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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예수님과 낙오자들(문제와 대답과 부가설명)02/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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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2-07 12:36 조회8,3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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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11분

기억절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연구범위: 마 21:28~32, 요 8:1~11, 막 5:1~20, 요 4:5~32, 마 9:9 ~13.

한 여인이 감옥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15세의 나이에 이미 혼외 자녀를 출산한 비운의 배경이 있었다. 유일한 살붙이였던 아이를 데려 가려고 방문한 사회복지사를 살해한 죄목으로 그녀는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 남편, 친척 심지어 친구 하나 없이 그녀는 험악한 미래를 혼자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한 목사의 방문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과오와 절망적인 상황 그리고 앞으로 닥칠 운명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자신을 용서하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어린 소녀를 보는 세상의 시선과 관계없이 그녀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알게 되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 영혼은 사회규범이나 선한 사람들의 친절을 능가하는 사랑과 용납의 주 안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였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표준이 높고, 중독의 문제가 덜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➋ 느끼기 : 그러한 특권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한다.
➌ 행하기 : 예수님처럼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돌보는 일에 헌신한다.

A.
❷ 예수님은 사회적 낙오자들을 어떻게 대하셨으며 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 이해와 수용으로 대하셨따. 그들의 필요를  제공하셨다.
❸ 우리 주변에서 사회적 낙오자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 인생의 확실한 목표가 없이 사는 사람들도 포함되지 않을까?
❹ 우리 교회가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의 소망과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이 소망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는 것을 합리적이고 사랑과 이해로 전파해야 할 것이다.

B.
❷ 어떻게 예수님은 소위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을까요?
※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의 친구가 되셨으며 보통사람으로 사셨기 때문에 그들이 가까이 따랐다.
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극복하셨던 편견은 무엇입니까?
※ 민족과 인종과 신분과 남녀 관계의 편견을 깨뜨렸다.

결론: 사회적 낙오자들을 돌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첫째날(일) 2월9일
밑바닥 인생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 21:31~32).

사회는 계층을 만든다. 부자와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선량하고 평범한 시민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중간 계층을 점유한다.
그러면 밑바닥에 매춘부, 약물중독자, 범죄자, 노숙자 등이 남는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환자와 세리도 하류층에 포함되었다.

1. 마 21:28~32, 눅 15:1~10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사회적 낙오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태도를 보이셨는가?
[마21: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눅15:1~10]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답: 사회에서 낙오자로 취급받는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지도계급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2. 어떤 일 때문에 사회적 낙오자들이 자기 의를 높이는 자들 앞에 나타났는가? 간혹 사회 지도층은 놓치지만 하류 인생들이 찾아낸 사실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상류층보다 하층민을 구원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답: 요한의 증거로 인하여 그들이 요한의 침례를 받고 믿고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였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찾아낸다.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적 낙오자들은 비록 악한 쾌락에 굳어져 있거나 자기만의 벽에 갇혀 있지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지도층보다 구원하기가 쉽다. 사회적 낙오자들의 허세 뒤에는 보통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정서적 공허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십대에 그들은 공개적으로 반항하며 내적인 불확실성을 보상받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광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이란 다분히 의도적으로 자신을 지도하는 사람(부모)의 바람과 정반대로 수립된다.
예수님은 이미 낮아진 그들의 자존감에 손상을 입히려 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들의 자존감을 새롭게 하셨다. 그분은 사회적 낙오자들에 대한 일관성 있는 사랑과 용납으로 그러한 기초를 놓으셨다. 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따뜻한 사랑과 용납에 녹곤 하였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사람들을 취급하실 때에 세심하게 하셨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당장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안 되도록 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2장에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에서 돈 바꾸는 자의 상을 취급하시는 모습이나,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비둘기 상자를 취급하시는 모습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돈을 얹어둔 상을 둘러 엎으신 것이 아니고 돈을 쏟아놓으신 다음에 상을 엎으셨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가지고 나가라고 하셨다. 돈이 있는 채로 상을 엎으시면 돈이 여기저기 튀어서 환전상이 그 돈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앞에 쏟아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비둘기 장을 열어버리면 비둘기가 날아가 버려서 상인이 손해를 볼 것이 때문에 그냥 그것을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 이것이 보통사람들, 민초들을 대하신 예수님의 섬세함이다.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그들을 이해하는 것도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상대를 십분 배려하시는 정신으로 일하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사회의 하층민들에게도 따뜻한 사랑을 베푸셨다. 그리고 그들은 상류층보다 주님의 은혜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였다.


