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비유를 통해 제자를 양성함(질문 대답과 부가설명)0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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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1-03 11:48 조회9,103회 댓글1건본문
1월 11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33분
기억절 :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13:3 4~3 5).
연구범위: 삼하 12:1~7, 사 28:24~28, 마 7:24~27, 마 13:1~30, 눅 20:9 ~19.
기독교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지성은 계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성만으로는 인성 전체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논리에 따라 작동하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로봇과 달리 인간은 사랑하고 느끼며 상처를 주고 울며 걱정하고 웃고 상상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성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영원한 진리를 표현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처한 자리에서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을 통해 말씀을 전하셨다. 이미지와 은유로 장식된 비유는 어른 아이 모두에게 심오한 진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구주의 화법으로는 칭의나 성화와 같은 복잡한 개념들도 이해하기가 쉬웠다. 즉 일상적인 언어로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들도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하면 쉽게 배울 수 있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이야기나 예화가 설교를 채울 뿐 아니라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예수님이 청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유익한 이야기를 들어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는다.
➌ 행하기 : 복음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현대적인 상징들을 찾는다.
A.
❷ 예수님은 어떤 이야기 또는 비유들을 사용하셨습니까?
※ 제자된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사실들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❸ 예수님이 예화, 비유, 상징 등을 사용하신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단순한 이야기를 통하여 많은 사실을 깨닫게 하되 스스로 깨닫기 위하여 사용하셨다.
❹ 그대가 재림 교회의 진리를 전한다면 어떤 비유나 이야기를 들어 전하겠습니까?
※ 경우에 따라 합당한 이야기들을 찾아 사용할 것이다.
B.
❷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대는 어떤 땅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까?
※ 각자가 대답해보자.
❸ 마 7:24~27에 나오는 두 건축자의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 보십시오.
※ 기초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건축뿐만 아니라 학문이나 신앙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❹ 각자 예수님을 믿으면 좋은 점을 자신의 경험과 예를 들어 증명해 보십시오.
※ 구원의 확실한 보증이 예수 안에 있다.
결론
기술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영화, 드라마, 책, 잡지 등에 실리는 개인의 이야기는 여전히 가치를 전달하는 주된 방법입니다. 우리도 이야기의 장점을 잘 살리고 있습니까?
첫째날(일) 구약의 예
1월5일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삼하 12:1).
1. 삼하 12:1~7, 사 28:24~28, 렘 13:12~14, 겔 15:1~7을 읽어 보라. 여기에 나오는 비유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확장시키는가? 이선지자들이 사용한 대상 또는 배경 가운데 무엇이 예수님의 비유에 다시 등장하는가?
[삼하12:1~7]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2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5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 이 비유는 다윗이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자신을 알아보도록 이끄신다.
[사28:24~28]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25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26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27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28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 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 농사하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교훈하시는 것을 깨닫도록 하였다.
[렘13:12~14]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13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14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포도주 비유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불행으로 취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겔15:1~7]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6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수풀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이 되게 한 것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지라 7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 말씀을 순복하지 않는 이스라엘 국민은 열매 없는 포도나무 같아서 땔감밖에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나단은 접견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 비유를 말한다. 다윗이 내린 판결은 자신이 범죄자임을 자인한 셈이었다. 나단은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동시에 대립 또는 처형의 위기를 피하였다.
이사야의 시적인 이야기는 청중들에게 익숙한 농업적 배경에서 착안했다. 그리고 수백 년 뒤에 예수께서도 동일한 배경을 차용하셨다. 이사야의 비유는 징계의 시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끝없는 자비에 대하여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의 징계를 보복의 무기가 아닌 교정의 도구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징계에는 구속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회계와 부흥 그리고 개혁을 권유하기에 적당했다. 그럼에도 더 완고하게 반역했기에 더 큰 징계가 따랐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비유는 끔찍한 심판을 예증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을 방해하면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그들이 선택한 결과에 내어준다. 예수님도 대중들에게 심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에스겔도 유사한 기별을 전하기 위해 별도의 상징을 사용하였다.
<부가설명> 비유는 요즘 말로 하면 예화이다. 설교에서 예화는 설교의 오아시스라고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야기 속에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도록 진리를 전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옛날 선지자들도 비유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서 백성들이 스스로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유도하고 또 뜻을 설명하기도 했다. 에스겔은 많은 비유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을 우화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우화도 비유의 한 형식이다. 이 방법은 상대방을 상하게 하지 않고 전하고자하는 기별을 전할 수 있다. 또 한 이야기 안에 여러 의미를 내포할 수 있어서 다양한 교훈의 효과를 누릴 수도 있다. 또 듣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확대해서 비유를 하는 선생의 의도와 상관없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신약성경에서 대표적인 것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이다. 그것은 영혼불멸이나 영원지옥을 가르치는 것이 전혀 아닌데 오늘날 교회가 그 비유를 영혼불멸 영원지옥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비유를 올바르게 깨달으면 풍성한 진리의 창고가 된다.
