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환자들을 제자로 양성함(교사강해)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1-24 07:59 조회4,978회 댓글0건첨부파일
- 05제5과 환자들을 제자로 양성함.hwp (96.0K) 81회 다운로드 DATE : 2014-01-24 07:59:34
본문
제5과 환자들을 제자로 양성함
2월 1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5분
기억절 :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15:30~31).
(도입)
이방인의 지역을 지나시면서 주님에 대한 소문은 점점 멀리 퍼져나갔다. 흉악하게 귀신들렸던 가나안 여인의 딸이 치유되었다는 소문의 시작으로부터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건들에 관한 소문이 데가볼리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결과는 여자와 어린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4천 명이 넘는 큰 무리가 모였다. 그들이 데려온 장애자들을 주님 앞에 앉혔고 주님은 그들을 고쳐주셨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v.31)고 기록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는 구절로 미루어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데가볼리 지방의 이방인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방인들이 왜 주님에게 몰려들었을까? 주님의 능력을 직접 보았거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능치 못함이 없으신 주님이시다. 주님 곁에 있으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주님은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질병과 육신적 지적 장애를 고치실뿐만 아니라 죄 사함의 능력도 있으신 분이시다. 이방인들이지만 능력의 주님을 알고 모여들었다. 유대인 일반 서민들 중에는 능력의 주님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온 다리 저는 사람, 장애인, 맹인, 말 못하는 사람과 그 외에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게 되었다. 어떤 병에 걸렸든지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온 사람은 다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은 병든 인생들을 온전케 하시는 치료의 주님이시다. 이렇게 치료를 받은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되었다.
연구범위: 사 53:4, 마 8:17, 막 2:1~12, 빌 4:4~9, 요일 3:20~22, 요 11:37~44.
*안교반과 소그룹을 일원화시키면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설교보다 병자를 치료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바치셨다. 그분의 이적은 그분께서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였다. 그분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의 자비의 소식이 그분을 앞서 갔다. 그분께서 지나가신 곳은 어디든지 그분의 동정을 받은 사람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기뻐하였고, 그들이 새로 발견한 능력을 시험하였다. 그들의 입술을 통하여 주께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듣고자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많은 청각장애인에게 그분의 음성은 그들에게 들린 첫 소리였고, 언어장애인들에게 그분의 이름은 그들이 말한 첫 단어였으며, 시각장애인들에게 그분의 얼굴은 그들이 처음으로 본 장면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을 찬양하는 음성을 높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분께서 마을과 도시들을 통과하실 때 그분께서는 마치 생명과 기쁨을 나누어 주는 물줄기 같으셨다”(치료 봉사, 19~20).
안교활동반과교과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누구에게나 질병은 불청객이지만 사람들이 질병으로 인해 영적 사물에 마음을 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병자들의 신체적 필요뿐 아니라 정서적, 영적 필요를 돌보기로 다짐한다.
➌ 행하기 : 다른 사람의 영적, 정신적 부담을 덜어준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각자 가장 심하게 앓았던 질병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 원치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❷ 예수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❸ 예수님뿐 아니라 교회의 치료 봉사에는 어떤 중요한 목적이 있을까요?
❹ 우리 교회는 어떤 방법으로 치료 봉사를 할 수 있을까요?
B. ❶ 병원 치료뿐 아니라 믿음과 뉴스타트 생활로 건강을 회복한 분들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❷ 공중 봉사에서 예수님은 왜 치료 봉사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생각합니까?
❸ 왜 우리는 치료 봉사를 신체로 제한하지 않고 전인적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❹ 치료 봉사가 자칫 본래의 목적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주의해야 할까요?
결론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적 건강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만난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한눈에 알아차리셨습니다. 어떻게 우리도 그분처럼 할 수 있을까요?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설 연휴 안부를 묻습니다.
❷ 전도해야 할 가족이나 친척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❸ 전도해야 할 가족과 친척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1월26일
치료의 메시아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교사강해 1)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병을 담당하실 그리스도를 예언하였다. 예수님은 인간이 귀신들리고 병든 것은 연약하기 때문임을 아셨다. 육신이 연약하여 육신의 병이 생긴다. 마음이 연약하여 의존적이 되고,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상처를 입게 된다. 영혼이 연약하여 사단의 유혹에 잘 넘어가고 세상의 죄에 쉽게 빠지게 되기도 한다. 사람은 강한 것 같지만 실상 연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순결한 인생을 살기 원하지만 연약하여 원치 않게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요즘에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슬프거나 울적함이 도를 지나쳐,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지거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며, 생각이 비관적으로 되는 우울증에 고통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 인간의 연약함은 죄에서 오는 것이다.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 인간은 얼굴에 땀을 흘리며 겨우 먹고살기 위해 일생을 수고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하나님 없이, 사명이 없이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땀을 흘러야 할 때 사람들은 연약해 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우리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다. 세상에서는 연약하고 부족한 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무시하지 많으시고 이해하시며 섬겨주셨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셨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신다. 예수님께 나의 연약함을 내려놓을 때 병든 내면이 나음을 받아,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점점 더 강한 자로 빚어지게 된다.(딤후 2:1)
사 53:4, 마 8:17, 요 9:1~3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말씀들은 어떤 질문을 제기하는가?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가?
옛날에 질병은 죄악의 결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신 또는 가족의 질병이 죄에 대한 벌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욥기를 보면 욥의 친구들은 그의 질병을 포함한 불행이 감추어진 잘못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즉 그의 죄가 어느 정도 그의 곤경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시각장애를 누군가의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하였다. 이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진단이나 처방이 아니라 속죄였음을 뜻한다. 마태는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그 예언을 성취하셨으며, 그 치유가 그분을 통해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고대의 여러 이방 전설에서도 치유의 신이 등장하지만 인간의 병약함을 짊어지겠다고 제안한 신은 없었다. 이사야는 우리의 질병과 죄악을 담당할 구속주를 예언하였다. 고대의 전설을 보면 왕권의 안위를 위한 대속의 방편이 있다. 왕에 대한 신의 계획을 만족시키기 위해 왕을 대신한 대속자의 희생으로 악의 징벌이 한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신하를 대신하여 왕이 죽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런 일에 대해 예언했고, 마태가 이를 확증했다. 하늘의 왕이 인간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흥미롭게도 사 53:4에 “슬픔”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픔”, “질병”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교훈
예수님은 질병의 고통을 짊어지심으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고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을 어루만지시는 구주를 따랐다.
