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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어린이들을 제자로 양성함(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1/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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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1-18 06:42 조회8,90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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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8분

기억절 :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 21:16).

연구범위: 시 127:3~5, 신 6:6~7, 눅 2:40~52, 마 18:1~6, 마 18:10~14 , 막 10:13 ~16 .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각 나라마다 제자를 양성하려는 열망 중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계층이 있으니 곧 어린이들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기독교 연구는 제각각 다르다. 하지만 교파를 초월하여 일치하는 한 가지가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비교적 어린 나이에 그리스도께 삶을 바친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층에서는 회심자가 적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채 성인층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쏟아 붓는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린이 사역의 가치를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러한 태도를 거부하셨다. 그분은 아이들을 위한 여지를 마련하셨고 심지어 그들에게 우선순위를 두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해야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어린이 사역을 하기 위해서 꼭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어른
이 어린이의 스승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어린이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발하도록 격려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음을 느낀다.
➌ 행하기 : 매주 교회, 학교 또는 이웃의 어린이들과 긍정적인 방법으로 교제한다.

A.
❷ 성경에서는 어린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습니까?
※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❸ 우리 교회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사업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교회에서 어린이 사업을 위한 예산을 별로 책정하지 않고 어린이를 양육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교회가 양성 후원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❹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넘쳐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 어른들의 발상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재정으로 후원해야 할 것이다.

B.
❶ 교회가 점점 고령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어릴 때부터 진리를 확신하도록 교육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성경을 그냥 이야기 식으로 들려주고 도덕적 훈화로 들려주고 있지 않나? 생명의 복음을 깨닫도록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할 것이다.
❷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에 대하여 얼마나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습니까?
※ 어린이가 예수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그들을 안고 안수하고 축복하셨다.
❸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배워야 하는 특성은 무엇입니까?
※ 단순하게 반응하고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태도가 아닐까?

결론: 어린 나이에 제자로 훈련시킬수록 더욱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들이 어렸을 때 재능과 열정을 계발시키는 대신 “더 나이가 들면 다시 오라”는 식으로 대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첫째날(일) 1월19일
히브리 어린이의 특권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 127:3~5).

고대 히브리인 어린이는 주변 국가의 어린이에 비하면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아이를 바쳐 신을 달래는 행습이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였다. 또한 어린이의 가치가 종종 그들의 경제적 기여도에 의해 평가되기도 했다. 그들의 고유의 가치가 아닌 노동 생산성이 어른 세계와 그들과의 관계를 정의하였다. 안타깝게도 경제적 가치에 관한 이런 태도는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진노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스라엘의 배도는 어린이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술과 이방 종교에 놀아난 므낫세는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에 이르렀다(대하33:6). 하지만 므낫세의 치세는 예외라 할 수 있다. 영적인 지도하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손들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1. 시 127:3~5, 128:3~6, 렘 7:31, 신 6:6~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린이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보시는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와 어린이들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시127:3~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시128:3~6]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렘7:31]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신6:6,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답: 하나님은 자녀들이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가르치셨다. 어린이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확실히 가르치라고 명하셨다.

교육, 장자권, 그 밖의 문화적 관습을 보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린이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예수님은 주변 사회에 비해 높은 히브리 어린이의 지위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시키셨다. 어린이도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연령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가설명> 영국의 시인 윌리암 워스워드는 그의 무지개라는 시에서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고 노래했다. 모든 어른들은 어린 시절을 거쳤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개구리 올챙이 때 일을 모른다고 어른이 되면 마치 자신은 어린이 시절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부디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만민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이 갓난아기로 세상에 오신 것은 갓난아기의 구주도 되신다는 것을 말없이 계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어린이 사업에 투자하고 집중해야 한다. 지난 해 한국에서 교회 목회자를 유,소,청년 중심을 보내고 어른들은 그래도 스스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성숙했기 때문에 스스로 교회를 유지하도록 하든지 부목사를 어른들을 위하여 일하게 하고 원목사는 유년, 소년, 청년들을 위하여 일하게 하는 시스템을 사용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아마 속히 유소청년들을 진리로 양육하는 일을 수행하야 할 것이다. 그때 올바른 진리에 굳게서 선 신앙을 심으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위하여 쓴 책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책이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부모들이 꼭 읽어야할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한국에는 없는 것 같고 미주 시조사에는 재고가 많은 것 같은데 자녀를 진리로 교육하는데 관심이 있으면 구입해서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비싼 것도 아니니까. 아무쪼록 부모님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의 어린이들을 진리로 튼튼하게 세우도록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자.

무 지 개
    
        W. 워스워드(1770-1850)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내 가슴은 설렌다
나 어렸을 때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니
나 늙어진 다음에도 부디 그러하여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죽어버리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느니 내 목숨의 하루하루여
천성의 자비로 맺어지어라.

