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과 영감 받은 선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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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01-22 09:16 조회5,72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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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5과 영감 받은 선지자들
1월 31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5분)
도입)
예언자란 미래사를 예언하다기보다 ‘앞에 서서 대신 말하는 사람’이었다. 미래나 내일을 위해 예언하기보다 오늘을 위한 대변자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로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세움을 입은 자들로서 특히 이스라엘의 불신, 배교의 시기에 이스라엘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소리였다. 신약 성경에서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종종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가리켜 "교회의 터"라고 불렀으며(엡 2;20), 순서상으로 선지자를 사도들 다음의 위치에 놓고 있다(엡 4:11, 고전 12장). 선지자들은 예언할 때에 주관적인 생각을 개입하거나, 받은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전해야 했다. 각 시대를 위해 영적인 개선과 부흥을 위해 주신 선지자들의 말씀, 하나님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기억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연구범위: 렘 36:1-4, 살전 2:13, 딤후 3:16, 딛 1:12, 벧후 1:1-4, 20-21.
학습 포인트: 영감과 계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언어(言語)영감과 사상(思想)영감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선지자들은 글을 쓸 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선지자들이 성경 밖의 자료를 인용한 경우가 있는가?
안식일 오후
성경이 영감 받은 책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있어 왔다. 더군다나 제 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또 다른 질문에 답해야 하는데, 그것은 엘렌 G. 화잇의 글이 영감 받은 글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1906년에 그녀가 쓴 모든 단어가 십계명처럼 영감 받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하는 내용의 편지를 어느 재림교인 의사에게 보낸 적이 있다. “나의 형제여, 그대는 내가 쓴 글들을 열심히 연구하였으므로 내 글 가운데서 내 자신이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을 결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과거에 우리 사업을 이끌어 나간 선구자들도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4)
이번 주에 우리는 영감의 문제와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할 것이다.
일요일(1월 25일)
계시와 영감(딤후 3:16)
도입)
인간의 삶에 수반된 절망과 비극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은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 자들의 존재를 불러왔다. 그래서 인간 역사 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등장한 신접한 자. 귀신, 점쟁이 또는 거짓 예언자들이 수 없이 등장하여 많은 인간을 오도하여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자기의 뜻과 사상을 전하고자 참 예언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예언적 은사를 주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으나 그 중에서도 이 예언적 은사는 중추적인 것이 된다. 이 예언적 은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장 전형적인 교통수단이 되어왔다. 이를 두고 아모스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암 3:7) 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이상과 꿈으로 말씀하셨다 (민 12:6).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구주의 오심을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눅 1:70).
1. 디모데후서 3:16과 베드로후서 1:20-21은, 성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다고 말합니까?
답:
디모데후서 3:16에서 바울은 성경이 테오프뉴스토스(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라고 말한다. 라틴어 성경은 이 구절을 “스크립투라 디비니투스 인스피라타(scriptura divinitus inspirata)”로 번역했는데, 인스피라타에서 영감(inspiration)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바울은 성경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한다. 성령께서는 이상과 꿈을 통해 선지자들에게 진리를 보여주시고(계시), 그런 다음에 선지자가 그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내용과 조화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영감).
베드로후서 1:21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배가 바람에 이끌리듯이 성경의 기자(記者)들도 성령에 이끌림을 받았다. 따라서 계시와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알리기를 원하시는 것을 잘 드러내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다. 어떤 이들은 말로써, 또 어떤 이들은 글로써 그 기별을 전하였는데, 이 중 글로 기록된 것이 성경이다.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의 선지자들만큼 자주 영감 받은 사실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기별 또한 하나님의 권위로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예를 들어 바울은,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고 하였으며,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살전 2:13)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인간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성경 기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기록하기도 하고(느 1:1-11, 단 10:1-9, 갈 1:12-20), 그 당시의 풍습과 전통을 기록하기도 했다. 몇몇 시편과 잠언은 주변 나라들의 문학과 문화를 반영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비록 영감의 책이지만 또한 기록한 사람의 개성이 반영되기도 했다.
교훈: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보여주시고 그것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 않도록 성령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셨다.
부가적용)
성서에 기술된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감동(숨, 호흡)으로 된 것으로써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말한 것을 기록한 책 중의 책이다(딤후3:16, 벧후1:16-21, 계1:10-20).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시므로 성령의 감동 곧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인데 다른 모든 경전들과 다른 것은 성서만이 하나님의 우주경영에 관한 모든 계획(설계도)과 그 계획을 이루시는 과정과 결과를 소상히 계시 하여 준다. 창조 된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의 우주만물과 만상들의 생성과 소멸을 알게 하며 어느 때 어느 시기에는 어떤 일을 어떻게 경영하실 지를 깨닫게 하므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원을 얻는 지혜를 주는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생각이나 과학에 지배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생각과 하늘에 속한 영적인 차원의 말씀으로써 나타난 모든 만물들과 만상들과 만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들을 운행하는 이치를 깨닫는 지혜와 총명의 신이 임한 자 곧 영감을 받은 자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며 그 안에만 무궁한 생명의 능력이 있다.
월요일(1월 26일)
언어(言語)영감과 사상(思想)영감(고전 7:10-12, 39-40)
도입)
우리는 성경에 대해 더 완벽한 신뢰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묘사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쓰여져 있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의 어려운 구절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하는 말을 우리에게 하지 않으신 것은 흥미롭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요나와 물고기의 이야기, 노아와 방주, 아담과 이브를 지으심 등의 말씀을 픽션이 아닌 실제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셨다. 만약 이러한 이야기들이 글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해서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성경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 있게 인용하였다. 이 모든 것은 성경의 영감성이 확실하며 그 모든 성경의 내용은 사실이며 진리임을 드러낸 것들이다.
1. 다음 구절들은 성경의 영감에 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사 2:1-2, 겔 36:16, 고전 7:10-12, 39-40, 살전 2:13)
답:
영감에 관한 두 가지 주요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언어영감설: 언어영감설은 기록한 사람보다는 성경의 단어들에 초점을 둔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기록하는 사람의 교육적 배경이나 어휘 능력에 따라 모든 단어를 선택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감은 오직 원본 성경에만 해당하고, 사본에는 해당하지 않으므로 사본에는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성경의 모든 단어가 기자의 어휘력이나 교육적 배경과 관계없이 성령에 의해 지시되었다는 축자(逐字)영감설과는 구별된다.