교훈
비유 또는 이야기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진리와 사실을 묘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였으며 하나님의 기별을 전달하는 도구였다.
둘째날(월) 건축자의 지혜
1월6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1. 마 7:24~2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 제자도에 대하여 무엇을 이해하게 되는가? 그와 같은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께서 왜 이러한 예를 사용하셨다고 생각하는가?
[마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답: 제자들은 확실한 진리의 말씀 위에 신앙을 세워야 하고 그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행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제자들이 아주 쉽게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건축에 대한 예화를 사용한 것이다.
현대의 문명사회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오늘날도 아직 문맹사회가 많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도 읽기와 쓰기는 아주 예외적인 것이었다. 지배계층, 문필전문가(서기관)는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기술을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의 기별을 문맹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형태로 설명하셨다. (물론, 식자층도 그 기별을 이해하였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이전에는 세계의 많은 문서가 오랜 시간에 걸쳐 손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비교적 소수만이 그와 같은 희귀한 물품을 소유했다. 따라서 전승, 비유를 통한 구두 소통이나 그와 유사한 방식이 정보 전달의 표준이었다.
하나님은 전체 인류에 구원을 베푸신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그와 같은 의사소통 방식을 사용하셔야 했다. 단순한 이야기들을 통해 세대와 세대를 거쳐 이어진 구전은 구원의 사상을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2. 눅 14:27~33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여기에 나오는 은유들은 제자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얼마나 밝혀 주는가?
[눅14:27~33]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답: 일을 시작하면 끝마칠 수 있도록 잘 계획하고 시작해야 하나다는 것을 가르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끝까지 따르도록 자신을 확실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건축은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건축이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비용을 산정해야 한다. 제자도도 준비가 필요하다. 오천 명을 먹인 기적, 놀라운 치유, 눈에 띄는 성공은 제자 후보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쉬울 것이라고 추측하게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전체 그림을 보도록 독려했다.
자기희생, 고난, 치욕 그리고 거절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제자들이 마주하게 될 구체적인 문제의 목록을 제공하실 수 있었음에도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여 그 기별을 전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한다.
<부가설명> 유대인들은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토라를 반드시 읽어야 했기 때문에 온 국민이 글을 배우고 쓰고 읽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 대하신 청중은 글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을 수 있다. 유대인들이니까. 그러나 옛날에 서민들이 글을 배우고 읽고 쓸 줄 알아야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으로 진리를 가르쳤고 이야기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비유는 말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 글로 그려놓은 그림이 참 많다. 성소, 상징적인 짐승들, 비유들이 다 글로 그려놓은 그림이다. 우리가 비유나 상징을 읽으면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예수께서 하신 교훈의 방법은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증거하는 제자들은 반드시 합당하게 배워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이 얼마나 큰 대가를 필요로 하는지 설명하셨다.
셋째날(화) 농업적인 비유
1월7일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마 13:3).
1. 마 13:1~3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제자훈련에 관하여 청중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이 비유에서 오늘날의 신자들은 어떤 교훈을 끌어내야 하는가?
[마13:1~30] 씨 뿌리는 비유와,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이유를 말씀하시고 밭의 가라지 비유를 하신 내용이 기록된 구절이다.(너무 길어서 독자가 찾아 읽기를 바란다.)
답: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 하고 가라지를 뿌리지 않아야하고 좋은 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듣고 보고 해도 마음이 주님께 먼 사람이 결코 도지 않아야 할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농경사회에 익숙한 당시의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제자도와의 관련성은 확연하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청중이 제자로서 그들의 표준을 높이도록 도전하셨다.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대면하기보다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스스로 대면하도록 인도하셨다. 내면의 거울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물질주의적인 자신들의 경향을 평가하고, 자신들의 인내력을 검토하며, 세상과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분석함으로 타협하지 않은 제자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동시에 진정한 제자도는 판단을 자신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인간의 분별력은 불완전하며 그 지식은 부분적이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이해력을 소유하셨다. 예수님도 사탄이 틈탈 것을 경고하신다. 제자는 판단을 동료 신자에게 맡겨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곡식이 아닌 가라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추수 때까지 두 가지는 함께 자란다.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통해 주신 교훈에는 이 세상에 대한 그분 자신의 사명에 나타나 있는 동일한 원칙이 드러나 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과 생애를 잘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 신성(神性)이 인성(人性)을 통해 나타났고 보이지 않는 영광이 보이는 사람의 형상을 통하여 나타났다.… 하늘의 사물이 세상 사물을 통하여 드러났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실물교훈, 17).
