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선지자 이사야(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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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9-18 07:51 조회6,289회 댓글0건본문
제 13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선지자 이사야
9월 27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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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예언문학의 보고라고 할 만큼 풍부한 어휘와 시적 감각으로 예리하게 시대 상황을 대변하는 이사야서는 총 66장로 된 방대한 예언집이다. 이사야서는 한 사람의 작품이라기 보다 선집으로 인정하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설이다. 기원전 8세기의 남북 왕조의 퇴폐풍조와 불의에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의 소리가 갑자기 40장부터는 기원전 6세기 나라가 망한 슬픔 속에서 야웨의 종을 통한 구원을 선포함으로 희망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56장부터는 또 다른 시대로 들어서면서 포로기 시대의 정황들이 묘사되어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의 차이를 보이면서도 일관성 있는 주제 하에 근본사상은 통일성 있게 나타난다. 즉 제 1 이사야가 예언활동을 한 이후 예언한 것들이 성취된 것을 목격한 제자들, 이사야 학파에 의해서 시대 배경은 서로 다르지만 일관성 있는 주제로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예언서 1-39장은 제 1 이사야로 부르며, 앗시리아 대신 바벨론이 등장하는 기원전 6세기의 상황을 담고 있는 40-55장을 제 2 이사야라 칭하고, 포로에서 풀려나 귀환한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하는 마지막56-66장을 제 3 이사야의 작품이라고 부른다. 이사야 1장 1절에서 예언자 이사야가 아모츠(amoz)의 아들로 되어 있다. 성경에는 동일하게 번역이 되어 있으나 이 이름은 북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 아모스(amos)와는 다른 이름이다. 이사야의 아버지나 그 가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출신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이사야는 왕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사 7:3). 또한 예루살렘의 지도자와 제사장들에게도 잘 알려졌으며(사28:7, 14), 정부 조직의 핵심인물에게 잘 알려진(사 29:5) 인물이라고 본다. 예루살렘 궁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고 40여년에 걸친 예언 활동 기간에 왕들의 자문역(대하 26:22)을 맡은 것으로 보아 북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 아모스와 같은 변두리 사람은 아니었다고 본다.
기억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연구범위: 레 16:30, 17:11, 사 6:1-10, 49:6, 렘 3:22, 마 28:18-20, 히 1:2.
중심 사상: 이사야는 죄와 타락을 지적했고, 공의와 의로움을 옹호했으며, 오실 메시야에 관하여 예언했던 주전 8세기의 강력한 선지자였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이사야처럼 일할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사야의 중심적인 사명은 남방 유다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는 죄와 타락과 하나님에 대한 민족적 반역을 거리낌 없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사야의 사명은 단지 유대 내부의 개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유다가 온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명을 수행할 날이 올 것을 내다보았다. 유다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홀로 간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하는 사명을 갖게 될 것이었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사 42:6).
온 세상을 향한 이 거대한 선교적 사명은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지고 말았다. 예수님의 사역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활동이 있기까지는 세상을 향한 이 복음전파의 이상(異像)이 실행되지 못했는데, 우리도 또한 이 시대에 그 동일한 이상에 동참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일요일(9월 21일)
“화로다. 나여!”(사 6:1-6)
도입)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홀로 자신을 바라보면 잘나고 귀하게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보면 자신의 죄악된 모습과 초라함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화로다 나여!’ 라는 의미하는 것은 자신이 심히 두려워한 나머지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이 사실을 이상히 여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그가 육신을 갖고 있는 한 그 육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진지하게 이끌려 가기 전에는 하나의 망상이며 어둠속을 걷는 것이며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 빛 속으로 들어오게 될 때 진실과 거짓의 차이를 알아보기란 쉽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때 빛을 가지고 오신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가졌던 그릇된 생각을 좋아할 때 볼 수 없었던 우리의 무가치함을 알아보게 하시기 위해서다.
1. 이사야 6:1-6을 읽으십시오. 이사야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답:
이사야는 이상(異像)을 통해, “높이 들린” 보좌(사 6:1)에 하나님이 친히 좌정해 계신 하늘 알현실(謁見室)을 볼 수 있도록 그곳으로 옮겨졌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알현실을 보는 이상 중에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끌리는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고, 스랍이라 불리는 여섯 날개 달린 존재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사야는 스랍들이 서로 창화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힘이 있어 문설주가 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하였다.
2. 이사야의 이상과 하나님을 뵌 다른 이들의 경험을 비교해 보십시오(출 20:18-19, 삿 13:22, 욥 42:5-6, 계 1:17). 그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어떤 중요한 교훈을 끌어 낼 수 있습니까?
