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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십자가에서의 속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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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11-26 09:24 조회5,7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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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십자가에서의 속죄
12월 6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3분)

도입)
회교국가인 모로코에 사는 한 남자가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 선교사는 글을 전혀 모르는 그를 위해 검정색, 빨강색, 흰색, 황금색의 네 장으로 만들어진 '글 없는 책'을 주며 그 책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첫 번째 장의 검정색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 장의 빨강색은 이 인간들의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상징합니다. 세 번째 장의 흰색은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어 구원받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장의 황금색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 책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는데, 얼마 있다가 그만 심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아내에게 '글 없는 책'을 가져다 달라고 하였다. 흰색 장을 펼쳐서 그의 가슴에 얹어 주었다. 그러자 그는 "내게 필요한 것은 흰색이 아니고 빨강색이오"라고 말하면서, 빨강색 장을 펴서 가슴에 올려놓고 예수님의 피를 부르면서 죽었다고 한다. 오직 보혈의 공로만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의롭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기억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연구범위: 마 26:37-38, 27:46, 막 14:33-34, 눅 22:40-44, 요19:28-30.

중심 사상: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겟세마네와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분의 경험을 살펴본다.

안식일 오후
어떤 사람이 패스트푸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자신의 비만과 그에 따른 건강상의 문제가 일주일에 네 번씩 패스트푸드(fast-food)를 먹은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음식점 탓으로 돌렸다!
우리도 그런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놓고 남을 비난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명을 수용하지 않으시고, 우리 각자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아름다운 속죄의 신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진실로 예수님을 의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신다. 우리가 책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죄에 대한 형벌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그 형벌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형벌을 묵과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죄의 형벌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11월 30일)
번민: 겟세마네로 향하심(마 26:37-38)

(도입)
우리는 겟세마네의 고민의 심도를 깊이 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참 뜻을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겟세마네의 고민은 적을 목전에 놓고 씨름하시는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분의 고뇌였다. 우리는 겟세마네의 체험을 개인적으로 치룬 일이 없다. 겟세마네와 갈바리의 경험은 전례가 없는 특이한 사건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으로 이르는 문턱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두려워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목적으로 세상에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이를 분명히 밝히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치르실 수 있다는 것을 아셨다. 한편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자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십자가의 고난을 치루는 격이 되기 때문이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눅 4:13) 예수님을 떠났던 사단은 겟세마네에서 다시 돌아왔다. 사단은 인자로서만의 주님을 상대로 겟세마네에서 최후의 공격을 퍼부었지만 역시 지고 말았다. 겟세마네의 고민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구주로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 시키려는 진통이었다. 겟세마네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얼마나 큰 주님의 희생이 있어야 했는가를 드러내 준다. 주님의 고통은 우리의 구원을 단순하게 한 기초석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자에 대한 승리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이 지금 열려져 있는 것은 인자가 거쳐 가신 겟세마네의 고통과 십자가의 승리가 있기 때문이다.

1. 마태복음 26:37-38과 마가복음 14:33-34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무엇을 경험하셨습니까?
답:
예수께서는 다음 몇 시간 안에 어떤 일을 당할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 경험은 극도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었다. 그분은 겟세마네에 이르시자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으셔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야기하셨다(마 26:37-38, 막 14:33-34).
그분께서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막 14:33). '심히 놀라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크탐베오(ekthambeo)는 당황하고 놀라서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는, 감정이 격앙된 상태로서, 종종 두려움과 공포와 떨림이 수반된다. 마태는 비슷한 의미의 루페오(lupeo)라는 동사를 썼는데 번민과 염려로 격해진 감정을 가리킨다(마 26:38).
마가복음 14:33에 두 번째로 나오는 '슬퍼하다'(헬, 아데모네오)라는 동사는 번민이나 슬픔, 혹은 공포 그 이상을 표현한 말이다. 예수님의 정서적 및 육체적 상태는 깊은 슬픔의 상태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분께서 일생 동안 늘 지니셨던 평안은 사라지는 듯이 보였다. 그 대신 두려움과 떨림과 번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가는 예수께서 겟세마네에 이르셨을 때 그 같은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감정은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와 같은 신체적 및 정서적 상태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이유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분께서 인간적인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세상 죄를 담당하신 결과라는 사실을 신약의 전체 내용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 14:34)고 하신 것은 그분의 마음 상태를 묘사하신 말씀이다. '내 마음'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분의 경험을 가리키는 말로서 '나 자신'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여기서 '심히 고민하다'라는 말은 페리루포스(perilupos)인데, 측량할 수 없는 강렬한 슬픔이나 괴로움을 가리킨다. 이 극심한 슬픔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둘째 사망의 경계에까지 이르셨다. 그분께서는 이미 우리가 겪었어야 할 고통을 겪기 시작하신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시자 극심한 번민과 슬픔으로 전율하셨다. 그분께서는 인류가 겪어야 할 둘째 사망을 경험하실 것이었다.