<부가설명> 예수께서 마음 밭에 뿌리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눅8:11)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서 잘 자라기 위하여서는 깨달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면 옛날 바리새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깨닫는 경험의 한 장면은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라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는데서 볼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치를 확실히 이해하게 되면 깨닫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생활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면 곧 생활로 옮겨야 깨달음이 생활에 굳게 된다. 엠마오의 제자들을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곧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자기들을 깨달은 체험을 증거하는 행동을 나타내었다. 깨달음이 만드는 결과였다. 우리도 예수 안에서 이런 경험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며 참 제자가 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제자도의 높은 표준을 제시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자신을 돌아봄으로 온전히 그분을 의지하게 하셨다.
넷째날(수) 혁명가의 전쟁
1월8일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稅)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눅 20:9).
그리스도는 평범한 무기조차 없었지만 그의 사역은 혁명적이었다. 그분의 도구는 칼이나 창보다 훨씬 강력하였다. 삶을 변화시키는 그분의 말씀은 종종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되었으며 악과 맞서는 그분의 병기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전략과 전술은 많은 지도자의 허를 찔렀다. 그들은 민중을 압도하는 그분의 호소력을 마주할 대비가 부족했다. 많은 경우 그분의 비유는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기별을 담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기별이 백성의 심령을 관통하는 곳은 어디든지 그들의 영향력이 위축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하였다.
1. 마 21:28~32, 눅 14:16~24, 20:9~19을 읽어 보라. 이 비유들은 어떤 강력한 기별을 담고 있는가? 비유는 종종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 전달되었지만, 우리가 누구이든 여기서 어떤 원칙이 우리에게 적용되는가?
[마21: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눅14:16~24]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20:9~1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답: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망한다는 기별을 강하게 전달한다.
“포도원의 비유는 유대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도 교훈이 된다. 현세의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큰 특권과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로부터 상당한 보답이 있기를 기대하신다”(실물교훈, 296).
우리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다. 그리스도 피로 구속함을 받았고, 우리의 의가 아닌 그분의 의를 힘입어 구원을 약속 받았으며, 영생의 보증과 성령을 받았다. 우리는 매우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의 가치를 잊어버리거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하찮게 여기기 쉽다. 비유 속의 포도원 농부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심판의 날에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변명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무지를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부가설명> 오늘의 제목은 혁명가의 전쟁이다. 교과 저자는 예수님을 혁명가로 보았다. 그런데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종교와 신앙의 관념의 혁명이다.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기록된 율법의 문자적 준행이 구원과 영생이 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세리와 창녀는 구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위치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이었다. 이유는 세리와 창기는 요한의 기별을 믿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구원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철저히 준행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데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핵심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얻으라는 것이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인 것이다. 이 세상은 사망의 나라이다. 사망은 망하게 되어 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딤후1:10)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행위의 복음을 외치고 있지 않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복음의 핵심 내용을 깨달아 전해야 한다. 그렇기 위하여 우리는 철저히 예수 반석에 떨어져서 자기가 산산히 깨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1:9~11)
교훈
비유와 상징으로 전달된 예수님의 기별은 칼과 창보다 강력하였고 반대 세력을 약화시킬 만큼 혁명적이었다.
다섯째날(목) 그리스도의 창조적인 유산
1월9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기록이 끝난 후에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는 방식이 성경에서 사라진 듯 보인다. 어떻게 이 현상을 설명해야 할까? 신약성경의 남은 부분은 확실히 바울을 중심에 둔다. 신약의 14책이 바울의 글이며, 역사적인 기록을 담은 사도행전도 거의 절반이 바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이야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은유와 직유 등 여러 창조적인 장치를 자주 활용하였다(참고 롬 7:1~6, 고전 3:10~15, 고후 5:1~10). 바울은 이야기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논조는 지겹거나 색채가 없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공중 담화와 바울의 언어 사이에는 문체상의 차이점이 존재하나 양쪽 모두 상당히 창조적인 표현력을 드러낸다.
신약의 다른 기자들도 비유를 사용하신 그리스도의 방법에 어느 정도 친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예화식 교육을 시작하기 위해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약 2:2) 들어온다고 가정해 보라고 썼다. 물론 예수님의 형제나 어떤 제자도 예수님만큼 이야기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직유나 상징은 흔히 사용된 방법이다.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 1:10). “또 배를 보라”(약 3:4). 베드로가 본 환상(행 10)도 상징적인 형태이다. 상징적인 담화는 계시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계 12:13).
