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 긍휼이 많으신 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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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8-03 22:30 조회6,462회 댓글0건첨부파일
- 2008년8월9일(안) 李奉周 (제6과).hwp (45.0K) 122회 다운로드 DATE : 2008-08-03 22: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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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8월9일(안) 일몰 오후7시32분
제6과 긍휼(矜恤)이 많으신 구주(救主)
<확대경(擴大鏡)>
◎ 우리가 세상에서 살 때 우리의 마음에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 중에 하나가 긍휼(矜恤)이라는 단어(單語)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矜恤)을 입었기에 우리 또한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 긍휼(矜恤)이라는 말은 ? =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이라는 뜻으로, 먼저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겨가 돌보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얼마나 긍휼(矜恤)이 여기시고 계시는지를 성경 출애굽기 33:19로 시작해서 유다서 1:23절까지에 180여회의 긍휼(矜恤)이란 단어로 말씀하고 계심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심을 엿볼 수가 있다. 우리 모두는 이번 교과를 통해서 긍휼에 대해서 보다 깊이 연구하고 깨달아 마음과 몸으로 반응(反應)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일(日) 무리에게 다가가심 (마 4:25)
◎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弟子)인가 ? 무리인가 ?
한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奇蹟)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치유(治癒)의 기적을 보기 위해 모여 들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다양(多樣)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을 만나고자한 그들의 믿음대로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추종(追從)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늘어나는 지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심지어 그들에게 도전적인 메시지를 전하셨고, 결국 헌신된 소수의 제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나고 만다.
그렇다면 모두가 예수님을 떠났을 때, 베드로를 포함한 몇몇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을까.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 로 가오리이까?(요6:68) 베드로는 무리에 끼는 것보다 그 소중한 말씀을 더 귀히 여겼던 것이다.
우리에게 질문을 한번 해보자.
“혹시 당신은 예수님을 향한 열정(熱情)이 주변 사람들의 지배적(支配的) 여론에 영향을 받는가?
아니면 옆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은 주님께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는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는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도 여전히 그분을 따른다.”
◎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제자(弟子)인가, 아니면 단지 얄팍한 호기심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인가.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 시대 우리들을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구체적(具體的)인 실천(實踐)사항(事項)들을 금주의 교과를 통해서 우리는 다짐과 교훈을 하여야 하겠다.
월(月) 개인적(個人的)인 접촉(接觸) (요 9:1-7)
◎ 모든 사람은 행복(幸福)을 원(願)한다. 아니 행복(幸福)하기위하여 산다.
돈은 가치(價値)가 있기 때문에 힘써 벌고,
건강(健康)은 필요해서 애써 지키고,
학문(學文)도 어차피 해야 하므로 공부를 위해 머리를 싸매지만,
이러한 것들 자체가 인생을 사는 목적(目的)이 될 수 없다.
이것들은 그 이상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方便)에 불과하기 때문에 수단적 가치(手段的價値)라고 한다.
행복(幸福)!
인생은 오직 그것만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목적적 가치(目的的價値)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힘에 벅찬 수단들에 의하여 추구(追求)되는 이 행복마저도 사람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설사 이뤄진다 해도 영원하지 못하고 기약 없이 가버리는 상대적 행복에 불과 하다.
참으로 영원한 행복, 변(變)하지도 않고 시들지도 않는 그런 절대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을까?
인간의 온갖 소원(所願), 모든 감정(感情), 만(萬) 가지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應答)인 성경(聖經)만이 그 해답(解答)이 된다.
◎ 제아무리 좋은 일이나 약(藥)이 있다하더라도 자기(自己)개개(箇箇)인에게 적용이 되지 못한다하면 아무런 유익(有益)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히 신앙(信仰)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 예수님의 생애와 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목격한 사람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4복음서의 조화(調和)에 나오는 179개의 사건(事件)들 중27%의 48개의 사건들만을 다루었지만 요한은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의 의미에 보다 더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등등.
이는 개인적(個人的)인 예수님과의 접촉(接觸)을 통해서 그들의 필요와 문제들을 해결해주심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도 문제와 질병과 어려움에 처해있는 모든 이들에게는 개인적(個人的)으로 예수님의 접촉이 더욱 절실히 필요 되는 시대임을 우리는 사명과 특권(特權)으로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유감없이 발휘하므로 귀한 축복을 누립시다.
화(火) 용서(容恕) (마 18:21-22)
◎ 용서(容恕)는 수직적(垂直的)인 형태인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거나,
수평적(水平的)인 형태인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때,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를 통해서만 가능(可能)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짓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용서(容恕)가 필요하다. (전도서 7:20, 로마서3:23)
용서(容恕)는 회개(悔改)의 결과이며 이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효과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면, 그 용서는 완전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8:12, )
이는 또한 붉게 얼룩져버린 것이 마치 눈처럼 순수한 흰색으로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이사야 1:18)
☞ 사람으로부터의 용서(容恕)
위에 언급(言及)한 것과 같이, 회개(悔改)의 필수조건으로부터 분리된 용서의 필수조건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이다.