부가적용)
「2005년에 KBS TV 『인간극장』에 <내게 너무 예쁜 당신> 이라는 제목으로 한 부부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 부부는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칠을 해서 먹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 유금옥씨가 20미터 사다리차에서 페인트칠을 하다가 추락하는 큰 사고를 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아내는 4년 동안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 이길수씨는 그 아내가 언젠가는 깨어날 것을 믿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수발을 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아내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랑해"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아내는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한다. 그녀의 정신 연령은 5살짜리 꼬마 상태이다. 그런 아내를 남편 이길수 씨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7년 동안 병수발을 하였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위해서 파마도 시켜주고, 얼굴 마사지도 해주고, 예쁘게 화장도 해주고, 그녀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서 별의 별 곳을 다 데리고 다녔다. 남편은 아내의 병수발을 하느라고 자기를 위해 쓸 시간이 없다. 있는 돈도 다 쓰고 화장품 외판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변함없이 아내의 병상을 지키고 있다. PD가 그 남편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처럼 헌신적으로 병든 아내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남편이 대답을 하였다. "아내를 사랑하니까 그렇죠. 그래도 저는 제 아내가 너무나 예쁜 걸요" 그래서 인간극장 제목이 <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다. 남편은 자신이 과거 젊은 시절에 망나니같이 살 때 그 아내가 자신의 모든 허물을 담당해 주고 참아주고 섬겨 준 것을 생각할 때에 아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럽고 예쁘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남편을 보면서 '담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짊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알것 같다. '담당한다' '짊어진다'는 것은 아내의 병과 연약함을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로 여기며 돌봐주는 것이다. 이러한 병을 없애고자 포기치 않고 헌신을 다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과 연약함을 짊어지신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하고 병든 것을 책망하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으신다.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며, 병들고 연약한 우리를 이해해 주신다. 우리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감당해 주신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과 연약한 것을 다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대신 채찍에 맞으셨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 다시 말해 모든 죄를 다 가져 가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친히 담당하시는 사랑, 짊어지시는 사랑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예수님이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는 육체 또는 마음의 질병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이 구원을 설교하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여기셨다(눅 4:17~19). 그분은 자신의 사랑과 인격에서 오는 능력으로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사셨다. 또 어떤 이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분의 말씀을 흠모하여 그분을 따랐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대하시는 그분의 모습 때문에 제자가 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그들의 상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적용|
주변에 질병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치유의 구주를 소개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고통당하는 자의 치료자- “예수께서는 자신에 관한 예언의 산 설명자로서 사람들 앞에 서셨다. 그는 자기가 읽은 말씀을 설명하시면서 메시야를 압박받는 자의 구원자요, 사로잡힌 자의 해방자요, 고통당하는 자의 치료자요,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키며 세상에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자로서 말씀하셨다”(시대의 소망, 237).
기 도
예수님, 온 몸과 마음까지 병들어 있는 저를 보옵소서. 주님의 치유의 손을 제게 얹어주셔서 깨끗함을 얻게 해 주시옵소서. 죄의 저주와 질병의 고통에서 놓임을 얻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1월27일
몸을 치유함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
교사강해 3)
예수께서는 인간을 치료하실 때에 몸을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치료하셨다. 몸과 마음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는지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치유는 언제나 마음의 치유와 함께 몸의 치료가 이루어지는 전인치유를 행하셨다. 인간은 여러 개로 나누어진 집합체가 아닌 나눌 수 없는 하나의 통합체다. 예를 들어 영적 질병이 마음이나 육체에, 마음의 질병이 육체나 영에, 육체의 질병이 마음이나 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전인치유란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단회적 개념이 아닌 질병으로부터의 회복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혼, 즉 전인이 온전한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불균형적인 삶의 방식에 균형과 조화를 가져다주는 실제적 접근이 전인치유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전인치유는 단절된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사회와 국가를 정화시키는 개념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 원효대사는 한국불교의 최고의 존재로 40세 때 중국 유학의 길을 가던 중 산속의 토굴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마침 목이 갈(渴)하여 캄캄한 밤중에 옆에 놓인 바가지에 물이 있음을 알고 그 물을 마셨다. 그 물맛은 감로수(甘露水)처럼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낸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밤에 먹은 물이 해골바가지의 물인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나온 것이다. 똑같은 물이 어제 밤에는 잘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그 물을 보니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문제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동일한 물건이나 현상이 자기의 마음에 따라서 그 몸에 이상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모두가 사람의 몸을 다스리는 마음의 문제임을 아는 것이다. 몸을 상대한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요 마음이 사람의 관리자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의 행동은 다 마음의 표현이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는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于先) 우리는 기도와 믿음으로 마음을 회개하고 정결케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몸을 병들게 한 마음을 먼저 치료하신 것이다.
막 2:1~12을 연구해 보라. 신체적인 질병과 죄와의 연관성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또한 우리가 이 기사에서 어떤 사실은 배우지 말아야 하는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인간 존재의 영적 차원(영혼)과 물질적 차원(몸)을 분리했다.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인들은 신체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육체는 일시적으로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기 때문에, 그들은 항구적인 영혼에 비해 몸을 가치 없게 여겼다.
실제로 고대에 가장 유명한 문서 가운데 하나에서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묘사한 글에 따르면 그는 죽음의 목전에서 길고 빼어난 언어로 육체는 매우 부패하고 사악하며 자신이 죽으면 그의 불멸의 영혼이 육체의 방해로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웅변하였다.
물론 성경은 그와 완전히 다른 사실을 가르친다. 인간의 신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로서 심히 기묘하게 지음을 받았다(시 139:14). 더욱이 신체는 영혼과 분리되지 않는다. 몸, 정신, 영은 인간 존재의 다른 측면일 뿐 독립할 수 있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상호 연결된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인 정신과 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께서 치유를 베푸실 때, 그분은 단지 암을 제거하고 심장병을 고치셨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영적 인간 존재를 변화시키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육체만 치유하셨던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항상 삶 전체를 치유하셨다. 그분의 전인적 접근은 육체적 건강이 영적 건강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차피 죽어서 영원한 멸망에 처할 사람을 치유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교훈
그리스인들과 달리 성경은 인간의 영, 혼, 육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예수님도 전인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셨다.
부가적용)
대전시 유성에 있는 국군군의관학교에 가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커다란 돌비가 있다. 거기에는 “살려야 한다”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군의관으로서 군대에서 상처 입은 군인들을 끝까지 살려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그곳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군의관이 저들의 사명 진술에 있어 군인을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영과 육과 혼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슬로건을 걸면 어떨까?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에덴의 회복과 인류가 상실한 영생의 회복, 그리고 영적인 능력의 회복, 육체적 능력의 회복을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치유를 경험해 보았습니까?
우리의 질병은 물론 죄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죄가 많다고 불치병에 걸리는 것도, 죄가 적다고 질병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단지 죄의 저주 아래 있는 피해자일뿐입니다. 따라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한 자들이 어떤 문제 때문에 그런 불행이 찾아왔는지 고민할 때 우리는 우리도 그들과 같은 불행을 당할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온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게 하시는 치유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적용|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를 떠나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육체적 질병과 영적 질병을 치유하심- “그리스도께서는 병자와 고통당하는 자와 귀신들린 자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그분은 당신의 치유의 능력을 받기 위해 찾아온 자들을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 그리고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나온 치유의 능력이 이러한 불쌍한 영혼들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들은 자기의 죄를 깨달았으며 많은 사람이 저희 육체적 질병과 함께 영적인 질병도 고침을 받았다”(시대의 소망, 823).
기 도
아버지, 우리에게 아름다운 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의 영향으로 나약해졌지만 아버지께서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몸도 구원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온전하게 치유받지 못해도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입게 될 부활의 날을 소망합니다.
셋째날(화) 1월28일
몸과 마음을 치유함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눅 8:35).
교사강해 3)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귀는 우리에게 찾아와서 언어 심사 행동을 훼방해 발을 걸고 자꾸 넘어지게 하고 실수하게 하고 그 다음은 억압한다. 마귀가 심신을 억압해서 자유를 빼앗고 우울하고 탄식하고 염려 근심의 노예가 되게 하고 나중에 제정신이 아니게 마음에 병이 들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다니시면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쳤다고 했으니 오늘날에도 마음이 눌린 이가 고침을 받을 수 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 주의 뜻이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십자가의 은혜로 해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 같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늘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늘 감사하는 삶을 살기 원하시지 마음에 슬픔이 꽉 들어차고 염려, 근심이 짓누르고 불평, 원망, 탄식, 미움, 원한이 꽉 들어찬 삶을 살기 원치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적이며 고질적인 염려와 근심, 불안과 초조를 나타내는 증상은 치료 받아야 된다. 진실한 사랑 앞에서 정신적인 건강은 꿈과 소망을 갖고 건강하게 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바로 치료의 역사를 베푸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치유와 정신적인 회복을 통해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간혹 예수님께 온 환자들은 정신과 신체에 모두 질병을 앓고 있었다. 신체적 회복은 결코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제자를 삼는 것이었다. 치료는 20년, 50년 멀게는 70년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지만 제자의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원한 삶을 제공한다.
