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추수와 파수꾼(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3/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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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3-14 10:19 조회8,989회 댓글0건본문
3월 23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45분
기억절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개역, 요 15:8).
연구범위: 요 1:40~46, 요 4:28~30, 눅 24:4~53, 행 1:6~8, 마 9:36~38, 눅 15장.
이번 과는 여러모로 지난 과의 연장선상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뚜렷한 목적을 위해 영적 지도자들을 세우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원리와 방법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시키는 영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놓으신 기초를 오늘날의 리더십 계발 이론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광고와 선전이 영적 성장 위에 있는 이상, 그 결과는 영적 빈약에 이를 뿐이고, 개종이 회개와 회심과 영적변화를 대체하는 이상, 사명은 흔들릴 뿐이다. 영적 투쟁을 위해 리더들을 준비시키기보다 회원을 모집하고 미디어 공세를 펼치며 홍보 캠페인을 펼치기 위한 리더 훈련은 재앙을 자초한다. 진정한 전도와 제자 양육은 ⑴ 자신의 죄성에 대한 인정, ⑵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참회, ⑶ 전적인 영적 굴복 그리고 ⑷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기별을 전파하고픈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진정한 제자는 직책이나 지위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섬김의 삶을 갈망한다.
➌ 행하기 : 자신이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 또는 지역으로 인도해 주시도록 성령께 자신을 맡긴다.
A.
❷ 목자가 없고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다는 말씀은 교회의 어떤 상태를 지적하고 있습니까?
※ 지도자 양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 열심히 추수장에 나가지 않는 것도 의미한다.
❸ 예수님이 타락한 죄인들을 “잃은” 자들로 묘사하신 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동정하여 당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정신이다.
❹ 우리는 익은 곡식을 추수하는 자 또는 잃은 자들을 찾는 자로서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 열심 있는 일꾼으로 성경의 진리를 확실히 알고 성령의 지도를 받아 일해야 한다.
B.
❷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사람들을 초청하는 전도 방식은 얼마나 효과적입니까?
※ 찾아가는 방식과 초청하는 방식은 경우에 따라 각각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그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셔서 그분이 없는
곳에서도 전도하게 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 우리는 성령의 지도로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❹ 우리가 전도하기에 앞서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기 위해 어떻게 협력하여 기도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 성령의 지도 없이 말씀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가절히 성령의 지도를 구해야 하고 오직 성경으로 성경을 깨닫는 원칙으로 연구해야 한다. 서로 이야기해보자.
결론: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통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종종 우리의 영적 은사를 활용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을까요?
첫째날(일) 3월16일
거지들의 빵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0~42).
지상 생애를 마치고 승천할 때가 가까워오자 예수님의 관심은 그분이 깊이 사랑하고 이타적으로 섬겼던 제자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버려지지 않을 것이었다. 비록 예수님은 하늘로 돌아가시지만,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나누었던 영적 친밀감은 성령께서 대신 공급하시도록 위탁되었다. 성령의 사역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요한은 여러 장을 할애하여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중에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에 관한 성령의 증언이었다. 물론 성령도 도움 없이는 증언하시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의 제자들도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협력 없이도 천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이 거룩한 사명을 위해 죄와 실수가 많고 예측하기 힘든 인간들을 선택하셨다.
1. 요 1:40~46, 4:28~30, 15:26~27, 19:35~36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에 따르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은 어떻게 협력하는가?
[요1:40~46]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요4:28~30]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15:26,2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요19:35,36]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답: 사람은 증인이 되고 하나님은 그 증거를 확인하신다.
전도는 흔히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안드레는 분명 이 점에서 뛰어났다. 그의 형제 베드로의 글은 언젠가 성경에 포함될 것이었고, 그의 사역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었으며, 예수님은 그를 가장 친밀한 세 제자 중 하나로 삼으셨다. 안드레는 그런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라는 그리스도의 단순한 명령을 따랐기 때문에 그는 특별한 인정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그릇들, 즉 전도, 행정 그리고 지도력에 탁월한 지도자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잊혀진 신실한 제자들의 손에 이끌려 그리스도께 인도되었던가? 비록 이들이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신실하게 예수님을 증언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업이 얼마나 무력했을지 상상해보라. 예수님은 우선 제자들이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의 단순한 과제를 제공하심으로 더 큰 임무를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셨다. 사마리아 여인, 빌립 그리고 안드레는 단순한 증언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초청의 힘을 증명한다. 우리도 모두 그와 같이 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부가설명> 옛날 박스트라는 목사는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설교할 때 약한 몸 때문에 항상 힘이 들었다. 한 번 설교가 끝나면 그는 파김치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약한 몸을 걱정하면 그는 대답하기를 설교는 당장 죽어가는 사람이 당장 죽어가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오늘의 교과에서 전도를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 있는 곳을 가르쳐주는 것이라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은 그 소개를 듣고 그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책임이 있다. 안드레가 그랬고, 빌립이 그랬으며 사마리아 여자가 그랬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지만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그분에게 오는 자는 생명의 떡을 먹을 것이다. 우리는 잘 초청해야 한다.