다른 이를 용서하기 위해서, 성경은 그들이 행한 일을 참된 마음으로 회개(悔改)하는 이들은 그들이 누구든 지간에 또한 그들이 얼마나 잘못했든지 간에(마태복음 18:21) 용서하라고 가르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실패하는 것은 그 개인이 용서 받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타인을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6:15 )
◎ 예수님은 용서(容恕)하는 것에 대한 참으로 값진 비유(譬喩)를 가르쳐 주셨다.
(마태복음 18:21-35)에 그분은 한 왕에게 많은 돈을 빚진 종을 이야기하셨고, 그 왕은 종에게 그가 가진 소유물을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하였다. 그 종은 왕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했고 왕은 종에게 그 빚을 다 탕감해주었다.
이 종은 왕의 면전을 떠나 그의 집으로 돌아가 그에게 빚진 자에게 갔다. 그는 자비(慈悲)를 구(求)하였기에, 그 또한 자비를 베풀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종은 그자를 용서(容恕)하지 않고 감옥(監獄)으로 보냈다. 이 소식이 왕에게 전해졌고, 왕은 몹시 화가 났다. 왕은 종에게 많은 빚을 탕감(蕩減)해줬기에 그 종도 그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왕은 그의 동정과 용서를 철회(撤回)하고 다시 그 종에게 그가 빚진 모든 것을 모두 갚도록 명(命)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끝마치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35)
◎ 용서(容恕)라는 단어(單語)가 가지는 의미(意味)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용서하며 살자는 뜻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1. 시편 78편 38절에 나오는 "코팔"이라는 용서는 "덮는다."(to cover)는 뜻이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허물과 죄를 덮어버리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써 우리 죄를 용서하시되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말이다.
마치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있는 노아에게 두 아들이 덮을 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해서 덮어주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2. 시편 25편 18절에 "나사"라는 용서는 "들어서 없애버린다"(to lift up or away)는 뜻이다.
우리들의 악하고 추한 것을 들어서 없애버린다는 의미로 마치 냄새나는 물질을 치워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더 더러운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다.(예레미야 17:9, 마태복음 15:19)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각종 오물들을 그 자취도 없이 치워버려 주시고 생각이 나지 않게 하신다.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3. 레위기 16장 10절에 "샬라크"라는 용서는 "보낸다."(send away)라는 뜻이다.
아사셀 양(羊)에게 죄(罪)를 전가(轉嫁)시켜 광야(廣野)로 보냄과 같이 아주 멀리 우리 죄를 보내버리는 은혜(恩惠)를 말한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빚을 탕감하다)는 “아피에이미”라는 단어가 동일한 해석이다. 선교라는 단어가 이런 단어에 의해 파생되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로 인해 용서받는 특별한 은혜를 반드시 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줬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용서하는 법칙을 가르쳐 줘야 한다. 용서를 가장 잘 실천하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주님의 사도라 제자라 할 수 있지 않을 까요.
4. 누가복음 7장 43절에 "카리조마이"라는 용서는 값없이 주다, 은혜를 베풀다, 탕감하다는 뜻이다. 반드시 갚아야 하는 빚을 아예 갚지 않도록 없애 버리는 것이다.
이런 빚진 자가 된 분을 예수님의 제자로 사도로 그에 삶이 달라지리라 확신한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광야와 같은 영혼들에게 이들은 보내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빚을 진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거듭난 자,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를 용서하셨듯이 이와 같이 우리도 남을 용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하기 위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할 뿐 아니라 자신도 용서할 수 있도록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懇求)해야겠습니다
내 모든 죄를 용서받을 뿐 아니라 용서를 실천할 때 우리 영혼은 진리 안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굳건해지기 때문입니다.
거룩이 없이는 진정한 행복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인터넷에서 펌 :글쓴이 : 이종남 목사>
☞ 잊혀진 명령 거룩하라
☞ "그리스도와 굳게 관계를 맺어라.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자유하라"
수(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요 1:14)
◎ 요 1:14절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봅시다.
(요 1:14)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개역한글판>
(요 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표준새번역개정판>
☞ 본 성경절은 크게 세 가지(삼위(三位) 사실을 말해 줍니다.
첫째 예수님의 성육신(聖肉身) 사실과 (성부(聖父))
둘째 그 결과인 이 땅에 초림(初臨)하셨음을 말씀하시며(예수님)
셋째,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反應)으로 본 예수님의 '인상'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성령님)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지요.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徵兆)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處女)가 잉태(孕胎)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豫言)은 성령님의 권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언의 성취 결과이지요. (마태 1:18~25 참조) 그래서 마태는 다음 성구 뒤에 바로 위의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 함이다:"(마 1:22참조: 23절)
[임마누엘의 표기/발음은 구약 히브리 원문은 '임마누엘'(라틴어식 표기: Immanuel), 신약 그리스어 원문은 '엠마누엘'(Emmanuel)로 돼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이름 '임마누엘'은 바로 요한복음의 본 절 "우리 가운데 거하심"과 같은 개념입니다.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엘'은 하나님이란 뜻이지요.
즉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물론 지금은 하늘에 계시며 그분의 영(靈)은 성령님으로서 믿는 우리 속에 계십니다.