눅 8:26~39에서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에게 함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위한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었다.
마 6:19~34, 벧전 5:7, 고후 4:7~10, 빌 4:4~9, 요일 3:20~22을 연구해 보라. 이 말씀에서 가르치는 원리들은 수많은 정신 질환에 잠재되어 있는 근심, 죄책감, 수치심을 얼마나 격감시킬 수 있는가?
정신적 자극은 종종 신체적 질환의 원인이 된다. 과학은 정신과 육체의 이러한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긴장하면 배탈을 일으킨다. 걱정은 수면장애의 원인이다. 제어 불가능한 분노는 심장병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정신 건강의 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개인적인 영적 헌신과 온전한 제자의 길로 그들을 자연스럽게 인도해야 한다.
“매일 그 날에 해당하는 걱정과 근심이 있다. 우리가 친구들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려움이 다가올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야기하고 걱정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자 기다리고 계시며, 어려울 때마다 즉시 도움이 되시는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구주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할지도 모른다”(정로의 계단, 121).
교훈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 위해서였다.
부가적용)
정신치료계의 거두인 레오나르 캠머 박사는 30년 동안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왔다. 그는 정신 건강을 위해 인간관계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절대로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교제해야 합니다. 정신질환은 대부분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환자들 중에는 우연히 걸려온 전화 한 통이, 혹은 모르는 사람이 걸었던 말 한 마디가 치료를 가져 오고 인생이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처방하는 치료와 간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지만, 그들이 받았던 관심과 사랑은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굉장히 깊은 병인데 전화 한통 받아서 위로받는 것이 마음의 큰 변화를 가져오고 따뜻한 손길 한번 스쳐가는 것이 마음에 큰 감동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에 돌아가서 관심어린 사랑의 말을 하여야 한다. 그 말이 서로서로를 위로하고 치료하고 힘을 주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자꾸 꾸짖고 결점을 들춰내지 말고 격려를 해주어야 한다. “잘한다. 할 수 있다. 너는 위대한 사람은 될 수 있다. 너는 건강하다”고 위로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그 말이 굉장한 용기를 주고 치료를 주고 새로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는 정신에 나타나는 병이므로 비난과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의학적인 조치를 통해 치료가 필요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진정한 관심과 사랑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면 정신적인 병은 일어나지도 아니할 것이고 또한 대다수가 낫는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건강을 악화시킬 만한 어떤 정신적, 정서적 문제가 있습니까?
걱정, 불안, 중압감은 현대인들의 정신적 상태를 요약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쉽게 분노를 표출하며 짜증을 냅니다. 많은 사람이 심리적 이유로 소화불량과 수면부족을 호소합니다. 마음의 상태는 분명 건강과 질병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개역, 마 6:34).
|적용|
그대는 어떻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기로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마음과 육체의 밀접한 관계- “마음과 육체 간에 존재하는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그 중 하나가 병에 걸리면 다른 하나가 동정하게 된다. 마음의 상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보다 건강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질병의 대부분은 정신적 우울에서 온다. 슬픔, 걱정, 불만, 후회, 죄책감, 불신 이 모든 것은 생명력을 저하시키고 쇠약과 죽음을 초래한다”(치료봉사, 241).
기 도
우리의 몸뿐 아리라 마음까지 치유하시는 주님, 제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마음의 근심과 걱정을 버리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건강한 제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넷째날(수) 1월29일
부활과 생명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41).
교사강해 4)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시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시는 동안 야이로 집 사람들이 와서 그 아이가 죽었다고 말했다(막 5:35절).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사람들의 이 말 속에는 절망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일을 보기도 했고 소문으로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실 수는 있을지라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이로가 절망하거나 믿음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시며, “달리다굼”(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이라는 능력의 말씀으로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36-42절). 죽은 자도 살리는 생명과 부활의 권세를 가진 분임을 보여 주신 것이다. “달리다굼”은 오늘날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무기력해지고 절망에 빠져 있는 우리들이 소망과 부활의 권능을 덧입고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말씀이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베푸시는 주님의 섬세하고 인격적인 사랑과 평안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한다. 또한 생명과 부활의 권능을 새롭게 덧입고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믿음의 세계를 활보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죽음이 결정권을 쥐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다음의 말씀으로부터 어떤 위대한 소망을 발견하는가? 눅 7:11~17, 막 5:21~43, 요 11:37~44.
정치가, 연예인, 운동선수들은 필연적으로 인기를 얻기 위한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정치가들은 과장된 미사여구와 엄청난 공약을 활용한다. 연예인들은 감정을 유발시켜서 청중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들의 재능을 사용한다. 운동선수들은 운동 기술을 가지고 관중을 놀라게 한다. 그들을 흠모하는 관객들은 자신도 그러한 솜씨를 소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추종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제시하시는가? 실업률 감소? 고액 연봉? 공을 다루는 뛰어난 재능? 엄청난 음역의 가창력? 감동적인 연기? 아니다. 대신 예수님은 아무도 줄 수 없는 것을 주신다. 다름 아닌 새로운 세계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과 비교하여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TV 홈쇼핑은 믿을 수 없는 조건의 상품으로 우리의 지성을 모욕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과장을 초월하여 배송료, 설치비 걱정 없는 최고의 조건 즉 무료로 영생을 주신다! 회의론자들은 전례가 없는 그 같은 제안을 비웃었다. 그리고 원수는 (영혼불멸설 같은) 허접한 모조품을 만들었다. 잠재 고객들은 각각의 주장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의론에 대항하고, 가짜를 폭로하고, 참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3가지 예증을 드셨다. 야이로의 딸,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는 이처럼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제안이 진짜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물론 여전히 질병과 사고가 지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마침내 승리할 것이었다. 기도한다고 매번 치유가 일어나지는 않을지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이에게 영생이 제공되었다.
교훈
우리가 기적적인 치유와 건강한 삶을 바란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최고의 약속은 영생이다.
부가적용)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마지막 절망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삼켜 버린다. 어린이도 젊은이도, 노인도 다 삼켜 버린다. 죽음의 확률은 100%이다. 아무도 죽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이것을 믿느냐?" 여러분은 이 말씀을 진정으로 믿으시는가? 진정 이 말씀을 믿으신다면 무엇이 그리도 염려가 되겠는가?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허락받은 자들이다. 그러할진대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렵다 해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 영원한 하늘나라가 예비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위대한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네가 나를 믿느냐? 네가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네가 나를 믿으면 살아나는 기적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온전히 체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예수님께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영생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질병이나 죽음을 받아들일 믿음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경우 치유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르러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몇 년씩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질병을 안고 살아가지만 치유되기는커녕 때로 더욱 악화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했어도 끝내 사망한다. 우리는 왜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가 일어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가 안 일어나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적적인 치유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영생의 부활로 나아오리라는 약속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적용|
그대는 임종을 앞둔 신자에게 어떻게 부활과 영생의 확신을 심어주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영생의 소망의 중심이 되시는 분을 쳐다보라- “오래지 아니하여 우리는 우리의 영생의 소망의 중심이 되신 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 앞에서는 이생에서 겪은 모든 시련과 고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 쳐다보라. 쳐다보라. 그리하여 그대들의 믿음이 계속 증가되게 하라. 그대들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거쳐 구속받은 자들을 위한 넓고 끝없는 먼 저쪽의 미래의 영광을 향해 가는 좁은 길을 따라야 한다”(교회증언 9권, 287).