답: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이상 중에 뵌 후에 다음과 같이 반응하였다. 그는 외치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망하다’로 번역된 다마(damah)라는 히브리어는 ‘절단되다,’ 혹은 ‘끝나다’의 의미이다. 제임스왕역(KJV)에도 이 단어는 ‘멸망하다’(perish; 시 49:12, 20) 또는 ‘망하다’(destroyed; 호 4:6)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이사야의 그러한 대면이 그에게는 완전히 깨어지는 경험이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뵈옵는 경험을 통하여,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교훈: 이사야는 이상 중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뵌 후에 자신의 부정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았으며,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부가적용)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알아차린 사람이 하나님을 뵙고 있을 때 죽음밖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는 분이시며 우리가 알기로는 그분에게는 숨겨진 것이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그분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가진 정결이 불결이기 때문이다. 이 선지자에게 이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와 비교할 때 우리는 어떠한가? 주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시작하셨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부정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남아있는 부정이 우리 육체 속에 언제나 있다. 그리하여 우리 또한 하나의 일반적인 교리를 끌어내지 않으면 안되겠다. 즉 모든 사람의 입술은 주께서 그것을 정결하게 해주시기 전에는 깨끗하지 못하고 부정하다는 것이다. 이 교리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교훈이 인간을 속이는 불결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는 정결한 것이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자신이 잘나고 귀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월요일(9월 22일)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6-7)
도입)
‘인체의 신비전’이라는 전시회는 인간의 육체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분해해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하며 신비로운지를 목격할 수 있게 했다. 그 중 인간의 폐를 비교해 놓은 것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건강한 사람의 폐는 맑은 우유빛깔로 선홍색 혈관이 선명하게 보이면서 힘줄의 결이 아주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줄담배를 피운 사람의 폐는 새까만 침전물이 가득하게 붙어 있어 마치 금방 굴뚝에서 나온 것 같았다. 만약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그것을 봤다면 결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담배가 폐를 새까맣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폐는 그럴지 몰라도 내 폐는 저 정도까지는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담배를 계속 피우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비슷한 모습이다. 죄가 우리의 영혼을 좀먹고 망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다. 교회에서도 죄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죄인이라는 말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듣기 싫어한다. 교회에 나와서까지 죄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정말 죄가 미워서가 아니라 나를 자꾸 죄인으로 몰고 가는 말이 듣기 싫다는 것이다. 그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솟아난다. “목사님, 죄라는 말 대신에 좀 더 고상하고 멋진 말을 사용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죄라고 하지 말고 ‘소외’라는 말을 쓰면 어떻습니까? 욕심과 탐심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야망이 있다’고 쓰면 어떻습니까? 게으름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쉼과 여유’라고 쓰면 어떻습니까? 죄악이라고 말하지 말고 ‘약간의 부적절한 생각,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말하면 어떻습니까?” 클린턴이 명백한 죄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죄라고 말하지 않고 ‘부적절한 행동이 있었다’고 말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는 죄와 죄인이라는 말을 조금씩은 완화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우리가 정말 큰 죄인임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허물을 발견할 때 하나님이 어느 때보다 우리 안에 분명히 계심을 알 수 있다. 바로 그것은 그 분이 임재하시는 표시인 것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대면한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는 그 경험이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에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하였다. 그는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뵈었고, 우렛소리 같은 스랍의 음성을 들었으며, 성전에 가득한 연기를 냄새 맡았고, 스랍들이 그의 입에 댄 핀 숯을 느꼈고 맛보았던 것이다(사 6:1-6).
어제 교과에서 보았듯이, 이사야는 하나님을 뵌 그 경험 후에 자신의 무가치함에 압도되고 말았다. 참으로 이사야 6:5에 나오는 그의 말은 자신과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한 자백이었다.
1. 왜 ‘부정한 입술’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을 상징했습니까? 이사야와 그의 백성의 죄는 그들의 말에만 국한되어 있었습니까?(참조 잠 13:3, 마 12:37, 눅 6:45)
답:
이사야가 자백하자마자, 스랍 하나가 하늘의 제단에서 취한 핀 숯을 가지고 날아와서 그것을 그의 입술에 대었다.
2. 이사야 6:6-7을 읽으십시오. 스랍이 핀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댄 행위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여기서 우리 자신을 위한 어떤 교훈을 취할 수 있습니까?
답:
이사야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하나님께 드릴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당신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이사야의 죄를 사하셨다. 여기서 ‘사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카파르(qaphar)에서 파생되었는데, 구약에서는 대체로 ‘속죄하다,’ 혹은 ‘속죄’라는 말로 번역되었다(참조 출 29:36, 30:10, 레 16:30, 17:11). 이사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죄가 사해지거나 덮어지지(카파르는 또한 ‘덮다’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창 6:14 참조) 않았다면 여호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후에야 그분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
교훈: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뵌 후에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은 후에야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될 수 있었다.
부가적용)
우리가 죄를 인식하는 것이 나쁜 것일까? 죄책감을 갖는 것이 틀린 것일까? 이것은 인생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이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죄의식이고 죄책감이다. 죄책감이 없다는 것은 영혼의 한센시병을 앓는 것과 같다. 한센시병은 육체가 위기에 노출될 때 어떤 세포도 지금 육체가 위기에 놓여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지는 질병이다. 통증을 느끼지 않는 병, 자기의 육체가 아프다는 것을 전혀 감각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병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썩어 가게 만드는 아주 무서운 병이다. 우리의 눈이 지금도 깜빡거리고 있는 것은 눈이 건조함을 통증세포가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뜨거운 물건을 만지면 갑자기 ‘앗 뜨거워!’하고 손을 떼는 것은 뜨거우니 계속 만지면 손을 댈 수밖에 없다고 통증세포가 알려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의 세포는 어떤 것일까? 악을 행했는데도 영혼의 고통이 없고, 불의를 행했는데도 양심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는데도 영혼과 정신세계가 나에게 경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영혼이 썩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죄를 지으면서도 뻔뻔해지는 마음, 남을 질투하고 미워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마음, 거짓과 불의를 일삼으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마음, 하나님 앞에 섰으면서도 두렵고 떨림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스스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 내 영혼이 지금 좀먹어 들어가고 있구나! 내 영혼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있구나! 내 영혼이 지금 망가지고 있구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분, 영적으로 성숙하고 거룩한 분이란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자기의 죄의 깊이와 넓이를 더 확실하게 깨달아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다. 성 어거스틴이 위대해진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참회록’을 통하여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죄의 인식을 갖는 것, 죄책감을 갖는 것은 아주 소중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과는 반대로 심한 죄책감에 빠져있는 경우의 모습도 있다. 안방에 있는 장롱 깊숙이 무엇인가를 감추어 놓듯이 가슴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죄책감을 쌓아 두는 사람이 있다. 예배 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말씀을 들어도 자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그릇된 죄책감이다. 우리는 진정한 죄책감과 잘못된 죄책감을 구별할 줄 알아야 죄 인식을 가지면서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 우리는 죄의 깊이와 넓이의 무서움을 깨달으면서도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처음에는 죄책감속에서 고통을 받았다. 무언가 조금만 잘못하면 시시콜콜하게 문제를 갖고 신부를 찾아가서 고해를 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찾아가 고해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수도사가 그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이보게, 하나님이 자네에게 화 나신게 아닐세. 이제 보니 자네가 하나님에게 화가 난 걸세.” 죄책감에 억눌려 사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자기가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다. 하나님은 용서했는데 ‘하나님, 왜 나를 용서해 주지 않으세요?’라고 따지면서 화를 내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주홍같이 붉은 죄가 흰 눈같이 희어졌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용서 못하고 자꾸만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이 올바른 죄책감을 갖고 있는가, 혹 잘못된 죄책감으로 억눌려 있는 것은 아닌가를 확인해야 될 것이다.