둘째날(월) 2월10일
“현장에서”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요 8:7~8).

1. 요 8:1~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사회적 낙오자들에 대해 어떤 사실을 배우는가?
[요8:1~1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답: 예수님은 사회적 낙오자들을 동정하시고 돌보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일하셨다.

감람산에서 영적으로 재충전하신 뒤에 예수님은 성전으로 돌아오셨다.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동안, 바리새인들이 그분 앞에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다. 그들은 간음죄에 대하여 사형을 지시한 모세의 법을 가지고 예수께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이 진실하지 못함을 아셨다.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함정에 빠뜨리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로마의 통치 아래서 유대 법정은 사형을 구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대지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그녀의 사형을 반대하면 율법에 대한 그의 충성을 포기했다고 주장하고 역으로 그분이 사형 집행을 지지하면, 로마법을 어겼다고 고소할 작정이었다.
지도자들의 이러한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으로 이 무력하고 죄 많은 여인이 붙잡혀 온 것이다. 예수님의 일에 대하여 낯설었다면 그녀는 그분의 자비하신 품성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은 마치 그녀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잊을 수 없는 전제를 달았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말씀은 공평의 장을 만들었다. 죄 없는 사람은 무자비한 형벌을 집행할 권한을 갖고, 반대로 죄 있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자비를 베풀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을 제외하면 죄 없는 사람이 없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조용히 사라졌고, 죄가 있는 이 사회적 낙오자는 은혜를 받았다.

<부가설명>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런 사실과 사건들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죄인과 낙오자들을 불쌍히 여기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처럼 대하지는 못한다. 우리 자신에게 예수님 같은 능력과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을 예수의 몸인 교회가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고 하셨다. 교회는 예수의 몸이고 예수님이 머리이고 교인들은 지체들이다.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지체들이 각각 지체로서 자기 일을 감당하면 예수께서 행하신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교인들 각자는 또 이런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면 유쾌하게 여기지 않는다. 지체들은 이런 사상에서 벗어나야한다. 우리도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들 대하듯 하는 마음과 태도가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주님의 용서하신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가 변해야 할 것이다.

교훈: 세상은 사회적 낙오자에게 무자비한 법을 적용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기보다 먼저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신다.


셋째날(화) 2월11일
최하위층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막 5: 2).

1. 막 5:1~20을 읽어 보라. 이 사람의 처지와 오늘날 노숙자들의 어려움을 비교해보라. 그에 대한 묘사와 정신질환자들의 상태를 비교해 보라. 비슷한 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오늘날의 사회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알리라고 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막5:1~20]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답: 귀신들린 사람은 비록 노숙을 하고 있지만 현재 정신이상 없이 노숙하는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노숙한다는 것을 그때나 지금이나 다 딱한 일이다. 정신질환자와 비슷한 것은 온전한 정신활동이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귀신이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는 그들을 정신병원으로 보내서 치료하게 하고 있고, 그런 처지가 안 되면 거의 방치하는 상태가 아닐까? 이 사람은 이방인이었다. 예수께서 알리라고 한 경우는 대개 이방인 환자를 치료했을 때이다. 유대인에게 예수님의 일을 알리게 되면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데 너무 일찍 방해가 이를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는 그 같은 끔찍한 상태로 묘지에서 사는 사람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어떤 사람은 그가 단지 정신병자였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달리 말한다. (만약 그가 단지 정신병자라면 돼지 떼에 일어난 일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귀신 들린 사람이든, 정신질환자이든 또는 약물중독자이든 아무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도 가능한 한 도움이 제공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의 한계 너머에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에게 최대한의 친절과 존중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가 감히 어떤 사람은 희망이 없다거나 하나님의 능력 밖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관점에서는 상황이 나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무한히 소중하다.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정신적인 손상과 장애를 가진 자들과 대면할 때에 기억해야 할 점이다.

