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여호와의 날(스바냐)(질문, 대답, 부가설명)06/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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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3-05-25 06:33 조회8,495회 댓글0건본문
6월 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7분
기억절: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습 2:11).
연구범위: 습 1:14~18, 욜 2:1~11, 습 2:1~3, 사 11:4, 습 3:1~5, 사 62:5, 나 1~3장.
중심 사상: 심판이 이를지라도 간절히 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있을 것이다.
선지서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한다면 스바냐서는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사이에 있을 것이다.
스바냐는 유대 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를 정죄하였다. 그는 겸손과 성실함으로 그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회개의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중 기별을 전하였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함하여 전세계적인 심판이 임박한다. 그러나 만국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무리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스바냐의 기별은 오늘날 타락한 세상에 소망의 기별을 전하는 자들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는 이번 주 교과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1. 깨닫기 :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백성에게 그분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리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백성이 하나님을 찾고 경배할 것이다.
2. 느끼기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와 함께 노래하며 즐거워하시리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긴다.
3. 행하기 : 하나님의 남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다른 이들을 섬긴다.
A.
2. 성경에서 특히 스바냐서에서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이라고 생각합니까?
※ 심판의 날이다.
3.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기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습 2:1~3)
※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의 역할로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
4.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의 범위에 들 수 있을까요?
※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으로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자들이 될 때 겸손한 자들이 다.
B.
2.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것을 미리 경고하시는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3. 구원받은 자를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무엇을 깨닫습니까?(습 3:17)
※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임을 깨닫는다.
4. 심판을 앞두고 우리를 구원하고픈 하나님의 마음에 어떤 삶으로 반응해야 합니까?
※ 날마다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그 생명의 성질인 사랑이 드러나는 생활로 반응해야 할 것이다.
결론 살아 계신 하나님은 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뿐 아니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반응하여 새 사람이 되고 그분께 경배할 때 기뻐하십니다.
첫째날(일) 암흑의 날
5월 26일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습 1:7).
1. 습 1:14~18을 욜 2:1~11, 암 5:18~20과 비교해 보라. 이 성경절들을 읽을 때,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습1:14~18]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5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욜2:1~1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4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5 그들의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초개를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6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7 그들이 용사같이 달리며 무사같이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되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8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 병기를 충돌하고 나아가나 상치 아니하며 9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더위잡고 오르며 도적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10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암5:18~20]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답: 전쟁의 날과 같아 보이고, 파멸과 공포가 뒤덮는 그런 분위기로 느껴진다.
<부가설명> 선지서에서 여호와의 날은 주로 심판의 날로 비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원(伸寃)의 날이기도 하다. 다니엘서에는 같은 단어 “딘”을 대적에게 적용할 때에는 심판으로 성도에게 적용할 때에는 신원으로 번역하였다.(단7:10, 22) 대적을 심판하여 형벌하는 것은 곧 그 대적에게 시달림을 받는 성도들에게 신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원이라는 말은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위에 기록된 성경구절들은 이스라엘도 심판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베푸는 심판은 그들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 기회로 제공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그들은 대적과 동일한 무리로 여김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형벌이 목적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결국 심판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스스로 빠지는 결과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이나 동일하다.
교훈: 스바냐가 전하는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인류의 역사를 마감하는 날이다. 그러나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는 미래를 여는 날이 될 것이다.
둘째날(월)
5월 27일
세상의 겸손한 자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1. 스바냐는 회개한 백성들을 “세상의 겸손한 자들”이라고 부른다(습 2:3). 다음의 성경절들은 ‘세상의 가난한 자들’로 번역할 수도 있는 이 표현에 대하여 어떤 빛을 비추고 있는가?(마 5:3, 시 76:9, 사 11:4, 암 8:4)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시76:9]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사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답: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수행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부가설명> 습2:3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라고 썼다. 이 말씀에서 겸손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자들이다. 세상이 말하는 겸손과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은 그 상태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온유해보이고 겸손하게 태도를 취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 아니다. 도덕적 겸손일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을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시119:85)라고 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고, 교만은 여호와의 법을 좇지 않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겸손하며 남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한 교양이요 인격의 모습이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아니다. 교만도 사람 사이에 잘난 척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대접 받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생활태도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교만의 정의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 겸손하고 온유한 자로 서야 할 것이다.
교훈: 선지자는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여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밖에 없다고 호소하였다.
셋째날(화) 타락한 도시
5월 28일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습 3:1~2).
