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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환자들을 제자로 양성함(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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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1-25 06:45 조회8,46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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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5분

기억절 :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15:30~31).

연구범위: 사 53:4, 마 8:17, 막 2:1~12, 빌 4:4~9, 요일 3:20~22, 요 11:37~44.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설교보다 병자를 치료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바치셨다. 그분의 이적은 그분께서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였다. 그분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의 자비의 소식이 그분을 앞서 갔다. 그분께서 지나가신 곳은 어디든지 그분의 동정을 받은 사람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기뻐하였고, 그들이 새로 발견한 능력을 시험하였다. 그들의 입술을 통하여 주께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듣고자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많은 청각장애인에게 그분의 음성은 그들에게 들린 첫 소리였고, 언어장애인들에게 그분의 이름은 그들이 말한 첫 단어였으며, 시각장애인들에게 그분의 얼굴은 그들이 처음으로 본 장면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을 찬양하는 음성을 높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분께서 마을과 도시들을 통과하실 때 그분께서는 마치 생명과 기쁨을 나누어 주는 물줄기 같으셨다”(치료봉사, 19~20).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누구에게나 질병은 불청객이지만 사람들이 질병으로 인해 영적 사물에 마음을 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병자들의 신체적 필요뿐 아니라 정서적, 영적 필요를 돌보기로 다짐한다.
➌ 행하기 : 다른 사람의 영적, 정신적 부담을 덜어준다.

A.
❷ 예수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 영육을 동시에 치료하셨다.
❸ 예수님뿐 아니라 교회의 치료 봉사에는 어떤 중요한 목적이 있을까요?
※ 치료봉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효과적인 도구이다.
❹ 우리 교회는 어떤 방법으로 치료 봉사를 할 수 있을까요?
※ 뉴스타트 방법을 성경과 증언의 원칙대로 시행하는 것으로 봉사할 수 있다.

B.
❷ 공중 봉사에서 예수님은 왜 치료 봉사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생각합니까?
※ 그것이 민중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면서 마음을 열게 하여 생명의 복음을 받을 길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❸ 왜 우리는 치료 봉사를 신체로 제한하지 않고 전인적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 전인적인 치료가 영생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심령이 치료될 때 육신도 건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❹ 치료 봉사가 자칫 본래의 목적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주의해야 할까요?
※ 치료봉사가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결론: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적 건강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만난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한눈에 알아차리셨습니다. 어떻게 우리도 그분처럼 할 수 있을까요?

첫째날(일) 1월26일
치료의 메시아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1. 사 53:4, 마 8:17, 요 9:1~3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말씀들은 어떤 질문을 제기하는가?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가?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마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요9:1~3]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답: 기록된 대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이것은 인간의 질병은 죄와 관계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친히 처리하셨다.