어떻게 설명되든지 원리는 동일하다. 은유, 직유, 비유, 풍유, 그 밖의 창조적인 언어 기법은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소통하게 한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청중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와 예화를 사용하여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활성화시켰다. 우리도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1. 아래에서 두세 개의 성경절을 골라 그 중에 있는 은유를 찾아보라. 이 말씀 가운데 어떤 다양한 기별이 담겨 있는가? 기별을 전달하기 위해 어떤 형상이 사용되었는가? 행 10:9~16, 약 3:3~12, 계 12:7~17, 18:9~20, 19:11~16.
[행10:9~16]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15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 보자기에 담긴 각종 가증한 생물들의 환상으로 이방인들을 가증하게 취급하는 베드로와 유대인의 사상을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기별로 은유하셨다.
[약3:3~12]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 말 입에 재갈 물리는 것과 배의 키와 불이 나무를 태우는 비유를 통하여 사람이 혀를 길들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샘이 한 구멍에서 두 가지 물을 솟구치지 않는 것을 통하여 한 사람이 각기 다른 두 가지 사상으로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계12:7~1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18:9~20]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1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6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계19: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 계시록은 요즘 말로하면 애니메이션적인 환상으로 역사적 사건과 말세적 사건을 나타내주셨다.
<부가설명> 성경에는 상징과 표상이 가득하다. 창세기 3장에 뱀이 등장한다. 그것이 실제로 뱀이 등장했겠지만 그것은 사단의 상징적 동물이다.(계12:9) 에스겔은 많은 비유로 이스라엘의 허물을 지적하였다. 다니엘은 많은 상징으로 세상의 역사를 예언하였다. 요한도 많은 상징으로 계시록을 기록하였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상징적 형상을 보여주셨다. 비유와 상징은 간단한 표현으로 많은 것을 말하게 한다. 성경을 공부할 때 또는 가르칠 때 적절한 비유와 상징은 예수께서 하신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장로교회에서 재림교회로 옮긴 후에 만화나 우화를 좋게 여기지 않는 말을 들었다. 그것들은 다 거짓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그 말을 그대로 들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성경을 읽으니까 성경에는 우화와 상징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니메이션으로 진리를 가르쳐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비유는 사실일 수도 있고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르쳐주려는 진리는 확실한 것이다. 비유나 우화나 애니메이션을 사용할 때에 그것이 정말 성경 진리를 올바르게 전하는 바른 전달 방법인가는 십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훈
비중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 외의 다른 신약 기자들도 창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였다.
여섯째날(금) 1월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실물교훈>, 17~27 “비유로 가르치심”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는 질문을 이끌어 내고자 하셨으며 주의성 없는 자들을 각성시켜서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새겨 주고자 하셨다. 비유로 가르치는 일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었고 호평을 받고 관심을 끌었다.…
비유로 가르치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꼭 전해야 할 진리를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의 교훈을 일상생활의 경험과 천연계의 장면들과 연결시킴으로 그들의 주목을 끄시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후에 그들이 그 교훈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실물들을 보게 될 때에, 거룩한 교사의 말씀을 회상(回想)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실 통로(通路)를 찾고 계셨다. 그는 여러 가지 실례를 사용하심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진리를 제시하셨을 뿐 아니라 여러 같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셨다”(실물교훈, 20~2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안교반에서 일요일 질문에 대한 그대의 답을 발표해 보십시오. 각각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 예수께서 경우에 합당한 비유를 베푸신 사실을 배우고 우리도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➋ 예수님은 청중에게 익숙한 사물에서 끌어낸 이미지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영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문화로부터 무엇을 끌어내 사용할 수 있을까요?
※ 우리 문화에서 진니를 증거하기에 적절한 사건과 이야기를 사용할 수 있다.
➌ 예수님은 대체로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비유를 사용하셨지만,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는 도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바울의 서신이나 신약의 다른 곳에서 도시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경우가 있습니까?
※ 야고보서는 도시에 가서 장사하려는 사실을 사용하였다.(약4:13~16) 그 외의 편지서에는 도시적인 이미지에 대하여 잘 떠오르지 않는다. 독자들께서 찾아보기 바란다.
➍ 훌륭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요소들이 있고 그것들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요소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 이야기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다. 우리가 비유나 이야기를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에 기승전결의 요소를 잘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이야기가 실감이 나는 것이고 합리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일몰:오후 5시 33분
기억절 :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13:3 4~3 5).