2. 사상영감설: 여기서는 단어가 아닌 기록한 사람에 초점이 있다. 단어보다는 기록한 사람이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다(고전 7:10-12, 39-40, 살전 2:13). 때때로 하나님이나 천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거나(렘 29:30-31, 계 19:9),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직접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경우도 있지만(민 22:35, 23:1-12, 26), 근본적으로 성경 기자가 이상이나 꿈, 혹은 사상을 받아 자신의 말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사 2:1-2, 계 4:1).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진리가 바르게 전달되도록 그 기록되는 과정에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재림교회는 성경과 엘렌 화잇의 글에 대해 사상영감설을 믿는다.
“성경의 단어 자체가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감동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었다. 영감은 인간의 언어나 표현 방법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신에게 작용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화가 그 사람의 사상에 깃드는 것이다. 거룩한 영감으로 물들여진 사상에 의해 언어는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의 정신과 의지가 인간의 정신과 의지에 혼합됨으로 인간의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
이 같은 맥락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라고 했다. 거룩한 영감이 사상에 임하였고, 또한 기록되는 과정에도 역사했음을 말한다.
교훈: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은 방법에 관한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재림교회는 거룩한 영감이 단어가 아닌 사상에 임하였다는 사상영감설을 받아들인다.
부가적용)
우리 교회는 성경의 모든 자구나 단어까지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축자적인 영감설을 배제한다. 오늘 저자의 표현에 언어영감에 대해 말한 것을 볼 때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언어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 저자의 사상을 감동시켜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면 분명히 사상영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개인적 생각은 성경저자의 언어와 사상에 함께 영향을 미쳤다고 여기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는 전적으로 사상영감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한 구절이라도 변개되어서는 안될 마치 축자영감을 받은 기록처럼 모든 성경의 구절구절이 존중되어야 할 말씀처럼 또한 성경을 하나님의 완전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그 분은 말씀하신다. '일점'이란 것은 히브리 알파벳에서 가장 작은 것이고 일획이란 것은 히브리 문자에서 작은 전환 혹은 획이다. 일점, 일획의 중요함을 그리 강조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아 필자 개인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언어와 사상에 함께 하나님께서 함께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보고 싶다. 성경적인 용어나 단어를 선택할 때 성경 저자가 기록한 것은 그 개인이 가지고 지적인 바탕 위에서 자신이 쓰고 싶었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상과 생각을 기록한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영감과 사상영감 이 두 가르침 모두가 다 성경을 기록하는데 있을법한 타당성이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이 두 사상을 모두 다 완전히 배제하기에는 이 두 사상의 흔적이 모두 성경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화요일(1월 27일)
이상을 받을 때의 신체적 현상(단 10:7-9, 17-18)
도입)
체험으로부터의 논증은 체험자의 주관적 증언에만 토대를 두고 있는 주관성을 탈피하지 못한다는 한계성이 있다.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수반되는 신체적 현상에 대한 자신의 주장뿐만 아니라 목격자의 증언 내지 검증이 필요하다. 이 예언적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초자연적 신체적 현상이 수반되는 것을 체험하거나 또는 목격자의 증언으로부터의 논증이다. 다니엘이 이상을 볼 때에 몸에 힘이 빠지고 호흡이 없어진 것(단 10:8, 17)은 이 같은 초자연적 신체적 현상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당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감추어진 진리의 초자연적 선포(宣布, manifestation)이다. 이 발현이 온 교회의 선(善)을 위해 행해 졌을 때, 이것을 두고 공적 계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발현이 개인적인 영적 이득을 위해 이루어졌을 때, 이것을 사적계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의 대상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에게 믿음과 품성(品性)에 반대되는 모든 계시는,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가차 없이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 1:8) 그러니까 계시의 발전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부터 신약성서의 마지막 편집시기까지 이루어졌다. 그 이후 교리의 발전은 이미 주어진 공적인 계시에 대한 설명이고 해석인 셈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계시는 사적인 계시에 해당되기 때문에 화잇 부인의 글도 성경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한다. 그들이 말한 계시는 그 심층에서는 참될 수 있지만, 부차적(副次的)인 오류와 섞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기적을 증가시키지 않으신다. 그리고 계시를 받은 사람의 정신 속에 있을 수 있는 오류 또는 편견을 고쳐 주지 않으신다. 계시의 목표는 영혼에게 영적인 유익함이지, 결코 지적인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는 사적계시에 대한 영혼의 고백을 듣게 될 때, 절대로 감탄을 드러내 보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지도자가 영혼의 계시를 감탄한다면 그것을 본 영혼은 즉시 사적 계시를 참된 것으로 여기게 되고, 자만하게 될 것이다. 만일 계시가 어떤 공동체의 설립이나 창설에 관계된다면, 영적 지도자는 초자연적 현명의 빛에 따라 그 이유를 상세하게 검증하기 전에는 그를 격려해 주어서는 안된다.
1. 하늘의 이상이 선지자들에게 임할 때에 어떤 신체적인 현상들이 나타났습니까?(단 10:7-10, 17-18, 행 9:1-5, 계 1:17)
답:
하늘의 존재 앞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일 수 있다. 다니엘, 사울(바울), 요한 등은 하늘의 이상을 받았을 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니엘은 기록하기를, “내 몸에 힘이 빠졌고” “죽은 자처럼 그의 발아래 쓰러졌다”고 하였다.
엘렌 화잇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계시를 받을 때와 받고 나서의 상태에 관하여 시시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계시를 주실 때면, 나 자신은 예수님과 천사들이 있는 곳에 이끌려가게 되었으며, 세속적인 사물에 대하여는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나는 천사가 나에게 가리켜 주는 것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였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
1868년에 그녀의 남편인 제임스 화잇(James White)은 그녀의 이상 중에 나타난 신체적 현상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1. 그녀는 주변 사물에 대해 완전히 무의식상태였고, 2. 숨을 쉬지 않았는데, 이는 가슴에 손을 대 보거나 입과 코를 막음으로 거듭 확인되었다. 3. 이상에 들어가는 즉시 근육은 딱딱해졌고, 관절은 고정되었으며, 어떤 외부의 힘으로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4. 이상에서 돌아왔을 때는 대낮이든 조명이 밝은 밤이든 모든 사물을 완전히 어둡게 느꼈다. 가장 밝은 사물이라도 식별할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생애의 사건들, 스트림 출판사, 1868년, 272)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이상을 보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는데, 조셉 베이츠(Joseph Bates)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가 이상을 보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만, 특히 메인 주 톱샴(Topsham)에서 그 흥미진진한 광경을 지켜보았을 때 혹시라도 최면술이나 속임수가 있을까 하여 내가 얼마나 주의 깊이 주시했는지 곁에 있던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광경들을 목격할 수 있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그리스도인 경험과 엘렌 G. 화잇의 가르침, 89)
교훈: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상을 볼 때에 나타났던 신체적인 현상이 엘렌 화잇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여러 사람들이 그 목격한 바를 증언하였다.