◎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은 즉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救援)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높은 보좌(寶座)를 버리시고 친히 육신(肉身)을 취(取)하시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결단코 사랑받기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강요된 사랑은 올바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너무나 우리는 자기복음(自己福音)(?)에 익숙해 있어서.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올바른 선택을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처럼, 끝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지만, 결코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선한 목적이라도,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악(惡)하다면 그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선택을 기다리십니다! 하루의 시작부터 마침까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그 선택과 결정 그리고 실행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물론 태초(太初)부터,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은 결정하셨습니다.
"너는 내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리고 있는지!" "24시간, 어떤 선택의 삶을 살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모든 것이 혼자라고요. 정말 잘못된 선택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땅의 삶의 선택권(選擇權)과 결정권(決定權)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결코 하나님에게 떠넘기거나 땅에 그 권리(權利)와 특권(特權)을 파묻어 두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임마누엘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는 멋지고, 보람되고 행복한 삶이되시길 기원합니다.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어떤 사람들은 품위 있게 늙어가는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불평과 까다로움만 늘어갑니다.
우리는 모두 늙어가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늙어가기 때문에 성격이 까다로워지고 성질이 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드는 것이 남을 혹평하게 하고 성미를 까다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 동안 우리가 쭉 지내온 대로 우리가 변해간다는 것이 더 맞을 겁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을 생각하고 이기적인 것들과 영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돌보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기쁨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매번 선택할 때마다 우리는 선택을 결정하는 우리의 부분, 즉 우리의 중심부를 이전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만들어 간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은혜롭고 온화하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나이 들고 있나?"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목(木) 비유(譬喩)로 말씀하심 (눅 15:8-10)
◎ 비유(比喩/譬喩)란?
어떤 현상(現象)이나 사물(事物)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을 말한다.
사람들은 아는 것만큼 이해(理解)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비유(譬喩)는 모르는 것을 알기 쉽게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는 것인데 이는 교수법(敎授法)으로는 최고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준(愚蠢)하고 미련한 인간들에게 끈임 없이 비유(譬喩)로 쉽게 알아듣고 배울 수 있도록 말씀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1.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慈悲)및 공의에 대하여
① 값진 진주(眞珠)의 비유(譬喩)로 (마 13:45-46)
② 잃어버린 양(羊)의 비유(譬喩)로 (눅 15:3-7)
③ 잃어버린 은전(銀錢)의 비유(譬喩)로 (눅 15:8-10)
④ 탕자(탕아(蕩兒))의 비유(譬喩)로 (눅 15:11-22)
⑤ 열매 없는 무화과(無花果)의 비유(譬喩)로 (눅 13:6-9)
2. 구속(救贖)의 경륜에 대하여
① 겨자씨의 비유(譬喩)로 (마 13:31-32)
② 가라지의 비유(譬喩)로 (마 13:24-30)
③ 악(惡)한 농부(農夫)의 비유(譬喩)로 (마 21:33-43)
3. 진리(眞理)를 받음에 대하여
① 씨 뿌리는 자 의 비유(譬喩)로 (마 13:3-9)
② 씨 및 땅의 비유(譬喩)로 (마 13:18-23)
③ 큰 잔치의 비유(譬喩)로 (눅 14:16-24)
④ 감추인 보화(寶貨)의 비유(譬喩)로 (마 13:44)
⑤ 새 옷과 새 술의 비유(譬喩)로 (막 2:21-22)
⑥ 두 빚진 자의 비유(譬喩)로 (눅 7:41-43)
⑦ 망대를 세움(싸움하려는 왕)의 비유(譬喩)로 (눅 14:28-33)
⑧ 더러운 일곱 귀신(鬼神)의 비유(譬喩)로 (마 12:43-45)
⑨ 두 아들의 비유(譬喩)로 (마 21:28-32)
⑩ 바위 혹은 모래위에 지은 집의 비유(譬喩)로 (마 7:24-27)
⑪ 어리석은 부자(富者)의 비유(譬喩)로 (눅 12:16-21)
3. 성품(性稟)의 변화(變化)에 대해서
① 자라나는 씨의 비유(譬喩)로 (막 4:26-29)
② 누룩의 비유(譬喩)로 (마 13:33)
③ 혼인(婚姻)예복(禮服)이 없는 사람의 비유(譬喩)로 (마 22:2-14)
4. 기도(祈禱)에 대하여
① 밤중에 방문(訪問)한 친구(親舊)의 비유(譬喩)로 (눅 11:5-13)
② 불의(不義)한 재판관(裁判官)의 비유(譬喩)로 (눅 18:1-8)
5. 겸손(謙遜)과 자만(自慢)의 대조(對照)에 대하여
① 상좌(上座)를 택(擇)함의 비유(譬喩)로 (눅 14:7-11)
② 바리새인과 세리(稅吏)의 비유(譬喩)로 (눅 18:9-14)
6. 현재(現在)의 기회(期會)를 잘 이용(利用)함에 대해서
① 귀인(貴人)과 므나의 비유(譬喩)로 (눅 19:11-27)
② 달란트의 비유(譬喩)로 (마 25:14-30)
③ 부정직(不正直)한 청지기의 비유(譬喩)로 (눅 16:1-9)
④ 부자(富者)와 나사로의 비유(譬喩)로 (눅 16:19-31)
7. 그리스도인과 그의 동료(同僚)대한 비유로
① 선(善)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譬喩)로 (눅 10:30-37)
② 용서(容恕)해 주지 않는 종의 비유(譬喩)로 (마 18:23-35)
③ 옛 보화(寶貨)와 새 보화(寶貨)의 비유(譬喩)로 (마 13:52)
④ 충실(忠實)한 청지기의 비유(譬喩)로 (눅 12:42-48)
8. 주님의 재림(再臨)을 기다림에 대하여
① 열 처녀(處女)의 비유(譬喩)로 (마 25:1-13)
② 깨어 있는 종의 비유(譬喩)로 (막 13;34-37) (눅 12:35-40)
③ 깨어있는 집 주인(主人)의 비유(譬喩)로 (눅 12:35-40)
④ 포도원의 일꾼들의 비유(譬喩)로 (마 20:1-16)
⑤ 무익(無益)한 종의 비유(譬喩)로 (눅 17:7-10)
⑥ 양(羊)과 염소의 비유(譬喩)로 (마 25:31-46)
9. 최후(最後)의 심판(審判), 영원한 보상(報償)이 됨에 대한 비유
① 그물 (마 13:47-50)
<복음성경 신 11-13쪽 참조>
☞ “ 비유로 가르치는 일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었고 호평을 받고 관심을 끌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보다 더 효과적인 교수 방법을 사용하실 수는 없으셨다.