연구범위: 삼하 12:1~7, 사 28:24~28, 마 7:24~27, 마 13:1~30, 눅 20:9 ~19.
기독교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지성은 계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성만으로는 인성 전체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논리에 따라 작동하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로봇과 달리 인간은 사랑하고 느끼며 상처를 주고 울며 걱정하고 웃고 상상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성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영원한 진리를 표현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처한 자리에서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을 통해 말씀을 전하셨다. 이미지와 은유로 장식된 비유는 어른 아이 모두에게 심오한 진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구주의 화법으로는 칭의나 성화와 같은 복잡한 개념들도 이해하기가 쉬웠다. 즉 일상적인 언어로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들도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하면 쉽게 배울 수 있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이야기나 예화가 설교를 채울 뿐 아니라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예수님이 청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유익한 이야기를 들어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는다.
➌ 행하기 : 복음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현대적인 상징들을 찾는다.
A.
❷ 예수님은 어떤 이야기 또는 비유들을 사용하셨습니까?
※ 제자된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사실들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❸ 예수님이 예화, 비유, 상징 등을 사용하신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단순한 이야기를 통하여 많은 사실을 깨닫게 하되 스스로 깨닫기 위하여 사용하셨다.
❹ 그대가 재림 교회의 진리를 전한다면 어떤 비유나 이야기를 들어 전하겠습니까?
※ 경우에 따라 합당한 이야기들을 찾아 사용할 것이다.
B.
❷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대는 어떤 땅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까?
※ 각자가 대답해보자.
❸ 마 7:24~27에 나오는 두 건축자의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 보십시오.
※ 기초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건축뿐만 아니라 학문이나 신앙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❹ 각자 예수님을 믿으면 좋은 점을 자신의 경험과 예를 들어 증명해 보십시오.
※ 구원의 확실한 보증이 예수 안에 있다.
결론
기술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영화, 드라마, 책, 잡지 등에 실리는 개인의 이야기는 여전히 가치를 전달하는 주된 방법입니다. 우리도 이야기의 장점을 잘 살리고 있습니까?
첫째날(일) 구약의 예
1월5일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삼하 12:1).
1. 삼하 12:1~7, 사 28:24~28, 렘 13:12~14, 겔 15:1~7을 읽어 보라. 여기에 나오는 비유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확장시키는가? 이선지자들이 사용한 대상 또는 배경 가운데 무엇이 예수님의 비유에 다시 등장하는가?
[삼하12:1~7]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2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5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 이 비유는 다윗이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자신을 알아보도록 이끄신다.
[사28:24~28]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25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26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27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28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 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 농사하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교훈하시는 것을 깨닫도록 하였다.
[렘13:12~14]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13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14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포도주 비유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불행으로 취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겔15:1~7]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6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수풀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이 되게 한 것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지라 7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 말씀을 순복하지 않는 이스라엘 국민은 열매 없는 포도나무 같아서 땔감밖에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나단은 접견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 비유를 말한다. 다윗이 내린 판결은 자신이 범죄자임을 자인한 셈이었다. 나단은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동시에 대립 또는 처형의 위기를 피하였다.
이사야의 시적인 이야기는 청중들에게 익숙한 농업적 배경에서 착안했다. 그리고 수백 년 뒤에 예수께서도 동일한 배경을 차용하셨다. 이사야의 비유는 징계의 시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끝없는 자비에 대하여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의 징계를 보복의 무기가 아닌 교정의 도구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징계에는 구속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회계와 부흥 그리고 개혁을 권유하기에 적당했다. 그럼에도 더 완고하게 반역했기에 더 큰 징계가 따랐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비유는 끔찍한 심판을 예증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을 방해하면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그들이 선택한 결과에 내어준다. 예수님도 대중들에게 심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에스겔도 유사한 기별을 전하기 위해 별도의 상징을 사용하였다.
<부가설명> 비유는 요즘 말로 하면 예화이다. 설교에서 예화는 설교의 오아시스라고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야기 속에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도록 진리를 전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옛날 선지자들도 비유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서 백성들이 스스로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유도하고 또 뜻을 설명하기도 했다. 에스겔은 많은 비유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을 우화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우화도 비유의 한 형식이다. 이 방법은 상대방을 상하게 하지 않고 전하고자하는 기별을 전할 수 있다. 또 한 이야기 안에 여러 의미를 내포할 수 있어서 다양한 교훈의 효과를 누릴 수도 있다. 또 듣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확대해서 비유를 하는 선생의 의도와 상관없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신약성경에서 대표적인 것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이다. 그것은 영혼불멸이나 영원지옥을 가르치는 것이 전혀 아닌데 오늘날 교회가 그 비유를 영혼불멸 영원지옥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비유를 올바르게 깨달으면 풍성한 진리의 창고가 된다.