부가적용)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수많은 사적 계시들을 어떻게 맏아들여야 하는가? 기적 같은 신기한 사건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즉 그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상한 현상에 너무 집착하고 휩쓸려 다니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교회가 확실히 기적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은 사적 계시에 현혹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적 계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기 전에는 관망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자세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른바 '사적' 계시들이 있었고, 그 중의 어떤 것들은 교회의 권위에 의해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신앙의 유산에 속하는 것들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결정적 계시를 '개선'하고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한 시대에 계시에 따른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데 불과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E.G 화잇의 기록은 교회가 여러 실험들을 통해 그리고 그의 기록과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증거가 충분하므로 그의 받은바 계시를 사적인 계시로만 말할 수 없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수요일(1월 28일)
영감과 편집 보조자들(렘 36:1-4)
도입)
전신마비가 된 프랑스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장 도미니크라는 사람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잇는 왼쪽 눈꺼풀을 깜박거려 의사 표시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1995년 말 쓰러져 15개월 간의 투병 생활 중에 대필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 내용은 병상에서 떠오른 가정과 직장생활에 관한 에세이 "잠수복과 나비"였다. 잠수복은 "꼼짝할 수 없는 육체", 나비는 "밖으로 나들이를 떠나고 싶은 정신"을 의미한다. 책에는 "내 아들 테오필 녀석은 50cm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데, 나는 그 녀석의 숱 많은 머리를 한번 쓸어줄 수도, 목덜미를 만져볼 수도 없고… 그러나 걱정마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같은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을 쓴 방법은 간단했지만 엄청난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알파벳 표를 보고 원하는 글자에서 눈을 깜박이면 대필자가 이를 받아 적었다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하루에 쓸 수 있는 양은 불과 반 페이지 정도였다. 자그마한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1년 3개월 동안 20만 번 이상 눈꺼풀을 깜박거렸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절망보다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인간 의지가 빛나는 책이다. 그런데 대필자의 봉사와 헌신이 없었다면 이 소중한 책을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이 장 도미니크의 대신해 이 글을 썼다고 해도 “잠수복과 나비”는 장 도미니크의 글이었듯이 예언의 신은 비록 E.G. 화잇의 글을 누군가 편집하고 도와주는 일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녀가 최종적으로 인정한 글이기에 그녀에 의해 기록된 그녀의 작품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어 기록한 그녀의 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기별이라고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필촉(筆觸)이 아니라, 필자(筆者)들이었다. 그들은 이상이나 꿈에서 본 것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하였다. 우리는 성경의 선지자들이 서기(書記)를 두었던 사례들을 알고 있는데, 이 서기들이 하나님의 기별을 기록했다.
1. 다음 구절들은 대필자 혹은 보조자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렘 36:1-4, 롬 16:22, 고전 16:21, 골 4:15-18, 살후 3:17)
답:
성경 기자들 중에는 편집 보조자나 서기를 통해 하나님의 기별을 기록하게 한 이들도 있다. 신약 시대에 서기들은 필자가 말하려는 내용을 밀랍(蜜蠟)판에 요약한 다음 그것을 편지에 옮겨 적었다. 편지를 보내기 전에 필자는 내용이 바르게 적혔는지 검토하였다.
엘렌 화잇도 편집 도우미를 활용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녀는 9살의 나이에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에 저자로서의 한계를 인식하였다. “나는 문법 학자가 아니지만 시도해 볼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면 마흔다섯의 나이에도 그 분야의 학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리라”(가려 뽑은 기별, 3권, 90). 그래서 편집 도우미가 원고를 정리하는 일을 도왔던 것이다.
2. 그녀는 문학적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를 강력히 느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충실한 조력자들이 나를 도와주었으며 저들은 증언들을 베껴 쓰는 일과 출판에 넘길 원고들을 준비하는 일에 불굴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가려 뽑은 기별, 1권, 50)
3. 그녀의 책은 대부분 처음부터 책으로 쓰이지 않았고, 이미 쓴 글들을 한 데 모아 책으로 엮었기 때문에 그 작업을 특별히 도울 사람들이 필요했다. 메리언 데이비스(Marian Davis)는 엘렌 화잇의 편집 도우미였다. “그녀는 인쇄물들에 출판된 내 기사들을 취하여 백지로 된 책에 풀로 붙인다. 또한 내가 기록한 모든 편지 사본도 가지고 있다. 책의 한 장(章)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그녀는 내가 기록한 특별한 내용을 기억하여 그 문제를 더욱 보강해 준다. 그럼에도 그 책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3권, 91)
교훈: 성경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엘렌 화잇도 편집 보조자들을 두었다. 그들이 책의 제작 과정에 도움을 주었으나 그 책은 여전히 저자의 것이다.
부가적용)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손에 의하여 기록된 책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의 저자가 인간이라는 말은 아니다. 비록 인간의 손을 빌어 기록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을 감동시키셔서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하셨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을 위해 대필해 줄 경우,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 글을 대필해 준 사람의 글로 여기지 않고 대필을 부탁한 사람의 글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증거해 주는 것처럼(딤후 3:16) 대필에 의존하였고 편집 보조자를 두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엘렌 G. 화잇의 글이기 때문이다..