청중들이 영적 사물을 참으로 알고자 했었더라면 그들은 그의 말씀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진정으로 진리를 알려고 하는 자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비유로 가르치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꼭 전해야 할 진리를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의 교훈을 일상생활의 경험과 천연계의 장면들과 연결시킴으로 그들의 주목을 끄시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후에 그들이 그 교훈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실물들을 보게 될 때에, 거룩한 교사의 말씀을 회상(回想)하게 되었다.
성령께 마음 문을 열어 놓는 자들에게는 구주의 교훈의 깊은 뜻이 더욱더 공개되었다. 신비하게 여겨지던 것이 분명하게 되고 이해하기 어렵던 것이 확실하게 이해되었다.
예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실 통로(通路)를 찾고 계셨다. 그는 여러 가지 실례를 사용하심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진리를 제시하셨을 뿐 아니라 여러 같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셨다. 그가 사용한 실례들 모두가 그들이 일상 보고 듣는 현장에서 인용된 것이었기 때문에 청중들의 흥미는 더욱 고조되었다. 구주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자기가 등한시되었다거나 잊어버린바 되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아무리 비천하고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의 가르침 속에서 친절하고 동정 어린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비유로 말씀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를 두른 많은 무리들 중에 제사장과 랍비, 서기관과 장로들, 헤롯당과 관원, 세상을 사랑하는 자, 완고한 자, 야심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정죄할 어떤 죄를 찾고자 했다. 또 이들의 밀정(密偵)들은 매일같이 예수님의 뒤를 밟으며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 중에서 그를 정죄할 어떤 구실을 찾아내어 지금 온 세상을 모두 자기에게로 이끌어가는 듯이 보이는 그를 영원히 침묵시키고자 하였다. 구주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질을 아시고 진리를 전하실 때에 그들이 산헤드린 앞에 고소할 조건을 잡지 못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는 비유로써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외식(外飾)과 악행을 견책하셨고 비유의 말씀으로써 골수를 쪼개는 듯 한 진리를 싸셨다. 만약 그가 노골적으로 공박(功駁)하셨더라면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즉시 그의 전도 사업을 제지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밀정들이 손을 쓰지 못하게 하시는 한편 오류가 밝히 드러나도록 진리를 천명(闡明)하셨으므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그의 교훈으로 유익을 받았다. 하나님의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이 그의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천연계와 일상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롬 1:20)는 것이다.
비유를 통해 주신 구주의 교훈에는 참된 고등교육(高等敎育)이 무엇인지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원(深遠)한 과학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열어 보일 수 있으셨으며 수세기에 걸쳐서 수고하고 연구하여야 겨우 통찰할 수 있는 신비들을 드러내실 수도 있으셨다. 그는 또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있게 될 모든 발명을 착상(着想)하고 자극할 풍부한 과학 분야의 암시를 제공할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그 같은 일을 하지 않으셨다. 그는 또 세속적으로 위대하게 될 수 있는 문을 열어 줌으로 사람들의 야심을 만족시키거나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의 모든 교훈은 사람들의 마음을 무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접촉시키는 데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의 사업에 대한 인간의 학설을 연구하라고 지시하지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과 그분의 말씀과 섭리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추상적인 이론을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품성 계발에 요긴한 문제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증대시키고 선을 행할 능력을 증가시키는 문제를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진리를 말씀하신 동시에 영생을 붙잡게 하는 진리를 말씀하셨다.”(실물, 21-23)
◎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진리(眞理)를 깨달을 수 있도록 쉬운 말과 비유(譬喩)를 통해 설명(說明)하셨다 .이 사실(事實)은 긍휼(矜恤)이 많으신 그분의 품성(稟性)을 잘 나타내 준다.
<초점(焦點)>
1.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께서는 죄인(罪人)들을 불쌍히 여기사 집단(集團)이나 개인(個人)에게 다가오셔서 구원(救援)으로 이끄시는 긍휼이 많으신 구주(救主)이시다
.2. 긍휼(矜恤)이 많으신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 기쁜 소식을 나누어 줄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선교사이다.