(부가적용)
예루살렘 부근에는 올리브에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이것은 올리브 재배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자진하여 사로잡힌 곳이다. 이 의미에서 `겟세마네'의 이름은 영원한 울림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이야기는 4복음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겟세마네'의 이름을 명기하고 있는 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뿐이다(마 26:36,막 14:32). 그것은 기드론을 건너 저편에 있는 동산이며(요 18:1), 감람산에 위치하여 예수께서 그곳으로 가셔서 습관에 따라 기도하시던 곳이다(눅 22:39,40). 바울은 자신의 고난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고난은 반드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하시는 고난임을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고난과 바울의 고난을 생각하여 우리의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겟세마네의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자. 우리는 나의 고난에 대해 "왜?"라고 질문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신의 고난에 의해 "왜?"라고 묻지 않으셨다. 묵묵히 참아내셨다. 다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바울역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참아냈다. 둘째,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자. 주님의 대답은 갈바리 십자가였다. 우리의 고난에 대한 질문에 주님은 말로 설명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주님은 십자가로 답하셨다. 그분의 십자가를 붙들고 구하면 된다. 그분의 십자가를 붙들면 그분을 만난다. 그분의 갈보리의 고난의 침묵 속에 모든 인류의 문제의 답이 들어있다. 셋째,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것이요."(11절)라고 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참고 죽었는가? 묵묵히 기다리자.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듯이 성도들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참으면 또한 왕노릇 할것이요."(12절)라고 했다. 우리의 겟세마네를 참아내자. 반드시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월요일(12월 1일)
잔: 자원하여 복종하심(마 26:39-42)

도입)
제자들은 예수님의 잔을 영광의 잔으로 생각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하고 있던 제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을 임의로 주관할 수 있는 큰 권력자가 되어 성공하고 출세할 줄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루살렘에 가까워지자 재빨리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는 높은 지위를 요구하였다. 선수를 빼앗긴 다른 제자들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는 말의 의미도 모른 채 예수님의 잔까지 마시겠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잔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영광의 잔이 아니었다. 많은 종들을 거느린 권력자들의 손에 들려지는 값비싸고 화려한 샴페인 잔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 바쁘게 수고하며 섬기면서도 물 한잔에 감사해야 하는 종의 잔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 크고 으뜸이 되는 사람임을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이 잔에 참여해야 한다. 이 땅의 가장 낮고 미천한 자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시고 목숨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잔을 함께 마셔야 한다. 또한 예수님의 잔은 고난과 십자가의 쓴 잔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였다. 누구도 예수님의 마신 고난의 쓴 잔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결코 선뜻 그 잔을 마시고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조차 거부한 채 오직 이 땅에서의 영광과 편안한 삶을 상징하는 달콤한 축배의 잔만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피가 담겨진 고난의 쓴 잔을 마시지 않는다면 결단코 영광과 부활의 잔에 동참할 수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성공과 출세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완주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인 것이다.