교훈: 예수님을 증거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수많은 영적 지도자가 생겨났다.
둘째날(월) 3월17일
예수께서 인내를 호소하실 때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1. 눅 24:47~53, 행 1:6~8, 16:6~10을 읽어 보라. 성령을 기다리는 일이 왜 필요했는가? 초기 교회의 전도 활동에 성령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곤란한 상황을 맞이했던 바울의 경험에서 오늘날의 신자들은 어떤 격려를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때를 위한 인내와 기다림에 관하여 위의 성경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눅24:47~53]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 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행1:6~8]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6:6~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답: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 있기 때문에 성령을 기다려서 그분의 지도로 증거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계획과 능력으로 전도하려고 하지 않고 성령의 강림과 그 인도를 기다려야 했다. 성령께서는 바울을 지시하여 그가 전도해야 할 지역을 지정해주셨다. 우리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대화와 모본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내를 가르치셨다. 심한 편견, 무지, 오해와 공공연한 음모를 겪으면서도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셨다. 그와 같은 인내심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그분의 전적인 의지에 기초해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의지하는 경험이 없다면 천국의 확장이 매우 위태롭게 될 것을 아셨다. 반대로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교훈을 배운다면 그들의 장래 사역은 하늘의 성과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의 첫 번째 명령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오늘날의 신자들도 그와 같은 교훈을 연마하기 바라신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자신을 신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지도를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음으로 자신과 하나님의 나라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비두니아 지역으로 들어가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고집센 바울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성령의 개입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였다. 사도는 자신을 마게도니아로 보내시는 성령의 지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끈질긴 노력을 기울이자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바울이 자기 계획을 무리하게 추진했다면 유럽 선교는 무기한 연기될 뻔하였다.
<부가설명> 기다리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기다리는 것과 우리의 증거를 받은 사람의 반응이 더딘 것에 대하여 오래 참고 기다리는 기다림도 있다. 오늘날 우리교회의 전도는 성급하다. 구도자가 아직 복음의 실상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몇 번 출석하면 침례를 권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조직의 문제도 있다. 합회에서 목회자들의 성적을 침례와 십일금 증가와 교회 이벤트적 사업을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서 취급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침례를 준 후에 그를 기성교인 취급을 해서 더 성경을 가르치고 진리의 지식과 경험을 깊이 할 수 있도록 이끌지도 않는다. 침례를 받았으니 알아서 교인노릇 하도록 자율에 맡겨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난 경험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교인들을 양산하고 그렇게 몇 년 교회에 출석하면 집사로, 또 몇 년 더 출석하면 장로로 세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교회 안에 재림기별을 모르는 집사 장로 심지어 목회자들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나친 말이면 용서하기 바란다.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3:15)
교훈: 복음을 전하는 일은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며 그런 태도는 철저하게 성령을 의지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먼저 성령의 지도를 기다려야 했다.
셋째날(화) 3월18일
권위를 행사함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1. 막 6:7~13, 마 16:14~19, 18:17~20, 28:18~20, 요 20:21~23을 비교해 보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종류의 권위가 있었는가?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막6:7~13]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마16:14~19]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18:17~20]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21~23]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답: 전도할 때 그들을 영접하는 어떤 집에든지 유할 권리를 주셨다. 또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와 천국열쇠를 가지고 땅에서 매고 푸는 권세와 침례를 주는 권세와 죄사함을 얻게 하는 권세를 주셨다.
“베드로가 교회의 믿음의 기초가 되는 진리를 나타냈으므로 예수께서는 전체 신도들의 대표자로서 그를 높이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천국 열쇠’는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그 말씀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 말씀은 하늘을 열고 닫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말씀은 사람들이 가납되느냐 혹은 거절당하느냐를 결정짓는 조건들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의 사업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거나 한다. 그들의 사업은 영원한 결과가 달려 있는 사명이다”(시대의 소망, 413~414).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사명을 맡기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 거룩한 능력을 부여하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성령을 통해 지상의 과업에 적합한 거룩한 능력을 제자들에게 부어주셨다. 어떤 신자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부족하게 주셨을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모든 기술과 재능, 힘과 역량이 공급되었다.