기 도
아버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 남았음을 믿습니다. 짧지만 제가 누렸던 첫 번째 생명도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의 재림과 부활을 소망합니다. 그 소망이 더 크고 확실하여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미련없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1월30일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치유의 유산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행 5:12, 14).
교사강해 5)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관한 여러 기록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 자신과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먼저 그 안에서부터 은혜가 충만했고, 한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썼으며, 함께 예배하는 기쁨이 있었고, 모든 것을 모두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사랑의 삶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는 필연적으로 밖으로 손을 펼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모든 문제의 해결과 치유의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하고 교회를 탄압하려는 세력도 한 쪽에 있었지만 세상은 교회에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지금 한국의 교회는 어떠한가? 오늘날 한국교회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누렸던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오히려 불신과 비난과 냉대의 대상이 되어 있다. 물론 교회가 어떻게 하든 교회에 대하여 적대적인 세력들의 악의적인 책동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잃어버린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처럼 먼저는 바른 믿음 위에 서고 사랑으로 충만하여 기쁨이 있고 나눔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랑과 기쁨과 나눔은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 사이에서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안에서 잡고 서로를 보듬는 손길은 반드시 세상을 향해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거리로 나가고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봉사의 그림자가 덮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인색한 교회는 세상을 잃게 된다. 세상이 교회의 그림자를 싫어하게 된다면 교회는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다. 요즈음 한국사회는 거리에 교회가 안 보이기를 원한다. 교회의 그림자조차도 싫어한다. 그래서 교회건물을 지으려 하면 방해와 장애가 많다. "시끄럽다, 집값 떨어진다. 교통 혼잡 일어난다. 주차 힘들어진다" 등 온갖 이유를 들어 교회를 못 짓게 하려고 들고 일어난다. 도시마다 마을마다 교회가 있어주기를 원하는 세상이어야 할 터인데 사정은 그 정반대이다. 예배당이 안 보이면 죽은 마을 같고, 교회가 없으면 불안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없으면 기쁨이 없으니 제발 우리 동네에 교회를 세워달라는 민원과 정부의 협조공문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세상을 바라는 것이 한낮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슬픈 일이다. 이런 것을 한 번 상상해본다. 교회 가까이 있으면 집값 땅값이 떨어지는 현상이 역전되어 서로 교회 옆에 집을 짓고 싶어 하고 예배당의 그림자가 얼마나 덮이느냐에 따라 집값이 올라가는 것이다. 예배당건물의 그림자가 손바닥만큼이라도 덮이는 집에 사는 것을 행복해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날, 그런 세상을 소망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기도하며 힘써야 한다.
행 3:1~19, 5:12~16, 9:36~42, 20:7~10, 고전 12:7~9, 28~31, 약 5:13~16을 읽어보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약 교회 시대에 치료봉사의 중요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1세기의 제자들은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요 1:50, 비교 요 5:20, 14:12)는 예수님의 약속을 직접 체험하였다. 기적적인 치유와 부활이 초기 기독교의 가장 유명한 사도였던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을 통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은 초기 교회 성장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기적적인 치유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는 수천 명의 종교 지도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영향을 미쳤으며 백성들도 그분을 따르게 했다.
종종 새로운 제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오해했다. 시몬은 기적의 능력을 돈을 주어 사려고 시도함으로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나타냈다(행 8:9~25).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이적의 중요성이 그들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능력의 표현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은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백성들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그분을 따랐다. 그들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선교를 발전시켰으며 그분이 심어주신 비전을 성취하고자 했다.
건강은 지속적인 관심사였으며 치료봉사는 교회의 지속적인 역할이었다. 치유는 영적 은사 목록에도 있다. 성경에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교훈
예수님의 승천 후에도 제자들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원하였다. 건강과 치료 봉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어져야 할 교회의 중요한 사역이다.
부가적용)
교회는 예루살렘 초대교회 때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듯이 세상으로 손을 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상이 깜짝 놀랄 일들을 해야 한다. 세상이 감동할 일들을 해야 한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통을 해소하기 위하여 봉사의 손길을 펴야 한다. 교만의 손길이 아니고 겸손의 손길을 펴야 한다. 탐욕의 손이 아니라 희생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손이 아니라 섬기는 손을 건네야 한다. 더러운 손이 아니라 깨끗한 손을 내밀어야 한다. 조건과 계산이 따라붙은 손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의 손길을 주어야 한다. 힘은 없으면서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손이 아니라 힘 있는 그러나 온유한 손을 빌려주어야 한다. 마음이 없는 손이 아니라 가슴이 실린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한편으로는 교회를 두려워하면서도 교회를 칭송하게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아오게 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존경하고 가까이 하려고 하게 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 세상으로부터 사랑 받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치료봉사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지만 이러한 은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만 신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친히 함께 계시는 시대에는 그것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보면 각각 다른 시기에 치료봉사에 헌신했던 신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인류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 동기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치료봉사가 완전한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임을 인식했다.
|적용|
그대가 실천할 수 있는 치료봉사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더 계발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치료의 사명을 주심-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분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병자들을 치료하도록 사명을 주셨다. 70인을 보내실 때, 그분은 그들에게 병자를 고치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도록 명하셨다. 그들의 육체적 건강이 제일 먼저 돌봄을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사도들이 전파할 그러한 진리들로 말미암아 접촉될 수 있도록 길이 준비되게 하기 위함이었다”(교회증언 4권, 225).
기 도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영혼을 자비의 눈길로 바라보시는 주님, 제가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손이 되어 그들을 어루만지고, 건강의 기별을 제시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들이 건강의 길뿐 아니라 영생의 길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1월3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눅 18:35~43, 13:10~17, 14:1~6, 요 6:1~2, 막 6:5~7, 6:54~56, 7:31~37, 8:22~26, 마 8:1~19, 12:15~23을 읽고, <치료봉사>, 17~21 “우리의 모본”, 73~85 “심령의 치료”, <의료봉사>, 25~29 “의료선교봉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읽어보라.
“중풍병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과 육체가 모두 치료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육체의 건강을 누리기 전에 심령의 건강이 필요했다. 육체의 질병을 고침받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해방을 주고, 심령을 죄에서 정결케 하셔야 한다. 이 교훈을 간과하지 말 것이다. 오늘날 육체적 질병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들은 이 중풍병자와 같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기별을 듣고자 갈망하고 있다. 불안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수반한 죄의 짐이 그들의 질병의 기초가 된다. 그들은 심령을 고쳐 주시는 분 앞에 나오기 전에는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한다. 오직 그분께서 주실 수 있는 화평만이 심령에 활력을 주고 육체에 건강을 줄 것이다.…
불과 얼마 전에 가족들 앞에서 천천히 운반되어 갔던 그 사람이 침상을 가뿐히 가지고 돌아오자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의 집에는 큰 기쁨이 생겼다.… 그 집에서는 기쁨에 넘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으며,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고통받는 자에게 힘을 주신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생애를 예수님께 바칠 준비가 되었다”(치료봉사, 7 7~7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떻게 치료봉사를 통해 복음에 대하여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까? 신자들이 치료봉사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는 실수를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➋ 성경에서 치유의 기사를 읽고 기적적인 치유의 소망을 가지고 교회나 병원에 온 잠재적 제자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그들을 위해 어떤 답이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 자신을 위한 답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경우 도움이 되는 성경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월 1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5분
기억절 :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15:30~31).