<부가설명> 이 사건은 예수께서 사람을 존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람은 사실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를 표상하고 있다. 그런 인류에게서 사단이 속히 떠나야 한다. 사단은 생명체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을 돼지 떼가 몰사하는 장면으로 연출하였다. 그러나 왜 예수께서 다른 사람의 정당한 소유의 그 많은 재산의 손실을 당하게 하셨는가라는 윤리적 의문은 남게 된다. 이 문제는 대답이 쉽지 않은 문제로 예수님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건이다. 만일 그 소유주가 유대인이었다면 그가 모세의 율법을 어긴 파렴치한이었기 때문에 그를 징책(懲責)할 목적으로 이 같은 큰 손해를 입혔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은 걸핏하면 모세의 율법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럴지라도 예수께서 이런 식으로 손해를 보게 하시는 분은 아니다. 만일 그 소유주가 이방인이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그런데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그것을 예수께서 허락하셨는데, 귀신의 이런 전략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악선전할 재료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가라고 했다. 그런 결과를 미리 아시는 예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다. 예수께서 사망이 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봉사하시는데 사람은 이익을 위하여 사람의 고귀성을 돌보지 않는데 대한 질책이 이 사건에 숨어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의 윤리는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하는데 맞추어져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부정한 돼지보다 돌봄을 받지 못하는 사회의 비정을 책망하시는 충정이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리적인 문제나 재산상의 피해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計劃)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이러한 재산상의 피해를 통해 사람이 영적, 정신적, 사회적 회복 및 건강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하면, 첫째는 사람은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과 돼지를 두고 사람 안에서 귀신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권위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을 높이셨다. 둘째는 돼지에게 귀신들이 들어가게 허락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귀신의 활동영역에 대하여 암시한다.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다. 이러한 돼지에게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심으로써 귀신의 활동 장소는 부정한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교훈: 우리는 정상적인 소통, 일상적인 활동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봉사와 구원의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넷째날(수) 2월12일
우물가의 여인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 4:9).

요 4:5~32을 연구하고 다음의 질문에 답하라.
1. 예수님은 어떤 사회적 통념을 허무셨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이야기는 사회적 통념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며 특히 그것이 우리의 전도활동을 저해할 때에 어떻게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어떤 사회적 통념이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대의 활동을 방해하는가?

답: 민족적 인종적 차별과 접촉 불가의 통념을 허무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서 복음을 전하심으로 사회적 통념은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요소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셨다. 재림교회를 이단으로 내모는 일반개신교의 통념이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요소이다.

2.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여인의 은밀한 삶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접근 방식에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답: 정죄하지 않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우리도 이 교훈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3. 이 이야기는 제자들의 편견에 대해 어떤 사실을 나타내는가? 어떤 식으로 우리도 그와 동일한 잘못을 범할 수 있는가?

답: 제자들이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일반 유대인이 가진 것과 같은 편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우리도 속한 사회의 통념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4. 사마리아 여인은 성적으로 문란한 자신의 삶을 예수께서 아신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고 마을에 들어가 그분에 대해 증언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정말 어떤 분인지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말을 통해 드러냈는가? 여기서 우리는 제자 양육에 필요한 인내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답: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라는 말은 아직도 의심이 있다는 표현이다. 사람들이 확신이 갈 때까지 인내와 온유로 대해야한다.

<부가설명> 죄가 들어온 후에 인류는 창조주를 더욱 멀리 배반하고 바벨탑을 쌓으면서 언어가 갈라지면서 언어를 따라 민족과 종족으로 갈라지고 문명과 야만이 갈라지고 지역을 따라 생활풍습이 달라지고 이런 역사가 흐르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겨나고 결국은 빈부귀천이 형성되었다. 이런 상태는 인류를 구원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데 엄청난 방해가 되는 상태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상 구조를 타파하셔야 하셨다. 그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런 사상을 타파하도록 가르치셨다. 사마리아 여자를 일부러 찾으시고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데는 이런 의도가 있었다. 이것은 영원한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고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일체의 행복으로 영원히 살아갈 것을 암시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교훈: 예수님은 유대인이 가기를 꺼려하는 사마리아에 들어가셔서 자신의 은밀한 삶 때문에 이웃을 멀리하는 한 여인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셨다.