간혹 인간 지도력은 필요한 원칙을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만약 리더가 적합한 능력을 확장시키지 않은 채 임무를 부여한다면, 실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지도자의 불안정성은 다른 사람의 사고와 하나님이 부여하신 창의력과 개별성을 제한하려는 통제 행위를 통해 표면화된다. 그렇게 위축되고 억눌린 제자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와 같은 행동은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대신 모든 악기를 일제히 연주시키려는 지휘자와 같다. 여기서 예수님의 모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약 누군가 권위를 제한하고 행동을 지시할 권한을 가졌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예수님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셨고 그분의 명령과 모본 외에는 그분의 영향력이 없는 곳으로 그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전하며 봉사하도록 사명을 맡기셨다.
<부가설명>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기관이다. 인간적 안목으로 보면 망할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께서 이 기관을 이끌고 가시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이 잘못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얼마나 지연되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운영을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일하게 하셨기 때문에 기다리신다. 인간의 실수와 허물로 교회가 무너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다시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고 이루실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 된 사람들은 성령의 지도를 절대적으로 받아야 한다.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런데 교과 저자가 지적했듯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따와서 말씀 선포하는 단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생각과 사회적 관심을 늘어놓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정말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증언의 말씀은 그것이 바로 천국열쇠라고 하였다. 말씀을 올바르게 따르지 않는 것은 말씀이 정죄한다.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고 따르면 말씀이 그를 사망에서 풀어 생명으로 옮긴다. 정말 제자들을 양육하려고 하면 오직 말씀에 의하여 성령의 지도를 받아 일해야 한다.
교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능력을 부여하셨다. 또한 그들을 통제하기보다 권위를 주어 그분의 말씀과 모본에 따라 봉사하도록 하셨다.
넷째날(수) 3월19일
추수를 위한 일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6~38).
1. 우리는 이 말씀에서 현재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임무를 위해 어떤 중요한 기별을 들어야 하는가?
답: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적은 것은 교회가 추수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교회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고 교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데 힘을 쏟고 실제로 제자를 삼는 일은 두 번째 세 번째로 밀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교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교회에서 일할 일꾼들을 제대로 양성하지 않으면 제자를 삼는 일꾼이 부족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교회가 튼튼하지 않으면 제자 삼는 일도 할 수 없다.
영적으로 수확할 곡식은 쌓였지만 추수할 일꾼은 거의 없다. 마음밭이 준비되어 영적 씨앗이 뿌려졌고, 발아한 후 풍부한 수분과 햇빛을 받고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이제 무르익은 영혼은 수확되기만을 기다리지만 추수꾼은 어디 있단 말인가? 간단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회화적인 문체로 예수님은 전염성이 강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려 하셨다.
때로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신자와의 교제를 갈망하며 함께 무리를 짓지만, 세상에서 추수를 기다리는 자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거룩한 책임감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들은 교회 일, 공공의 의무, 건물 관리 그리고 현상유지를 위한 여러 훌륭한 계획들로 분주하다. 이것들 모두가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진지한 신자들은 전도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이렇게 하소연한다. “목사님, 이런 전도 방식도 좋지만,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필요 없지 않나요?”
상당히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도 있어야 한다. “언제 예수님이 곡물창고지기의 부족 때문에 탄식하셨습니까?” 그분은 추수할 일꾼을 더 많이 보내달라고 간구하셨다.
<부가설명> 교인된 사람들은 어느 경우에나 곡식을 거둘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설명하도록 공부하고 기억하고 훈련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없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성경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였다.(딤후3:15) 예수님은 당신께서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가르치기 전에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첫째 선생은 성령이시다.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구원의 도리를 알기 위하여 그것이 기록된 장절을 살피고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따라 여러 구절들을 연결하여 확실한 대답을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록된 본문을 중히 여겨야 한다. 주석이나 기타 참고 책들은 어디까지나 참고 책일 뿐이다. 기도하고 성령의 지도를 간절히 사모하며 깨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면 성령께서 이끌어주실 것이다. 일단 답을 얻었으면 그것이 성경 전체의 사상에 일치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한 문제에서는 답이 훌륭한 것 같아도 전체적으로 사슬처럼 아름답게 연결되지 않으면 그 대답은 잘못 된 것이다. 일꾼이 되기 위하여 계속 자기를 교육시켜야 한다.