1.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마 26:39-40, 막 14:35-36, 눅 22:40-44). 예수께서는 이제 곧 직면하게 될 일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답:
예수께서 동산에 계실 때 사용하신 잔(盞)이라는 상징적 언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내면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다. 성경에서 잔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시 16:5, 23:5)이나, 우리에게 제공된 구원(시 116:13)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잔은 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시 75:8)을 나타내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이 잔에는 그분의 원수에 대한 심판을 가리키는 진노의 포도주가 담겨 있다(렘 25:15-16). 예수께서 할 수 있으면 그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마 26:39, 막 14:36)고 아버지께 요청하셨을 때, 그 잔은 심판의 잔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로부터,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외로움을 경험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지지를 바라셨으나 그것을 얻지 못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분께서는 자신을 버리지 마시기를 홀로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하나님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한 다른 길이 없다"는 응답을 확인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원하여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셨다.

2. 폭도들이 그분을 사로잡기 위해 왔을 때, 베드로는 그분을 보호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요 18:11)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당하기로 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 이 지상에 오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으시지만, 우리의 죄와 형벌을 당하실 수 있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셨다.

교훈: 예수께서는 속절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자원하여 고난의 잔을 마시기로 하셨다. 그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자.

부가적용)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넘치도록 수고하면서 살았던 성도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예수 십자가 앞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는 교회 역사를 돌아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가 신약성경에 제시된 교회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할 때마다, 진정한 복음의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한결같이 나타났던 현상은 항상 이 십자가의 도가 저들의 신앙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교회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바 복음에 얼마나 충실한지, 교회가 영적으로 얼마나 부흥하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뛰어난 시금석은 바로 이 십자가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이 십자가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 인생은 과연 무엇인지’ 나의 가장 분명한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에 로마서 3장23절은 말씀하기를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임을 고하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말하는 죄란 어떤 인간의 구체적인 악행을 두고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빗나가 버린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 없이 사는 모든 삶, 하나님만을 가장 사랑하지 아니한 인간의 모든 죄를 두고 하는 말씀이다. 이에 또한 성경은 이러한 죄인이 있어야 할 곳은 ‘본질상 진노의 자리’임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노의 자리에서 죄인인 우리가 감당해야 할 형벌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십자가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실체를 깨닫게 한다. 하지만 십자가의 의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 우리에게 두 번째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의 자녀들인 우리가 달려야 할 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달려 죽게 하심으로,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를 그 진노의 무덤에서 해방시키시고 건져주신 사랑을 말한다. 이 사랑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우리가 능히 당해야 할, 우리의 질고와 우리의 슬픔을 대신 지고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죄를 인하여 대신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장면 장면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장차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는 아들의 모습을 외면하시면서 까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십자가는 두 번째 의미로 우리에게 오늘도 묵묵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화요일(12월 2일)
어둠: 원수의 손에 넘겨지심(눅 11:20-21)