다섯째날(목) 2월13일
세리와 죄인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우리는 죄가 침입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수천년이 지나도 천연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과 선하심을 증명한다. 그러나 죄로 어두워진 우리의 심령은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삶이 어떠했을지 헤아리지 못한다. 단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모든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계급 차별, 편견, 문화적, 인종적 경계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러한 경계가 사라지리라는 기대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세상이 더 악화되면서 이러한 장벽도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낙오자들에게 큰 심적 고통과 아픔을 야기하는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1. 마 9:9~13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말이 아닌 그분의 행동에서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특히 호 6:6을 인용하면서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에 주목하라. 우리는 모두 어느 사회의 일부분이며 어느 사회에나 있는 편견과 사회적 장벽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예수님이 그토록 강하게 비난하셨던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9:9~13]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답: 진정한 성경의 종교의 본질은 긍휼과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비난한다면 우리도 동일한 편견에 사로잡힌 상태를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된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앉으사 식사하고 계신 것을 보았다. 그는 조용하고 침착하였으며, 친절하고, 예모가 있었으며, 우의에 넘친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보고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지만 그것은 자기들의 행동 양식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그 광경을 참고 볼 수가 없었다”(화잇주석, 마 9:11).
“거만한 바리새인들이 자고하면서 그들이 가진 것과 같은 특권과 빛의 축복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였다. 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미워하고 멸시하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들의 죄가 더 컸다. 하늘의 빛이 그들의 가는 길을 거스려 비치고 있었다.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는 말씀이 들렸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말하였다”(화잇주석, 마 9:11).

<부가설명> 우리는 종교인들이라면 도덕적으로 일정 수준에 이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렇다. 모든 고등종교의 종교인들은 도덕적으로 수양이 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인정받고 존경받아야 한다. 그들이 잘못하면 세속 사람들은 실망한다. 자신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못 살아도 그들은 올바로 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세속의 지탄을 받지 않게 살아가야 하는데, 인간이라 그렇지 못한 경우가 세상에 노출되는데 대하여 많은 스트레스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서 지탄을 받는 사람들을 부르셨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을 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런 모습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아주 불편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런 지탄의 대상들이 예수를 만나서 평안을 얻고 회복이 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였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이었다. 그분에게는 생명이 있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 역사를 받아들이면 그 생명의 본질을 따라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경험에 들어가고, 주위의 보통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이 생명을 소개하는 통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훈: 타락한 이후 세상에는 줄곧 계급과 인종 차별이 존재해 왔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경계를 극복하고 사회적 낙오자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여섯째날(금) 2월1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183~195 “야곱의 우물에서”, 333~341 “잠잠하라 고요하라”, 460~462 “함정 가운데서”, <치료봉사>, 164~169 “시험받는 자들을 도와 줌”, 171~182 “부절제한 사람을 위한 봉사”, 183~200 “직업 없고 집 없는 사람들을 도와 줌”을 읽어 보라.

“그분께서 결코 호의를 보이실 수 없었던 한 계급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존심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
타락한 사람들은 그들이 사람답게 되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지도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확신을 가지고 인류를 영화롭게 하셨으므로 인류의 명예를 스스로 간직하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가장 깊이 타락한 사람들일지라도 존중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적의(敵意)와 부패와 불순을 접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분에게 끊임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감정에 충격을 받았다거나 당신의 고상한 취미가 훼손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을 결코 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악습과 강한 편견과 거만한 감정이 어떠하든지 그분께서는 그 모든 것을 동정 깊은 친절로 대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을 받게 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유사한 시험과 시련을 당하는 형제들로, 또한 이따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고자 애쓰며, 낙담과 어려움에 부딪혀 싸우고, 동정과 도움을 갈망하고 있는 형제들로 여기게 될 것이다”(치료봉사, 164~16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사회적 낙오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다가서기 위해서 회중의 습관 중에 무엇을 고쳐야 할까요? 가장 까다롭고 힘든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때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합리적 기대는 무엇입니까?
※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 중에 하나처럼 여김을 받도록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특별한 무리인 것 같은 인상과 태도를 버려야 한다. 겸손과 섬김과 말씀의 확신으로 확고부통한 신앙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➋ 예수님은 어떻게 죄에 대한 변명을 인정하거나 죄인을 정죄하는 태도를 모두 피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신뢰, 격려, 확신을 활용하여 사회적 낙오자들의 추락을 역전시키셨습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낙오자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봤음에도 예수님은 어떻게 이 잠재적 제자들이 자신을 편하게 느끼도록 하셨을까요?
※ 예수님은 용서하는 봉사를 하셨기 때문에 이 두 상태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태도였다. 예수님은 그들과 어울리되 그들과 같은 상태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생명의 운동력을 확인시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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