교훈: 교회는 내적 연합과 유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추수할 일꾼을 더 많이 필요로 하신다.
다섯째날(목) 3월20일
잃었다가 다시 찾음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예수님은 교훈과 모본을 통해 제자들로 하여금 죄인들 심지어 창녀과 세리 같은 악명 높은 자들과도 교제하도록 가르치셨다. 그들이 어떻게 온 세상을 제자로 삼을 수 있을까? 그분의 가르침은 종종 이러한 죄인들에게 집중되었다. 예수님이 그들을 “잃은” 자로 여기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인지 증명한다. 그분은 그들을 “반역적인 무리” 또는 “타락한 자들”로 여기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잃은 자”라는 표현을 선택하셨다.
“잃은”이란 표현은 다른 표현에 비해 부정적 어감이 없다. 우리는 타락한 영혼들을 책망하기보다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잃은”이란 단어는 찾는 자들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는 관대한 표현이다. 폄하하는 발언은 잃은 자들을 멀리 떠나게 한다. 중립적인 언어는 용납과 관계의 가능성을 전달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잃은 자들을 찾는 사람이 되도록 권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잃은 자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이든 어떤 방식의 삶을 살든 상관없이 그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봉사는 이것이니 곧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사 58:6~7)이다. 그대 자신이 오직 그대의 천부의 사랑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죄 가운데서 고생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불행을 당한 자와 참회하는 자들을 질투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서 이기심의 얼음이 녹아내리면 그대는 하나님과 같은 동정심을 가지게 되고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210~211).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잃은 양 비유와 잃은 은전 비유와 잃은 아들 비유를 하셔서 책임이 목자와 주부(主婦)와 아버지에게 있다는 인상으로 가르치셨다. 사실 양은 스스로 도망갔다. 아들도 스스로 집을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은 양”이라고 표현하셨다. 책임을 양에게 묻지 않고 목자가 지는 정신이다. 잃은 아들도 그렇다. 은전은 스스로 도망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주부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 지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잃은”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내셨다. 그래서 말씀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잃은 지구와 그 사람들을 찾으러 세상에 오셨다. 목자로 오셨다. 그리고 죽기까지 하시므로 잃은 것을 찾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로나 결코 쉽지 않다.
교훈: 예수님은 타락한 죄인들을 묘사할 수 있는 다른 표현보다 ‘잃은’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심으로 비난보다는 동정하고 구원해야 할 책임을 강조하셨다.
여섯째날(금) 3월2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488~496 “갈릴리로부터의 마지막 여행”, 436~444 “누가 가장크냐?”, <사도행적>, 17~24 “열두 제자의 훈련”, 25~34 “대사명”, 35~46 “오순절” 47~56 “성령의 선물”을 읽어 보라.
“제자들은 영적인 필요를 느끼고 영혼 구원 사업에 적합한 거룩한 정열을 달라고 주께 부르짖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을 위한 축복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혼 구원에 대한 부담에 눌려 있었다. 그들은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능력을 간구하였다”(사도행적, 3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예수님의 훈련 방법에서 오늘날 제자 훈련 교사들이 활용해야 할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훈련이 그대의 교회에서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보십시오.
※ 예수께서는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시고 준비되도록 기다리시는 방법으로 훈련시켰다.
➋ 목요일에 우리는 언어의 문제와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을 검토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단어들을 정해진 의미로 사용하지만, 그 단어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는 자들을 상대할 때 어떻게 언어 선택에 더욱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 우리만이 사용하는 특정 용어들을 사용하는데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도록 바르게 표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정죄하는 듯한 언어들은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➌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습은 복음 전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그 모습과 그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합니까?
※ 우리 자신에게는 빵이 없다. 생명의 떡은 오직 예수님이다. 우리도 예수님께 얻어먹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떡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떡이 필요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떡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➍ 그대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그대의 교회는 교회 자체와 그 필요에 초점을 맞춥니까? 아니면 복음 전파에 초점을 맞춥니까? 복음 전파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교회에 얼마나 이롭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 교회가 전도활동에 더욱 집중하고 자체의 필요에 관심을 덜 기울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도를 열심히 하면 어떻게 그러한 필요가 해결됩니까?
※ 교회를 튼튼히 하는 것은 곧 전도를 활발히 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 그냥 교회 자체를 튼튼히 하는 것을 위하여 튼튼히 하는 것은 교회가 하는 바른 일이 아니다.