목요일(1월 29일)
영감과 누가의 책(눅 1:1-4)
도입)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누가복음은 철저하게 누가의 의지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누가는 스스로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히 살폈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 어디에도 성령의 지시나 감동으로 기록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는 목격자들에게서 실제적인 증언을 수집했고, 성령의 감동으로 어느 복음서보다도 적나라하게 예수의 행적을 기록했다. 누가는 예수의 비유를 독특한 것으로 많이 기록했으며, 예수의 인성에 대한 전반적인 강조를 그림처럼 전개하였다. 그리고 비유를 통해서 소개되는 인물들의 인간적인 개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었으며,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방인을 위한 인자, 인애, 아름다운 찬송시로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사도행전의 저자) 의사(醫師)인 누가다. 의사였던 누가는 이방인(시리아 인)이면서 헬라 문화권에서 교육받은 훌륭한 의사였다. 그는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울과 행동을 같이하면서 건강과 여려 일들을 도운 귀한 사역자로서, 바울의 다른 제자들이 다 떠나도 끝까지 바울을 도왔다.(딤후4:11) 그리고 본서의 기록연대는 주후 60년으로 본다.
1. 누가는 그의 복음서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영감에 관한 어떤 사실을 알게 됩니까?(눅 1:1-4)
답: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꿈이나 이상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묘사한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지만, 성령의 영감과 지도하심을 따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을 기초로 하여 작업을 하였다.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두로 정보를 얻었을 뿐 아니라(고전 1:10-11), 어떤 곳에서는 이교 저자들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7:28에서 그는, “우리는 모두 어떤 면에서 제우스의 은덕을 입었도다.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노래한 실리시아의 시인 아라투스(Aratus, BC 315-240)의 글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린도전서 15:33과 디도서 1:12에서 그는 영감 받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다른 자료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엘렌 화잇도 때때로 다른 책들을 자료로 사용하였는데, 각 시대의 대쟁투(The Great Controversy) 서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 있어서 종교 개혁의 발전에 따라 생긴 큰 사건들은 오늘날 개신교계에서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그것들은 누구든지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나는 그러한 역사를 본서에 해당되는 범위 안에서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곧 사실의 기술을 이해하기에 적당하리만큼, 또한 필요한 만큼만 간결하게 취급하였다. 어떤 역사가가 주제의 총괄적 견해를 간단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사건들을 분류했거나 편의상 세부(細部)들을 요약했을 경우에는 그 역사가의 말들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인용한 것은 그 저자를 권위자로 소개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다만 그가 주장하는 바가 주제를 설명하는 일을 쉽게 해주고 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그 역사가의 말에 아무런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 시대에 종교 개혁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과 견해를 기술함에 있어서도 그들이 출판한 저서에 대하여 그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였다.”(각 시대의 대쟁투, xi-xii)
교훈: 성경의 기자들이 때때로 영감 받지 않은 저자의 글을 인용하여 진리를 설명한 경우가 있다. 엘렌 화잇 또한 다른 저자들의 글을 인용하였다.
부가적용)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라는 고위관리가 전해들은 복음의 내용을 확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용도로 쓰여 지도록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는 전혀 주저함 없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특별한 계시로 쓰여 졌다는 증거는 없다. 우리는 흔히 정경의 기록을 매우 신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야만 정경성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누가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정경이 철저하게 인간적인 관심과 필요를 위하여 기록되었음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이 정경의 자리에 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기록의 필요를 스스로 느낀 그 사람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 전달하고 계시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성을 순식간에, 신비스러운 과정으로, 인간 저자의 개인적 능력이나 자질을 배제하거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이해를 성경자체는 사실상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계시는 그 심층에서는 참될 수 있지만, 부차적(副次的)인 오류와 섞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기적을 증가시키지 않으신다. 그리고 계시를 받은 사람의 정신 속에 있을 수 있는 오류 또는 편견을 고쳐 주지 않으신다. 계시의 목표는 영혼에게 주는 영적인 유익함이지, 결코 지적인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는 사적계시에 대한 영혼의 고백을 듣게 될 때, 절대로 감탄을 드러내 보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지도자가 영혼의 계시를 감탄한다면 그것을 본 영혼은 즉시 사적 계시를 참된 것으로 여기게 되고, 자만하게 될 것이다. 만일 계시가 어떤 공동체의 설립이나 창설에 관계된다면, 영적 지도자는 초자연적 현명의 빛에 따라 그 이유를 상세하게 검증하기 전에는 그를 격려해 주어서는 안된다. 누가복음은 한 개인이 모은 자료임에도 정경을 인정한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글이었기에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인정된 정경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글을 가져오거나 들은 사실을 기록하고 다른 사람의 글을 차용하여 기록하였다고 해서 그의 영감성을 모두 의심할 필요는 없다. 영감성은 직접적인 계시에 의하지 않고서도 기록된 누가복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G 화잇의 글도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유익에 비해 그녀의 글은 때때로 철자가 틀리기도 하였고 그의 표현이 선지자의 글이라고 하기에 때때로 교정이 필요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은 교회의 영적인 발전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고 있고 또한 그가 받은 직접적인 계시들도 많은 사람들의 시험을 통과하여 인정된 기별이기 때문이다.
금요일(1월 3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엘렌 G. 화잇, 가려 뽑은 기별, 1권, 제1장 ‘예언서 저자들의 영감’(15-23)
“지금 내가 경고와 견책에 대한 증언을 그대들에게 보낼 때에 그대들 중 다수는 그 증언이 단순히 화잇 자매의 의견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처럼 그대들은 하나님의 영을 모욕하였다. 그대들은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예언의 신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는지 알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나에게 계시로 보여졌다. 나는 과거에 전혀 본 적이 없는 얼굴들을 보았으며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 얼굴들을 보았을 때 나는 저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단잠에서 깨어나 과거에 나에게 전개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가지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한 밤중에 편지들을 썼는데, 그 편지들은 위기 직전에 하나님의 사업이 큰 재난을 면하도록 대륙을 횡단하여 제 때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성질의 일들이 여러 해 동안에 걸친 나의 사업이었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과오들을 견책하고 책망하도록 한 능력이 나를 강권하였다. 지난 36년간의 이러한 사업이 위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밑에서 솟아난 것인가? …
내가 쓰는 편지들과 내가 증거하는 증언들을 통해서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것을 그대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면에 단 한 가지의 기사도 단순히 내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지 않는다. 내가 쓴 서신과 증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나에게 보여주신 것으로서 이 계시는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고귀한 광선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어떤 성경은 다른 성경보다 더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위험한 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까?