교훈
비유 또는 이야기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진리와 사실을 묘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였으며 하나님의 기별을 전달하는 도구였다.
둘째날(월) 건축자의 지혜
1월6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1. 마 7:24~2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 제자도에 대하여 무엇을 이해하게 되는가? 그와 같은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께서 왜 이러한 예를 사용하셨다고 생각하는가?
[마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답: 제자들은 확실한 진리의 말씀 위에 신앙을 세워야 하고 그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행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제자들이 아주 쉽게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건축에 대한 예화를 사용한 것이다.
현대의 문명사회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오늘날도 아직 문맹사회가 많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도 읽기와 쓰기는 아주 예외적인 것이었다. 지배계층, 문필전문가(서기관)는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기술을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의 기별을 문맹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형태로 설명하셨다. (물론, 식자층도 그 기별을 이해하였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이전에는 세계의 많은 문서가 오랜 시간에 걸쳐 손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비교적 소수만이 그와 같은 희귀한 물품을 소유했다. 따라서 전승, 비유를 통한 구두 소통이나 그와 유사한 방식이 정보 전달의 표준이었다.
하나님은 전체 인류에 구원을 베푸신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그와 같은 의사소통 방식을 사용하셔야 했다. 단순한 이야기들을 통해 세대와 세대를 거쳐 이어진 구전은 구원의 사상을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2. 눅 14:27~33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여기에 나오는 은유들은 제자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얼마나 밝혀 주는가?
[눅14:27~33]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답: 일을 시작하면 끝마칠 수 있도록 잘 계획하고 시작해야 하나다는 것을 가르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끝까지 따르도록 자신을 확실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건축은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건축이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비용을 산정해야 한다. 제자도도 준비가 필요하다. 오천 명을 먹인 기적, 놀라운 치유, 눈에 띄는 성공은 제자 후보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쉬울 것이라고 추측하게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전체 그림을 보도록 독려했다.
자기희생, 고난, 치욕 그리고 거절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제자들이 마주하게 될 구체적인 문제의 목록을 제공하실 수 있었음에도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여 그 기별을 전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한다.
<부가설명> 유대인들은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토라를 반드시 읽어야 했기 때문에 온 국민이 글을 배우고 쓰고 읽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 대하신 청중은 글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을 수 있다. 유대인들이니까. 그러나 옛날에 서민들이 글을 배우고 읽고 쓸 줄 알아야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으로 진리를 가르쳤고 이야기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비유는 말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 글로 그려놓은 그림이 참 많다. 성소, 상징적인 짐승들, 비유들이 다 글로 그려놓은 그림이다. 우리가 비유나 상징을 읽으면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예수께서 하신 교훈의 방법은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증거하는 제자들은 반드시 합당하게 배워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이 얼마나 큰 대가를 필요로 하는지 설명하셨다.
셋째날(화) 농업적인 비유
1월7일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마 13:3).
1. 마 13:1~3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제자훈련에 관하여 청중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이 비유에서 오늘날의 신자들은 어떤 교훈을 끌어내야 하는가?
[마13:1~30] 씨 뿌리는 비유와,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이유를 말씀하시고 밭의 가라지 비유를 하신 내용이 기록된 구절이다.(너무 길어서 독자가 찾아 읽기를 바란다.)
답: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 하고 가라지를 뿌리지 않아야하고 좋은 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듣고 보고 해도 마음이 주님께 먼 사람이 결코 도지 않아야 할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농경사회에 익숙한 당시의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제자도와의 관련성은 확연하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청중이 제자로서 그들의 표준을 높이도록 도전하셨다.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대면하기보다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스스로 대면하도록 인도하셨다. 내면의 거울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물질주의적인 자신들의 경향을 평가하고, 자신들의 인내력을 검토하며, 세상과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분석함으로 타협하지 않은 제자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동시에 진정한 제자도는 판단을 자신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인간의 분별력은 불완전하며 그 지식은 부분적이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이해력을 소유하셨다. 예수님도 사탄이 틈탈 것을 경고하신다. 제자는 판단을 동료 신자에게 맡겨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곡식이 아닌 가라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추수 때까지 두 가지는 함께 자란다.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통해 주신 교훈에는 이 세상에 대한 그분 자신의 사명에 나타나 있는 동일한 원칙이 드러나 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과 생애를 잘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 신성(神性)이 인성(人性)을 통해 나타났고 보이지 않는 영광이 보이는 사람의 형상을 통하여 나타났다.… 하늘의 사물이 세상 사물을 통하여 드러났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실물교훈, 17).