(도입)
이방인의 지역을 지나시면서 주님에 대한 소문은 점점 멀리 퍼져나갔다. 흉악하게 귀신들렸던 가나안 여인의 딸이 치유되었다는 소문의 시작으로부터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건들에 관한 소문이 데가볼리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결과는 여자와 어린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4천 명이 넘는 큰 무리가 모였다. 그들이 데려온 장애자들을 주님 앞에 앉혔고 주님은 그들을 고쳐주셨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v.31)고 기록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는 구절로 미루어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데가볼리 지방의 이방인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방인들이 왜 주님에게 몰려들었을까? 주님의 능력을 직접 보았거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능치 못함이 없으신 주님이시다. 주님 곁에 있으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주님은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질병과 육신적 지적 장애를 고치실뿐만 아니라 죄 사함의 능력도 있으신 분이시다. 이방인들이지만 능력의 주님을 알고 모여들었다. 유대인 일반 서민들 중에는 능력의 주님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온 다리 저는 사람, 장애인, 맹인, 말 못하는 사람과 그 외에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게 되었다. 어떤 병에 걸렸든지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온 사람은 다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은 병든 인생들을 온전케 하시는 치료의 주님이시다. 이렇게 치료를 받은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되었다.
연구범위: 사 53:4, 마 8:17, 막 2:1~12, 빌 4:4~9, 요일 3:20~22, 요 11:37~44.
*안교반과 소그룹을 일원화시키면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설교보다 병자를 치료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바치셨다. 그분의 이적은 그분께서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였다. 그분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의 자비의 소식이 그분을 앞서 갔다. 그분께서 지나가신 곳은 어디든지 그분의 동정을 받은 사람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기뻐하였고, 그들이 새로 발견한 능력을 시험하였다. 그들의 입술을 통하여 주께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듣고자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많은 청각장애인에게 그분의 음성은 그들에게 들린 첫 소리였고, 언어장애인들에게 그분의 이름은 그들이 말한 첫 단어였으며, 시각장애인들에게 그분의 얼굴은 그들이 처음으로 본 장면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을 찬양하는 음성을 높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분께서 마을과 도시들을 통과하실 때 그분께서는 마치 생명과 기쁨을 나누어 주는 물줄기 같으셨다”(치료 봉사, 19~20).
안교활동반과교과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누구에게나 질병은 불청객이지만 사람들이 질병으로 인해 영적 사물에 마음을 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병자들의 신체적 필요뿐 아니라 정서적, 영적 필요를 돌보기로 다짐한다.
➌ 행하기 : 다른 사람의 영적, 정신적 부담을 덜어준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각자 가장 심하게 앓았던 질병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 원치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❷ 예수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❸ 예수님뿐 아니라 교회의 치료 봉사에는 어떤 중요한 목적이 있을까요?
❹ 우리 교회는 어떤 방법으로 치료 봉사를 할 수 있을까요?
B. ❶ 병원 치료뿐 아니라 믿음과 뉴스타트 생활로 건강을 회복한 분들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❷ 공중 봉사에서 예수님은 왜 치료 봉사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생각합니까?
❸ 왜 우리는 치료 봉사를 신체로 제한하지 않고 전인적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❹ 치료 봉사가 자칫 본래의 목적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주의해야 할까요?
결론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적 건강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만난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한눈에 알아차리셨습니다. 어떻게 우리도 그분처럼 할 수 있을까요?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설 연휴 안부를 묻습니다.
❷ 전도해야 할 가족이나 친척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❸ 전도해야 할 가족과 친척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1월26일
치료의 메시아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교사강해 1)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병을 담당하실 그리스도를 예언하였다. 예수님은 인간이 귀신들리고 병든 것은 연약하기 때문임을 아셨다. 육신이 연약하여 육신의 병이 생긴다. 마음이 연약하여 의존적이 되고,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상처를 입게 된다. 영혼이 연약하여 사단의 유혹에 잘 넘어가고 세상의 죄에 쉽게 빠지게 되기도 한다. 사람은 강한 것 같지만 실상 연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순결한 인생을 살기 원하지만 연약하여 원치 않게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요즘에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슬프거나 울적함이 도를 지나쳐,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지거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며, 생각이 비관적으로 되는 우울증에 고통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 인간의 연약함은 죄에서 오는 것이다.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 인간은 얼굴에 땀을 흘리며 겨우 먹고살기 위해 일생을 수고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하나님 없이, 사명이 없이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땀을 흘러야 할 때 사람들은 연약해 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우리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다. 세상에서는 연약하고 부족한 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무시하지 많으시고 이해하시며 섬겨주셨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셨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신다. 예수님께 나의 연약함을 내려놓을 때 병든 내면이 나음을 받아,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점점 더 강한 자로 빚어지게 된다.(딤후 2:1)
사 53:4, 마 8:17, 요 9:1~3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말씀들은 어떤 질문을 제기하는가?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가?
옛날에 질병은 죄악의 결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신 또는 가족의 질병이 죄에 대한 벌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욥기를 보면 욥의 친구들은 그의 질병을 포함한 불행이 감추어진 잘못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즉 그의 죄가 어느 정도 그의 곤경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시각장애를 누군가의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하였다. 이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진단이나 처방이 아니라 속죄였음을 뜻한다. 마태는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그 예언을 성취하셨으며, 그 치유가 그분을 통해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고대의 여러 이방 전설에서도 치유의 신이 등장하지만 인간의 병약함을 짊어지겠다고 제안한 신은 없었다. 이사야는 우리의 질병과 죄악을 담당할 구속주를 예언하였다. 고대의 전설을 보면 왕권의 안위를 위한 대속의 방편이 있다. 왕에 대한 신의 계획을 만족시키기 위해 왕을 대신한 대속자의 희생으로 악의 징벌이 한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신하를 대신하여 왕이 죽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런 일에 대해 예언했고, 마태가 이를 확증했다. 하늘의 왕이 인간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흥미롭게도 사 53:4에 “슬픔”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픔”, “질병”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교훈
예수님은 질병의 고통을 짊어지심으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고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을 어루만지시는 구주를 따랐다.