화요일(9월 23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도입)
웃시야 왕은 죽었고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모든 믿음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이사야는 나라의 형편과 운명을 생각하고 도움과 위로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런 어려운 때(탄식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이사야는 영적인 큰 축복을 받았다. 나라가 어려울 때 이사야는 먼저, 위에 계신(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1절). 그가 주님을 보았을 때 이사야는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되었나? 거룩한 영광이 충만하신 주님을 뵌 이사야는 망(亡)하게 된 자신을 보았다(5절). 누구든지 참으로 왕이신 주님을 뵙고, 주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의 죄악과 실패를 반드시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바라본 사람들은 자신의 의(義)와 거룩이 누더기 같음을 깨달아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망하게 된 모습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이사야는 하나님께로부터 깨끗함을 받았다. 이사야는 첫째로 위를 바라보았고 둘째로 자신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는 셋째로 바깥의 형편 즉 이 세상의 형편을 바라보았다. 이제 하나님은 이사야를 불러 말씀을 전하는데(선포하는데) 사용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사야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필요들에게만 얽매여 있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 했다. 더 이상 죄에 속박되어 있지 아니했으며 그는 정결케 되어 있었다. 이제 일하러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응답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셨을 때 이사야는 얼른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대답하였다. 이사야가 그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그는 자신이 맡게 될 사역에 대해 세세하게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라(참조 히 11:8).
이사야는 자신에게 필요한 은사나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거나, 자신이 성공적으로 그 사역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르심에 응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그 임무에 대해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반응한 것도 아니었다(사실 그는 어떤 임무를 맡게 될지 알지도 못했다). 이사야가 응답한 까닭은, 비록 자신은 무가치하지만 하나님은 존귀하시며, 자신은 무능하지만 하나님을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사명이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해주신 것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1.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인 지상명령(마 28:18-20)을 읽으십시오. 특히 지상명령의 첫 부분을 주의 깊게 읽으십시오. 이것은 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입니까?
답:
“그러므로”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능력으로 가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힘만을 의지한다면 결코 갈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기술만을 신뢰한다면 결코 갈 수 없다. 우리의 사명은 우주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참조 행 17:28, 골 1:16, 히 1:2)에 의해 고무된 것이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도록 필요한 능력을 주신다. 그분은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하셨고(사 6:7),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임하시어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눅 1:35)으로 덮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고(눅 22:32), 사울을 성령으로 안수하신 분이시다(행 9:17-18). 그분은 또한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두신 분이시다(렘 1:9). 지구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있는 우리가 그보다 적게 기대해서야 되겠는가?
교훈: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대답했다. 역사의 중대한 시점에 있는 우리도 그렇게 반응하자.
부가적용)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도자가 떠맡는 과정이다. 기도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며, 마침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일어나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직분을 맡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으나 요즘은 오히려 귀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를 다니되 쉽고, 편하게 생활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각 교회의 기관에서는 일군을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사야로 하여금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게 하고, 스랍을 통해 그 죄사함을 선언 하신 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말씀하셨다. 이는 일군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이 보낼 자를 찾고 계시자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귀하기 때문에 내가 가겠습니다. 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화답하여야 한다. 일하라고 부르시며 사명을 주셨는데도 요나처럼 사명을 버리고 도망을 치거나, 소를 사고, 밭을 사고, 장가든 자들처럼 핑계를 대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핑계를 대며 사명을 피하려는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주님이 나를 부르고 나에게 사명을 주실 때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이 부르시고, 사명을 주심에 감격하여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겠다, 고 순종하며 사명에 충성 하여야 한다.
수요일(9월 24일)
이사야의 호소(사 6:9-10)
도입)
이사야는 귀족 출신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주저함 없이 초지일관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였다. 그는 4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유다 왕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왕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큰 도움을 주었지만, 유대 임금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예언 활동은 그가 시도한 개혁의 성패와 관계없이 후대의 예언자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신탁(믿고 맡김)은 바벨론 유배를 겪던 제 2 이사야(40-55장)와 제 3 이사야(56-66장)의 저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고,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유배 이후 시대의 예언자들에게 메시야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나아가 이사야는 예수님의 삶과 사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1. 이사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읽으십시오(사 6:9-10). 우리는 이사야에게 하신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답:
제임스왕역(KJV)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은 이 구절을 마치 하나님께서 고의로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신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을 주의 깊이 읽어보면 약간의 풍자(諷刺)와 반어법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의 백성을 향해, 듣고 깨달으며 마음을 열고 당신께로 돌이키면 고쳐주겠다고 끊임없이 호소하신 하나님께서 여기서 다른 의미의 말씀을 하셨겠는가?
