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과 예수님과 낙오자들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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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4-02-07 11:55 조회4,854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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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7 과 예수님과 낙오자들
기억절:“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8-30)
첫째 날(일) 밑바닥 인생
*도입질문: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차별적일 수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주류와 비주류라는 용어 자체가 사람들의 죄의 본성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자본과 명예, 지식, 권력 등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사람 사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일 뿐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보다도 더 귀한 존재들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의 잘 못된 기준에 의해서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을 주고 싶어하십니다.(롬5:20)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사랑이기에, 소외당하였다고 느끼는 사람은 차별 없이 주시는 사랑의 거리에서 그 만큼 더 멀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주시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다.
창36장에는 주류처럼 보이는 야곱에 비해 비주류처럼 보이는 에서의 이야기와 그 후손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 전체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외당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록입니다.
요21:25말씀처럼 예수님의 기록만 기록에 남긴다 할지라도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한 장 더 남기기보다는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비주류 인생들인 에서와 그들의 후손의 계보를 1장 속에 빽빽이 기록에 담아두셨습니다.
소외당했다고 느끼고, 마음에 좌절과 열등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그들 모두를 하나님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로 보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낙심하고 절망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타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시지만 그들은 그 사랑을 받을만한 자리가 줄어들어서 예민하게 반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을 때에 생명력 충만함이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에 예민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안타까워 하십니다.
둘째 날(월) “현장에서”
*도입질문: 이 세상에서 사회적 낙오자에 대한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이 어떻게 다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요8장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힘 있는 여인의 상대방에 대하여는 간과한 채, 오직 힘없는 여인만 잡아서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사회적 약자이기에 당시의 권력자들은 무자비한 법적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의 길과 새로운 삶을 제시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누가 주류인지, 누가 비주류인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한 반면, 예수님의 시선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싶은 입장에서 판단하십니다.
돌을 들고 있었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눈에는 반드시 구원하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돌이 상징하는 참 돌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여인을 돌을 던져 죽이지 말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제시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자 돌을 든 사람도 이미 용서하셨지만 그들은 회개의 기회도 놓친 채,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에 의해 정죄 받은 힘없는 여인은 생명 속에 있는 사람이었고, 힘없는 여인을 정죄하다가 예수님을 떠난 의인처럼 보였던 사람들은 생명 밖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받은 사람은 그 사랑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요일3:9)
셋째 날(화) 최하위층
*도입질문: 자기 정신으로 살지 못하고 사단의 영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정신적으로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태어난 사람들이 다르지 않습니다.
크게 보면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인해 이미 사망 속에 있는 자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극진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눈에는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대해야겠습니다.
넷째 날(수) 우물가의 여인
*도입질문: 사회적 편견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사마리아는 유다 사람들에게 별로 좋은 사람처럼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서로 상종도 하지 않을 만큼 서로에게는 큰 벽이 있었습니다.
그 배경은 꽤 오래 전으로 올라갑니다.
솔로몬의 죽음이후에 솔로몬의 아들이었던 르호보암의 억압적인 왕권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 12지파 중 10지파가 지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승계한 르호보암을 중심으로는 남방 유다와 베냐민 2지파가 지지하여 그 나라는 유다라 하였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10지파가 지지하여 북방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만들어졌습니다.
사마리아는 북방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북방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이후에 세워진 모든 왕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졌고, 그 결과 그들은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인해 멸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앗시리아의 정책은 통합정책이어서 정복한 북방이스라엘 사람과 앗시리아 사람들이 서로 혼인을 통해 하나의 나라가 되게 하였습니다.
남방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였지만 바벨론의 정책은 정복당한 민족이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어서 바벨론에 포로 잡혀왔어도 유다 사람들의 특별 자치구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는 남방 유다 사람들에게는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이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한 이방인과 같은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예수님 당시에는 유다 사람들과 이스라엘(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의 편견과 사회적 통념을 과감하게 무너뜨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보셨기 때문에 생명을 막는 모든 편견과 사회적 통념은 다 무너뜨렸습니다.
사마리안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었던 요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골 깊은 사회적 통념도 예수님은 구원의 대상으로서 보셨기 때문에 과감하게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사회적 통념 속에서 내가 편협함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구원의 열망과 반대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생명과 구원을 주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시각에서 사람들을 대해야 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사회적 편견과 사회적 통념이 있다면 과감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섯째 날(목) 세리와 죄인들
*도입질문: 공공연한 지탄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공공연하게 지탄을 받는 사람들, 그들을 함께 지탄해야 내 자신의 의로움이 빛날 것 같게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생명과 구원을 주고 싶으신 예수님의 품성대로 그들을 대하셨습니다.
맞다 틀리다의 눈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의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공공연하게 지탄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귀한 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지속적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사람의 지속적인 행복은 생명력 충만하고, 사랑에 감동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망 속에서 처절하게 좌절하고 자책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서시고 싶어 하시고, 그들의 눈이 절망의 현실에서 생명적 희망인 예수님 자신에게 돌려지기를 심히 원하십니다.