2. 비록 엘렌 화잇에 관한 오해와 예언의 신에 대한 오용이 있을지라도, 그녀의 예언의 은사를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1월 31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5분)
도입)
예언자란 미래사를 예언하다기보다 ‘앞에 서서 대신 말하는 사람’이었다. 미래나 내일을 위해 예언하기보다 오늘을 위한 대변자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로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세움을 입은 자들로서 특히 이스라엘의 불신, 배교의 시기에 이스라엘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소리였다. 신약 성경에서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종종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가리켜 "교회의 터"라고 불렀으며(엡 2;20), 순서상으로 선지자를 사도들 다음의 위치에 놓고 있다(엡 4:11, 고전 12장). 선지자들은 예언할 때에 주관적인 생각을 개입하거나, 받은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전해야 했다. 각 시대를 위해 영적인 개선과 부흥을 위해 주신 선지자들의 말씀, 하나님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기억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연구범위: 렘 36:1-4, 살전 2:13, 딤후 3:16, 딛 1:12, 벧후 1:1-4, 20-21.
학습 포인트: 영감과 계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언어(言語)영감과 사상(思想)영감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선지자들은 글을 쓸 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선지자들이 성경 밖의 자료를 인용한 경우가 있는가?
안식일 오후
성경이 영감 받은 책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있어 왔다. 더군다나 제 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또 다른 질문에 답해야 하는데, 그것은 엘렌 G. 화잇의 글이 영감 받은 글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1906년에 그녀가 쓴 모든 단어가 십계명처럼 영감 받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하는 내용의 편지를 어느 재림교인 의사에게 보낸 적이 있다. “나의 형제여, 그대는 내가 쓴 글들을 열심히 연구하였으므로 내 글 가운데서 내 자신이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을 결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과거에 우리 사업을 이끌어 나간 선구자들도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4)
이번 주에 우리는 영감의 문제와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할 것이다.
일요일(1월 25일)
계시와 영감(딤후 3:16)
도입)
인간의 삶에 수반된 절망과 비극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은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 자들의 존재를 불러왔다. 그래서 인간 역사 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등장한 신접한 자. 귀신, 점쟁이 또는 거짓 예언자들이 수 없이 등장하여 많은 인간을 오도하여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자기의 뜻과 사상을 전하고자 참 예언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예언적 은사를 주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으나 그 중에서도 이 예언적 은사는 중추적인 것이 된다. 이 예언적 은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장 전형적인 교통수단이 되어왔다. 이를 두고 아모스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암 3:7) 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이상과 꿈으로 말씀하셨다 (민 12:6).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구주의 오심을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눅 1:70).
1. 디모데후서 3:16과 베드로후서 1:20-21은, 성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다고 말합니까?
답:
디모데후서 3:16에서 바울은 성경이 테오프뉴스토스(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라고 말한다. 라틴어 성경은 이 구절을 “스크립투라 디비니투스 인스피라타(scriptura divinitus inspirata)”로 번역했는데, 인스피라타에서 영감(inspiration)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바울은 성경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한다. 성령께서는 이상과 꿈을 통해 선지자들에게 진리를 보여주시고(계시), 그런 다음에 선지자가 그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내용과 조화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영감).
베드로후서 1:21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배가 바람에 이끌리듯이 성경의 기자(記者)들도 성령에 이끌림을 받았다. 따라서 계시와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알리기를 원하시는 것을 잘 드러내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다. 어떤 이들은 말로써, 또 어떤 이들은 글로써 그 기별을 전하였는데, 이 중 글로 기록된 것이 성경이다.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의 선지자들만큼 자주 영감 받은 사실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기별 또한 하나님의 권위로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예를 들어 바울은,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고 하였으며,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살전 2:13)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인간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성경 기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기록하기도 하고(느 1:1-11, 단 10:1-9, 갈 1:12-20), 그 당시의 풍습과 전통을 기록하기도 했다. 몇몇 시편과 잠언은 주변 나라들의 문학과 문화를 반영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비록 영감의 책이지만 또한 기록한 사람의 개성이 반영되기도 했다.
교훈: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보여주시고 그것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 않도록 성령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셨다.
부가적용)
성서에 기술된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감동(숨, 호흡)으로 된 것으로써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말한 것을 기록한 책 중의 책이다(딤후3:16, 벧후1:16-21, 계1:10-20).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시므로 성령의 감동 곧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인데 다른 모든 경전들과 다른 것은 성서만이 하나님의 우주경영에 관한 모든 계획(설계도)과 그 계획을 이루시는 과정과 결과를 소상히 계시 하여 준다. 창조 된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의 우주만물과 만상들의 생성과 소멸을 알게 하며 어느 때 어느 시기에는 어떤 일을 어떻게 경영하실 지를 깨닫게 하므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원을 얻는 지혜를 주는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생각이나 과학에 지배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생각과 하늘에 속한 영적인 차원의 말씀으로써 나타난 모든 만물들과 만상들과 만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들을 운행하는 이치를 깨닫는 지혜와 총명의 신이 임한 자 곧 영감을 받은 자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며 그 안에만 무궁한 생명의 능력이 있다.
월요일(1월 26일)
언어(言語)영감과 사상(思想)영감(고전 7:10-12, 39-40)
도입)
우리는 성경에 대해 더 완벽한 신뢰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묘사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쓰여져 있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의 어려운 구절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하는 말을 우리에게 하지 않으신 것은 흥미롭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요나와 물고기의 이야기, 노아와 방주, 아담과 이브를 지으심 등의 말씀을 픽션이 아닌 실제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셨다. 만약 이러한 이야기들이 글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해서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성경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 있게 인용하였다. 이 모든 것은 성경의 영감성이 확실하며 그 모든 성경의 내용은 사실이며 진리임을 드러낸 것들이다.
1. 다음 구절들은 성경의 영감에 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사 2:1-2, 겔 36:16, 고전 7:10-12, 39-40, 살전 2:13)
답:
영감에 관한 두 가지 주요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언어영감설: 언어영감설은 기록한 사람보다는 성경의 단어들에 초점을 둔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기록하는 사람의 교육적 배경이나 어휘 능력에 따라 모든 단어를 선택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감은 오직 원본 성경에만 해당하고, 사본에는 해당하지 않으므로 사본에는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성경의 모든 단어가 기자의 어휘력이나 교육적 배경과 관계없이 성령에 의해 지시되었다는 축자(逐字)영감설과는 구별된다.