도입)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눅 22:3).."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누가와 요한은 유다의 배후에서 활동하는 사단의 움직임을 언급하고 있다. 누가는 사단이 유다 속에 들어가서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유다 속에 들어갔다는 언급은 (눅 22:3)과 (요 13:2)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기록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요한은 사단이 유다 속에 들어가는 단계를 둘로 나누었니다. 그는 사단이 첫째로 유다에게 예수 팔 생각 넣었으며(요 13:2),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두 번째로 다시 유다 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요 13:27). 그러나 누가는 사단의 활동을 일회적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사단이 유다 속에 들어갔고, 그 결과로 유다가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2:3-4). 또한 누가는 요한과 달리 이 사건이 최후의 만찬 전에 일어났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누가와 요한의 기록은 주님의 수난이 하나님의 섭리인 동시에, 사단과의 영적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유다의 배신은 근원적으로 사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배반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수 있다. 그 동안 학자들은 유다가 주님을 배반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이 유다의 배신 이유로 제시한 이유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관계없는 갈릴리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루살렘 산헤드린에서 내린 결정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는 갈릴리 출신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산헤드린에서 내린 명령("누구든지 예수 있는 것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요 11:57)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을 가능성이 있다. 2) 유다는 처음부터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주님이 정치적 왕국을 세우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는 정치적 실권자인 산헤드린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다. 3) 유다는 주님의 모든 재정을 맡았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자기보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더 가까이 하시는 것을 보고 질투심에서 주님을 배반했을 수도 있다. 4) 유다는 처음부터 재물을 노리고 주님을 따랐을지 모른다. 그는 실제로 주님의 재정을 맡아보면서 은밀히 돈을 훔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께서 전혀 물질을 모으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의 곁에 있어도 부자가 될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주님을 배반했을 수도 있다. 5) 유다는 처음에는 주님을 존경했지만, 나중에는 주님을 가짜 메시아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그대로 가면 소요가 일어나고, 그 주동자인 예수는 체포되어 죽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신도 화를 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사단이 유다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사단은 유다가 예수께서 체포되기 전에 대제사장의 편이 되어야 후에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요 13:27).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대적에게 은밀히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체포되고 또 수난을 당하신 것은 사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민란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월절을 피해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나님은 주님께서 유월절 양, 즉 속죄 제물이 되도록 체포되게 만드셨다.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로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배반하고 죽인 종교 지도자들과 가룟 유다에게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무죄한 사람을 고의적으로 정죄하고 죽였으며, 유다는 돈을 받고 의인을 악인에게 팔아넘겼다. 그러므로 그는 후에 분명히 자신의 악행에 대해 심판받게 될 것이다. 사단은 종교 지도자들과 유다를 통해서 주님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음모를 가지고 인류 구원을 위한 도구로 바꾸셨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으며, 사건들은 십자가로 향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 거센 악의 세력에 직면하고 계셨다. 사단의 세력과의 싸움은 정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받으시고 “죄인의 손에 팔리”셨다(마 26:45). 여기서 '팔리다'(헬, 파라디도미)라는 동사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번 사용되었다. 유다가 그분을 배반하였으나, 하나님의 계획은 불가사의하게 성취되고 있었다. 우리 죄를 위해 그분을 죽음에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롬 4:25).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과 에베소서 5:2에 언급되어 있듯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시고 자원하여 희생적인 죽음을 당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마태복음 26:45-46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셨다. 이것은 소유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미 하나님의 빛이 그분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으며, 그분은 어둠의 세력에 넘겨지고 있었다(엘렌 G. 화잇, 영문 시조, 1892년 8월 1일자). 이제 그분은 완전히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이었다. 그분께는 이 시간이 “어두움의 권세”(눅 22:53)가 지배하는 시간이요, 아버지의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시간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홀로 어둠의 왕국으로 들어가고 계셨으나, 거기서 단번에 악을 물리치실 것이었다.

1. 예수께서는 어두움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어떻게 묘사하셨습니까?(눅 11:20-22)
답:
누가는 예수께서 어둠이 지배하는 때를 맞이하고 계셨다고 말했으며(눅 22:53),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고 덧붙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흑암의 영역 안으로 가셔서 우리가 겪어야 했던 것을 겪으셨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사단의 권세(행 26:18)에서 건져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 2:15)

교훈: 예수께서는 죄인의 손에 넘겨지심으로 흑암의 세력에게 내어준 바 되셨다. 그분께서 이러한 경험을 겪으신 것은 우리를 흑암에서 건지시기 위함이었다.

부가적용)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 사람이 십자가를 볼 때에 그는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자신의 죄라는 것을 깨닫는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배은망덕과 반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 왔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가장 좋은 친구를 버리고 가장 귀중한 하늘의 선물을 모독해 온 것을 느끼게 된다. 계속해서, 그것도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 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 심장을 찔러 온 것이다. 그는 어둡고 깊은 죄의 심연(深淵)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자신과 자신의 죄를 보고, 그 죄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독생자 아들을 죄인을 위해 죽게 내어주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더 이상 쏟아 부을 수 없는 귀중한 하늘의 보화와 선물을 내려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다. 십자가에서 비취는 빛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 모든 사랑이 곧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이다.