옛날에 질병은 죄악의 결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신 또는 가족의 질병이 죄에 대한 벌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욥기를 보면 욥의 친구들은 그의 질병을 포함한 불행이 감추어진 잘못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즉 그의 죄가 어느 정도 그의 곤경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시각장애를 누군가의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하였다. 이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진단이나 처방이 아니라 속죄였음을 뜻한다. 마태는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그 예언을 성취하셨으며, 그 치유가 그분을 통해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고대의 여러 이방 전설에서도 치유의 신이 등장하지만 인간의 병약함을 짊어지겠다고 제안한 신은 없었다. 이사야는 우리의 질병과 죄악을 담당할 구속주를 예언하였다. 고대의 전설을 보면 왕권의 안위를 위한 대속의 방편이 있다. 왕에 대한 신의 계획을 만족시키기 위해 왕을 대신한 대속자의 희생으로 악의 징벌이 한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신하를 대신하여 왕이 죽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런 일에 대해 예언했고, 마태가 이를 확증했다. 하늘의 왕이 인간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흥미롭게도 사 53:4에 “슬픔”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픔”, “질병”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이 구원을 설교하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여기셨다(눅 4:17~19). 그분은 자신의 사랑과 인격에서 오는 능력으로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사셨다. 또 어떤 이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분의 말씀을 흠모하여 그분을 따랐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대하시는 그분의 모습 때문에 제자가 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그들의 상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부가설명> 유대인들의 사상에는 이 세상에서 잘못 되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죄의 형벌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그렇게 정죄하고 몰아붙였다. 요9:1~3에 기록된 제자들의 질문도 같은 사상의 표현이다. 병이 죄로 인하여 생긴 것은 맞지만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죄의 세상에 죄인이 된 사람들이 죄가 만드는 질병을 앓게 되는 것뿐이다. 개인이 아무리 선해도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의롭게 살면 병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이 계시하는 근본적인 죄는 아담 안에서 죽은 것을 뜻한다. 아담의 후손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로 태어난다.(고전15:22) 병은 이 사망의 전초병(前哨兵)이다. 그러나 그것의 원인은 부모도 본인도 아니고 사단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지적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7) 바울은 자기 육체의 질병을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다. 이것은 모든 질병이 사단으로 인한 것임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이것은 죄가 사단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같은 사상이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질병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귀신들린 병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 요9:3에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셨는데, 많은 교인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랬다고 엉뚱하게 오해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오늘 교과의 성경구절들은 이것을 가르쳐주는 구절들이다. 이런 말씀들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훈: 예수님은 질병의 고통을 짊어지심으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고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을 어루만지시는 구주를 따랐다.


둘째날(월) 1월27일
몸을 치유함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

1. 막 2:1~12을 연구해 보라. 신체적인 질병과 죄와의 연관성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또한 우리가 이 기사에서 어떤 사실은 배우지 말아야 하는가?
[막2:1~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답: 예수께서 중풍환자에게 네 죄를 사했다고 말씀하시므로 질병이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예수님의 치유는 육신의 치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전인을 회복시키는 것임을 드러내셨다.
교과 저자가 배우지 말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저자의 설명을 본다면 영혼과 육신의 분리 사상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이 구절 안에 그런 암시는 없는 것 같은데 반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낙?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인간 존재의 영적 차원(영혼)과 물질적 차원(몸)을 분리했다.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인들은 신체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육체는 일시적으로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기 때문에, 그들은 항구적인 영혼에 비해 몸을 가치 없게 여겼다.
실제로 고대에 가장 유명한 문서 가운데 하나에서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묘사한 글에 따르면 그는 죽음의 목전에서 길고 빼어난 언어로 육체는 매우 부패하고 사악하며 자신이 죽으면 그의 불멸의 영혼이 육체의 방해로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웅변하였다.
물론 성경은 그와 완전히 다른 사실을 가르친다. 인간의 신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로서 심히 기묘하게 지음을 받았다(시 139:14). 더욱이 신체는 영혼과 분리되지 않는다. 몸, 정신, 영은 인간 존재의 다른 측면일 뿐 독립할 수 있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상호 연결된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인 정신과 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께서 치유를 베푸실 때, 그분은 단지 암을 제거하고 심장병을 고치셨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영적 인간 존재를 변화시키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육체만 치유하셨던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항상 삶 전체를 치유하셨다. 그분의 전인적 접근은 육체적 건강이 영적 건강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차피 죽어서 영원한 멸망에 처할 사람을 치유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이 중풍환자를 보셨을 때 그의 생활습관이 죄에 찌든 생활습관인 것을 아셨다. 그를 치유하는 것은 그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그렇게 죄의 사함을 선언하셨다. 그가 죄에 찌든 생활습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육신의 병을 고쳐줄지라도 가서 병 낫기 전과 같은 동일한 생활을 계속하면 또 질병에 사로잡힌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를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먼저 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예수께서 그 환자의 죄를 사하실 때에 그 환자는 정말 죄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온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주위에서는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정죄하는 말로 수군거렸다. 그때 예수께서는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2:8,9)고 물으셨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겪는다. 어느 것이 쉬울까? 필자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이 구절을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네 죄를 사했다는 말이 어렵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일어나 상을 가지고 가라는 말을 대중 앞에서 했는데, 그 환자가 일어나지도 않고 걸어가지도 않으면 그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대중 앞에 폭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정말 병 고치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사람들 눈에 결과가 당장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고해 신부들도 그 말을 한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전인적인 것이며 특히 참으로 죄를 사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진정한 건강을 보여주신다.