<무더운 성하(盛夏)의 계절에 靈肉간에 주님안에서 강건하세요> 살롬 !
제6과 긍휼(矜恤)이 많으신 구주(救主)
<확대경(擴大鏡)>
◎ 우리가 세상에서 살 때 우리의 마음에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 중에 하나가 긍휼(矜恤)이라는 단어(單語)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矜恤)을 입었기에 우리 또한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 긍휼(矜恤)이라는 말은 ? =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이라는 뜻으로, 먼저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겨가 돌보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얼마나 긍휼(矜恤)이 여기시고 계시는지를 성경 출애굽기 33:19로 시작해서 유다서 1:23절까지에 180여회의 긍휼(矜恤)이란 단어로 말씀하고 계심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심을 엿볼 수가 있다. 우리 모두는 이번 교과를 통해서 긍휼에 대해서 보다 깊이 연구하고 깨달아 마음과 몸으로 반응(反應)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일(日) 무리에게 다가가심 (마 4:25)
◎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弟子)인가 ? 무리인가 ?
한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奇蹟)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치유(治癒)의 기적을 보기 위해 모여 들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다양(多樣)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을 만나고자한 그들의 믿음대로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추종(追從)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늘어나는 지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심지어 그들에게 도전적인 메시지를 전하셨고, 결국 헌신된 소수의 제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나고 만다.
그렇다면 모두가 예수님을 떠났을 때, 베드로를 포함한 몇몇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을까.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 로 가오리이까?(요6:68) 베드로는 무리에 끼는 것보다 그 소중한 말씀을 더 귀히 여겼던 것이다.
우리에게 질문을 한번 해보자.
“혹시 당신은 예수님을 향한 열정(熱情)이 주변 사람들의 지배적(支配的) 여론에 영향을 받는가?
아니면 옆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은 주님께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는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는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도 여전히 그분을 따른다.”
◎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제자(弟子)인가, 아니면 단지 얄팍한 호기심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인가.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 시대 우리들을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구체적(具體的)인 실천(實踐)사항(事項)들을 금주의 교과를 통해서 우리는 다짐과 교훈을 하여야 하겠다.
월(月) 개인적(個人的)인 접촉(接觸) (요 9:1-7)
◎ 모든 사람은 행복(幸福)을 원(願)한다. 아니 행복(幸福)하기위하여 산다.
돈은 가치(價値)가 있기 때문에 힘써 벌고,
건강(健康)은 필요해서 애써 지키고,
학문(學文)도 어차피 해야 하므로 공부를 위해 머리를 싸매지만,
이러한 것들 자체가 인생을 사는 목적(目的)이 될 수 없다.
이것들은 그 이상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方便)에 불과하기 때문에 수단적 가치(手段的價値)라고 한다.
행복(幸福)!
인생은 오직 그것만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목적적 가치(目的的價値)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힘에 벅찬 수단들에 의하여 추구(追求)되는 이 행복마저도 사람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설사 이뤄진다 해도 영원하지 못하고 기약 없이 가버리는 상대적 행복에 불과 하다.
참으로 영원한 행복, 변(變)하지도 않고 시들지도 않는 그런 절대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을까?
인간의 온갖 소원(所願), 모든 감정(感情), 만(萬) 가지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應答)인 성경(聖經)만이 그 해답(解答)이 된다.
◎ 제아무리 좋은 일이나 약(藥)이 있다하더라도 자기(自己)개개(箇箇)인에게 적용이 되지 못한다하면 아무런 유익(有益)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히 신앙(信仰)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 예수님의 생애와 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목격한 사람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4복음서의 조화(調和)에 나오는 179개의 사건(事件)들 중27%의 48개의 사건들만을 다루었지만 요한은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의 의미에 보다 더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등등.
이는 개인적(個人的)인 예수님과의 접촉(接觸)을 통해서 그들의 필요와 문제들을 해결해주심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도 문제와 질병과 어려움에 처해있는 모든 이들에게는 개인적(個人的)으로 예수님의 접촉이 더욱 절실히 필요 되는 시대임을 우리는 사명과 특권(特權)으로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유감없이 발휘하므로 귀한 축복을 누립시다.
화(火) 용서(容恕) (마 18:21-22)
◎ 용서(容恕)는 수직적(垂直的)인 형태인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거나,
수평적(水平的)인 형태인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때,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를 통해서만 가능(可能)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짓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용서(容恕)가 필요하다. (전도서 7:20, 로마서3:23)
용서(容恕)는 회개(悔改)의 결과이며 이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효과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면, 그 용서는 완전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8:12, )
이는 또한 붉게 얼룩져버린 것이 마치 눈처럼 순수한 흰색으로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이사야 1:18)
☞ 사람으로부터의 용서(容恕)
위에 언급(言及)한 것과 같이, 회개(悔改)의 필수조건으로부터 분리된 용서의 필수조건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이다.
다른 이를 용서하기 위해서, 성경은 그들이 행한 일을 참된 마음으로 회개(悔改)하는 이들은 그들이 누구든 지간에 또한 그들이 얼마나 잘못했든지 간에(마태복음 18:21) 용서하라고 가르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실패하는 것은 그 개인이 용서 받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타인을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6:15 )
◎ 예수님은 용서(容恕)하는 것에 대한 참으로 값진 비유(譬喩)를 가르쳐 주셨다.