2. 사상영감설: 여기서는 단어가 아닌 기록한 사람에 초점이 있다. 단어보다는 기록한 사람이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다(고전 7:10-12, 39-40, 살전 2:13). 때때로 하나님이나 천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거나(렘 29:30-31, 계 19:9),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직접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경우도 있지만(민 22:35, 23:1-12, 26), 근본적으로 성경 기자가 이상이나 꿈, 혹은 사상을 받아 자신의 말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사 2:1-2, 계 4:1).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진리가 바르게 전달되도록 그 기록되는 과정에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재림교회는 성경과 엘렌 화잇의 글에 대해 사상영감설을 믿는다.
“성경의 단어 자체가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감동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었다. 영감은 인간의 언어나 표현 방법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신에게 작용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화가 그 사람의 사상에 깃드는 것이다. 거룩한 영감으로 물들여진 사상에 의해 언어는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의 정신과 의지가 인간의 정신과 의지에 혼합됨으로 인간의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
이 같은 맥락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라고 했다. 거룩한 영감이 사상에 임하였고, 또한 기록되는 과정에도 역사했음을 말한다.
교훈: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은 방법에 관한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재림교회는 거룩한 영감이 단어가 아닌 사상에 임하였다는 사상영감설을 받아들인다.
부가적용)
우리 교회는 성경의 모든 자구나 단어까지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축자적인 영감설을 배제한다. 오늘 저자의 표현에 언어영감에 대해 말한 것을 볼 때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언어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 저자의 사상을 감동시켜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면 분명히 사상영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개인적 생각은 성경저자의 언어와 사상에 함께 영향을 미쳤다고 여기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는 전적으로 사상영감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한 구절이라도 변개되어서는 안될 마치 축자영감을 받은 기록처럼 모든 성경의 구절구절이 존중되어야 할 말씀처럼 또한 성경을 하나님의 완전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그 분은 말씀하신다. '일점'이란 것은 히브리 알파벳에서 가장 작은 것이고 일획이란 것은 히브리 문자에서 작은 전환 혹은 획이다. 일점, 일획의 중요함을 그리 강조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아 필자 개인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언어와 사상에 함께 하나님께서 함께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보고 싶다. 성경적인 용어나 단어를 선택할 때 성경 저자가 기록한 것은 그 개인이 가지고 지적인 바탕 위에서 자신이 쓰고 싶었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상과 생각을 기록한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영감과 사상영감 이 두 가르침 모두가 다 성경을 기록하는데 있을법한 타당성이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이 두 사상을 모두 다 완전히 배제하기에는 이 두 사상의 흔적이 모두 성경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화요일(1월 27일)
이상을 받을 때의 신체적 현상(단 10:7-9, 17-18)
도입)
체험으로부터의 논증은 체험자의 주관적 증언에만 토대를 두고 있는 주관성을 탈피하지 못한다는 한계성이 있다.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수반되는 신체적 현상에 대한 자신의 주장뿐만 아니라 목격자의 증언 내지 검증이 필요하다. 이 예언적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초자연적 신체적 현상이 수반되는 것을 체험하거나 또는 목격자의 증언으로부터의 논증이다. 다니엘이 이상을 볼 때에 몸에 힘이 빠지고 호흡이 없어진 것(단 10:8, 17)은 이 같은 초자연적 신체적 현상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당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감추어진 진리의 초자연적 선포(宣布, manifestation)이다. 이 발현이 온 교회의 선(善)을 위해 행해 졌을 때, 이것을 두고 공적 계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발현이 개인적인 영적 이득을 위해 이루어졌을 때, 이것을 사적계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의 대상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에게 믿음과 품성(品性)에 반대되는 모든 계시는,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가차 없이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 1:8) 그러니까 계시의 발전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부터 신약성서의 마지막 편집시기까지 이루어졌다. 그 이후 교리의 발전은 이미 주어진 공적인 계시에 대한 설명이고 해석인 셈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계시는 사적인 계시에 해당되기 때문에 화잇 부인의 글도 성경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한다. 그들이 말한 계시는 그 심층에서는 참될 수 있지만, 부차적(副次的)인 오류와 섞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기적을 증가시키지 않으신다. 그리고 계시를 받은 사람의 정신 속에 있을 수 있는 오류 또는 편견을 고쳐 주지 않으신다. 계시의 목표는 영혼에게 영적인 유익함이지, 결코 지적인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는 사적계시에 대한 영혼의 고백을 듣게 될 때, 절대로 감탄을 드러내 보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지도자가 영혼의 계시를 감탄한다면 그것을 본 영혼은 즉시 사적 계시를 참된 것으로 여기게 되고, 자만하게 될 것이다. 만일 계시가 어떤 공동체의 설립이나 창설에 관계된다면, 영적 지도자는 초자연적 현명의 빛에 따라 그 이유를 상세하게 검증하기 전에는 그를 격려해 주어서는 안된다.
1. 하늘의 이상이 선지자들에게 임할 때에 어떤 신체적인 현상들이 나타났습니까?(단 10:7-10, 17-18, 행 9:1-5, 계 1:17)
답:
하늘의 존재 앞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일 수 있다. 다니엘, 사울(바울), 요한 등은 하늘의 이상을 받았을 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니엘은 기록하기를, “내 몸에 힘이 빠졌고” “죽은 자처럼 그의 발아래 쓰러졌다”고 하였다.
엘렌 화잇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계시를 받을 때와 받고 나서의 상태에 관하여 시시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계시를 주실 때면, 나 자신은 예수님과 천사들이 있는 곳에 이끌려가게 되었으며, 세속적인 사물에 대하여는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나는 천사가 나에게 가리켜 주는 것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였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
1868년에 그녀의 남편인 제임스 화잇(James White)은 그녀의 이상 중에 나타난 신체적 현상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1. 그녀는 주변 사물에 대해 완전히 무의식상태였고, 2. 숨을 쉬지 않았는데, 이는 가슴에 손을 대 보거나 입과 코를 막음으로 거듭 확인되었다. 3. 이상에 들어가는 즉시 근육은 딱딱해졌고, 관절은 고정되었으며, 어떤 외부의 힘으로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4. 이상에서 돌아왔을 때는 대낮이든 조명이 밝은 밤이든 모든 사물을 완전히 어둡게 느꼈다. 가장 밝은 사물이라도 식별할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생애의 사건들, 스트림 출판사, 1868년, 272)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이상을 보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는데, 조셉 베이츠(Joseph Bates)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가 이상을 보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만, 특히 메인 주 톱샴(Topsham)에서 그 흥미진진한 광경을 지켜보았을 때 혹시라도 최면술이나 속임수가 있을까 하여 내가 얼마나 주의 깊이 주시했는지 곁에 있던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광경들을 목격할 수 있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그리스도인 경험과 엘렌 G. 화잇의 가르침, 89)
교훈: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상을 볼 때에 나타났던 신체적인 현상이 엘렌 화잇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여러 사람들이 그 목격한 바를 증언하였다.