2. 다음 구절들을 읽으십시오. 방금 살펴본 본문의 의미에 비추어 볼 때, 다음 구절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신 30: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잠 2: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렘 3:2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렘 4: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듣고 순종하여 돌이키면 고쳐주겠다고 호소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듣지 않았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바는, 백성이 어떻게 이사야에게 반응할지를 하나님께서 단순히 서술하신 것이며, 그분께서 백성이 그렇게 반응하기를 바라시거나 혹은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백성이 계속해서 이사야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자 그들의 마음은 자연히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사야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명하신 일들을 행하라고 백성에게 호소하셨으나, 우리가 아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돌이켜 고침을 받으라고 호소하셨으나 그 백성은 듣기를 거절하였다.
부가적용)
이 세상에 마지막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영적인 빙하시대가 출현할 것이라고 성령께서 경고하셨다.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사야 시대처럼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자아, 돈, 그리고 쾌락의 추구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신자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을 보내셔서 꽁꽁 얼어붙은 인간의 마음을 녹이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신다. 이사야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구하였지만 저들의 마음은 빙하처럼 꽁꽁 굳어 있었다. 잘 생각해 보라.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무엇을 소유하느냐(To Have)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To Be)에 달려 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예수 믿고 더 잘 살아야지 더 많이 가지고 누리며 살아야지 그럼 다른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 예수 믿더니 축복 받았구나 라고 말할게 아니냐?”고 말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착각이다. 세상 사람들의 넓은 길, 물질을 의지해서 편하게 살려는 길로 갈려는 핑계이다.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조차도 우리들에게 이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으로 믿는 자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으로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비록 그것 때문에 내가 손해보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바보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이 가야할 길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 다른 삶의 모습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믿음의 삶을 보여주며 사는 사람들이다. 기독교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목요일(9월 25일)
이방의 빛(사 42:6-7)
도입)
이방의 빛이란 첫째로 예수님께 적용되는 말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비추어야 할 빛이시다. 또한 바울에게, 선교사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과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빛이라 불러 주신다. 특히 이방의 빛이라 불러 주시니, 그것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사명자의 삶이다. 비전이란 그 부르심을 가슴에 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큰 Lamp 가게에 가보면 책상 스탠드부터 샹들리에까지 다양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불을 환하게 켜서 주의를 끌고 있다. 그러나 Lamp 가게의 등은 어두움을 밝히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초라해도 어두운 뒷골목을 밝히는 가로등이 훨씬 의미가 있다. 세상의 빛, 이방의 빛이란 그렇게 어두운 곳, 주님을 모르는 곳, 세상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곳에서 빛을 밝히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할 일도 많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할 일보다 사람이 많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교회에서 힘을 받아 세상에 나가 많은 곳에서 빛을 밝히기 위함이다. 교회 안이 신앙의 주 무대가 아니라 세상과 이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사야의 사명은 유다를 개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원대한 것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참되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는 언덕 위의 빛으로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 2:2).
1. 우리 재림교인들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우리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참조 계 14:6).
답:
2. 이사야 42:6-7을 읽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유다 민족에게 어떤 일을 행하도록 부르셨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답:
3. 이사야 49:6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 재림교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줍니까?
답: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1860년대까지만 해도 외방선교에 대한 사명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초기 재림교인들은 복음의 사명이 북 아메리카 내에 있는 다양한 인종 그룹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다문화 사회였으므로 초기 재림교인들은 본국에 있는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만 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서 스폴딩은 초기 재림교회가 그들의 사명을 북 아메리카로 한정한 것은 ‘편의적 합리화’라고 지적했다(아서 휫필드 스폴딩,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발생과 역사,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 2권, 193).
그러나 이 어린 교회는 오래지 않아서 복음의 명령에 대한 이해가 너무 제한적이었음을 인식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태평양 지역 등 전 세계에 진리를 전파하고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여러 방법을 통해 개인적으로 이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교훈: 이사야는 유다가 이방의 빛의 사명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는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최후 호소를 전할 사명을 위임받았다.
부가적용)
빛은 밝히기 위함인지라 말(bowl)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고 했다. 등화관제훈련을 하던 때가 있었다. 적기가 우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리는 것이다. 빛인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속에 살면서 스스로 가리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빛이 드러나면 부담스러워서 일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자기의 직분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라 살고, 세상에서는 믿음의 논리를 접고 세상의 논리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다. 세상 사람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것은 빛 됨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다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요 삶의 목표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사인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흑암의 나라의 백성을 빛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신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는 일이 선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열망이 바로 선교의 동기가 된다. 이 땅에 많은 이방인이 있다. 구원 받기를 원하나 받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 중에도 구원의 기쁨과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나타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이다.
금요일(9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선지자와 왕, 제25장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음’(303-310)
“하나님의 목적의 최종적인 성취에 관한 이 약속은 이사야의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 지상의 어떤 세력이 유다를 대항할 수 있겠는가?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보았으며,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하며 창화(唱和)하는 스랍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는 배역한 유다에게 주신 여호와의 기별 뒤에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따를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엘렌 G. 화잇, 이사야의 소명, 애드벤트 리뷰 앤드 쎄베스 헤럴드, 1915년 3월 11일자).
“유다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은혜로운 제의를 받아들이라는 선지자의 권고는 헛되지 아니하였다. 그 권고에 깊이 유의하고 저희 우상들을 버리고 돌이켜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희 창조주의 사랑과 자비와 부드러운 동정심을 배워 알았다. 유다 역사상 암흑 시대였던 때 곧 남은 자만이 그 땅에 있을 수 있었던 시대에 선지자의 말은 결정적인 개혁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었다. 이사야는 ‘그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겠고’(사 17:7-8)라고 선언하였다”(선지자와 왕, 32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선지자는 왜 인기가 없습니까? 만약 이사야가 살아서 돌아와 재림교회에서 활동한다면, 그는 어떤 말을 할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들을 대했듯이 화잇 여사를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요약: 선지자 이사야는 인기 없고 인정받지 못할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의 사명은 백성이 그의 몸을 톱으로 켜서 갈라놓았을 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사역을 통해 삶이 변화되었고, 그의 말의 능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하고 있다.