(마태복음 18:21-35)에 그분은 한 왕에게 많은 돈을 빚진 종을 이야기하셨고, 그 왕은 종에게 그가 가진 소유물을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하였다. 그 종은 왕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했고 왕은 종에게 그 빚을 다 탕감해주었다.
이 종은 왕의 면전을 떠나 그의 집으로 돌아가 그에게 빚진 자에게 갔다. 그는 자비(慈悲)를 구(求)하였기에, 그 또한 자비를 베풀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종은 그자를 용서(容恕)하지 않고 감옥(監獄)으로 보냈다. 이 소식이 왕에게 전해졌고, 왕은 몹시 화가 났다. 왕은 종에게 많은 빚을 탕감(蕩減)해줬기에 그 종도 그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왕은 그의 동정과 용서를 철회(撤回)하고 다시 그 종에게 그가 빚진 모든 것을 모두 갚도록 명(命)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끝마치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35)
◎ 용서(容恕)라는 단어(單語)가 가지는 의미(意味)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용서하며 살자는 뜻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1. 시편 78편 38절에 나오는 "코팔"이라는 용서는 "덮는다."(to cover)는 뜻이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허물과 죄를 덮어버리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써 우리 죄를 용서하시되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말이다.
마치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있는 노아에게 두 아들이 덮을 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해서 덮어주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2. 시편 25편 18절에 "나사"라는 용서는 "들어서 없애버린다"(to lift up or away)는 뜻이다.
우리들의 악하고 추한 것을 들어서 없애버린다는 의미로 마치 냄새나는 물질을 치워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더 더러운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다.(예레미야 17:9, 마태복음 15:19)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각종 오물들을 그 자취도 없이 치워버려 주시고 생각이 나지 않게 하신다.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3. 레위기 16장 10절에 "샬라크"라는 용서는 "보낸다."(send away)라는 뜻이다.
아사셀 양(羊)에게 죄(罪)를 전가(轉嫁)시켜 광야(廣野)로 보냄과 같이 아주 멀리 우리 죄를 보내버리는 은혜(恩惠)를 말한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빚을 탕감하다)는 “아피에이미”라는 단어가 동일한 해석이다. 선교라는 단어가 이런 단어에 의해 파생되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로 인해 용서받는 특별한 은혜를 반드시 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줬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용서하는 법칙을 가르쳐 줘야 한다. 용서를 가장 잘 실천하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주님의 사도라 제자라 할 수 있지 않을 까요.
4. 누가복음 7장 43절에 "카리조마이"라는 용서는 값없이 주다, 은혜를 베풀다, 탕감하다는 뜻이다. 반드시 갚아야 하는 빚을 아예 갚지 않도록 없애 버리는 것이다.
이런 빚진 자가 된 분을 예수님의 제자로 사도로 그에 삶이 달라지리라 확신한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광야와 같은 영혼들에게 이들은 보내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빚을 진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거듭난 자,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를 용서하셨듯이 이와 같이 우리도 남을 용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하기 위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할 뿐 아니라 자신도 용서할 수 있도록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懇求)해야겠습니다
내 모든 죄를 용서받을 뿐 아니라 용서를 실천할 때 우리 영혼은 진리 안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굳건해지기 때문입니다.
거룩이 없이는 진정한 행복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인터넷에서 펌 :글쓴이 : 이종남 목사>
☞ 잊혀진 명령 거룩하라
☞ "그리스도와 굳게 관계를 맺어라.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자유하라"
수(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요 1:14)
◎ 요 1:14절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봅시다.
(요 1:14)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개역한글판>
(요 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표준새번역개정판>
☞ 본 성경절은 크게 세 가지(삼위(三位) 사실을 말해 줍니다.
첫째 예수님의 성육신(聖肉身) 사실과 (성부(聖父))
둘째 그 결과인 이 땅에 초림(初臨)하셨음을 말씀하시며(예수님)
셋째,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反應)으로 본 예수님의 '인상'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성령님)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지요.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徵兆)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處女)가 잉태(孕胎)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豫言)은 성령님의 권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언의 성취 결과이지요. (마태 1:18~25 참조) 그래서 마태는 다음 성구 뒤에 바로 위의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 함이다:"(마 1:22참조: 23절)
[임마누엘의 표기/발음은 구약 히브리 원문은 '임마누엘'(라틴어식 표기: Immanuel), 신약 그리스어 원문은 '엠마누엘'(Emmanuel)로 돼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이름 '임마누엘'은 바로 요한복음의 본 절 "우리 가운데 거하심"과 같은 개념입니다.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엘'은 하나님이란 뜻이지요.
즉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물론 지금은 하늘에 계시며 그분의 영(靈)은 성령님으로서 믿는 우리 속에 계십니다.
◎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은 즉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救援)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높은 보좌(寶座)를 버리시고 친히 육신(肉身)을 취(取)하시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결단코 사랑받기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강요된 사랑은 올바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너무나 우리는 자기복음(自己福音)(?)에 익숙해 있어서.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올바른 선택을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처럼, 끝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지만, 결코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선한 목적이라도,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악(惡)하다면 그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선택을 기다리십니다! 하루의 시작부터 마침까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그 선택과 결정 그리고 실행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물론 태초(太初)부터,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은 결정하셨습니다.