1. 습 3:1~5을 읽어 보라. 누가 정죄를 당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 빛과 진리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끝내 타락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습3:1~5]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4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답: 빛과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감사히 받아 자기의 생활철학으로 생활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은 받은 빛과 진리를 가진 사실을 특권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조건 봐준다는 그릇된 사상으로 그 빛과 진리를 더럽혔다.
<부가설명> 몇째 과인지 언젠가 같은 이야기를 쓴 기억이 있는데, 사람은 문화 환경의 압박을 이기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살고 민족 전체가 그렇게 생활하면 그 생활 상태가 정상적인 것이고 당연한 것으로 몸에 밴다. 옛날 한국 남자들은 총각 때는 머리를 땋았고 결혼을 하면 상투를 틀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일제가 한국 남자들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을 때 양반 선비들은 목을 베면 베었지 상투를 자를 수 없다고 버티었다. 그것이 당시 나라와 온 국민의 문화였다. 지금은 아무도 그 문화를 따르지 않는다. 문화가 바뀐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문화화 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문화사조는 정말 힘이 있다. 우리는 재림교회의 진리를 교인들의 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 우리교회도 재림교회가 깨달은 성경진리를 문화사조가 되게 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 역력하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이 진리를 사상문화사조가 되게 해야 하고 생활문화가 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옛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교훈: 스바냐는 예루살렘의 타락을 지적하며 그 책임이 정치적인 지도자와 종교적인 지도자들에게 있다고 경고하였다.
넷째날(수)
5월 29일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1.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받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을 어떻게 묘사했는가?(사 62:5, 65:19)
[사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65: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답: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하였다.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백성을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부가설명> 이 세상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초상집 같이 호곡소리가 들리고 슬픔이 가득한 곳이다. 이런 세상에 생명이신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셔서 십자가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람들을 옮겨놓았다. 초상집에 죽은 사람이 살아 건강하게 일어나 앉아서 음식을 먹고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죽음 앞에서 통곡하던 식구들의 기분이 어떨까? 이것이 정말인가? 생시인가 꿈인가? 아마도 처음에는 환상을 보는 것으로 착각했을는지 모른다. 나인성 과부가 그랬을 것이고, 야이로가 그랬을 것이며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일 뿐 슬픔의 통곡이 기쁨의 눈물로 바뀌고 통곡소리는 환희의 외침으로 바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무리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그것을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묘사했고 습3:17은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묘사하였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일로 즐거워하신다.(시104:31) 구원받은 성도들도 그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아멘.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자체여야 한다.
교훈: 하나님의 진정한 목표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에 있다. 그분은 구원받은 자들이 누리는 행복을 보시며 우리보다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다섯째날(목) 부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5월 30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나 1:3).
1. 나훔 1~3장을 읽어 보라. 어느 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을 알게 되는가? 여기서 배운 사실을 우리는 마지막 시대의 사건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성경은 공부하는 분들이 찾아 각자가 읽기 바랍니다.]
답: “[나1:3,7,15]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이 선하심을 알게 하고 또 그가 심판을 베푸시는 것도 세상에 공의를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당한 성품을 알게 하는 내용이다.
<부가설명> 나훔이 선지자로 봉사한 시기에 관한 암시는 노아몬의 멸망에 대한 언급에서 볼 수 있다(3:8). 그 성읍은 BC 663년에 앗수르 왕 아슈르바니팔에게 멸망되었다. 그러므로 나훔의 봉사 가운데 일부는 적어도 그때 이후에 행해진 것이 분명하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아직 미래의 일로 보고 있다(3:7). 그렇다면 나훔의 적절한 연대는 BC 640년경이다. 앗수르의 종말을 언급하는 이 예언은 분명히 앗수르의 권세와 번영이 정점에 달했을 때 기록되었을 것이므로 나훔서는 성경 예언의 진실성을 뚜렷하게 입증하며,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받았음을 증명한다. 아슈르바니팔 치세 당시에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앗수르 군대에 점령되었거나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에 판도는 바뀌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c. 627?) 후에 앗수르 제국은 곧 붕괴되었다. 석 달 동안 포위공격을 당한 끝에 마침내 니느웨는 BC 612년에 메대와 바벨론에 함락되고 말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선지서가 기원전 663-612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한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분명한 말로 예언했는데, 요나의 경고로 회개한지 한 100년쯤 후의 일이다. 요나와 나훔을 대조하여 보면 하나님은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니느웨가 결국 하나님의 이 사랑을 저버리므로 스스로 바벨론에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그분의 말씀을 유의하고 따른 성도들을 구원받았다. 이것을 역사의 종말에 있을 심판과 그분의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예표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1:7)
교훈: 하나님의 공의는 더딘 것 같지만 반드시 실현된다. 그분은 죄악을 심판하며 자기를 의뢰하는 자를 구원하실 것이다.