9월 27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1분)
도입)
이스라엘 예언문학의 보고라고 할 만큼 풍부한 어휘와 시적 감각으로 예리하게 시대 상황을 대변하는 이사야서는 총 66장로 된 방대한 예언집이다. 이사야서는 한 사람의 작품이라기 보다 선집으로 인정하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설이다. 기원전 8세기의 남북 왕조의 퇴폐풍조와 불의에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의 소리가 갑자기 40장부터는 기원전 6세기 나라가 망한 슬픔 속에서 야웨의 종을 통한 구원을 선포함으로 희망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56장부터는 또 다른 시대로 들어서면서 포로기 시대의 정황들이 묘사되어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의 차이를 보이면서도 일관성 있는 주제 하에 근본사상은 통일성 있게 나타난다. 즉 제 1 이사야가 예언활동을 한 이후 예언한 것들이 성취된 것을 목격한 제자들, 이사야 학파에 의해서 시대 배경은 서로 다르지만 일관성 있는 주제로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예언서 1-39장은 제 1 이사야로 부르며, 앗시리아 대신 바벨론이 등장하는 기원전 6세기의 상황을 담고 있는 40-55장을 제 2 이사야라 칭하고, 포로에서 풀려나 귀환한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하는 마지막56-66장을 제 3 이사야의 작품이라고 부른다. 이사야 1장 1절에서 예언자 이사야가 아모츠(amoz)의 아들로 되어 있다. 성경에는 동일하게 번역이 되어 있으나 이 이름은 북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 아모스(amos)와는 다른 이름이다. 이사야의 아버지나 그 가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출신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이사야는 왕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사 7:3). 또한 예루살렘의 지도자와 제사장들에게도 잘 알려졌으며(사28:7, 14), 정부 조직의 핵심인물에게 잘 알려진(사 29:5) 인물이라고 본다. 예루살렘 궁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고 40여년에 걸친 예언 활동 기간에 왕들의 자문역(대하 26:22)을 맡은 것으로 보아 북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 아모스와 같은 변두리 사람은 아니었다고 본다.
기억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연구범위: 레 16:30, 17:11, 사 6:1-10, 49:6, 렘 3:22, 마 28:18-20, 히 1:2.
중심 사상: 이사야는 죄와 타락을 지적했고, 공의와 의로움을 옹호했으며, 오실 메시야에 관하여 예언했던 주전 8세기의 강력한 선지자였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이사야처럼 일할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사야의 중심적인 사명은 남방 유다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는 죄와 타락과 하나님에 대한 민족적 반역을 거리낌 없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사야의 사명은 단지 유대 내부의 개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유다가 온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명을 수행할 날이 올 것을 내다보았다. 유다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홀로 간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하는 사명을 갖게 될 것이었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사 42:6).
온 세상을 향한 이 거대한 선교적 사명은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지고 말았다. 예수님의 사역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활동이 있기까지는 세상을 향한 이 복음전파의 이상(異像)이 실행되지 못했는데, 우리도 또한 이 시대에 그 동일한 이상에 동참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일요일(9월 21일)
“화로다. 나여!”(사 6:1-6)
도입)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홀로 자신을 바라보면 잘나고 귀하게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보면 자신의 죄악된 모습과 초라함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화로다 나여!’ 라는 의미하는 것은 자신이 심히 두려워한 나머지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이 사실을 이상히 여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그가 육신을 갖고 있는 한 그 육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진지하게 이끌려 가기 전에는 하나의 망상이며 어둠속을 걷는 것이며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 빛 속으로 들어오게 될 때 진실과 거짓의 차이를 알아보기란 쉽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때 빛을 가지고 오신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가졌던 그릇된 생각을 좋아할 때 볼 수 없었던 우리의 무가치함을 알아보게 하시기 위해서다.
1. 이사야 6:1-6을 읽으십시오. 이사야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답:
이사야는 이상(異像)을 통해, “높이 들린” 보좌(사 6:1)에 하나님이 친히 좌정해 계신 하늘 알현실(謁見室)을 볼 수 있도록 그곳으로 옮겨졌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알현실을 보는 이상 중에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끌리는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고, 스랍이라 불리는 여섯 날개 달린 존재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사야는 스랍들이 서로 창화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힘이 있어 문설주가 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하였다.
2. 이사야의 이상과 하나님을 뵌 다른 이들의 경험을 비교해 보십시오(출 20:18-19, 삿 13:22, 욥 42:5-6, 계 1:17). 그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어떤 중요한 교훈을 끌어 낼 수 있습니까?
