언하였다. 사도 시대에 성령을 부어 주심은 이른비, 혹은 먼저의 비의 시작이었고 그 결과는 영광스러웠다. 종말에도 성령의 임재가 참 교회와 함께 할 것이다.”(사도행적, 54).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통하여 나타난다. 모든 경우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 없을는지 몰라도 초대에도 교회에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로 이끌어내셨을 때 그 광야는 교회를 표상하였다(행7:38). 바로 이 광야에서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느9:19,20]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20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오순절 때에도 교회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그처럼 역사적으로 성령의 역사는 교회 안에서 교인인 성도들에게 성령의 뜻을 따라 필요에 응하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가 온전한 것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세상에 예수님이 능력으로 증거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교회에 예수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성령 충만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될 때에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다.
[고전1:5-7]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그리스도의 증거가 없는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일 수 없고 그런 교회에 속해 있는 교인은 성령 충만한 경험을 누릴 수 없다.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어야 재림을 기다릴 수 있다. 부족함이 없는 은사는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될 때 이루어진다. 우리교회에는 예수의 증거가 있다. 예수의 증거가 있음으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교회야 말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이다. 이 교회에 속한 성도 개개인은 성령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다.
재림이 임박한 시기, 그 재림을 기다리는 무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케 됨으로 교회 안에 모든 은사가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충만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태 25장의 열 처녀 비유는 재림 직전의 교회의 상태에 대한 비유이다.
등을 가지고 등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은 10명이 동일하다. 신랑이 더디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5명은 그냥 등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 등에는 기름이 있고 불이 켜져 있었다. 신랑이 더디 오기 때문에 등에 있는 기름으로 밤중까지 불을 밝히 켤 수 없었다. 다른 5명은 등은 물론이요 등(燈) 외의 그릇에 기름을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더디 올지라도 불을 밝히는데 문제가 없었다.
저는 이 등 외의 그릇에 주목하였다. 등 외에 기름 담긴 그릇은 무엇일까? 기름이니까 담을 그릇이 필요한 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했을까? 그렇다면 3절처럼 등도 가지고 기름도 가지고 있더라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마25:3,4]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기름이 성령이시라면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데 왜 그릇에 담기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이라고 했으니 성경에 성령이 역사하여 그 뜻을 바르게 알도록 하시는데, 등 외의 그릇은 성경도 아니고 그것이 사람도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일반 주석들은 등을 사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석이나 실물교훈에 등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한다. 기름은 말씀에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다. 그렇다면 기름이 담긴 등 외의 그릇은 무엇을 뜻할까?
그래서 그릇이라고 말씀한 의도를 생각한다. 이것은 재림이 가까운 때에 있을 사건을 비유로 예언한 것이 아닌가. 재림이 가까운 역사적 시점에 성경 말씀의 빛이 가물거릴 때, 그 빛을 밝게 해줄 기름을 담은 그릇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하면 문제도 있다. 예언의 신의 기별은 얼마든지 원하는 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데, 나누어주면 둘 다 쓰기에 모자란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비유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이야기 요소이다. 이 비유는 풍유적인 면이 포함된 비유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비유가 더러 있다.
[암8:11-1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오늘날 성경은 지천으로 많다. 그러나 그 말씀의 참 뜻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경은 있으나 말씀의 기갈이 심한 시대가 아닌가. 왜? 기름이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등인 성경말씀을 밝힐 기름이 필요하고 그 기름을 담은 그릇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 예언의 신이신 성령을 통하여 한 선지자를 일으키시고 그에게 성령으로 말씀의 불빛을 밝게 빛나도록 인도하셨다.
마지막 때에 진리 교회에 선지자가 회복될 것은 두 가지 확실한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언의 증거와 역사의 증거이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증거에 의하여 우리는 성경이 말한 선지자인지 스스로 선지자라고 하는지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다.
[계10: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이 말씀은 계10:1부터 예언된 사건이 이루어진 결과로 나타날 사실을 계시한 것이다. 그것은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먹고 입에는 다나 배에는 쓴 경험이 있은 후에 다시 예언하는 일이 있게 된다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 말씀은 다시 예언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선지자를 일으키신다는 예언이다.
이것이 예언의 증거이다.
그리고 펴 놓인 작은 책은 다니엘서이다. 구약성경에서 봉함된 책은 다니엘서뿐이며, 과연 다니엘서를 해석하는 일로 입에는 다나 배에는 쓴 경험을 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1844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꿀 같이 달았으나 그때 예수께서 재림하시지 않음으로 당한 큰 실망이다. 즉 배에는 쓴 경험이다. 그런 후에 주님은 다시 예언할 종을 일으키셨다. 이것이 역사의 증거이다. 바로 이런 역사적 시점에 선지자를 일으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언의 선물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 예언의 증거와 그 예언이 성취된 역사적 증거를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11장은 다시 예언할 내용에 대하여 가르친다. 곧 성소 문제를 깨달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세 천사의 기별,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에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기별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교회이다. 우리교회는 아주 특별한 교회이며 진리 교회이다. 우리는 바로 이 교회의 교인들이다. 홀로 처할 백성이요 열방 중에 하나일 수 없다. 우리의 이런 위치와 신분을 확실히 하고 그리고 확실한 이런 진리를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 실천하고 증거해야 한다.
그래서 여자의 남은 자손인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하심으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 이 교회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교회는 예언의 신의 은사를 가진 교회이다. 예언의 신께서 선지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증거를 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증거이고 예수의 증거이다. 이 증거를 주신 분이 예언의 신이시다. 증거의 말씀 자체를 예언의 신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아주 합당한 것은 아니다. 화잇 선지자 자신이 예언의 신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다. 화잇 선지자에게 임하신 예언의 신 그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이 일에 우리는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준비시키기 원하는 총명한 젊은 남녀들의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시일 내에 영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는 여러 선교지를 위한 많은 훌륭한 일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예언의 신을 통해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며,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자서전, 373)
“믿음으로 전진한 사람은 풍성한 보상을 받았다. 일을 해 가면서, 그들은 그들이 내딛은 발걸음이 현명하였음을 더욱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1904년 2월 25일자 리뷰지 편집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기록하였다.”달이 갈수록 우리는 본부를 워싱턴으로 이전해야 했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또한 이 기별을 위해 광범위한 감화를 끼칠 진리의 기념물을 이곳에 설립하는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언의 신을 통해 주어진 지시를 통해서 볼 때, 출판, 교육, 의료 사업 등 각 분야의 기관 사업은 표본적으로 이곳에 설립되어야 하며, 계속적으로 복음 전도의 활동을 추진하여, 이 나라의 수도와 교단 사업 본부에 한 선교 운동으로서의 이 기별을 적절히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있도록 해야 한다.”(자서전, 396).
“나의 사업은, 하나님의 인을 지니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인을 지니고 있다. 이 사업에는 양편에 다 관련된 일이 없다. 증언들은 하나님의 영에서 나온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서 나온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의 신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내 앞에 지나갔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93).
이런 말씀들은 예언의 신이 성령이심을 증거한다.
우리교회야말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이다. 이 교회에서 성도 개인마다 자신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께 굴복시키고(고후10:5) 예언의 신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말씀을 깨달을 때 성도 개인이 성령 충만한 경험에 이를 것이다. 저는 이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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