일몰:오후 6시 45분
기억절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개역, 요 15:8).
연구범위: 요 1:40~46, 요 4:28~30, 눅 24:4~53, 행 1:6~8, 마 9:36~38, 눅 15장.
이번 과는 여러모로 지난 과의 연장선상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뚜렷한 목적을 위해 영적 지도자들을 세우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원리와 방법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시키는 영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놓으신 기초를 오늘날의 리더십 계발 이론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광고와 선전이 영적 성장 위에 있는 이상, 그 결과는 영적 빈약에 이를 뿐이고, 개종이 회개와 회심과 영적변화를 대체하는 이상, 사명은 흔들릴 뿐이다. 영적 투쟁을 위해 리더들을 준비시키기보다 회원을 모집하고 미디어 공세를 펼치며 홍보 캠페인을 펼치기 위한 리더 훈련은 재앙을 자초한다. 진정한 전도와 제자 양육은 ⑴ 자신의 죄성에 대한 인정, ⑵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참회, ⑶ 전적인 영적 굴복 그리고 ⑷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기별을 전파하고픈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진정한 제자는 직책이나 지위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섬김의 삶을 갈망한다.
➌ 행하기 : 자신이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 또는 지역으로 인도해 주시도록 성령께 자신을 맡긴다.
A.
❷ 목자가 없고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다는 말씀은 교회의 어떤 상태를 지적하고 있습니까?
※ 지도자 양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 열심히 추수장에 나가지 않는 것도 의미한다.
❸ 예수님이 타락한 죄인들을 “잃은” 자들로 묘사하신 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동정하여 당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정신이다.
❹ 우리는 익은 곡식을 추수하는 자 또는 잃은 자들을 찾는 자로서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 열심 있는 일꾼으로 성경의 진리를 확실히 알고 성령의 지도를 받아 일해야 한다.
B.
❷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사람들을 초청하는 전도 방식은 얼마나 효과적입니까?
※ 찾아가는 방식과 초청하는 방식은 경우에 따라 각각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그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셔서 그분이 없는
곳에서도 전도하게 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 우리는 성령의 지도로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❹ 우리가 전도하기에 앞서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기 위해 어떻게 협력하여 기도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 성령의 지도 없이 말씀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가절히 성령의 지도를 구해야 하고 오직 성경으로 성경을 깨닫는 원칙으로 연구해야 한다. 서로 이야기해보자.
결론: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통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종종 우리의 영적 은사를 활용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을까요?
첫째날(일) 3월16일
거지들의 빵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0~42).
지상 생애를 마치고 승천할 때가 가까워오자 예수님의 관심은 그분이 깊이 사랑하고 이타적으로 섬겼던 제자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버려지지 않을 것이었다. 비록 예수님은 하늘로 돌아가시지만,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나누었던 영적 친밀감은 성령께서 대신 공급하시도록 위탁되었다. 성령의 사역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요한은 여러 장을 할애하여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중에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에 관한 성령의 증언이었다. 물론 성령도 도움 없이는 증언하시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의 제자들도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협력 없이도 천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이 거룩한 사명을 위해 죄와 실수가 많고 예측하기 힘든 인간들을 선택하셨다.
1. 요 1:40~46, 4:28~30, 15:26~27, 19:35~36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에 따르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은 어떻게 협력하는가?
[요1:40~46]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요4:28~30]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15:26,2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요19:35,36]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답: 사람은 증인이 되고 하나님은 그 증거를 확인하신다.
전도는 흔히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안드레는 분명 이 점에서 뛰어났다. 그의 형제 베드로의 글은 언젠가 성경에 포함될 것이었고, 그의 사역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었으며, 예수님은 그를 가장 친밀한 세 제자 중 하나로 삼으셨다. 안드레는 그런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라는 그리스도의 단순한 명령을 따랐기 때문에 그는 특별한 인정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그릇들, 즉 전도, 행정 그리고 지도력에 탁월한 지도자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잊혀진 신실한 제자들의 손에 이끌려 그리스도께 인도되었던가? 비록 이들이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신실하게 예수님을 증언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업이 얼마나 무력했을지 상상해보라. 예수님은 우선 제자들이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의 단순한 과제를 제공하심으로 더 큰 임무를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셨다. 사마리아 여인, 빌립 그리고 안드레는 단순한 증언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초청의 힘을 증명한다. 우리도 모두 그와 같이 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부가설명> 옛날 박스트라는 목사는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설교할 때 약한 몸 때문에 항상 힘이 들었다. 한 번 설교가 끝나면 그는 파김치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약한 몸을 걱정하면 그는 대답하기를 설교는 당장 죽어가는 사람이 당장 죽어가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오늘의 교과에서 전도를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 있는 곳을 가르쳐주는 것이라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은 그 소개를 듣고 그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책임이 있다. 안드레가 그랬고, 빌립이 그랬으며 사마리아 여자가 그랬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지만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그분에게 오는 자는 생명의 떡을 먹을 것이다. 우리는 잘 초청해야 한다.