부가적용)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수많은 사적 계시들을 어떻게 맏아들여야 하는가? 기적 같은 신기한 사건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즉 그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상한 현상에 너무 집착하고 휩쓸려 다니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교회가 확실히 기적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은 사적 계시에 현혹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적 계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기 전에는 관망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자세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른바 '사적' 계시들이 있었고, 그 중의 어떤 것들은 교회의 권위에 의해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신앙의 유산에 속하는 것들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결정적 계시를 '개선'하고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한 시대에 계시에 따른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데 불과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E.G 화잇의 기록은 교회가 여러 실험들을 통해 그리고 그의 기록과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증거가 충분하므로 그의 받은바 계시를 사적인 계시로만 말할 수 없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수요일(1월 28일)
영감과 편집 보조자들(렘 36:1-4)
도입)
전신마비가 된 프랑스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장 도미니크라는 사람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잇는 왼쪽 눈꺼풀을 깜박거려 의사 표시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1995년 말 쓰러져 15개월 간의 투병 생활 중에 대필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 내용은 병상에서 떠오른 가정과 직장생활에 관한 에세이 "잠수복과 나비"였다. 잠수복은 "꼼짝할 수 없는 육체", 나비는 "밖으로 나들이를 떠나고 싶은 정신"을 의미한다. 책에는 "내 아들 테오필 녀석은 50cm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데, 나는 그 녀석의 숱 많은 머리를 한번 쓸어줄 수도, 목덜미를 만져볼 수도 없고… 그러나 걱정마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같은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을 쓴 방법은 간단했지만 엄청난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알파벳 표를 보고 원하는 글자에서 눈을 깜박이면 대필자가 이를 받아 적었다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하루에 쓸 수 있는 양은 불과 반 페이지 정도였다. 자그마한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1년 3개월 동안 20만 번 이상 눈꺼풀을 깜박거렸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절망보다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인간 의지가 빛나는 책이다. 그런데 대필자의 봉사와 헌신이 없었다면 이 소중한 책을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이 장 도미니크의 대신해 이 글을 썼다고 해도 “잠수복과 나비”는 장 도미니크의 글이었듯이 예언의 신은 비록 E.G. 화잇의 글을 누군가 편집하고 도와주는 일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녀가 최종적으로 인정한 글이기에 그녀에 의해 기록된 그녀의 작품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어 기록한 그녀의 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기별이라고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필촉(筆觸)이 아니라, 필자(筆者)들이었다. 그들은 이상이나 꿈에서 본 것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하였다. 우리는 성경의 선지자들이 서기(書記)를 두었던 사례들을 알고 있는데, 이 서기들이 하나님의 기별을 기록했다.
1. 다음 구절들은 대필자 혹은 보조자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렘 36:1-4, 롬 16:22, 고전 16:21, 골 4:15-18, 살후 3:17)
답:
성경 기자들 중에는 편집 보조자나 서기를 통해 하나님의 기별을 기록하게 한 이들도 있다. 신약 시대에 서기들은 필자가 말하려는 내용을 밀랍(蜜蠟)판에 요약한 다음 그것을 편지에 옮겨 적었다. 편지를 보내기 전에 필자는 내용이 바르게 적혔는지 검토하였다.
엘렌 화잇도 편집 도우미를 활용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녀는 9살의 나이에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에 저자로서의 한계를 인식하였다. “나는 문법 학자가 아니지만 시도해 볼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면 마흔다섯의 나이에도 그 분야의 학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리라”(가려 뽑은 기별, 3권, 90). 그래서 편집 도우미가 원고를 정리하는 일을 도왔던 것이다.
2. 그녀는 문학적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를 강력히 느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충실한 조력자들이 나를 도와주었으며 저들은 증언들을 베껴 쓰는 일과 출판에 넘길 원고들을 준비하는 일에 불굴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가려 뽑은 기별, 1권, 50)
3. 그녀의 책은 대부분 처음부터 책으로 쓰이지 않았고, 이미 쓴 글들을 한 데 모아 책으로 엮었기 때문에 그 작업을 특별히 도울 사람들이 필요했다. 메리언 데이비스(Marian Davis)는 엘렌 화잇의 편집 도우미였다. “그녀는 인쇄물들에 출판된 내 기사들을 취하여 백지로 된 책에 풀로 붙인다. 또한 내가 기록한 모든 편지 사본도 가지고 있다. 책의 한 장(章)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그녀는 내가 기록한 특별한 내용을 기억하여 그 문제를 더욱 보강해 준다. 그럼에도 그 책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3권, 91)
교훈: 성경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엘렌 화잇도 편집 보조자들을 두었다. 그들이 책의 제작 과정에 도움을 주었으나 그 책은 여전히 저자의 것이다.
부가적용)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손에 의하여 기록된 책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의 저자가 인간이라는 말은 아니다. 비록 인간의 손을 빌어 기록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을 감동시키셔서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하셨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을 위해 대필해 줄 경우,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 글을 대필해 준 사람의 글로 여기지 않고 대필을 부탁한 사람의 글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증거해 주는 것처럼(딤후 3:16) 대필에 의존하였고 편집 보조자를 두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엘렌 G. 화잇의 글이기 때문이다..