교훈: 그리스인들과 달리 성경은 인간의 영, 혼, 육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예수님도 전인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셨다.


셋째날(화) 1월28일
몸과 마음을 치유함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눅 8:35).

예수님은 육체적인 치유와 정신적인 회복을 통해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간혹 예수님께 온 환자들은 정신과 신체에 모두 질병을 앓고 있었다. 신체적 회복은 결코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제자를 삼는 것이었다. 치료는 20년, 50년 멀게는 70년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지만 제자의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원한 삶을 제공한다.
눅 8:26~39에서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에게 함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위한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었다.

1. 마 6:19~34, 벧전 5:7, 고후 4:7~10, 빌 4:4~9, 요일 3:20~22을 연구해 보라. 이 말씀에서 가르치는 원리들은 수많은 정신 질환에 잠재되어 있는 근심, 죄책감, 수치심을 얼마나 격감시킬 수 있는가?
[마6:19~3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고후4:7~1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빌4:4~9]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요일3:20~22]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답: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예수 안에서 용서의 확신을 가지고 기뻐하는 생활을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면 정신적 질병을 넉넉히 이길 것이다.

정신적 자극은 종종 신체적 질환의 원인이 된다. 과학은 정신과 육체의 이러한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긴장하면 배탈을 일으킨다. 걱정은 수면장애의 원인이다. 제어 불가능한 분노는 심장병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정신 건강의 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개인적인 영적 헌신과 온전한 제자의 길로 그들을 자연스럽게 인도해야 한다.
“매일 그 날에 해당하는 걱정과 근심이 있다. 우리가 친구들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려움이 다가올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야기하고 걱정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자 기다리고 계시며, 어려울 때마다 즉시 도움이 되시는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구주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할지도 모른다”(정로의 계단, 121).

<부가설명>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문제를 껴안고 염려하고 고민한다. 염려와 고민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결코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사람은 궁리하고 모색한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어쩌면 사람이 아닐는지 모른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문제와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리라고 권고한다. 그냥 맡기는 것이 아니고 맡겨버리는 것이다. 버리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버릴 줄 알면 염려와 고민에서 해방될 것이다. 영어의 포기라는 말 give up이 참 좋은 뜻인 것 같다. 이 말을 단어 그대로 풀이하며 “위에 주라”는 말이 아닌가. 포기라는 것을 영어 단어대로 생각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성경이 바로 그렇게 가르친다. 네 염려를 모두 주께 맡겨버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하면 정신 질환은 아마도 거의 겪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염려와 문제를 맡으시고 전지(全知)하신 지혜로 맡겨버린 사람에게 인생 전체를 관통하여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에까지 관통하는 가장 유익한 해답을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교훈: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 위해서였다.


넷째날(수) 1월29일
부활과 생명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41).

1. 죽음이 결정권을 쥐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다음의 말씀으로부터 어떤 위대한 소망을 발견하는가? 눅 7:11~17, 막 5:21~43, 요 11:37~44.
[눅7:11~17]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막5:21~43]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요11:37~44]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답: 이 사건들은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명하는 표적들이다. 예수님이 생명이시고 그분을 믿으면 부활의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확증하는 복음이다.