여섯째날(금)
5월 3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정확하게 열국과 계산하신다. 회개하도록 부르시며 당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동안 이 계정은 열려 있으나 그 숫자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액수에 달할 때 당신의 분노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때는 계산은 끝나고 하나님의 참으심도 그친다. 자비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하여 호소하지 아니한다”(선지자와 왕, 364).
“타락하지 않은 세상과 하늘 우주 앞에서 세상은 온 땅의 심판자, 그들이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분께 회계해야 한다. 어떠한 심판의 날이 되겠는가! 그날은 하나님의 복수의 큰 날이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으신다. 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그분을 모욕하고, 채찍질하고,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은 어린양의 진노를 느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행위들의 그 진정한 성격이 그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13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스바냐 시대의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동료 백성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던 반면 어떤 이들은 그런 죄를 보고도 안주하였습니다. 그대는 하나님이 어떤 죄를 더 무겁게 여기신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 악을 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악을 방관하면 그것이 더 나쁘다. 그러나 죄의 경중을 떠나서 모든 죄는 하나님이 무겁게 보신다. 그러나 책임이 중한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을 추궁할 것이다.
2. “사람이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보다 더욱 속절없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다.”는 증언의 말을 곱씹어 보십시오.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 말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됩니까? 왜 이 진리가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핵심입니까? 우리가 그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누구의 공로를 의지하게 될까요?
※ 예수 외에는 사망이 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분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 생명이신 분이 생명을 불어넣어주실 때 살아나게 된다. 이것이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세상의 도덕적 안목이나 권력으로 보면 나약하기 짝이 없어서 의지하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생명은 예수께만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의지하는 것을 가장 강력한 줄 아는 사람이다.
3. 부하고 평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왜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잊기 쉬울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착각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
※ 자기가 재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게 하신 하나님을 뒷전에 두게 되는 것 같다.
4.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노래하며 기뻐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현재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 수요일 부가설명을 다시 읽어보라. 초상집에서 죽은 사람을 살려놓았을 때의 기쁨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일몰:오후 7시 47분
기억절: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습 2:11).
연구범위: 습 1:14~18, 욜 2:1~11, 습 2:1~3, 사 11:4, 습 3:1~5, 사 62:5, 나 1~3장.
중심 사상: 심판이 이를지라도 간절히 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있을 것이다.
선지서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한다면 스바냐서는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사이에 있을 것이다.
스바냐는 유대 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를 정죄하였다. 그는 겸손과 성실함으로 그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회개의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중 기별을 전하였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함하여 전세계적인 심판이 임박한다. 그러나 만국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무리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스바냐의 기별은 오늘날 타락한 세상에 소망의 기별을 전하는 자들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는 이번 주 교과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1. 깨닫기 :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백성에게 그분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리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백성이 하나님을 찾고 경배할 것이다.
2. 느끼기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와 함께 노래하며 즐거워하시리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긴다.
3. 행하기 : 하나님의 남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다른 이들을 섬긴다.
A.
2. 성경에서 특히 스바냐서에서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이라고 생각합니까?
※ 심판의 날이다.
3.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기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습 2:1~3)
※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의 역할로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
4.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의 범위에 들 수 있을까요?
※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으로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자들이 될 때 겸손한 자들이 다.
B.
2.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것을 미리 경고하시는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3. 구원받은 자를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무엇을 깨닫습니까?(습 3:17)
※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임을 깨닫는다.
4. 심판을 앞두고 우리를 구원하고픈 하나님의 마음에 어떤 삶으로 반응해야 합니까?
※ 날마다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그 생명의 성질인 사랑이 드러나는 생활로 반응해야 할 것이다.
결론 살아 계신 하나님은 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뿐 아니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반응하여 새 사람이 되고 그분께 경배할 때 기뻐하십니다.
첫째날(일) 암흑의 날
5월 26일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습 1:7).
1. 습 1:14~18을 욜 2:1~11, 암 5:18~20과 비교해 보라. 이 성경절들을 읽을 때,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습1:14~18]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5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욜2:1~1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4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5 그들의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초개를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6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7 그들이 용사같이 달리며 무사같이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되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8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 병기를 충돌하고 나아가나 상치 아니하며 9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더위잡고 오르며 도적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10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암5:18~20]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답: 전쟁의 날과 같아 보이고, 파멸과 공포가 뒤덮는 그런 분위기로 느껴진다.