목요일(1월 29일)
영감과 누가의 책(눅 1:1-4)
도입)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누가복음은 철저하게 누가의 의지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누가는 스스로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히 살폈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 어디에도 성령의 지시나 감동으로 기록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는 목격자들에게서 실제적인 증언을 수집했고, 성령의 감동으로 어느 복음서보다도 적나라하게 예수의 행적을 기록했다. 누가는 예수의 비유를 독특한 것으로 많이 기록했으며, 예수의 인성에 대한 전반적인 강조를 그림처럼 전개하였다. 그리고 비유를 통해서 소개되는 인물들의 인간적인 개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었으며,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방인을 위한 인자, 인애, 아름다운 찬송시로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사도행전의 저자) 의사(醫師)인 누가다. 의사였던 누가는 이방인(시리아 인)이면서 헬라 문화권에서 교육받은 훌륭한 의사였다. 그는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울과 행동을 같이하면서 건강과 여려 일들을 도운 귀한 사역자로서, 바울의 다른 제자들이 다 떠나도 끝까지 바울을 도왔다.(딤후4:11) 그리고 본서의 기록연대는 주후 60년으로 본다.
1. 누가는 그의 복음서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영감에 관한 어떤 사실을 알게 됩니까?(눅 1:1-4)
답: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꿈이나 이상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묘사한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지만, 성령의 영감과 지도하심을 따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을 기초로 하여 작업을 하였다.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두로 정보를 얻었을 뿐 아니라(고전 1:10-11), 어떤 곳에서는 이교 저자들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7:28에서 그는, “우리는 모두 어떤 면에서 제우스의 은덕을 입었도다.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노래한 실리시아의 시인 아라투스(Aratus, BC 315-240)의 글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린도전서 15:33과 디도서 1:12에서 그는 영감 받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다른 자료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엘렌 화잇도 때때로 다른 책들을 자료로 사용하였는데, 각 시대의 대쟁투(The Great Controversy) 서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 있어서 종교 개혁의 발전에 따라 생긴 큰 사건들은 오늘날 개신교계에서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그것들은 누구든지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나는 그러한 역사를 본서에 해당되는 범위 안에서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곧 사실의 기술을 이해하기에 적당하리만큼, 또한 필요한 만큼만 간결하게 취급하였다. 어떤 역사가가 주제의 총괄적 견해를 간단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사건들을 분류했거나 편의상 세부(細部)들을 요약했을 경우에는 그 역사가의 말들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인용한 것은 그 저자를 권위자로 소개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다만 그가 주장하는 바가 주제를 설명하는 일을 쉽게 해주고 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그 역사가의 말에 아무런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 시대에 종교 개혁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과 견해를 기술함에 있어서도 그들이 출판한 저서에 대하여 그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였다.”(각 시대의 대쟁투, xi-xii)
교훈: 성경의 기자들이 때때로 영감 받지 않은 저자의 글을 인용하여 진리를 설명한 경우가 있다. 엘렌 화잇 또한 다른 저자들의 글을 인용하였다.
부가적용)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라는 고위관리가 전해들은 복음의 내용을 확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용도로 쓰여 지도록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는 전혀 주저함 없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특별한 계시로 쓰여 졌다는 증거는 없다. 우리는 흔히 정경의 기록을 매우 신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야만 정경성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누가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정경이 철저하게 인간적인 관심과 필요를 위하여 기록되었음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이 정경의 자리에 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기록의 필요를 스스로 느낀 그 사람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 전달하고 계시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성을 순식간에, 신비스러운 과정으로, 인간 저자의 개인적 능력이나 자질을 배제하거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이해를 성경자체는 사실상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계시는 그 심층에서는 참될 수 있지만, 부차적(副次的)인 오류와 섞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기적을 증가시키지 않으신다. 그리고 계시를 받은 사람의 정신 속에 있을 수 있는 오류 또는 편견을 고쳐 주지 않으신다. 계시의 목표는 영혼에게 주는 영적인 유익함이지, 결코 지적인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는 사적계시에 대한 영혼의 고백을 듣게 될 때, 절대로 감탄을 드러내 보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지도자가 영혼의 계시를 감탄한다면 그것을 본 영혼은 즉시 사적 계시를 참된 것으로 여기게 되고, 자만하게 될 것이다. 만일 계시가 어떤 공동체의 설립이나 창설에 관계된다면, 영적 지도자는 초자연적 현명의 빛에 따라 그 이유를 상세하게 검증하기 전에는 그를 격려해 주어서는 안된다. 누가복음은 한 개인이 모은 자료임에도 정경을 인정한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글이었기에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인정된 정경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글을 가져오거나 들은 사실을 기록하고 다른 사람의 글을 차용하여 기록하였다고 해서 그의 영감성을 모두 의심할 필요는 없다. 영감성은 직접적인 계시에 의하지 않고서도 기록된 누가복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G 화잇의 글도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유익에 비해 그녀의 글은 때때로 철자가 틀리기도 하였고 그의 표현이 선지자의 글이라고 하기에 때때로 교정이 필요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은 교회의 영적인 발전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고 있고 또한 그가 받은 직접적인 계시들도 많은 사람들의 시험을 통과하여 인정된 기별이기 때문이다.
금요일(1월 3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엘렌 G. 화잇, 가려 뽑은 기별, 1권, 제1장 ‘예언서 저자들의 영감’(15-23)
“지금 내가 경고와 견책에 대한 증언을 그대들에게 보낼 때에 그대들 중 다수는 그 증언이 단순히 화잇 자매의 의견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처럼 그대들은 하나님의 영을 모욕하였다. 그대들은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예언의 신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는지 알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나에게 계시로 보여졌다. 나는 과거에 전혀 본 적이 없는 얼굴들을 보았으며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 얼굴들을 보았을 때 나는 저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단잠에서 깨어나 과거에 나에게 전개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가지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한 밤중에 편지들을 썼는데, 그 편지들은 위기 직전에 하나님의 사업이 큰 재난을 면하도록 대륙을 횡단하여 제 때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성질의 일들이 여러 해 동안에 걸친 나의 사업이었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과오들을 견책하고 책망하도록 한 능력이 나를 강권하였다. 지난 36년간의 이러한 사업이 위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밑에서 솟아난 것인가? …
내가 쓰는 편지들과 내가 증거하는 증언들을 통해서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것을 그대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면에 단 한 가지의 기사도 단순히 내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지 않는다. 내가 쓴 서신과 증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나에게 보여주신 것으로서 이 계시는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고귀한 광선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어떤 성경은 다른 성경보다 더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위험한 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까?
2. 비록 엘렌 화잇에 관한 오해와 예언의 신에 대한 오용이 있을지라도, 그녀의 예언의 은사를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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