교훈: 이 세상에서는 어린이들이 무시되기 쉬우나 하나님은 어린이들을 소중하고 중요하게 대하도록 가르치셨다.

둘째날(월) 1월20일
예수님의 어린 시절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건너뛰고 바로 성숙한 어른으로 지구에 오셨다면, 어린이들을 이해하는 그분의 능력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아이처럼 발육과 성숙을 포함한 모든 성장 단계를 거치셨다. 그분은 십대가 겪는 유혹을 이해하신다. 그분은 어린 시절의 유약함과 불안정함을 겪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어린이가 그들의 처지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난관에 부딪혔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구주께서 진실로 인간이셨음을 보여주는 한 방편이었다.
1. 눅 2:40~5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눅2:40~52]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4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답: 어린시절 예수님은 부모님을 순종하여 받드는 삶을 살았다고 가르쳐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열두 살 되는 해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분기점(分岐點)이었다. 히브리의 남아들은 이 연령이 차면 율법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었다. 그 아이는 종교적 교훈을 받을 특별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거룩한 절기와 예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릴 때에 유월절에 참여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신 것도 이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75).
누가복음 2장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도 지혜를 얻으셨다. 하나님은 그분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소년 예수께서 유월절에 성전을 방문한 경험에서 미루어볼 때 우리는 그분에게 심오한 영적 지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소년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은 랍비들의 머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하나님은 어린 시절의 다양한 경험을 그와 같이 매력적이고 흠 없는 품성을 빚는 데 사용하신다. 아마도 목수의 기술을 습득하고, 경건한 부모의 관심을 받으며, 규칙적으로 성경을 대하고, 나사렛 마을 사람과 교류하면서 예수님의 성장 기초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무리 눈에 띄는 아이였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분도 우리와 같이 아이였다는 사실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거의 없다. 누가복음의 이 기사가 전부이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한 상상적인 이야기들이 소위 외경들에 기록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12세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온 후에 침례받을 때까지 18년을 인도에 가서 불교를 연구했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간단명료하게 기록하였다. 예수께서 12세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에 순종하며 받드시더라고 함축적으로 말하였다. 예수님은 침례 받으러 요단강에 나갈 때까지 집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받드시는 삶을 사신 것이다. 그렇게 하셔서 모든 성장하는 어린이들이 어떻게 성장기를 보내야하는지를 보여주셨다. 우리의 어린이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받드는 생활을 훈련받아야 한다. 교회에서도 그렇게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1~4)

교훈: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어린아이의 발육과 성장기를 거치심으로 그들의 필요를 이해하실 뿐 아니라 그 연령의 중요성을 보여주셨다.

셋째날(화) 1월21일
어린이들을 치유하심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눅 9: 42).

1. 마 9:18~26, 막 7:24~30, 눅 9:37~43, 요 4:46~54을 읽어 보라. 이 말씀 속에서 누구의 자녀가 건강을 회복했는가? 이 이야기들의 배경은 얼마나 유사한가? 그대는 어떤 차이점을 발견했는가?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배워 이 시대에 적용해야 하는가?
[마9:18~2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막7:24~30]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눅9:37~43]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39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42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요4:46~54]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답: 야이로의 딸,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 변화산에서 내려와서 고쳐준 아들,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고쳐주신 내용들이다. 경우가 각각 다르지만 부모가 자녀의 회복을 소원하는 모습은 동일하다. 예수님은 부모의 간청을 다 들어주셨다.