답: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이상 중에 뵌 후에 다음과 같이 반응하였다. 그는 외치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망하다’로 번역된 다마(damah)라는 히브리어는 ‘절단되다,’ 혹은 ‘끝나다’의 의미이다. 제임스왕역(KJV)에도 이 단어는 ‘멸망하다’(perish; 시 49:12, 20) 또는 ‘망하다’(destroyed; 호 4:6)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이사야의 그러한 대면이 그에게는 완전히 깨어지는 경험이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뵈옵는 경험을 통하여,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교훈: 이사야는 이상 중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뵌 후에 자신의 부정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았으며,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부가적용)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알아차린 사람이 하나님을 뵙고 있을 때 죽음밖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는 분이시며 우리가 알기로는 그분에게는 숨겨진 것이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그분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가진 정결이 불결이기 때문이다. 이 선지자에게 이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와 비교할 때 우리는 어떠한가? 주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시작하셨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부정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남아있는 부정이 우리 육체 속에 언제나 있다. 그리하여 우리 또한 하나의 일반적인 교리를 끌어내지 않으면 안되겠다. 즉 모든 사람의 입술은 주께서 그것을 정결하게 해주시기 전에는 깨끗하지 못하고 부정하다는 것이다. 이 교리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교훈이 인간을 속이는 불결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는 정결한 것이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자신이 잘나고 귀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월요일(9월 22일)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6-7)
도입)
‘인체의 신비전’이라는 전시회는 인간의 육체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분해해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하며 신비로운지를 목격할 수 있게 했다. 그 중 인간의 폐를 비교해 놓은 것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건강한 사람의 폐는 맑은 우유빛깔로 선홍색 혈관이 선명하게 보이면서 힘줄의 결이 아주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줄담배를 피운 사람의 폐는 새까만 침전물이 가득하게 붙어 있어 마치 금방 굴뚝에서 나온 것 같았다. 만약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그것을 봤다면 결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담배가 폐를 새까맣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폐는 그럴지 몰라도 내 폐는 저 정도까지는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담배를 계속 피우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비슷한 모습이다. 죄가 우리의 영혼을 좀먹고 망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다. 교회에서도 죄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죄인이라는 말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듣기 싫어한다. 교회에 나와서까지 죄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정말 죄가 미워서가 아니라 나를 자꾸 죄인으로 몰고 가는 말이 듣기 싫다는 것이다. 그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솟아난다. “목사님, 죄라는 말 대신에 좀 더 고상하고 멋진 말을 사용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죄라고 하지 말고 ‘소외’라는 말을 쓰면 어떻습니까? 욕심과 탐심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야망이 있다’고 쓰면 어떻습니까? 게으름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쉼과 여유’라고 쓰면 어떻습니까? 죄악이라고 말하지 말고 ‘약간의 부적절한 생각,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말하면 어떻습니까?” 클린턴이 명백한 죄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죄라고 말하지 않고 ‘부적절한 행동이 있었다’고 말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는 죄와 죄인이라는 말을 조금씩은 완화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우리가 정말 큰 죄인임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허물을 발견할 때 하나님이 어느 때보다 우리 안에 분명히 계심을 알 수 있다. 바로 그것은 그 분이 임재하시는 표시인 것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대면한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는 그 경험이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에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하였다. 그는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뵈었고, 우렛소리 같은 스랍의 음성을 들었으며, 성전에 가득한 연기를 냄새 맡았고, 스랍들이 그의 입에 댄 핀 숯을 느꼈고 맛보았던 것이다(사 6:1-6).
어제 교과에서 보았듯이, 이사야는 하나님을 뵌 그 경험 후에 자신의 무가치함에 압도되고 말았다. 참으로 이사야 6:5에 나오는 그의 말은 자신과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한 자백이었다.
1. 왜 ‘부정한 입술’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을 상징했습니까? 이사야와 그의 백성의 죄는 그들의 말에만 국한되어 있었습니까?(참조 잠 13:3, 마 12:37, 눅 6:45)
답:
이사야가 자백하자마자, 스랍 하나가 하늘의 제단에서 취한 핀 숯을 가지고 날아와서 그것을 그의 입술에 대었다.
2. 이사야 6:6-7을 읽으십시오. 스랍이 핀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댄 행위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여기서 우리 자신을 위한 어떤 교훈을 취할 수 있습니까?
답:
이사야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하나님께 드릴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당신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이사야의 죄를 사하셨다. 여기서 ‘사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카파르(qaphar)에서 파생되었는데, 구약에서는 대체로 ‘속죄하다,’ 혹은 ‘속죄’라는 말로 번역되었다(참조 출 29:36, 30:10, 레 16:30, 17:11). 이사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죄가 사해지거나 덮어지지(카파르는 또한 ‘덮다’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창 6:14 참조) 않았다면 여호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후에야 그분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
교훈: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뵌 후에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은 후에야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될 수 있었다.
부가적용)
우리가 죄를 인식하는 것이 나쁜 것일까? 죄책감을 갖는 것이 틀린 것일까? 이것은 인생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이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죄의식이고 죄책감이다. 죄책감이 없다는 것은 영혼의 한센시병을 앓는 것과 같다. 한센시병은 육체가 위기에 노출될 때 어떤 세포도 지금 육체가 위기에 놓여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지는 질병이다. 통증을 느끼지 않는 병, 자기의 육체가 아프다는 것을 전혀 감각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병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썩어 가게 만드는 아주 무서운 병이다. 우리의 눈이 지금도 깜빡거리고 있는 것은 눈이 건조함을 통증세포가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뜨거운 물건을 만지면 갑자기 ‘앗 뜨거워!’하고 손을 떼는 것은 뜨거우니 계속 만지면 손을 댈 수밖에 없다고 통증세포가 알려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의 세포는 어떤 것일까? 악을 행했는데도 영혼의 고통이 없고, 불의를 행했는데도 양심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는데도 영혼과 정신세계가 나에게 경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영혼이 썩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죄를 지으면서도 뻔뻔해지는 마음, 남을 질투하고 미워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마음, 거짓과 불의를 일삼으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마음, 하나님 앞에 섰으면서도 두렵고 떨림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스스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 내 영혼이 지금 좀먹어 들어가고 있구나! 내 영혼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있구나! 내 영혼이 지금 망가지고 있구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분, 영적으로 성숙하고 거룩한 분이란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자기의 죄의 깊이와 넓이를 더 확실하게 깨달아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다. 성 어거스틴이 위대해진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참회록’을 통하여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죄의 인식을 갖는 것, 죄책감을 갖는 것은 아주 소중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과는 반대로 심한 죄책감에 빠져있는 경우의 모습도 있다. 안방에 있는 장롱 깊숙이 무엇인가를 감추어 놓듯이 가슴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죄책감을 쌓아 두는 사람이 있다. 예배 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말씀을 들어도 자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그릇된 죄책감이다. 우리는 진정한 죄책감과 잘못된 죄책감을 구별할 줄 알아야 죄 인식을 가지면서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 우리는 죄의 깊이와 넓이의 무서움을 깨달으면서도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처음에는 죄책감속에서 고통을 받았다. 무언가 조금만 잘못하면 시시콜콜하게 문제를 갖고 신부를 찾아가서 고해를 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찾아가 고해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수도사가 그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이보게, 하나님이 자네에게 화 나신게 아닐세. 이제 보니 자네가 하나님에게 화가 난 걸세.” 죄책감에 억눌려 사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자기가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다. 하나님은 용서했는데 ‘하나님, 왜 나를 용서해 주지 않으세요?’라고 따지면서 화를 내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주홍같이 붉은 죄가 흰 눈같이 희어졌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용서 못하고 자꾸만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이 올바른 죄책감을 갖고 있는가, 혹 잘못된 죄책감으로 억눌려 있는 것은 아닌가를 확인해야 될 것이다.