교훈: 예수님을 증거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수많은 영적 지도자가 생겨났다.
둘째날(월) 3월17일
예수께서 인내를 호소하실 때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1. 눅 24:47~53, 행 1:6~8, 16:6~10을 읽어 보라. 성령을 기다리는 일이 왜 필요했는가? 초기 교회의 전도 활동에 성령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곤란한 상황을 맞이했던 바울의 경험에서 오늘날의 신자들은 어떤 격려를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때를 위한 인내와 기다림에 관하여 위의 성경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눅24:47~53]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 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행1:6~8]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6:6~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답: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 있기 때문에 성령을 기다려서 그분의 지도로 증거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계획과 능력으로 전도하려고 하지 않고 성령의 강림과 그 인도를 기다려야 했다. 성령께서는 바울을 지시하여 그가 전도해야 할 지역을 지정해주셨다. 우리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대화와 모본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내를 가르치셨다. 심한 편견, 무지, 오해와 공공연한 음모를 겪으면서도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셨다. 그와 같은 인내심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그분의 전적인 의지에 기초해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의지하는 경험이 없다면 천국의 확장이 매우 위태롭게 될 것을 아셨다. 반대로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교훈을 배운다면 그들의 장래 사역은 하늘의 성과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의 첫 번째 명령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오늘날의 신자들도 그와 같은 교훈을 연마하기 바라신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자신을 신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지도를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음으로 자신과 하나님의 나라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비두니아 지역으로 들어가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고집센 바울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성령의 개입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였다. 사도는 자신을 마게도니아로 보내시는 성령의 지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끈질긴 노력을 기울이자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바울이 자기 계획을 무리하게 추진했다면 유럽 선교는 무기한 연기될 뻔하였다.
<부가설명> 기다리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기다리는 것과 우리의 증거를 받은 사람의 반응이 더딘 것에 대하여 오래 참고 기다리는 기다림도 있다. 오늘날 우리교회의 전도는 성급하다. 구도자가 아직 복음의 실상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몇 번 출석하면 침례를 권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조직의 문제도 있다. 합회에서 목회자들의 성적을 침례와 십일금 증가와 교회 이벤트적 사업을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서 취급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침례를 준 후에 그를 기성교인 취급을 해서 더 성경을 가르치고 진리의 지식과 경험을 깊이 할 수 있도록 이끌지도 않는다. 침례를 받았으니 알아서 교인노릇 하도록 자율에 맡겨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난 경험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교인들을 양산하고 그렇게 몇 년 교회에 출석하면 집사로, 또 몇 년 더 출석하면 장로로 세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교회 안에 재림기별을 모르는 집사 장로 심지어 목회자들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나친 말이면 용서하기 바란다.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3:15)
교훈: 복음을 전하는 일은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며 그런 태도는 철저하게 성령을 의지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먼저 성령의 지도를 기다려야 했다.
셋째날(화) 3월18일
권위를 행사함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1. 막 6:7~13, 마 16:14~19, 18:17~20, 28:18~20, 요 20:21~23을 비교해 보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종류의 권위가 있었는가?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막6:7~13]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마16:14~19]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18:17~20]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21~23]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답: 전도할 때 그들을 영접하는 어떤 집에든지 유할 권리를 주셨다. 또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와 천국열쇠를 가지고 땅에서 매고 푸는 권세와 침례를 주는 권세와 죄사함을 얻게 하는 권세를 주셨다.
“베드로가 교회의 믿음의 기초가 되는 진리를 나타냈으므로 예수께서는 전체 신도들의 대표자로서 그를 높이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천국 열쇠’는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그 말씀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 말씀은 하늘을 열고 닫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말씀은 사람들이 가납되느냐 혹은 거절당하느냐를 결정짓는 조건들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의 사업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거나 한다. 그들의 사업은 영원한 결과가 달려 있는 사명이다”(시대의 소망, 413~414).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사명을 맡기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 거룩한 능력을 부여하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성령을 통해 지상의 과업에 적합한 거룩한 능력을 제자들에게 부어주셨다. 어떤 신자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부족하게 주셨을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모든 기술과 재능, 힘과 역량이 공급되었다.