모든 기사에 나타난 현저한 공통점은 절망에 빠진 부모가 예수님께 찾아와 자녀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부모가 있을까? 자녀가 아파서 죽어가고 있을 때에 아픔과 고뇌, 두려움, 끔찍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경험이 있는 부모라면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비록 예수님은 지상에서 부모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분은 부모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그들의 자녀를 치유하셨다. 어떤 경우든지 치유가 이루어졌다. 그분은 아무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그렇게 해서 그분의 사랑이 단지 부모 뿐 아니라 자녀들을 위한 사랑이었음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물론 부모가 자녀를 위해 기도해도 자녀가 낫지 않은 경우가 있다. 아마도 자녀의 장례식보다 더 슬픈 경험은 없을 것이다. 늙은 사람이 먼저 죽는 것이 순서이다. 그래서 먼저 죽은 자녀를 애도하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진다. 그래서 이런 장례식에 거의 모든 부모가 이렇게 묻는다. “차라리 제가 대신 죽으면 안 됩니까?”
육체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나 영적인 부패를 지켜보는 것은 모두 고통스럽다. 술과 담배, 음란에 중독되어 무관심한 청소년기를 보내는 자녀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부모가 고민에 빠져 있는가?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비록 사정이 행복하게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는 위의 성경 기사에 등장하는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의지할 필요가 있다. 엘렌 G. 화잇도 선지자로서 두자녀의 장례를 치렀다.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이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부가설명> 부모가 있어야 자녀가 있다. 결혼한 남녀가 부로라는 증명을 하려면 출산해야 한다. 부부가 되었어도 자녀를 출산하지 않으면 부모는 못 된다. 부모가 되면 자녀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양육과 교육에 대한 책임이다. 성장하는 자녀들이 여러 어려움에 시달릴 때 부모는 함께 고통을 받는다. 그것을 해결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생긴다. 참 기이한 마음이다. 오래전에 미국의 어떤 갑부의 딸이 어떤 갱단에게 납치되었다. 그리고 그 부모에게 20만 불을 요구했다. 그것도 새 돈이어야 하고 20만 불이 일련번호가 차례대로 맞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부모가 그런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애태우는 것을 본 어떤 싱거운 회사원이 말했다. “사장님, 제게 2만 불만 주면 따님 나이의 따님처럼 예쁜 여자를 사장님께 갖다드릴 수 있으니 딸을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왜 그리 어려운 요구를 들어주려고 그렇게 고민하고 애를 쓰십니까?” 말이 되는 것인가? 부모와 자녀의 이 참으로 기이한 혈육의 사랑의 끈은 사랑이시고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도 어린이와 어른들을 다 사랑하신다.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이것은 혈연의 끈이며 이것을 사랑의 줄이라고 말한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호11:4)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사랑의 줄로 바른 양육을 해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자녀를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부모들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그분은 자녀들을 위한 우리의 관심과 고민을 이해하신다.

넷째날(수) 1월22일
두려운 경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1. 마 11:25~26, 18:1~6, 10~14을 분석해 보라. 우리는 여기서 어린이에 관한 교훈 뿐 아니라 일반적인 믿음에 대하여 어떤 진리를 배워야 하는가? 예수님의 경고가 얼마나 엄중하였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는 왜 이 경고 앞에서 떨어야 하는가?
[마11:25,26]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18:1~6, 10~14]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답: 어린아이는 자기 소견이 없는 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소경 없이 단순히 믿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를 깨닫는다. 어린이들에게 이것을 가르쳐 제자가 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어린이를 올바르게 대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올바르게 대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엄중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예수님은 종종 어린아이에게 있는 진실성에 대해 언급하셨다. 어린이들의 진실성, 겸손함, 의존성 그리고 순진함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나타나야 할 본질을 정확히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그러한 단순성과 신뢰심을 갈망해야 한다.
오늘날의 제자 양성자들이 배워야 할 또 다른 교훈이 있다. 어린이들의 순진한 의존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대로 교육을 받는다면 어린이들은 신뢰의 순수성을 어른이 될 때까지 간직할 수 있다. 어린이가 자라고 나이가 들면, 사물에 대하여 질문할 테고 모두가 그렇듯이 답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며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인기가 없다. 우리는 부모 또는 어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에 대한 지식을 어린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 친절, 동정과 관심을 통해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설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훈련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그들 앞에 보여주는 것이다.
그와 정반대로 교회가 후원하는 행사에서 어린이를 상대로 하는 범법 행위는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파괴한다.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자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분의 기별은 확신과 신뢰심을 일깨운다. 감히 어떤 인간 조직이 조심성 없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부가설명> 부모는 자기 자녀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어린 자녀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웃음으로 받고 대답하곤 한다. 그러나 좀 자라서 계속 어린아이 같은 말을 해대면 짜증도 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집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 비하면 엄청 부드럽고 인정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어린이들을 예수님 대하듯 하라고 가르치니 참 쉽지 않은 요구이다. 이 요청은 어린이를 제자가 되도록 양육하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다. 11:25에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낸다고 했을 때 그 어린아이는 “네피오스”인데 어린이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신뢰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상징어로도 사용된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기록된 사상대로 수용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합리성이 없고 시대에 맞지 않고 논리성이 부족하고 등등. 여러 이유를 들어서 학문적으로 각색하고 윤색하여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을 철학으로 만들기 쉽다. 그러나 네피오스들은 주신 말씀을 단순하게 받아서 전할 것이다. 제자를 삼은 일에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아이들을 복음에 깊이 젖게 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이들의 순수한 믿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이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다.