부가적용)
「2005년에 KBS TV 『인간극장』에 <내게 너무 예쁜 당신> 이라는 제목으로 한 부부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 부부는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칠을 해서 먹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 유금옥씨가 20미터 사다리차에서 페인트칠을 하다가 추락하는 큰 사고를 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아내는 4년 동안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 이길수씨는 그 아내가 언젠가는 깨어날 것을 믿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수발을 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아내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랑해"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아내는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한다. 그녀의 정신 연령은 5살짜리 꼬마 상태이다. 그런 아내를 남편 이길수 씨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7년 동안 병수발을 하였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위해서 파마도 시켜주고, 얼굴 마사지도 해주고, 예쁘게 화장도 해주고, 그녀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서 별의 별 곳을 다 데리고 다녔다. 남편은 아내의 병수발을 하느라고 자기를 위해 쓸 시간이 없다. 있는 돈도 다 쓰고 화장품 외판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변함없이 아내의 병상을 지키고 있다. PD가 그 남편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처럼 헌신적으로 병든 아내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남편이 대답을 하였다. "아내를 사랑하니까 그렇죠. 그래도 저는 제 아내가 너무나 예쁜 걸요" 그래서 인간극장 제목이 <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다. 남편은 자신이 과거 젊은 시절에 망나니같이 살 때 그 아내가 자신의 모든 허물을 담당해 주고 참아주고 섬겨 준 것을 생각할 때에 아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럽고 예쁘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남편을 보면서 '담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짊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알것 같다. '담당한다' '짊어진다'는 것은 아내의 병과 연약함을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로 여기며 돌봐주는 것이다. 이러한 병을 없애고자 포기치 않고 헌신을 다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과 연약함을 짊어지신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하고 병든 것을 책망하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으신다.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며, 병들고 연약한 우리를 이해해 주신다. 우리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감당해 주신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과 연약한 것을 다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대신 채찍에 맞으셨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 다시 말해 모든 죄를 다 가져 가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친히 담당하시는 사랑, 짊어지시는 사랑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예수님이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는 육체 또는 마음의 질병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이 구원을 설교하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여기셨다(눅 4:17~19). 그분은 자신의 사랑과 인격에서 오는 능력으로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사셨다. 또 어떤 이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분의 말씀을 흠모하여 그분을 따랐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대하시는 그분의 모습 때문에 제자가 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그들의 상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적용|
주변에 질병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치유의 구주를 소개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고통당하는 자의 치료자- “예수께서는 자신에 관한 예언의 산 설명자로서 사람들 앞에 서셨다. 그는 자기가 읽은 말씀을 설명하시면서 메시야를 압박받는 자의 구원자요, 사로잡힌 자의 해방자요, 고통당하는 자의 치료자요,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키며 세상에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자로서 말씀하셨다”(시대의 소망, 237).
기 도
예수님, 온 몸과 마음까지 병들어 있는 저를 보옵소서. 주님의 치유의 손을 제게 얹어주셔서 깨끗함을 얻게 해 주시옵소서. 죄의 저주와 질병의 고통에서 놓임을 얻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1월27일
몸을 치유함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
교사강해 3)
예수께서는 인간을 치료하실 때에 몸을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치료하셨다. 몸과 마음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는지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치유는 언제나 마음의 치유와 함께 몸의 치료가 이루어지는 전인치유를 행하셨다. 인간은 여러 개로 나누어진 집합체가 아닌 나눌 수 없는 하나의 통합체다. 예를 들어 영적 질병이 마음이나 육체에, 마음의 질병이 육체나 영에, 육체의 질병이 마음이나 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전인치유란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단회적 개념이 아닌 질병으로부터의 회복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혼, 즉 전인이 온전한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불균형적인 삶의 방식에 균형과 조화를 가져다주는 실제적 접근이 전인치유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전인치유는 단절된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사회와 국가를 정화시키는 개념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 원효대사는 한국불교의 최고의 존재로 40세 때 중국 유학의 길을 가던 중 산속의 토굴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마침 목이 갈(渴)하여 캄캄한 밤중에 옆에 놓인 바가지에 물이 있음을 알고 그 물을 마셨다. 그 물맛은 감로수(甘露水)처럼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낸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밤에 먹은 물이 해골바가지의 물인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나온 것이다. 똑같은 물이 어제 밤에는 잘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그 물을 보니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문제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동일한 물건이나 현상이 자기의 마음에 따라서 그 몸에 이상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모두가 사람의 몸을 다스리는 마음의 문제임을 아는 것이다. 몸을 상대한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요 마음이 사람의 관리자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의 행동은 다 마음의 표현이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는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于先) 우리는 기도와 믿음으로 마음을 회개하고 정결케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몸을 병들게 한 마음을 먼저 치료하신 것이다.
막 2:1~12을 연구해 보라. 신체적인 질병과 죄와의 연관성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또한 우리가 이 기사에서 어떤 사실은 배우지 말아야 하는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인간 존재의 영적 차원(영혼)과 물질적 차원(몸)을 분리했다.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인들은 신체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육체는 일시적으로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기 때문에, 그들은 항구적인 영혼에 비해 몸을 가치 없게 여겼다.
실제로 고대에 가장 유명한 문서 가운데 하나에서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묘사한 글에 따르면 그는 죽음의 목전에서 길고 빼어난 언어로 육체는 매우 부패하고 사악하며 자신이 죽으면 그의 불멸의 영혼이 육체의 방해로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웅변하였다.
물론 성경은 그와 완전히 다른 사실을 가르친다. 인간의 신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로서 심히 기묘하게 지음을 받았다(시 139:14). 더욱이 신체는 영혼과 분리되지 않는다. 몸, 정신, 영은 인간 존재의 다른 측면일 뿐 독립할 수 있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상호 연결된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인 정신과 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께서 치유를 베푸실 때, 그분은 단지 암을 제거하고 심장병을 고치셨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영적 인간 존재를 변화시키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육체만 치유하셨던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항상 삶 전체를 치유하셨다. 그분의 전인적 접근은 육체적 건강이 영적 건강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차피 죽어서 영원한 멸망에 처할 사람을 치유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교훈
그리스인들과 달리 성경은 인간의 영, 혼, 육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예수님도 전인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셨다.
부가적용)
대전시 유성에 있는 국군군의관학교에 가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커다란 돌비가 있다. 거기에는 “살려야 한다”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군의관으로서 군대에서 상처 입은 군인들을 끝까지 살려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그곳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군의관이 저들의 사명 진술에 있어 군인을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영과 육과 혼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슬로건을 걸면 어떨까?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에덴의 회복과 인류가 상실한 영생의 회복, 그리고 영적인 능력의 회복, 육체적 능력의 회복을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치유를 경험해 보았습니까?
우리의 질병은 물론 죄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죄가 많다고 불치병에 걸리는 것도, 죄가 적다고 질병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단지 죄의 저주 아래 있는 피해자일뿐입니다. 따라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한 자들이 어떤 문제 때문에 그런 불행이 찾아왔는지 고민할 때 우리는 우리도 그들과 같은 불행을 당할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온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게 하시는 치유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적용|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를 떠나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육체적 질병과 영적 질병을 치유하심- “그리스도께서는 병자와 고통당하는 자와 귀신들린 자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그분은 당신의 치유의 능력을 받기 위해 찾아온 자들을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 그리고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나온 치유의 능력이 이러한 불쌍한 영혼들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들은 자기의 죄를 깨달았으며 많은 사람이 저희 육체적 질병과 함께 영적인 질병도 고침을 받았다”(시대의 소망, 823).
기 도
아버지, 우리에게 아름다운 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의 영향으로 나약해졌지만 아버지께서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몸도 구원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온전하게 치유받지 못해도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입게 될 부활의 날을 소망합니다.
셋째날(화) 1월28일
몸과 마음을 치유함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눅 8:35).
교사강해 3)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귀는 우리에게 찾아와서 언어 심사 행동을 훼방해 발을 걸고 자꾸 넘어지게 하고 실수하게 하고 그 다음은 억압한다. 마귀가 심신을 억압해서 자유를 빼앗고 우울하고 탄식하고 염려 근심의 노예가 되게 하고 나중에 제정신이 아니게 마음에 병이 들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다니시면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쳤다고 했으니 오늘날에도 마음이 눌린 이가 고침을 받을 수 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 주의 뜻이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십자가의 은혜로 해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 같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늘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늘 감사하는 삶을 살기 원하시지 마음에 슬픔이 꽉 들어차고 염려, 근심이 짓누르고 불평, 원망, 탄식, 미움, 원한이 꽉 들어찬 삶을 살기 원치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적이며 고질적인 염려와 근심, 불안과 초조를 나타내는 증상은 치료 받아야 된다. 진실한 사랑 앞에서 정신적인 건강은 꿈과 소망을 갖고 건강하게 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바로 치료의 역사를 베푸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치유와 정신적인 회복을 통해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간혹 예수님께 온 환자들은 정신과 신체에 모두 질병을 앓고 있었다. 신체적 회복은 결코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제자를 삼는 것이었다. 치료는 20년, 50년 멀게는 70년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지만 제자의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원한 삶을 제공한다.