화요일(9월 23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도입)
웃시야 왕은 죽었고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모든 믿음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이사야는 나라의 형편과 운명을 생각하고 도움과 위로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런 어려운 때(탄식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이사야는 영적인 큰 축복을 받았다. 나라가 어려울 때 이사야는 먼저, 위에 계신(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1절). 그가 주님을 보았을 때 이사야는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되었나? 거룩한 영광이 충만하신 주님을 뵌 이사야는 망(亡)하게 된 자신을 보았다(5절). 누구든지 참으로 왕이신 주님을 뵙고, 주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의 죄악과 실패를 반드시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바라본 사람들은 자신의 의(義)와 거룩이 누더기 같음을 깨달아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망하게 된 모습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이사야는 하나님께로부터 깨끗함을 받았다. 이사야는 첫째로 위를 바라보았고 둘째로 자신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는 셋째로 바깥의 형편 즉 이 세상의 형편을 바라보았다. 이제 하나님은 이사야를 불러 말씀을 전하는데(선포하는데) 사용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사야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필요들에게만 얽매여 있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 했다. 더 이상 죄에 속박되어 있지 아니했으며 그는 정결케 되어 있었다. 이제 일하러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응답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셨을 때 이사야는 얼른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대답하였다. 이사야가 그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그는 자신이 맡게 될 사역에 대해 세세하게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라(참조 히 11:8).
이사야는 자신에게 필요한 은사나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거나, 자신이 성공적으로 그 사역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르심에 응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그 임무에 대해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반응한 것도 아니었다(사실 그는 어떤 임무를 맡게 될지 알지도 못했다). 이사야가 응답한 까닭은, 비록 자신은 무가치하지만 하나님은 존귀하시며, 자신은 무능하지만 하나님을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사명이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해주신 것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1.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인 지상명령(마 28:18-20)을 읽으십시오. 특히 지상명령의 첫 부분을 주의 깊게 읽으십시오. 이것은 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입니까?
답:
“그러므로”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능력으로 가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힘만을 의지한다면 결코 갈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기술만을 신뢰한다면 결코 갈 수 없다. 우리의 사명은 우주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참조 행 17:28, 골 1:16, 히 1:2)에 의해 고무된 것이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도록 필요한 능력을 주신다. 그분은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하셨고(사 6:7),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임하시어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눅 1:35)으로 덮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고(눅 22:32), 사울을 성령으로 안수하신 분이시다(행 9:17-18). 그분은 또한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두신 분이시다(렘 1:9). 지구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있는 우리가 그보다 적게 기대해서야 되겠는가?
교훈: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대답했다. 역사의 중대한 시점에 있는 우리도 그렇게 반응하자.
부가적용)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도자가 떠맡는 과정이다. 기도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며, 마침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일어나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직분을 맡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으나 요즘은 오히려 귀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를 다니되 쉽고, 편하게 생활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각 교회의 기관에서는 일군을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사야로 하여금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게 하고, 스랍을 통해 그 죄사함을 선언 하신 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말씀하셨다. 이는 일군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이 보낼 자를 찾고 계시자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귀하기 때문에 내가 가겠습니다. 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화답하여야 한다. 일하라고 부르시며 사명을 주셨는데도 요나처럼 사명을 버리고 도망을 치거나, 소를 사고, 밭을 사고, 장가든 자들처럼 핑계를 대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핑계를 대며 사명을 피하려는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주님이 나를 부르고 나에게 사명을 주실 때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이 부르시고, 사명을 주심에 감격하여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겠다, 고 순종하며 사명에 충성 하여야 한다.
수요일(9월 24일)
이사야의 호소(사 6:9-10)
도입)
이사야는 귀족 출신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주저함 없이 초지일관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였다. 그는 4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유다 왕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왕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큰 도움을 주었지만, 유대 임금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예언 활동은 그가 시도한 개혁의 성패와 관계없이 후대의 예언자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신탁(믿고 맡김)은 바벨론 유배를 겪던 제 2 이사야(40-55장)와 제 3 이사야(56-66장)의 저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고,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유배 이후 시대의 예언자들에게 메시야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나아가 이사야는 예수님의 삶과 사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1. 이사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읽으십시오(사 6:9-10). 우리는 이사야에게 하신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답:
제임스왕역(KJV)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은 이 구절을 마치 하나님께서 고의로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신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을 주의 깊이 읽어보면 약간의 풍자(諷刺)와 반어법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의 백성을 향해, 듣고 깨달으며 마음을 열고 당신께로 돌이키면 고쳐주겠다고 끊임없이 호소하신 하나님께서 여기서 다른 의미의 말씀을 하셨겠는가?