"너는 내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리고 있는지!" "24시간, 어떤 선택의 삶을 살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모든 것이 혼자라고요. 정말 잘못된 선택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땅의 삶의 선택권(選擇權)과 결정권(決定權)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결코 하나님에게 떠넘기거나 땅에 그 권리(權利)와 특권(特權)을 파묻어 두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임마누엘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는 멋지고, 보람되고 행복한 삶이되시길 기원합니다.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어떤 사람들은 품위 있게 늙어가는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불평과 까다로움만 늘어갑니다.
우리는 모두 늙어가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늙어가기 때문에 성격이 까다로워지고 성질이 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드는 것이 남을 혹평하게 하고 성미를 까다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 동안 우리가 쭉 지내온 대로 우리가 변해간다는 것이 더 맞을 겁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을 생각하고 이기적인 것들과 영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돌보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기쁨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매번 선택할 때마다 우리는 선택을 결정하는 우리의 부분, 즉 우리의 중심부를 이전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만들어 간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은혜롭고 온화하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나이 들고 있나?"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목(木) 비유(譬喩)로 말씀하심 (눅 15:8-10)
◎ 비유(比喩/譬喩)란?
어떤 현상(現象)이나 사물(事物)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을 말한다.
사람들은 아는 것만큼 이해(理解)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비유(譬喩)는 모르는 것을 알기 쉽게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는 것인데 이는 교수법(敎授法)으로는 최고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준(愚蠢)하고 미련한 인간들에게 끈임 없이 비유(譬喩)로 쉽게 알아듣고 배울 수 있도록 말씀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1.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慈悲)및 공의에 대하여
① 값진 진주(眞珠)의 비유(譬喩)로 (마 13:45-46)
② 잃어버린 양(羊)의 비유(譬喩)로 (눅 15:3-7)
③ 잃어버린 은전(銀錢)의 비유(譬喩)로 (눅 15:8-10)
④ 탕자(탕아(蕩兒))의 비유(譬喩)로 (눅 15:11-22)
⑤ 열매 없는 무화과(無花果)의 비유(譬喩)로 (눅 13:6-9)
2. 구속(救贖)의 경륜에 대하여
① 겨자씨의 비유(譬喩)로 (마 13:31-32)
② 가라지의 비유(譬喩)로 (마 13:24-30)
③ 악(惡)한 농부(農夫)의 비유(譬喩)로 (마 21:33-43)
3. 진리(眞理)를 받음에 대하여
① 씨 뿌리는 자 의 비유(譬喩)로 (마 13:3-9)
② 씨 및 땅의 비유(譬喩)로 (마 13:18-23)
③ 큰 잔치의 비유(譬喩)로 (눅 14:16-24)
④ 감추인 보화(寶貨)의 비유(譬喩)로 (마 13:44)
⑤ 새 옷과 새 술의 비유(譬喩)로 (막 2:21-22)
⑥ 두 빚진 자의 비유(譬喩)로 (눅 7:41-43)
⑦ 망대를 세움(싸움하려는 왕)의 비유(譬喩)로 (눅 14:28-33)
⑧ 더러운 일곱 귀신(鬼神)의 비유(譬喩)로 (마 12:43-45)
⑨ 두 아들의 비유(譬喩)로 (마 21:28-32)
⑩ 바위 혹은 모래위에 지은 집의 비유(譬喩)로 (마 7:24-27)
⑪ 어리석은 부자(富者)의 비유(譬喩)로 (눅 12:16-21)
3. 성품(性稟)의 변화(變化)에 대해서
① 자라나는 씨의 비유(譬喩)로 (막 4:26-29)
② 누룩의 비유(譬喩)로 (마 13:33)
③ 혼인(婚姻)예복(禮服)이 없는 사람의 비유(譬喩)로 (마 22:2-14)
4. 기도(祈禱)에 대하여
① 밤중에 방문(訪問)한 친구(親舊)의 비유(譬喩)로 (눅 11:5-13)
② 불의(不義)한 재판관(裁判官)의 비유(譬喩)로 (눅 18:1-8)
5. 겸손(謙遜)과 자만(自慢)의 대조(對照)에 대하여
① 상좌(上座)를 택(擇)함의 비유(譬喩)로 (눅 14:7-11)
② 바리새인과 세리(稅吏)의 비유(譬喩)로 (눅 18:9-14)
6. 현재(現在)의 기회(期會)를 잘 이용(利用)함에 대해서
① 귀인(貴人)과 므나의 비유(譬喩)로 (눅 19:11-27)
② 달란트의 비유(譬喩)로 (마 25:14-30)
③ 부정직(不正直)한 청지기의 비유(譬喩)로 (눅 16:1-9)
④ 부자(富者)와 나사로의 비유(譬喩)로 (눅 16:19-31)
7. 그리스도인과 그의 동료(同僚)대한 비유로
① 선(善)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譬喩)로 (눅 10:30-37)
② 용서(容恕)해 주지 않는 종의 비유(譬喩)로 (마 18:23-35)
③ 옛 보화(寶貨)와 새 보화(寶貨)의 비유(譬喩)로 (마 13:52)
④ 충실(忠實)한 청지기의 비유(譬喩)로 (눅 12:42-48)
8. 주님의 재림(再臨)을 기다림에 대하여
① 열 처녀(處女)의 비유(譬喩)로 (마 25:1-13)
② 깨어 있는 종의 비유(譬喩)로 (막 13;34-37) (눅 12:35-40)
③ 깨어있는 집 주인(主人)의 비유(譬喩)로 (눅 12:35-40)
④ 포도원의 일꾼들의 비유(譬喩)로 (마 20:1-16)
⑤ 무익(無益)한 종의 비유(譬喩)로 (눅 17:7-10)
⑥ 양(羊)과 염소의 비유(譬喩)로 (마 25:31-46)
9. 최후(最後)의 심판(審判), 영원한 보상(報償)이 됨에 대한 비유
① 그물 (마 13:47-50)
<복음성경 신 11-13쪽 참조>
☞ “ 비유로 가르치는 일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었고 호평을 받고 관심을 끌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보다 더 효과적인 교수 방법을 사용하실 수는 없으셨다.