정치가, 연예인, 운동선수들은 필연적으로 인기를 얻기 위한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정치가들은 과장된 미사여구와 엄청난 공약을 활용한다. 연예인들은 감정을 유발시켜서 청중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들의 재능을 사용한다. 운동선수들은 운동 기술을 가지고 관중을 놀라게 한다. 그들을 흠모하는 관객들은 자신도 그러한 솜씨를 소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추종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제시하시는가? 실업률 감소? 고액 연봉? 공을 다루는 뛰어난 재능? 엄청난 음역의 가창력? 감동적인 연기? 아니다. 대신 예수님은 아무도 줄 수 없는 것을 주신다. 다름 아닌 새로운 세계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과 비교하여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TV 홈쇼핑은 믿을 수 없는 조건의 상품으로 우리의 지성을 모욕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과장을 초월하여 배송료, 설치비 걱정 없는 최고의 조건 즉 무료로 영생을 주신다! 회의론자들은 전례가 없는 그 같은 제안을 비웃었다. 그리고 원수는 (영혼불멸설 같은) 허접한 모조품을 만들었다. 잠재 고객들은 각각의 주장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의론에 대항하고, 가짜를 폭로하고, 참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3가지 예증을 드셨다. 야이로의 딸,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는 이처럼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제안이 진짜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물론 여전히 질병과 사고가 지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마침내 승리할 것이었다. 기도한다고 매번 치유가 일어나지는 않을지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이에게 영생이 제공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경우 치유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르러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몇 년씩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질병을 안고 살아가지만 치유되기는커녕 때로 더욱 악화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했어도 끝내 사망한다. 우리는 왜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가 일어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가 안 일어나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적적인 치유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영생의 부활로 나아오리라는 약속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부가설명> 가장 완전한 치유는 생명의 부활을 하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의 모든 간구가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영원한 건강으로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길목이다. 그러니까 잠깐 머무는 길목의 상태에 너무 상심하거나 기뻐 뛰거나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기쁨은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확신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롬5:5) 육신의 질병에서 회복이 되었어도 이 세상에서는 한 번 죽게 되어 있다.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말씀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살려주셨지만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다 죽었다. 예수님의 손에 직접 치료받았던 많은 병자들이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다 죽었다. 한 번 죽는 것은 면할 수 없다.(히9:27)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죽음에서 살려주시는 일로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셨고, 마침내 친히 부활하시므로 그분 자신이 생명이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은 영생의 부활을 한다는 것을 보증하셨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치료이다. 이 생명을 확실히 나누므로 제자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교훈: 우리가 기적적인 치유와 건강한 삶을 바란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최고의 약속은 영생이다.


다섯째날(목) 1월30일
그리스도께서남기신 치유의 유산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행 5:12, 14).

1. 행 3:1~19, 5:12~16, 9:36~42, 20:7~10, 고전 12:7~9, 28~31, 약 5:13~16을 읽어보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약 교회 시대에 치료봉사의 중요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행3:1~19]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5:12~16]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행9:36~42]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행20:7~10]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고전12:7~9, 28~31]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약5:13~16]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답: 신약시대의 제자들은 치료봉사를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이심을 증명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여겼다. 지금 우리들도 성경이 제시하는 건강 원칙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건강의 도리를 전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생명이시며 구주이심을 증거하는 도구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즉 제자를 삼는 일에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할 것이다.

1세기의 제자들은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 1:50, 비교 요 5:20, 14:12)는 예수님의 약속을 직접 체험하였다. 기적적인 치유와 부활이 초기 기독교의 가장 유명한 사도였던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을 통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은 초기 교회 성장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기적적인 치유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는 수천 명의 종교 지도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영향을 미쳤으며 백성들도 그분을 따르게 했다.
종종 새로운 제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오해했다. 시몬은 기적의 능력을 돈을 주어 사려고 시도함으로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나타냈다(행 8:9~25).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이적의 중요성이 그들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능력의 표현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은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백성들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그분을 따랐다. 그들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선교를 발전시켰으며 그분이 심어주신 비전을 성취하고자 했다.
건강은 지속적인 관심사였으며 치료봉사는 교회의 지속적인 역할이었다. 치유는 영적 은사 목록에도 있다. 성경에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은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만 신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친히 함께 계시는 시대에는 그것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보면 각각 다른 시기에 치료봉사에 헌신했던 신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인류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 동기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치료봉사가 완전한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임을 인식했다.