수요일(12월 3일)
외침: 하나님과 분리되심(마 27:46)

도입)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시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셨다. 그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다. 하나님이 정말 예수님을 버리셨겠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버리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지금 연극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정말 버리지도 않으셨는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는 것은 ‘쇼(show)’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정말 버리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서 고개를 돌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사실을 인정하고 계심을 뜻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우리 무리의 죄악을 짊어지신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거룩하신 분인데 어떻게 죽으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사실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죄를 짊어지신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것이 확실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과 함께 고통당하셨다"(엘렌 G. 화잇, 위를 바라봄, 223).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할 수 있다(엘렌 G. 화잇, 영문 시조, 1894년 3월 26일자). 그 고통은 어떤 고통이었기에 그리스도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부르짖으시게 했는가?

1. 예수님의 그 부르짖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마 27:46)
답: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는 전에 결코 경험한 적이 없으신 죄의 형벌을 경험하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거두어졌기 때문에 두려운 어두움이 그분의 영혼을 휘감은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는 그분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셨기 때문이다. …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의 형벌을 받아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가장 큰 슬픔을 가지고 그분을 바라보셨다. 신성의 능력들이 이렇게 분리된 것은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7권, 924)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을 아들로부터 거두신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자리에서 죽으시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그 아들에게 전해 줄 자가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 죄를 위해 죽으실 때 아버지의 마음에는 원한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죽음을 즐거워하지 않으셨고, 아들과 함께 고통당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당하신 진정한 형벌은 "신성의 능력들이 분리되는 것"이었다. 엘렌 화잇은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신비 속으로 인도하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삼위 하나님이 겪으신 일을 우리에게 묘사해 주고 있다. '분리되다'라는 동사는 '끊어져 갈라지다'라는 의미가 있다. 유지되어야 할 연합이 찢어진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영원한 사망을 맛보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일시적으로 분리되는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셨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무엇인가? 이미 2,000년 전에 우리 무리의 죄악이 예수님께로 넘어갔다는 뜻이다. 몇 사람의 죄만 넘어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죄가 넘어간 것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데, 그 죄와 그 죄로 인한 모든 결과들까지 예수 그리스도께로 넘어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는 말이다. 그 피가 흘려지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죄 사함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고 했다. 성경은 진리이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변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늘 살아 있다. 언제는 피 흘림이 죄 사함을 이루다가 언제는 아니라는 식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죄 사함은 항상 피 흘림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피가 흘려지지 않고는 사함이 없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또,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고 되어 있다.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는가?’ 피가 죄를 씻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몇 개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먼저, 반드시 죄의 값이 치러져야만 죄가 사하여진다. ‘사하여진다’는 말은 ‘씻어진다’는 말과 같다. 다음으로,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 죽음이라는 값이 치러져야 한다. 그 다음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에, 피가 흘려졌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값이 치러졌다는 증거가 된다. 결국 ‘피가 죄를 속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일시적으로 분리되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견디신 고통이었다.

목요일(12월 4일)
다 이루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요 19:28-30)