눅 8:26~39에서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에게 함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위한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었다.
마 6:19~34, 벧전 5:7, 고후 4:7~10, 빌 4:4~9, 요일 3:20~22을 연구해 보라. 이 말씀에서 가르치는 원리들은 수많은 정신 질환에 잠재되어 있는 근심, 죄책감, 수치심을 얼마나 격감시킬 수 있는가?
정신적 자극은 종종 신체적 질환의 원인이 된다. 과학은 정신과 육체의 이러한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긴장하면 배탈을 일으킨다. 걱정은 수면장애의 원인이다. 제어 불가능한 분노는 심장병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정신 건강의 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개인적인 영적 헌신과 온전한 제자의 길로 그들을 자연스럽게 인도해야 한다.
“매일 그 날에 해당하는 걱정과 근심이 있다. 우리가 친구들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려움이 다가올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야기하고 걱정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자 기다리고 계시며, 어려울 때마다 즉시 도움이 되시는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구주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할지도 모른다”(정로의 계단, 121).
교훈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 위해서였다.
부가적용)
정신치료계의 거두인 레오나르 캠머 박사는 30년 동안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왔다. 그는 정신 건강을 위해 인간관계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절대로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교제해야 합니다. 정신질환은 대부분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환자들 중에는 우연히 걸려온 전화 한 통이, 혹은 모르는 사람이 걸었던 말 한 마디가 치료를 가져 오고 인생이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처방하는 치료와 간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지만, 그들이 받았던 관심과 사랑은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굉장히 깊은 병인데 전화 한통 받아서 위로받는 것이 마음의 큰 변화를 가져오고 따뜻한 손길 한번 스쳐가는 것이 마음에 큰 감동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에 돌아가서 관심어린 사랑의 말을 하여야 한다. 그 말이 서로서로를 위로하고 치료하고 힘을 주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자꾸 꾸짖고 결점을 들춰내지 말고 격려를 해주어야 한다. “잘한다. 할 수 있다. 너는 위대한 사람은 될 수 있다. 너는 건강하다”고 위로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그 말이 굉장한 용기를 주고 치료를 주고 새로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는 정신에 나타나는 병이므로 비난과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의학적인 조치를 통해 치료가 필요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진정한 관심과 사랑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면 정신적인 병은 일어나지도 아니할 것이고 또한 대다수가 낫는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건강을 악화시킬 만한 어떤 정신적, 정서적 문제가 있습니까?
걱정, 불안, 중압감은 현대인들의 정신적 상태를 요약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쉽게 분노를 표출하며 짜증을 냅니다. 많은 사람이 심리적 이유로 소화불량과 수면부족을 호소합니다. 마음의 상태는 분명 건강과 질병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개역, 마 6:34).
|적용|
그대는 어떻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기로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마음과 육체의 밀접한 관계- “마음과 육체 간에 존재하는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그 중 하나가 병에 걸리면 다른 하나가 동정하게 된다. 마음의 상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보다 건강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질병의 대부분은 정신적 우울에서 온다. 슬픔, 걱정, 불만, 후회, 죄책감, 불신 이 모든 것은 생명력을 저하시키고 쇠약과 죽음을 초래한다”(치료봉사, 241).
기 도
우리의 몸뿐 아리라 마음까지 치유하시는 주님, 제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마음의 근심과 걱정을 버리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건강한 제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넷째날(수) 1월29일
부활과 생명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41).
교사강해 4)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시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시는 동안 야이로 집 사람들이 와서 그 아이가 죽었다고 말했다(막 5:35절).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사람들의 이 말 속에는 절망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일을 보기도 했고 소문으로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실 수는 있을지라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이로가 절망하거나 믿음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시며, “달리다굼”(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이라는 능력의 말씀으로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36-42절). 죽은 자도 살리는 생명과 부활의 권세를 가진 분임을 보여 주신 것이다. “달리다굼”은 오늘날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무기력해지고 절망에 빠져 있는 우리들이 소망과 부활의 권능을 덧입고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말씀이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베푸시는 주님의 섬세하고 인격적인 사랑과 평안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한다. 또한 생명과 부활의 권능을 새롭게 덧입고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믿음의 세계를 활보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죽음이 결정권을 쥐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다음의 말씀으로부터 어떤 위대한 소망을 발견하는가? 눅 7:11~17, 막 5:21~43, 요 11:37~44.
정치가, 연예인, 운동선수들은 필연적으로 인기를 얻기 위한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정치가들은 과장된 미사여구와 엄청난 공약을 활용한다. 연예인들은 감정을 유발시켜서 청중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들의 재능을 사용한다. 운동선수들은 운동 기술을 가지고 관중을 놀라게 한다. 그들을 흠모하는 관객들은 자신도 그러한 솜씨를 소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추종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제시하시는가? 실업률 감소? 고액 연봉? 공을 다루는 뛰어난 재능? 엄청난 음역의 가창력? 감동적인 연기? 아니다. 대신 예수님은 아무도 줄 수 없는 것을 주신다. 다름 아닌 새로운 세계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과 비교하여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TV 홈쇼핑은 믿을 수 없는 조건의 상품으로 우리의 지성을 모욕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과장을 초월하여 배송료, 설치비 걱정 없는 최고의 조건 즉 무료로 영생을 주신다! 회의론자들은 전례가 없는 그 같은 제안을 비웃었다. 그리고 원수는 (영혼불멸설 같은) 허접한 모조품을 만들었다. 잠재 고객들은 각각의 주장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의론에 대항하고, 가짜를 폭로하고, 참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3가지 예증을 드셨다. 야이로의 딸,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는 이처럼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제안이 진짜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물론 여전히 질병과 사고가 지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마침내 승리할 것이었다. 기도한다고 매번 치유가 일어나지는 않을지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이에게 영생이 제공되었다.
교훈
우리가 기적적인 치유와 건강한 삶을 바란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최고의 약속은 영생이다.
부가적용)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마지막 절망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삼켜 버린다. 어린이도 젊은이도, 노인도 다 삼켜 버린다. 죽음의 확률은 100%이다. 아무도 죽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이것을 믿느냐?" 여러분은 이 말씀을 진정으로 믿으시는가? 진정 이 말씀을 믿으신다면 무엇이 그리도 염려가 되겠는가?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허락받은 자들이다. 그러할진대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렵다 해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 영원한 하늘나라가 예비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위대한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네가 나를 믿느냐? 네가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네가 나를 믿으면 살아나는 기적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온전히 체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예수님께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영생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질병이나 죽음을 받아들일 믿음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경우 치유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르러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몇 년씩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질병을 안고 살아가지만 치유되기는커녕 때로 더욱 악화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했어도 끝내 사망한다. 우리는 왜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가 일어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가 안 일어나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적적인 치유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영생의 부활로 나아오리라는 약속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적용|
그대는 임종을 앞둔 신자에게 어떻게 부활과 영생의 확신을 심어주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영생의 소망의 중심이 되시는 분을 쳐다보라- “오래지 아니하여 우리는 우리의 영생의 소망의 중심이 되신 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 앞에서는 이생에서 겪은 모든 시련과 고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 쳐다보라. 쳐다보라. 그리하여 그대들의 믿음이 계속 증가되게 하라. 그대들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거쳐 구속받은 자들을 위한 넓고 끝없는 먼 저쪽의 미래의 영광을 향해 가는 좁은 길을 따라야 한다”(교회증언 9권, 287).