그들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방문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대속하시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셔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인해 안심하고 예수님께로 나아오길 바라십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일깨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의지의 자유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절대적 사랑에 대한 감동의 반응으로 인해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선택을 하게 함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절대적 사랑을 쏟으시고 느끼도록 하십니다.(롬10:21, 고후5:14)
기억절:“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8-30)
첫째 날(일) 밑바닥 인생
*도입질문: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차별적일 수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주류와 비주류라는 용어 자체가 사람들의 죄의 본성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자본과 명예, 지식, 권력 등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사람 사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일 뿐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보다도 더 귀한 존재들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의 잘 못된 기준에 의해서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을 주고 싶어하십니다.(롬5:20)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사랑이기에, 소외당하였다고 느끼는 사람은 차별 없이 주시는 사랑의 거리에서 그 만큼 더 멀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주시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다.
창36장에는 주류처럼 보이는 야곱에 비해 비주류처럼 보이는 에서의 이야기와 그 후손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 전체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외당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록입니다.
요21:25말씀처럼 예수님의 기록만 기록에 남긴다 할지라도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한 장 더 남기기보다는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비주류 인생들인 에서와 그들의 후손의 계보를 1장 속에 빽빽이 기록에 담아두셨습니다.
소외당했다고 느끼고, 마음에 좌절과 열등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그들 모두를 하나님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로 보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낙심하고 절망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타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시지만 그들은 그 사랑을 받을만한 자리가 줄어들어서 예민하게 반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을 때에 생명력 충만함이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에 예민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안타까워 하십니다.
둘째 날(월) “현장에서”
*도입질문: 이 세상에서 사회적 낙오자에 대한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이 어떻게 다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요8장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힘 있는 여인의 상대방에 대하여는 간과한 채, 오직 힘없는 여인만 잡아서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사회적 약자이기에 당시의 권력자들은 무자비한 법적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의 길과 새로운 삶을 제시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누가 주류인지, 누가 비주류인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한 반면, 예수님의 시선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싶은 입장에서 판단하십니다.
돌을 들고 있었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눈에는 반드시 구원하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돌이 상징하는 참 돌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여인을 돌을 던져 죽이지 말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제시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자 돌을 든 사람도 이미 용서하셨지만 그들은 회개의 기회도 놓친 채,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에 의해 정죄 받은 힘없는 여인은 생명 속에 있는 사람이었고, 힘없는 여인을 정죄하다가 예수님을 떠난 의인처럼 보였던 사람들은 생명 밖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받은 사람은 그 사랑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요일3:9)
셋째 날(화) 최하위층
*도입질문: 자기 정신으로 살지 못하고 사단의 영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정신적으로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태어난 사람들이 다르지 않습니다.
크게 보면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인해 이미 사망 속에 있는 자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극진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눈에는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대해야겠습니다.
넷째 날(수) 우물가의 여인
*도입질문: 사회적 편견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사마리아는 유다 사람들에게 별로 좋은 사람처럼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서로 상종도 하지 않을 만큼 서로에게는 큰 벽이 있었습니다.
그 배경은 꽤 오래 전으로 올라갑니다.
솔로몬의 죽음이후에 솔로몬의 아들이었던 르호보암의 억압적인 왕권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 12지파 중 10지파가 지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승계한 르호보암을 중심으로는 남방 유다와 베냐민 2지파가 지지하여 그 나라는 유다라 하였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10지파가 지지하여 북방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만들어졌습니다.
사마리아는 북방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북방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이후에 세워진 모든 왕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졌고, 그 결과 그들은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인해 멸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앗시리아의 정책은 통합정책이어서 정복한 북방이스라엘 사람과 앗시리아 사람들이 서로 혼인을 통해 하나의 나라가 되게 하였습니다.
남방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였지만 바벨론의 정책은 정복당한 민족이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어서 바벨론에 포로 잡혀왔어도 유다 사람들의 특별 자치구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는 남방 유다 사람들에게는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이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한 이방인과 같은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예수님 당시에는 유다 사람들과 이스라엘(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의 편견과 사회적 통념을 과감하게 무너뜨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보셨기 때문에 생명을 막는 모든 편견과 사회적 통념은 다 무너뜨렸습니다.
사마리안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었던 요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골 깊은 사회적 통념도 예수님은 구원의 대상으로서 보셨기 때문에 과감하게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사회적 통념 속에서 내가 편협함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구원의 열망과 반대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생명과 구원을 주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시각에서 사람들을 대해야 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사회적 편견과 사회적 통념이 있다면 과감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섯째 날(목) 세리와 죄인들
*도입질문: 공공연한 지탄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공공연하게 지탄을 받는 사람들, 그들을 함께 지탄해야 내 자신의 의로움이 빛날 것 같게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생명과 구원을 주고 싶으신 예수님의 품성대로 그들을 대하셨습니다.
맞다 틀리다의 눈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의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공공연하게 지탄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귀한 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지속적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사람의 지속적인 행복은 생명력 충만하고, 사랑에 감동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망 속에서 처절하게 좌절하고 자책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서시고 싶어 하시고, 그들의 눈이 절망의 현실에서 생명적 희망인 예수님 자신에게 돌려지기를 심히 원하십니다.
그들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방문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대속하시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셔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인해 안심하고 예수님께로 나아오길 바라십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일깨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의지의 자유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절대적 사랑에 대한 감동의 반응으로 인해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선택을 하게 함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절대적 사랑을 쏟으시고 느끼도록 하십니다.(롬10:21, 고후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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