간혹 인간 지도력은 필요한 원칙을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만약 리더가 적합한 능력을 확장시키지 않은 채 임무를 부여한다면, 실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지도자의 불안정성은 다른 사람의 사고와 하나님이 부여하신 창의력과 개별성을 제한하려는 통제 행위를 통해 표면화된다. 그렇게 위축되고 억눌린 제자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와 같은 행동은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대신 모든 악기를 일제히 연주시키려는 지휘자와 같다. 여기서 예수님의 모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약 누군가 권위를 제한하고 행동을 지시할 권한을 가졌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예수님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셨고 그분의 명령과 모본 외에는 그분의 영향력이 없는 곳으로 그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전하며 봉사하도록 사명을 맡기셨다.
<부가설명>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기관이다. 인간적 안목으로 보면 망할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께서 이 기관을 이끌고 가시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이 잘못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얼마나 지연되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운영을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일하게 하셨기 때문에 기다리신다. 인간의 실수와 허물로 교회가 무너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다시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고 이루실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 된 사람들은 성령의 지도를 절대적으로 받아야 한다.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런데 교과 저자가 지적했듯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따와서 말씀 선포하는 단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생각과 사회적 관심을 늘어놓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정말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증언의 말씀은 그것이 바로 천국열쇠라고 하였다. 말씀을 올바르게 따르지 않는 것은 말씀이 정죄한다.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고 따르면 말씀이 그를 사망에서 풀어 생명으로 옮긴다. 정말 제자들을 양육하려고 하면 오직 말씀에 의하여 성령의 지도를 받아 일해야 한다.
교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능력을 부여하셨다. 또한 그들을 통제하기보다 권위를 주어 그분의 말씀과 모본에 따라 봉사하도록 하셨다.
넷째날(수) 3월19일
추수를 위한 일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6~38).
1. 우리는 이 말씀에서 현재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임무를 위해 어떤 중요한 기별을 들어야 하는가?
답: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적은 것은 교회가 추수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교회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고 교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데 힘을 쏟고 실제로 제자를 삼는 일은 두 번째 세 번째로 밀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교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교회에서 일할 일꾼들을 제대로 양성하지 않으면 제자를 삼는 일꾼이 부족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교회가 튼튼하지 않으면 제자 삼는 일도 할 수 없다.
영적으로 수확할 곡식은 쌓였지만 추수할 일꾼은 거의 없다. 마음밭이 준비되어 영적 씨앗이 뿌려졌고, 발아한 후 풍부한 수분과 햇빛을 받고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이제 무르익은 영혼은 수확되기만을 기다리지만 추수꾼은 어디 있단 말인가? 간단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회화적인 문체로 예수님은 전염성이 강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려 하셨다.
때로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신자와의 교제를 갈망하며 함께 무리를 짓지만, 세상에서 추수를 기다리는 자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거룩한 책임감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들은 교회 일, 공공의 의무, 건물 관리 그리고 현상유지를 위한 여러 훌륭한 계획들로 분주하다. 이것들 모두가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진지한 신자들은 전도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이렇게 하소연한다. “목사님, 이런 전도 방식도 좋지만,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필요 없지 않나요?”
상당히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도 있어야 한다. “언제 예수님이 곡물창고지기의 부족 때문에 탄식하셨습니까?” 그분은 추수할 일꾼을 더 많이 보내달라고 간구하셨다.
<부가설명> 교인된 사람들은 어느 경우에나 곡식을 거둘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설명하도록 공부하고 기억하고 훈련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없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성경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였다.(딤후3:15) 예수님은 당신께서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가르치기 전에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첫째 선생은 성령이시다.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구원의 도리를 알기 위하여 그것이 기록된 장절을 살피고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따라 여러 구절들을 연결하여 확실한 대답을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록된 본문을 중히 여겨야 한다. 주석이나 기타 참고 책들은 어디까지나 참고 책일 뿐이다. 기도하고 성령의 지도를 간절히 사모하며 깨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면 성령께서 이끌어주실 것이다. 일단 답을 얻었으면 그것이 성경 전체의 사상에 일치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한 문제에서는 답이 훌륭한 것 같아도 전체적으로 사슬처럼 아름답게 연결되지 않으면 그 대답은 잘못 된 것이다. 일꾼이 되기 위하여 계속 자기를 교육시켜야 한다.