도입)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모든 필요를 다 채우셨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죽어서 갚아야 할 모든 죄값을 주님께서 다 지불하신 것을 나타낸다. 이제는 주님께서 이루신 이 구원을 우리의 것으로 하는 일만 남았다. 우리가 사막 한 복판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목이 말라서 죽어가고 있다. 물만 마시면 살 수 있는데, 물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물을 한 통 가지고 왔다. 그러면 나는 살 수 있다. 그런데 제가 그 물을 발로 차 버리면서, “이 더러운 물 안 마실 거야.” 하고 거절해 버렸다. 그러면 살 수 없다. 물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물을 거절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실화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한 독일 병사가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왔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영국군인 하나가 달려와서 자기의 피를 수혈해 주라고 했다. 독일 군인이 그 사람을 쳐다보더니, “저 더러운 영국 놈의 피를 안 받겠다.” 하고 거절해 버렸다. 그 사람은 결국 죽었다. 그 사람은 피가 없어서 죽었겠는가? 아니다. 피를 거절했기 때문에 죽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셨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사람이 멸망에 떨어지는 것이다.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용서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1.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겪으신 마지막 경험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요 19:28-30).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분의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까?
답:
비록 원수 사단은 몇몇 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으나, 그분께서는 중요한 순간에 자원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께 드리셨다.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선하심과 사랑을 신뢰하면서 잠드셨음을 시사한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고 하셨다. 이제 적절한 순간이 왔을 때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완전한 속죄의 희생이 단번에 바쳐졌으며, 그 희생을 통해 하늘과 땅이 다시 연결되었음을 뜻한다. 오랜 세월동안 감추어져 있던 구원의 계획이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온 우주에 완전히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희생을 제공하셨으므로, 이제 십자가를 구원의 유일한 방편으로 바라보는 모든 인간에게 속죄가 주어질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구약의 희생제도는 끝났다.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는데(마 27:51, 막 15:38), 이는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길이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희생으로 열렸음을 보여준다.
"다 이루었다"는 외침은 승리의 함성이었다. 그분은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사단을 패배시키셨다(히 2:14). 십자가에서 사단과 그의 부하들의 궁극적 파멸이 확정되었다.
이 승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무덤에서 부활하시던 때에 분명히 드러났으며 인침을 받았다. 영광스러운 일요일 아침에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성취되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8). “나는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 1:18)

교훈: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은 완전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시고 죄인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으며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셨음을 뜻한다.

부가적용)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죄벌 받고 죽으셨다는 것을 상징하여 주는 표시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믿고 있어야 한다. 살인죄로 사형을 기다리는 바라바가 집행일에 감방에서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바라바, 바라바”하는 군중의 함성이 들려왔다. 이 소리를 듣자 바라바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제는 마지막이구나!‘ 갑자기 발소리와 함께 자물쇠 여는 소리가 들리자 그의 심장은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간수가 바라바를 이끌자 바라바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그를 따라 갔다. 그런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간수는 바라바를 사형장으로 데려가지 않고, 석방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영문을 몰라 하며 바라바는 간수에게 물었다. “왜 사형을 집행하지 않소? ” 간수는 무뚝뚝하게 그에게 말했다. “너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사렛 사람 예수란 자가 너를 대신 죽는다” “예수라니?” 그가 누굽니까?“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그가 자기 대신 죽어 준다는 예수가 그저 놀랍고 고마울 뿐이었다. 사형언도를 받은 바라바는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받아 마땅한 죄와 벌을 내 대신 받아 주신 주님을 생각하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53:5)

금요일(12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의 담당자가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주님이 지신 죄의 저주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엄청난 힘으로 내려 누를 때에 그분께서 느끼신 그 슬픔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유한한 인간은 유한한 정도의 시련만을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더 큰 고통을 느끼시었다. 왜냐하면 인성과 신성이 함께 결합해 있었으며, 잃어버린 세상의 죄로 인하여 야기된 고통을 견딜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견디신 고뇌는 죄의 성질과 계속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실 보복의 성질을 더욱 넓고 깊게 깨닫게 해 주었으며, 더욱 확대된 이해를 갖게 해주었다. 죄의 값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는 회개하고 믿는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 유한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겪으신 고난을 다 이해할 수 없음을 위의 인용절은 가르쳐 줍니다. 이 사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이 지불하신 대가가 어떤 것이었음을 말해 줍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경험할 수 없었던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에서 어떤 위안을 얻게 됩니까?

2. 삼위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분리되는 경험을 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속죄의 심오한 의미를 얼마나 깊이 깨닫게 됩니까? 삼위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우리 죄의 형벌을 경험하셨습니까? 안식일 교과토의 시간에 함께 토의해 보십시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죄인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경험을 온전히 맛보셨다.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죄를 위한 형벌을 갚으시고, 우리 죄를 위해 속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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