2. 다음 구절들을 읽으십시오. 방금 살펴본 본문의 의미에 비추어 볼 때, 다음 구절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신 30: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잠 2: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렘 3:2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렘 4: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듣고 순종하여 돌이키면 고쳐주겠다고 호소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듣지 않았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바는, 백성이 어떻게 이사야에게 반응할지를 하나님께서 단순히 서술하신 것이며, 그분께서 백성이 그렇게 반응하기를 바라시거나 혹은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백성이 계속해서 이사야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자 그들의 마음은 자연히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사야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명하신 일들을 행하라고 백성에게 호소하셨으나, 우리가 아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돌이켜 고침을 받으라고 호소하셨으나 그 백성은 듣기를 거절하였다.
부가적용)
이 세상에 마지막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영적인 빙하시대가 출현할 것이라고 성령께서 경고하셨다.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사야 시대처럼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자아, 돈, 그리고 쾌락의 추구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신자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을 보내셔서 꽁꽁 얼어붙은 인간의 마음을 녹이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신다. 이사야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구하였지만 저들의 마음은 빙하처럼 꽁꽁 굳어 있었다. 잘 생각해 보라.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무엇을 소유하느냐(To Have)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To Be)에 달려 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예수 믿고 더 잘 살아야지 더 많이 가지고 누리며 살아야지 그럼 다른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 예수 믿더니 축복 받았구나 라고 말할게 아니냐?”고 말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착각이다. 세상 사람들의 넓은 길, 물질을 의지해서 편하게 살려는 길로 갈려는 핑계이다.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조차도 우리들에게 이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으로 믿는 자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으로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비록 그것 때문에 내가 손해보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바보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이 가야할 길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 다른 삶의 모습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믿음의 삶을 보여주며 사는 사람들이다. 기독교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목요일(9월 25일)
이방의 빛(사 42:6-7)
도입)
이방의 빛이란 첫째로 예수님께 적용되는 말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비추어야 할 빛이시다. 또한 바울에게, 선교사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과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빛이라 불러 주신다. 특히 이방의 빛이라 불러 주시니, 그것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사명자의 삶이다. 비전이란 그 부르심을 가슴에 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큰 Lamp 가게에 가보면 책상 스탠드부터 샹들리에까지 다양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불을 환하게 켜서 주의를 끌고 있다. 그러나 Lamp 가게의 등은 어두움을 밝히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초라해도 어두운 뒷골목을 밝히는 가로등이 훨씬 의미가 있다. 세상의 빛, 이방의 빛이란 그렇게 어두운 곳, 주님을 모르는 곳, 세상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곳에서 빛을 밝히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할 일도 많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할 일보다 사람이 많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교회에서 힘을 받아 세상에 나가 많은 곳에서 빛을 밝히기 위함이다. 교회 안이 신앙의 주 무대가 아니라 세상과 이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사야의 사명은 유다를 개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원대한 것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참되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는 언덕 위의 빛으로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 2:2).
1. 우리 재림교인들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우리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참조 계 14:6).
답:
2. 이사야 42:6-7을 읽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유다 민족에게 어떤 일을 행하도록 부르셨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답:
3. 이사야 49:6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 재림교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줍니까?
답: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1860년대까지만 해도 외방선교에 대한 사명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초기 재림교인들은 복음의 사명이 북 아메리카 내에 있는 다양한 인종 그룹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다문화 사회였으므로 초기 재림교인들은 본국에 있는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만 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서 스폴딩은 초기 재림교회가 그들의 사명을 북 아메리카로 한정한 것은 ‘편의적 합리화’라고 지적했다(아서 휫필드 스폴딩,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발생과 역사,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 2권, 193).
그러나 이 어린 교회는 오래지 않아서 복음의 명령에 대한 이해가 너무 제한적이었음을 인식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태평양 지역 등 전 세계에 진리를 전파하고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여러 방법을 통해 개인적으로 이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교훈: 이사야는 유다가 이방의 빛의 사명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는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최후 호소를 전할 사명을 위임받았다.
부가적용)
빛은 밝히기 위함인지라 말(bowl)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고 했다. 등화관제훈련을 하던 때가 있었다. 적기가 우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리는 것이다. 빛인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속에 살면서 스스로 가리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빛이 드러나면 부담스러워서 일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자기의 직분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라 살고, 세상에서는 믿음의 논리를 접고 세상의 논리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다. 세상 사람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것은 빛 됨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다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요 삶의 목표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사인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흑암의 나라의 백성을 빛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신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는 일이 선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열망이 바로 선교의 동기가 된다. 이 땅에 많은 이방인이 있다. 구원 받기를 원하나 받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 중에도 구원의 기쁨과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나타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이다.
금요일(9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선지자와 왕, 제25장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음’(303-310)
“하나님의 목적의 최종적인 성취에 관한 이 약속은 이사야의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 지상의 어떤 세력이 유다를 대항할 수 있겠는가?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보았으며,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하며 창화(唱和)하는 스랍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는 배역한 유다에게 주신 여호와의 기별 뒤에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따를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엘렌 G. 화잇, 이사야의 소명, 애드벤트 리뷰 앤드 쎄베스 헤럴드, 1915년 3월 11일자).
“유다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은혜로운 제의를 받아들이라는 선지자의 권고는 헛되지 아니하였다. 그 권고에 깊이 유의하고 저희 우상들을 버리고 돌이켜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희 창조주의 사랑과 자비와 부드러운 동정심을 배워 알았다. 유다 역사상 암흑 시대였던 때 곧 남은 자만이 그 땅에 있을 수 있었던 시대에 선지자의 말은 결정적인 개혁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었다. 이사야는 ‘그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겠고’(사 17:7-8)라고 선언하였다”(선지자와 왕, 32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선지자는 왜 인기가 없습니까? 만약 이사야가 살아서 돌아와 재림교회에서 활동한다면, 그는 어떤 말을 할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들을 대했듯이 화잇 여사를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요약: 선지자 이사야는 인기 없고 인정받지 못할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의 사명은 백성이 그의 몸을 톱으로 켜서 갈라놓았을 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사역을 통해 삶이 변화되었고, 그의 말의 능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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