<부가설명> 예수께서 마음 밭에 뿌리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눅8:11)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서 잘 자라기 위하여서는 깨달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면 옛날 바리새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깨닫는 경험의 한 장면은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라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는데서 볼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치를 확실히 이해하게 되면 깨닫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생활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면 곧 생활로 옮겨야 깨달음이 생활에 굳게 된다. 엠마오의 제자들을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곧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자기들을 깨달은 체험을 증거하는 행동을 나타내었다. 깨달음이 만드는 결과였다. 우리도 예수 안에서 이런 경험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며 참 제자가 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제자도의 높은 표준을 제시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자신을 돌아봄으로 온전히 그분을 의지하게 하셨다.
넷째날(수) 혁명가의 전쟁
1월8일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稅)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눅 20:9).
그리스도는 평범한 무기조차 없었지만 그의 사역은 혁명적이었다. 그분의 도구는 칼이나 창보다 훨씬 강력하였다. 삶을 변화시키는 그분의 말씀은 종종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되었으며 악과 맞서는 그분의 병기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전략과 전술은 많은 지도자의 허를 찔렀다. 그들은 민중을 압도하는 그분의 호소력을 마주할 대비가 부족했다. 많은 경우 그분의 비유는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기별을 담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기별이 백성의 심령을 관통하는 곳은 어디든지 그들의 영향력이 위축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하였다.
1. 마 21:28~32, 눅 14:16~24, 20:9~19을 읽어 보라. 이 비유들은 어떤 강력한 기별을 담고 있는가? 비유는 종종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 전달되었지만, 우리가 누구이든 여기서 어떤 원칙이 우리에게 적용되는가?
[마21: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눅14:16~24]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20:9~1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답: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망한다는 기별을 강하게 전달한다.
“포도원의 비유는 유대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도 교훈이 된다. 현세의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큰 특권과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로부터 상당한 보답이 있기를 기대하신다”(실물교훈, 296).
우리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다. 그리스도 피로 구속함을 받았고, 우리의 의가 아닌 그분의 의를 힘입어 구원을 약속 받았으며, 영생의 보증과 성령을 받았다. 우리는 매우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의 가치를 잊어버리거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하찮게 여기기 쉽다. 비유 속의 포도원 농부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심판의 날에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변명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무지를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부가설명> 오늘의 제목은 혁명가의 전쟁이다. 교과 저자는 예수님을 혁명가로 보았다. 그런데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종교와 신앙의 관념의 혁명이다.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기록된 율법의 문자적 준행이 구원과 영생이 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세리와 창녀는 구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위치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이었다. 이유는 세리와 창기는 요한의 기별을 믿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구원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철저히 준행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데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핵심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얻으라는 것이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인 것이다. 이 세상은 사망의 나라이다. 사망은 망하게 되어 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딤후1:10)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행위의 복음을 외치고 있지 않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복음의 핵심 내용을 깨달아 전해야 한다. 그렇기 위하여 우리는 철저히 예수 반석에 떨어져서 자기가 산산히 깨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1:9~11)
교훈
비유와 상징으로 전달된 예수님의 기별은 칼과 창보다 강력하였고 반대 세력을 약화시킬 만큼 혁명적이었다.
다섯째날(목) 그리스도의 창조적인 유산
1월9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기록이 끝난 후에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는 방식이 성경에서 사라진 듯 보인다. 어떻게 이 현상을 설명해야 할까? 신약성경의 남은 부분은 확실히 바울을 중심에 둔다. 신약의 14책이 바울의 글이며, 역사적인 기록을 담은 사도행전도 거의 절반이 바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이야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은유와 직유 등 여러 창조적인 장치를 자주 활용하였다(참고 롬 7:1~6, 고전 3:10~15, 고후 5:1~10). 바울은 이야기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논조는 지겹거나 색채가 없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공중 담화와 바울의 언어 사이에는 문체상의 차이점이 존재하나 양쪽 모두 상당히 창조적인 표현력을 드러낸다.
신약의 다른 기자들도 비유를 사용하신 그리스도의 방법에 어느 정도 친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예화식 교육을 시작하기 위해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약 2:2) 들어온다고 가정해 보라고 썼다. 물론 예수님의 형제나 어떤 제자도 예수님만큼 이야기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직유나 상징은 흔히 사용된 방법이다.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 1:10). “또 배를 보라”(약 3:4). 베드로가 본 환상(행 10)도 상징적인 형태이다. 상징적인 담화는 계시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계 12:13).