<부가설명> 선지서에서 여호와의 날은 주로 심판의 날로 비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원(伸寃)의 날이기도 하다. 다니엘서에는 같은 단어 “딘”을 대적에게 적용할 때에는 심판으로 성도에게 적용할 때에는 신원으로 번역하였다.(단7:10, 22) 대적을 심판하여 형벌하는 것은 곧 그 대적에게 시달림을 받는 성도들에게 신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원이라는 말은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위에 기록된 성경구절들은 이스라엘도 심판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베푸는 심판은 그들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 기회로 제공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그들은 대적과 동일한 무리로 여김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형벌이 목적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결국 심판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스스로 빠지는 결과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이나 동일하다.
교훈: 스바냐가 전하는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인류의 역사를 마감하는 날이다. 그러나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는 미래를 여는 날이 될 것이다.
둘째날(월)
5월 27일
세상의 겸손한 자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1. 스바냐는 회개한 백성들을 “세상의 겸손한 자들”이라고 부른다(습 2:3). 다음의 성경절들은 ‘세상의 가난한 자들’로 번역할 수도 있는 이 표현에 대하여 어떤 빛을 비추고 있는가?(마 5:3, 시 76:9, 사 11:4, 암 8:4)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시76:9]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사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답: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수행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부가설명> 습2:3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라고 썼다. 이 말씀에서 겸손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자들이다. 세상이 말하는 겸손과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은 그 상태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온유해보이고 겸손하게 태도를 취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 아니다. 도덕적 겸손일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을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시119:85)라고 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고, 교만은 여호와의 법을 좇지 않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겸손하며 남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한 교양이요 인격의 모습이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아니다. 교만도 사람 사이에 잘난 척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대접 받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생활태도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교만의 정의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 겸손하고 온유한 자로 서야 할 것이다.
교훈: 선지자는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여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밖에 없다고 호소하였다.
셋째날(화) 타락한 도시
5월 28일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습 3:1~2).
1. 습 3:1~5을 읽어 보라. 누가 정죄를 당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 빛과 진리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끝내 타락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습3:1~5]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4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답: 빛과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감사히 받아 자기의 생활철학으로 생활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은 받은 빛과 진리를 가진 사실을 특권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조건 봐준다는 그릇된 사상으로 그 빛과 진리를 더럽혔다.
<부가설명> 몇째 과인지 언젠가 같은 이야기를 쓴 기억이 있는데, 사람은 문화 환경의 압박을 이기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살고 민족 전체가 그렇게 생활하면 그 생활 상태가 정상적인 것이고 당연한 것으로 몸에 밴다. 옛날 한국 남자들은 총각 때는 머리를 땋았고 결혼을 하면 상투를 틀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일제가 한국 남자들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을 때 양반 선비들은 목을 베면 베었지 상투를 자를 수 없다고 버티었다. 그것이 당시 나라와 온 국민의 문화였다. 지금은 아무도 그 문화를 따르지 않는다. 문화가 바뀐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문화화 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문화사조는 정말 힘이 있다. 우리는 재림교회의 진리를 교인들의 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 우리교회도 재림교회가 깨달은 성경진리를 문화사조가 되게 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 역력하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이 진리를 사상문화사조가 되게 해야 하고 생활문화가 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옛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교훈: 스바냐는 예루살렘의 타락을 지적하며 그 책임이 정치적인 지도자와 종교적인 지도자들에게 있다고 경고하였다.
넷째날(수)
5월 29일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1.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받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을 어떻게 묘사했는가?(사 62:5, 65:19)
[사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65: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답: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하였다.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백성을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부가설명> 이 세상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초상집 같이 호곡소리가 들리고 슬픔이 가득한 곳이다. 이런 세상에 생명이신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셔서 십자가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람들을 옮겨놓았다. 초상집에 죽은 사람이 살아 건강하게 일어나 앉아서 음식을 먹고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죽음 앞에서 통곡하던 식구들의 기분이 어떨까? 이것이 정말인가? 생시인가 꿈인가? 아마도 처음에는 환상을 보는 것으로 착각했을는지 모른다. 나인성 과부가 그랬을 것이고, 야이로가 그랬을 것이며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일 뿐 슬픔의 통곡이 기쁨의 눈물로 바뀌고 통곡소리는 환희의 외침으로 바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무리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그것을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묘사했고 습3:17은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묘사하였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일로 즐거워하신다.(시104:31) 구원받은 성도들도 그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아멘.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자체여야 한다.