기 도
아버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 남았음을 믿습니다. 짧지만 제가 누렸던 첫 번째 생명도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의 재림과 부활을 소망합니다. 그 소망이 더 크고 확실하여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미련없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1월30일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치유의 유산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행 5:12, 14).
교사강해 5)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관한 여러 기록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 자신과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먼저 그 안에서부터 은혜가 충만했고, 한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썼으며, 함께 예배하는 기쁨이 있었고, 모든 것을 모두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사랑의 삶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는 필연적으로 밖으로 손을 펼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모든 문제의 해결과 치유의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하고 교회를 탄압하려는 세력도 한 쪽에 있었지만 세상은 교회에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지금 한국의 교회는 어떠한가? 오늘날 한국교회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누렸던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오히려 불신과 비난과 냉대의 대상이 되어 있다. 물론 교회가 어떻게 하든 교회에 대하여 적대적인 세력들의 악의적인 책동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잃어버린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처럼 먼저는 바른 믿음 위에 서고 사랑으로 충만하여 기쁨이 있고 나눔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랑과 기쁨과 나눔은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 사이에서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안에서 잡고 서로를 보듬는 손길은 반드시 세상을 향해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거리로 나가고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봉사의 그림자가 덮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인색한 교회는 세상을 잃게 된다. 세상이 교회의 그림자를 싫어하게 된다면 교회는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다. 요즈음 한국사회는 거리에 교회가 안 보이기를 원한다. 교회의 그림자조차도 싫어한다. 그래서 교회건물을 지으려 하면 방해와 장애가 많다. "시끄럽다, 집값 떨어진다. 교통 혼잡 일어난다. 주차 힘들어진다" 등 온갖 이유를 들어 교회를 못 짓게 하려고 들고 일어난다. 도시마다 마을마다 교회가 있어주기를 원하는 세상이어야 할 터인데 사정은 그 정반대이다. 예배당이 안 보이면 죽은 마을 같고, 교회가 없으면 불안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없으면 기쁨이 없으니 제발 우리 동네에 교회를 세워달라는 민원과 정부의 협조공문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세상을 바라는 것이 한낮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슬픈 일이다. 이런 것을 한 번 상상해본다. 교회 가까이 있으면 집값 땅값이 떨어지는 현상이 역전되어 서로 교회 옆에 집을 짓고 싶어 하고 예배당의 그림자가 얼마나 덮이느냐에 따라 집값이 올라가는 것이다. 예배당건물의 그림자가 손바닥만큼이라도 덮이는 집에 사는 것을 행복해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날, 그런 세상을 소망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기도하며 힘써야 한다.
행 3:1~19, 5:12~16, 9:36~42, 20:7~10, 고전 12:7~9, 28~31, 약 5:13~16을 읽어보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약 교회 시대에 치료봉사의 중요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1세기의 제자들은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요 1:50, 비교 요 5:20, 14:12)는 예수님의 약속을 직접 체험하였다. 기적적인 치유와 부활이 초기 기독교의 가장 유명한 사도였던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을 통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은 초기 교회 성장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기적적인 치유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는 수천 명의 종교 지도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영향을 미쳤으며 백성들도 그분을 따르게 했다.
종종 새로운 제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오해했다. 시몬은 기적의 능력을 돈을 주어 사려고 시도함으로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나타냈다(행 8:9~25).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이적의 중요성이 그들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능력의 표현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은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백성들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그분을 따랐다. 그들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선교를 발전시켰으며 그분이 심어주신 비전을 성취하고자 했다.
건강은 지속적인 관심사였으며 치료봉사는 교회의 지속적인 역할이었다. 치유는 영적 은사 목록에도 있다. 성경에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교훈
예수님의 승천 후에도 제자들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원하였다. 건강과 치료 봉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어져야 할 교회의 중요한 사역이다.
부가적용)
교회는 예루살렘 초대교회 때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듯이 세상으로 손을 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상이 깜짝 놀랄 일들을 해야 한다. 세상이 감동할 일들을 해야 한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통을 해소하기 위하여 봉사의 손길을 펴야 한다. 교만의 손길이 아니고 겸손의 손길을 펴야 한다. 탐욕의 손이 아니라 희생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손이 아니라 섬기는 손을 건네야 한다. 더러운 손이 아니라 깨끗한 손을 내밀어야 한다. 조건과 계산이 따라붙은 손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의 손길을 주어야 한다. 힘은 없으면서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손이 아니라 힘 있는 그러나 온유한 손을 빌려주어야 한다. 마음이 없는 손이 아니라 가슴이 실린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한편으로는 교회를 두려워하면서도 교회를 칭송하게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아오게 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존경하고 가까이 하려고 하게 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 세상으로부터 사랑 받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치료봉사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지만 이러한 은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만 신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친히 함께 계시는 시대에는 그것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보면 각각 다른 시기에 치료봉사에 헌신했던 신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인류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 동기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치료봉사가 완전한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임을 인식했다.
|적용|
그대가 실천할 수 있는 치료봉사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더 계발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치료의 사명을 주심-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분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병자들을 치료하도록 사명을 주셨다. 70인을 보내실 때, 그분은 그들에게 병자를 고치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도록 명하셨다. 그들의 육체적 건강이 제일 먼저 돌봄을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사도들이 전파할 그러한 진리들로 말미암아 접촉될 수 있도록 길이 준비되게 하기 위함이었다”(교회증언 4권, 225).
기 도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영혼을 자비의 눈길로 바라보시는 주님, 제가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손이 되어 그들을 어루만지고, 건강의 기별을 제시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들이 건강의 길뿐 아니라 영생의 길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1월3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눅 18:35~43, 13:10~17, 14:1~6, 요 6:1~2, 막 6:5~7, 6:54~56, 7:31~37, 8:22~26, 마 8:1~19, 12:15~23을 읽고, <치료봉사>, 17~21 “우리의 모본”, 73~85 “심령의 치료”, <의료봉사>, 25~29 “의료선교봉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읽어보라.
“중풍병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과 육체가 모두 치료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육체의 건강을 누리기 전에 심령의 건강이 필요했다. 육체의 질병을 고침받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해방을 주고, 심령을 죄에서 정결케 하셔야 한다. 이 교훈을 간과하지 말 것이다. 오늘날 육체적 질병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들은 이 중풍병자와 같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기별을 듣고자 갈망하고 있다. 불안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수반한 죄의 짐이 그들의 질병의 기초가 된다. 그들은 심령을 고쳐 주시는 분 앞에 나오기 전에는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한다. 오직 그분께서 주실 수 있는 화평만이 심령에 활력을 주고 육체에 건강을 줄 것이다.…
불과 얼마 전에 가족들 앞에서 천천히 운반되어 갔던 그 사람이 침상을 가뿐히 가지고 돌아오자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의 집에는 큰 기쁨이 생겼다.… 그 집에서는 기쁨에 넘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으며,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고통받는 자에게 힘을 주신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생애를 예수님께 바칠 준비가 되었다”(치료봉사, 7 7~7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떻게 치료봉사를 통해 복음에 대하여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까? 신자들이 치료봉사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는 실수를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➋ 성경에서 치유의 기사를 읽고 기적적인 치유의 소망을 가지고 교회나 병원에 온 잠재적 제자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그들을 위해 어떤 답이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 자신을 위한 답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경우 도움이 되는 성경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