<부가설명> 복음을 전하는데 활용하는 무엇이든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예수님 재림하시면 이 세상 것은 다 지나가고 난 후이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사65:17) 부활한 완전하고 건강한 몸은 다시는 아픈 것이 없을 것이다.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계21:4)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안다. 소망 중에 기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건강하고 올발라야 한다.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소위 이적을 행하는 일이 있다해도 그들이 말하는 것이 율법과 증거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생명의 부활의 아침을 맞지 못할 것이다.(사8:20) 성경이 말하는 부활과 천주교나 일반 개신교가 말하는 부활은 단어만 같지 사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들은 영혼불멸을 믿기 때문에 생명의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잃어버린 일이 없다고 믿는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에 생명은 가지고 있는데, 영혼으로 하늘나라에 있다가 그 영혼이 들어갈 육체가 부활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부활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참으로 생명 자체가 부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창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부활하는 각 성도들에게 하늘에 보관되어 있는 그들의 구원받은 인격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살던 나와 부활하는 나는 동일한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성경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교훈: 예수님의 승천 후에도 제자들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원하였다. 건강과 치료 봉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어져야 할 교회의 중요한 사역이다.


여섯째날(금) 1월3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눅 18:35~43, 13:10~17, 14:1~6, 요 6:1~2, 막 6:5~7, 6:54~56, 7:31~37, 8:22~26, 마 8:1~19, 12:15~23을 읽고, <치료봉사>, 17~21 “우리의 모본”, 73~85 “심령의 치료”, <의료봉사>, 25~29 “의료선교봉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읽어보라.
“중풍병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과 육체가 모두 치료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육체의 건강을 누리기 전에 심령의 건강이 필요했다. 육체의 질병을 고침받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해방을 주고, 심령을 죄에서 정결케 하셔야 한다. 이 교훈을 간과하지 말 것이다. 오늘날 육체적 질병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들은 이 중풍병자와 같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기별을 듣고자 갈망하고 있다. 불안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수반한 죄의 짐이 그들의 질병의 기초가 된다. 그들은 심령을 고쳐 주시는 분 앞에 나오기 전에는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한다. 오직 그분께서 주실 수 있는 화평만이 심령에 활력을 주고 육체에 건강을 줄 것이다.…
불과 얼마 전에 가족들 앞에서 천천히 운반되어 갔던 그 사람이 침상을 가뿐히 가지고 돌아오자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의 집에는 큰 기쁨이 생겼다.… 그 집에서는 기쁨에 넘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으며,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고통받는 자에게 힘을 주신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생애를 예수님께 바칠 준비가 되었다”(치료봉사, 7 7~7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떻게 치료봉사를 통해 복음에 대하여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까? 신자들이 치료봉사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는 실수를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건강이 악화되어 고통 받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쳐주신 방법으로 치유가 되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마음이 열리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선 현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첫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치료봉사가 복음의 전파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➋ 성경에서 치유의 기사를 읽고 기적적인 치유의 소망을 가지고 교회나 병원에 온 잠재적 제자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그들을 위해 어떤 답이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 자신을 위한 답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경우 도움이 되는 성경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 복음의 참된 사실을 깨닫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이적들의 복음적 의미를 알아듣도록 잘 설파해 주어야 할 것이다. 영생과 부활의 확신을 가지게 되면 현실적인 결과를 보지 않아도 제자가 되어 영적 치유를 받을 것이다.

댓글목록

최경애님의 댓글

최경애 작성일

교과설명  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음을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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