교훈: 교회는 내적 연합과 유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추수할 일꾼을 더 많이 필요로 하신다.
다섯째날(목) 3월20일
잃었다가 다시 찾음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예수님은 교훈과 모본을 통해 제자들로 하여금 죄인들 심지어 창녀과 세리 같은 악명 높은 자들과도 교제하도록 가르치셨다. 그들이 어떻게 온 세상을 제자로 삼을 수 있을까? 그분의 가르침은 종종 이러한 죄인들에게 집중되었다. 예수님이 그들을 “잃은” 자로 여기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인지 증명한다. 그분은 그들을 “반역적인 무리” 또는 “타락한 자들”로 여기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잃은 자”라는 표현을 선택하셨다.
“잃은”이란 표현은 다른 표현에 비해 부정적 어감이 없다. 우리는 타락한 영혼들을 책망하기보다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잃은”이란 단어는 찾는 자들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는 관대한 표현이다. 폄하하는 발언은 잃은 자들을 멀리 떠나게 한다. 중립적인 언어는 용납과 관계의 가능성을 전달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잃은 자들을 찾는 사람이 되도록 권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잃은 자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이든 어떤 방식의 삶을 살든 상관없이 그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봉사는 이것이니 곧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사 58:6~7)이다. 그대 자신이 오직 그대의 천부의 사랑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죄 가운데서 고생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불행을 당한 자와 참회하는 자들을 질투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서 이기심의 얼음이 녹아내리면 그대는 하나님과 같은 동정심을 가지게 되고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210~211).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잃은 양 비유와 잃은 은전 비유와 잃은 아들 비유를 하셔서 책임이 목자와 주부(主婦)와 아버지에게 있다는 인상으로 가르치셨다. 사실 양은 스스로 도망갔다. 아들도 스스로 집을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은 양”이라고 표현하셨다. 책임을 양에게 묻지 않고 목자가 지는 정신이다. 잃은 아들도 그렇다. 은전은 스스로 도망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주부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 지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잃은”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내셨다. 그래서 말씀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잃은 지구와 그 사람들을 찾으러 세상에 오셨다. 목자로 오셨다. 그리고 죽기까지 하시므로 잃은 것을 찾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로나 결코 쉽지 않다.
교훈: 예수님은 타락한 죄인들을 묘사할 수 있는 다른 표현보다 ‘잃은’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심으로 비난보다는 동정하고 구원해야 할 책임을 강조하셨다.
여섯째날(금) 3월2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488~496 “갈릴리로부터의 마지막 여행”, 436~444 “누가 가장크냐?”, <사도행적>, 17~24 “열두 제자의 훈련”, 25~34 “대사명”, 35~46 “오순절” 47~56 “성령의 선물”을 읽어 보라.
“제자들은 영적인 필요를 느끼고 영혼 구원 사업에 적합한 거룩한 정열을 달라고 주께 부르짖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을 위한 축복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혼 구원에 대한 부담에 눌려 있었다. 그들은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능력을 간구하였다”(사도행적, 3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예수님의 훈련 방법에서 오늘날 제자 훈련 교사들이 활용해야 할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훈련이 그대의 교회에서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보십시오.
※ 예수께서는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시고 준비되도록 기다리시는 방법으로 훈련시켰다.
➋ 목요일에 우리는 언어의 문제와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을 검토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단어들을 정해진 의미로 사용하지만, 그 단어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는 자들을 상대할 때 어떻게 언어 선택에 더욱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 우리만이 사용하는 특정 용어들을 사용하는데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도록 바르게 표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정죄하는 듯한 언어들은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➌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습은 복음 전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그 모습과 그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합니까?
※ 우리 자신에게는 빵이 없다. 생명의 떡은 오직 예수님이다. 우리도 예수님께 얻어먹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떡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떡이 필요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떡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➍ 그대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그대의 교회는 교회 자체와 그 필요에 초점을 맞춥니까? 아니면 복음 전파에 초점을 맞춥니까? 복음 전파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교회에 얼마나 이롭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 교회가 전도활동에 더욱 집중하고 자체의 필요에 관심을 덜 기울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도를 열심히 하면 어떻게 그러한 필요가 해결됩니까?
※ 교회를 튼튼히 하는 것은 곧 전도를 활발히 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 그냥 교회 자체를 튼튼히 하는 것을 위하여 튼튼히 하는 것은 교회가 하는 바른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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