교훈: 하나님의 진정한 목표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에 있다. 그분은 구원받은 자들이 누리는 행복을 보시며 우리보다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다섯째날(목) 부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5월 30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나 1:3).
1. 나훔 1~3장을 읽어 보라. 어느 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을 알게 되는가? 여기서 배운 사실을 우리는 마지막 시대의 사건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성경은 공부하는 분들이 찾아 각자가 읽기 바랍니다.]
답: “[나1:3,7,15]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이 선하심을 알게 하고 또 그가 심판을 베푸시는 것도 세상에 공의를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당한 성품을 알게 하는 내용이다.
<부가설명> 나훔이 선지자로 봉사한 시기에 관한 암시는 노아몬의 멸망에 대한 언급에서 볼 수 있다(3:8). 그 성읍은 BC 663년에 앗수르 왕 아슈르바니팔에게 멸망되었다. 그러므로 나훔의 봉사 가운데 일부는 적어도 그때 이후에 행해진 것이 분명하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아직 미래의 일로 보고 있다(3:7). 그렇다면 나훔의 적절한 연대는 BC 640년경이다. 앗수르의 종말을 언급하는 이 예언은 분명히 앗수르의 권세와 번영이 정점에 달했을 때 기록되었을 것이므로 나훔서는 성경 예언의 진실성을 뚜렷하게 입증하며,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받았음을 증명한다. 아슈르바니팔 치세 당시에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앗수르 군대에 점령되었거나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에 판도는 바뀌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c. 627?) 후에 앗수르 제국은 곧 붕괴되었다. 석 달 동안 포위공격을 당한 끝에 마침내 니느웨는 BC 612년에 메대와 바벨론에 함락되고 말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선지서가 기원전 663-612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한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분명한 말로 예언했는데, 요나의 경고로 회개한지 한 100년쯤 후의 일이다. 요나와 나훔을 대조하여 보면 하나님은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니느웨가 결국 하나님의 이 사랑을 저버리므로 스스로 바벨론에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그분의 말씀을 유의하고 따른 성도들을 구원받았다. 이것을 역사의 종말에 있을 심판과 그분의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예표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1:7)
교훈: 하나님의 공의는 더딘 것 같지만 반드시 실현된다. 그분은 죄악을 심판하며 자기를 의뢰하는 자를 구원하실 것이다.
여섯째날(금)
5월 3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정확하게 열국과 계산하신다. 회개하도록 부르시며 당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동안 이 계정은 열려 있으나 그 숫자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액수에 달할 때 당신의 분노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때는 계산은 끝나고 하나님의 참으심도 그친다. 자비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하여 호소하지 아니한다”(선지자와 왕, 364).
“타락하지 않은 세상과 하늘 우주 앞에서 세상은 온 땅의 심판자, 그들이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분께 회계해야 한다. 어떠한 심판의 날이 되겠는가! 그날은 하나님의 복수의 큰 날이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으신다. 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그분을 모욕하고, 채찍질하고,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은 어린양의 진노를 느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행위들의 그 진정한 성격이 그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13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스바냐 시대의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동료 백성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던 반면 어떤 이들은 그런 죄를 보고도 안주하였습니다. 그대는 하나님이 어떤 죄를 더 무겁게 여기신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 악을 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악을 방관하면 그것이 더 나쁘다. 그러나 죄의 경중을 떠나서 모든 죄는 하나님이 무겁게 보신다. 그러나 책임이 중한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을 추궁할 것이다.
2. “사람이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보다 더욱 속절없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다.”는 증언의 말을 곱씹어 보십시오.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 말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됩니까? 왜 이 진리가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핵심입니까? 우리가 그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누구의 공로를 의지하게 될까요?
※ 예수 외에는 사망이 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분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 생명이신 분이 생명을 불어넣어주실 때 살아나게 된다. 이것이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세상의 도덕적 안목이나 권력으로 보면 나약하기 짝이 없어서 의지하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생명은 예수께만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의지하는 것을 가장 강력한 줄 아는 사람이다.
3. 부하고 평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왜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잊기 쉬울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착각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
※ 자기가 재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게 하신 하나님을 뒷전에 두게 되는 것 같다.
4.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노래하며 기뻐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현재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 수요일 부가설명을 다시 읽어보라. 초상집에서 죽은 사람을 살려놓았을 때의 기쁨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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