어떻게 설명되든지 원리는 동일하다. 은유, 직유, 비유, 풍유, 그 밖의 창조적인 언어 기법은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소통하게 한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청중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와 예화를 사용하여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활성화시켰다. 우리도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1. 아래에서 두세 개의 성경절을 골라 그 중에 있는 은유를 찾아보라. 이 말씀 가운데 어떤 다양한 기별이 담겨 있는가? 기별을 전달하기 위해 어떤 형상이 사용되었는가? 행 10:9~16, 약 3:3~12, 계 12:7~17, 18:9~20, 19:11~16.
[행10:9~16]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15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 보자기에 담긴 각종 가증한 생물들의 환상으로 이방인들을 가증하게 취급하는 베드로와 유대인의 사상을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기별로 은유하셨다.
[약3:3~12]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 말 입에 재갈 물리는 것과 배의 키와 불이 나무를 태우는 비유를 통하여 사람이 혀를 길들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샘이 한 구멍에서 두 가지 물을 솟구치지 않는 것을 통하여 한 사람이 각기 다른 두 가지 사상으로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계12:7~1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18:9~20]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1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6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계19: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 계시록은 요즘 말로하면 애니메이션적인 환상으로 역사적 사건과 말세적 사건을 나타내주셨다.
<부가설명> 성경에는 상징과 표상이 가득하다. 창세기 3장에 뱀이 등장한다. 그것이 실제로 뱀이 등장했겠지만 그것은 사단의 상징적 동물이다.(계12:9) 에스겔은 많은 비유로 이스라엘의 허물을 지적하였다. 다니엘은 많은 상징으로 세상의 역사를 예언하였다. 요한도 많은 상징으로 계시록을 기록하였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상징적 형상을 보여주셨다. 비유와 상징은 간단한 표현으로 많은 것을 말하게 한다. 성경을 공부할 때 또는 가르칠 때 적절한 비유와 상징은 예수께서 하신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장로교회에서 재림교회로 옮긴 후에 만화나 우화를 좋게 여기지 않는 말을 들었다. 그것들은 다 거짓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그 말을 그대로 들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성경을 읽으니까 성경에는 우화와 상징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니메이션으로 진리를 가르쳐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비유는 사실일 수도 있고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르쳐주려는 진리는 확실한 것이다. 비유나 우화나 애니메이션을 사용할 때에 그것이 정말 성경 진리를 올바르게 전하는 바른 전달 방법인가는 십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훈
비중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 외의 다른 신약 기자들도 창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였다.
여섯째날(금) 1월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실물교훈>, 17~27 “비유로 가르치심”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는 질문을 이끌어 내고자 하셨으며 주의성 없는 자들을 각성시켜서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새겨 주고자 하셨다. 비유로 가르치는 일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었고 호평을 받고 관심을 끌었다.…
비유로 가르치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꼭 전해야 할 진리를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의 교훈을 일상생활의 경험과 천연계의 장면들과 연결시킴으로 그들의 주목을 끄시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후에 그들이 그 교훈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실물들을 보게 될 때에, 거룩한 교사의 말씀을 회상(回想)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실 통로(通路)를 찾고 계셨다. 그는 여러 가지 실례를 사용하심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진리를 제시하셨을 뿐 아니라 여러 같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셨다”(실물교훈, 20~2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안교반에서 일요일 질문에 대한 그대의 답을 발표해 보십시오. 각각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 예수께서 경우에 합당한 비유를 베푸신 사실을 배우고 우리도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➋ 예수님은 청중에게 익숙한 사물에서 끌어낸 이미지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영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문화로부터 무엇을 끌어내 사용할 수 있을까요?
※ 우리 문화에서 진니를 증거하기에 적절한 사건과 이야기를 사용할 수 있다.
➌ 예수님은 대체로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비유를 사용하셨지만,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는 도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바울의 서신이나 신약의 다른 곳에서 도시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경우가 있습니까?
※ 야고보서는 도시에 가서 장사하려는 사실을 사용하였다.(약4:13~16) 그 외의 편지서에는 도시적인 이미지에 대하여 잘 떠오르지 않는다. 독자들께서 찾아보기 바란다.
➍ 훌륭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요소들이 있고 그것들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요소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 이야기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다. 우리가 비유나 이야기를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에 기승전결의 요소를 잘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이야기가 실감이 나는 것이고 합리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이한용님의 댓글
이한용 작성일
목사님 새해에도 건강 하시고 행복 하세요.
동해의 밝은 해가 화진포 바닷가에서 떠오르는 모습에서 희망찬 새해 아침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