다섯째날(목) 1월23일
어린아이들을 용납하라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1. 막 10:13~16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영접하는 태도를 보고 어린들은 얼마나 쉽게 그분을 영접했는가?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책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기사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어린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막10:13~16]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답: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들은 아이들 데려와서 복 빌어주시기를 열망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당시 어른들이 태도를 대변하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잘 음미하고 우리도 어린이를 예수께서 대하신 것과 같이 대하도록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지했을 뿐 분명 나쁜 의도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더 중요한 일에 그분의 힘을 집중시키실 수 있도록 다른 일에 시간을 뺏기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바랐던 교훈을 대단히 오해하였다.  
어린이들이 거친 어른들에 의해 제지를 당했는데, 사랑 많고 따뜻한 예수님이 그들에게 팔을 벌리시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당연히 아이들은 그분께 달려가 안겼을 것이다.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제자를 양육하는 자들이 어떻게 어린이들을 대해야 하는지 매우 소중한 실례를 얻는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접촉한 어린이들 중에서 당신의 은혜의 후사요, 당신의 나라의 시민이 될 남녀들을 보셨으며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당신을 위하여 순교자들이 될 것이었다. 그는 이 어린이들이 세상적으로 현명하고 마음이 완고한 장성한 사람들보다도 매우 쉽게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들을 가르치심에 있어서 그는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오셨다. 하늘의 왕이신 그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동심의 이해력에 맞도록 당신의 중대한 교훈을 단순하게 하셨다. 그는 후년에 돋아나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힐 진리의 씨를 그들의 마음속에 심으셨다”(시대의 소망, 512~515).

<부가설명> 예산 디엘 무디 선생이 전도회를 인도하고 왔을 때 그의 부인이 물었다. “오늘 몇 명이 모였습니까?” “두 사람 반이 왔어요.” “예? 두 사람 반이라니? 그러면 어른 둘에 아이 하나가 온 것이에요?” “아니요, 아이 둘에 어른 하나가 왔지요.” 무디 선생은 어른 하나를 반 사람으로 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오늘 어른 된 우리들은 인생 살 날이 어린이에 비하여 반 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교회의 장래는 우리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진리에 굳게 서는 것에 달렸다고 말하면 과언일까? 가정에서 교회에서 삼육학교에서 어린 사람들에게 진리를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그 진리 위에 굳게 서도록 교육해야 한다. 부모의 책임이고 교회 교사들과 목회자들의 책임이며 삼육학교 교사들의 책임이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위하여 이렇게 본을 보이시고 교훈하신 것이다. 아이들에게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기 위하여 부모와 교사와 어른들이 진리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렇기 위하여 우리는 열심히 성경진리를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깨달은 그것은 예수님처럼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바르게 제자 양성을 하게 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그분께 나아오는 아이들을 막지 못하도록 하셨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구주를 영접하는 하나님 나라의 후사이기 때문이다.

여섯째날(금) 1월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511~517 “아이들을 축복하심”, 592 “다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심”, <교회증언 6권>, 93~95 “침례”, <교육> 185~186 “성경의 가르침과 연구”를 읽어 보라.

“아이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들의 마음은 거룩한 감화를 받을 수 있게 열려 있고 받은 교훈을 간직하기에 강하다.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나이에 알맞은 경험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영적 사물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은 품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그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하늘을 위하여 교육하도록 그들에게 위탁된 주님의 가족의 어린 식구로 여겨야 한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께 배우는 교훈들을 어린 심령들이 받을 수 있는 대로 하늘의 원칙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조금씩 그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시대의 소망, 51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많은 사람이 어린 나이에 그리스도를 더 잘 영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회의론자들은 어린이들이 너무 유치하고 무지해서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른들처럼 마음이 아직 강퍅해지거나 냉소주의나 회의주의에 물들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즉 그들은 천진함과 열린 마음으로 성령의 역사를 더욱 쉽게 수용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토의해 보십시오.
※ 그들은 사물과 교훈에 대하여 단순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르게 전하면 그들이 마음에 쉽게 진리를 받아들인다. 성경이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사실이라는 것과 오히려 과학보다 성경이 오래 전에 과학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합리적으로 가르치면 그들이 그릇된 과학을 배울 때에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저술된 책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➋ 어떻게 하면 오늘날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을 닮은 매력적인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기이한 복장, 특이한 음악적 취향, 기괴한 행동을 시도하는 청소년과 좀 더 친해지기 위해 교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활동적인 청소년들에게 매력적인 교회가 되려면 얼마나 더욱 생동감이 넘쳐야 합니까?
※ 신앙생활의 지실성과 기쁨과 행복의 모습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따르는 것보다 진리를 따른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강조하는 대신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느끼도록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➌ 교인들은 어떤 단계를 통해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께 삶을 드리기를 원하는 청소년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 진리를 따라 사는 즐거움을 모본으로 보이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진리가 성경에 있음을 드러내면서 진리를 가르쳐 깨닫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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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명님의 댓글

이기명 작성일

김목사님, 저는 이기명입니다. 목사님이 올리시는 교과 설명과 대답, 부가 설명들은 매주 빼지 않고 꼭 참조합니다. 교과를 가르치는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건강하셔서 오래 오래 계속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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