청중들이 영적 사물을 참으로 알고자 했었더라면 그들은 그의 말씀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진정으로 진리를 알려고 하는 자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비유로 가르치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꼭 전해야 할 진리를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의 교훈을 일상생활의 경험과 천연계의 장면들과 연결시킴으로 그들의 주목을 끄시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후에 그들이 그 교훈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실물들을 보게 될 때에, 거룩한 교사의 말씀을 회상(回想)하게 되었다.
성령께 마음 문을 열어 놓는 자들에게는 구주의 교훈의 깊은 뜻이 더욱더 공개되었다. 신비하게 여겨지던 것이 분명하게 되고 이해하기 어렵던 것이 확실하게 이해되었다.
예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실 통로(通路)를 찾고 계셨다. 그는 여러 가지 실례를 사용하심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진리를 제시하셨을 뿐 아니라 여러 같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셨다. 그가 사용한 실례들 모두가 그들이 일상 보고 듣는 현장에서 인용된 것이었기 때문에 청중들의 흥미는 더욱 고조되었다. 구주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자기가 등한시되었다거나 잊어버린바 되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아무리 비천하고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의 가르침 속에서 친절하고 동정 어린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비유로 말씀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를 두른 많은 무리들 중에 제사장과 랍비, 서기관과 장로들, 헤롯당과 관원, 세상을 사랑하는 자, 완고한 자, 야심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정죄할 어떤 죄를 찾고자 했다. 또 이들의 밀정(密偵)들은 매일같이 예수님의 뒤를 밟으며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 중에서 그를 정죄할 어떤 구실을 찾아내어 지금 온 세상을 모두 자기에게로 이끌어가는 듯이 보이는 그를 영원히 침묵시키고자 하였다. 구주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질을 아시고 진리를 전하실 때에 그들이 산헤드린 앞에 고소할 조건을 잡지 못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는 비유로써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외식(外飾)과 악행을 견책하셨고 비유의 말씀으로써 골수를 쪼개는 듯 한 진리를 싸셨다. 만약 그가 노골적으로 공박(功駁)하셨더라면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즉시 그의 전도 사업을 제지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밀정들이 손을 쓰지 못하게 하시는 한편 오류가 밝히 드러나도록 진리를 천명(闡明)하셨으므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그의 교훈으로 유익을 받았다. 하나님의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이 그의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천연계와 일상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롬 1:20)는 것이다.
비유를 통해 주신 구주의 교훈에는 참된 고등교육(高等敎育)이 무엇인지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원(深遠)한 과학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열어 보일 수 있으셨으며 수세기에 걸쳐서 수고하고 연구하여야 겨우 통찰할 수 있는 신비들을 드러내실 수도 있으셨다. 그는 또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있게 될 모든 발명을 착상(着想)하고 자극할 풍부한 과학 분야의 암시를 제공할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그 같은 일을 하지 않으셨다. 그는 또 세속적으로 위대하게 될 수 있는 문을 열어 줌으로 사람들의 야심을 만족시키거나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의 모든 교훈은 사람들의 마음을 무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접촉시키는 데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의 사업에 대한 인간의 학설을 연구하라고 지시하지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과 그분의 말씀과 섭리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추상적인 이론을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품성 계발에 요긴한 문제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증대시키고 선을 행할 능력을 증가시키는 문제를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진리를 말씀하신 동시에 영생을 붙잡게 하는 진리를 말씀하셨다.”(실물, 21-23)
◎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진리(眞理)를 깨달을 수 있도록 쉬운 말과 비유(譬喩)를 통해 설명(說明)하셨다 .이 사실(事實)은 긍휼(矜恤)이 많으신 그분의 품성(稟性)을 잘 나타내 준다.
<초점(焦點)>
1.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께서는 죄인(罪人)들을 불쌍히 여기사 집단(集團)이나 개인(個人)에게 다가오셔서 구원(救援)으로 이끄시는 긍휼이 많으신 구주(救主)이시다
.2. 긍휼(矜恤)이 많으신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 기쁜 소식을 나누어 줄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선교사이다.
<무더운 성하(盛夏)의 계절에 靈肉간에 주님안에서 강건하세요> 살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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